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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2024년 마가복음 11강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마가복음 7:1-37)2024-05-27 0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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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마가복음 11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

 

말씀/ 마가복음 7:1-37

요절/ 마가복음 7:20

또 이르시되 사람에게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은 정결 예식을 엄격히 지켰습니다. 식사 전에 반드시 손을 씻었습니다. 특히 이방인들이 섞여 있는 시장에 다녀오면 더욱 그러했습니다. 손뿐만 아니라 잔과 주발과 놋그릇을 부지런히 씻었습니다. 외적인 부분을 깨끗하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사람을 더럽게 하거나 깨끗하게 하는 길은 그런 것에 있지 않다고 하십니다. 내면에 있다고 하십니다. 본문을 통해 우리가 깨끗한 사람이 되는 길을 배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깨끗한 삶, 거룩한 삶을 살기를 기도합니다.

 

1절입니다. "바리새인들과 또 서기관 중 몇이 예루살렘에서 와서 예수께 모여들었다가" 이들은 예루살렘 중앙 공회인 산헤드린에서 보낸 합동조사단이었습니다. 그들은 갈릴리 지역에서 당시 한창 유명세를 타고 있던 예수님을 조사하기 위해 온 것입니다. 그들은 갈릴리 가버나움에 와서 무엇을 보게 되었습니까? 2절입니다. "그의 제자 중 몇 사람이 부정한 손 곧 씻지 아니한 손으로 떡 먹는 것을 보았더라" 아니, 예수님의 제자들이 손도 안 씻고 음식을 먹는 것이었습니다! 누가복음 11:38을 보면 예수님도 잡수시기 전에 손 씻지 아니하곤 하셨습니다. 본문의 조사단이 보는 그 시점에 예수님이 손을 씻고 식사를 하셨는지 아니면 제자들만 먹고 예수님은 드시지 않았는지는 확실하지 않습니다. 여하튼 제자들은 손을 씻지 않고 떡을 먹었고 이를 조사단이 본 것입니다. 그들은 "이럴 수가! 저 더러운 손으로 음식을 먹다니? 저 자들의 속이 시커머지겠구먼!" 하였습니다. 음식 먹기 전에 손을 씻는 것은 유대인이면 반드시 지켜야할 장로들의 전통이었습니다. 여기서 유대 장로들의 전통은 그냥 관습적으로 만든 규칙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구전율법을 의미합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이 모세를 통해 구약에 기록된 율법, 곧 성문법을 주셨지만 그와 별개로 기록되지는 않았지만 말로만 주신 율법, 곧 구전율법도 주셨다고 믿었습니다. 그 구전율법이 나중에 AD 200년경에 가말리엘의 후손 예후다에 의해 집대성된 미쉬나 (Mishnah)입니다. 미쉬나에는 6개 분야에 총 613개의 계명이 들어있습니다. 그중에 정결함과 부정함에 대한 항목이 있는데 여기에 손을 씻어야 한다는 규정이 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먹기 전에 손을 씻지 않는 것은 단순히 정결예식을 행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율법을 어기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이에 유대인들은 손을 씻을 뿐만 아니라 잔과 주발과 놋그릇을 부지런히 씻었습니다. 이런 그들이 볼 때 예수님의 제자들이 손을 씻지 않고 음식을 먹는 것은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 따져 묻습니다.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장로들의 전통을 준행하지 아니하고 부정한 손으로 떡을 먹나이까?"

 

이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이 무엇입니까? 6절입니다. "이르시되 이사야가 너희 외식하는 자에 대하여 잘 예언하였도다 기록하였으되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이 말씀은 이사야서 29:13절에서 인용한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외식하는 자라고 하십니다. '외식'이란 헬라어로 "휘포크리테스"인데 가면을 쓴 연극배우를 가리킵니다. 가면을 쓰면 그 사람의 원래 얼굴이 보이지 않습니다. 자기가 아닌 다른 사람으로 보입니다. 예수님이 종교지도자들을 외식하는 자라고 하신 것은 그들이 가면으로 자기들의 속을 가리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왜 속을 가릴까요? 드러내기가 부끄럽게 때문입니다. 더럽기 때문입니다. 멋진 가면을 쓰면 속이 가려지고 자기가 마치 그 가면의 사람인 것처럼 인정을 받습니다.

