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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2024년 로마서 4강 심판 아래 있는 온 세상(로마서 2:17-3:20)2024-10-07 2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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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로마서 제 4 강 

심판 아래 있는 온 세상


말씀/ 로마서 2:17-3:20

요절/ 로마서 3:19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에 있게 하려 함이라”


탈무드에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한 젊은이가 랍비를 찾아와 ‘탈무드를 배우고 싶습니다’ 요청합니다. 그러자 랍비가 질문을 합니다. “두 사람이 굴뚝 청소를 했다. 그런데 한 사람의 얼굴은 그을음으로 시커메졌고, 다른 사람은 깨끗했다. 그렇다면 두 사람 중에 누가 세수를 하겠느냐?” 젊은이는 너무나 쉽다는 표정으로 “얼굴이 시커멓게 된 사람이죠.”합니다. 그러자 랍비가 “틀렸다. 얼굴이 깨끗한 사람이다. 깨끗한 사람은 얼굴이 시커먼 사람을 보고서 ‘내 얼굴도 저렇게 더러울거야.’ 이렇게 생각하고 씻을 것이다. 반면 얼굴이 시커먼 사람은 깨끗한 사람을 보고서 안씻을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접근법은 사람은 남과 비교하면서 사는 ‘상대적 존재’라는 기초위에서 논리를 전개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다시 한번 랍비가 묻습니다. “두 사람이 굴뚝청소를 했다. 청소후에 얼굴이 깨끗한 사람과 시커먼 사람, 둘 중에 누가 세수를 할까?” 그러자 젊은이가 자신 있게  “얼굴이 깨끗한 사람이요”합니다. 그러자 랍비가 정색을 하며 “너는 탈무드를 공부할 만한 자격이 없다. 아니~ 두 사람이 똑같이 굴뚝 청소했는데~ 어떻게 한 사람만이 더러워질수 있겠느냐? 두 사람 다 시커멓게 되지~ 그러니 둘 다 씻어야 되지 않겠는가!”합니다. 이 말은 잘못된 전제에서 답을 찾으면 바른 해답을 찾을 수 없다는 것을 말해 준다 하겠습니다. 


오늘 말씀은 ‘인간의 실존’에 관한 내용입니다. 굴뚝 청소를 한 두 사람이 모두 시커멓게 될 수밖에 없는 것처럼, 온 인류가 하나님 앞에서 모두 다 더러운 죄인임을 선언합니다. 여기에는 예외가 없습니다. ‘나’를 포함한 ‘우리’입니다. 이 시간, 인간의 실존에 대해 올바로 알고 올바른 해결책을 고민해 보는 시간이 되길 기도합니다. 


자, 이제까지 우리는 1,2장에서 이방인의 죄와 유대인의 죄에 대해 배웠습니다. 바울은 이어서 유대인의 문제점이 무엇인가를 지적합니다. 세 가지.


첫째, 교만과 위선의 죄입니다. (17-24절)

17절을 보면 바울은 ‘유대인이라 불리는 네가~’란 말로 시작을 합니다. 당시 유대인에게는 ‘유대인’이란 호칭은 매우 특별한 의미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들에게는 아주 아주 명예로운 이름이요, 하나님께 택함 받은 백성, 선민이라는 자부심을 갖게합니다. 오늘날도 그들은 ‘유대인’이란 자부심이 대단합니다. 최근 자료에 의하면 전 세계 유대인 인구는 약 1500만명 정도 된다고 합니다. 그중에 700만명이 이스라엘에 거주합니다. 그리고 미국에 가장 많이 거주하는데, 미국 인구의 약 2.4%정도 됩니다. 자, 그렇다면 하버드대 학생중에서 유대인 학생 비율이 얼마나 될까요? 30%라고 하네요. 예일대 28%, 보스턴대 24%가 유대인이라고 합니다. 전 세계에서 인재들이 다 몰려오는데 대단하지 않습니까? 거기에다 아이비리그 대학에 재직하는 유대인 교수의 비율은 무려 40%나 된다고 합니다. 노벨상 받은 사람도 유대인 비중이 약 22%입니다. 이러니 유대인이라는 자부심이 얼마나 크겠습니까? 로마서~ 누가 썼습니까? 유대인인 사도 바울이 썼습니다. 그도 유대인이란 자부심이 있었습니다. 자, 그렇다면 유대인들이 자랑하는 것, 네 가지가 있는데~ 무엇일까요? 첫째, ‘여호와 하나님을 섬긴다.’ 둘째, ‘율법을 가졌다.’ 셋째, ‘할례를 받았다.’ 넷째, ‘예루살렘에 성전이 있다’는 것입니다.


