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누가복음 3강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신 예수님
말씀/ 누가복음 4:14-44
요절/ 누가복음 4:18,19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요즘 제가 해외에 계신 선교사님들과 함께 한 가지 프로젝트를 하고 있습니다. 팬데믹
시대를 맞이해 전세계 2세 및 청년들을 위한 온라인 학교를 여는 프로젝트입니다. 처음에 저는 일사천리로 일이 진행될지 알았습니다. 무슨 강의를 할지, 또 어떤 분들을 강사로 초빙할지 논의하고 결정할 것을 기대했습니다. 그런데
선교사님들은 ‘이 프로젝트를 도대체 왜 하는지, 누구를 위해
하며, 어떤 목적과 방향성 가운데 할 것인지’ 이것을 mission statement라고 하는데, 이 mission statement를 완성하는데 몇 달을 보냈습니다. 서기
한 사람을 세워 초안을 만들고, 이 초안을 구글 박스에 올리면 각자 수시로 그것을 수정하고, 다음 번 모임에서 그 수정한 것을 논의했습니다. 답답했습니다. 이런 과정이 왜 필요할까? 그런데 마침내 완성된 mission statement를 읽어보고 의문이 풀렸습니다. Mission
statement를 읽어보는 것만으로도 온라인 학교에 대한 꿈과 비전이 생겼습니다. 오늘
말씀은 예수님이 선포하신 Mission Statement입니다. 이 Mission Statement를 통해 예수님이 어떤 꿈과 비전 가운데 일하실지 알 수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이 예수님의 꿈이 나의 꿈과 비전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16절을 보면 예수님은 고향 나사렛으로 가셨습니다. 나사렛은 작은 시골동네입니다. 중대한 Mission Statement를 발표하려면 큰 동네 가버나움에서 하는 것이 맞을 것 같습니다. 왜 예수님은 작은 산골 동네에서 이런 중대한 발표를 하시는 것입니까? 그
이유는 이따가 뒤에서 살펴보겠습니다.
17-21절을 보십시오.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드리거늘 책을 펴서 이렇게 기록된 데를 찾으시니 곧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책을 덮어 그 맡은 자에게 주시고 앉으시니 회당에 있는 자들이 다 주목하여 보더라
이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되 이 글이 오늘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 하시니”
예수님이 안식일날 회당에서 읽으신 말씀은 이사야 61:1,2절입니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이 말씀의 배경은 ‘희년(喜年) 제도’입니다. 레위기 25장을 보면 하나님은 매 50년마다 희년을 선포하도록 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왔을 때 하나님은 레위 지파를 제외한 모든 이스라엘 백성에게 땅을 분배해 주셨습니다. 이는 인류 역사에 획기적인 일이었습니다. 당시 어떤 왕이 나라를
새로 세우면 분배해야 했습니다. 이때 개국공신을 대우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만약 개국공신을 홀대했다가는 정권이 기반이 흔들릴 것입니다. 또
기득권층을 배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것저것 배려하고 나눠주고 하다보면 결국 백성들에게 줄 땅이
없었습니다. 인류 역사를 보면 이런 문제로 늘 백성들은 기아와 빈곤에 시달렸습니다.
하나님은 공평한 땅분배로 이런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셨습니다. 그런데
여기에도 문제는 있습니다. 하나님은 공평한 기회를 주셨지만 사람들이 각자의 죄와 허물로 인해 그 땅을
지키지 못한 것입니다. 성실하게 농사를 짓지 않은 경우도 있고 혹은 농사짓는 것이 귀찮아 쉽게 돈을
벌 수 있는 방법을 찾다가 쫄딱 망해서 큰 빚을 지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그 빚을 갚기 위해 땅을 팔고
그것도 부족해 가족이 다른 집에 종으로 팔려가기도 했습니다. 또 감옥에 투옥되기도 했습니다. 여기에 부자들의 탐욕도 문제입니다. 부자들은 경제적 어려움에 빠진
동포의 형편을 이용해 땅투기를 하여 큰 부자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바로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희년(喜年) 제도를 만드습니다.