 

7절입니다.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 하였느니라." 예수님은 소위 "구전율법" 이라고 말하는 장로들의 유전은 사람이 만든 계명이라고 선언하십니다. , 하나님이 주신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만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이 설사 하나님의 계명을 잘 지키고자 하는 동기에서 만들어졌다 하더라도, 사람이 만든 것이므로 근본적으로 권위가 없습니다. 더 나아가서 그들의 문제점이 무엇입니까? 이는 그들이 그런 사람이 만든 계명을 지키느라 하나님의 계명을 버리는 것입니다. 구체적인 예가 고르반 전통입니다. 십계명의 제 오 계명은 말합니다. "네 부모를 공경하라". 부모 공경은 대인 계명으로 첫 번째로 주신 것입니다. 반드시 지켜야하는 중요한 계명입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사람이 부모에게 말하기를 내가 드려 유익하게 할 것이 고르반 곧 하나님께 드림이 되었다고 말하기만 하면 그만이라고 가르쳤습니다. , 그렇게 말하면 부모님께 드릴 의무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서는 자기 아버지나 어머니에게 다시 아무 것도 하여 드리기를 허락하지 아니하였습니다. 이것이 무슨 말이냐 하면 이렇습니다. 어떤 사람에게 포도원이 있는데, “이 포도원에서 나는 것은 다 하나님께 바친다. 고르반이다." 라고 말하면 부모에게는 하나도 안 드려도 되었습니다. 물론, 처음 이 제도가 생길 때는 정말 하나님만을 온 마음으로 사랑하기 위해 그렇게 하였을 것입니다. 부모님을 섬기지 못하는 마음에 눈물을 흘리면서 고르반 맹세를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그 정신은 없어지고 형식만 남게 되었습니다. 예수님 시대에 이 고르반 제도는 매우 인기가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고르반이라고 말로만 맹세하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같은 맹세는 실제로 성전에 물건을 바쳐야 한다는 강제 규정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 맹세한 자는 고르반 된 물건의 일부만 성전에 드리고, 또는 아예 드리지도 않고, 자기가 써도 되었던 것입니다. 결국 이런 유전은 불효자들의 기만적인 행위를 정당화시켜주는 구실을 하였습니다. 한편 후대 랍비들은 이런 불합리성 때문에 나중에 고르반을 빌미로 부모 공양을 등한히 해서는 안 된다는 규정을 추가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당시에는 아직 그 조항이 제정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사람이 만든 전통을 열심히 지키면서 스스로 의롭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런 그들을 책망하십니다.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이는 마음을 드리지 않고 겉으로만 하는 신앙생활을 경계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처음 예수님을 만나고서는 모두 마음이 뜨거운 적이 있었습니다. 어떤 목자님은 자기 심장이 식기 전에 하나님께 드리고자 하였습니다. 그런데 점점 시간이 지나면서 나도 모르게 신앙생활이 습관적으로 되어갑니다. 마음은 다른데 가 있고 형식적으로 하나님을 섬길 때가 많습니다. 그러다 보면 말씀을 공부하는 것, 찬송하는 거, 주일 예배 드리는 것도 기쁨이 되지 못하고 마지못해 하게 됩니다. 예배 때에는 오늘 본문이 왜 이렇게 길지? , 오늘 설교는 30분이 넘었는데 저 목자님은 계속 말씀하시네" 하는 마음이 듭니다. 우리에게 이런 증상이 나타나면 바로 우리가 바리새인이 된 것을 알아야 합니다. 내가 입술로만 하나님을 공경하고 나의 마음이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떠나 있음을 깨닫고 회개해야 합니다. 사람들은 속을 보지 못하고 겉만 보기에 우리가 외적인 투쟁만 하기 쉽습니다. 그래서 외식하게 됩니다. 가면을 씁니다. 그것이 사람들의 인정을 받으며 동시에 나의 내면의 죄는 감출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런 유혹을 물리치고 마음 중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종들이 되도록 도와주시길 기도합니다. 보이지 않으나 모든 것을 보시는 하나님을 마음으로 경외하기를 기도합니다.

