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메세지

제목2024년 마가복음 19강 모퉁이의 머릿돌(마가복음 11:27-12:17)2024-08-13 21:08
작성자

2024년 마가복음 19강 메시지

모퉁이의 머릿돌

 

말씀/ 마가복음 11:27-12:17

요절/ 마가복음 12:10,11 “너희가 성경에 건축자들이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이것은 주로 말미암아 된 것이요 우리 눈에 놀랍도다 함을 읽어 보지도 못하였느냐 하시니라

 

오늘 말씀은 권위에 관한 말씀입니다. 권위란 하나의 권리입니다. 주어진 상황에서 결정을 하거나 행동을 취할 수 있는 권리죠. 예수님께서 하늘로 승천하시면서 제자들에게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다’(28:18)고 하셨습니다. 만물의 통치권이 예수님께 있습니다. 권위에는 복종이 따릅니다. 그에 따라 질서 유지가 되는 것이죠.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후 성전에서 종교지도자들과 갈등을 하십니다. 그 배경에는 권위 문제가 있었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인간의 권위에 대해서, 그리고 예수님의 권위에 대해서 한번 생각해보겠습니다. 이 가운데서 하나님께서 권위를 어떻게 세우시고, 쓰시는가? 배우길 기도합니다.

 

27절을 보십시오. 예루살렘 성전에서 거니시던 예수님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과 마주칩니다. 이 세 부류의 사람들은 산헤드린 공회원들입니다. 오늘날로 하면 국회의원에 해당이 됩니다. 그들은 이스라엘의 최고 권력기관으로 모든 법을 만들고 집행까지 하였습니다. 그들은 그들이 가진 권위를 가지고서 예수님께 묻습니다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느냐? 누가 이런 일 할 권위를 주었느냐?” 그들이 묻고 있는 이런 일이란 어제 예수께서 성전에서 매매하는 자들을 쫓아내시고 한 바탕 소동을 일으킨 사건을 말합니다. 자신들이 공회의 권위로 성전에서 장사할 수 있도록 구역을 마련하고 장사하는 이들에게 특권을 주었는데~ 예수가 그 권위에 도전했다는 것입니다. “우리 권위보다 더 높은 권위가 없는데 도대체 네가 뭔데~ 우리 허락도 없이 장사꾼들을 쫓아내며 상을 엎으며 이 소란을 피웠단 말인가?” 항의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무슨 권위로 그 일을 하셨습니까? 이미 예수님은 어제 성전을 깨끗케하시면서 그 권위의 근거를 밝히셨습니다. “이에 가르쳐 이르시되 기록된 바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칭함을 받으리라고 하지 아니하였느냐 너희가 강도의 소굴을 만들었도다(11:27).” 예수님은 이사야56:7절 말씀을 제시하시며 하나님의 권위를 가지고서 행하셨음을 분명히 그들에게 알렸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의 행동을 하나님의 권위로 인정하기가 싫었습니다. 그들의 마음을 잘 아시는 예수님은 그들의 마음을 드러내는 역질문을 하십니다. “요한의 세례가 하늘로부터냐 사람으로부터냐 내게 대답하라 그러면 말해주겠다”(30) 그들이 서로 의논합니다. 만약 하늘로부터라 하면 어찌하여 그를 믿지 않았느냐?’라며 책망을 받을 것입니다. ‘사람으로부터라할까 하였으나 모든 사람이 세례요한을 참 선지자로 여기므로 백성을 두려워하였습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딜레마에 빠졌습니다. 마침내 대답을 포기합니다. “우리가 알지 못하노라그러자 예수님도 말씀하십니다. “나도 말하지 않겠다”(33).

 

,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당신의 권위를 세례 요한의 권위와 연계시킨 이유가 무엇일까요? 과거 세례요한이 요단강에서 회개의 세례를 베풀 때 산헤드린 공회에서 진상조사단을 파견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 세례 요한이 그들을 향하여 이렇게 증언하였습니다. “나는 너희로 회개하게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베풀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푸실 것이요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곳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하였습니다(3:5-12). 예수님의 사역은 세례요한의 사역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았으며, 요한은 예수님을 내 뒤에 오시는 분으로 증언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세례요한의 사역을 계승하셨습니다. 그러기에 그들이 세례요한의 권위를 인정한다면 예수님의 권위도 인정할 수 밖에 없습니다. 세례요한이 요단강에서 회개의 세례를 행한 일이나, 예수님이 성전을 깨끗케 하신 일, 이 모두는 하나님의 전권으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권위보다 더 높은 권위를 받아들이고 자신들이 가진 권위를 포기해야 마땅합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나의 권위를 하나님께 양도하는 것입니다. 이제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입니다. 혹시 우리도 이들처럼 나의 권위를 지키기 위해 나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있지는 않는가? 우리 자신을 돌아보아야 하겠습니다.

