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로마서 제 7 강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말씀/ 로마서 5:1-21 요절/ 로마서 5:1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우리는 로마서 4장까지를 통해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 칭의(Justification)에 관한 진리를 배웠습니다. 죄인으로서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었던 우리가 다만 주 예수님을 믿음으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게 된 것은 실로 말로 다할 수 없는 큰 은혜입니다. 이 은혜가 너무 커서 “이제는 여한이 없다, 족하다!” 이런 마음이 듭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는 여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마치 양파 껍질을 벗겨보면 그 속에 새로운 껍질이 나오듯이 의롭다 하심을 받은 은혜에 더하여 이전에는 알지 못했던 은혜와 복들이 나타나게 됩니다. 오늘 말씀 전반부에서는 이러한 복들이 무엇인지 우리에게 구체적으로 알려주고 있습니다. 또한 후반부에서는 아담과 그리스도를 비교하면서 이 복들이 믿는 자들에게 주어지는 것이 확실하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주어지는 복들을 온전히 깨닫고 풍성하게 누리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1절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지난 4장까지의 내용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이 사실은 오늘 진술하는 본문의 대전제가 됩니다. 다시금 강조하지만,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 하는 판정을 받은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는 예수님이 우리 죄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신 것을 믿는 믿음 때문입니다. 이 사실은 너무나도 중요하고 복된 소식이라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혹시 우리 중에 하나님의 의롭다 하심을 얻지 못한 분이 있습니까? 다음 말씀으로 넘어가기 전에 예수님이 나의 죄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신 것을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시인하시기 바랍니다. 나 자신이 의롭다 함을 받은 것, 구원받은 것을 확신할 수 있는 근거는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입니다. 성경이 근거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일점일획도 떨어지지 않습니다. 우리의 신앙의 근거를 언제든지 영원히 변하지 않는 하나님의 말씀에 두기를 기도합니다.
자, 그러면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사람이 누리게 된 첫 번째 복이 무엇입니까? 이는 우리가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게 된 것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화평을 누리자"는 말은 다른 번역을 보면 직설법으로 "화평을 누립니다"로 번역이 되어있습니다. NIV나 KJV 영어 성경에도 "We have peace with God"으로 되어 있습니다. 의롭다 하심을 받은 우리는 이제 하나님과 화평한 관계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화평한 관계!
우리 중 대부분은 우리가 하나님과 불화 관계에 있었다는 것을 잘 모릅니다. 불화 정도가 아니라 우리 머리 위에 하나님의 진노가 머물러 있었다는 것을 잘 모릅니다. 그러나 의롭다 하심을 받기 전에 우리는 본질상 진노의 자녀였습니다. (엡2:3) 우리는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며 살았습니다. 그런 삶으로 인해 하나님의 진노를 머리 위에 쌓아두고 있었던 것입니다. 지난번에 배운 로마서 2:5은 말합니다. "다만 네 고집과 회개하지 아니한 마음을 따라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심판이 나타나는 그 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는도다" 하나님의 이러한 진노로 말미암아 우리는 과거에 끊임없는 불안과 두려움에 시달렸습니다. 실로 우리 인간의 불안의 뿌리는 하나님과의 관계성이 단절되어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는 것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하나님과 불화한 가운데 있는 사람은 죄를 짓고 도망 다니는 자처럼 마음에 참된 평안이 없습니다. 끊임없이 양심에 가책을 받으며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두려움에 시달립니다. 그런데 진노를 받아야 할 우리가 도리어 무엇을 누리게 되었습니까? 화평입니다. 하나님과 더불어 화평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영접하였을 때 하나님은 더 이상 우리의 죄를 보시지 않고 우리가 옷 입은 예수 그리스도를 보셨습니다. 우리를 의롭다 인정해 주심과 동시에 하나님과 화평하게 되는 복도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과 화평하게 되었다니 이 얼마나 큰 복입니까? 하나님과 화평하게 된 사람은 이제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아무런 거리낌도, 어색함도, 부자유함도 없습니다. 전에는 우리가 지은 죄로 인해 하나님 앞에 설 때마다 불안하고 떨렸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더 이상 두렵지 않습니다. 이제는 어린아이가 아버지에게 달려가 안기듯 기쁨으로 하나님께 나아갑니다.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자유함과 참 쉼을 누립니다. 성 어거스틴은 참회록에서 자신이 하나님 안에서 안식을 발견하기 전에는 그 어디서도 마음의 평화를 얻지 못했다고 고백하였습니다. 하나님과의 평화가 없는 사람은 근본적으로 공허함과 두려움과 불안과 근심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께 믿음으로 나온 자들에게 이 평화가 주어집니다. 이 평화는 우리가 주관적으로 느끼든 느끼지 못하든 상관없이 주어지는 평화입니다. 하나님과의 우리의 평화의 관계는 법적으로 확립된 것입니다. 우리의 감정이나 조건과는 아무 상관 없이 객관적으로 확보된 것입니다. 절대 취소되는 법이 없습니다. 그래서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자가 누리는 화평은 영원한 화평입니다.
