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추수감사절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하도다
말씀 / 역대하 20:1-30 요절 / 역대하 20:21 “백성과 더불어 의논하고 노래하는 자들을 택하여 거룩한 예복을 입히고 군대 앞에서 행진하며 여호와를 찬송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 감사하세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하도다 하게 하였더니”
우리는 보통 추수감사절 말씀으로 초장에는 양 떼가 입혔고 골짜기에는 곡식이 덮였고 길에는 기름이 떨어지나이다 하는 시편 말씀을 주로 공부했습니다. 올해는 우리 모임의 전체적인 방향 가운데 역대하 20장을 공부하게 되었습니다. 오늘 말씀에 나오는 유다 왕은 여호사밧입니다. 그는 국가적인 위기 상황에서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그가 믿은 하나님은 그 인자하심이 영원한 분이십니다. 우리가 본문을 통해 그 인자하심이 영원한 하나님을 배우고 이 하나님께 감사 찬송하기를 기도합니다.
1절입니다. "그 후에 모압 자손과 암몬 자손들이 마온 사람들과 함께 와서 여호사밧을 치고자 한지라" 여호사밧은 남 유다 4대 왕입니다. 그는 나라를 잘 다스린 선왕으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역대하 17장을 보면 그가 왕위에 올라서 한 일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는 조상 다윗의 길로 행하여 우상숭배를 척결하였습니다. 대대적인 종교 개혁을 일으켰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그를 축복하사 그의 부귀와 영광이 크게 떨치게 하셨습니다. 그의 나라도 견고하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후 그는 북이스라엘의 아합왕 가문과 혼인함으로 인척 관계를 맺었습니다. 아합왕과 연합하여 길르앗 라못을 정벌하는 일에 나섰습니다. 거기서 죽을 뻔하였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아합왕만 죽고 자기는 겨우 생명을 구했습니다. 그는 자신이 여호와가 미워하시는 자와 동맹을 맺은 것을 회개하고, 제2차 종교 개혁을 단행합니다. 그 내용이 오늘 본문 바로 전인 역대하 19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20:1 은 "그 후에"라는 말로 시작됩니다. 여호사밧이 회개하고 대대적인 종교 개혁을 이룬 후에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제1차 개혁 이후 여호사밧을 크게 축복하셨던 것처럼 다시 그를 축복하실 것 같습니다. 그런데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모압, 암몬, 마온 사람들이 동맹을 맺어 유다를 쳐들어왔습니다. 2절에서와 같이 그들은 "큰 무리"였습니다. 수적으로 여호사밧이 도저히 대항할 수 없는 큰 군대였습니다. 이런 큰 군대가 어디까지 진격해 왔나요? 2절을 보면 하사손다말 곧 엔게디까지 쳐들어왔습니다. 엔게디는 사해 바다 서쪽에 있는 성읍입니다. 과거 다윗이 사울을 피하여 다닐 때 동굴에서 그의 옷자락 끝을 베었던 곳입니다. 엔게디는 여호사밧이 있는 예루살렘에서 불과 100 Km 정도입니다. 2-3일이면 예루살렘에 도착할 거리입니다. 참으로 풍전등화같이 위급한 상황입니다.
이때 여호사밧은 무엇을 합니까? 3절입니다. "여호사밧이 두려워하여 여호와께로 낯을 향하여 간구하고 온 유다 백성에게 금식하라 공포하매“ 그는 두려웠습니다. 당연한 것입니다. 고대 시대의 전쟁은 오늘날과 달리 미사일과 총으로 싸우는 전쟁이 아닙니다. 자기가 총을 쏘고는 누가 맞았는지도 잘 모릅니다. 고대 시대 전쟁은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싸웁니다. 칼과 창으로 적을 찌르고 죽입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자기가 죽습니다. 전쟁에 지면 자기뿐만 아니라 가족들 모두 죽임을 당하거나 노예로 잡혀갑니다. 이런 끔찍한 전쟁에 처하면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여호사밧은 특히 백성들의 목숨이 자기에게 달려있다고 생각하니 두려웠습니다. 그런데 그는 이런 가운데서 무엇을 합니까? "여호와께로 낯을 향하여 간구하고"
보통 이런 경우에 왕은 참모들을 소집하여 긴급 작전회의를 합니다. 또는 강대국에 SOS를 칩니다. 그러나 여호사밧은 제일 먼저 여호와께로 낯을 향하여 간구합니다. ESV 성경에는 "set his face to seek the LORD"로 되어 있습니다. 그의 얼굴을 고정하여 오직 하나님만 쳐다보고 있다는 것입니다. 어린아이들이 장난감 가게에서 뭘 사고 싶으면 손으로 가리키며 엄마 얼굴만 뚫어지게 쳐다봅니다. 사 달라는 것입니다. 여호사밧은 자기의 무능을 인정하고 오직 하나님만 의지합니다. 더 나아가 그는 온 백성들에 금식 기도를 공포합니다. 이에 유다 온 백성이 예루살렘에 다 모여들었습니다. 합심하여 여호와께 간구하였습니다.
