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메세지

제목2024년 마가복음 15강 뭇 사람의 끝이 되어야 하리라(마가복음 9:30-50)2024-06-23 20:49
작성자

2024년 마가복음 15

 

뭇 사람의 끝이 되어야 하리라

말씀/ 마가복음 9:30-50

요절/ 마가복음 9:35

예수께서 앉으사 열두 제자를 불러서 이르시되 누구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뭇 사람의 끝이 되며 뭇 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하시고

 

지난 주 말씀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자신의 본래의 영광스런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그 이후 산 밑으로 내려오셔서 귀신들린 한 아이를 고쳐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이제 갈릴리를 통과하여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십니다. 가시는 노중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그들이 따라야 할 길, 곧 제자도에 대해 가르치십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가 참으로 위대한 삶을 사는 길에 대해 배우기를 기도합니다.

 

1. 십자가의 길을 가시는 그리스도

예수님은 갈릴리를 통과하시는 중에 아무에게도 알리고자 아니하셨습니다. 이는 그 동안 무리를 돕던 갈릴리 사역을 마치고 예루살렘으로 가는 마지막 여정을 시작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앞으로 남은 짧은 기간 동안 제자들을 집중적으로 돕기 원하셨습니다. 31절입니다. "이는 제자들을 가르치시며 또 인자가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죽임을 당하고 죽은 지 삼 일만에 살아나리라는 것을 말씀하셨기 때문이더라" 지난 8:31을 보면, 예수님은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 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사흘 만에 살아나야 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예수님이 베드로의 신앙고백을 받으신 후 처음으로 말씀하신 수난 예고였습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길에 두 번째로 수난 예고를 하십니다. 세 번째는 10:33에 나옵니다. (수난 예고: 마가복음 8:31, 9:31, 10:33) 두 번째 수난 예고 "인자가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죽임을 당하고 죽은 지 삼 일만에 살아나리라"는 첫 번째 보다는 짧지만 그 요점은 동일합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반복적으로 이렇게 자신이 고난을 받을 것이라는 사실을 말씀하시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이는 제자들의 마음을 준비시키시기 위함이었습니다. 또한 그들로 하여금 성경적 메시야관을 갖도록 도우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어떠하였습니까? 그들은 예수님의 이 말씀을 깨닫지도 못하고 묻기도 두려워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그들의 예수님께 대한 메시야관이 달랐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의 메시야관은 영광의 메시야였습니다. 신적인 능력으로 이 땅에서 로마를 몰아내고 영광스런 다윗 왕국을 다시 세우는 메시아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스라엘의 정치적 회복이 아니라 인류의 죄 문제를 해결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이를 위해 십자가에 달려 죽으사 인류의 죗값을 치르시고 사망을 깨뜨리고 부활하셔야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와 부활의 메시아이십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예수님이 자신이 죽으신다는 말씀을 반복하여 하시는데 그것이 이해도 안 되었고 그런 가능성을 만분의 일이라도 생각해 보고 싶지 않았습니다. 사람은 듣고 싶은 것만 듣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원하지 않는 말, 듣고 싶지 않은 말은 아무리 말해도 들리지도 않고 이해도 되지 않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하신 말씀의 뜻을 묻기도 두려워했습니다. 만일 예수님이 자세히 설명을 해 주시면 그 뜻을 알게 되고 받아들여야 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제자들은 그들이 원하지 않는 시나리오를 생각조차 해 보기 원치 않았습니다. 마음의 귀를 꼭 틀어막고 듣지 않고자 결심하였습니다. 변화산에서 하나님이 직접 말씀하신 것처럼, 이런 그들은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것을 들어야 되었습니다.

 