 

당시 유대인들의 정결예식은 겉만 깨끗이 하는 것이었습니다. 보이지 않는 속은 상관이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그들의 문제를 지적하십니다. 14-16절입니다. "무리를 다시 불러 이르시되 너희는 다 내 말을 듣고 깨달으라. 무엇이든지 밖에서 사람에게로 들어가는 것은 능히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하되 사람 안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니라 하시고" 유대 종교지도자들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씻지 않은 손으로 먹으면 그 음식이 배에 들어가 그들을 더럽게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 밖에서 들어가는 음식이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한다고 하십니다. 이는 무엇이든지 밖에서 들어가는 것은 배로 들어가 뒤로 나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19b에서 놀라운 선언을 하십니다. "모든 음식물은 깨끗하니라" 하나님이 만드신 모든 음식물은 깨끗합니다. 감사함으로 먹으면 됩니다. 사도 바울도 디모데전서에서 말합니다. "음식물은 하나님이 지으신 바니 믿는 자들과 진리를 아는 자들이 감사함으로 받을 것이니라 하나님께서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나니" (딤전4:3b,4) 물론 비위생적인 음식을 먹으면 배탈이 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 배탈 난 사람이 그 음식으로 인하여 더러워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20절입니다. "또 이르시되 사람에게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사람 안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합니다. 예수님은 21-23절에서 사람 안에서 나오는 것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말씀하십니다. "속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 곧 음란과 도둑질과 살인과 간음과 탐욕과 악독과 속임과 음탕과 질투와 비방과 교만과 우매함이니 이 모든 악한 것이다 속에서 나와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사람의 속은 그 마음을 의미합니다. 마음이 무엇입니까? 사전에는 마음이란 "생각, 감정, 기억 따위가 생기거나 자리 잡는 위치"라고 되어 있습니다. 곧 마음이란 감정, 사상, 생각, 기억 등의 좌소(坐所)이며, 그러한 것들을 행동으로 옮기게 하는 인격의 중심부를 의미합니다. 보이지는 않으나 나의 가장 중심부에 위치하여 나의 인격과 삶을 주관하는 곳입니다.

 

예수님은 사람의 마음에서 악한 생각이 나온다고 하십니다. 선한 생각도 나올 수 있을 것 같은데 악한 생각이 나온다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인간의 심성이 타락한 것을 잘 아십니다. 사람의 마음이 어떠합니까? 선지자 예레미야는 말합니다.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 (17:9) 새번역은 이렇게 말합니다. "만물보다 더 거짓되고 아주 썩은 것은 사람의 마음이니, 누가 그 속을 알 수 있습니까?"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악한 생각이 무엇입니까? 대표적으로 12가지입니다. 음란sexual immorality), 도둑질(theft), 살인(murder), 간음(adultery), 탐욕(greed), (malice), 속임(deceit), 음탕 (lewdness), 질투(envy), 비방(slander), 교만(arrogance), 우매함(folly)입니다.