5-13절은 여호사밧이 온 백성을 대표하여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 내용입니다. 기도의 포인트는 5가지입니다. 첫째, ”여호와는 하늘의 하나님이 아니십니까?“ 6절입니다. "이르되 우리 조상들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는 하늘에서 하나님이 아니시니이까 이방 사람들의 모든 나라를 다스리지 아니하시나이까 주의 손에 권세와 능력이 있사오니 능히 주와 맞설 사람이 없나이다" 여호와 하나님은 하늘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늘의 하나님이라는 말은 온 세상의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모압이나 암몬, 에돔은 저마다 자기들의 신을 섬기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 신들은 모두 숨도 쉬지 못하는 우상들이며 오직 하나님만이 이스라엘 뿐만 아니라 이방 나라들도 다스리시는 왕이시지 않느냐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저들의 왕도 되시니 저들이 하는 일을 중지시켜달라는 것입니다.
둘째, ”이 땅을 우리에게 주신 분은 하나님이 아니십니까?“ 7절입니다. "우리 하나님이시여 전에 이 땅 주민을 주의 백성 이스라엘 앞에서 쫓아내시고 그 땅을 주께서 사랑하시는 아브라함의 자손에게 영원히 주지 아니하셨나이까?" 하나님, 우리가 이 땅을 달라고 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갈 바를 알지 못하고 그의 고향을 떠날 때 하나님이 이 땅을 그와 그의 자손에게 주시리라 약속하시지 않으셨나요? 이곳에 원래 있던 민족들을 쫓아내시고 애굽에 있던 우리를 이곳에 심으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니 우리를 지켜 주셔야 되는 것 아닌가요? 라는 기도입니다.
셋째, ”이 성전에서 기도할 때 들으신다고 약속하지 않으셨습니까?“ 예전에 솔로몬이 예루살렘 성전을 건축하고서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주의 종과 주의 백성 이스라엘이 이 곳을 향하여 기도할 때에 주는 그 간구함을 들으시되 주께서 계신 곳 하늘에서 들으시고 들으시사 사하여 주옵소서"(대하6:21) 그 기도에 대해 하나님은 하늘에서 불을 내려서 모든 번제물과 제물들을 살랐습니다. 솔로몬의 기도를 응답하겠다는 확인이었습니다. 여호사밧은 그 사건을 기억하며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넷째, ”옛적에 우리가 암몬과 모압과 세일 산 사람들을 치려고 할 때 하나님께서 막지 않으셨습니까?“ 그들은 이스라엘과 형제 민족이므로 하나님이 그들을 치지 말라고 하셔서 치지 않았습니다. 그들에게 자비를 베풀었습니다. (신명기 2장) 그런데 그들이 지금 우리를 쳐들어왔습니다. 선을 악으로 갚는 것도 유분수가 아닙니까?
다섯째, 이 큰 무리를 우리가 대적할 능력이 없습니다. 우리는 오직 주만 바라보나이다라고 합니다. 자기들의 비참한 형편을 그대로 아뢰었습니다.