당시 제자들이 고난당하는 예수님을 원치 않았던 것처럼 지금도 사람들에게 십자가를 지시는 예수님, 또 그 뒤를 따라가는 제자의 삶은 인기가 없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영광 받기 원합니다. 세상에서 복 받고 잘 되기만을 원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지상 메시아적인 자세가 아니라 주님이 가신 고난의 길을 따라가고자 하는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길을 가심으로 우리가 세상에서 얻을 수 있는 최고의 복을 이미 주셨습니다. 어떤 복을 주셨습니까? 그의 죽으심과 부활을 통해 죄사함과 영생의 은혜를 주셨습니다. 죄의 결과인 사망으로부터의 자유를 주셨습니다. 이 땅에서도 죄의 종이 되어 사는 인생, 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 수군수군하는 자로 살아가는 (1:29) 그런 추한 삶에서 자유를 얻게 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에서의 영원한 생명을 주셨습니다. 이는 사람이 상상할 수 있는 최고의 은혜입니다. 우리의 목숨이 1만개가 있다면 감사함으로 주님께 다 드려도 부족한 큰 복을 받은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의 삶은 주님이 주신 이 큰 은혜에 감사하여 기꺼이 주님이 가신 길을 따라가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이미 받은 은혜가 무엇인지 잘 모르고 세상의 복을 구합니다. 물론 세상의 복도 복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받은 영원한 복에 비하면 사실 별거 아닙니다. 있으면 편리하고 없어도 그로 인한 불편은 잠깐일 뿐입니다. 우리가 죄사함과 영생의 은혜를 감사하여 예수님을 따라 십자가의 길을 가는 것이 마땅합니다. 우리가 이런 분명한 믿음의 자세로 세상의 것들에 대해 자유함을 가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주어진 모든 상황에 감사하며 주님이 명하시는 영혼 구원에 힘쓰는 제자의 길을 가기를 기도합니다.

 

2. 뭇 사람의 끝이 되어야 하리라

33절을 보면 제자들은 예수님의 수난 예고의 말씀을 영접하기보다 길에서 서로 쟁론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이들의 쟁론을 그냥 넘어가지 않으셨습니다. 그들이 쟁론한 문제가 중요한 사안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이 가버나움에 이르러 집에 계실 때 제자들을 불러보아 물으십니다. "너희가 길에서 서로 토론한 것이 무엇이냐" 여기서 토론은 영어로 'argue'로 자기주장을 내세우며 논쟁한 것을 의미합니다. 그들이 논쟁한 내용은 "누가 크냐" 하는 것이었습니다.

 

제자들이 3년 전에 예수님을 처음 따를 때에는 예수님을 랍비로 모시고 순수하게 배우고자 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행하시는 놀라운 기적들, 몰려드는 수많은 무리들을 볼 때 그들의 마음이 점점 높아졌습니다. 예수님이 지상메시아 왕국을 이루실 그리스도라는 믿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에 따라 자기들도 신분 상승을 이루고 중앙정계에 진출할 수 있다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이런 비전 가운데 그들은 서로 경쟁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서로 자기가 큰 자라고 선전하기 시작했습니다. 누가 봐도 베드로, 요한, 야고보 세 제자가 앞서 가는 것은 분명하게 보였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우리 세 명만 데리고 변화산에 올라가신 것 몰라? 일단 우리는 1, 너희들은 2선 제자들이라고..."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홉 제자는 그것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빌립은 이렇게 말했을 것입니다. "지도자는 나처럼 머리가 좋고 계산이 빨라야 된다고..." 유다는, ", 예수님이 돈 관리를 내게 맡겨주신 것 모르는구먼! 나야 말로 최고로 신임을 받는 제자라고" 하였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그들에게 참으로 큰 자가 되는 길이 무엇인지 가르쳐주십니다. 35절입니다. "예수께서 앉으사 열두 제자를 불러서 이르시되 누구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뭇 사람의 끝이 되며 뭇 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하시고" 예수님은 자리에 앉으셨습니다. 당시 랍비들이 제자들을 정식으로 가르칠 때 앉아서 가르쳤습니다. 예수님의 하시는 말씀이 무엇입니까? "누구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뭇 사람의 끝이 되며 뭇 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예수님은 제자들이 서로 위대하게 되고자 하는 것을 절대로 나쁘게 여기지 않으셨습니다. 도리어 그것이 자연스런 것이요 당연한 것으로 보셨습니다. 단지 예수님이 보시기에 그들은 어떻게 해야 참으로 위대한 자가 되는지를 몰랐던 것입니다. 이에 아주 귀한 진리의 말씀- 어떻게 하는 것이 위대한 사람이 되는 길인가를 가르쳐주십니다. 이는 뭇 사람의 끝이 되며 뭇 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오랫동안 세상에 살면서 세상적인 가치관을 따라 살아왔습니다. 당시 세상에서는 어떤 사람을 첫째라고 여겼나요? 헤롯 안타파스 같은 왕입니다. 제자들은 세례 요한을 죽인 그를 미워했지만 속으로는 그의 정치적인 권세를 원했습니다. 말 한마디에 위대한 선지자 요한도 파리 목숨처럼 죽게 하는 그의 권세를 부러워했습니다. 대제사장이나 바리새인들이 위선적인 자들인 것을 알았지만, 그들이 갖고 있던 종교적인 권력을 부러워했습니다. 세상에서는 첫째가 되기 위해 실제적으로 힘이 되는 권력과 돈이 있어야 됩니다. 권력과 돈이 있어서 다른 사람들을 굴복시키고 마음대로 조종하는 자를 세상에서는 큰 자라고 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따르면서도 그런 가치관을 갖고 있었습니다.

