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마가복음 17강 섬기러 오신 예수님 말씀 / 마가복음 10:32-52 요절 / 마가복음 10:45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마가복음 8:22부터 오늘 본문이 끝나는 10:52까지는 예수님이 갈릴리에서 에루살렘으로 이동하시면서 제자들을 가르치신 내용입니다. 예수님이 가르치신 제자도(弟子道)의 마지막 부분이 오늘 말씀입니다. 그 내용은 한 마디로 예수님과 같이 제자들도 "섬기는 종"이 되라는 말씀입니다. 실상 예수님은 지난 9장에서도 누구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뭇 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한다고 가르치셨습니다. 오늘 말씀에서 더 나아가 섬기는 “종”이 되라고 하십니다. 이와 같이 강조하시는 것은 그만큼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가 섬기는 종의 삶을 살고자 소원하기를 기도합니다. 1. 십자가와 부활의 길을 가시는 예수님 32절입니다.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에 예수께서 그들 앞에 서서 가시는데 그들이 놀라고 따르는 자들은 두려워하더라 이에 다시 열두 제자를 데리시고 자기가 당할 일을 말씀하여 이르시되." 예수님은 예루살렘에서 일어날 일을 잘 아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버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고자 굳게 결심하시고 그 길을 앞서 가십니다. 33,34절입니다.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에 올라가노니 인자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겨지매 그들이 죽이기로 결의하고 이방인들에게 넘겨 주겠고 그들은 능욕하며 침 뱉으며 채찍질하고 죽일 것이나 그는 삼일 만에 살아나리라 하시니라."(33,34) 예수님의 수난 예고는 마가복음에 세 번 기록되어 있습니다. 8:31, 9:31, 그리고 10:33절입니다. 첫 번째 예고는 베드로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한 변화산에서였습니다. 예수님은 두 번째 예고에서 수난의 장소가 예루살렘임을 말씀하셨습니다. 본문의 세 번째 예고에서는 예수님이 이방인들에게 넘겨지실 것을 말씀하십니다. 이방인들이라면 로마인들을 의미합니다. 이는 예수님이 로마인들의 사형 방법인 십자가에서 죽임 당하실 것을 예고하신 것입니다. 십자가 형벌은 심히 두려운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담대한 마음으로 그 길을 앞서 가십니다. 예수님은 이방인들이 자신을 "능욕하며 침 뱉으며 채찍질하고 죽일 것"이라고 아주 구체적으로 말씀하십니다. 마치 십자가 사건 이후에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어떤 사람이 자기의 죽음을 이와 같이 정확히 예고할 수 있단 말입니까? 그리스도 예수님은 그의 신적인 지식으로 이와 같이 예고하신 것입니다. 또한 세 번 예고 때마다 예수님은 자신이 사흘 만에 부활하실 것을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이 부활의 믿음으로 십자가 고난의 길을 가십니다. 우리도 그저 이를 악물고 십자가만 지고자 하면 눌립니다. 끝까지 질 수 없습니다. 그러나 십자가 뒤에는 부활의 영광이 있습니다. 주님을 위해 고난을 질 때 반드시 영광으로 갚아주십니다. 종교개혁자 존 캘빈은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자신을 쏟아 부었습니다. 설교나 저술 작업을 위해서 밤새도록 연구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이런 그는 일생동안 많은 병, 곧 두통, 천식, 관절염, 결석, 악성 폐렴, 늑막염 등을 앓았습니다. ‘걸어 다니는 병원’이라고 불릴 정도였습니다. 그는 세상을 떠나기 전에 병으로 고난이 많았지만 로마서 8:18절 말씀을 붙들고 모든 고통을 이겨냈습니다.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느니라." 부활의 영광을 바라본 것입니다. 우리도 부활의 영광을 바라보며 주님이 가신 십자가의 길을 잘 가기를 기도합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와 같은 수난 예고를 왜 반복하여 말씀하실까요? 이는 첫째로 그 일이 일어날 때 제자들이 실족하지 않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무엇보다 예수님은 자신이 이를 위해 오셨다는 것을 제자들에게 심고자 하신 것입니다. 구약시대 유대인들은 그리스도가 세상에 한번 오시는 것으로 믿었습니다. 왕이요 심판주로 오시는 것으로 믿었습니다. 이런 그들의 메시야관은 다분히 민족적이며 세속적이었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가 로마를 몰아내고 영광스런 다윗 왕국을 재건하실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았습니다. 그러나 실상 그리스도가 오셔서 하실 일은 그런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스라엘을 로마로부터 해방시키는 것이 아니라, 온 인류를 해방시키는 것이었습니다. 