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로마서 제 1 강
복음의 능력
말씀/ 로마서 1:1-17 요절/ 로마서 1:16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
로마서는 기독교의 헌법이라고 불립니다. 영국의 신학자이며 시인인 사무엘 콜리지는 로마서야 말로 인류 역사상 최고의 문서라고 하였습니다. 로마서만큼 인류 역사에 큰 영향을 미친 책은 없습니다. 이 위대한 책을 이번 가을학기에 배우게 하시는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로마서는 AD 57년 경, 사도 바울이 제 3차 전도여행을 하는 중 고린도에서 집필하였습니다. 당시 그는 고린도 이후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는 여정이었습니다. 그는 예루살렘에 가면 어떤 일을 당할지 모르는 위험한 상황이었습니다. 그토록 로마 선교를 원하였지만 자기의 미래를 장담할 수 없었습니다. 그는 이런 상황에서 로마에 있는 성도들에게 복음을 전하고자 편지를 쓰는 것입니다. 따라서 로마서는 바울의 ‘유언적 서신’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만큼 그의 믿음과 기독교의 핵심 사상이 명쾌하게 드러나 있습니다. 우리가 이번에 이런 로마서를 공부함으로 복음의 골격을 든든히 하기를 기도합니다. 이 시대의 강력한 세속주의와 인본주의 세력 앞에서 흔들리지 않는 복음전파자로서의 확고한 자세를 덧입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1.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신 예수님 1절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 여기서 종이란 말은 '둘로스', 곧 노예라는 뜻입니다. 바울 자신이 주인 되신 예수님께 온전히 순종하는 자임을 말합니다. 한편, 서론에서 언급한 정황을 보면, 이는 자신이 종이라는 겸손한 표현에서 더 나아가, “예수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그들에게 말하는 자”라는 영적 권위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종은 주인의 심부름꾼이지만 또한 주인의 권위를 갖고 나아가기 때문입니다. 그는 자신이 사도로 부르심을 받았다고 말합니다. 사도는 예수님이 직접 임명하여 보낸 자들입니다. 바나바와 실라 같은 사람도 간접적으로는 사도라고 불린 적이 있지만, 진정한 사도는 예수님의 12제자와 바울만을 말합니다. 신사도운동하는 분들 있는데 신사도는 예수님의 사도들이 아닙니다. 사도는 1세기에만 있던 사람들입니다. 당시 사도는 예수님과 같은 권위 있는 자들로 여겨졌습니다. 그들의 말이 신약성경으로 기록되었습니다. 바울은 사도행전 9장에 기록된 대로 자신이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의 부름을 받았음을 언급하며 그의 사도권을 여러 번 주장하였습니다. 그가 사도가 된 것은 자신이 희망해서 된 것이 아니요 예수님이 그를 사도로 부르셨기 때문입니다.
또한 바울은 자신이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다고 말합니다. 복음은 사람이 생각해 만들어 낸 것이 아닙니다. 그 기원이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내시고 하나님이 성취하셨습니다. 바울은 바로 그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택정함은 영어로 'set apart' 로 따로 구별되었다는 것입니다. 만세 전에 택정되었다가 다메섹 도상의 사건을 통하여 실현된 그 부르심을 말합니다. 바울은 자신이 누구이며 자신의 부르심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았습니다. 그는 이 정체성과 부르심이 분명하였습니다. 그럴 때 그는 사람들의 말에 흔들리지 않았고 그 어떤 시련이 닥쳐와도 일생동안 예수님의 부르심에 충성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에게도 분명한 정체성과 부르심의 확신이 중요합니다. 이 시대에 믿음을 갖고 살아가기가 쉽지 않습니다. 여러 가지 도전이 많습니다. 우리가 사도 바울과 같은 정체성과 부르심을 굳게 하지 않으면 이리 저리 흔들리며 떠내려가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복음의 일꾼의 분명한 정체성과 부르심을 늘 새롭게 하여 주시길 기도합니다.