이상의 여호사밧의 기도가 어떠합니까? 그는 하나님 앞에서 팩트 체크를 합니다. 팩트에 기초하여 그들의 침공이 얼마나 부당한 일인지 하늘 법정에 고소합니다. 여호사밧 이름의 뜻이 ‘하나님이 심판하신다’입니다. 하나님이 심판해달라, 징벌해달라고 간구하는 것입니다. 그는 이스라엘 역사 가운데 하나님이 무엇을 어떻게 행하셨는지를 잘 알았습니다. 그 하나님은 변함이 없으시며 지금도 신실하신 분임을 믿고 인격적으로 기도하였습니다.
위기의 때에 그의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빛납니다. 우리는 소방서 기도를 드리기 쉽습니다. 평상시에 하나님 알기를 게을리하다가도, 불이 나면 하나님께 긴급 기도를 드립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제사를 드리는 것보다 더 원하시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예레미야 9:24입니다. "자랑하는 자는 이것으로 자랑할지니 곧 명철하여 나를 아는 것과 나 여호와는 사랑과 정의와 공의를 땅에 행하는 자인 줄 깨닫는 것이라 나는 이 일을 기뻐하노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우리가 명철하여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십니다.
하나님을 아는 자는 위기의 때에 용맹합니다. 다니엘 11:32절도 말합니다. "그가 또 언약을 배반하고 악행하는 자를 속임수로 타락시킬 것이나 오직 자기의 하나님을 아는 백성은 강하여 용맹을 떨치리라." 마귀는 위기의 때에 신자들을 속임수로 타락시킵니다. 속임 당하여 범죄하게 만듭니다. 정신없는 자 같이 행하게 합니다. 역대하28장을 보면 유다왕 아하스는 북이스라엘과 아람 연합군의 공격을 받자 앗수르에게 도움을 청합니다. 그런데 앗수르의 디글랏 빌레셀은 도리어 유다를 공격합니다. 아하스가 예루살렘 성전과 왕궁의 기물들을 다 가져다가 주지만 소용이 없었습니다. 그러자 아하스는 도리어 아람 신들을 섬깁니다. 한 마디로 정신없는 짓을 하는 것입니다. 그는 유다 각 성읍에 산당을 세워 우상에게 분향하여 여호와를 더욱 진노하게 하였습니다.
하나님을 잘 모르는 자들은 이와 같이 곤경의 때 마귀에게 속아 타락합니다. 그러나 오직 자기의 하나님을 아는 백성은 강하여 용맹을 떨칩니다. 여호사밧은 하나님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위기의 때에 하나님께 나아가 인격적으로 기도하였습니다. 그는 2차 개혁도 단행했는데 국가적 재난을 당한 것이 현실적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을 믿고 그에게 나아가 침착하게 기도하였습니다. 그가 기도할 때 유다 모든 사람들, 즉 여자들과 어린아이들도 기도에 동참하였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여호사밧과 백성들의 기도를 어떻게 응답하셨습니까? 14절을 보면 레위 사람 야하시엘에게 말씀을 주십니다. 15-17절입니다. "야하시엘이 이르되 온 유다와 예루살렘 주민과 여호사밧 왕이여 들을지어다 여호와께서 이같이 너희에게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이 큰 무리로 말미암아 두려워하거나 놀라지 말라 이 전쟁은 너희에게 속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라 16 내일 너희는 그들에게로 내려가라 그들이 시스 고개로 올라올 때에 너희가 골짜기 어귀 여루엘 들 앞에서 그들을 만나려니와 17 이 전쟁에는 너희가 싸울 것이 없나니 대열을 이루고 서서 너희와 함께 한 여호와가 구원하는 것을 보라 유다와 예루살렘아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며 놀라지 말고 내일 그들을 맞서 나가라 여호와가 너희와 함께 하리라 하셨느니라 하매"
하나님의 말씀의 포인트는 3가지입니다. 첫째, 너희는 이 큰 무리로 말미암아 두려워하거나 놀라지 말라. 둘째, 이 전쟁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라. 셋째, 너희는 대열을 이루고 서서 너희와 함께 한 여호와가 구원하는 것을 보라입니다. 곧, 하나님이 싸울 것이니 아무 걱정 말고 보기만 하라는 것입니다. 물론 그 보는 것이 안방에서 TV를 보듯이 하는 것은 아니고, 대열을 이루고 적들에게 나아가서 하나님이 싸우시는 것을 보라고 하십니다. 한 마디로 그들에게 오직 하나님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전쟁이 닥친 이 상황에서 하나님의 이 말씀을 믿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닙니다. 조금이라도 일이 어긋나면 모두 몰살을 당하는 위기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호사밧과 백성들의 반응은 어떠합니까? 18절입니다. "여호사밧이 몸을 굽혀 얼굴을 땅에 대니 온 유다와 예루살렘 주민들도 여호와 앞에 엎드려 여호와께 경배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여호사밧 자기에게 직접 임한 것이 아닙니다. 