오늘 본문의 19절에 나오는 ‘주의
은혜의 해’가 바로 이 희년을 가리킵니다. 히브리어로 희년은 ‘요벨’인데 이것은 본래 ‘뿔나팔을
부는 해’라는 뜻입니다. 요벨을 라틴어로 번역하면서 발음이
비슷한 ‘Jubilaeus’라는 단어를 사용했는데 이 단어가 기쁨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영어에서는 Jubilee가 되었는데 라틴어의 기쁨이라는 의미를 살린
한자 번역이 곧 희년(喜年)입니다. 하나님은 처음 땅 분배를 시작한 해로부터 시작하여 50년 째가 되었을
때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은 각자 자기 고향으로 돌아가도록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고향 나사렛으로 가신
것은 바로 이 말씀에 의거한 것입니다. 고향에서 희년이 선포되면 모든 것이 50년 전으로 다시 리셋되었습니다. 여러 사정으로 땅을 잃어버린 사람에게
땅을 다시 돌려주었고 모든 빚을 다 탕감해 주었습니다. 남의 집에 종이 되었던 사람은 자유민이 되었습니다. 감옥에 투옥된 자는 풀려났고 미래에 희망을 볼 수 없던 사람이 다시 꿈과 희망을 가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 희년 제도는 아쉽게도 이스라엘 역사 가운데 잘 지켜지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가진 자들이 욕심과 탐욕을 내려놓지 못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장차 메시야가 오시면
지금까지 선포되지 못한 희년을 선포할 것이라고 예언했습니다. 예수님은 본문 말씀을 읽으시고 이사야 선지자의
이 예언이 오늘 이 시간 예수님 자신을 통해 성취되었다고 선포합니다.
사회주의적 관점에서 성경을 보는 일부 학자들은 본문을 근거로 예수님이 사회개혁을 위해 사회 개혁자요, 혁명가로 오셨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복음서 전체를 볼 때 예수께서
사회 개혁을 위해 기득권층과 맞서 싸우고 투쟁했다는 내용을 찾기는 어렵습니다. 그보다는 사람들의 정신과
영혼의 빈곤문제, 죄와 탐욕에 노예가 된 문제를 해결해주시고 영혼의 참된 자유와 해방을 선포하기 위해
오셨다고 보는 것이 맞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예수께서 부의 분배 문제, 가난한 자들의 고통 문제에 대해 외면했다고 보는 것은 전혀 타당치 않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은 자기를 따르는 자들에게 그들의 소유를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 줄 것을 강하게 권면하셨습니다. 예수님을 가장 잘 배운 사도 바울도 교회가 가난한 자의 구제에 항상 힘쓰는 것이 옳다고 했습니다. 저는 팬데믹이 있기 전 매년 해외에서 온 2세 선교사들과 함께 선교사
묘지 및 선교사 기념관을 방문했습니다. 선교사 묘지에 묻힌 많은 선교사들이 의사였고 또 그 중 많은
이들이 의대에서도 공부를 아주 잘 해 교수가 되거나 많은 부와 명성을 쌓을 수 있는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을 만난 후 그들이 받은 특권을 가난한 한국 백성을 위해 아낌없이 나눠주었습니다. 그들의
나눔으로 인해 많은 가난한 이들이 선교사들을 통해 주시는 하나님의 위로를 받았습니다.
그러면 희년을 선포하시는 메시야 예수님은 오늘날 우리 청년들을 위해 무슨 일을 하십니까?
먼저 가난한 자들을 부요하게 하십니다. 오늘날 우리 청년들 가운데
경제적으로, 또 정신적으로 가난한 이들이 많습니다. 요즘
청년들과 예전 사람들을 비교하는 것은 좀 그렇지만 예전 사람들은 어떤 면에서 오늘날 청년보다 경제적으로는 더 어려웠을지라도 정신세계는 풍요했던
것 같습니다. 그 시절 청년들은 스마트폰이 없었기 때문에 시간이 나면 먼 산을 바라보며 깊은 상념에
빠지거나 묵상을 했습니다. 어떤 이들은 늘 손에 시집을 들고 시를 읊었습니다. 문학전집을 읽거나 고전을 읽기도 했습니다. 이런 활동은 정신세계를
풍요롭게 해 줍니다. 정신세계가 풍요로우면 사람이 삶의 역경이나 고난 앞에서 견디는 힘이 있습니다. 이에 비해 요즘 청년들은 어떻습니까? 시간만 나면 유투브 영상을
보거나 게임을 하거나 Social Media 활동을 합니다. 요즘
군대에서 휴가나온 둘째 아들이 무슨 영상을 보는데 영상 제목이 ‘오분 순삭’입니다. 당신의 삶에서 5분을
순간삭제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5분 순삭 영상을 계속 보다보면 5분이 아니라 5시간이 순식간에 삭제됩니다. 틈날 때마다 짬날 때마다 이런 영상만 보고 앉아있으면 정신세계가 극도록 가난해집니다.