2절입니다. "이 복음은 하나님이 선지자들을 통하여 그의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 복음은 그의 아들에 관한 내용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 곧 성자 하나님이 이 땅에 오셔서 하신 일에 대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서 하신 일이 무엇입니까? 천국 복음을 전파한 것입니다. 무엇보다 우리 인생들의 죄를 위해 대신 피 흘려 죽으시고 부활하신 것입니다. 이를 통해 죄인인 우리들을 위한 대속을 이루신 것입니다. 이 복음은 아담의 타락 이후 하나님이 여러 선지자들을 통하여 약속해 오신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3절입니다. "그의 아들에 관하여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예수님은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습니다. 하나님은 인류의 메시야를 다윗의 후손 가운데 보내실 것이라는 약속을 여러 번 하셨습니다. 특히 삼하7:12,13에 보면 하나님은 다윗의 후손 가운데 영원한 나라의 왕을 보내신다 하십니다. 그 왕위를 영원히 견고하게 하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삼하12:16) 이를 다윗언약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다윗의 후손으로 오셔서 이 언약을 성취한 분이십니다.
한편 영적으로는 어떠합니까? 4절입니다.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 육신으로는 다윗의 후손으로 오셨지만 영적으로는 죽은 자들 가운데 부활하셨습니다. 인류 역사상 자기 힘으로 부활한 자는 예수님 외에는 없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잠깐 부활하였다가 다시 죽는 '소생'이 아닙니다. 영원히 다스리시는 왕으로서의 부활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성령의 능력으로 이러한 놀라운 일을 성취하심으로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온 천하에 드러내셨습니다. 세상에서 인정되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 분이 바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라고 고백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믿는 예수님, 만민에서 전파해야 할 예수님은 약속대로 오신 메시아, 죽음 권세를 깨뜨리시고 살아나신 분, 영원히 온 세상을 다스리시는 왕이십니다. 이 예수님이 우리의 그리스도가 되십니다.
오늘날을 불안한 세대라고 부릅니다. 살아가는 방식은 더욱 편리해지고 있지만 빠르게 돌아가는 세상, 앞으로 어떤 일이 닥칠지 모르는 미래 앞에 사람들은 불안해합니다. 염려와 걱정, 두려움이 세상을 점점 지배합니다. 이러한 세상에 예수님은 우리의 주요 그리스도가 되십니다. 이 예수님은 기독교 교리상의 신조로서 그저 우리가 믿는 분이 아닙니다. 역사상 실제로 그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된 분이십니다. 메시아로 확증된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천하 사람들에게 예수, 그 이름 외에 구원을 얻을 다른 이름을 주신 일이 없으십니다. (행4:12) 우리가 이 예수님을 굳게 붙들고 어떤 가운데서도 염려하지 않고 도리어 하늘의 평강을 누리며 담대한 복음전도자의 삶을 살기를 기도합니다.
2. 은혜와 사도의 직분 5절입니다.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은혜와 사도의 직분을 받아 그 이름을 위하여 모든 이방 중에서 믿어 순종케 하나니” 1절에서 바울 개인으로 시작한 소개가 5절에서는 "우리"로 변합니다. 바울 자신이 받은 은혜와 사도의 직분이 자기만이 아니라 로마 성도들 또한 더 나아가 우리 모두에게 해당된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바울과 우리가 받은 바가 무엇입니까?
첫째,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은혜를 받았습니다. ‘은혜’란 값없이 받는 호의입니다. 나는 아무 것도 한 것이 없는데 좋은 선물을 받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으로 인해 받은 선물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받은 은혜는 영원한 생명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죄로 인해 영원한 형벌을 받아야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지만 그의 거룩한 성품으로 인해 죄를 심판하셔야만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나 대신 심판을 받고 죽임 당하셨습니다. 복음을 한 마디로 하면 Substitution (자리바꿈)입니다. 예수님이 죄인의 자리를 취하여 죽으심으로, 우리가 의인의 자리를 차지하게 된 것입니다.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서 영원한 형벌을 받을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서 복락을 누리는 영생을 얻은 자가 되었습니다. 이는 우리가 인생을 수백 번을 고쳐 산다고 해도 갚을 수 없는 큰 은혜를 받은 것입니다.