특히 그들은 율법을 의지하여 하나님을 자랑하였습니다(17). ‘율법을 의지한다’ 이 말은 원어로 ‘율법을 통해 안식을 누린다’는 말입니다. 그들은 율법 속에서 쉼을 얻고 만족을 누렸습니다. 어려서부터 가정에서 말씀을 배웠으며, 말씀으로 만족하는 법을 터득하였으며,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는 것이 최고의 복이라고 그들은 생각을 했습니다(시1:2). 뿐만 아닙니다. 하나님을 자랑했습니다. 율법의 교훈을 받아 하나님의 뜻을 알고자 힘썼습니다. 지극히 선한 것을 좋게 여겼습니다(18). 그들은 영적인 맹인들을 인도하며 어둠에 있는 자의 빛으로서 목자 역할을 했습니다(19). 그들은 자연스럽게 지식과 진리의 모범이었습니다. 영적으로 어리석고 어린 사람을 말씀으로 돕는 성경 선생이었습니다(20). 


여기까지 볼 때, 유대인들이 얼마나 귀한 사명과 특권을 받아 누리고 있는지를 알 수가 있습니다.


자, 그렇다면 여기서 ‘율법’이 무엇입니까? 유대인들에게 ‘율법’은 네 가지를 의미하였습니다. 첫째 십계명, 둘째 모세오경, 셋째 구약성경, 넷째 율법학자들의 해석입니다. 사실 구약성경과 십계명에는 구체적인 형식과 규칙이 없습니다. 크고 넓은 원칙만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것을 법으로 모든 사람들에게 적용시키기가 어려웠죠. 그래서 율법학자들은 이것을 실생활에 적용하려고 613가지의 시행규칙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이것을 사람들에게 문자 그대로 지키도록 하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율법학자들의 율법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율법학자들이 정하여 준 규칙을 지켜야 구원을 얻는다고 생각했습니다. 또 그것을 잘 지키면 ‘신앙생활을 잘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율법에 대해 언급하신 적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율법을 무엇이라 했습니까? ‘구약성경 전체에 담겨진 하나님의 뜻’이며 ‘이를 행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그러시면서 ‘율법학자들이 만든 조항들을 문자적으로 지키도록 강요하는’ 종교지도자들의 가르침을 책망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과 종교지도자들이 자주 부딪쳤죠. 종교지도자들은 예수님이 안식일에 병고치는 것을 문제 삼았습니다. 또 제자들이 안식일에 밀 이삭을 잘라먹는 것을 보고 ‘하지 못할 짓을 한다’고 시비를 걸었습니다. 이처럼 유대인들은 율법을 잘 안다고 생각했지만, 실은 잘 모르고 있었으며 오해하고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도 지금 이를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20절을 보면 ‘스스로 믿으니’라고 나옵니다. 그들은 자신들만이 율법을 가졌다고 잘못된 특권의식, 즉 교만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만이 선민이고 나머지 모든 사람을 통틀어서 ‘이방인’이라고 부르면서 차별했습니다. 더 나아가 경멸하기까지 했습니다. ‘이방인들은 지옥 땔감으로 쓰기 위해 하나님께서 창조하셨어~’ 이 얼마나 잘못된 생각입니까? 그들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에 이르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몰랐습니다. 열방에 대한 제사장 직무를 망각하고 있었습니다. 


율법을 왜 주셨습니까? 행하라고 주신 것 아닙니까? 그런데 그들은 다른 사람에게 율법을 가르치면서 정작 자신을 가르치지 않고, 행하지 않았습니다(21,22). 도둑질하지 말라고 말하면서 자신들은 도둑질했습니다. 간음하지 말라고 말해 놓고 몰래 음란사이트에 들어갔습니다. 우상숭배하지 말라고 해 놓고 돈을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고 마음 첫 자리에 아이돌 스타를 두었습니다. 그들은 언행불일치의 위선의 죄를 범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그들의 결과가 무엇입니까? 23,24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을 욕되게 하였습니다. 이방인 중에서 하나님의 이름이 모독을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 가장 싫어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이름이 모욕과 모독을 받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십계명을 통해 이를 엄격히 금하셨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하나님께 모욕과 모독이 돌아가지 않도록 특별히 신경을 썼습니다. 만약 신성모독을 하면 돌로 쳐 죽였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로 인하여 하나님께서 모욕과 모독을 받고 계신다고 하시니~ 그것도 이방인들에게 모독을 받는다니~ 이 얼마나 충격적인 사실입니까? 


