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마가복음 16강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는가 말씀/ 마가복음 10:1-31 요절/ 마가복음 10:15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 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그 곳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시고” 갈릴리 사역을 마치신 예수님은 이제 예루살렘을 향해 올라가십니다. 이 길은 고난과 죽음이 기다리고 있는 길입니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하나님을 떠나 멸망으로 가는 인생을 구원하기 위한 위대한 길입니다. 예수님은 그 길을 가는 도중에 여러 사람을 만나시고 세상 원리를 추종하는 제자들에게 하나님 나라 원리를 가르치십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하나님 나라의 구원 원리를 배우고 누가 구원을 받을 수 있는지를 배우길 기도합니다. 1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가버나움을 떠나 사마리아지역을 우회하여 유대 지경과 요단강 건너편으로 가셨습니다. 이곳은 베레아 지역입니다. 예루살렘에 가까워질수록 유대 종교지도자들에 의해 예수님을 죽일려는 계획은 더욱 구체화 될 것입니다. 이번 유월절에 예수님은 자신이 감당할 십자가로 인하여 그 마음이 얼마나 무거우셨을까요? 그럼에도 예수님은 제자들을 대상으로 가르치던데서 다시 전례대로 무리들에게 공개적으로 말씀을 가르치십니다. 그러자 다시 대적자들의 공격에 노출이 되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나아와 그를 시험하여 묻습니다. “사람이 아내를 버리는 것이 옳으니이까?” 이 질문이 왜 예수님께 시험이 됩니까? 당시 이혼문제는 율법학자 사이에 첨예한 논쟁거리였습니다. 모세는 신24:1,2절에서 수치스런 일이 있으면 이혼증서를 써서 내보내라고 했는데, 샴마이학파는 ‘수치되는 일’을 간음으로만 한정하여 간음이외에는 이혼이 안된다고 주장했습니다. 반면 힐렐학파는 ‘수치되는 일’을 남편이 맘에 안드는 모든 것으로 해석하여 아내가 바가지 긁는다거나, 밥을 태운다거나 하면 이혼 사유가 되었습니다. 이혼은 남편 권한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예수님이 어떻게 대답을 하든 신학적 논쟁에 휘말려 반대편측으로부터 공격받을 수 있습니다. 또한 이곳 베레아는 헤롯 안디바의 관할 지역으로 세례 요한이 활동했던 주 무대입니다. 세례요한이 헤롯의 불의한 이혼과 혼인을 비판했다가 처형을 당했습니다. 이혼문제에 관해 아주 예민한 지역이죠. 잘못 대답했다가는 세례요한과 같은 운명에 처해질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어떻게 대응합니까? 대답 대신에 모세가 어떻게 하라고 했는지를 물으십니다. 아까 이혼 논쟁에서 사용되었던 신24:1,2 말씀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던 그들은 거침없이 대답했습니다. “모세는 이혼 증서를 써주어 내어 버리기를 허락하였나이다”(4) 그 당시 여자는 가부장적인 사회에 살면서 소위 ‘인권’이 없었습니다. 여자는 자기 의사와 상관없이 부모의 의해 단지 시집보내어졌습니다. 그러므로 모세가 이 명령을 준 것은 사람들이 임의로 이혼을 못하도록 억제하고, 또 버려진 여자를 보호하기 위해 준 것입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마치 모세가 이혼하는 것을 적극적으로 허락한 것으로 잘못 해석하였습니다. 예수님은 모세가 이혼을 허락한 것은 그 조상들의 마음의 완악함 때문이라며 그들의 죄성을 드러내십니다. 그러시면서 성경적 결혼관을 가르쳐주십니다. 5-9절을 다 함께 읽겠습니다. “창조 때로부터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지으셨으니 이러므로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그 둘이 한 몸이 될지니라 이러한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 하시더라” 예수님은 모세 율법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인간을 창조할 때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결혼에 대해 말씀하심으로, 결혼의 근본적이며 본질적인 원리를 가르쳐주십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남자와 여자로 만드셨습니다. 이는 남자나 여자나 동등한 권리를 가진 독립적인 인격체임을 말해줍니다. 그리고 한 남자와 한 여자가 부모의 보호에서 떠나 둘이 연합하여 한 몸을 이루도록 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결혼입니다. 사람들은 결혼을 남녀 상호간의 계약 관계로 보는 경향이 있는데 그렇치 않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창조 섭리에 의해서 결혼이 시작되었고, 하나님께서 결혼제도를 만드셨습니다. 그러므로 결혼을 통한 부부의 연합은 성결하고 영원한 관계입니다. 인간의 연합 중에서 가장 친밀한 연합입니다. 어떤 과정을 통해 결혼을 했던지간에 결혼의 배후에는 하나님의 신적 권위가 자리잡고 있습니다. 따라서 사람이 인위적으로 나눌 수 없습니다. 서로의 동의하에 합법적 절차를 통해 이혼한다고 해도 하나님의 관점에서는 이혼이 성립되지 않습니다. 이혼은 하나님께서 만드신 창조질서를 파괴하는 범죄요, 하나님의 권위에 도전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그 아내를 버리고 다른 데에 장가드는 자는 본처에게 간음을 행하는 것이요 또 아내가 남편을 버리고 다른 데로 시집가도 간음을 행하는 것이 됩니다(11-12). 이 결혼 원리에는 또 다른 영적 원리의 비밀이 베일에 숨겨져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입니다. 