바울은 핍박자요 포행자인 자기를 구원하여 주신 주님의 은혜가 너무나 감사하였습니다. 그의 전 인생 가운데 이 구원의 은혜가 그의 심령에 생생하였습니다. 그는 더 이상 아무 것도 바랄 것이 없었습니다. 온 힘을 다하여 감사함으로 충성하였습니다. 박해를 받을 때 예수님의 은혜를 조금이라도 갚는다는 생각에 도리어 기뻐하였습니다. 우리는 때로 주님의 역사를 위해 온 힘을 다하여 수고했는데 보이는 열매가 없을 때 힘이 빠질 때가 있습니다.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을 때 손해의식이 들기도 합니다. 나만 애썼다는 피해의식도 듭니다. 이런 마음을 갖는 이유는 우리가 주님의 구원의 은혜를 잊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심령에 날마다 구원의 은혜가 새로워지도록 은혜 주시길 기도합니다.
둘째, 사도의 직분을 받았습니다. 사도는 “보내심을 받은 자”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보내심을 받아 복음을 전하는 사명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사명을 부담스런 것으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사명은 마치 밤바다를 항해하는 배에게 북극성과 같이, 우리에게 분명한 방향을 가르쳐줍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참된 사명이 없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사람이 어떻게 살겠습니까? 그때마다의 상황에 맞춰 자신의 욕망에 따라 살 것입니다. 그런 인생은 바다 위에 떠 있는 부유물 같아서 정처가 없습니다. 의미가 없습니다. 이리저리 쓸리며 살다가 인생 다 가버립니다. 하나님이 주신 사명이 있을 때 인생을 낭비하지 않고 참된 가치와 의미가 있는 삶을 살게 됩니다.
특별히 성경을 가르쳐서 예수님을 믿어 구원을 받게 하는 이 사도의 직분은 세상의 그 무엇보다 가장 아름다운 직분입니다. 육신의 병도 낫게 해 주는 의사의 직분이 귀하지 않습니까? 사람으로 믿어 영원히 구원을 얻게 하는 사도의 직분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귀한 직분입니다. 사람이 이 직분의 가치를 정말 안다면 일분일초를 아껴 온 힘을 다하여 복음을 전하게 됩니다. 사도 바울이 받은 사도의 직분은 구체적으로 이방인들을 믿어 순종케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믿음과 순종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참된 믿음은 순종을 수반합니다. 순종이 따라 오지 않는 믿음은 참된 믿음이 아닙니다. 바울은 이방인들 가운데 그러한 순종하는 믿음을 심는 일에 온 힘을 다하였습니다.
바울은 이 사도의 직분을 ‘그 이름을 위하여’ 감당하였습니다. 그는 과거에 자기 이름을 위해 살았습니다. 그의 스승 가말리엘을 본받아 이스라엘 최고의 랍비가 되고자 하였습니다. 그런 그가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 오직 예수님의 이름을 위하여 살게 되었습니다. "그 이름을 위하여!" 이것이 사도 바울의 인생목적이었습니다. 자기가 어떻게 되든지 오직 그리스도가 전파되고, 그리스도의 이름이 높임을 받고, 그리스도가 영광을 받으면 되었습니다. 이를 위해 그는 도리어 자기를 낮추고 숨겼습니다. 이런 사도의 직분은 우리의 인생을 아름답고 귀하게 만듭니다. 끊임없이 배우게 하고 예수님 안에서 성장하게 합니다. 예수님의 성품을 덧입게 합니다. 우리가 젊음의 때 이 직분의 고귀함을 깊이 알게 하시며 이 사도의 직분을 충성스럽게 감당하게 하여주시기를 기도합니다.
