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마가복음 12강 바리새인들과 헤롯의 누룩을 주의하라
말씀/ 마가복음 8:1-26 요절/ 마가복음 8:15 “예수께서 경고하여 이르시되 삼가 바리새인들의 누룩과 헤롯의 누룩을 주의하라 하시니” 지난 주 말씀에서 우리는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배웠습니다. 그것은 우리 마음에서 나오는 악한 것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 건설하기 위해 오셨습니다. 그 나라를 어디에 세우시나요? 우리 마음에 세우십니다. 그 분은 우리 마음 중심에 왕으로 앉으시고 우리를 통치하기 원하십니다. 그리하여 내 안에 있는 악한 것들을 몰아내시며, 우리를 거룩한 백성 되게 하시며, 생명으로 풍성히 채우십니다. 오늘 말씀은 예수님께서 떡 일곱 개와 물고기 두어 마리로 사천 명을 먹이신 사건입니다. 이전에도 예수님은 오병이어로 오천 명을 먹이셨습니다. 마가복음은 스피드하게 기술하는게 특징인데, 왜 이렇게 비슷한 사건을 두 번씩 기록할까요? 저자 마가는 두 사건 속에서 계속하여 강조하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제자들이 예수께서 떡을 뗀 것이 갖는 표징(표적)의 의미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음을 강조합니다. 주님은 두 번에 걸쳐 먼저 행하시고(Doing), 다음에 가르치십니다(Teaching). 전형적인 교육 방식입니다. 예수님은 이 두 사건을 통해 자신이 누구인지 계시하십니다. 무리와 제자들에게 이 사건의 의미를 이해할 것을 엄숙히 요구하십니다. 그러나 여전히 그들의 귀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알아듣지 못했고, 그들의 눈은 주님의 영광을 보지 못하였습니다. 이런 점에서 두 사건 후에 일어난 각각의 치유 사건이 의미심장합니다. 오병이어 사건 후에 귀머거리의 귀가 열려 듣게 되고(7:31-36), 칠병이어 사건 후에 맹인의 눈이 열려 보게 됩니다(8:22-26). 이는 장차 제자들의 귀가 열리고 눈이 뜨이게 될 것을 예표합니다. 마침내 제자들의 입에서 ‘주는 그리스도시니이다’ 신앙 고백하는데 이르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말씀을 통해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가르치시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특히 주를 따른다고 하면서도 범하기 쉬운 잘못, 즉 주의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배우길 기도합니다. 1절을 보십시오. “그 무렵에 또 큰 무리가 있어 먹을 것이 없는지라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여기서 ‘그 무렵’이란 앞선 사건과 연결이 됩니다. 예수께서 그동안 이방지역인 두로와 시돈을 거쳐 데가볼리 지역 갈릴리 호숫가에 이르렀습니다. 많은 무리들이 예수님을 따라왔습니다. 그 무리의 수는 9절 말씀을 보면 약 사천 명이었습니다. 전에 오병이어로 오천 명을 먹인 사건이 유대인들 대상이었다면, 본문에 나오는 무리들은 주로 이방인들이었습니다. 오병이어 사건 때는 제자들의 이스라엘 전도여행 결과로 무리들이 모였다면, 이번에는 예수님의 이방인 전도 여행 결과로 무리들이 모였습니다. 예수님은 2박 3일의 국제 수양회를 여시고 말씀을 가르치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눈에 무슨 문제가 발견이 됩니까? 2절을 읽습니다. “내가 무리를 불쌍히 여기노라 그들이 나와 함께 있은 지 이미 사흘이 지났으나 먹을 것이 없도다” 오병이어 사건 때 제자들이 먼저 문제의식을 가졌다면, 이번에는 예수님이 먼저 문제 의식을 가지십니다. 예수님은 무리를 불쌍히 여기십니다. 굶주린 배를 움켜지면서도 말씀에 집중하고 있는 그들을 보면서 예수님의 심장 깊은 곳에서 긍휼과 동정심이 끓어올랐습니다. 이 심정은 바로 인류를 지극히 사랑하사 자신의 몸을 십자가에까지 내어 주신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오병이어 사건 때도 예수님이 무리들을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그때는 목자 없는 양 같이 영적으로 굶주린 그들을 보고서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그 결과 그들을 영적인 양식인 말씀으로 먹이셨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무리들의 육체의 굶주림을 보시고 불쌍히 여기십니다. 무리는 예수님과 함께 3일을 보내면서 집중적으로 말씀을 가르침 받았습니다. 사흘 동안 외진 곳에서 지냈고 양식은 바닥이 났습니다. 이대로 돌려보낸다면 가는 노중에 기진하게 될 것입니다. 그들 중에는 두로와 시돈같이 멀리서 온 사람들(3절), 특히 여자와 아이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말씀을 사모하여 나아온 그들을 사랑하십니다. 