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로마서 제 6 강 믿는 자를 의롭다 여기시는 하나님 말씀/ 로마서 4:1-25 요절/ 로마서 4:5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하지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이번에 한국 문학계에 아주 기쁜 소식이 전해졌죠. 한강 작가가 노벨문학상을 탄 것입니다. 예전에 그녀가 이런 말을 했죠. “내가 쓴 대표적 작품인 ‘채식주의자’를 읽고서 ‘너무나 낯설고 당황스럽다’란 반응을 보인 독자들이 많았다”고 했습니다. 우리 한국 독자들이 그녀의 소설을 이해하기 쉽지 않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바울은 지난주 말씀에서 ‘믿음으로 의롭다 여김을 받는다’는 ‘이신칭의’의 원리를 설명했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에게 이 개념은 아주 낯선 것이었고, 그들을 당황스럽게 했습니다. 구약에서 추구하고 있는 구원의 길과 예수님이 열어 주신 구원의 길이 과연 같은지에 대한 의문이 있었습니다. 그들 중 어떤 이들은 바울의 주장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결국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 외에 모세가 전한 할례와 율법을 다 준수해야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여 구원의 복음을 율법화시키고 잘못된 가르침을 전하였습니다. 그것이 바로 사도행전 15장에 나오는 내용이요,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예루살렘 총회까지 열리지 않았습니까? 그렇다면 예수님 오시기 이전의 구약 성도들은 과연 어떻게 의롭게 되며, 어떻게 구원을 받았을까요? 그것을 4장에서 다룹니다.
자, 어떤 예가 좋을까요? 유대인들에게 가장 설득력 있는 두 인물, 아브라함과 다윗을 예로 듭니다. 이를 통해 ‘이신칭의’의 구원의 원리가 바울이 새롭게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구약 시대에도 적용되었던 원리임을 알립니다. 과거나 현재나 미래나 구원의 도리는 단 한 가지입니다. 믿음으로 의롭게 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아브라함과 다윗에게 적용되었던 믿음의 원리가 오늘날 우리에게 어떻게 적용이 되는지를 배우길 기도합니다.
1-2절을 다 함께 읽겠습니다. “그런즉 육신으로 우리 조상인 아브라함이 무엇을 얻었다 하리요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면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 아브라함이 누구입니까? 유대인의 조상입니다. 뿐만 아닙니다. 마1:1절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라” 그는 메시야의 조상입니다. 자, 묻겠습니다. 아브라함이 육신, 즉 행위로써 무엇을 얻었습니까? 그가 자랑할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많이 있습니다. 그는 처음 하나님께서 부르셨을 때 갈 바를 알지 못하였으나 본토 친척 아비의 집을 떠났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전적으로 순종하여 좇았습니다. 조카 롯이 전쟁에서 포로로 끌려갔을 때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추격하여 조카롯을 마침내 구출했습니다. 전리품은 하나도 취하지 않고서 다 돌려주고 나누어주었습니다. 또한 그는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자기에게 속한 모든 자들에게 할례를 행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은 그 지역에서 부자요, 아름다운 아내를 가진 자요, 명망있는 족장으로 알려졌습니다. 자, 그렇다면 이러한 것들이 그를 의롭게 하였습니까? No. 성경은 아니라고 합니다. 아브라함이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자랑할 것이 많이 있었겠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없다고 합니다. 그도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성경이 말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3절을 읽겠습니다.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냐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진 바 되었느니라” 바울이 인용한 이 내용은 창15:6절에 나옵니다. 그가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졌습니다.
4,5절을 다함께 읽겠습니다.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이 은혜로 여겨지지 아니하고 보수로 여겨지거니와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하지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이 내용이 오늘 메시지의 핵심이요 요절입니다. ‘이신칭의’의 원리를 잘 나타낸다 하겠습니다. 본문은 아브라함을 염두에 두고 표현한 것인데 ‘일하는 자’란 표현은 ‘스스로 의롭게 될 수 있는 사람’을 말합니다. 자기 힘으로 노력해서 의롭게 될 수 있는 사람을 의롭다고 인정하는 것은 전혀 은혜가 될 수 없습니다. 당연한 일이고, 상식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어떤 방식으로 의롭게 여기셨나요? ‘하나님을 믿으매’입니다. 이렇게 표현한 이유가 뭘까요? 만약 그가 그의 행위로 의롭다 함을 받을 수 있었다면 이런 표현을 쓰지 않았겠죠. 그러면 무슨 뜻이겠습니까? ‘그가 의롭게 여김을 받는데 그의 공로가 1도 없다. 오직 믿음의 법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의롭다 함을 받았다.’ 이런 뜻입니다. 이로 말미암아 그는 하나님께서 의롭다고 공개적으로 표명해 준 성경상의 첫 번째 인물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그를 ‘믿음의 조상’이라 부릅니다.
