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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2024년 마가복음 14강 그의 말을 들으라(마가복음 9:2-29)2024-06-17 0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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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마가복음 14

그의 말을 들으라

 

말씀/ 마가복음 9:2-29

요절/ 마가복음 9:7

마침 구름이 와서 그들을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하는지라

 

지난 주 말씀에서 예수님은 베드로로부터 주는 그리스도이십니다라는 신앙고백을 받으셨습니다. 그러자 비로소 그동안 베일에 가리어져 있던 그리스도가 하실 일에 대해 제자들에게 가르치셨습니다. 그것은 인자가 고난받고 죽임당하고 사흘 만에 살아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 능력 많으신 예수님이 고난받고 죽는다고 하시니 도저히 영접이 되지 않았습니다. 이런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자기 부인,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촉구하십니다.

 

오늘 말씀은 예수님의 부활 영광을 보여주시고 성부 하나님께서 그의 말을 들으라고 하십니다. 이를 통해 제자들에게 믿음을 심으시고, 자기 부인 자기 십자가 뒤에 오는 영광을 보도록 하십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성경적 메시야관을 갖게 하시고 주님 가신 길을 따라가는 제자의 삶을 살기를 기도합니다.

 

1. 산 위에서

 

2절을 보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십자가 고난과 부활에 대해 말씀하신지 엿새가 지났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시고 따로 높은 산에 올라가셨습니다. 그곳에서 예수님은 변형되셨습니다. 변형되셨다는 것은 성형수술을 한 정도가 아니라 애벌레가 나비가 된 것처럼 그 본체가 달라졌다는 뜻입니다. 그동안 예수님은 제자들의 눈에 머리 둘 곳도 없고 거지 대장과 같이 누추하고 가난한 모습이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그리스도에 대해 예언한대로,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는(53:2), 그런 모습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본래 그런 분이 아니십니다. 예수님은 세상 그 누구보다도 영광스럽고 찬란하고 거룩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예수님의 변형은 감추어진 인자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고난의 종예수님에 대해 5313절에 예언하기를 보라 내 종이 형통하리니 받들어 높이 들려서 지극히 존귀하게 되리라하였습니다. 3절을 보면, 예수님의 옷이 광채가 나며 세상에서 빨래하는 자가 그렇게 희게 할 수 없을 만큼 매우 희어졌습니다. 제자들이 지각할 수는 있지만 세상의 그 어떤 찬란함과도 비견할수 없는, 그런 형태로 예수님의 모습이 변형되셨습니다. 잠시이지만 예수님의 몸은 인성의 베일이 걷히고, 영광스런 물질적 빛의 형태로 나타났습니다. 제자들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눈부신 영광을 보자 너무나 놀라 입을 다물지 못하였습니다. 저자 마가는 변형이란 용어를 통해 하나님 나라의 강력한 도래를 알립니다.

 

, 그렇다면 예수께서 왜 이처럼 영광스런 모습을 제자들에게 보여주시는 걸까요? 자기 부인, 자기 십자가가 끝이 아니라 그 후에 놀라운 부활의 영광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입니다. 백문이불여일견이라고, 말로만 해서는 제자들이 실감나게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이 보는 앞에서 부활 영광을 보여주셨습니다. 저는 대학 1학년 가을, 복음을 듣고서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마음에 모시는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때 저의 심령에 하나님 나라가 임하였습니다. 기도를 드리고 눈을 떴는데 온 캠퍼스가 완전히 천국으로 변해 있는 놀라운 광경을 보았습니다. 지금도 그 감격과 황홀함은 잊혀지지 않습니다.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이루어질 천국을 미리 보여주신 것 같습니다. 이 사건은 저에게 죽음 후에 있을 천국을 기대하게 하였고, 지금까지 저의 신앙생활에 큰 힘이 되었습니다.