그들의 필요를 아십니다. 그리고 외면치 않으시고 채워주시고자 하십니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이 너무나 영적이어서 사람들의 먹는 문제 같은 것은 별로 신경쓰지 않을 것이라 여깁니다. 온 천하를 잃어도 영생만 얻으면 되니 현실적인 문제들을 다 포기하라고 하실 것 같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렇지 않습니다. 영적으로 먼저 도우시지만 또한 그들의 실제적인 필요를 이해하시고 도우십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6:33)”하셨고,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신다(마6:31,32)”고 하셨습니다. 우리의 모든 필요를 아시고 공급하시는 주님을 믿기를 바랍니다. 또한 우리에게 맡기신 양들의 필요를 알고 이를 주님께 아뢰며, 그들의 실제적 필요를 돕는 목자의 삶을 살기를 기도합니다. 4절을 보겠습니다. “제자들이 대답하되 이 광야 어디서 떡을 얻어 이 사람들로 배부르게 할 수 있으리이까” 지난 오병이어 사건에서는 돈이 문제가 되었으나 이번에는 어디서 살 것인가 하는 것이 문제였습니다. 제자들이 예전의 사건을 체험한 후 무리를 배부르게 먹이고자 하는 마음은 생긴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여전히 전능하신 주님의 능력을 경험하고서도 다시 그러한 문제가 현실로 닥쳐오자 믿음을 갖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를 볼 때 믿음은 한번 경험한다고 바로 생기는 것이 아니라 반복하여 배워야 함을 보게 됩니다. 예수님은 이런 그들을 이해하셨습니다. 다시금 오병이어와 같은 이적을 베푸사 그들의 믿음을 도와주십니다. 그들에게 가지고 있는 떡을 가져오라 명하시고 무리를 땅에 앉게 하십니다. 떡 일곱 개를 가지사 하나님께 감사 기도를 드리시고 그것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어 무리에게 나누어주게 합니다. 또한 작은 생선 두어 마리를 나누어 주게 하사 무리를 먹게 하십니다. 그들이 모두 배불리 먹었습니다. 남은 조각을 다 거두니 일곱 광주리에 찼습니다. 예수님은 무리들을 흩어 보내시고 제자들과 함께 배에 올라 달마누다 지방으로 가셨습니다. 우리가 오병이어와 칠병이어 사건속에 나타난 예수님의 행보의 패턴을 눈치재길 바랍니다. 그것은 이스라엘 전도여행과 이방인 지역 전도여행의 마무리를 각각 만찬으로 매듭지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제 갈릴리 호수를 중심으로 한 갈릴리 사역을 마무리하십니다. 앞으로 예루살렘 사역이 시작될 것입니다. 집중적인 제자 교육이 있게 되고 예수님과 제자들 사이에 갈등이 있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제자 훈련의 마지막은 제자 공동체와 함께 최후의 만찬으로 마무리를 하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지금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예수님과 함께 하는 만찬으로 우리를 초대하고 있습니다. 이번 여름수양회가 올 상반기 사역을 마무리하는 만찬입니다. 참석하셔서 주님께서 공급하시는 영육간의 풍성함을 맛보길 기도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하늘에 가면 당연히 만찬이 있겠죠, 기대하시기 바랍니다. 11절을 보겠습니다. “바리새인들이 나와서 예수께 힐난하며 그를 시험하여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을 구하거늘”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의 관점을 예수님을 향하여 주장하며 논쟁하며 다투며 비난하면서 심지어 시험하기까지 하였습니다. 예수님을 테스트한 것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피조물이 조물주에게 따져 묻고 조물주를 테스트한다는 것이 말이 됩니까?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께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을 요구하였습니다. 표적이 무엇입니까? ‘말의 진실성이나 행동의 정당성을 보장하는 징표’입니다. 이적과는 다릅니다. 그들이 요구하는 것은 예수님의 가르침과 행동이 하늘로부터 왔음을 표적으로 증명해 보이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이미 ‘예수님이 행한 이적들이 귀신의 왕 바알세블의 힘을 빌어 쫓아낸 것이다’라고 결론을 내린 바 있습니다. 이러한 표적 요구는 예수님을 인정하지 않기로 결심한 그들이 예수님을 비난하고 난처하게 만들고자 하는 명분에 불과한 것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의 표적 개념은 구약과 유대 문헌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선지자 요엘이 말하길 ‘메시야가 오면 하늘과 땅에 피와 불과 연기 기둥이 임한다’고 했는데, 그것을 보여달라는 것입니다(욜2:30). 