뿐만 아닙니다. 하나님은 경건하지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십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전에 하나님은 경건하지 아니한 자를 어떻게 대하셨습니까? 하늘로부터 진노를 나타내셨습니다(1:18). 그리고 진노를 내리지 않을 경우 어떻게 하셨습니까? 길이 참으시는 중에 죄를 간과하셨습니다(3:25). pass over 하셨습니다. 애굽의 장자 재앙 때 문설주에 발라진 피를 보고 심판하지 않고 넘어간 것, 그리고 짐승의 피로 제사를 드리면 일시적으로 넘어가 준 것이 그 대표적인 사례라 할 수 있습니다. 이제껏 하나님은 경건하지 아니한 자들을 향하여 두 가지 방식, 진노하시거나 간과해주시는 방식을 취하셨습니다. 구약 성경이 이를 입증합니다. 그런데 이제 하나님의 방식이 바뀌었습니다. 경건하지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십니다. 그 변화의 각도을 보십시오. 30도가 아니고, 60도도 아니고, 90도도 아니고, 정확히 180도, 정반대로의 변화입니다. 이렇게 달라진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예수께서 화목제물이 되사 인간이 받아야 할 모든 진노가 그에게 다 쏟아 부어졌기 때문입니다. 우리 대신 죄의 형벌을 받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누가 의롭다 여김을 받게 되었습니까? 경건한 자가 아닙니다. 경건치 아니한 자입니다. 놀랍지 않습니까? 경건하지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 하나님은 의롭다 하여 주십니다. 이 원리가 ‘이신칭의(以信稱義)’입니다. 자신을 경건한 사람이요, 비교적 의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여기에 해당되지 않습니다. 그 사람은 아직 구원받을 소망이 없습니다. 한자 ‘義’를 보십시오. 하나님의 어린양이 내 머리 위에 있는 저주를 가져가심으로 의가 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의롭다 여겨주시는 사람은 자신이 죄인임을 인식하고 믿음으로 어린양 예수님을 내 머리의 주인으로 모시는 자입니다.
바울 당시 유대인들 사이에는 ‘아브라함의 의를 근거로 그의 혈통적 후손들이 혜택을 받고, 심지어 구원을 요구할 수 있다’는 교리가 팽배했습니다. 그 근거로 신4:37 ‘여호와께서 네 조상들을 사랑하신고로 그 후손인 너를 택하시고’란 말씀을 예로 들었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후손의 권리’를 말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조상들에게 하신 약속을 신실하게 성취하신다’는 것을 말한 것입니다. 그들은 ‘아브라함이 의롭게 된 것’과 ‘아브라함의 후손의 의미’에 대해 잘못 이해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마3:9을 보면, 세례요한이 자기에게 나아온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에게 이런 말을 합니다.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리라’ 이렇게 책망합니다. 또한 예수께서 자신을 믿는 유대인들에게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요8:31,32)하셨으나, 유대인들은 ‘지금 뭔 말 하세요. 우리는 아브라함의 자손이에요. 남의 종이 된 적이 없는데 어찌하여 우리가 자유롭게 되리라고 말합니까? 우리는 자유인이에요’ 이렇게 반발하였습니다. 그들은 혈통적으로 아브라함의 후손이였기에 자유인, 즉 당연히 구원받은 자라고 생각했습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유대인들의 잘못된 생각이 무엇입니까? 그들은 아브라함을 위대한 조상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거룩하다고 생각했어요. 완벽하다고 생각했어요. 의인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러나 정작 그가 어떤 방식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는지에 관한 관심은 1도 없었습니다. 제가 질문합니다. 진정으로 위대한 것이 무엇입니까? 아브라함입니까? 아니면 자력으로 의롭다 함을 받지 못하는 인간을 의롭다 여김을 받게 하는 복음입니까? 복음이 위대한 것 아닙니까? 또한 이러한 ‘이신칭의’의 원리를 세우신 하나님이 위대한 것 아닙니까? 자신의 보혈의 피로 이 원리를 완성시키신 예수 그리스도가 위대한 것 아닙니까?
