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누가복음 15강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말씀/ 누가복음 9:18-36
요절/ 누가복음 9:20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하나님의 그리스도시니이다 하니”
수업시간에도 특별히 중요한 시간이 있습니다. 다른 때에는 다소 졸더라도
그 중요한 수업에 잘 집중하면 좋은 성적을 얻게 됩니다. 이처럼 오늘 말씀은 특별히 중요한 말씀입니다. 우리가 이전 말씀 들을 때 다소 집중하지 못했더라도 괜찮습니다. 오늘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집중할 때 하늘로부터 오는 큰 은혜를 받을 것을 믿습니다.
18,19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따로 기도하실 때에 제자들이 주와 함께 있더니 물어 이르시되 무리가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대답하여 이르되 세례 요한이라 하고 더러는 엘리야라, 더러는 옛 선지자 중의 한 사람이 살아났다 하나이다”
본문을 보면 예수님은 따로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중대한 사역의
전환점을 맞이할 때 항상 따로 기도하셨습니다. 기도하시던 예수님은 멀찍이 떨어져 있던 제자들을 불러
한 가지 질문을 하셨습니다.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제자들은
대답했습니다. “아, 예수님에 대한 사람들의 생각이요? 어떤 사람은 예수님이 세례 요한이라고 합디다. 어떤 사람은 엘리야다, 아니다, 옛 선지자 중 한 사람이 살아난 것이다, 갑론을박하고 있습니다.”
세례 요한은 나름대로 평온한 일상을 살아가던 사람들 앞에 갑자기 나타나 말했습니다.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라” 그의 메시지를 들은 사람들은
각자 자기 죄를 회개하고 참된 회개의 표현으로 세례를 받았습니다. 예수님이 전하는 메시지를 들어보면
세례 요한과 비슷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예수님이 세례 요한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한편 예수님에게는 세례 요한과 다른 점도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병든
자를 고치고 귀신들린 자에게서 귀신을 쫓아내는 능력이 있었습니다. 그런 능력을 보면서 사람들은 기도로
하늘문을 열고 닫고 불과 비를 내리게 했던 능력의 선지자 엘리야가 하늘에서 내려온 것이 분명하다 생각했습니다. 그런가
하면 옛 선지자 중 한 사람이 다시 살아난 것이다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예수님이 누구라고 생각합니까? 오늘날 사람들은 예수님이
누군지에 대해 거의 관심이 없습니다. 수천년 전에 살았던 사람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는가 생각합니다. 나름대로 학식이 있는 분들은 예수님을 석가모니, 공자, 소크라테스와 더불어 인류의 탁월한 스승 중 한 분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얼마 전 가수 나훈아가 ‘테스형’이라는
노래를 불렀습니다. “어쩌다가 한바탕 턱 빠지게 웃는다 그리고는 아픔을 그 웃음에 묻는다 그저 와준
오늘이 고맙기는 하여도 죽어도 오고 마는 또 내일이 두렵다. 아! 테스형
세상이 왜 이래 왜 이렇게 힘들어 아! 테스형 소크라테스형 사랑은 또 왜 이래 너 자신을 알라며 툭
내뱉고 간 말을 내가 어찌 알겠소 모르겠소 테스형 먼저 가본 저 세상 어떤가요 테스형 가보니까 천국은 있던가요 테스형 아 테스형 아 테스형”
이 노래는 “너 자신을 알라”며
인류에게 깨달음을 주었던 인류의 스승 소크라테스에게 형 테스형, 소크라테스형, 인생이 왜 이렇게 힘드냐며 조언 좀 해 달라는 내용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것을
패러디한다면 사람들이 인생을 살다가 힘들면 “예수 형, 인생을
사는 것이 이렇게 힘든 줄 몰랐어요. 예수 형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하나요? 좀 알려주세요”라고 노래로 만들어 부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실제로 예수님은 지금까지 그 누구도 생각해내지 못한 삶의 위대한 교훈과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예수님이 오시기 전까지 사람들은 용서와 사랑이 가진 위대한 힘에 대해 잘 알지 못했습니다. 만약 누군가 나를 무시하고 나를 함부로 대한다면 강력한 힘을 보여줌으로 함부로 나를 무시하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만약 이웃 부족이 우리 부족을 해치고 공격한다면 강력한 힘으로 그것을 제어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오셔서 원수를 용서하고 사랑함으로 원수에 대한 미움과 분노를 이기고
승리하는 삶의 놀라운 교훈을 주셨습니다. 인도의 마하트마 간디는 영국 유학생 시절 이 예수님의 가르침에
깊은 감명을 받고 후일 비폭력 운동을 전개했습니다. 그는 인도를 식민통치하는 영국에 대해 분노와 폭력으로
반응하지 않고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온유함과 사랑의 마음으로, 그러나 인도독립이라는 분명한 정신 가운데