어디로부터? 죄로부터! 죄와 그 결과인 사망으로부터! 인류를 죄로부터 구원하시기 위해 그리스도가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이를 위해 예수님은 속죄의 피를 십자가에서 흘리셔야 되었습니다. 그리고 사흘 만에 부활하사 사망의 권세를 영원히 파하셔야 되었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사명이요 이것이 복음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마음에 어찌하든지 이 복음을 심고자 하셨습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따르면서도 세상적인 성공과 복을 구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고자 하시는 것은 그 어떤 세상의 복보다 훨씬 더 탁월하고 영원한 복인 죄로부터의 구원입니다. 하지만 제자들은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의 메시지를 절대로 받아들이지 않는 자세였습니다. 예전에 우리 모임에 와서 성령론 강의를 하셨던 한 교수님의 말씀이 생각이 납니다. "사람들은 죄악의 꿀 마지막 한 방울까지 다 먹을 때까지 회개하지 않는다." 마치 제자들이 예수님의 복음을 끝까지 받아들이지 않고자 귀를 틀어막고 있던 것과 같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무엇보다 먼저 예수님을 통해 받은 이 죄사함과 구원의 은혜를 깊이 감사해야겠습니다! 그리고 예수님 믿고 세상적인 복을 받고 형통한다는 것보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죄와 사망에서 구원을 얻는다는 이 복음을 힘써 전해야겠습니다. 2.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35절입니다.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이 주께 나아와 여짜오되 선생님이여 무엇이든지 우리의 구하는 바를 우리에게 하여 주시기를 원하옵나이다." 이들의 요청하는 바가 놀랍습니다. 무엇을 구하든지 다 들어달라는 것입니다. 이들이 그와 같이 요청할 수 있었던 근거가 무엇일까요? 아마 그들이 베드로와 함께 3명의 수제자로 인정받았기 때문일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그들의 모친은 살로메로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의 친자매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래서 마태복음에는 그들의 어머니가 직접 나와서 예수님께 부탁하는 것으로 나옵니다. (마20:21) 그의 어머니가 예수님의 육신의 이모이니 예수님이 무엇이든지 들어주실 것을 기대한 것입니다. 그들이 요구한 것이 무엇입니까? 37절을 보면 예수님의 영광중에서 자기들을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해 달라는 것입니다. 곧,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시어 그 놀라운 권능으로 로마를 몰아내시고 새 정부를 세우실 때, 자기들을 제 2인자, 3인자로 세워달라는 것입니다. 그들의 부탁은 실로 황당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런 그들도 잘 이해하시며 영광을 얻기 전에 먼저 고난을 받아야만 한다고 하십니다. 곧, 잔을 마시고 세례를 받아야 된다 하십니다. 그들은 예수님과 같은 십자가의 길을 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두 제자는 그저 영광만 얻을 수 있다면 무엇이라도 못하랴 하며 “할 수 있나이다”라고 대답합니다. 그들은 메시아 왕국 건설을 위한 충신들의 고난 정도로 생각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그들을 감당하시며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내가 마시는 잔을 마시며 내가 받는 세례를 받으려니와 내 좌우편에 앉는 것은 내가 줄 것이 아니라 누구를 위하여 준비되었든지 그들이 얻을 것이니라." 그들이 과연 고난의 잔과 죽음의 세례를 받을 것임을 예언하십니다. 이 예언대로 나중에 야고보는 사도들 중의 첫 순교자가 되고 요한은 밧모 섬에 유배되어 가장 늦게까지 살며 주님의 고난에 동참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러할지라도 예수님의 영광의 보좌의 좌우편에 앉는 것은 오직 성부 하나님이 정하실 일이라고 하십니다. (40) 성자 하나님은 성부와 동등한 존귀와 권능을 가진 분이십니다. 그러나 겸손하신 예수님은 아버지 하나님 앞에서 때때로 자기의 신성을 제한하십니다. (막13:32) 좌우편에 앉게 하는 권한을 아버지께 맡기십니다. 그러면 누가 그 자리에 앉게 될까요? 겸손히 섬기는 사람들, 뭇사람의 종이 되는 사람들, 자기는 그런 자리를 얻을 자격이 도저히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앉게 될 것입니다.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님께 나아가 청탁할 때에 다른 제자들은 그 사실을 잘 몰랐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큰 소리로 대답하시자 모든 것이 드러났습니다. 