또한 그리스도와 교회와의 관계입니다. 구약은 남편되신 하나님께서 간음한 이스라엘을 끊임없이 찾아와 용서하고 회복시킨 내용을 담아 쓴 사랑의 편지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어떻게 합니까?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완악하여 남편되신 하나님을 반복하여 배반하고 다른 남자에게로 향하였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사랑은 언약으로 맺어진 부부 관계이기에 절대 끊지 않으셨습니다. 여전히 그들을 사랑으로 품으십니다. 호세아서에 보면 하나님은 호세아 선지자에게 창녀인 고멜을 아내로 맞이하게 하십니다. 얼마후 그녀가 집을 나가 다른 남자에게로 갑니다. 그때 하나님은 호세아에게 이런 명령을 하십니다.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이스라엘 자손이 다른 신을 섬기고 건포도 과자를 즐길지라도 여호와가 그를 사랑하나니 너는 또 가서 타인의 사랑을 받아 음녀가 된 그 여자를 사랑하라 하시길”(호3:1) 호세아에게 음녀가 된 그 여자를 다시 데려오라 하십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택한 백성을 끝까지 사랑하십니다. 사도바울은 그리스도인의 구원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내가 그들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요 또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그들을 주신 내 아버지는 만물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요10:28,29)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8:38,39) 우리에게 주신 부부 관계는 참으로 신비한 것입니다. 거기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배울 수 있고, 예수님과 교회와의 관계도 배울 수 있습니다. 우리가 살다 보면 부부 사이에 갈등이 생깁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간단합니다. 하나님께서 짝지어 주셨으니 하나님께 가서 해결해달라고 하면 됩니다. 하나님이 해결책을 가지고 있지 않겠습니까? 우리는 단지 하나님께서 짝지어 주셨다는 하나님의 권위에 순종하면 됩니다. 연합하기에 힘쓰면 됩니다. 그러면 어떤 위기도 극복하게 될 것입니다. 아직 결혼하지 않은 우리 청년들은 결혼하고 가정을 꾸리고자 해야 합니다. 거기에 하나님의 사랑과 영적 세계를 알게 하는 풍성함이 있습니다. 13절을 보십시오. “사람들이 예수께서 만져 주심을 바라고 어린 아이들을 데리고 오매 제자들이 꾸짖거늘” 당시 유대인 아이들은 회당에서 랍비의 축복을 받는 일이 흔히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존경하고 따르는 사람들이 자기들의 아이들을 데려와 예수님의 축복을 받고자 하였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짜증을 내며 “왜 어린 아이를 데려오세요? 사역에 방해되잖아요.”하며 쫓아냈습니다. 이를 보신 예수님을 제자들을 향하여 분노하시고 공개적으로 책망하십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어린 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14) 하나님 나라가 어린 아이와 같은 사람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함께 15절을 읽겠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 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그 곳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시고”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사람이 누구인가?를 가르쳐줍니다. 어린아이와 같이 하나님 나라를 받드는 사람입니다. ‘받들다’는 것은 ‘환영하다’, ‘영접하다’란 뜻입니다. 어린아이들처럼 예수님을 영접하고 순수하게 받아들이는 사람입니다. 자기는 아무것도 아니고 오직 긍휼과 자비를 베풀어 주어야 살 수 있는 존재라는 고백입니다. 절대적으로 의존의 존재라는 것입니다. 어린 아이에게서는 아무것도 나올게 없습니다. 먹을 것도 안나오고, 다른 사람을 도울수도 없습니다. 이런 어린 아이같은 마음을 가진 사람은 심령이 가난합니다. 겸손합니다. 하나님을 전폭적으로 신뢰하며 의존합니다. 이처럼 누구든지 어린아이와 같은 믿음있는 태도로 하나님 나라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결단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하나님 나라는 인간의 업적이나 공덕에 의해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그리스도를 믿고 의지하는 자에게 하나님께서 은혜로, 선물로 주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기에게 나아온 어린 아이들을 안고 그들 위에 안수하시고 축복하셨습니다. 17절부터 22절까지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길에 나가실새 한 사람이 달려와서 꿇어 앉아 묻자오되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 네가 계명을 아나니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거짓 증언 하지 말라, 속여 빼앗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였느니라 그가 여짜오되 선생님이여 이것은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켰나이다 예수께서 그를 보시고 사랑하사 이르시되 네게 아직도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가서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시니 그 사람은 재물이 많은 고로 이 말씀으로 인하여 슬픈 기색을 띠고 근심하며 가니라” 청년이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질문합니다. 