사도 바울은 6-8절을 통해 ‘이신 칭의’ 원리가 인간의 행복과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알려줍니다. 여기에 인용된 말씀은 시32편으로서 다윗이 쓴 것입니다. 다윗이 어떤 사람입니까? 유대인들이 의인으로 인정하고 존경했던 이스라엘의 위대한 왕입니다. 그가 어떤 복을 누렸습니까? 그는 왕이었습니다. 시인이요, 음악가요, 장군이었습니다. 그에게는 많은 대적자들이 있었지만 원수들은 그 앞에서 패망하여 물러갔습니다. 소년시절 물맷돌로 거인 골리앗을 무찌른 사건은 너무나도 유명합니다. 전쟁을 했다 하면 백전백승이었습니다. 그의 나라는 나날이 확장되어 갔습니다. 그의 왕위는 세월이 흘러갈수록 견고해져 갔습니다. 세상에 이보다 더 행복한 사람이 있을까요? 참으로 듣기만 해도 부럽습니다. 하지만 성경을 보십시오. 그가 이런 것들로 행복을 이야기합니까? 물론 그는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내려 주신 은혜를 인하여 하나님을 찬양하고 감사했습니다. 하지만 밧세바의 일로 죄로 고통할 때, 진정한 행복이 많은 돈이나 권력이나 명예나 전쟁의 승리에 있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런 것들은 인간의 노력으로도 어느 정도 성취할 수 있습니다. 또한 좀 부족해도 행복하게 살 수 있습니다. 하지만 죄의 문제는 다릅니다. 왕이라 해서 그것이 해결됩니까? 그는 밧세바와 간음할 때 ‘왕이니까 얼마든지 가능할 수도 있지’ ‘그 맛에 왕 하는 것 아니겠어~’ 이렇게 생각했을 수 있겠지만, 우리 하나님께서 용서하셨습니까? 눈감아 주셨습니까? 아닙니다. 즉각 나단을 통해 왕이라해도 죄만큼은 자동 처리될 수 없음을 분명히 일깨워 주셨습니다. 다윗이 얼마나 가슴 뜨끔했겠습니까? 그래서 다윗이 지금 사람이 일한 것이 없어도 의로 여기심을 받는 자의 행복이 어떤 것인가? 만일 그렇게만 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노래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윗의 이러한 심정이 이해가 갑니까? 그런데 이신 칭의 원리에 의해서 불법을 저지른 사람이, 그리고 일한 것이 없는 사람이 믿음으로 죄의 문제가 깨끗이 해결함 받고 ‘죄없다’ 판결을 받았다고 합니다. 세상 천지에 이보다 더한 행복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이러한 복을 누리는 사람은 다윗이 누린 외적인 복을 가지지 못했다 할지라도, 진정으로 행복한 사람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이신 칭의’의 진리를 한마디로 대체하면 ‘복음’입니다. 기쁜 소식, 행복한 소식입니다. 이 소식을 듣는 사람은 뛸 듯이 기뻐하게 되어 있습니다. 영혼이 소스라치게 놀라며 살아나게 되어 있습니다. 세리, 죄인 뿐 아니라 다윗과 같이, 바울과 같이 좋은 조건에 있는 사람이라도 기뻐 뛰게 되어 있습니다. 하박국 선지자가 ‘무엇~ 무엇이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합3:17,18) 말한 것처럼 우리도 이 기쁨과 행복을 마음껏 구가하며 살아가길 기도합니다. 구원의 확신을 가집시다.