 

, 그렇다면 그들이 하나님의 권위에 도전하게 된 이유가 무엇일까요? 예수님은 반항하는 소작농 비유를 통해 그들의 문제를 깨우쳐 주고자 하십니다. 12장 말씀입니다.

 

어떤 사람이 포도원을 만들고 울타리를 치고 즙 짜는 틀을 만들고 망대를 지어서 농부들에게 세로 주고 타국에 갔습니다. 주인은 때가 이르매 농부들에게 소출 얼마를 받으려고 한 종을 보냈습니다(12:1-2).

 

주인이 왜 소출 얼마를 받고자 하는 걸까요? 그것은 주인과 소작농들과의 관계를 이어주는 끈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주인과 소작농들의 정체성을 확인시키는 표시입니다. 소작농이 세를 내지 않으면 어떻게 됩니까? 자기 정체성을 잃어버려요. 자기가 주인 인줄로 착각해요. 그러면 주인과 소작농과의 관계성이 깨집니다. 소출의 얼마를 내야만 자기 정체성도 지키고 주인과의 관계성도 이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소작농들은 어떻게 합니까? 소출을 받으러 온 종을 잡아서 심하게 때려서 거저 보냈습니다. 정말 소작농으로서 해서는 안 될 일을 합니다. 그럼에도 주인은 어떻게 하죠? 또 다른 종을 보냅니다. 농부들이 이번에는 종의 머리에 상처를 내고 능욕합니다. 주인은 또 다시 종을 보내지만 농부들은 그 종을 죽입니다. 또 그 외 많은 종을 때리고 죽입니다. 소작농들의 행태는 더욱 반항적이며 더욱 폭력적이 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에 따라 주인에게 더 큰 수모와 능욕을 안겨다 줍니다. 주인은 상황의 심각성을 인지하고서 자, 무엇을 합니까? 자기의 사랑하는 아들을 최후의 수단으로 보냅니다. 그러면서 내 아들은 존대하리라.” 합니다. 이런 주인이 이해가 되나요? 그동안 이렇게 험한 꼴을 보고서도 하나 밖에 없는 자기 사랑하는 아들을 보내다니~ 이런 바보같은 짓을 하는 주인이 이 세상에 어디 있단 말입니까? 도대체 왜 이런 바보같은 일을 하는 것일까요? 주인은 자기의 사랑하는 아들을 내어줄 만큼 농부들과의 관계를 회복하기를 간절히 원했던 겁니다. 그들에게 무한한 자비를 베풉니다. 한 말씀이 생각이 납니다.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요일4:10) 화목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습니다. 그런데 농부들은 어떻게 반응합니까? 7절을 읽겠습니다. “그 농부들이 서로 말하되 이는 상속자니 자 죽이자 그러면 그 유산이 우리 것이 되리라 하고.” ‘이는 상속자니 자 죽이자 그러면 그 유산이 우리 것이 되리라그들은 주인의 마음은 안중에도 없습니다. 오직 탐욕에 눈이 멀었습니다. 아들을 죽여 포도원 밖에 내어 던져버립니다(8). 이 얼마나 배은망덕한 행동입니까? 어떻게 그들이 이렇게까지 악해졌을까요? 감사를 잊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주인으로부터 포도원을 맡아 처음 일하게 되었을 때 얼마나 감격하며 감사했습니까? 신의 직장에서 일할 수 있게 된 것 그 자체만으로도 감사함이 충만했어요. 하지만 무더운 여름날, 피땀 흘려 일하다 보니 나의 수고만이 생각났습니다. 탐스러운 열매를 보니 내 수고로 얻은 것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소출의 얼마를 내라고 하니 아까웠습니다. 남 좋은 일 한 것 같은 손해 심정이 들었습니다. 어느덧 그들의 입에는 불평과 원망의 말이 많아졌습니다. 그러자 포도원을 준 주인에 대한 감사가 싹~ 사라졌습니다.