대제사장 아마랴를 통해 온 말씀도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여호사밧은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방법을 겸손히 영접하였습니다. 야하시엘을 통해 주신 말씀을 온전히 믿었습니다. 하나님이 친히 싸우신다는 말씀보다 더 위로와 힘이 되는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물론 여호사밧은 아직 하나님이 어떻게 싸우실지는 모릅니다. 당장 승리를 주실 수도 있고 안 주실 수도 있습니다. 적들을 그냥 물러가게 하실 수도 있습니다. 장기전에 들어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었습니다. 그때 그의 마음에 감사와 찬송이 넘쳐났습니다. 하나님께 몸을 굽혀 얼굴을 땅에 댔습니다. 하나님을 경배한 것입니다. 모든 백성들도 엎드려 여호와께 경배하였습니다. 그핫 자손과 고라 자손에게 속한 레위 사람들은 서서 심히 큰 소리로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합니다. 팡파레를 울리며 승리의 함성을 외쳤습니다. 팡파레는 승리한 후에 부르는 것입니다. 그들은 이미 하나님 안에서 승리한 것을 믿고 심히 큰 소리로 찬송하였습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말씀이 주어지기 전과 후가 완전히 다름을 볼 수 있습니다. 야하시엘을 통해 말씀이 주어지기 전과 그 후의 외적인 상황은 변한 것이 없습니다. 여전히 모압 동맹군들은 예루살렘으로 진격해 오고 있습니다. 두려워할 수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이 주어진 후 여호사밧과 백성들의 마음이 달라졌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싸우신다는 약속의 말씀을 붙들자 모든 걱정과 근심이 물러갔습니다. 두려움이 사라지고 담대함이 생겼습니다. 감사와 찬송이 넘쳤습니다.
우리의 삶도 그러합니다. 사람마다 걱정 근심이 없는 사람이 없습니다. 연말에 직장에서 승진을 앞두고 있는 목자님들은 승진하지 못할까 염려가 됩니다. 승진해 보십시오. 거기에 또 다른 걱정과 근심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돈이 부족한 분들은 걱정이 많습니다. 돈을 많이 벌어보십시오. 거기에도 걱정과 근심이 있습니다. 사람이 살아있는 동안에 걱정과 근심은 그림자와 같이 우리를 따라다닙니다. 걱정과 근심, 두려움을 이기는 길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붙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겠다, 나의 문제를 다 아시고 도와주시겠다는 약속을 믿을 때 우리는 근본적으로 모든 염려와 걱정,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가 늘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위기의 때, 말씀이 없으면 허둥대다가 죄에 빠집니다. 악수에 악수를 거듭하다가 큰 곤경에 처하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말씀이 있을 때 침착합니다. 모든 것을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며 감사하며 난관을 헤쳐나갑니다.
20절입니다. "이에 백성들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서 드고아 들로 나가니라 나갈 때에 여호사밧이 서서 이르되 유다와 예루살렘 주민들아 내 말을 들을지어다 너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신뢰하라 그리하면 견고히 서리라 그의 선지자들을 신뢰하라 그리하면 형통하리라 하고." 이튿날 아침 유다 백성들이 적을 향하여 드고아 들로 나갔습니다. 백성들이 나갈 때 여호사밧이 말합니다. "너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신뢰하라 그리하면 견고히 서리라 그의 선지자들을 신뢰하라 그리하면 형통하리라" 백성의 지도자인 왕의 믿음이 돋보입니다. 당시 전쟁은 국가의 운명이 왕에게 달려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임진왜란 때 선조는 의주로 도망을 갔습니다. 하루에 40Km 이상 열흘간 초 스피드로 줄행랑을 쳤습니다. 왕만 잡히지 않으면 나라는 망하지 않는 것이기에 의도적으로 그렇게 했다고 해석하는 학자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가 백성을 버리고 자기만 살겠다고 도망가려 했던 것은 팩트입니다. 이런 왕 앞에서는 백성들이 적과 싸울 수 없습니다. 그러나 여호사밧은 자신이 먼저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그리고 백성들에게 믿음을 심었습니다.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신뢰하라 그리하면 견고히 서리라!"