그리고 유대 문헌에 의하면, 랍비 엘리에셀이 자신의 가르침이 하늘로부터 온 것이냐는 도전을 받았을 때 특정한 ‘표적들’로 응대했다고 합니다. 예를 들면, 쥐엄나무가 백 규빗이나 이동되었다든지, 수로의 물이 거꾸로 흐르게 되었다든지,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하늘에서 음성이 들려서 엘리에셀의 가르침이 옮다고 증언했다는 내용입니다. 이러한 표적을 보여 달라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의 이러한 요구에 대한 예수님의 반응이 무엇입니까? 12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마음속으로 깊이 탄식하시며 이르시되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적을 구하느냐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세대에 표적을 주지 아니하리라 하시고” 예수님은 탄식하셨습니다. 그분의 깊은 한숨에서 나타나 보이는 분노와 슬픔이 느껴지시나요? 왜 이렇게 이 세대가 표적을 구하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은혜의 계시를 배척하는 비뚫어진 마음과 불신앙에서 기인한 것 아닙니까? 모세가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 때 그 세대가 가졌던 하나님께 대해 완악했던 마음을 그 후손들이 똑같이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그들의 요구에 어떻게 반응하십니까? 단호히 거부하십니다. 하나님은 결코 사람들에 의해 시험받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분노를 가시적으로 나타내십니다. 즉시 그들을 떠나십니다. 배를 타고 건너편으로 가십니다. 지난 주일 일용할 양식의 제목이 무엇이었습니까? ‘영광이 이스라엘을 떠났도다(삼상 4:22)’입니다. 이스라엘이 엘리 제사장 때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패합니다. 그러자 언약궤를 앞세워 싸웁니다. 하지만 패하고서 엘리 제사장의 두 아들이 죽고 언약궤마저 빼앗깁니다. 이 소식을 전해 들은 엘리 제사장은 쇼크를 받고 죽습니다. 그의 며느리는 난산으로 말미암아 아이를 출산하면서 ‘영광이 이스라엘을 떠났도다’ 말하고서 죽습니다. (5/26 일용할 양식 참고하세요) 언약궤를 빼앗긴 것이 왜 하나님의 영광이 이스라엘을 떠난 것이 되나요? 언약궤는 하나님의 임재를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언약궤 위에는 그룹천사들의 날개로 보위하고 있는 시온좌가 있습니다. 거기에 하나님께서 임재하십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언약궤를 만들 때 그곳을 비워두게 하셨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장차 그 자리를 차지할 분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분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오 그 본체의 형상이십니다. 본문에서 예수께서 ‘그곳을 떠났다’로 표현하지 않고, ‘그들을 떠났다’고 나옵니다. 이는 그들에게 아주 심각한 표징입니다. 이것은 그들에게 심판을 의미합니다. 또한 회개를 촉구합니다. 13절을 보겠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떠나 다시 배에 올라 건너편으로 벳새다로 향하셨습니다. 배를 타고 가는 중에 제자들이 서로 수군거렸습니다. “아이고 맙소사, 우리가 급히 오는 바람에 떡 한 개밖에 못가져 왔네~~. 오늘 저녁식사는 어떻게 하지?” 이를 곁에서 들으신 예수님이 그들에게 무슨 말씀을 하십니까? 15절을 읽습니다. “예수께서 경고하여 이르시되 삼가 바리새인들의 누룩과 헤롯의 누룩을 주의하라 하시니” 아니, 제자들은 떡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예수님은 왜 갑자기 누룩 이야기를 하시는 걸까요? ‘예수께서 경고하여 이르시되’란 말을 볼 때, 제자들의 모습 속에서 바리새인과 헤롯의 누룩이 있음을 보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를 교육의 기회로 삼고자 하십니다. ‘삼가 바리새인들의 누룩과 헤롯의 누룩을 주의하라’ 누룩 비유는 소량의 효모가 전체에 가득 퍼져 영향을 미치는 것을 말합니다. 누룩은 유대교나 당시 헬레니즘 사회 모두에서 타락에 대한 일반적인 은유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렇다면 바리새인의 누룩과 헤롯의 누룩이 무엇일까요? 눅12:1에서는 외식하는 것을 누룩이라 했고, 마16:12에서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잘못된 가르침을 누룩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마가복음의 흐름속에서 이 누룩은 무엇을 말할까요? 