 

음란, 간음, 음탕은 성적인 죄입니다. 살인, 악독, 질투, 비방, 교만, 우매함은 사람에 대한 파괴적인 말과 행동을 가리킵니다. 도둑질은 제 8계명, 속임은 제 9계명, 탐욕은 제 10계명에 위반되는 것입니다. 물론 여기에 열거된 12가지가 사람을 더럽게 하는 모든 악한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또한 양심과 도덕을 가진 존재인 인간에게 선한 것이 전혀 없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 선한 것도 이러한 악한 것들과 섞여 있어 근본적으로 불순하다는 것입니다. 사람의 마음에서 이러한 악한 생각이 나와서 그 사람의 말과 행동을 더럽게 합니다. 이러한 악한 생각의 충동을 받아 더러운 일을 하는 사람은 손을 아무리 잘 씻고 옷을 깨끗하게 입어도 더러운 것입니다. 정결 예법만 잘 지키는 것은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속사람 곧 그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생각을 깨끗하게 해야만 깨끗한 사람이 됩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속사람 곧 마음이 깨끗한 사람이 될 수 있을까요? 이 점이 오늘 말씀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입니다. 세 가지입니다.

 

첫째, 우리 죄를 회개하고 예수님의 피로 씻음을 받아야 합니다. 히브리서 9:14는 말씀합니다.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을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지 못하겠느냐?" 더러워진 옷은 세탁기에 넣어 돌리면 되지만 더러워진 내면은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더러워진 내면은 회개하고 예수님의 피를 영접함으로 깨끗하게 될 수 있습니다. 이는 이론이 아닙니다. 실제입니다. 우리는 진실되게 우리의 마음과 말과 행동의 죄를 자백합니다. 그리고 죄사함의 약속의 말씀을 믿음으로써 죄사함을 받아들입니다. 그러면 실제적으로 우리의 죄가 사해지고 내면이 깨끗하게 됩니다. 성령께서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십니다. (요일 1:9). 이러한 죄고백과 믿음으로 사함 받는 일이 매일 연속적으로 이루어질 때 우리의 내면이 점점 깨끗해집니다.

 

둘째,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채워야 합니다. 우리가 죄를 자백하고 회개하는 것으로 그치면 또 다시 죄의 지배를 받게 됩니다. 우리 마음은 빈 항아리와 같아서 무엇인가로 채워져야만 합니다. 이 마음을 비워두면 우리가 세상에 발붙이고 살면서 세상의 일과 세상에 대한 욕심으로 가득 차게 됩니다.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는 일들, 세상 뉴스와 세상 사람들의 일들로 가득 차게 됩니다. 빈집의 비유가 있죠? 집이 깨끗하게 청소되어 있고 비어 있을 때 집 나갔던 귀신이 다른 일곱 귀신을 데리고 들어와서 그 집을 점령한다는 것 말입니다. (12:43-45)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마음을 채워야합니다. 무엇으로 채워야할까요? 깨끗한 것으로 채워야 합니다. 깨끗한 것으로 꽉꽉 채우면 더러운 것이 들어올 틈이 없게 됩니다.

 