 

오늘날도 이런 세상적인 가치관이 영적인 세계에도 그대로 들어와 교회공동체를 타락시킵니다. 요즘에도 우리 사회에는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은밀하게 예수님을 섬기는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시골에서 지역 교회를 섬기며 일생동안 헌신하는 목회자들도 많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큰 교회의 목회자는 더 위대한 사람으로 여겨집니다. 어디를 가나 레드카펫 대접을 받습니다. 제가 예전에 필리핀에서 열린 선교대회에 참여한 적이 있었습니다. 소위 이름난 한 목회자는 부부동반으로 비행기 비즈니스 클래스로 도착하여 공항에서도 최고의 의전 서비스를 받는 것을 보았습니다. 세상에서의 방식이 하나님 보시기에 옳은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참으로 위대한 사람이 되는 길은 뭇 사람의 끝이 되어야 한다 하십니다. 그 자리에서 뭇 사람을 섬기는 자, 그가 위대한 자입니다. 이는 세상 가치관과 완전히 다른 것입니다.

 

사람이 고귀한 이유는 그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 곧 하나님의 성품을 가진 자로 살아갈 때 가장 고귀합니다.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하나님이신 예수님을 보십시오. 가장 높으신 분이지만 가장 낮은 자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가장 낮은 자로 사셨습니다. 사랑하기 힘든 사람들을 자기 목숨을 주기까지 사랑하셨습니다. 사람이 그러한 예수님의 삶을 배울 때 가장 고귀합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살면서 나도 모르게 갖게 된 세속적인 가치관을 버려야겠습니다. 사람들로부터 인정받고 높임 받는다고 내가 위대하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의 칭찬과 영광을 받는 것이 나를 더 훌륭한 사람이 되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가장 낮은 곳에 서는 자, 그가 높은 사람이요 귀한 사람입니다. 가장 낮은 곳이 어디일까요? 사람들의 인정과 환호가 없는 곳, 존재감이 없게 보이는 곳, 인간적으로 불편한 곳, 그런 곳에서 섬기는 자가 위대한 자입니다.

 

왜 이런 삶이 위대할까요? 한번 해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보통 사람들은 그런 삶을 살 수 없습니다. 사람들의 무시를 받으면 "나를 뭐로 보고 그래?" 하는 마음이 솟구칩니다. 말없이 섬기다가도 아무도 알아주지 않으면 손해의식이 듭니다. 나만 더 수고하고 더 비용과 시간을 들이면 계속하고 싶은 마음이 사라집니다. 뭇 사람의 끝이 되어 섬기는 것- 그것도 한두 번도 아니고 늘 그렇게 사는 것, 이는 아무나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가 정말로 위대한 사람이 아닌 한! 진정으로 거듭난 사람, 예수님을 깊이 아는 사람, 실력이 있는 사람만이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그는 뭇 사람의 끝에서 섬기는 것을 기뻐합니다. 자기 이름이 드러나지 않는 것을 도리어 감사해 합니다. 그는 자기와 주님만이 아는 비밀이 많은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이 하나님 보시기에, 또 결국 사람들 보기에도 위대한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겉멋이 들어, 소리 나는 빈 깡통 같은 자들이 아니라, 그 내면이 겸손하고 희생적인 종들이 되기 원하셨습니다. 내면성이 위대한 자가 위대한 자입니다. 물론 정열과 꿈이 많은 우리 젊은이들이 이런 길을 가기는 쉽지 않습니다. 아니 불가능합니다. 이는 자신의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감사한 것은 우리가 예수님을 따를 때 예수님이 우리로 이 길을 가게 하십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그런 사람으로 만들어주십니다. 우리가 세상 사람들 같이 사람들의 인정과 칭찬을 구하고 섬김만 받고자 하는 것이 참으로 부끄러운 것임을 알아야겠습니다. 예수님과 같이 겸손히 낮아지고 섬기는 종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로 그러한 삶을 살게 하시며, 그런 우리 마음에 자유함과 기쁨을 충만히 허락하여 주시길 기도합니다.

