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로마서 제 5 강 그의 피를 믿음으로 말씀/ 로마서 3:21-31 요절/ 로마서 3:25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아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오늘 말씀은 로마서 5강입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4번 로마서 주일 말씀을 들었는데 간단히 정리해 봅니다. 우리는 1강에서 사람들은 누구나 하나님을 알 수 있지만 하나님을 고의로 부인하고 있다는 것을 보았습니다. 2강에서 바울은 특히 이방인들의 죄 문제를 드러냈습니다. 3강에서는 남을 판단하는 사람들의 문제, 그리고 지난 4강에서는 유대인들의 죄 문제를 드러냈습니다. 그래서 지난 4강까지의 결론은 무엇이었습니까? 모든 사람이 죄인이다, 예외가 없다, 모두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인간은 마치 사형 선고를 받고 그 집행을 기다리는 사형수와 같게 되었습니다. 어느 누구도 스스로 이 절망 상태에서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런 인생들을 위하여 구원의 역사를 시작하십니다. 이제 새로운 희망의 메시지가 주어집니다. 지난 강의까지가 인간론, 죄악론이었다면 오늘 말씀은 구원론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심판 받을 인생들을 어떻게 구원하십니까? 오늘 말씀을 통해 예수님의 속량의 은혜, 그의 피의 은혜가 우리 심령에 충만하게 임하기를 기도합니다. 1. 율법 외에 나타난 '하나님의 한 의‘ 21절입니다.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이 말씀은 "이제는"으로 시작합니다. 한글 성경에는 나타나 있지 않지만 원문에는 '그러나'를 의미하는 접속사 ‘de'’가 있습니다. 그래서 영어 성경은 "But now”로 번역합니다. But now! 그러나 이제는! 입니다. 지금까지의 절망적인 인간의 상태에 한 줄기 빛이 비취는 말입니다. 대 전환입니다. 그러면 "그러나 이제는“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습니다.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 율법은 하나님께로부터 나온 것으로 거룩하고 의롭습니다. 그런데 그 율법과 별개의 ‘의’가 하나님으로부터 나타났습니다. 이 별개의 ‘의’는 결론적으로 말하면 법정용어로 "의롭다는 판정"을 말합니다. 율법 아래서 모든 인간은 율법을 지켜야만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고 판정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로마서 3:20 말씀처럼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습니다. 율법으로는 다만 죄를 깨달을 뿐입니다. 그래서 율법 아래서는 아무도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는 판정을 받을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율법을 지킴으로 의를 얻는 방식이 아니라, 다른 방식으로 의를 얻는 방식이 나타났습니다. 이 의를 얻을 때 심판에서 벗어날 뿐만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성이 회복됩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영원한 생명을 누립니다. 율법과 별개로, 곧 율법과 전혀 무관하게 세상에 새롭게 나타난 이 하나님의 의는 21절 마지막 부분을 보니 뭐라고 되어 있습니까?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무슨 말입니까? 여기서 율법과 선지자라는 말은 구약 성경을 말합니다. 이 하나님의 의는 이미 구약 성경에 증거된 것, 즉 반드시 나타나리라 예언되었던 의입니다. 하나님은 아담의 타락 이후 여자의 후손을 통해 인류를 구원하시겠다는 약속을 이미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모세를 통하여 율법을 주시기 약 600년 전,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으시고 구원자를 보내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수많은 선지자들을 통해 메시야 약속을 하셨습니다. 출애굽 사건, 성전제도, 제사 제도.. 모든 것이 실상 ‘하나님의 의’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내신 이 새로운 의는 율법으로 사람을 구원해 보려다가 안 되어서 다른 방법을 시도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율법은 폐기하고 다른 원칙을 적용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오래 전부터 증거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맨 처음부터 이 의를 통해 인생들을 구원하기로 뜻을 정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면 이 하나님의 의의 내용이 무엇입니까? 22절입니다.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인생들에게 주시는 의입니다. 