저는 과거에 인생의 허무에 고통하였습니다. 나의 인생을 가장 가치 있는 것을 위해 열심히 살고 싶었지만, 무엇이 가치 있는 것인지 몰랐습니다. 죽으면 다 끝이라는 허무주의가 저를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늘 검정색 바바리코트를 입고 다녔습니다. 맑은 날에도 “아, 내 마음에는 비가 내린다”하면서 캠퍼스에서 검정 우산을 쓰고 다녔습니다. 친구들과 소주를 마시며 "이래도 한 세상, 저래도 한 평생, 돈도 명예도 사랑도 다 싫다~“ "사의 찬미"를 불렀습니다. 그러다가 군대에서 성경을 읽는 가운데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과의 화평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하늘의 평화를 맛보니 찬송가가 저절로 흘러나왔습니다. ”내 영혼이 은총 입어 중한 죄짐 벗고 보니 슬픔 많은 이 세상도 천국으로 변하도다“ 정말 그 어디나 하늘나라였습니다. 하나님과 화평한 삶을 사는 가운데 내면이 조금씩 회복되었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던 이 죄인으로 하여금 이 은혜의 세계에 들어오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와 찬송을 드립니다!
우리가 받은 두 번째 복은 무엇일까요? 이는 은혜의 자리에 들어가게 된 것입니다. 2a절입니다.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다’는 말은 ‘하나님의 은혜의 영역 안에 들어가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구약시대에 은혜의 영역은 성전의 제일 안쪽 곧 지성소를 의미했습니다. 성전의 구조가 어떻게 되죠? 하나님께서 임재하시는 지성소는 성전 맨 안쪽 깊숙이 위치해 있었습니다. 지성소 앞쪽에 성소가 있었습니다. 성소 주변에는 제사장의 뜰이 있었고, 그 바깥쪽에 유대인의 뜰이 있었습니다. 유대인의 뜰 밖에 여인들만이 들어갈 수 있는 뜰이 있었습니다. 맨 바깥쪽에 이방인들이 들어갈 수 있는 뜰이 있었습니다. 그 이방인의 뜰은 실상 성전 밖이었습니다. 이방인들은 성전에도 들어갈 수 없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보좌가 있는 지성소에는 대제사장만이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그것도 일 년에 단 하루 대속죄일에만 짐승의 피를 가지고 두려움 가운데 겨우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한 마디로 은혜의 영역, 곧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방인이었던 우리가 믿음으로 하나님이 계시는 은혜의 영역에 들어감을 얻었습니다. “들어가게 되었다”가 아니라 “들어감을 얻었다”고 말합니다. 아무나 얻는 은혜가 아님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의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할까요? 이는 아무 두려움이 하나님의 보좌에 나아가서 아버지되신 하나님과 교제하게 된 것입니다.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은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의 사랑하는 아들들이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의 아들됨을 확신하도록 우리 마음에 성령을 부어 주셔서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게 하셨습니다. “아빠!” 이는 어린아이가 퇴근하고 집에 돌아온 아빠를 반가이 맞이하며 외치는 말과 같습니다. 어린아이는 아빠에게 가까이 나아가는데 아무 어려움이 없습니다.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우리는 언제든지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가 하나님과 사귐을 가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또한 그의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다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을 갖는 가운데 그의 일꾼이 되어 복음의 제사장 직분을 감당하게 된 것을 말합니다. 세상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아름다움과 영광을 전하여 그들도 하나님을 예배하는 사람들이 되게 하는 직분을 얻은 것입니다. 이는 실로 천사도 흠모하는 거룩한 직분입니다. 우리가 이러한 은혜의 자리에 들어감을 얻은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에 근거한 것입니다. 이 은혜는 우리의 행위와 상관없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원히 확보된 은총입니다. 