 

3. 어린 아이를 영접하시는 예수님

예수님은 제자들이 뭇 사람을 섬기는 자들이 되도록 가르치신 후 이제 친히 본을 보이십니다. 36절입니다. "어린 아이 하나를 데려다가 그들 가운데 세우시고 안으시며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어린 아이는 귀엽습니다. 사랑스럽습니다. 어린 아이는 그 마음이 단순하고 순수히 배우고자 하는 장점이 있습니다. 그러나 한편 아직 미숙하고 분별력이 부족하여 유치한 면이 많습니다. 자기중심적이고 고집이 셉니다. 제가 얼마 전에 저녁 때 집 근처 공원에 나갔는데 어느 남자 아이를 보았습니다. 6-7살 정도 보이는 데, 그는 엄마한테 떼를 쓰고 있었습니다. 그 아이의 고집이 얼마나 센지 엄마의 손에 이끌려 공원 건너편으로 다 건너가기 까지 떼를 쓰고 우는 것을 보았습니다. 엄마는 하나도 화를 내지 않고 "그렇게 떼쓴다고 엄마가 들어주지 않아!" 라고만 하였습니다. 엄마의 인내심이 대단하다고 여겨졌습니다.

 

당시 유대의 문화권에서는 어린아이를 방자하며 무분별하여 엄격한 교육을 필요로 하는 존재로 여겼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시대에 이렇게 낮게 취급되는 어린 아이를 섬김의 대상으로 내세우셨습니다. 어린 아이를 안으심으로 깊은 애정을 표시하시며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나를 영접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니라." (9:37) 예수님의 이름으로 영접한다는 것은 예수님의 심정과 사랑으로 영접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어린 아이는 섬겨도 별로 표시가 나지 않습니다. 계속하여 섬기기도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연약하고, 부족하고, 요구 사항이 많고, 자기중심적인 사람을 예수님의 마음으로 인내심과 겸손함으로 섬기는 것이 낮아져 뭇 사람을 섬기는 것입니다.

 

4. 소금을 두고 서로 화목하라

38절입니다. "요한이 예수께 여짜오되 선생님 우리를 따르지 않는 어떤 자가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쫓는 것을 우리가 보고 우리를 따르지 아니하므로 금하였나이다." 제자들은 자기들이 예수님의 정통 라인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예수님이 자기들을 첫 제자들로 부르셨기 때문에 이제 누구든지 예수님을 따르기 원하는 자들은 자기들 뒤에 줄 서야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자기들을 패씽하여 예수님께 직통으로 줄을 대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이 자기들을 따르지도 않으면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들이 보기에 이는 명백한 질서 위반이었습니다. 그래서 더 이상 하지 말도록 중단시켰습니다. 제자들은 그들에 대한 시기심이 충만하였습니다. 자기들은 변화산 밑에서 귀신들린 아이를 낫게 하지 못했었는데 귀신을 쫓아내는 이들로 인해 위기감을 느꼈습니다. 제자들의 마음은 편협하였고 섬기는 마음이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들에게 무엇이라 말씀하십니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금하지 말라 내 이름을 의탁하여 능한 일을 행하고 즉시로 나를 비방할 자가 없느니라.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우리를 위하는 자니라.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10:39-41) 예수님은 비방하거나 중단시키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더 나아가 예수님은 그런 자들도 섬기라고 하셨습니다. 그들도 그리스도를 위해 일하는 자들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빌립보 1장을 보면 사도 바울이 투옥되었을 때 바울의 역사를 경쟁하던 어떤 사람들이 바울을 괴롭게 하려고 더욱 열심히 그리스도를 전했습니다. 그들의 동기는 투기와 분쟁의 마음이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말합니다. "겉치레로 하나 참으로 하나 무슨 방도로 하든지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니 이로써 나는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리라" (1:18) 바울은 자기가 어떻게 되든지 그리스도가 전파되는 것 자체를 기뻐하고 기뻐하였습니다. 이것이 제자의 마땅한 자세입니다. 우리는 우리 그룹에 속한 사람들만 섬기기 쉽습니다. 이는 넓은 의미의 이기주의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에 속한 사람은 누구나 귀히 보고 섬기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자기의 부르심대로 역할을 잘 하되 또한 관용하는 마음으로 다른 사람들이 주님으로 부터 받은 역할을 귀히 여길 줄 알아야 합니다.