그후 여호사밧이 한 일이 무엇입니까? 21절입니다. "백성과 더불어 의논하고 노래하는 자들을 택하여 거룩한 예복을 입히고 군대 앞에서 행진하며 여호와를 찬송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 감사하세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하도다 하게 하였더니" 노래하는 자들을 택하여 거룩한 예복을 입혔습니다. 그들로 군대 앞에서 행진하며 여호와를 찬송하게 하였습니다.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 엄청나게 많은 적들이 시스 고개를 넘었습니다. 적들의 대열 전방에 가장 용맹한 군사들을 앞세우며 밀려 내려오고 있습니다. 이들을 대적하려면 여호사밧도 유다에서 가장 용맹한 특수부대를 전방에 배치해야 될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는 제일 앞에 노래하는 자들, 곧 합창단을 세웠습니다. 그것도 전투복을 입은 것도 아니고 하나님께 예배드릴 때 입는 거룩한 예복을 입게 하였습니다. 완전 비무장이었습니다. 그들은 전열의 제일 앞에 서서 하나님을 찬송하였습니다. 이는 완전히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행동이었습니다.
그러면 여호사밧은 그들로 무슨 찬송을 부르게 하였습니까? "여호와께 감사하세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하도다" 여호와께 감사 찬송을 하도록 했습니다. 온 백성이 몰살당할 수도 있는 전쟁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감사하라고 명할 수 있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는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영원하기 때문입니다.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하도다!”
그러면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영원하다는 뜻이 무엇일까요? 여기서 인자는 히브리어 ‘헤쎄드’로, ‘favor’(호의) 또는 ‘faithfulness’(신실함)입니다. 이는 언약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호의와 신실하신 성품을 말합니다. 그러한 성품이 영원하다는 것입니다. NIV는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하도다’를 ‘his love endures forever’로 번역합니다. ‘endure’는 불편하거나 고통스러운 상황을 당해도 포기하지 않고 지속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를 보면 하나님은 그의 언약의 백성들에 대해 불편한 적이 많았습니다. 자신의 호의를 포기할 정도로 고통스럽고 괴로운 상황을 많이 겪으셨습니다. 그러면서도 그의 인자하심을 계속 유지해 오셨다는 것입니다.
여호사밧과 백성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단순히 전쟁에서의 구원하시겠다는 약속을 넘어 하나님의 인자하심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오래 전에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으셨습니다. 하나님은 불완전하고 불성실한 인간과 언약을 맺으시고도 변함없이 그 언약에 성실하십니다. 이는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구주로 믿음으로 새 언약의 백성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늘 주님을 배반하지만 우리의 모든 허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언약의 백성이라는 것 하나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에게 인자하십니다. 그의 변함 없는 인자하심 때문에 우리는 언제라도 하나님께 은혜를 구할 수 있습니다.