이 의는 세상의 모든 믿는 사람들에게 효력이 미칩니다. 믿지 않는 자에게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마치 전기 콘센트에 전기가 흐르고 있는데 플러그를 꽂아야만 전기가 흐르는 것과 같습니다. 믿지 않는 자에게는 효력도 없고 영향도 없습니다. 그러면 사람은 무엇을 믿어야 하는 것인가요?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는다고 할 때 예수님의 여러 가지를 믿을 수 있습니다. 그 분은 세상에서 아주 훌륭한 삶을 사신 분이라고 믿을 수 있습니다. 그 분은 선한 분이요 기독교를 창시한 분이라고 믿을 수도 있습니다. 그에게 기도하면 복을 주시는 분이라고 믿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믿음은 여기에서 말하는 바, 곧 우리에게 하나님의 의를 부여하여 우리를 구원하는 믿음은 아닙니다. 우리를 구원하는 믿음, 곧 Saving faith 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의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부활하신 사실을 믿는 믿음입니다. 이 믿음이 의를 얻게 하는 믿음입니다. 우리로 구원을 얻게 하는 이 믿음에 대해 로마서 10:9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이 믿음을 가지는 누구에게나 하나님의 의가 미칩니다. 하늘로부터 믿음의 통로를 통하여 하나님의 의가 그에게 도달합니다. 여기에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한국 사람이나 미국 사람, 빈부귀천, 남녀노소 차별이 전혀 없습니다. 질문이 생깁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이 도대체 무엇이길래 내가 하나님의 의를 받는다는 말인가? 어떻게 믿는다는 한 가지 이류로 내가 지옥 심판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단 말인가? 이에 대한 답변이 복음의 핵심 중의 핵심인 23,24절입니다. 2. 우리를 속량하신 예수님 23,24절입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23절은 앞의 19절과 비슷한 말씀입니다. 절망적인 인간의 상태를 말합니다. 23절은 먼저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다고 선언합니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생각합니다. "나는 죄를 범하지 않았지만 아담의 범죄로 인해 그 후손인 내가 자동적으로 심판을 받게 되었어." 아닙니다. 아담의 범죄로 세상에 죄가 들어온 것은 사실이지만, 우리 각자가 다 범죄하였습니다. 내가 지은 죄에 대해 내가 책임을 져야합니다. 나의 죄 때문에 내가 죽음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범죄하였습니다. 죄를 범한 인간에게는 장차 하나님의 영원한 정죄를 받는 것과 별개로, 이 땅에서 이미 그들에게 죄의 효력이 나타났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인간이 더 이상 하나님의 영광을 반영할 수 없는 상태가 된 것입니다. 즉, 인간은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영광은 '무게'라는 뜻이 있습니다. 죄를 범한 인간을 저울에 달아보니 하나님의 요구하시는 수준에 미달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중량미달! 금이나 은의 경우, 함량 미달! 사람이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지 못하는 상태가 된 것입니다. 한 마디로 내면이 병들게 되었습니다. 오늘날 사람들이 왜 이렇게 불행합니까? 왜 사회가 이렇게 병들었습니까? 한 마디로 모든 사람이 죄로 인해 오염되어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내면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고 회복의 역사가 시작될 때 우리의 내면이 회복됩니다. 병든 내면이 치유가 됩니다. 하나님이 본래 창조하신 그 형상이 우리 내면에 회복됩니다. 그런 삶에 참된 기쁨과 행복이 있습니다. 그런 삶이 이 땅에서 천국을 누리고 또 그 삶은 영원까지 이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게 된 인간을 위해 하나님은 무슨 일을 하셨습니까? 독생자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셔서 속량을 이루셨습니다. 여기서 속량(Redemption) 이라는 개념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속량”은 로마시대의 노예제도를 배경으로 합니다. 당시에는 어떤 사람이 빚을 갚지 못하면 자기 몸을 노예로 팔아야 되었습니다. 전쟁에서 포로가 되면 노예로 팔리기도 했습니다. 이 경우 노예는 스스로 자기를 자유민이 되게 할 수는 없었습니다. 내가 만일 노예라면, 어떤 자유인이 나의 빚을 치르고, 나의 노예 값을 지불하고 나를 사서 자유하게 해주어야만 비로소 자유롭게 될 수 있었습니다. 이때 지불하는 돈을 속전(Redemption)이라고 하고 그렇게 대신 속전을 내어 노예를 사서 풀어주는 것을 속량이라고 합니다. 