비폭력 저항 운동을 전개했습니다. 그 결과 인도독립을 이루어낼 수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수천년 전 예수님의 가르침이 나에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 생각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가르침은 오늘날 인류의 삶 구석구석에 깊이 배어 있습니다. 러시아의 푸틴은 생명을 존중하는
마음이 없습니다. 그는 여기에 어린아이들이 있다고 표시해놓은 건물에 일부러 미사일을 날렸습니다. 그는 나는 수많은 사람들이 죽는 것에 눈하나 까딱하지 않는 사람이다 하는 것을 일부러 과시합니다. 나는 필요하면 핵폭탄도 날릴 수 있다는 것을 사람들의 마음에 심어 자신에 대한 두려움을 갖게 합니다. 이에 비해 예수님은 한 생명의 소중함을 가르치셨습니다. 여기 있는
사람들 중 가장 부족하고 연약한 소자 한 사람의 생명이 온 천하 우주만물보다 더 소중하다는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이 예수님의 생명 존중 사상은 인류의 DNA 안에 녹아 들어가 있습니다. 오늘날 각종 사회 규범과 제도, 또 강대국이 약한 나라를 대상으로
취하는 정책, 각 나라의 사회복지 제도 안에 예수님의 가르침의 정신은 구석구석 배어 있습니다.
이런 점들을 생각해 본다면 분명 예수님은 인류의 위대한 스승입니다. 하지만
이런 훌륭한 가르침은 예수님 한 분만 주신 것은 아닙니다. 또 인류의 정신에 위대한 영향을 끼친 다른
이들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인류의 위대한 스승들 중 한 분이다 - 이렇게 결론을 내릴 수 있을까요?
20-22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하나님의 그리스도시니이다 하니 경고하사 이 말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명하시고 이르시되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 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야 하리라 하시고”
제자들의 답변을 들으신 예수님은 다시 질문을 던지셨습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예수님의 첫 번째 질문은 객관적 정보에 관한 질문이었습니다. 자기가 듣고 알고 있는 정보를 그대로 말하면 되었습니다. 이에 비해
예수님의 두 번째 질문은 ‘나의 생각’에 관한 질문입니다. “너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제자들이 머리를 두드리며 ‘아 뭐라고 답해야지? 분위기상 이 질문에 섣불리 잘못 대답했다가는
뭔가 굉장히 안좋은 일이 있을 것 같은데’ 고민할 때 베드로가 말했습니다. “당신은 하나님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리스도는 헬라어(크리스토스)로
기름부음을 받은 자라는 뜻입니다. 영어로는 The Anointed이고
히브리어로는 메시야입니다. 하나님의 기름부음을 받았다는 것은 하나님이 특별한 목적을 위해 그 사람을
택했다는 것입니다. 구약 시대 때 제사장, 선지자, 왕을 세울 때 기름을 부었습니다. 오늘날 대통령은 손을 들고 선서를
합니다. 그 선서는 국민에 의해 권한을 위임받았으며 앞으로 일정기간 대통령 직분을 성실하게 마음을 다해
감당하겠다는 의미가 됩니다. 이와같이 머리에 올리브 기름을 붓는 과정은 그 사람이 하나님을 섬기는 제사장, 선지자, 왕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이처럼 ‘크리스토스’는
원래는 보통 명사입니다. 기름부음을 받은 자는 누구나 ‘크리스토스’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정관사가 붙으면 고유명사가 됩니다. 원문을 보면 정관사가 붙어 있습니다. ‘호 크리스토스’ 곧 The Anointed입니다.
이것은 특별한 사명을 위해 하나님의 택함을 받아 기름부음을 받은 자라는 의미입니다.
특별한 사명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인류를 죄와 죽음으로부터 구원하는
사명입니다. 죄란 무엇입니까? 죄는 도둑질, 사기, 살인 등 형사처벌을 받는 죄가 있고 거짓말, 간음, 음행 등 자신의 양심과 사람들의 마음에 상처를 주는 도덕적
차원의 죄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죄가 겉으로 표현되는 방식이고 근본적으로 죄는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떠난 것입니다. 마치 나무가지가 나무를 떠나면 잠시 후 말라 죽어버리는 것처럼, 죄로 인해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떠난 인간은 그 결과 죽을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현대 과학자들은 죽음은 엔트로피 법칙에 따른 자연스러운 결과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죽음을 두려워합니다. 죽음 자체도 두렵지만 죽음 이후에 대해 공포감을 가지고 있습니다. 소가 도살장으로 끌려갈 때 그 가는 길에 아무런 도살에 대한 징후가 없지만 본능적으로 소는 자신이 죽을 것을
알고 눈물을 흘리며 두려워합니다. 이처럼 인간은 죽음 너머에 대한 본능적인 공포와 두려움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두려움의 뿌리는 죄입니다. 범죄자가 경찰을 두려워하는 것처럼
죄인은 의의 재판장이신 하나님을 두려워합니다. 죽은 후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 두렵습니다.
