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메세지

제목2024년 마가복음 13강 누구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마가복음 8:27-9:1)2024-06-09 2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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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마가복음 13

 

누구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말씀 / 마가복음 8:27-9:1

요절 / 마가복음 8:34

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주일 메시지를 전할 때 마다 느끼는 점은, “오늘 전하는 이 메시지가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말씀이다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대하며, 이 말씀이야 말로 정말 가장 중요한 말씀들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말씀이라는 확신이 듭니다. 왜냐하면 오늘 말씀은 우리에게 가장 고귀한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는 진리를 분명하게 가르쳐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 삶은 고난의 길임에 분명합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이는 또한 생명의 길이요 영광의 길입니다. 사람이 갈 수 있는 최상의, 최고의 길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이 놀라운 진리를 깨닫게 해 주시길 기도합니다. 그리하여 우리 모두가 십자가의 길, 영생의 길을 가기를 기도합니다.

 

마가복음을 두 파트로 나눈다면, 오늘 말씀이 바로 두 번째 파트가 시작되는 시점입니다. 첫 파트에서는 예수님이 주로 무리들을 대상으로 여러 기적을 행하시며 말씀을 가르치십니다. 반면에 두 번째 파트에서는 주로 제자들을 가르치고 훈련하십니다. 또한 예루살렘에 올라가셔서 십자가를 지십니다. 오늘 본문은 제자의 길, 곧 제자도에 대한 내용입니다. 제자도를 가르치시기 전에 예수님은 아주 중요한 절차를 거치십니다. , 제자들의 신앙고백을 받으십니다.

 

27절입니다. "예수와 제자들이 빌립보 가이사랴 여러 마을로 나가실새 길에서 제자들에게 물어 이르시되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예수님이 제자들과 빌립보 가이사랴 지역의 여러 마을로 나가실 때였습니다. 이곳은 갈릴리 호수 북쪽에 있는 헬몬산 기슭에 위치한 지역으로 이스라엘에서 가장 경치가 좋은 곳이라고 합니다. 빌립보 가이사랴라는 이름은 당시 그 지방의 분봉왕인 헤롯 빌립이 자기 이름과 로마 황제 가이사의 이름을 따서 지은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곳을 지나실 때 제자들에게 질문하십니다.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예수님은 당신의 생애가 막바지에 이른 것을 아시고, 자신의 정체성을 점차로 드러내고자 하십니다. 예수님은 먼저 사람들의 예수님께 대한 생각을 물으셨습니다.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이 질문은 제자들에게 하실 본 질문을 위한 예비 질문이었습니다. 여하튼 제자들은 예수님의 갑작스런 질문에 대답합니다. ", 예수님, 사람들이 뭐라고 하냐면요... 어떤 사람은 예수님을 세례 요한이라, 더러는 엘리야, 더러는 선지자 중의 하나라고 말합니다."

 

이전에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이 바알세불, 곧 사탄의 힘을 빌려 일하는 자라고 악평했습니다. 예수님의 친척들은 예수님이 귀신에 들렸다고 보았습니다. 고향 사람들은 예수님이 목수의 아들이 아니냐?”하며 폄하하였습니다. 이에 비해 사람들의 객관적인 관점은 그래도 호의적인 편입니다. 예수님이 누구신지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여하튼 위대한 사람들 중의 하나라고 본 것입니다. 이 점에 대해 영국의 기독교 변증학자 C.S. Lewis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위대한 성인이다, 박애주의자, 교육자, 사랑을 실천한 위대한 지도자라고 한다. 그러나 성경을 읽어보면 당신은 예수님은 하나님이다라고 말하거나, 아니면 예수는 완전한 미치광이거나 역사상 가장 지독한 거짓말쟁이다라고 해야 한다. 다른 입장을 취할 수는 없다"라고 하였습니다. , 그렇습니다. 이는 예수님은 자신이 하나님이라고 분명히 말씀하신 경우가 많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이 있기 전에 내가 있느니라.” (8:58)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여 달라고 하느냐?” (14:9)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10:30) 이런 명백한 말씀들에 대해 우리는 예수님을 그저 훌륭한 분이라는 정도의 견해를 가질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잘 모르는 사람들은 그저 그가 위대한 사람이다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이제 제자들에게 본론적인 질문을 하십니다. 29a절입니다. "또 물으시되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예수님은 사실 이 질문을 하시기 위해 지난 3년간 제자들을 데리고 다니며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의 제자교육, 제자훈련의 목표는 바로 이 질문에 대한 바른 대답을 하도록 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물으시는 타이밍을 잡기 위해, 또 제자들이 바른 신앙고백을 할 수 있도록 기도를 많이 하셨을 것입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여기서 강조된 말은 "너희는"입니다. 그래서 NIV에는 "But what about you?" "Who do you say I am?" 하며 두 번 “you”를 반복하여 강조합니다. “다른 사람들이 무엇이라고 하던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나는 너희에게 어떤 존재냐?”라는 질문입니다. "나는 너희에게 어떤 존재인가?" 이는 실로 열두 제자뿐 아니라 모든 세대 모든 사람들이 반드시 답해야 할 중대한 질문입니다. 예수님께 대한 자세, 예수님에 대한 올바른 고백이 한 사람의 영원한 운명을 결정짓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에 대해 어떤 자세를 갖고 계십니까? 다른 사람의 입장과 상관없이 여러분에게 예수님은 어떤 분이 되십니까?