요한복음 8:34에서 예수님은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고 하셨습니다. 우리 인간은 죄를 범함으로 죄에게 팔려 죄의 종이 된 것입니다. 이런 우리를 위해 예수님이 우리 대신 속전을 지불하셨습니다. 그 속전은 바로 예수님의 생명이셨습니다.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으신 것입니다. 우리를 속량하신 것입니다. 세상의 어떤 종교도 신이 그를 섬기는 사람들을 위해 죽는다는 것은 없습니다. 그저 어르고 달램을 받아 인간을 축복하는 정도입니다. 사람을 낮아져 섬긴다는 신도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님은 우리를 속량하시기 위해 자기 몸을 십자가에 내어 주신 것입니다. 이 사실은 너무나 쇼킹하여 사실 하나님은 예수님 이전 1,400년 동안 이런 일이 있을 것을 증거해 주셨습니다. 곧 제사제도입니다. 레위기를 보면 인간의 죄를 속하기 위해서는 수소나 암양, 염소 등을 제단에서 잡습니다. 칼로 목을 찔러 죽이고 그 피를 갖고 1년에 한번 지성소에 들어갔습니다. 죄에는 반드시 피가 따라왔습니다. 피가 없이는, 곧 죽음이 없이는 사함이 없었습니다. 죄의 대가는 죽음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피 흘려죽으신 것은 우리 인생들을 속량하기 위한 죽으심입니다. 예수님은 창조주이신 성자 하나님으로서 그 분의 피, 그 분의 생명은 이 세상 모든 인류의 생명보다 더 귀합니다. 더 가치가 있습니다. 그래서 그 분의 피는 모든 인류의 죄를 사하는 가치, 곧 능력이 있는 것입니다. 미국의 한 목사님은 어느 날 설교 후에 나가보니 교회 밖에 세워둔 자기 차가 견인되어 간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가 차를 찾으러 가니 차가 견인되어 있는 장소가 "Redemption Center"(속량쎈타) 라고 쓰여 있었습니다. 직원에게 무려 200불의 벌금을 내니 주차 위반 딱지에 "Redeemed" (속량되었음) 라고 스탬프를 찍어 주었습니다. 그러고 나서 그는 비로소 자기 차를 가져갈 수 있었습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은 자기 목숨으로 우리를 위해 속전을 내셨습니다. 우리 각자에게는 “Redeemed" (속량되었음) 라는 영적인 스탬프가 찍혀 있는 것입니다. 바라바라는 사람이 생각납니다. 그는 민란을 꾸미고 그 민란 중에 살인한 자입니다. 사람을 죽인 자입니다. 그래서 십자가형을 언도받고 사형 집행일자만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제 그 집행일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간수가 옥문을 열어주며 말합니다. “너는 이제 자유다! 감옥을 나가라!” “어,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죠? 왜 죽어야할 제가 아무 한 일도 없이 자유의 몸이 되나요?” “네가 나가는 이유는 바로 저 사람, 예수가 너 대신 죽게 되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나의 자리에 죽으시고 내가 그의 자리를 얻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대속함의 은혜를 입은 바라바들입니다. 우리는 대속함 (우리 대신 속량함, 또는 구속함)을 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입니다. 찬송가에 ”대속하신 예수님“, ”속량 받는 우리“, ”구속함을 받은 우리“ 등의 표현이 많이 나오는데 이제는 우리가 그 뜻을 잘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24절을 다시 한 번 봅시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속전은 예수님이 내셨습니다. 자기 몸을 제단에 드리셨습니다. 그 결과 우리가 속량함을 받았습니다. 값은 그가 내시고 혜택은 우리가 받은 것입니다. 우리는 값없이, 공짜로, 거저, 은혜 (곧 아무 자격이 없지만 선물을 받음)로 죄를 사함 받고 의롭다함을 받은 것입니다. 값없이, 공짜로, 거저 받았다고 값싼 것은 아닙니다. 사람이 도저히 갚을 수 없기에, 예수님이 자기 생명을 대신 내어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무엇입니까? 다만 예수님의 이 은혜를 감사할 뿐입니다. 일생 감사하고 또 감사할 뿐입니다. 3. 화목제물 되신 예수님 바울은 23,24절에서 “속량”이라는 개념으로 우리가 죄로부터 벗어나 의롭게 된 것을 설명하였습니다. 이제 이어지는 말씀에서는 우리가 예수님이라는 화목제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진노로부터 구원받은 것으로 설명을 합니다. 25,26절입니다.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아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를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라" 여기서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아 화목제물로 세우셨다“고 하는데 우리는 먼저 화목제물이 무엇인지 이해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여기서 ”화목제물“이라고 번역된 단어는 헬라어 '힐라스테리온'인데, 하나님과 죄인을 화목하게 하는 제물 곧 ”속죄제물“을 뜻합니다. 