저는 제 자녀들이 틈만 나면 5분 순삭 영상을 보지만 그래도 주일이
되면 말씀을 듣고 또 아침에는 짧게라도 QT를 하는 것을 보고 이것이 그들의 내면 세계를 부요하게 해
주는 것을 느낍니다. 그것을 어떻게 느끼냐면 같이 밥을 먹다가 입에서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말을 통해
느낍니다. 어떤 대화를 하다보면 그 주제에 대해 상당히 깊이가 있고 내용이 있는 생각을 가지고 있음을
봅니다. 저는 그것이 성경 말씀을 통해 메시야 예수님이 주시는 마음의 부요함임을 보게 됩니다.
다음으로 메시야 예수님은 포로된 자들을 자유하게 하십니다. 어제 한
포럼에서 강의를 들었는데 ‘청소년 중독’에 관한 내용이었습니다. 강의에 의하면 청소년이 중독되는 것은 뇌의 도파민 분비와 관련이 있습니다. 사람이
어떤 중독성있는 영상물을 시청하거나 행동을 할 때 뇌에서 도파민이 분비됩니다. 도파민은 사람을 각성시켜
중요한 일에 집중하도록 돕습니다. 그런데 게임이나 음란 영상 등을 보면서 도파민을 과도하게 분비되어
정작 도파민이 필요할 때에 도파민 부족으로 일에 집중하기 어렵고 일종의 무기력하고 우울한 상태가 지속됩니다.
강의를 하신 강사님도 본래 중독 문제가 있었습니다. 강사님은 어렸을
적 부모님으로부터 ‘너는 커서 반드시 의사가 되어야 한다.’라는
말을 듣고 자랐습니다. 그래서 의사가 되는 것이 꿈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하다보니 의사가 되지 못하고 다른 전공을 하게 되었습니다. 꿈을 이루지 못하게 되었으므로 삶에
의욕을 잃고 여러가지 중독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한 선배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선배님은 당시 IMF로 경제사정이 좋지 않았습니다. 밤을 새워 야간근무를 해야 했습니다. 강사님도 대학원을 다니면서
밤을 새워 일을 했습니다. 둘이 아침에 만나서 둘 다 밤을 샜으므로 성경공부를 하다가 번갈아 가며 졸았습니다. 그러다가 깨어나 계속 이어서 성경공부를 했습니다. 성경공부가 끝나면
선배님은 본인도 경제사정이 좋지 않음에도 강사님을 맛있는 음식으로 섬겨주었습니다. 선배님의 따스한 사랑에
이끌려 강사님은 계속 성경공부를 했습니다. 그러다가 예수님을 메시야로 만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메시야로 만났을 때 잃어버렸던 꿈을 찾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인도로 뇌분야를 전공하게 되었는데 여기에 깊은 흥미를 느끼게 되어 공부를 재미있게 하게 되었습니다. 또
중고등학생들에게 성경을 가르치는 JBF 교사가 되었는데 학생들에게 어떻게 하면 성경을 쉽고 재미있게
가르칠 수 있을까 열심히 연구하게 되었습니다. 과거에는 꿈이 없어 여러가지 중독에 빠졌는데 지금은 학생들에게
성경을 재미있게 잘 가르치는 일이 꿈이 되어 이 일을 하느라 시간 가는 줄 모른다고 했습니다.
다음으로 메시야 예수님은 눈먼 자를 다시 보게 합니다. 눈먼 자는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 보지 못합니다. 저는 과거 전공공부를 열심히 해서 세상에서 성공하고
인정받는 것을 삶의 목표로 삼았습니다. 1분 1초를 아껴
전공공부에 올인했습니다. 대학시절 다른 이들은 전부 친구를 사귀고 함께 술도 마시고 놀러다니는 것을
즐거워하고 대학생활의 낭만으로 여겼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런 것이 다 헛된 짓이요 시간 낭비라고 여겼습니다. 그래서 친구를 사귀지 않았습니다. 학교 식당에서 늘 혼자 식사했습니다. 때로는 혼자 밥먹는 것이 외톨이처럼 보이지 않을까 자의식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전공 영어책을 펴놓고 밥을 먹었습니다. 어느날 이런 저에게 목자님이 찾아 오셨습니다. 함께 식사해주시고 대화해주셨습니다. 이 목자님을 통해 저는 조금씩
나의 친구가 되어주신 예수님께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세리처럼 자기 일에 몰두하던 저에게 “나를 따라오너라” 말씀으로 찾아오시고 다른 사람의 마음을 알고 그의
고통과 아픔을 돌아보며 도와주는 새로운 세계를 보도록 하셨습니다.