 

제자들 중에 베드로가 나서서 대답합니다. "주는 그리스도시니이다." "You are the Christ!" 이 고백은 아주 정확한 고백이었습니다. 예수님이 기대하시던 바로 그 고백이었습니다. 마태복음 16:17에서 예수님은 이 고백을 들으시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예수님은 그의 고백을 기뻐하시고 그 고백은 하나님이 하게 하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 '그리스도'란 무슨 뜻입니까? 그리스도란 그 본래 뜻이 기름 부음을 받은 자” (the anointed one)로 히브리어로는 "메시야" 입니다. 구약시대에 세 종류의 사람들이 기름 부음을 받았는데 그들은 제사장, 선지자, 왕들이었습니다. 기름 부음을 받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택함을 받아 거룩한 자로 구별되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그래서 기름 부음을 받아 성직을 맡게 된 자를 "그리스도" ('a Christ')로 불렀습니다. 구약시대 후반부에 들어와 그리스도라는 말은 좀 더 특별한 의미를 갖게 되었습니다. 곧 하나님에 의해 기름 부음을 받아 자기 백성을 구원하고 다윗 왕국을 새롭게 건설할 자를 가리키게 되었습니다. 제사장이요, 선지자요, 왕으로 오실 이스라엘의 구원자를 의미하였습니다. 베드로의 고백은 바로 예수님이 그 오시리라 예언된 이스라엘의 구원자를 말한 것이었습니다. 물론 당시 유대인들의 그리스도에 대한 기대는 매우 정치적이었고 현실적이었습니다. 그리스도라는 호칭 자체가 정치적, 국가적인 의미를 지녔습니다. 그러나 실상 예수님은 어떠한 그리스도이십니까? 인류의 죄를 사하시기 위해 자신을 십자가에 내어드리는 그리스도가 되십니다. "주는 그리스도시니이다!" 베드로의 이 신앙고백은 100점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의미한 그리스도는 당시 유대인의 생각과 다르지 않았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자신이 그리스도로서 가셔야 할 길에 대해 가르쳐주십니다.

 

31절입니다.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 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사흘 만에 살아나야 할 것을 비로소 그들에게 가르치시되." 이는 제자들 모두에게 쇼킹한 말씀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이 생각한 메시야는 전혀 고난을 받지 않고 오직 영광만을 누리는 분으로 여겼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은 메시야가 오셔서 하나님의 권능으로 로마를 몰아내고 과거의 찬란했던 다윗 왕국을 다시 세우실 것으로 믿었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이 많은 고난을 받고 버린 바 되어 죽임을 당해야 한다니 이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고 받아들일 수도 없는 것이었습니다.

 

31절을 보면 예수님은 자신이 십자가의 길을 가셔야 함을 비로소 드러내 놓고 말씀하십니다. "비로소 그들에게 가르치시되"라는 말은 이제 시작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귀를 틀어막아도 계속하여 십자가의 길에 대해 가르치십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사실 자신의 죽음과 함께 영광스런 부활도 언급하셨습니다.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 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사흘 만에 살아나야 하리라" 앞으로도 두 번 더 수난 예고를 하시는데 그때도 모두 부활하실 것을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수난 예고는 절대로 슬프고 절망적인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결국 영광스럽게 부활하여 최후의 승리자가 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온 인류의 원수인 마귀와 사망의 세력을 멸하시고 그를 믿는 인생들에게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메시야의 고난과 죽음이라는 것에 막혀서 그 이상 한 걸음도 더 나아가지 못했습니다.