 

감사를 잊어버리면 어떻게 됩니까? 욕심이 생깁니다. 욕심이 생기니 자기 분수를 모르고 날뜁니다. 자기의 정체성을 망각합니다. 잘못된 주인의식으로 충만하여 주인행세를 하게 되고, 결국 주인을 대적하며 주인의 자비와 사랑까지 짓밟아버리게 된 것입니다.

 

이제 주인이 어떻게 하겠습니까? 9절을 읽겠습니다. “포도원 주인이 어떻게 하겠느냐 와서 그 농부들을 진멸하고 포도원을 다른 사람들에게 주리라.” 주인은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군대를 동원하여 농부들을 진멸할 것입니다. 그 포도원을 다른 사람에게 소작으로 줄 것입니다. 결국 농부들의 터무니없는 반항은 단단한 바위에 부딪혀 산산조각이 날 것입니다.

 

이 비유가 무얼 말합니까? 먼저는 하나님의 은혜에도 불구하고 반역과 불순종으로 점철된 이스라엘 역사를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당신과 언약을 맺은 백성들에게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상응하는 열매를 요구하기 위해서 선지자들을 보냈습니다. 예레미야는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 조상들이 애굽 땅에서 나온 날부터 오늘까지 내가 내 종 선지자들을 너희에게 보내되 끊임없이 보냈으나 너희가 나에게 순종하지 아니하며 귀를 기울이지 아니하고 목을 굳게 하여 너희 조상들보다 악을 더 행하였느니라”(7:25,26) 또 말합니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그의 모든 종 선지자를 너희에게 끊임없이 보내셨으나 너희가 순종하지 아니하였으며 귀를 기울여 듣지도 아니하였도다”(25:4)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의의 열매를 전혀 드리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그것을 요구한 선지자들을 핍박하고 잡아 죽였습니다. 이제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까지 죽일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하나님의 심판을 예고하고 있습니다.

 

소출의 얼마를 내지 않고 반항하던 소작농들이 진멸된다는 이 비유는 앞서 예수께서 무화과 나무에서 얼마의 열매를 찾았으나 얻지 못하여 저주를 받아 뿌리부터 말라버린 사건을 연상시킵니다. 또한 성전을 깨끗한 사건도 생각이 납니다. 이제 더 이상 열매가 없는 성전 예배는 끝이 날 것입니다. 유대교와 유대교의 예배는 더 이상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기에 종언을 고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을 죽인 일을 계기로 하나님은 포도원을 다른 사람에게 맡기실 것입니다. 선교사명이 이방인들에게 넘어가게 됩니다.

 

이 말씀이 오늘날 우리에게 주는 의미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과거 이스라엘에 버금가는 한량없는 축복을 우리나라에게 부어 주셨습니다. 폭발적인 영적 부흥과 제자양성, 세계선교를 감당하는 기독교 강국이 되게 하셨습니다. 세계에서 규모가 가장 큰 5대 교회가 한국 땅에 세워질 정도가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경제적으로도 크게 번영을 누리게 하셨습니다. 6.25전쟁으로 폐허가 된 나라가 가장 짧은 기간에 다른 나라를 원조해주는 선진국이 되었습니다. UBF와 각 갱인을 생각해보아도 그렇습니다.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시고 성경선생이요 목자로 세우셨서 쓰십니다. 이번 체코에서 열린 유럽수양회에 천 여명이 넘는 많은 청년들과 목자들이 모여 말씀과 소감으로 천국잔치를 맛보았습니다. 참석한 모든 분들이 이구동성으로 너무나도 은혜롭고 좋았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UBF를 쓰셔서 세계선교를 이루셨고 현재 이루어가고 계심을 봅니다. 여러분은 이 일이 하나님의 도우심과 은혜와 축복으로 된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렇다면 이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소출의 얼마를 요구하실 것입니다.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소출의 얼마를 기쁨으로 드리길 기도합니다. 하나님은 물질의 얼마’, ‘시간의 얼마를 원하십니다. 한 달 소득 중 얼마를 헌금으로 주님께 드립시다. 아프리카나 중남미 양들과 목자들을 물질로 지원합시다. 또한 우리는 한 주를 시작하면서 그 첫날을 예배라는 이름으로 하나님께 드립니다. 또 어떤 날을 혹은 어느 시간을 정하여 주님께 드립니다. 그 시간이 말씀을 공부하는 시간이든, 기도하는 시간이든, 주의 역사를 섬기는 시간이든, 그 시간을 주께 드릴 때 내 삶의 주인이 내가 아니라 주님이시다는 것을 인식하게 됩니다. 이러한 드림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게 되고, 탐심을 제어하게 됩니다.