유대인들의 실패에서 우리가 배워야 할 교훈이 무엇입니까? 다른 사람을 가르치기에 앞서 먼저 자신을 가르쳐야 합니다. 아는 만큼 행하고자 힘써야 합니다. 성경공부한 것, 주일 메시지 들은 것을 머리와 가슴으로 깨닫고, 영으로 내려가, 내 삶 속에서 실천되어지게 해야 합니다. 사도바울은 고전9:27에서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라고 했습니다. 우리도 우리의 위선적인 삶으로 인해 하나님의 이름이 세상에서 모독을 받지 않도록 말씀을 지식으로만 아는 것이 아니라 실천하기를 기도합니다. 


두 번째, 유대인들의 잘못은 ‘의식치중죄’입니다(25-29)

유대인들의 대표적인 의식이 무엇입니까? 할례입니다. 어느 정도로 중요하게 여겼을까요? 안식일에 할례를 할 수 있을까요? 없을까요? 할 수 있습니다. 할례법이 안식일 법보다 더 위에 있기 때문입니다. 다윗이 골리앗을 맞서 싸우고자 할 때 ‘이 할례받지 못한 자가 하나님의 군대를 무시하는구나’하며 분개하지 않았습니까? 할례는 하나님께 속하였다는 징표입니다. 유대인들은 할례를 받지 않으면 구원을 받지 못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러한 주장은 초대교회 그리스도인 사이에서도 있었습니다. 사도행전 15장 1절을 보면, 어떤 유대 그리스도인들이 안디옥교회에 와서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능히 구원을 받지 못하리라” 이렇게 가르쳤습니다. 예수 믿는 것에 더하여 할례를 받아야 구원얻는다는 주장입니다. 이것 때문에 바울 및 바나바와 그들 사이에 적지 않은 다툼과 변론이 일어났습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고자 소집되었된 것이 바로 A.D.50년경 ‘예루살렘총회’ 아닙니까? 그때 총회의 결론이 무엇입니까? ‘할례는 구원과 상관이 없다’,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은 할례받지 않아도 된다’고 결의하였습니다. 그리고 구원과는 관계없지만 피체 먹는 것, 간음등 몇가지만 권고 사항으로 교회에 편지를 써서 보내기로 결정을 합니다. 자, 본문에서 바울은 할례에 관해 무엇이라 합니까?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라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해야 한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신앙생활에 의식도 필요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마음 자세입니다. 우리의 마음 상태를 늘 점검하고 마음에 할례를 해야 합니다. 외형적인 경건한 모습을 통해 사람들에게 칭찬받으려 하는 것을 경계하고, 마음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께 칭찬받고자 힘쓰기를 기도합니다.


세 번째, 유대인의 잘못은 불신앙의 죄입니다(3장 1-8절). 

유대인들은 할례를 받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맡았음에도(1,2). 불신앙을 가졌습니다. 불신앙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으나 그를 영접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불신앙을 변명하였습니다. 구체적으로 세 가지 궤변을 늘어 놓았습니다. 