 

4절을 읽습니다. “이에 엘리야가 모세와 함께 그들에게 나타나 예수와 더불어 말하거늘엘리야는 선지자의 대표입니다. 모세는 율법을 대표합니다. 특히 여기서 엘리야를 모세보다 먼저 앞세우며 엘리야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말라기서에서 그리스도가 오기 전에 먼저 엘리야가 와서 모든 것을 회복시킬것이라고 언급하였기 때문입니다. 이제 예수님을 통해 구약에 예언된 모든 것이 곧 성취되게 될 것입니다. “다 이루었다외칠 날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세 제자들은 예수님의 영광스런 모습을 지금 보고 있습니다. 엘리야와 모세까지 직접 눈 앞에서 보고 있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황홀했겠습니까? 또 얼마나 무서웠겠습니까? 임여호수아목자님이 군악대에서 군 복무를 했는데요. 전군의 장성들이 모이는 곳에서 악기를 연주한 적이 있었습니다. 별 하나, 별 둘, 별 셋, 별 넷~. 평소에는 군대에서 별 하나도 구경하기 힘든데 수백, 수천개의 별들 앞에서 연주하니 너무나 떨리고 황홀했다고 합니다. 하물며 제자들은 어떠했겠습니까? 베드로가 거룩한 두려움에 빠져 말합니다. “랍비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우리가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사이다그는 차마 말할 수 없었겠지만 초막 하나를 더 지어 자기도 그곳에서 머물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는 문제 많은 산 밑, 곧 자기 부인 자기 십자가의 삶을 살아야 하는 곳으로 내려가지 않고 예수님과 모세와 엘리야가 있는 영광의 산 위에서 영원토록 살고만 싶었습니다.

 

그러나 그때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7절을 다 함께 읽겠습니다. “마침 구름이 와서 그들을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하는지라구름은 하나님의 임재하심과 영광과 위엄을 상징합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성부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고 증거합니다. 예수님의 권위와 권세가 절대적임을 알려줍니다.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예수님의 말씀을 최우선으로 들으라 합니다. 절대 복종하라 합니다. 들어보고 맘에들면 ‘yes’하고, 맘에 안들면 ‘no’, 이렇게 취사선택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만약 로마 황제가 명령한다면 그렇게 할 수 있을까요? 무서워서라도 절대 복종할 것입니다. 하물며 하나님의 사랑하는 아들이 명령하시는데, 그것을 들을까 말까 망설일수 없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요한복음 5:25절은 말씀합니다.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그의 말을 듣는 자가 살아나기 때문입니다. 만약 듣지 않으면 어떻게 됩니까? 여전히 죽은 자가운데 있게 됩니다. 베드로는 사도행전에서 유대인들을 향하여 이렇게 말합니다 모세가 말하되 주 하나님이 너희를 위하여 너희 형제 가운데서 나 같은 선지자 하나를 세울 것이니 너희가 무엇이든지 그의 모든 말을 들을 것이라 누구든지 그 선지자의 말을 듣지 아니 하는 자는 백성중에서 멸망 받으리라”(2:22,23) 말씀을 듣는 것은 단지 선택의 문제가 아닙니다. 죽느냐 사느냐의 문제입니다. 여러분 중에 혹시 신앙생활이 생명력이 넘쳐야 하는데~ 왠지 무기력하고, 쉽게 피곤하며, 의욕이 생기지 않는 분이 있지는 않습니까?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주의 말씀을 잘 듣지 않기 때문일 가능성이 큽니다. 신앙생활을 오래 했더라도 주님의 말씀을 듣지 않으면 곧 생명력을 잃고 무기력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현재 제자들이 들어야 할 주의 말씀은 무엇입니까? 예수님의 고난과 죽으심과 부활에 관한 메시지입니다. 그 중에서도 십자가의 복음은 반드시 들어야 합니다. 그런데 십자가 말씀은 듣기가 쉽지 않습니다. 2000년 전이나 지금이나 십자가를 좋아할 사람은 없습니다. 사람들은 십자가만 없으면 신앙생활을 재미있고 즐겁게 할 수 있을 것이라 여깁니다. 그래서 자기 부인, 자기 십자가를 가르치지 않는 곳을 찾아 방황합니다. 그러나 십자가가 없는 곳에는 죄사함도, 부활의 영광도, 생명력도 없습니다. 처음 얼마동안은 부담 없이 잘 지낼 수 있을지 모르지만 곧 강한 세속주의에 휩쓸려 떠내려가게 됩니다. 우리가 십자가의 복음을 부담스럽게 여기는 이유는 십자가 뒤에 베일로 싸여있는 부활의 영광을 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있어 그의 말을 듣는 것이 무엇일까요? 첫째, 성경을 배우고 말씀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1970년대 UBF에서 독일로 파송된 간호사들을 위해 UBF 창립자인 이사무엘선교사님이 독일에 가서 그녀들을 모아 요1:4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말씀을 전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독일에 파송된 그녀들 안에 생명의 역사를 이루어 구원하셨고, 이 생명의 빛을 이방 땅에 전하고자 그들을 독일선교사로 파송하셨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이 말씀에 감동받은 간호선교사님들이 자기 인생가운데 역사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글로 한번 써 보자해서 인생소감을 썼는데, 이것이 UBF 인생소감쓰기의 시초입니다. 소감을 쓰면서 그들은 우리가 이곳에 돌벌러 온 것이 아니라 선교하러 왔다’, ‘선교사로 살겠다며 결단하는 소감들을 써서 발표하였습니다. 각 선교사님들의 마음에 감동의 역사가 있었고, 유럽선교의 불길이 번지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 소식을 전해 들은 한국의 목자들도 우리도 한번 써보자하여 인생 소감을 쓰게 되었습니다. 그후 UBF하면 소감이 될 정도로 소감을 듣고 주께 돌아온 사람들이 많았고, 소감 쓰기를 통해 주님을 만나고 내면 문제가 해결되는 역사가 계속 이어져 왔습니다. UBF역사는 말씀과 소감을 통해 이루어진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처럼 우리가 말씀을 듣고 순종으로 반응할 때 주님이 원하시는 제자로 성장하게 됩니다.