구약의 제사제도에서 일반적으로 말하는 화목제물이 아니라, 대 속죄일의 속죄 제물로 세우신 것을 말합니다. 유대 달력으로 7월10일은 대 속죄일입니다. 그날 유대의 대제사장은 성전에서 가장 거룩한 장소인 지성소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그 날만 들어갈 수 있었고 그 날에 반드시 들어가야 되었습니다. 종교적으로 가장 높은 위치에 있는 대제사장이라도 그 곳에 그냥 들어갈 수는 없었습니다. 반드시 송아지나 염소를 죽여 피를 내어 그 피를 양푼에 담아 들고 들어가야 되었습니다. 그렇게 하지 아니하면 죽임을 당했습니다. 대제사장은 짐승의 피를 손가락으로 찍어 속죄소 위 앞쪽에 일곱 번 뿌리고, 앞바닥에 일곱 번 뿌렸습니다. 또 언약궤 앞바닥에도 뿌렸습니다. 이렇게 함으로 이스라엘 자손이 범한 모든 죄를 속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규례들을 주시고 순종하게 하심으로 이를 통하여 피 흘림이 없으면 죄 사함이 없다는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히 9:22) 구약에서 대제사장이 가지고 지성소에 들어간 짐승의 피는 일 년 동안 지은 죄를 사하는 능력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매년마다 짐승의 피를 뿌려 죄 사함을 받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피는 다릅니다. 예수님은 짐승의 피가 아니라 자신의 피로, 단번에 영원한 제사를 드리셨습니다. 하나님은 죄를 미워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죄로 인해 매일 분노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화목제물이 되셨습니다. 그 제물은 하나님의 모든 진노를 완전히 누그러뜨렸습니다. 화목제물 되신 예수님으로 인해 하나님의 진노가 해결되었습니다. 영원히! 이 예수님의 피는 그 효력이 완전하고 영원합니다. 더 이상 다른 어떤 제사도 필요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자신을 제물로 드리심으로 이제 그림자였던 모든 제사 제도는 끝났습니다. 폐지되었습니다. 예수님의 피의 효력, 곧 그의 죽음으로 인한 대속의 능력은 완전합니다. 영원합니다. 누구든지 예수님의 피를 의지하여 믿음으로 나오는 자는 죄 사함을 받습니다. 아무리 흉악한 죄인이라도 그의 죄가 눈과 같이, 양털같이 희어집니다. 예수님의 피는 우리를 죄에서 정결하게 할 뿐 아니라 더 나아가 우리의 더러워진 양심을 깨끗케 하고, 죽은 행실에서 떠나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합니다. (히9:12-14) 예수님을 화목제물로 세우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지금까지 모든 제사의 제물은 사람이 준비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라는 화목제물은 하나님이 준비하셨습니다. 창세기 22장을 보면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과 함께 모리아 산으로 갑니다. 영특한 이삭이 아버지에게 묻습니다. "아버지, 불과 나무는 있거니와 번제할 어린 양은 어디 있나이까?" 이에 대해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친히 준비하실 것이라고 대답합니다. 실제로 하나님이 준비하십니다. 아브라함은 이삭대신 하나님이 준비하신 양을 잡아 번제로 드립니다. 아브라함은 그 모리아 땅을 “여호와 이레”라고 부릅니다. 하나님이 준비하신다는 것입니다. 2천년 후 바로 그 장소, 모리아 산에서 하나님이 예비하신, 여호와이레 어린 양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신 것입니다. 실로 하나님의 경륜이 놀랍지 않습니까? 그러면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화목제물로 세우신 목적이 무엇입니까? 25b,26절을 다시 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를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은 사람들이 짓는 죄에 대해 길이 참으셨습니다. 참지 않으셨다면 노아의 방주 같은 사건이 세상에 여러 번 있었을 것입니다. 지구상의 인류는 다 멸망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람들의 죄를 길이 참아오셨습니다. 그러나 영원히 참을 수는 없으십니다. 그 경우 심각한 문제가 발생하기 때문입니다. 곧 죄를 벌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은 공의롭지 않은 분으로 드러납니다. 하나님의 가장 큰 속성은 거룩함입니다. Holy, Holy, Holy 하신 분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함이 사람에게 나타나는 방식이 공의입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죄를 심판하심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참으시고, 참으시고, 또 참으시다가 마침내 예수님을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게 하심으로 하나님은 죄를 심판하시는 의로우신 분이심을 나타내셨습니다. 