다음으로 메시야 예수님은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십니다. 지난 주 여러
사람들과 대화하면서 많은 이들이
마음에 큰 눌림을 갖고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어떤 분은 단기 프로젝트가 있고 3년 내에 해야 하는 장기 프로젝트가 있는데 그 프로젝트로 인해 늘 마음이 눌렸습니다. 제가 그에게 그러지 말고 하루 계획표에 단기 업무와 장기 업무를 다 녹여 넣으라고 조언해 주었습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단기 프로젝트의 경우 구체적으로 하루에 해야 할 분량을 정해서 계획표 안에 넣고, 또 3년 이내에 해야 하는 장기 프로젝트의 경우 그것을 주말에 몰아서
할 것인지, 혹은 업무가 한가한 시즌에 몰아서 할 것인지, 혹은
매일매일 조금씩 꾸준히 할 것인지 결정하고 그 결정을 하루 스케쥴표에 녹여 넣으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일단 스케쥴표가 완성이 되면 그 다음부터는 3년 뒤는 절대 생각하지 말고, 아니 내일 일도 생각하지 말고 매일매일 그날 하루 소화해야 할 일만 생각하라고 했습니다. 사람의 마음이 아무리 연약하다 해도 누구든지 하루 일과 정도는 큰 마음의 눌림 없이 해 낼 수 있다고 조언해
주었습니다. 여기에는 내일 일은 내가 알 수도 없고, 어떻게
할 수도 없으니 메시야 예수님께 맡기고 다만 오늘 하루 인도해주시도록 주님을 의지하고 기도하는 믿음이 필요하다고 말해 주었습니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그렇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의 사역의 방향이요 하나님이 예수님께
주신 삶의 꿈과 비전입니다. 날마다 가난한 자들을 부요하게 하고 포로된 자를 자유케 하며 눈 먼 자를
다시 보게 하고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신 예수님은 얼마나 행복했을까요. 오늘 이 시간 이 예수님의 행복이
우리의 행복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고향 사람들은 크게 놀랐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예수님에 대한 편견이 있었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동네에서 보고 자란
‘아’가 어떻게 메시야일 수 있는가, 그렇다면
우리에게 메시야임을 입증하는 기적을 보여봐라 하는 마음을 가졌습니다. 이런 그들에게 예수님은 메시야가
선포하는 이 은혜는 저 엘리야 시대 때 사렙다 과부처럼, 저 엘리사 시대 때 수리아 사람 나아만처럼
겸손한 사람만이 받을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을 들은 마을 사람들은 머리끝까지 화가 치밀어올라
예수님을 벼랑 끝으로 몰고가 죽이려 했습니다.
안타깝게도 오늘날 수많은 이들이 예수님에 대한 편견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렸을
적 교회에 부정적인 시각을 가진 부모님을 통해 갖게 된 편견이 있습니다. 또 학교 친구들이 하는 말을
통해 갖게 된 편견이 있습니다. 사렙다 과부처럼, 수리아의
나아만처럼 모든 편견을 내려놓고 겸손한 마음으로 메시야 예수님께 나올 때 그가 베푸시는 큰 은혜를 받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 은혜를 받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31-44절에서 예수님은 귀신 들린 자에게 명령하여 귀신을 내쫓으셨습니다. 또 열병에 걸린 시몬의 장모에게 열병을 꾸짖으심으로 병을 고쳐주셨습니다. 이를
통해 메시야의 능력을 나타내셨습니다. 계속 자기들 곁에 머물러 있기를 원하는 이들에게 다른 동네에도
하나님의 나라 복음을 전해야 한다고, 내가 이 일을 위해 보내심을 받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결론입니다. 예수님은 가난한 자를 부요하게 하시고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눌린 자에게 자유함을 주기 위해 오셨습니다. 이 시간 메시야 예수님께 나아와 메시야가 주시는 그 풍성한 구원의 은혜를 누리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