첫 번째 궤변은 ‘나의 불신앙이 하나님의 약속을 파기할 수 있다’는 주장입니다. 믿음이 무엇입니까? 서로 신뢰하는 것입니다. 서로의 약속을 믿는 것입니다. 그런데 한쪽 편에서 안 믿어버리면 어떻게 됩니까? 그 약속이 파기되나요? 사람 사이에는 파기될 수 있습니다. 남북간에 군사 합의를 했더라도 한쪽에서 안 지키면 파기될 수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논리를 좋아합니다. 그래서 ‘만일 내가 안 믿어 버리면 그 약속은 폐기처분되는 것 아닌가?’ 이런 말로 사도바울에게 따지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렇지 않다’고 합니다. 왜? 하나님은 미쁘시기 때문입니다. 신실하신 하나님은 그 약속을 파기하지 않습니다. 내가 믿든 안 믿든 하나님께서는 약속을 반드시 성취하십니다. 사람은 거짓되되 하나님은 참되십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출애굽한 이스라엘에게서 광야 40년동안 일어났던 일입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가나안 땅에 들어가라고 하였으나, 가나안 땅에 거인들이 살고 있음을 알고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며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지 못하겠다’며 울며불면서 하나님을 원망하였습니다. 물이 없을 때는 ‘매장지가 없어서 이곳에서 죽게 하려고 하는가’하며 지도자 모세를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들은 마음이 완악해져서 번번히 ‘애굽으로 다시 돌아가자’ 하였습니다. 조금만 힘들어도, 조금만 어려움에 봉착해도 하나님을 원망하고 믿지 않고 하나님을 반역한 적이 열 번이나 있었다고 성경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의 광야 생활 아닙니까? 이때 하나님께서 ‘그래~ 약속 파기’ 이렇게 하셨습니까? 그들이 다 광야에서 엎드려졌을지라도 그들의 후손들을 약속대로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하지 않았습니까? 하나님은 한번 약속하고 작정하신 것은 인간이 비방하고 반항하고 거역하고 믿지 않을지라도 반드시 행하십니다. 이것을 통해 주의 말씀에 의롭다 하심을 얻고 판단받으실 때 이기십니다(4). 


두 번째 궤변은 ‘내 불의가 하나님의 의를 드러나게 하였으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진노를 내리면 안된다’는 주장입니다(5-7). 하나님은 공의로우시며 사람을 행위대로 심판하시기 때문에 결코 불의하지 않으시며, 세상을 심판하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의는 사람에 의해 결코 변하지 않습니다. 마치 구름이 끼었다고 해서 태양이 빛을 발하지 않는 것이 아닌 것과 같습니다. 사람은 거짓되되 하나님은 항상 참되십니다. 


어떤 신학생이 시험을 보았습니다. 공부를 하나도 안 해서 답안지에 한 글자도 쓸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답안지에 이렇게 적었습니다. “하나님은 아시죠~ 제가 시험 점수 잘 나오도록 기도한거... 아시죠?” 교수님이 채점해서 학생에서 돌려주었습니다. 거기에는 이렇게 써졌습니다. “하나님은 백점, 넌 빵점” 우리는 불의할지라도 하나님은 항상 의롭습니다. 


세 번째 궤변은 ‘선을 이루기 위하여 악을 행하자’는 주장입니다(8). 내가 죄를 많이 지을수록 하나님의 자비로움이 더 드러나는 것 아닌가? 하는 논리입니다. UBF 어떤 학생이 있었습니다. 그는 ‘내 인생이 너무 밋밋해서 소감에 은혜가 없어’ 그러면서 ‘세상에 나가 죄를 많이 지어보고 돌아와서 소감을 발표하면 더 은혜가 있을거야’ 하면서 UBF를 잠시 떠나겠다고 하였습니다. 이 말에 여러분들은 어떻게 답해주시겠습니까? 사도바울은 ‘그들은 정죄받는 것이 마땅하다’고 합니다. 행여나 이런 비합리적인 논리로 주님을 떠나지 않길 바랍니다. 


우리는 근래에 사무엘하 일용할 양식을 보았습니다. 거기에 보면 다윗이 우레아의 아내 밧세바를 범한 후 그 결과가 어떠했습니까? 다윗이 회개할 때 하나님께서 용서해 주셨지만 다윗이 죄의 세력에 짓눌려 처철한 고통을 맛봅니다. 입술이 마르고 뼈가 녹고 눈에 눈물이 마르지 않는 심적 고통을 겪었습니다. 이뿐입니까? 그의 집에 칼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자식들이 간음죄를 행하고 서로 죽이고 마침내 압살롬이 반역하여 다윗이 쫓기는 신세가 되지 않았습니까? 죄의 즐거움은 잠깐이지만 죄로 인한 고통은 또 그 결과는 평생을 갑니다. 혹여 우리 가운데 ‘선을 이루기 위해 악을 행하자’라든지, ‘주님이 다 용서해 주실 것이니 죄를 짓자’ 이런 마음을 갖지 않기를 바랍니다. 