하나님의 그 동안의 죄에 대한 모든 진노를 예수님께 쏟아 부으신 것입니다. 이를 통해 온 세상에 하나님의 거룩하심, 공의로우심을 드러내셨습니다. 26절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시기 위함이라는 말이 3번이나 반복됩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화목제물로 세우신 그 일차적인 목적은 우리에 대한 사랑을 나타내심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나타내기 위함입니다. 더 나아가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심입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을 동시에 드러낸 하나님의 절묘한 지혜입니다. 이해하기도 쉽지 않은 이 놀라운 사건을 누가 생각이라도 할 수 있단 말입니까? 천사라도 불가능합니다. 실로 예수님의 십자가는 오묘하신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4. 오직 믿음으로 이상과 같은 놀랍고도 위대한 일을 누가 하셨습니까? 홀로 하나님이 하셨습니다. 그래서 27절입니다. "그런즉 자랑할 데가 어디냐 있을 수가 없느니라 무슨 법으로냐 행위로냐 아니라 오직 믿음의 법으로니라“ 우리는 우리의 행위로 절대로 의에 이를 수가 없었습니다. 이런 우리에게 하나님은 예수님이 행하신 속량 때문에, 예수님이 자신을 화목제물로 드리셨기 때문에 우리에게 ‘하나님의 의’를 주셨습니다. 이 의는 하나님이 의롭다고 쳐주시는 의, 법정용어로 칭의(justification)입니다. 이 하나님의 의, 곧 우리를 의롭다고 인정하시는 칭의로 말미암아 우리는 모든 죄 사함을 받고 하나님과의 관계성이 회복됩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하신 이 모든 은혜의 역사가 우리에게 효과가 미치기 위해서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위에서 보았듯이 이 ‘하나님의 의’는 ”모든 자“가 아니라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칩니다. 믿는 자에게만 미칩니다. 오직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믿음이 무엇이며 왜 믿음만 있으면 되나요? 존 칼빈은 믿음이란 “하나님의 선물을 받기 위해 내미는 손“이라고 하였습니다. 좀 더 자세하게 표현하면 하나님이 내 손에 얹어 주신 것을 내가 물리치지 않고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믿음은 받아들이는 것, 영접하는 것입니다. 믿음은 선한 행위가 아닙니다. 신뢰하고 영접하는 것입니다. 에베소 2:8은 이 믿음도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왜 하필 믿음입니까? 왜 하나님은 나의 성품이나, 능력, 학벌을 기준으로 하지 않으시고 믿음을 보시나요? 왜 하나님은 하필 믿음이라는 방법으로 사람을 구원하십니까? 이는 오직 우리가 구원받는 것이 오직 하나님의 은혜에 속하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들로 오직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리게 하기 위함입니다. 무엇보다 성경은 믿음이란 신뢰하는 것, 그럼으로써 믿는 대상과 하나 되는 것, 연합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예를 들어, 버스를 타고 가는 사람이 흔들리지 않고자 손잡이를 잡습니다. 손잡이를 믿는 것입니다. 그 손잡이를 잡는 순간에 나는 손잡이와 하나 됩니다. 연합합니다. 그래서 버스가 흔들려도 나는 안전합니다. 그와 같습니다. 내가 예수님을 믿음으로 예수님과 내가 하나로 연합되어 그가 하신 일을 내가 한 일로 하나님이 쳐주십니다. 인정해주십니다. 왕자님과 결혼한 여인은 왕자의 특권을 같이 누리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결론은 이것입니다. 우리가 의를 얻은 것으로 우리가 자랑할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다만 예수님을 속량물로, 화목제물로 세우신 하나님께 감사할 뿐입니다.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을 믿도록 하신 하나님께 감사할 뿐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와 영광을 찬송할 뿐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의를 얻는 길, 구원을 얻는 길은 나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는 것 외에는 다른 길이 전혀 없습니다. 사람은 어떤 비범한 노력으로도 스스로의 힘으로 구원에 이를 수 없습니다. 우리들이 구원받는 길은 ‘하나님의 의’이신 그리스도의 피를 믿는 길밖에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피가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에서 우리를 지켜 줍니다. 이 땅에서, 그리고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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