이에 다른 열 제자의 반응이 어떠하였습니까? 그들은 듣고 야고보와 요한에 대하여 화를 내었습니다. "아니, 너희들, 엄마 찬스로 이렇게 인사 청탁을 할 수 있는 거야?" 이런 제자들을 보시는 예수님의 마음이 어떠했을까요? 제자들은 지난 3년 반 동안 예수님을 따르며 배웠지만 그들의 가치관은 여전히 세상적이었습니다. 인간적인 야심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런 그들을 감당하시며 소망 중에 키우십니다. 그들은 나중에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변화됩니다.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을 전하는 사도들로 귀히 쓰임 받게 됩니다. 3. 인자가 온 것은 42,43절입니다. "예수께서 불러다가 이르시되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그들을 임의로 주관하고 그 고관들이 그들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당시 이방인의 집권자들은 백성들을 임의로 주관하고 고관들은 권세를 부렸습니다. 갈릴리 분봉왕 헤롯 안티파스는 임의로 세례요한을 가두었습니다. 살로메의 춤의 대가로 요한의 목을 내어주었습니다. 원칙과 기준이 없이 권력을 휘둘렀습니다. 이것이 당신 집권자들이 권세를 사용하는 방식이었습니다. 집권자는 다스리는 자입니다. 집권자들이 임의로 다스리며 자기 권세를 부리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는 무엇보다 자기들에게 권세를 주신 분이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영적 권세든, 세상적인 권세든 모든 권세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옵니다. 모든 집권자들은 자기 머리 위에 하나님이 계심을 알아야 합니다. 자기들이 하나님의 권세를 일시적으로 위임 받은 청지기요 종임을 알아야 합니다. 권세는 양날의 칼과 같습니다. 그것을 잘 사용하면 백성들이 정의와 평화가운데 지냅니다. 그러나 잘못 사용하면 자기를 해치고 백성들을 해칩니다. 우리나라의 정치 지도자로부터 우리 모임의 각 책임자에 이르기까지 반드시 알아야 할 것이 이것입니다. 다스린다는 것은 사람을 누르고 그 위에 군림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맡겨주신 사람들을 섬기는 것입니다. 자기가 왕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그의 머리 위에 계시고, 그 분의 뜻대로 나라와 모임을 섬겨야 합니다. 하나님이 왕이십니다. 우리 인간은 왕 되신 하나님의 뜻을 섬기는 청지기요 종입니다. 이러한 권세관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고린도 성도들에게 말합니다. "우리가 우리를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주 되신 것과 또 예수를 위하여 우리가 너희의 종 된 것을 전파함이라" (고후4:5) 바울은 종으로서 고린도 성도들을 섬겼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으니 이러한 권세관을 갖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달라야 합니다. 44절입니다.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을지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을지니?” 무슨 말씀인가요? 제자들은 다른 가치관을 가져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높은 사람이 된다, 으뜸이 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를 바르게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높은 사람, 으뜸 되고자 하는 자는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여기서 섬기는 자는 원어로 '디아코노스'인데 '집사', '하인'을 뜻합니다. “디아코노스”의 본뜻은 먼지를 뒤집어쓰고 일한다는 것입니다. 곧, 먼지를 뒤집어쓰며 일하며 섬기는 자입니다. 세상에서는 먼지를 만지지도 않는 사람이 큰 자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보시기에 큰 자는 낮아져 섬기는 자입니다. 낮아져 섬긴다는 것은 본인의 능력이 안 되고 게을러서 어쩔 수 없이 하인 역할을 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얼마든지 다른 사람처럼 높은 자리에 앉을 수 있으나 자발적으로 낮아져 섬긴다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합니다. 여기서 종은 “둘로스”로 그야말로 로마 시대 신분상 가장 낮은 위치에 있는 자입니다. 당시 종은 걸어다는 물건으로 취급을 받았습니다. 자발적으로 낮아져 그와 같은 위치에 처하여 다른 사람을 섬기는 자가 으뜸 된다는 것입니다. 왜 이렇게 섬기는 종으로 사는 것이 큰 자의 삶이요 으뜸 된 자의 삶입니까? 이는 이러한 삶을 통해 다른 사람들의 생명을 살리기 때문입니다. 자기 자신만을 위해 사는 삶은 누구나 살 수 있습니다. 