 

주님을 믿는 자 중 어린아이와 같이 믿음이 연약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부주의하여 그들에게 상처를 주어 실족케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죄는 참으로 심각한 것입니다. 소가 뒷걸음치다 쥐를 밟으면 쥐는 그 자리에서 즉사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그와 같이 남을 실족케 하는 죄를 엄히 경계하십니다. 연약한 사람 하나를 실족하게 하는 것보다 차라리 연자 맷돌을 그 목에 매고 바다에 던져지는 것이 낫다고 하십니다. 또한 손이나 발이나 눈이 범죄하게 하면 차라리 찍어 버리고 빼어 버리라고 하십니다. 장애자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 두 팔을 가지고 지옥에 들어가는 것보다 낫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을 문자적으로 지키면 우리 중에 장애자가 아닌 사람은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이 말씀은 그 만큼 우리가 죄를 중히 심각하게 여기고 자신이나 다른 사람이 범죄하지 않도록 힘써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경고의 말씀을 하시면서 지옥이 얼마나 두려운 곳인지 말씀하십니다. 48,49절입니다. “거기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 사람마다 불로서 소금 치듯 함을 받으리라어떤 사람들은 지옥이란 상상으로 만들어 낸 곳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랑의 하나님이 믿지 않는 자들을 설마 지옥에까지 던져 넣으실까 하는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지옥은 실재하는 장소입니다. 신약 성경을 보면 지옥이라는 단어가 13번 나오는데, 그 중에 11번이 예수님이 친히 언급하신 것입니다. 나머지 두 번은 야고보와 베드로가 한번 씩 언급했습니다. (3:6, 벧후2:4) 예수님이 친히 지옥을 이렇게 언급하였는데 우리가 지옥이 없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지옥은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음행하는 자들과 점술가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거짓말하는 모든 자들이 최후에 던져지는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입니다. (21:8)

 

49절 말씀은 KJV 성경에는 "For" 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48절에 대한 이유를 49절에서 설명하는 것입니다. 한편 50절 말씀은 49절의 "지옥"이라는 단어만 받아서 오늘 본문 30-49절의 내용을 격언구로 결론을 짓는 말씀입니다. 50절입니다. "소금은 좋은 것이로되 만일 소금이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이를 짜게 하리요 너희 속에 소금을 두고 서로 화목하라 하시니라" 이것이 오늘 말씀의 결론입니다. 제자들은 서로 누가 크냐 쟁론했습니다. 낮아져 섬기지 못하였습니다. 화목하지 못하였습니다. 다른 그룹의 사람들과도 화목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내적 외적으로 소금을 두고 서로 화목해야 합니다. 소금의 역할이 무엇입니까? 부패를 방지하고 맛을 내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소금이 그러한 역할을 하려면 조건이 있습니다. 그것은 소금이 녹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소금으로써 녹는다는 것이 무엇일까요? 오늘 예수님이 가르치신 것처럼 뭇 사람의 끝이 되는 것입니다. 뭇 사람을 섬기는 것입니다. 어린 아이 같이 연약한 사람을 영접하여 섬기는 것이요 또한 다른 그룹의 사람도 사랑으로 영접하는 것입니다.

 

진짜 소금은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뭇 사람 중에 가장 끝이 되셨습니다. 뭇 사람을 섬기셨습니다. 어린 아이와 같이 섬기기 어려운 사람도 섬기셨습니다. 십자가에 달려 목숨을 주시기까지! 예수님의 제자된 우리는 마땅히 이 길을 따라가야 합니다. 소금으로 녹아서 우리 각자를 통해 우리의 이웃이, 우리 공동체가, 우리 사회가 부패하지 않고 맛있는 공동체가 되도록! 사람들이 하나님과 화목하고 또한 사람들 간에 진정한 화목이 이루어지기까지. 그것이 소금된 제자의 삶입니다.

 

결론적으로, 하나님은 세상에서 위대하다고 하는 사람들을 위대하다 하지 않으십니다. 예수님의 성품을 닮아 뭇 사람의 끝이 되며 뭇 사람을 섬기는 자를 위대하게 보십니다. 우리가 세상의 거짓된 가치관을 버리고 주님이 가르쳐주신 영적인 가치관을 갖기를 기도합니다. 우리가 낮아져 뭇 사람을 섬길 때 우리는 예수님의 형상으로 끝없이 성장합니다. 겸손과 사랑의 사람으로 커 갑니다. 이런 자에게 하나님께서 풍성한 기쁨과 자유함과 생명의 열매를 주십니다. 우리가 연약한 한 사람을 겸손히 섬김으로 예수님을 섬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