 

둘째, 성령의 음성을 듣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늘로 승천하시면서 그의 영인 성령을 보내주셨습니다. 성령은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게 하고 그의 뜻을 우리에게 전달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의 음성을 민감하게 듣고 반응해야 합니다. 조이 도우슨의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삶이란 책자에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뉴질랜드에 사는 70세 노부인이 어느날, 성경읽기를 하다가 산에 가서 기다리라는 성경 구절이 그녀의 마음을 사로잡았습니다. 그녀는 무시하고 계속 성경을 읽는데 마음이 편치 않았습니다. 그래서 다시 돌아가 그 말씀을 읽습니다. 그리고 기도합니다. ‘어느 산으로 가야하죠?’ 즉시, ‘테 아로하란 산이 영 가운데 떠올랐습니다. 그 산은 집에서 30마일이나 떨어져 있습니다. 그녀는 마을 버스 정류장으로 가서 버스를 타고 그 산으로 갔습니다. 그리고 주님, 이제 뭘 어떻게 하죠?’ 묻습니다. 대답이 옵니다. ‘산에 오르라등산로를 따라 30분정도 올라가는데, 전망대가 있는 나무의자에 한 청년이 앉아 있었습니다. 이때 그녀에게 하나님의 임재가 느껴졌고 그 청년에게 다가가 자기가 거기에 오게 된 자초지종을 말했습니다. 그러자 청년은 놀라며 자신은 자살하기 위해 이 산에 왔는데 용기가 나지 않아 머뭇거리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녀는 즉시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이루어진 하나님의 구속의 사랑의 복음을 증거했습니다. 그 청년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고 자신의 삶을 그 분께 드리겠다 헌신하였습니다. 그 청년의 새로운 삶은 그 노부인을 집에까지 모셔다 드리는 것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이처럼 우리는 매사에 성령의 음성을 듣고 성령의 인도함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그의 말을 듣는 것입니다.

저는 여름 수양회를 준비하면서 딤후 4장을 암송하고 있습니다. 거기에 보면,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따를 스승을 많이 두고 또 그 귀를 지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따르리라”(3,4)고 나옵니다. 이러한 세태속에서 디모데가 해야 할 일을 말해줍니다. “그러나 너는 모든 일을 신중하여 고난을 받으며 전도자의 일을 하며 네 직무를 다하라”(5) 그 이유가 무엇인가? “전제와 같이 내가 벌써 부어지고 나의 떠날 시각이 가까웠도다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자에게도니라”(6-8) 주님께서 이에 대한 보상을 반드시 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저는 말씀을 암송하면서 나에게 주신 십자가와 고난을 잘 감당하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가를 배우게 되었습니다. 제가 이를 잘 감당하길 기도합니다. 현재 우리가 당하는 고난은 장차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 주신 십자가와 고난을 잘 감당하라고 당부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듣고, 순종하여 감당함으로 주님의 영광에 동참하는 우리가 되길 기도합니다.