3. 빚진 자의 심정 8절입니다. "먼저 내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너희 모든 사람에 관하여 내 하나님께 감사함은 너희 믿음이 온 세상에 전파됨이로다." 당시 초기 기독교인들은 서로를 뜨겁게 사랑하였습니다. 로마 사람들이 병약하다고 버린 어린 아기들을 데려다가 키우고는 하였습니다. 이런 것들이 사회에 선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당시 제국의 수도 로마에 많은 사람들이 왔다가 성도들을 보고 그들의 믿음에 대해 들었습니다. 이와 같이 하여 그들의 믿음이 온 세상에 전파되었습니다. 바울은 로마 성도들의 이러한 믿음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그의 심령으로 섬기는 하나님이 증인이라고 말할 수 있는 정도로 로마 성도들을 위해 쉬지 않고 기도합니다.
바울은 어찌하든지 그들에게 나아가기를 원했습니다. 이는 그가 가진 신령한 은사를 나누어 주어 그들의 믿음을 견고하게 하기 원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무엇보다 바울은 로마에 갔다가 그들의 도움을 받아 당시 땅 끝으로 알려진 서바나까지 나아가 복음을 전하고자 하였습니다. 그가 이와 같이 로마에, 또 땅 끝까지 나아가 복음을 전하고자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14,15절입니다. "헬라인이나 야만인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 그러므로 나는 할 수 있는 대로 로마에 있는 너희에게도 복음 전하기를 원하노라" 이는 그의 인간적인 야심이나 사업적인 욕심에서 나온 것이 아닙니다. 빚진 자의 심정 때문이었습니다.
바울은 누구에게 빚을 졌다고 하나요? "헬라인이나 야만인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에게 다" 빚을 졌다고 합니다. 여기서 헬라인이나 야만인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라는 것은 세상의 모든 사람을 의미합니다. 바울은 세상사람 모두에게 빚을 졌다는 것입니다. 그가 도대체 무슨 빚을 졌을까요? 로마에 가 본적도 없고 먼 나라의 이방인을 알지도 못하는데 무슨 빚을 진 것일까요? 실상 그는 예수님께 생명의 빚을 졌습니다. 그는 과거에 자기 의가 충만하여 예수님을 대적하였습니다. 성도들을 무자비하게 핍박하였습니다. 이런 그는 하나님의 심판 제 1호 대상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런 그를 불쌍히 여기시고 용서해 주셨습니다. 그의 죄를 위해서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그를 구원하여 주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를 충성되이 여기시고 만민에게 복음을 전하는 사도가 되게 하셨습니다. 예전의 바울은 죽고 이제는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새 생명과 새 사명을 받아 살게 된 것입니다. 이런 그는 예수님의 은혜에 너무 감사하여 주님께서 원하시는 무엇이든지 하기 원했습니다. 예수님이 원하시는 것은 세상의 모든 사람이 복음을 듣고 구원을 얻는 것입니다. 이에 그의 예수님께 대해 가진 빚진 자의 심정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에게 향한 것입니다.
빚진 자의 심정은 어떤 것일까요? 우리 가운데 김선형 목자님은 대학에 들어갔을 때 대출통장 4개나 있었다고 하였습니다. 은행에서 날마다 빚을 갚으라는 독촉이 왔었습니다. 전화가 울리면 가슴이 떨렸습니다. 빚 진자는 빚을 다 갚기까지는 항상 죄인의 심정으로 채권자의 은혜를 구할 뿐입니다. 빚을 조금 갚았다고 자기 의를 내세울 수도 없습니다. 자나 깨나 빚을 갚고자 모든 노력을 합니다. 바울은 자기의 모든 빚을 다 갚기까지 쉼 없이 일하였습니다. 빚진 자의 심정은 바울로 하여금 큰 역사를 이룬 후에도 교만해지지 않게 하였습니다. 자족하지 않고 지칠 줄 모르는 불사조와 같은 사명인이 되게 하였습니다. 복음 전파자가 싸워야 할 내적 원수는 자기만족과 교만, 또한 피해의식과 손해의식입니다. 이는 모두 빚진 자의 심정을 잃어버린 데서 오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께 진 빚은 생명의 빛입니다. 우리 목숨을 다하여 수고하여도 이 빚을 다 갚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늘 이 받은 은혜에 감사하여 충성할 뿐입니다. 우리가 언제나 부족한 마음, 무익한 종의 마음, 감사한 마음, 곧 빚진 자의 심정으로 충성하기를 기도합니다.