바울은 유대인들의 문제점을 지적한 후, 9절에서 ‘그러면’이란 말로 환기를 시킵니다. 다함께 9절을 읽겠습니다. “그러면 어떠하냐 우리는 나으냐 결코 아니라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 아래에 있다고 우리가 이미 선언하였느니라” 여기서 ‘우리’는 누구일까요? 바울을 포함하여 로마 성도들, ‘그리스도인들’을 말합니다. 지금까지 유대인이나 헬라인들의 죄를 고발했는데~ ‘우리는 나으냐 결코 아니라’고 합니다. ‘나 자신’을 포함하여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결코 그들보다 낫지 않다고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10-18절까지에서 그 이유를 알려줍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 깨닫는 자도 없다.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다.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었다. 선을 행하는 자가 하나도 없다. 그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다. 그 혀로는 속임을 일삼는다.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다.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다. 그 발은 피 흘리는데 빠르다. 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다.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한다. 그들의 눈 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다.” 여기 나오는 구절들은 구약의 시편과 이사야서 말씀들을 인용한 것입니다. ‘그 발은 피 흘리는데 빠른지라’ 이 말씀만 이사야서이고 나머지는 다 시편 말씀입니다. 그리고 인용된 그 시편 말씀은 모두 ‘다윗’이 쓴 것으로 봅니다. 다윗이 누굴 대상으로 썼는가? 악한 자들, 그리고 자기를 대적하는 자들, 그리고 다윗 자신의 죄에 관해 기록한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그토록 존경하던 다윗도 자신이 죄인이라고 고백합니다. 지금 이것을 기록하는 사도바울은 어떤 마음이었을까요? 자신의 죄에 대해 깊이 성찰했을 것입니다. 그는 유대인으로서 자부심이 대단했습니다. 율법에 충실한 사람이었습니다. 할례받은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께 대한 열심은 둘째 가라면 서러울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을 대적하고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였습니다. 예수님을 만난 후 그는 자신이 얼마나 극악무도한 죄인인가를 깨달았고, 말년에 ‘나는 죄인 중에 괴수’라고 현재형으로 고백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된 지금도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정말 자신을 죄인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우리 그리스도인들을 포함하여 모든 인류가 죄 아래 있다고 성경은 선포하고 있습니다. 마틴 루터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인간이 죄를 지어서 죄인이 아니라, 죄인이기 때문에 죄를 짓는다” 인간에게 누가 죄짓는 방법을 가르쳐 주지 않았어도 인간은 죄짓는 유전자를 가지고 태어났습니다. 그래서 다윗이 “내가 죄악 중에서 출생하였음이여 어머니가 죄 중에서 나를 잉태하였나이다”(시51:10),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시51:3)” 라고 고백한 것 아닙니까? 세상 사람들은 개인의 자유와 법 앞에서 만인이 평등하다고 강조합니다. 반면 성경은 모든 인간이 죄인이란 점에서 평등하다고 강조합니다. 단 한명도 예외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왜 율법을 주셨는가? 19,20절을 다 함께 읽겠습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에 있게 하려 함이라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울법은 우리에게 많은 유익을 줍니다. 율법은 거룩하며, 우리의 영혼을 소생케 하며, 구원의 길로 인도하는 안내자가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율법의 가장 중요한 기능은 세상으로 죄를 깨닫도록 하는 것입니다. 이론적으로는 율법을 온전히 행하면 의롭게 되지만 죄로 오염된 인간이 이를 온전히 지킬수 없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인간이 자신의 행위나 노력으로 구원얻을 길이 전혀 없습니다. 구원에 관한 한 인간은 완전히 수동적일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몸에 이상이 생기면 병원에 가서 피검사나 엑스레이를 찍습니다. 이것들은 우리에게 치료의 필요성을 알게 해 줍니다. 그러나 치료해 주지는 못하죠. 이처럼 율법도 인간이 죄인이란 사실을 일깨워 주지만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죄인들에게 나타났고, 죄의 대가로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을 받아야 합니다. 마치 우리가 등산하다 낭떠러지로 굴러 떨어져 구덩이에 갇힌 형국과 같습니다. 망망대해에서 바다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는 상황과 같습니다. 누군가가 돕지 않는다면 소망이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인간의 실존입니다. 이제 어찌해야 합니까? 다행스럽게도 바울은 인간의 죄 문제와 심판의 문제를 해결할 방법을 제시합니다. 그것이 다음에 나옵니다. 다음 주 말씀을 기대하게 됩니다. 참고로 사도요한은 요1:17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 다음 주 말씀에서 우리가 그 해결책을 찾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