 

제자들이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정신이 들어 문득 둘러보니 그곳에는 아무도 없고 오직 예수님과 자기들뿐이었습니다. 저희가 산에서 내려올 때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경계하시며 인자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때까지는 본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구속역사가 완성될 때까지 베일에 싸인채로 두고자 하십니다. 10,11절을 읽습니다. “그들이 이 말씀을 마음에 두며 서로 문의하되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것이 무엇일까 하고 이에 예수께 묻자와 이르되 어찌하여 서기관들이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하리라 하나이까제자들은 인자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난다고 하니 어리둥절했습니다. 인자와 죽음과 부활의 관계를 도대체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당시 유대인들은 죽은 자의 부활은 세상 마지막 때, 종말에나 일어날 일로 여겼습니다. 예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난다고 하니 이해불가입니다. 또한 서기관들은 말라기 선지자의 예언에 기초하여 엘리야가 먼저 와서 모든 것을 회복한 후에 메시야가 영광 중에 나타나 다윗왕처럼 통치할 것이라고 가르쳤습니다. 다분히 정치적, 민족적 메시야관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이 이게 어떻게 된 것인지 묻고 있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은 성경적 메시야관을 가르치십니다. 12,13절을 보십시오. “이르시되 엘리야가 과연 먼저 와서 모든 것을 회복하거니와 어찌 인자에 대하여 기록하기를 많은 고난을 받고 멸시를 당하리라 하였느냐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엘리야가 왔으되 기록된 바와 같이 사람들이 함부로 대우하였느니라 하시니라예수님은 서기관들이 엘리야가 먼저 와서 모든 것을 회복할 것이라고 말한, 그 말은 맞다고 하십니다. 그리고 그들이 오해하고 있는 부분을 바르게 하고자 질문을 하십니다. 그렇다면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멸시를 당하리라고 기록된 성경말씀은 무슨 말인가되물음으로써 제자들의 이해를 촉구합니다. 예수님은 이미 엘리야가 왔다고 합니다. 그가 세례요한임을 간접적으로 알려주십니다. 그러나 그가 주의 길을 예비하였지만 사람들로부터 함부로 대우를 받고 죽임을 당한 것이라고 하십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도 사람들로부터 대우를 받지 못하고 고난받고 죽을 것을 예표합니다. 여기서 그들이 알았어야 하는 것은 십자가 굴욕 안에 회복과 영광이 숨겨져 있다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3년동안 예수님을 지근거리에서 따르면서 많은 가르침을 받았는데도 여전히 인자의 죽음과 부활에 대해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하나님 나라가 베일에 싸여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한계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 성령의 조명가운데 이를 깨달아 알게 된 우리는 참으로 복됩니다.

 

2. 산 밑에서

 

14절을 보십시오. “이에 그들이 제자들에게 와서 보니 큰 무리가 그들을 둘러싸고 서기관들이 그들과 더불어 변론하고 있더라예수님이 산 아래로 내려오니 아홉 제자가 서기관들과 말다툼을 하고 있었습니다. 어떤 아이 아빠가 말 못하게 하는 귀신들린 아들을 데리고 왔는데, 제자들이 그 귀신을 쫓아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무능함은 그 아버지에게 실망을 안겨주었고, 그들은 서기관들로부터 무시를 당하고 있었습니다.(17,18)

 

여기에 대한 예수님의 반응이 무엇입니까? 19절을 읽겠습니다. “대답하여 이르시되 믿음이 없는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에게 참으리요 그를 내게로 데려오라 하시매예수님은 제자들이 귀신을 쫓아내지 못한 이유를 믿음이 없는 것으로 보셨습니다. 믿음의 실력은 어떻게 나타납니까? 예수 이름 권세를 사용할 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과 연합하여야 합니다. 예수님과 일치시켜야 그 분이 주신 능력이 나타납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어떠합니까? 경험의 밧데리는 충분한데, 예수님을 믿는 믿음의 밧데리가 방전되었습니다. 그러니 능력이 나타나지 않은 것입니다. 이 믿음 없음은 단지 제자들만의 문제가 아니라 그 세대 전체의 문제입니다. 예수께서 그 아들을 돕고자 하자 귀신이 최후 발악을 합니다.(20-21)

 