4. 복음의 능력 16절입니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로다.” 당시 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부끄러워하였습니다. 고전 1:23도 보면 예수님의 십자가가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도리어 자랑스럽게 여겼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는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복음이 무엇입니까? 복음 곧 좋은 소식은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으심으로 우리의 죄를 대속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죽음 권세를 깨뜨리시고 부활하신 것입니다. 복음은 예수님이 하신 일입니다. 좋은 소식, 메시지입니다. 그런데 이 복음은 또한 능력입니다. 놀랍지 않습니까? 말로 전하는 복된 소식, 그것이 동시에 능력이라는 것입니다. 사전에 보면 “능력"은 ”일을 감당해 낼 수 있는 힘"이라고 정의되어 있습니다. 복음은 소식이지만 또한 힘입니다. 무슨 일을 해 내는 힘? 구원을 얻게 하는 힘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렇게 정리할 수 있습니다. 한 사람이 복음을 듣습니다. 그 복음의 내용을 이해하고 복음을 믿습니다. 예수님이 자기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부활하신 그 사건이 참임을 믿습니다. 그럴 때 복음은 그 사람의 믿음을 통해 그 사람 안에 힘을 발휘합니다. 어떤 힘? 그로 하여금 구원을 얻게 하는 힘입니다. 이로써 그 사람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거듭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영적으로 보면 핵폭발보다 더 강력한 힘으로 말미암아 한 사람이 완전히 변화되는 것입니다. 세상에 그 어떤 힘도 복음의 힘보다 강력하지 않습니다. 전적으로 타락하여 죄와 허물로 죽은 사람을 다시 살게 하는 힘은 세상에 전혀 없습니다. 오직 복음에만 있습니다. 그 힘은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두 가지를 알 수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의 인류 구원의 방식은 복음을 통해서라는 것입니다. 16절의, 복음이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라는 것은 복음만이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라는 것입니다. 구원의 길은 오직 복음을 듣고 믿음으로서 입니다. 고린도전서 1:21b절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여기서 전도의 미련한 것은 미련한 방법처럼 보이는 전도 행위를 통해 구원하기를 기뻐하셨다는 것이 아니라, 전도하는 그 미련하게 보이는 내용, 곧 복음을 통해 구원하신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사람 눈에 미련하게 보이는 복음을 믿는 자를 구원하십니다. 어떤 사람이 이런 질문을 하였습니다. 파푸아뉴기니아 밀림 속에 사는 사람들도 복음을 들어야만 구원을 받습니까? 하나님은 전능하셔서 복음을 듣지 않고도 신비한 방법으로 구원을 얻게 할 수 있지 않을까요? 그 답은 "오직 복음을 듣고 믿어야 구원을 받습니다“ 입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시지만 자신이 이미 내신 구원의 방법을 지키십니다. 누구든지 복음을 듣고 믿어야 합니다. 그래서 수많은 선교사들이 자기의 생명의 위협을 무릅쓰고 미전도 종족들에게 나아간 것입니다.
둘째, 우리는 오직 복음의 능력을 믿고 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요즘에 복음을 대체하고자 하는 시도들이 많이 있습니다. 정신적 치료나, 명상 같은 것으로 대체하고자 합니다. 심지어 뉴에이지 같은 운동도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에 그 어떤 인간적, 그 어떤 물리적인 힘도 사람을 거듭나게 하여 구원에 이르게 하는 힘은 없습니다. 오직 복음만이 믿는 자 속에서 폭발적으로 역사하여 그를 구원에 이르게 합니다. 복음은 죽은 글이나 말이 아닙니다. 그 안에 하나님의 능력이 있습니다. 성령의 역사로 말씀이 갑자기 벌떡 일어나기도 합니다. 천둥 같은 소리로 사람을 책망하기도 하고 몽둥이로 때리듯 가격하기도 합니다. 고압전선에 감전된 것 같은 충격을 주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힘이 나타나면 사람이 온전히 변화됩니다.