 

, 그렇다면 농부들이 죽인 그 아들은 어떻게 됩니까? 10절을 읽겠습니다. “너희가 성경에 건축자들이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당시에는 돌이 많아서 집을 돌로 지었습니다. 그때 건축자는 돌을 잘 골라서 기초석을 놓습니다. 그런데 어떤 건축자가 돌 하나를 쓸모없다고 버렸습니다. 하지만 그가 버린 그 돌이 오히려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습니다. ‘모퉁이의 머릿돌은 건물의 가장 중요한 부분입니다. 쓸모없다고 버린 돌이 오히려 가장 소중한 돌이 된 겁니다. 그것은 우리 눈에 놀랍게 보이는데, 하나님께서 하신 일입니다(11).

 

이 말씀에서 버린 돌’, ‘머릿돌은 무엇을 뜻합니까? 버린 돌은 종교 지도자들이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지 않고 배척하고 죽인 일을 말합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원하는 집을 짓는 일에 예수님을 적합한 돌로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셨습니다. 그 예수님을 하나님 왕국의 머릿돌로 삼으셨습니다. ‘쓸모없다.’라고 버림받은 예수님이 하나님 왕국에서 가장 존귀한 분이 되셨습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도 세상에서 쓸모없는 사람, 별로 가치없는 사람으로 취급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그들을 하나님 나라 건축물의 한 부분으로 여기시고 존귀하게 하십니다. 반면 세상에서 잘 나간다 할 지라도 그가 예수님을 믿지 않는다면 그는 하나님 나라에서 버림을 받게 될 것입니다. 오히려 심판을 받습니다. 예수님의 재림의 때에 우리네 인생은 역전 현상이 벌어집니다.

 

저는 여기 계신 종로2부 목자님들과 청년들로 인해 감사합니다. 너무나 귀한 분들과 함께 하여 영광이며 기쁨입니다. 제가 힘이 빠져 축 쳐질때 2부 동역자들을 보면 힘이 납니다. 특히 여러분들이 발표하는 소감을 들을 때 더더욱 그렇습니다. 이곳에 모인 분들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의 모습을 보기 때문입니다. “쓸모없이 버려진 사람을 쓸모있는 사람으로 변화시키시는 주님의 손길을 보기 때문입니다. 그 중심에는 모퉁이의 머릿돌 되신 예수님이 계십니다. 우리가 현재 부족한 점이 많이 있지만 소망을 가지는 이유는 우리가 예수님을 나의 머릿돌이요 인생의 기초석으로 삼고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저는 본문 말씀을 준비하면서 우리 구주 예수님을 내 삶 속에서 주인으로 대접하면서 살아가고 있는가? 생각하였습니다. 내가 주인 행세를 하고 있지는 않는가? 하는 생각이 들어 회개가 됩니다. 제가 내 구주 예수님께 다시금 나의 주인 자리를 내어드리며 그분의 다스림을 온전히 받기를 기도합니다. 내 안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점점 더 선명해지길 기도합니다.

 