백성들은 인자하신 하나님을 믿고 힘차게 찬송하였습니다. 그때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22,23절입니다. "그 노래와 찬송이 시작될 때에 여호와께서 복병을 두어 유다를 치러 온 암몬 자손과 모압과 세일 산 주민들을 치게 하시므로 그들이 패하였으니 23 곧 암몬과 모압 자손이 일어나 세일 산 주민들을 쳐서 진멸하고 세일 주민들을 멸한 후에는 그들이 서로 쳐죽였더라" 백성들의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노래와 찬송으로 나타났습니다. 이는 믿음의 증거였습니다. 노래와 찬송이 시작될 때 적진 가운데 자중지란이 일어났습니다. 23절에 암몬과 모압 자손이 일어나 같은 편이었던 세일 산 주민들을 진멸한 것을 볼때 어떤 이유인지는 알수 없지만 세일 산 주민들이 먼저 암몬과 모압을 친 것으로 유추해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아마 유다를 치기보다는 모압과 암몬을 치고 그들의 많은 재물과 보물을 약탈하는 것이 더 유익하다고 판단했던 것 같습니다. 여하튼 자중지란이 일어나고 결국 같은 편끼리 서로 쳐 죽이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유다 사람이 들 망대에 이르러 적들을 보니 땅에 엎드러진 시체들뿐이었습니다. 한 사람도 피한 자가 없었습니다. 유다 백성들은 적진에 가서 전리품을 챙깁니다. 재물과 의복과 보물이 심히 많았습니다. 너무 많아 사흘 동안에 거두어들였습니다. 가을에 풍년이 들면 농부들은 한 해의 수고를 다 잊어버립니다. 그 얼굴 만면에 기쁨이 넘칩니다. 제가 어릴 때 항상 칠월칠석날(음력 7.7)에는 비가 왔습니다. 견우와 직녀가 오작교에서 만날 때 감격의 눈물을 흘렸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한번은 비가 많이 온 칠석날 다음에 논두렁에서 미꾸라지를 잡는데 그물을 넣을 때마다 엄청나게 많은 미꾸라지가 잡혔습니다. 너무 즐거워서 정신없이 잡았던 기억이 납니다. 미꾸라지 잡는 즐거움도 그러한데 본문에서와 같이 탈취물을 나눌 때의 즐거움이 어떠했겠습니까?
그들의 즐거움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넷째 날, 골짜기에 모여 여호와를 송축하였습니다. 감사제를 드린 것입니다. 그리고 그곳을 ‘브라가’(축복) 골짜기라고 명하였습니다. 그 골짜기는 실상 유다 백성들에게 죽음의 골짜기가 될 장소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것을 축복의 골짜기로 만들어 주셨습니다. ‘역대하’는 유다 백성들이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간 지 70년이 지나고, 바사 왕 고레스가 유다 백성들에게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라고 명령하는 것으로 끝이 납니다(대하36:22,23). 선지자 예레미야를 통해 주신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된 것입니다. 이는 성전이 무너지고 바벨론 포로라는 슬프고 고통스러운 과거에도 불구하고 그 백성과 맺은 언약을 신실하게 지키시는 인자하신 하나님을 보여줍니다. 포로 생활에서 돌아온 백성들의 현실은 고달팠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영원한 인자하심을 인하여 그들은 감사, 찬송하지 않을 수 없던 것이었습니다.
우리도 지난 한 해 돌아볼 때 하나님이 기적적으로 상황을 반전시키시고 축복하신 것들이 있습니다. 영육간에 건강을 주시고 학교와 직장, 가정과 교회에 주신 풍성한 은혜와 축복을 생각할 때 감사와 찬양을 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이 모든 은혜와 축복을 기억하고 우리 하나님께 감사와 찬송을 드려야겠습니다. 그러나 한편 하나님 앞에서 나름대로 최선을 다 했지만 예상치 못한 어려움이 닥쳐 온 경우도 있습니다. 상황이 더 어려워진 경우도 있습니다. 이런 때 우리는 우울해하거나 불평하거나 짜증을 내기 쉽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형편이 어떠하든지 가만히 생각해보면 영원토록 인자하신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라는 사실보다 더 감사, 찬송할 일은 없습니다.
역대기는 히브리 성경에서 맨 마지막에 배치된 책입니다. 신약의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하는 소망의 책입니다. 하나님의 인자하심은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으로 그 절정에 이릅니다. 예수님을 보내셔서 우리와 새 언약을 맺어주시고, 그 언약대로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을 감사, 찬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반복하여 죄를 범하지만, 우리의 모든 허물을 견디시고 그 언약을 취소하지 않으시는 하나님, 우리를 위해 하나님 나라 약속을 변함 없이 이루어가시는 하나님을 감사, 찬송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 인자가 영원하신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심을 인하여 온 마음으로 주님을 감사하고 찬송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자기의 명예를 위해 싸우십니다. 당장 우리의 현실이 어렵더라도 하나님은 그 인자하심을 반드시 보여주사 영광을 받으실 것입니다. 우리가 이 하나님을 믿고 온 마음으로 감사와 찬송을 드리기를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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