먼저 바리새인들의 누룩을 생각해보겠습니다. 예수께서 그동안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을 바리새인들에게 분명히 보여주었음에도 그들은 여전히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을 구하고 있습니다. ‘보여주면 믿겠다’ ‘나를 믿게해 봐’ 하는 마음입니다. 헤롯의 누룩은 무엇입니까? 헤롯은 예수님께 대한 적대적인 관심을 가졌으며, 예수께서 행하시는 표적을 보고자 하는 욕망이 있었습니다. 이들의 공통점은 ‘믿지 않을 수 없는 표적을 내 놓으라’는 신앙입니다. 특히 바리새인들은 어떻게 신앙생활하고 있었습니까? 스스로 생각하기를 신앙생활 잘하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자부하였습니다. 성경을 잘 알고 있으며, 성경 말씀대로 살아간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진단은 무엇입니까? 그들은 하나님의 계명을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지켰습니다. 입술로는 하나님을 공경한다 말하지만 마음은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져 있습니다. 마음으로부터 나오는 악을 깨끗하게 할 생각은 하지 않고 겉만 깨끗하게 하고자 열심을 내었습니다. 하나님의 뜻보다 자신의 뜻을 추구하였고, 하나님의 영광보다 자신의 영광을 추구하였습니다. 그들의 신앙생활의 중심에는 하나님이 계신 것이 아니라, 그 중심에 자기가 있었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성경 곧 진리의 떡을 자신들의 방식으로 발효시키고 결국 부패시키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막12:24에서 그들에게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는고로 오해함이 아니냐(막12:24)’하시며 그들의 신앙생활의 현주소를 알려주십니다. 그들의 누룩은 성경도 모르고, 하나님의 능력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바리새인과 헤롯의 누룩이 지금 제자들 속에도 있음을 인지하시고 경고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의 반응이 무엇입니까? 16절을 보면, 서로 수군거리기를 “이는 우리에게 떡이 없음이로다”합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오해하고 있습니다. 내인(內人)이라고 불리우는 제자들이 외인(外人)이라 불리는 바리새인이나 헤롯과 전혀 다를 바가 없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제자들을 날카롭게 책망하십니다. 17,18절을 읽습니다. “예수께서 아시고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 떡이 없음으로 수군거리느냐 아직도 알지 못하며 깨닫지 못하느냐 너희 마음이 둔하냐 너희가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느냐 또 기억하지 못하느냐” 예수님은 열두 제자들에게 ‘너희들이 삼년 동안 이렇게 반복하여 가르침을 받고, 권능의 역사를 수없이 경험하고서도 여전히 눈멀고 귀멀어 있느냐.’ 그들의 무감각과 우둔함을 호되게 책망하십니다. 19,20절을 읽겠습니다. “내가 떡 다섯 개를 오천 명에게 떼어 줄 때에 조각 몇 바구니를 거두었더냐 이르되 열둘이니이다. 또 일곱 개를 사천 명에게 떼어 줄 때에 조각 몇 광주리를 거두었더냐 이르되 일곱이니이다. 이르시되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 하시니라” 자! 예수님은 지금 무엇을 말하고자 하시는 것입니까? 여러분은 깨달음이 있습니까? 이해를 돕기 위해 제가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사과나무에서 사과가 떨어집니다. 우리는 보통 ‘당연하지’하며 별 생각이 없습니다. 그런데 뉴턴은 거기에서 중력이 작용하고 있음을 보았습니다. 그는 이를 연구하여 ‘만유인력’의 원리를 공식으로 만들어냈습니다. 또 우리는 ‘유레카’로 유명한 아리키메데스의 이야기를 잘 압니다. 아리키메데스가 목욕탕에 들어갔는데 물이 넘칠 때 그는 거기서 놀라운 깨달음을 얻고서 ‘유레카’ 외치며 기뻐 맨몸으로 거리로 뛰쳐나왔습니다. 그가 질량과 부피 사이의 관계, 즉 ‘밀도’를 발견하여 왕으로부터 의뢰받은 왕관이 순금인가, 아닌가를 알아낼 수 있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초등학생때 지구가 둥굴다는 것이 이해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사는 지구 반대편에 있는 사람들은 아래로 떨어질터인데, 그게 가능하겠느냐는 의문이 있었습니다. 중력의 원리를 알지 못하니 이런 오해를 한 것입니다. 자! 그렇다면 생각해봅시다. 한 사람의 한 끼 식사량인 떡 다섯 개나 떡 일곱 개로 오천 명, 사천 명이 배불리 먹을 수 있습니까? 불가능합니다. 