무엇이 깨끗한 것일까요? 세상에 있는 모든 것 중에 유일하게 깨끗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순전합니다. 잠언 30:5 "하나님의 말씀은 다 순전하며 하나님은 그를 의지하는 자의 방패시니라." 12:6 "여호와의 말씀은 순결함이여 흙 도가니에 일곱 번 단련한 은 같도다." 우리가 말씀을 마음에 채우면 온갖 악하고 더러운 생각들은 다 밀려나갑니다. 다시 들어올 틈이 없게 됩니다. 말씀에서 나오는 생각은 다 순전합니다. 그 생각에서 나오는 말과 행동은 다 깨끗합니다. 그래서 그 사람이 깨끗한 사람, 거룩한 사람으로 변해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날마다 말씀을 가까이 하여 말씀을 먹고, 읽고, 묵상하고, 암송하며, 내면에 채우는 가운데 하나님이 보시기에 깨끗한 사람들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셋째, 우리의 몸과 마음을 주님께 적극적으로 드려야 합니다. 소극적으로 마음을 지킨다고 해서 다 지켜지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 지체를 불의의 병기로 죄에게 드리지 말고 오직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 (6:13). 악한 생각이 자리 잡을 틈을 주지 말아야 합니다. 창세기에 보면 하나님은 범죄한 가인에게도 그러한 방향을 주셨습니다. 4:7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죄를 적극적으로 다스리지 않으면 언제든지 죄가 달려듭니다. 문 앞에 웅크리고 기다렸다가 문을 열면 야수같이 달려듭니다. 우리의 몸을 하나님께 산제사로 드릴 때 자연스럽게 악한 생각을 멀리하게 됩니다. 점점 더 내면이 깨끗한 사람, 거룩한 사람으로 변화됩니다. 내면이 깨끗한 사람이 행복한 사람입니다. 산상 수훈에서도 예수님은 마음이 청결한 자는 하나님을 볼 것이라고 하십니다. (5:8) 매일 매일 하나님을 보며 사는 사람, 하나님과 교제하며 사는 사람, 하나님이 그 안에 사는 사람이 복됩니다. 우리 자신을 적극적으로 하나님께 드리는 가운데 내면이 깨끗하여 참 행복을 누리는 사람들이 다 되기를 기도합니다.

 

24절입니다. "예수께서 일어나사 거기를 떠나 두로 지방으로 가서 한 집에 들어가 아무도 모르게 하시려 하나 숨길 수 없더라" 두로는 갈릴리 바다에서 약 30Km 정도 북쪽에 있는 베니게의 해안 도시입니다. 이방 지역입니다. 유대인들이 이러한 이방 지역으로 가는 것은 부정한 사람들과 관계성을 맺는 것을 의미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외모로 사람을 판단하지 않으십니다. 예수님은 이방인에게도 그리스도가 되십니다. 예수님이 조용히 쉬고자 들어가신 그 집에 한 여인이 찾아 왔습니다. 25절입니다. "이에 더러운 귀신 들린 어린 딸을 둔 한 여자가 예수의 소문을 듣고 곧 와서 그 발아래에 엎드리니" 한 여인이 예수님의 발아래에 엎드렸습니다. 그는 귀신들린 딸을 둔 여자로 헬라인이요 수로보니게 족속이었습니다. 저자는 헬라인이요 또한 수로보니게 족속이라고 하며 그녀가 이중으로 이방인임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유대인 입장에서 볼 때 은혜를 받을 만하 꼬투리가 전혀 없는 여인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여인이 예수님께 나와 발 앞에 엎드렸습니다. 자기 딸에게서 귀신 쫓아내 주시기를 간구하였습니다.

 

사랑의 예수님은 이런 여인의 청을 즉시로 들어주심이 마땅하게 보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무엇이라고 하십니까? 27절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자녀로 먼저 배불리 먹게 할지니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여기서 ""(퀴나리온)라는 단어는 원어상 들개가 아니라 집에서 기르는 애완견을 말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대인에게 개는 더러운 짐승의 대명사였습니다. 자기가 토한 것을 가서 다시 먹는 짐승으로 불렸습니다. (벧후 2:22) 그러므로 이 여인을 개라고 하는 것은 상당히 모욕적인 언사였습니다. 예수님은 자녀로 먼저 배불리 먹게 해야 한다고 하십니다. 이는 이방인들보다 유대인들을 먼저 도와야 한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4장에서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난다고 하신 말씀과 유사합니다. (4:22) 여하튼 현재 수로보니게 여인은 매우 상처받기 쉬운 상태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여인에게 믿음이 있음을 아셨습니다. 그녀의 믿음을 테스트하여 그녀의 아름다운 겸손과 실제적인 믿음을 더욱 드러내고자 하셨습니다. 제자들에게 믿음이란 무엇인가를 가르쳐주시기 원하셨던 것입니다.