우리가 이 은혜의 자리에 들어감을 얻었다는 사실을 확신하고 이 은혜를 누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셋째, 우리가 받은 세 번째 복은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게 된 것입니다. 2b절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여기서 하나님의 영광은 하나님 자신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은 영광 그 자체이십니다. 우리는 이제까지 우리가 지은 죄 때문에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볼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의롭다 하심을 받은 이제는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며 기뻐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이 땅에 온전히 실현되는 그날에는 우리의 성품도 하나님의 영광의 성품으로 바뀌게 됩니다. 더 이상 썩을 몸이 아니라 썩지 아니할 몸으로, 욕된 몸이 아니라 영광스러운 몸으로, 약한 몸이 아니라 강한 몸으로, 육의 몸이 아니라 신령한 몸으로 변화됩니다. 한 마디로 그리스도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됩니다. 그래서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보듯이 그렇게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 즐거워하게 될 것입니다. 그 즐거움은 인간의 언어로 도저히 표현할 수가 없습니다. 사탄 마귀는 수시로 세상 영광을 가지고 우리를 유혹합니다. 세상 영광을 줄테니 하나님의 영광을 소망하지 말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 어떤 세상 영광도 하나님의 영광과 비교될 수 없습니다. 돈, 권력, 쾌락, 세상 명예 이런 것들은 모두 다 썩고 더러워지고 쇠하여질 거짓 소망들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소망만이 영원히 존재하는 참 소망입니다. 의롭다 하심을 받은 우리가 이런 소망을 붙들 때 우리는 모든 세상 유혹 가운데서도 자신을 깨끗하게 할 수 있습니다.
3,4절입니다.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앞에서 우리는 의롭다 하심을 받은 자가 누리는 복이 첫째,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게 된 것, 둘째, 은혜의 자리에 들어가게 된 것, 셋째,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게 된 것임을 보았습니다. 3,4절도 우리가 누리는 복에 대한 내용입니다. 그런데 조금 이해하기 어려운 점들이 보입니다. 하나님이 복을 주실 때 즐거워하는 것은 잘 이해가 되는데 "환난 중에도 즐거워한다?" 잘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우리가 그렇게 할 수 있는 이유를 설명해 줍니다.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게 되기 때문입니다. 환난은 온갖 역경, 압박, 곤경, 질병, 핍박 등을 포함합니다. 환난을 좋아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우리가 환난을 당할 때 마음이 괴롭고 슬퍼지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환난은 인내를 만들어 냅니다. 인내는 참고 견디는 능력입니다. 참고 견디는 것은 단지 성격상의 문제가 아닙니다. 인내는 머리로만 배워서는 도저히 소유할 수 없는 것입니다. 실제적인 환난을 거쳐야만 생기는 열매입니다.
이러한 인내는 연단을 낳습니다. 여기서 연단은 ‘character’ 인데, 단련된 인격을 의미합니다. 환난을 견디는 가운데 나의 믿음에 섞여 있던 모든 불순물들이 빠지고 정금같은 믿음을 체험적으로 소유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닮은 인격을 갖게 됩니다. 그리스도를 닮은 성숙한 인격의 소유자가 되는 것은 환난을 통한 인내의 열매입니다. 그런데 연단은 결국 무엇을 이룹니까? 소망을 이루게 됩니다. 이 소망은 앞에서 언급한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될 바로 그 소망을 가리킵니다.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우리에게 주어지는 환난의 궁극적 도달점이 무엇입니까? 소망입니다. 실제로 그렇지 않겠습니까? 만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환난을 허락하지 않으신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소망을 갖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세상이 편안하고 살기 좋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환난을 주심으로 인내와 연단을 거쳐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소망이 더욱 커지고 확실해지고 간절하게 하십니다.