자기 욕망대로 살면 됩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을 섬기며 그들의 행복과 성공을 위해 사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심지어 그들을 위해 나의 생명까지도 희생하며 섬기는 것은 결단코 쉽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운 마음, 하나님의 이타적인 사랑이 있어야만 가능합니다. 그러기에 그러한 삶을 사는 사람이 하나님을 닮은 사람으로서 가장 으뜸 되는 것입니다. 45절입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NIV에는 "For even the Son of Man..." 라고 되어 있습니다. "For"는 앞의 절 44절의 이유가 45절이라는 말이고, “even”이라는 말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일지라도” 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제자들이 섬기는 자요 모든 사람의 종으로 살아야 하는 이유는, 성자 하나님이신 예수님조차도 그런 삶을 사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그런 섬기는 종의 인생을 사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이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시기 위함입니다. 예수님의 삶을 한 마디로 말한다면 순종의 삶이셨습니다. 예수님조차도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섬기는 종으로 사셨는데, 예수님의 제자들은 마땅히 그렇게 살아야 되지 않겠는가 하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실로 많은 사람을 섬기셨습니다. 가정에서는 어머니와 동생들을 섬기셨습니다. 예수님은 죄로 말미암아 무기력하게 된 중풍병자도 섬기시고, 이기심으로 병든 세리도 섬기시고, 반항심으로 병든 거라사 광인도 섬기셨습니다. 예수님은 세상 욕심으로 가득 차 있던 제자들을 끝까지 품고 섬기셨습니다. 제자들의 발을 닦으시기까지 섬기셨습니다. 좋은 사람, 선한 사람을 섬기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거스르는 사람, 자기를 해치는 사람, 은혜를 배반하는 사람까지도 섬기셨습니다. 예수님의 섬기는 삶의 절정은 죄인들을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 곧 대속의 죽으심에 있습니다. 이 예수님의 희생으로 말미암아 많은 죄인들이 생명을 얻었습니다. 저와 여러분도 모두 예수님의 섬김의 열매로 새 생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어쩔 수 없어서 섬기신 것이 아닙니다. 도덕적, 윤리적인 본을 보여주고자 하신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은 섬기는 것을 인생 목적으로 삼아 세상에 오셨습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라고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자기 목숨을 주기까지 섬기는 것이 예수님의 인생목적이었습니다. 이러한 인생목적이 분명하지 않으면 낮아져 섬길 때 손해의식이 듭니다. 그러나 섬기는 것을 목적으로 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섬기는 일이 기쁨이 되고 섬김으로 행복합니다. 섬기는 종의 삶이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삶입니다. 하나님이 가장 인정하시는 큰 자의 삶, 으뜸이 되는 삶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당장 이 놀라운 진리를 영접하지는 못할지라도 분명하게 가르치셨습니다. 나중에 성령 하나님이 오셔서 예수님이 가르치신 모든 것을 그들로 깨닫게 하십니다. 그들로 예수님과 같이 섬기는 종의 인생을 살게 하십니다. 46-52절에서 예수님은 소경 바디매오를 섬기십니다. 저자 마가가 이 스토리를 여기에 배치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이는 진정으로 눈 뜬 사람의 삶이 무엇인가를 말하고자 함입니다. 신앙 공동체에 들어와서도 세상적인 가치관으로 높아지고자 하고 군림하고자 하는 것은 아직 영적인 눈을 뜨지 못한 것입니다. 예수님에 의해 눈을 뜰 때 참으로 어떤 삶이 으뜸 되는 삶인지를 밝히 보게 됩니다. 지난주 언론에 에티오피아 유사무엘 선교사님에 관한 기사가 실렸습니다. 30년 전에 전문의 자격을 따자마자 우간다로 나아가셔서 지금까지 우간다와 에티오피아에서 의료사역을 하고 계십니다. 가장 열악한 환경에서 현지인들을 치료하며 섬기십니다. 그는 병들어 죽어가는 아프리카 사람들의 종과 같이 되어 그들을 섬기며 청춘을 바쳤습니다. 이번에 JW성천상을 받게 되었습니다. 선교지에서 30년! 이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고국을 떠나 물질문제, 건강문제, 제자양성 문제 앞에서 선교지에서 사는 것 자체가 마음에 큰 스트레스입니다. 유사무엘 선교사님은 선교지에서 청춘을 다 바치고 이제 백발이 되었습니다. 사실 이 분외에도 우간다의 임누가 선교사님, 강리빙스톤 선교사님 등 모두 한국에서 얼마든지 잘 살 수 있는 의사들입니다. 예수님의 섬김의 정신을 본받아 아프리카에 나아가 일생을 바쳐 섬기고 계십니다. 