이 복을 누가 누리게 됩니까? 유대인들은 할례자만이 누린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언제 의롭다 여김을 받았습니까? 할례를 받기 14년 전입니다. 이는 아브라함이 할례받은 자의 조상이 될뿐 아니라 할례받지 아니한 자의 조상도 된다는 뜻입니다. ‘이신칭의’의 행복은 그가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아브라함의 믿음의 자취를 좇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누리게 됩니다.
그렇다면 할례와 믿음은 어떤 관계입니까? 할례(순종 또는 율법)는 믿음의 증표일 뿐입니다. . 할례는 아브라함이 받은 구원의 ‘열매’이지 구원의 조건은 아닙니다. 루터는 ‘은혜와 율법을 혼동하면 안된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순종해서 자유를 얻은 것입니까? 아닙니다. 자유를 얻었기 때문에 순종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믿어 순종케 하나니’ 믿음 후에 순종이 옵니다. (행위에 따른 구분-도표참조)
13-16절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으로부터 ‘너로 인하여 모든 족속이 복을 얻으리라(창12:3)’는 언약을 받은 이유, 축복을 받은 이유를 말해줍니다. 그것은 아브라함의 믿음 때문입니다. 결코 율법 때문이 아닙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아브라함이 이 약속을 받은 때가 언제입니까? 모세가 율법을 받기 훨씬 이전, 500년 이전의 일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의 상속자가 되리라’한 이 언약은 율법이 아니라 믿음으로 말미암아 받은 것입니다. 그렇다면 율법에 속한 자들이 아브라함의 후사이겠습니까? 아니면 믿음에 속한 자들이 아브라함의 후사이겠습니까? 겉으로는 둘 다 아브라함의 후사입니다. 그러나 율법에 속하였지만 믿음에 속하지 아니한다면 그는 혈통적으로 아브라함의 후손일지는 몰라도 진정한 의미에서 아브라함의 후손이 아닙니다. 만약 율법에 속한 자들이 후사이면 믿음은 헛것이 되고 약속은 폐하여질 것입니다. 만약 하나님의 약속이 율법 준수를 조건으로 내걸었다면 하나님의 은총은 사라지고 심판만이 남게 될 것입니다. 율법을 지킬 수 없는 인간의 무능력이 약속의 실현을 불가능하게 만듭니다. 실제로 아브라함의 상속자가 누가 되었습니까? 아브라함이 상속자로 내세웠던 집에서 길리운 다메섹 사람 엘리에셀이었습니까? 아니면 첩의 몸에서 난 이스마엘이었습니까? 하나님은 이들이 상속자가 아니라고 하십니다. 오직 약속으로 난 이삭만이 그의 상속자라 하셨습니다. 이것이 말해주는 바가 무엇입니까? 약속의 상속자, 즉 후사가 되는 것은 은혜로 되는 것이요, 믿음으로 된다는 것입니다. 육신의 자녀가 상속자가 아니요 오직 약속의 자녀가 상속자입니다(롬9:8) 성경은 말합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요1:12,13) 나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만이 세상의 상속자요 아브라함의 후사입니다. 아브라함도, 다윗도 멀리서 그리스도를 바라봄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구원의 원리는 단 한 가지입니다. 구약성도도, 신약성도도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습니다. 그래서 종교 개혁자들이 중세카톨릭의 잘못된 구원관을 바로 잡기 위해 ‘오직 성경, 오직 믿음, 오직 은혜’를 주창한 것 아닙니까?
그렇다면 아브라함의 믿음은 구체적으로 어떤 믿음이었습니까?
첫째,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부르시는 분이라 믿었습니다(17).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너의 후손이 하늘의 별과 같이, 바닷가의 모래같이, 많아지리라” 약속하셨습니다. 또한 “네 씨로 말미암아, 곧 그리스도를 보내사 천하만민이 복을 받으리라”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어떠하였습니까? 그가 백세가 되어 자기 몸이 죽은 것 같았고, 그의 아내 사라도 태가 죽어 경수가 끊어진지 오래 되었습니다. 자식을 낳고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된다는 약속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해 보였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믿음이 약해지지 않았습니다. 능히 이루시는 하나님을 바라보고 소망의 불씨를 끄지 않았습니다. 때가 되자 하나님은 100세된 아브라함과 90세된 사라, 할아버지와 할머니 사이에서 아들을 낳게 하셨습니다. 그뿐입니까? 하나님께서 약속으로 얻게 된 아들 이삭을 번제물로 드리라 할 때 그는 지체하지 않았습니다. 즉시 순종하였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죽은 자도 살리신다는 부활신앙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죽음에서 생명을, 무에서 유를 이끌어 내시는 하나님의 전능성을 믿었습니다.