이와 같이 복음 자체가 하나님의 능력인데 이것이 유효하기 위해서는 한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그것은 복음을 믿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복음은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지만 믿지 않는 사람에게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그래서 복음 전파자인 우리의 수고가 필요한 것입니다. 요즘의 캠퍼스 학생들은 중고등학교에서 무신론적인 교육을 받아 왔습니다. 유물론과 진화론에 기초한 세계관을 배웠습니다. 이들에게 창조주 하나님이라든가 구주 예수님이라는 말은 외계인 언어와 같습니다. 도저히 이해가 안 됩니다. 그들이 복음을 믿기 위해서는 무엇이 선행되어야 하나요? 이해! 그들이 먼저 복음의 내용을 이해해야 합니다. 죄가 무엇인지? 하나님이 심판이 무엇인지? 왜 예수님이 대신 죽으셔야 되었는지? 왜 우리가 그를 구주로 믿어야 되는 건지? 그들에게는 난센스와 같이 들리는 이 모든 것을 겸손히 사랑으로 잘 가르쳐 이해하도록 도와야 합니다. 그리고 복음을 믿기까지 기도하며 섬기는 사랑의 수고를 해야 합니다. 그것이 전도자의 수고요 우리들의 십자가입니다. 이 일이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길 외에 다른 길은 전혀 없습니다.
감사한 것은 하나님이 이러한 복음 역사에 함께 하신다는 것입니다. 지난주에 국민대 캠퍼스에서 한 자매님이 UBF광고를 보고 성경공부를 하고 싶다고 연락을 해 왔다고 합니다. 이런 학생들도 있습니다. 우리가 몰라서 그렇지 하나님이 남겨놓으신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전도자의 사역을 감당하기를 기도합니다. 일생동안 우리가 한 생명이라도 전도하여 구원하면 그것처럼 귀한 생명의 열매가 없는 것입니다. 사람을 구원하게 하는 힘은 우리에게 있지 않습니다. 복음에 있습니다.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이러한 복음의 능력이 이 가을학기에 우리 가운데 힘차게 역사하시길 기도합니다.
17절입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여기서 ‘하나님의 의’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의를 말합니다. 율법은 사람의 의를 요구합니다. 그러나 사람은 그 어떤 비상한 노력을 해도 하나님 앞에 설 수 없습니다. 이런 세상에 하나님은 인생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사람의 의와 별도의 다른 의를 내셨습니다. 예수님이 우리 죄를 대속하심으로써 하나님이 이루신 의입니다. 복음에 바로 그 하나님의 의가 드러났습니다. 이 하나님의 의를 믿음으로 우리는 구원을 받습니다. 그러면 구원을 얻은 우리는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이제 부터는 나의 노력과 의지로 성화를 이루는 삶을 살아야 하나요? 아닙니다. ‘믿음으로 믿음에 이른다’는 것은 ‘처음부터 끝까지 믿음으로’, ‘한결같이 오직 믿음으로’라는 뜻입니다. 물론 우리는 거룩하게 살고자 노력을 해야 합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을 내 힘이 아니리 주님을 믿음으로, 주님이 주시는 은혜와 힘으로 애를 써야 하는 것입니다. 오직 의인, 곧 하나님의 의를 믿어 의인이라는 칭함을 받게 된 신자는, 계속하여 믿음으로 세상을 살아가야 합니다.
결론적으로, 복음은 메시지이지만 또한 살아계신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이 복음만이 사람을 구원합니다. 능력이 우리에게 있지 않습니다. 복음 자체 있습니다. 우리가 이 복음의 능력을 믿고 빚진 자의 심정으로 이 복음을 전해야겠습니다. 양들이 믿고 순종하기에 이르기까지 해산의 수고를 감당해야겠습니다. 이 모든 일을 오직 우리를 사랑하사 십자가에서 피 흘리신 예수님의 이름을 위하여 감당하기를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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