우리는 아브라함의 생애를 통해서 이 사실을 잘 알 수 있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즉시 아들을 주지 않으시고 25년을 기다리도록 하셨습니까? 또 왜 그 기간 동안 고향을 멀리 떠나서 외국인과 나그네로서 험하고 고된 장막생활을 하도록 하셨습니까? 인내와 연단과 그리고 마침내 영원한 하나님 나라 소망을 주시기 위함이 아니었습니까? 우리 가운데 의롭다하심을 받는 큰 은혜를 받고 나서 환난을 받는 분들이 있습니다. 질병이나 심각한 물질 문제로 인하여 어려움을 당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캠퍼스 역사를 섬기기 위해 온 마음을 드리지만 돌아온 결과가 낙심될 때가 있습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그처럼 사랑하사 의롭다 하심을 얻게 하신 당신의 자녀들에게 이런 어려움을 주시는 것입니까? 그것은 바로 환난을 통해서만 얻어질 수 있는 인내와 연단과 소망의 열매들을 맺게 하고자 하심입니다. 환난은 우리를 영적으로 순수하게 하고 성숙하게 하는 큰 복입니다. 그래서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들이 환난을 도리어 즐거워하고 기뻐할 수 있는 것입니다.
5절입니다. "소망이 부끄럽게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바 됨이니." 우리는 위의 3,4절에서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소망을 붙들도록 환난과 인내를 허락하신다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소망은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소망입니다. 그러면 그 소망은 정말 확실한 것인가요? 반드시 이루어지는 것인가요? 하나님은 이 사실에 대해 보증을 하십니다. 보증이란 약속의 성취에 대한 담보입니다. 우리의 소망하는 바가 반드시 이루어질 것임을 약속하시는 하나님의 보증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우리 마음에 가득히 부어진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신 사랑을 볼 때 하나님은 그 약속하신 바를 반드시 이루실 것을 확신하게 됩니다. 우리를 참으로 사랑하신다면 우리에게 거짓 약속을 하시겠습니까?
그러면 하나님의 사랑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나타났습니까? 6-8절입니다. "6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7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우리는 연약한 자들이요, 경건치 않은 자들이요 죄인들이었습니다. 연약하다는 것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능력이 조금도 없다는 것입니다. 경건치 않다는 것은 하나님의 형상이 완전히 파괴되어 하나님을 사랑하지도, 감사치도 경외치도 않는 것을 말합니다. 또 죄인이라 함은 표적을 맞추지 못한 사람이라는 뜻으로서 그 마음의 동기와 인생 목적이 비뚤어진 사람을 말합니다. 한 마디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만한 아무런 꼬투리도 없었던 것입니다. 디도서 3:3절에 따르면 우리는 어리석은 자요, 순종치 아니한 자요 속은 자요, 각색 정욕과 행락에 종노릇한 자요, 악독과 투기로 지낸 자요, 가증스러운 자요, 피차 미워한 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께서는 이런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습니다. 그저 말로만 "내가 너희를 사랑한다"고 하신 것이 아니고 죽으셨습니다. 고난을 받으시는 흉내만 내신 것이 아니고 실제로 십자가에서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이 죽으심이야말로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가장 확실한 증거입니다. 이 사랑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 마음에 부어졌습니다. 우리는 그 사랑을 깨달을 수도, 가늠할 수도 없었지만 성령께서 그 사랑을 깨닫게 해 주셨습니다. 풍성하게! 그 놀라운 사랑을 볼 때 우리는 하나님의 소망이 결코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으리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우리에 대한 사랑을 나타내신 확실한 증거입니다.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죽으신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볼 때 우리는 하나님의 절대적인 사랑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이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깨달을 때 우리도 마음과 성품과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나의 이웃들을 사랑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우리를 위해 자기 아들을 속죄 제물로 내어주심으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습니다. 확증이 무슨 뜻입니까? 확실히 증명하신 것입니다. 십자가 그 자체가 하나님의 우리에 대한 사랑의 확실한 증표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깨닫는 데서부터 출발합니다.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할 때 세상의 그 무엇도 전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우리의 현실이 아무리 어렵고 힘들더라도 나를 이토록 사랑하시는 나의 아버지 하나님을 생각할 때 아무런 염려가 없습니다. 두려움이 없습니다. 십자가를 통해 우리에 대한 절대적인 사랑을 확증하신 우리 하나님께 감사와 찬송을 돌려드립니다. 12-21절은 아담과 그리스도에 대해 말씀합니다. 이 부분에서 먼저 생각하고 넘어가야 할 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왜 이 시점에서 첫 사람 아담의 이야기가 등장하느냐 하는 점입니다. 우리는 앞에서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가 누리는 복을 살펴보았습니다. 이 복들이 얼마나 크고 풍성한지를 알았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사람들의 마음에 "참 좋은 복들이구나. 그런데 정말 우리가 이 모든 복들을 받을 수 있는 것인가?" 