 

이런 예수님의 말씀에 대한 베드로의 반응이 어떠합니까? 32b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항변하매" 영어로는 "Peter took him aside and began to rebuke him"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는 베드로가 예수님을 잠깐 한쪽으로 데려가 책망하기 시작하였다는 것입니다. "아니, 예수님, 잠깐 이리로 와 보이소!" 지금 무에라 하셨습니까? 죽으신다고요? , 이 베드로가 있지 않습니까? 제가 지켜드리겠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이 죽으신다고 하시니 너무 마음 약한 소리를 하신 것이라 여기고 예수님을 나무란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그에게 무슨 말씀을 하십니까? 33절입니다. "예수께서 돌이키사 제자들을 보시며 베드로를 꾸짖어 이르시되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 여기서 하나님의 일은 무엇일까요? , 그렇습니다. 31절 내용입니다.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버린 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다시 살아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 길을 가심으로 인류의 죄 문제를 해결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일입니다. 사람의 일은 무엇일까요? 이는 유대인들의 소망대로 예수님이 그 전능한 능력으로 로마를 몰아내고 이스라엘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전자인데 베드로는 후자를 원했습니다. 예수님이 전자의 길을 가지 마시고, 후자의 길을 가시도록 푸시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그를 엄히 꾸짖으셨습니다.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예수님은 베드로를 "사탄"이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예수님의 단호한 입장을 나타내는 것이요 십자가 고난의 길은 추호도 수정될 수 없음을 말씀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가는 길을 방해하지 말라고 무섭게 책망하셨습니다.

 

더 나아가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34절입니다. "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이 말씀은 무리와 제자들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곧 그 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신자들, 또한 오늘을 살아가는 모든 크리스천들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신자 곧 크리스천이 된다는 말은 그리스도의 사람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는 매사에 예수님이 가신 길을 따라 가는 사람이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가시는 길이 무엇입니까? 곧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 길입니다. 누구든지 자기를 부인하지 않고 또 자기 십자가도 지지 않는다면 그는 예수님을 따를 수 없습니다.

그러면 자기 부인이란 무엇일까요? 자기 부인은 'deny oneself'인데 반대되는 표현은 'seek oneself' (자기 추구)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본능적으로 자기를 추구합니다. 자기를 이롭게 하고자 하고 자기 만족을 누리고자 합니다. 세상에서는 인생의 목적은 자아실현이라고 가르칩니다. 사전을 보니 자아실현이란 개인의 능력과 기술, 잠재력을 최대한 이루는 것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무엇을 위해 이루는 것인지는 말하지 않지만 여하튼 자기의 능력, 기술, 잠재력을 최대한 발휘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기의 모든 능력을 개발하여 자기가 원하는 바를 성취하고자 합니다. 돈을 많이 벌어 마음껏 누리기도 합니다. 자신의 역량을 다하여 사회 발전에 봉사하기도 하고 또 그에 따른 성취감을 누립니다. 그런데 자기 부인을 하라고 해서 이런 자기실현의 꿈을 다 버리라, 자기의 모든 능력과 잠재력을 다 버리라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의 능력을 최대한 개발하고 실현해야 합니다. 문제는 그 목적이 무엇이냐 하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만의 만족과 성취감과 자기 영광을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를 창조하시고 세상에 보내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자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내 자신의 꿈을 좇아 내 뜻대로 살았던 것에서 돌이켜 하나님의 원하시는 뜻에 따라 인생을 사는 것입니다.