많은 희생 가운데서도 예수님의 섬김의 본을 가장 잘 따른 사람은 아마도 미국 최초의 선교사 아도니람 저드슨일 것입니다. 그는 인도와 미얀마에 나아가 일생을 헌신하였습니다. 복음을 전하고 성경번역을 하였습니다. 미국 간첩으로 오해를 받아 수년간 감옥에서 고생하였습니다. 동역하는 아내와 자식들이 모두 죽어 미얀마 땅에 묻혔습니다. 그의 거처 근처에 여러 개의 무덤이 있었습니다. 그의 전기를 읽어보면 참으로 선교사로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깊은 울림이 있습니다. 이러한 사람들의 삶은 낮아져 자기 생명을 내어준 비범한 삶입니다. 큰 자의 삶, 으뜸 되는 삶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이런 섬기는 종의 길을 가야 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사람들에게 위대한 사람으로 인정받기 위해서? “아, 저 사람 참 겸손하구나.. 스스로 낮아져 종이 되어 섬기는구나!”하는 칭찬을 받기 위해서? 참된 자아실현을 위해서? 아닙니다. 우리가 이런 섬기는 종의 길을 가야 되는 이유는 그것이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뜻이요, 하나님께서 가장 기뻐하시는 삶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창조주이십니다. 우리의 주인이요 아버지시요 왕이십니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처럼 절대적인 가치가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우리의 존재 목적이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것입니다. 특히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았습니다. 거룩하시고 위대하신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은 우리는 누구나 위대한 삶을 살기 원합니다. 으뜸 되기 원합니다. 으뜸 되고자 하는 것이 잘못이 아닙니다. 모름지기 다 으뜸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올바르게 으뜸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낮아져 섬기는 종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아들들로 받아들여진 우리의 마땅한 삶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셔서 일생을 섬기는 종의 인생을 사시고 자기 목숨을 대속물로 내어주셨습니다. 이로써 하나님을 가장 기쁘시게 하셨습니다. 제자된 우리들의 나아갈 길을 명확히 제시해 주셨습니다. 가장 존귀한 예수님이라도 이 길을 가셨는데 우리도 마땅히 이 참 사랑의 길, 진정으로 위대한 삶의 길을 가야 되겠습니다. 우리가 예수님과 같이 섬기는 종으로 사는 것을 우리의 인생 목적으로 삼기를 기도합니다. 그러면 마지막으로, 우리가 어떻게 이런 길을 갈 수 있을까요? 우리가 이러한 삶을 살기로 결단한다고 되는 것은 아닙니다. 죄악된 본성을 갖고 있는 우리는 이러한 인생 방향을 영접하기조차 힘듭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처럼 부담을 느끼고 알레르기 반응까지 나옵니다. 이런 우리가 어떻게 섬기는 종의 삶을 살 수 있을까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합니다. 감사한 것은 우리 안에는 예수님이 살아계십니다.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빌1:21a)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빌2:13) 이 예수님이 나의 삶을 살아내시도록 할 때 우리는 거룩한 소원을 갖게 되고 거룩한 삶을 살게 됩니다. 예수님이 성령으로 내 안에 사시도록 하기 위해서 우리가 할 일이 무엇일까요? 이는 하나님의 말씀이 늘 마음에 거하게 하며 말씀이 나를 다스리게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안에 살아서 거할 때 성령께서 우리를 점차로 변화시켜 가십니다. 우리에게 거룩한 소원을 주십니다. 소원과 열정을 갖고 낮아져 섬기는 삶을 살게 하십니다. 나로 하여금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하는 마음을 주시고, 섬기는 종의 삶을 기쁨으로 살게 하십니다. 영적인 세계로 날마다 더욱 깊이 인도해주십니다. 주님과의 친밀한 사귐에서 나오는 행복을 누리게 하십니다. 결론적으로, 예수님은 제자도 중에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이는 다른 사람을 섬기는 삶이요, 모든 사람의 종이 되는 삶입니다. 예수님이 친히 그러한 삶을 사셨습니다. 성령께서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으로부터 이미 받은 대속의 은혜에 감사하여 일생 동안 섬기는 삶을 살 수 있도록 해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모든 사람의 종의 되어 죽어가는 생명을 구하는 일을 힘써 섬길 수 있도록 도와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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