하는 의문이 들기 쉬움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이러한 은혜의 선물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에게 확실히 주어짐을 보여줄 필요성을 느꼈던 것입니다. 이를 위해 그가 선택한 가장 좋은 예가 아담의 예였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아담 안에 있을 때 그의 영향을 받아 원하든, 원치 않든 죄와 사망의 지배를 받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와 같이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 그가 주시는 은혜와 영생을 얻는 것 역시 너무도 당연한 것으로 믿을 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12절입니다.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습니다. 여기서 한 사람은 처음 범죄한 아담입니다. 세상에서는 아무도 어떻게 죽음이 생겼는지 설명해 주지 못합니다. 그저 자연현상이려니 하고 생각할 뿐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첫 사람 아담으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음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바울은 12절부터 아담의 예를 근거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말합니다. 이 부분을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아담 한 사람의 불순종으로 죄가 세상에 들어왔고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정죄와 죽음과 심판에 이르게 하였습니다. 반면에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의 순종으로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함을 받게 되었습니다. 두 아담, 곧 첫 사람 아담과 둘째 아담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영향력은 모든 사람들에게 있어서 절대적입니다. 우리는 과거에 모두 옛사람 아담 안에 있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그가 물려준 죽음과 심판의 영향력을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게 되었습니다. 그의 영향력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받고 영생을 누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아담 안에 있느냐, 그리스도 안에 있느냐 하는 것이 절대적으로 중요합니다. '옛사람에 머물러 죄 가운데 사느냐' 아니면 '회개하고 예수님을 영접함으로 예수님 안에서 사느냐' 여기에 따라서 삶의 결과는 완전히 달라지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 우리는 그와 함께 왕 노릇합니다. 17절입니다. "한 사람의 범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그 한 사람을 통하여 왕 노릇 하였은즉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은 한 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생명 안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 아담 한 사람의 범죄로 인해 사망이 모든 인류에게 왕 노릇하게 되었습니다. 사망이 왕 노릇한다는 것이 무슨 뜻일까요? 고대에 왕은 절대군주였습니다. 왕의 말은 곧 즉시 시행되는 법이었습니다. 아담 이후 사망이 세상의 왕이었습니다. 모든 사람은 사망의 지배를 받았습니다. 사망 앞에서 벌벌 떨었습니다. 죽기를 무서워하여 일생 동안 사망의 종노릇하였습니다. 이러한 세상에 이제 우리 신자들은 더 이상 사망의 종노릇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도리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생명 안에서 왕 노릇 하게 된 것입니다.
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은 그 순간에 이미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졌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5장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요 5:24) ".. whoever hears my word and believes him who sent me has eternal life and will not be condemned; he has crossed over from death to life." 믿는 자는 이미 영생을 얻는 것이요, 이미 확정적으로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졌습니다. (has crossed over from death to life) 모든 신자들은 이미 사망의 권세에서 벗어났습니다. "사망아 네가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있느냐?" 마음껏 사망을 비웃으며 생명을 향유하는 왕적인 존재들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현재 그리스도와 함께 이 세상을 통치하는 일에 참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시는 그날에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영원히 왕노릇하게 됩니다.
결론적으로 오늘 우리는 하나님의 의롭다 하심을 받은 자가 누리는 복들을 살펴보았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과 화평케 된 것입니다. 그의 은혜에 들어감을 얻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환난 중에서도 즐거워하고, 하나님 그분 자체를 즐거워하게 된 것입니다. 이 모든 복들은 주님께서 아들 삼으신 우리들을 위해 주신 복들이니 우리가 풍성하게 누려야겠습니다. 우리는 하늘나라 황태자, 황공주의 삶을 누리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거지로 산다면 이는 얼마나 불행한 일입니까? 하나님이 얼마나 안타깝게 여기시겠습니까? 우리의 믿음 하나를 보시고 의롭다 하시고 이 풍성한 복을 누리게 하시는 은혜의 하나님께 감사와 찬송을 돌려 드립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