 

자존심을 건드리는 듯한 예수님의 말씀에 대하여 여인은 어떻게 반응합니까? 28절입니다. "여자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상아래 개들도 아이들이 먹던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여인은 먼저 자신이 이방인으로 개와 같음을 인정하였습니다. 유대인을 먼저 구원하시고 그들을 통한 이방인 구원이라는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였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겸손히 받아들였습니다. 그럴 때 그녀는 조금도 자존심 상하지 않고 ", 나는 개와 같이 부정한 이방인입니다. 그러나 개들도 아이들이 먹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마치 상아래서 꼬리를 흔들며 주인의 호의를 기다리는 강아지처럼 예수님의 부스러기 은혜라도 기다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을 보면 예수님은 여인의 이 말을 들으시고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말씀하십니다. (15:28)

 

믿음이란 자기에게는 아무런 의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자기를 의지하지 않고, 오직 주님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반면에 교만은 자기를 의지하는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주님께 대한 믿음은 겸손의 다른 면입니다. 이 여인이 어떻게 이런 놀라운 믿음을 가질 수 있었을까요? 이는 비록 그녀가 예수님에 대해 아는 바가 많지 않았지만 그녀가 예수님에 대해 들었던 것을 겸손히 그 마음에 영접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녀의 절박한 상황이 그녀로 하여금 더욱 겸손하게 하고 믿음을 갖게 하는 계기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여인은 겸손하여 예수님에 대한 말씀을 그대로 영접하였습니다. 그대로 믿었습니다. 실제로 여인이 예수님께 "주여" 라고 부른 말(Kuple)하나님을 의미라는 칭호인데 마가복음에서 이곳에만 나타납니다. 여인은 겉으로 깨끗한 유대인들이 멸시하는 이방여인에 불과하였지만 그녀에게는 예수님께 대한 놀라운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녀의 내면에 아름다운 겸손과 진주와 같은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 내면의 겸손과 믿음이 밖으로 나와 말로 나타난 것입니다. "주여 옳소이다마는 상아래 개들도 아이들이 먹던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내면의 가득한 것이 밖으로 나오기 마련입니다. 예수님은 이 여인의 믿음을 기뻐하시고 그녀의 딸을 고쳐주셨습니다.

 

31-37절은 예수님이 한 귀먹은 사람을 고쳐주시는 내용입니다. 예수님은 그를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그 사람을 따로 데리시고 손가락을 그의 양 귀에 넣고 침을 뱉어 그의 혀에 손을 대셨습니다. 34절입니다.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에바다 하시니 이는 열리라는 뜻이라" 예수님은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셨습니다. 여기서 탄식은 거의 신음에 가까운 소리를 말합니다. 이 탄식은 사탄의 속박으로 인해 인생들이 영육 간에 겪는 장애를 긍휼히 여기신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의 마음 깊이 이러한 탄식이 있었습니다. 그 탄식함으로 하나님께 기도하셨습니다. 그리고 "에바다" (Be opened! 열려라!) 하셨습니다. 그러자 그의 귀가 열리고 혀가 맺힌 것이 곧 풀려 말이 분명하여졌습니다. 본문의 사람은 신체적으로 귀먹었지만 오늘날 영적으로 귀먹은 사람들이 많습니다. 우리가 이런 사람들에 대해 마음 깊이 탄식하기를 기도합니다. 그러한 탄식에서 나오는 기도를 드려야겠습니다. 그런 탄식에서 나오는 심정으로 캠퍼스 양들을 섬겨 우리 가운데 에바다의 역사가 충만하게 일어나기를 기도합니다.

 

결론적으로, 하나님은 우리의 중심을 보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 앞에서 가면을 쓰는 것은 두 손으로 해를 가리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가 날마다 회개하고 예수님의 피로 사함 받게 하시며 우리의 내면을 순전한 말씀으로 채우길 기도합니다. 우리 몸을 의의 병기로 주님께 적극적으로 드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온갖 죄악이 난무한 시대 가운데 내면이 깨끗한 주의 백성들로 빚어지기를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