그런데 이것이 가능케 되었다면, 우리는 무엇을 생각할 수 있습니까? 그렇다면 반드시 거기에는 어떤 원리가 작용했다고 볼 수 밖에 없습니다. 그 원리가 무엇입니까? ‘예수님의 함께하심’의 원리입니다. 다른 말로 ‘임마누엘’의 원리입니다. 제자들은 떡의 숫자와 남은 조각의 숫자까지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 표적을 이룰 수 있었던 원리나 그 의미를 깨닫지 못하고 있는 눈뜬 봉사요, 귀뚫린 귀머거리였습니다. 21절을 다 같이 읽겠습니다. “이르시되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 하시니라”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 제자들에게만 아니라 이 복음서를 읽는 모든 그리스도인 청중들을 향한 주님의 외침입니다. 그들이 진정 깨달아야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예수가 구약에 예언된 그리스도이시며 주님이라는 비밀입니다. 이 비밀이 현재 베일에 싸인채 언급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배에 제자들과 함께 있는 ‘유일한 참 떡’이십니다. 제자들이 이것을 보지 못하고 육신의 떡만 보고 있으니, 아직 영적으로 어립니다. 하지만 주님은 그들의 눈이 밝아져 그리스도의 영광을 볼 것을 기대하며 소망가운데서 양육하고 계십니다. 우리에게 누룩은 무엇입니까? 신앙생활의 본질에서 떠나 있는 것을 말합니다. 그렇다면 신앙의 본질이 무엇입니까? 내 마음 중심에 여호와 하나님이 계시는 것이요. 다른 말로 하면 그리스도가 중심이 되는 것입니다. 또한 신앙생활의 동기가 ‘사랑’에 기인한 것이어야 합니다. 오병이어와 칠병이어 사건속에는 예수님의 사랑이 담겨져 있습니다. 예수께서 무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자신의 몸과 살을 떼어 먹이심 같이 우리의 신앙의 동기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데서 나오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다른 무언가의 영향으로 그리스도가 중심에서 밀려나게 되거나, 사랑이 기초가 되지 않는다면 그것이 누룩입니다. 그것이 돈이 될 수도 있고, 명예가 될 수도 있고, 세상 풍조가 될 수도 있고, 나의 외형적인 유익이 될 수도 있습니다. 외형적인 평화를 추구하는 것 조차 누룩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 선조들의 누룩을 보십시오. 일제 강점기 신사참배를 강요할 때, 교회와 성도들을 보호한다는 명목하에 많은 교회들이 우상에게 절하였습니다. 극소수의 목사와 성도들만이 이를 거부하고 순교까지 하였습니다. 오히려 교회는 부끄럽게도 신사참배를 거부한 사람들에게 징계까지 내렸습니다. 한경직목사님은 종교계의 노벨상이라 불리우는 템플턴상을 받을 때 수상소감에서 자신은 신사참배를 묵인하고 참여했던 죄인이라고 고백하며 회개한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민족을 사랑하시고 축복하사 한국에 파송된 수많은 선교사님들의 피흘림과 희생의 터전위에 복음이 전파되게 하시고 교회를 세우시고 부흥의 역사가 이루어져 기독교 강국이 되고 세계에 대해 제사장 나라 되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우리 속에는 여전히 우리 조상들의 ‘신사참배’와 같은 망령된 누룩이 있지 않는가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회개하고 주님께로 돌이켜야 합니다. 저도 나의 내면을 깊이 살펴보면, 주님보다 세상의 부나 명예, 세상 즐거움을 추구하는 누룩들이 있는 것을 봅니다. 주님을 따른다 하면서도 주님을 기쁘시게 하기보다 사람들을 기쁘게 하고 인정받고자 하는 누룩들이 있습니다. 주님의 고난에 동참하기보다 회피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제가 이를 발견하고 회개합니다. 22-26절은 벳새다에서 맹인의 눈을 뜨게 하신 사건으로서, 예수님께서 단번에 낫게 하지 않으시고, 두 번에 걸쳐 안수하시고 낫게 하신 특이한 치유 사역입니다. 예수께서 사람을 돕되 단계적으로 돕습니다. 제자들을 돕되 인내심을 가지고 단계적으로 영적 세계에 눈을 뜨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빠른 변화가 없다고 낙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조금 더디더라도 주님의 도우심으로 온전함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결론입니다. 참된 신앙생활은 예수로 충만해지는 것입니다. 이것을 방해하는 모든 것들이 누룩입니다. 이러한 불신앙의 누룩, 세속의 누룩을 주의하고 제거해야 하겠습니다. 성령의 조명가운데 성경을 올바로 해석하고 적용함으로 우리 안에 그리스도가 충만하고 그분의 다스림으로 풍성한 생명을 누리길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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