둘째. 그는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의 근거가 무엇이었습니까? 가능성이었습니까? 자기 추측이나 최면이었습니까? 이런 것들이 아닙니다. 그의 믿음의 근거는 하나님의 약속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않았고, 약속하신 그것을 능히 이루실 것을 확신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약속을 반드시 지키십니다. 상황이 나빠졌다고 바꾸지 않습니다. 또한 그 약속을 이루시는 능력이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불가능하게 보이는 상황에서도 약속을 끝까지 붙들었습니다. 이때 하나님은 그의 믿음을 보시고 의롭다 해 주셨고, 그를 통해 영광을 받으셨습니다.
돌이킴이나 후회하심이 없는 하나님의 약속은 오늘날에도 하나님의 백성을 붙들어 주고 지탱해 주는 든든한 버팀목이 됩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고난을 겪고, 심지어 불신앙에 물들고, 마음이 완악해지기까지 하는 상황에서도 하나님은 언제나 신실하십니다. 고후1:20은 말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니 그런즉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아멘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느니라” 하나님의 약속은 어떤 상황에서도 우리에게 ‘예(yes)’가 됩니다. 지난주 체코의 신한나선교사님의 인생 소감과 선교보고를 들으면서 하나님의 약속이 얼마나 신실하게 성취되는가를 보았습니다. 남편인 신이삭선교사님을 20년 전에 간암으로 사별하시고 앞이 막막했습니다. 어떻게 해야 할지 선택의 기로에 서 있었습니다. 그 때 욥기서를 보던 중에 하나님께서 욥기41:11절 말씀을 주셨습니다. “누가 먼저 내게 주고 나로 갚게 하였느냐 온 천하에 있는 것이 내것이라” 신한나선교사님은 이 말씀을 붙잡고 주장하며 지난 20년간 믿음으로 체코역사를 섬겼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말씀대로 이루시는 것을 체험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언제든지 ‘예스’가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앞에 ‘아멘’으로 화답하길 기도합니다.
이제까지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아브라함의 예를 살펴보았습니다. 이것이 아브라함만을 위한 것입니까? 믿음으로 사는 로마 성도들과 우리들을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언약과 주권에 따라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를 믿는 자들을 위한 것입니다. 우리를 믿음으로 의롭다 하시는 우리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립니다.
자, 그렇다면 ‘이신 칭의’의 원리를 예수께서 어떻게 완성하셨는가? 25절을 보겠습니다. 예수는 우리가 범죄한 것 때문에 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살아나셨습니다. 이것을 ‘의의 전가’라고 합니다. 우리는 원래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었고, 우리 스스로는 아무런 의가 없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상에서 우리가 받아야 할 죄의 형벌을 가져가시고, 대신 그 분이 가진 의를 우리에게 주심으로, 그리스도의 의가 우리의 의로 여겨지게 되었습니다. 마치 ‘피의 교환’과 같습니다. 그 분은 우리의 죽음의 피를 가져가시고, 자신의 생명의 피를 우리에게 내어 주셨습니다.
믿음으로 의롭게 된 우리는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다른 것이 없습니다.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현재 여러 가지 면에서 유례없는 도전에 직면해 있습니다. 신앙을 드러내는 것만으로도 공격 대상이 되는 건 이제 자연스러운 일이 되었습니다. 세상의 거센 저항을 두려워하여 그냥 머물러 있기가 쉽습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두려움을 넘어서야 합니다. 세속화된 세상을 거슬러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를 신뢰하고 살아내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을 향한 믿음 속에서 세상의 정신과 반대되는 거룩함을 선택하고, 소외된 사람들에게 따뜻한 빛이 되어주며, 더 가지려는 삶이 아닌 베풀고 나누는데 적극적이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일상의 삶에서 보여줄 수 있는 믿음의 용기입니다. 우리의 삶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며 생명을 살리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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