청년은 선한 일을 통해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2퍼센트의 부족한 선을 채우면 구원을 얻지 않을까? 생각하고서 지금 질문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청년의 관심사인 ‘선’을 주제 삼아 대화를 풀어가십니다. 그렇다면 선한 사람은 누구인가? 사람은 선할 수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선하십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어렸을때부터 율법을 가르침 받고 지키면 영생에 이른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렇다면 그가 율법을 얼마나 잘 지켰는가? 돌아보자고 하십니다. 예수께서 청년에게 질문하십니다. 그 질문은 십계명중 이웃 사람에 관한 계명을 나열하시고서 이것들을 지켰는가를 묻습니다. 그러자 청년은 ‘아, 그거~ 어려서부터 배웠고 다 지켰습니다’ 합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아, 그래~. ‘다 지켰다고’ 하는데~ 진짜 다 지켰는가 보자” 하시며 그 사실이 허구인 것을 알게 하시고자 ‘한가지 부족한 것’을 말씀하십니다. 사실 한 가지만 안 지켰겠습니까? 우리의 일거수 일투족을 다 아시는 주님께서 보실 때 수없이 많은 것을 지키지 않았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대표적인 것 한 가지만 끄집어 내십니다. 그것은 재물에 관한 것입니다. ‘한가지 부족한 것이 있는데 내 제물을 팔아 가난한 자에게 주라 그러면 하늘에서 보화가 있고 그러고 나서 나를 따르라’ 방향을 주십니다. 이것을 통해서 그 사람이 ‘다 지켰다’는 것이 허구임을 드러내시고 그 청년이 영생을 얻는데 가장 큰 장애물인 재물을 걷어내도록 하십니다. 그러나 그는 재물이 많은고로 슬픈 기색을 띠고 근심하며 떠났습니다. 그는 결국 예수님이 제시한 이웃사랑에 관한 실천 한가지를 행할 수 없음이 드러났습니다. 이것이 말해주는 것이 무엇입니까? 사람이 행위로는 구원받을 수 없음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제자들도 놀랐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합니다. “애들아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낙타가 바늘귀로 나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애들아(children)’ 이 말은 아까 어린아이처럼 천국을 받드는 제자들을 말했을 수도 있고요, 아직 영적으로 어린 제자들을 표현했을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당시 관용구로 쓰던 ‘낙타가 바늘귀로 나간다’는 말을 인용하여 부자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어렵다고 하십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에 심히 놀랍니다. 그리고 제자들끼리 서로 말합니다. 안드레가 말하길 “베드로형, 그러면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을까?” 베드로가 말하길 “그러게 말이야. 예수님의 말씀이 도통 이해가 안돼” 제자들이 왜 이렇게 서로 말했을까요? 당시 유대인들은 부자가 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축복해주셔서 된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그 청년은 율법을 어려서부터 알고 지킨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생각하길 이 청년이야말로 영생에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으로 여겨졌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구원얻기 힘들다고 예수께서 말씀하시니 ‘그렇다면 누가 구원을 얻을수 있단 말인가?’ 이렇게 생각했던 것입니다. 깜짝 놀란거죠. 그 당시 유대인들의 구원관을 엿볼 수 있습니다.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는가?’ 이 의문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이 무엇입니까? 27절을 읽습니다. “예수께서 그들을 보시며 이르시되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는 그렇지 아니하니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 아무도 구원을 얻을 수 없다고 합니다. 제자들의 질문은 실은 잘못된 질문입니다. 구원은 얻는 것이 아닙니다. 받는 것입니다. 사람이 스스로, 내 힘으로, 내 노력으로 얻을 수 잇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실 때 받는 것입니다. 은혜로, 선물로 주실 때 받는 것입니다. 사람은 할 수 없지만 하나님은 다 하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만이 구원의 주체가 되십니다. 부자든 가난한 자든 하나님의 뜻대로 구원을 주십니다. 이것을 예수님이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부자청년 이야기를 잘못 해석하여 ‘우리가 우리의 모든 재물을 팔아 가난한 자에게 나누어 주고 구원을 얻읍시다’ 이런 식으로 적용하면 본문과 동떨어진 이야기가 됩니다. 