그러자 그의 아버지는 예수님께 도움을 요청합니다. 22절을 읽겠습니다. “귀신이 그를 죽이려고 불과 물에 자주 던졌나이다 그러나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도와주옵소서.” 그 아버지는 예수님께 능력이 있으면 좀 도와달라고 합니다. 그는 예수님의 능력을 제한하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완전히 포기한 것도 아닙니다. ‘반은 믿고 반은 의심하고 있습니다. 제자들의 실패가 예수님의 능력에도 의심의 그림자가 드려지게 하였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무슨 말씀을 하십니까? 23절을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 하시니.” 예수님은 그의 사고방식을 바꿔주십니다. 그 아버지는 예수님이 능력이 있으면 아들을 고칠 수 있다.’라고 하였지만 예수님은 네가 믿음이 있으면 네 아들을 고칠 수 있다.”고 하십니다. 네 아들을 고치고 못 고치고가 예수님의 능력에 달린 것이 아니라 너의 믿음에 달려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항상 우리에게 무한한 충만함을 부어주시는데, 실패하는데에는 그 기름이 아니라 그것을 담는 그릇이 문제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말해주는 바가 무엇입니까? 우리가 한계를 만났을 때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능력이 아니라 나의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내가 믿으면 예수님께서 일하십니다. 예수께서 하지 못할 일은 없습니다. 그러나 내가 예수님을 믿지 않고 의심하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이것이 하나님 나라의 원리입니다.

뛰어보았자 벼룩이다란 말이 있습니다. 한 심리학자가 벼룩의 높이뛰기에 대해서 실험했는데, 20-30cm를 뛰었습니다. 벼룩을 유리컵 속에 넣고 뚜껑을 닫자 뚜껑 때문에 10cm도 못 뛰었습니다. 얼마 후 유리컵에서 벼룩을 꺼내놓았는데 여전히 높이 뛰지를 못했습니다. 그 벼룩은 여기까지가 한계다.’라는 생각에 갇힌 것입니다. 이런 모습이 믿음으로 산다는 우리들에게도 나타날 수 있습니다. 삶의 현장에서 몇 번 어려움을 만나다 보면 믿음을 놓쳐버리고 예수님의 능력을 제한시켜 버리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믿는 예수님은 한계가 없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누구든지 이 예수님을 믿으면 어떤 인생 문제도 해결 받을 수 있습니다. 내가 믿음이 있으면 학업문제도, 취업문제도, 결혼문제도, 물질문제도, 건강문제도, 인생의 모든 문제가 주안에서 반드시 해결이 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믿음을 가질 수 있습니까? 24절을 읽겠습니다. “곧 그 아이의 아버지가 소리를 질러 이르되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소서 하더라.” 그 아버지는 예수님의 능력이 아니라 자기 믿음이 중요함을 깨달았습니다. 그런데 자기에게 믿음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는 믿음 없음을 예수님께 고백하고서 도움을 요청한 것입니다. 이에 예수님은 제자들이 쫓아내지 못한 그 더러운 귀신을 꾸짖어 쫓아내십니다(25-28). 그러자 아이 얼굴에 회색이 돌고 눈이 초롱초롱해지고 입가에 미소를 띤 모습으로 정상적인 아이가 되었습니다. 이것을 본 아이의 아버지는 얼마나 기뻤겠습니까? 예수님은 마귀의 세력을 몰아내시고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기 위해 오신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십니다.

 

제자들은 자신들이 귀신을 쫓아낼 수 없었던 이유를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29절을 읽겠습니다. “이르시되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종류가 나갈 수 없느니라 하시니라.” 기도로만 쫓아낼 수 있다고 합니다. 기도는 하나님 나라와 맞닿게 하는 사다리와 같습니다. 기도는 하나님께 대한 절대 의존의 표현이며,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표현입니다. 기도는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구현하는 마스터 키와 같습니다.

 

오늘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한국 사람들에게 어떤 삶을 살고 싶은가?’란 설문조사를 했을 때 1위가 행복한 삶을 사는 것으로 조사된 걸로 알고 있습니다. 대개 이 답변속에는 내가 원하는, 내가 꿈꾸는, 내 소원이 이루어지는 자아실현의 그림을 그리면서 답을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의 참된 행복은 내가 원하는 삶을 사는데 있지 않고, 그리스도가 원하는 삶을 사는데 있습니다. 거기에는 자기 부정과 십자가의 굴욕이 있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꺼려합니다. 그런데 자세히 들여다 보면 그 굴욕 후에 얻는 영광이 베일에 싸여 감추어져 있습니다. 이를 볼 줄 아는 사람만이 자기 인생을 그리스도께 던질 수 있습니다. 주와 복음을 위해 기꺼이 고난받기를 자원하게 됩니다. 성령께서 우리의 영적인 눈을 뜨게 하사 그리스도의 영광을 보게 하옵시며, 그 영광에 참여하고픈 열망을 우리 가슴에 품게 하사 그의 말을 듣게 하시길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