 

그러면, 자기 십자가란 무엇일까요? 이는 자기 부인의 삶, 즉 하나님의 뜻을 먼저 순종하는 삶을 살아가기 위해 감당해야 할 모든 수고입니다. 자기 내면의 이기적인 욕망을 포기하는 것, 나의 세상적인 성취를 바라는 사람들의 기대를 저버리는 것, 예수님의 제자로 살아가기 위한 모든 내적 외적 도전을 극복해나가는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에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그 십자가를 지고 처형장으로 가는 죄수를 즉각적으로 연상시키는 말이었습니다. 그러한 진지한 자세와 분명한 결단을 촉구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 신자들이 그와 같이 자기 부인을 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야 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35절입니다.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NIV에 보면 35절 앞에 "For"가 있습니다. , 34절의 이유를 35절에서 말하는 것입니다. 자기 부인, 자기 십자가는 누구에게나 부담스런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 길을 가야 되는 이유는 자기의 생명이 달려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예수님을 따라 자기 부인 자기 십자가의 길을 가지 않으면 일시적으로는 편안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렇게 사는 길은 결국 자기 목숨을 잃는 길입니다. 반면에 예수님과 그의 복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으면 구원합니다. “자기 목숨을 잃는데 목숨을 구원한다?” 무슨 뜻일까요? 이는 세상에서 잠시 사는 육신의 목숨을 잃지만 영원한 목숨,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는 영원한 생명을 얻는 길에 대해 참으로 놀랍고 분명한 말씀입니다. 역설의 진리요 생명의 패러독스입니다. 주님을 위해 나를 부인하면 내가 죽을 것 같은데 실상은 그것이 내가 사는 길이라는 것입니다. 참된 생명, 영원한 생명을 얻는 길이라는 것입니다. 주과 복음을 위해 십자가를 지면 그것은 끔찍한 손해라고 생각되는데 그것이야 말로 자기에게 엄청나게 유익이 되는 길이라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영원한 생명은 단지 우리가 현재 모습으로 이 땅에서 죽지 않고 영원히 사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시는 슬픈 것이나, 애통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나 사망이 없는 영광스런 몸으로 하나님의 나라에서 영원한 복락을 누리는 것입니다. 주와 복음을 위해 자기 목숨을 잃는다는 것은 이 땅에서 주 예수님께 절대적인 충성을 드리는 것을 말합니다. 주님과 주님이 기뻐하시는 복음 사역을 위해 자기 목숨을 드리기까지 헌신하는 것, 이를 위해 자신의 온 정열과 삶을 바치는 것입니다. 그러한 삶이 영원한 생명, 참 생명을 얻는 길입니다.

 

36,37절입니다.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자기 목숨과 바꾸겠느냐?" 그렇습니다. 세상에서도 아무리 많은 돈을 준다 해도 그것을 위해 자기 목숨을 내놓아야 한다면 이는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千金不如一身 (천금불여일신)입니다. 세상에서의 일시적인 육신의 목숨도 이러할진대 영원한 참 생명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습니다. 사람들은 어떻게 하면 잘 살 수 있을까 생각합니다. 어찌하든 죽지 않고자 애를 씁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참으로 영원히 잘 사는 길을 말씀하십니다. 그것은 바로 이 땅에서 주와 복음을 위해서 우리의 인생을 드리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마귀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네 인생은 네 것이야. 네가 원하는 대로 살아! 누구도 너에게 이래라 저래라 할 수 없어. 보이는 것만 믿어. 소확행! 작아도 확실한 행복을 먼저 챙겨. 나중이라는 것을 믿지 마! 너의 이 세상에서의 목숨을 잘 지키라고!” 그러나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다! 그러나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누구든지, 누구든지 반복하십니다.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잃어버릴 수도 있고, 누구나 얻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생명 문제에 있어서는 자격도 없고 조건도 없습니다.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사느냐 하는 삶의 방식이 한 사람의 영원한 운명을 결정짓습니다. 자기의 본성적인 욕망을 부인하고 우리 주님과 그의 복음을 위해 살 때 영원한 생명을 얻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 인생을 살 수 있을까요? 우리는 먼저 주님을 나의 개인적인 그리스도로 깊이 만나야 합니다. 예수님은 나 자신에게 어떤 분이십니까? 이 점이 분명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해주신 분입니다. 우리를 다스리시는 참된 왕이십니다. 그 분을 위해 살 때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십니다. 이 생명은 이 세상을 넘어 영원에 이르는 다함이 없는 생명입니다. 이 예수님을 나의 구주”, “나의 그리스도로 깊이 만날 때 우리는 기쁨과 감사함으로 자기 부인, 자기 십자가의 길, 주와 복음을 위해 나의 인생을 드리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13장에 밭에 감추인 보화 비유가 나옵니다. 어떤 사람이 밭을 갈다가 보화를 발견하였습니다. 그는 이를 발견한 후 숨겨 두고 기뻐하며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았습니다. 그 밭을 사기 위해 자기의 모든 소유, 집과 자동차 등 모든 것을 팔았습니다. 그는 슬프거나 괴로운 마음으로 팔지 않았습니다. 넘치는 기쁨과 즐거움으로 팔았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이 나에게 누구시고 그가 주시는 영생이 무엇인가를 알 때 기쁨으로 나의 것을 다 팔아 주님을 따를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과거에 자기 명예와 영광을 위해 살던 자였습니다. 이런 그가 참 보화되신 예수님을 발견하였습니다. 그때 그는 예수님이야 말로 세상에서 가장 귀한 것임을 알았습니다. 예수님 대신 세상의 그 무엇이라도 얻으면 얻을수록 자기에게 손해가 됨을 알았습니다. 그런 것을 얻기 위해 드린 시간과 에너지는 예수님을 얻기 위하여 드린 것에 비하면 너무나 큰 낭비였기 때문입니다. 그는 말합니다.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3:7,8) 그는 세상의 좋게 보이는 수많은 것을 얻는 것보다 그리스도를 조금이라도 더 알고 소유하는 것을 귀히 여겼습니다. 그리스도를 알고 얻기 위해서 기꺼이 날마다 버리는 삶, 죽는 삶을 살았습니다. (고전15:31,32)