사람으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다고 분명히 예수님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이 청년을 돕기위해, 이 사람의 문제가 무엇인지를 알게 하기 위해, 그 청년의 방식으로 접근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의 행위로는 절대 구원받지 못합니다. 엡2:8,9절을 말합니다.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 그러자 베드로가 불안해진 것 같습니다. 자기들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른 것 같은데 이것으로 구원의 보증이 되지 않은 것 같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말합니다.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랐나이다”(28) 과연 베드로를 포함하여 제자들이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랐을까요?! 예수님은 이에 대한 대답을 하십니다. 29-30절을 읽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머니나 아버지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현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식과 전토를 백배나 받되 박해를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그 당시 예수님을 따르는 것은 가족 중심의 유대교 공동체를 포기하고 그들을 떠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위해 가족을 뒤로 하고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은 육체의 가족이 아닌 하나님 나라의 가족의 일원으로 영접이 될 것입니다. 그 결과 박해가 주어지지만 동시에 하나님 나라의 복이 주어집니다. 현세에서 하나님 나라 백성과 가족이 되는 보상이 주어집니다. 그리고 내세에는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다고 하십니다. 부정의 부정은 강한 긍정입니다. 반드시 영생을 받게 된다고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보증해 주십니다. 그러면서 경계의 말씀도 하십니다. 제자들은 이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으니 당연히 큰 보상을 받아야 된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생각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너희들이 재물뿐 아니라 너희 모든 것, 너희 생명까지 버린다고 해서 너희 구원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됐냐? 아니다. 구원얻는데 1도 도움이 안됐다. 너희 공로는 하나도 없다. 그 구원의 공로는 하나님의 사랑,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내어주심으로 온전히 100% 하나님의 은헤로 이루어진 것이다. 그러므로 주와 복음을 위해 네가 가진 모든 것, 네 인생 모든 것을 주께 드려서 충성을 다 했다 할지라도, 모든 일을 끝낸 후 ‘나는 무익한 종입니다’ 이런 고백밖에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만약에 ‘내가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이 수고했으니 더 보상 받아야해’ 이렇게 나를 내세우는 순간 ‘나중’이 된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처럼 인생 마지막에 ‘나는 죄인중에 괴수다’ 이런 고백을 하는 사람이 ‘먼저’가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앞에서 어린 아이처럼 겸손할 수 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나의 구원을 위해 내가 한 것이 아무것도 없기 때문입니다. 오직 주님의 은혜로 된 것이고, 주님의 희생으로 된 것이고, 주님의 한량없는 사랑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내 모든 것을 다 팔아도 절대 얻을 수 없는 하늘의 보화, 영생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것으로 족합니다. 더 이상 필요한 것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만족하며 기뻐하며 감사해야 하겠습니다.
결론입니다.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까? 아무도 자기 힘으로는 얻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주님의 십자가 대속의 사랑으로, 그 분의 깰 수 없는 언약으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린아이처럼 하나님 나라를 받들어야 합니다. 전적으로 무능하고 타락한 존재임을 자각하고 하나님의 능력과 긍휼을 의존해야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의 은혜가 부어져 구원을 내가 얻는 것이 아니라, 선물로 받게 됩니다. 우리에게 주신 이 영생은 이 세상 그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는 가장 소중한 것입니다. 이를 아는 우리는 이제부터 이 세상 원리를 따라 살지 않고 하나님 나라의 원리를 따라 살아야겠습니다. 우리에게 이미 주신 구원을 예수님을 따라가며 완성해 가길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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