13절입니다. 예수님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바리새인과 헤롯당 몇 사람을 보내어 예수의 말씀을 책잡으려 합니다. ‘책잡다이 말은 덫을 가지고 짐승을 사로잡는 것을 설명할 때 썼던 말입니다. 그들은 지금 예수님을 고발할 거리를 찾고 있습니다. 먼저 예수님께 아첨의 말을 한 후 세금 납부에 관해 질문을 합니다.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으니이까 옳지 아니하니이까?” 이 세금은 모든 유대인들이 일년에 한번 내는 인두세입니다. A.D.6년 유대 분봉왕 헤롯 아켈레오가 실권하고 로마총독 구례뇨가 직접 통치할 때부터 인구 조사로 처음 부과하였는데, 그 해 갈릴리의 유다가 봉기를 일으킨 계기가 되었습니다(4:37). 이 세금은 곧바로 로마 제국의 국고로 들어갔습니다. 로마에 세금을 바치는 것은 로마의 통치를 인정하는 것이고, 로마 황제를 주인으로 받아들이는 것이었으므로 유대인들에게 예민한 문제였습니다. 세금 납부에 대해 열심당원은 단호히 거부했고, 바리새인은 종교적 이유로 분개했고, 헤롯당은 정치적 이유로 지지했습니다.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으니이까 옳지 아니하니이까?” 참으로 대답하기 난처한 질문입니다. 예수께서 만약 세금을 바치라하면 백성들로부터 매국노라는 평판을 받을 수 있습니다. ‘세금을 바치지 말라하면 반란 세력으로 고소당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의도를 간파하시고 너희가 어찌하여 나를 시험하느냐책망하십니다. 그리고 그들이 세금으로 내는 데나리온 하나를 가져오라 하십니다. 이것은 티베리우스의 데나리온은 은화인데, 동전 한 면에는 신성한 아우구스투스의 아들, 티베리우스 가이사 아우구스투스란 글이 새겨져 있습니다. 다른 면에는 황제의 어머니 리비아가 오른손에 올림피아의 홀을 쥐고 왼손에는 감람나무 가지를 들고 신들의 보좌에 앉아 하늘의 평화를 주는 모습이 그려져 있습니다. 동전에 새겨진 형상과 글은 모두 황제 숭배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신성한 영광에 대한 주장을 담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가져온 데나리온을 가리키며 묻습니다. “이 형상과 이 글이 누구의 것이냐?” 그들은 주저없이 가이사의 것입니다.” 답합니다. 이 동전이 널리 유통되고 사용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하겠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무엇이라 하십니까?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17) 이 말이 무슨 뜻입니까? 예수님의 답변은 너무나 그 깊이가 깊어서 질문한 사람들조차 어리둥절하게 만드는 놀라운 답변이었습니다. 수능으로 치면 킬러문항이라 할 정도로 알 듯 모를 듯 너무나도 오묘합니다.

여기에 담긴 의미 세 가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1) 예수님은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란 말을 통해 데나리온이 가이사의 것임을 인정했습니다. 세금으로 내는 데나리온은 가이사가 만들었으며 가이사가 유통시켰으며 가이사가 거두어들였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그의 세상적 권위를 암묵적으로 인정한다는 말이며, 그에게 세금을 내야 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권리를 침해하지 않는한 우리는 국가에 대한 의무를 져야 합니다. 그 근거는 하나님의 명령이기 때문입니다(13:1-7).

 

2) 예수님은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란 말로서 둘을 극명하게 구별하십니다. 동전의 소유가 가이사의 것임을 인정하지만, 동전에 쓰여진 우상숭배 주장에 대한 글은 인정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황제라 할지라도 인간과 하나님 사이의 이런 무례한 혼동을 예수님은 단호히 거부하십니다. 신성한 영광은 오직 하나님께 속한 것입니다.

 

3)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는 말을 통해 궁극적인 통치권자가 하나님임을 알려줍니다. 하나님께 대한 의무와 가이사에 대한 의무가 구별되지만 완전히 분리된 것이 아닙니다. 모든 일이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는데에 있어 더 높은 차원에서 통합되며 하나님의 주권하에 있습니다. 모든 만물은 하나님에 의해 창조되었고 하나님에 의해 다스림을 받고 하나님의 뜻을 이룹니다. 세상 권위도 하나님의 권위 아래 놓여있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피조세계가 하나님의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쓰시겠다 하면 군말없이 드려야 합니다. 특별히 인간은 누구의 형상이 새겨져 있습니까? 하나님의 형상이 새겨져 있습니다. 가이사의 형상이 새겨진 데나리온은 가이사에게 바쳐야 하듯이 하나님의 형상이 새겨진 인간은 하나님께 전적인 충성을 바쳐야 합니다. 또한 가이사의 글이 아닌 하나님의 글, 즉 성경 말씀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사도바울은 거듭나 하나님의 소유가 된 그리스도인들에게 이렇게 권면합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12:1)”

 

결론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권위를 이 땅에 실현시키신 하나님의 아들이시오. 하나님 나라의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십니다. 이 땅에서 버림받으셨지만 하나님 나라에서 가장 존귀한 분이 되셨습니다. 우리는 그분이 가신 길을 따르도록 부름을 받았습니다. 세상에서 무시받고 버림받을지라도 우리가 슬퍼하거나 화내지 않고 기쁘게 순례의 길을 가길 바랍니다. 날이 갈수록 그리스도의 형상이 우리 안에 새겨지는데 힘써야 합니다. 우리에게 맡기신 소명을 청지기적 자세로 충성하며, 감사하며, 모든 영광을 그 분께 돌리는 복된 삶을 살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