 

모라비안 교도의 후원자 진젠도르프 백작은 독일 작센' 제후국의 장관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는 귀족이고 부유했습니다. 이런 그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깊이 만났습니다. 그는 이후 자신의 모든 인생과 소유를 다 드려 주님을 따랐습니다. 그는 말했습니다. “나에게 한 가지 열정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예수님이시다." 우리가 예수님을 깊이 만나면 자기 부인은 더 이상 힘든 일이 아닙니다. 기쁨으로 자기를 부인하게 됩니다. 또한 죄악된 자기의 본성을 부인하고 주님을 따르는 것, 그 자체도 특권이요 은혜임을 알게 됩니다. 예수님을 알수록 더욱 큰 소원을 가지고 주님을 따르게 됩니다. 그런 사람에게는 주와 복음을 위해 섬기는 것, 희생하는 것도 기쁨입니다. 자기 부인, 자기 십자가는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만난 사람의 삶의 자발적인 양식입니다. 주와 복음을 위한 삶이 가장 귀하고 가치 있습니다. 우리에게 가장 유익하고 복된 생명의 길입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도우사 이 축복된 길을 더욱 힘차게 가도록 소원과 능력 주시길 기도합니다.

 

우리가 사람들을 두려워하여 음란하고 죄 많은 세상과 타협하면 어떻게 됩니까? 예수님도 아버지의 영광으로 오실 때 우리를 부끄러워하십니다. 신사참배에 반대하며 순교한 주기철 목사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을 위하여 오는 고난을 내가 피하였다가 이 다음 내 무슨 낯으로 주님을 대하오리! 주님을 위하여 이제 당하는 수옥(囚獄)을 내가 피하였다가 이 다음 주님이 "너는 내 이름으로 평안과 즐거움과 영광을 다 받아 누리고 고난의 잔은 어찌하고 왔느냐"고 물으시면 내 무슨 말로 대답하랴! 주님을 위하여 오는 십자가를 내가 이제 피하였다가 이 다음 주님이 "너는 내가 준 유일한 유산인 고난의 십자가를 어찌하고 왔느냐"고 물으시면 내 무슨 말로 대답하랴!”

 

결론적으로, 우리 각자에게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예수님은 우리의 영원한 왕이시요, 나를 죄와 사망에서 건지시는 구원자시요, 나의 인생의 목적이신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나의 그리스도이십니다. 누구든지 이 예수님을 나의 그리스도로 깊이 만날 때 주님은 우리로 하여금 기꺼이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게 해주십니다. 기쁨으로 주와 복음을 위해 살게 하십니다. 주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날마다 고백하게 하시며 영원한 생명을 얻는 진리의 길을 가게 해 주시길 기도합니다. 주님 다시 오시는 날까지 절대적인 충성심으로 주님과 복음 역사를 섬길 수 있게 해주시길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