하나님은 인류를 이 죄와 죽음으로부터 구원하기 위해 한 사람을 특별히 택하여 그에게 이 구원의 사명을 맡기고자
하셨습니다. 그 택함받은 분이 바로 예수님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구체적으로 어떤 방법으로 인류를 죄로부터 구원하십니까? 그 방법은 구약 성경인 이사야 53:4-6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하나님의 그리스도이신 예수께서는 죄인들이 각자 받아야 할 무서운 죄의 형벌을 십자가에서 대신 받고 죽으심으로
인류를 죄와 죽음으로부터 구원하십니다. 예수님은 인류에게 위대한 도덕적 윤리적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인류의 정신을 한 단계 더 높여주셨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예수님의
사역의 본질은 아닙니다.
C. S. Lewis는 그의 저서
‘순전한 기독교’에서 다음과 같은 말을 하였습니다. “인간에
불과한 사람이 예수와 같은 주장을 했다면, 그는 결코 위대한 도덕적 스승이 될 수 없습니다. 그는 정신병자 - 자신을 삶은 계란이라고 말하는 사람과 수준이 똑같은
정신병자 - 거나, 아니면 지옥의 악마일 것입니다. 이제 여러분은 선택을 해야 합니다. 이 사람은 하나님의 아들이었고, 지금도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그게 아니라면 미치광이거나 그보다 못한
인간입니다. 당신은 그를 바보로 여겨 입을 틀어 막을 수 있고, 악마로
여겨 침을 뱉고 죽일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그의 발 앞에 엎드려 하느님이요 주님으로 부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위대한 인류의 스승이니 어쩌니 하는 선심성 헛소리에는 편승하지 맙시다.
그는 우리에게 그럴 여지를 주지 않았습니다. 그에게는 그럴 여지를 줄 생각이 처음부터 없었습니다.”
그의 주장의 요점은 다음과 같습니다. “하나님이 그리스도로 하여금
인류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죽게 하셨다는 예수의 주장은 정신병자의 미친 헛소리이거나 아니면 정말 그것이 사실이거나 둘 중의 하나입니다. 정직하고 진실하게 예수의 주장을 대면할 때 그를 헛소리한 정신병자로 취급하거나 아니면 그의 발 아래 엎드려
나의 죄를 위해 죽으신, 나를 위해 죽으신 나의 구세주라고 고백하거나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해야 합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사실은 오늘날 수많은 청년들이 이런 진지한 고민을 해보기도 전에 시대 분위기에 휩쓸려 예수의
가르침을 일종의 헛소리로 단정한다는 것입니다. 또래 청년들이 기독교는 다 헛소리다 단정짓는 그 분위기에
휩쓸려 진지한 고민의 시간을 아예 갖지 않습니다. 그냥 그런가보다 하고 지레짐작하고 그 다음부터는 기독교의
가르침에 대해 처음부터 부정적인 반응을 보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모든 시대 분위기, 선입관, 지레짐작하는 마음을 내려놓고 이 예수님 앞에 홀로 서는 시간을 가져보십시오.
본문과 동일한 사건을 기록한 마태복음에 의하면 예수님이 하나님의 그리스도시라는 베드로의 이 고백은 그가 스스로 생각해서 깨달은 것이
아니라, 하늘 아버지께서 그의 마음의 눈을 밝혀 주심으로 알게 하셨다고 되어 있습니다.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마 16:17)
지금까지 인류역사에서 사과가 땅에 떨어진 것을 보고 어째서 사과열매가 위로 올라가거나 옆으로 날아가지 않고 땅으로
떨어지지 생각하고, 거기에서 만유인력의 법칙을 발견한 사람은 뉴튼밖에 없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수없이 사과 열매가 땅으로 떨어진 것을 보았지만 거기에서 만유인력의 법칙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이와같이 예수님을 보고 예수님이 하나님의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깨달은 사람은 열두 제자들 중 베드로밖에 없었습니다. 이것은 그가 천재였기 때문이 아니라 하늘 아버지께서 그의 마음의 눈을 밝혀주셨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하나님의 그리스도시라는 것은 하늘 아버지께서 성령으로 그 사람의 마음의 눈을 열어주실 때에만 가능합니다. 그러므로 우리 목자님들은 양들이 복음을 깨달을 수 있도록 간절히 기도해야 합니다. 설득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아니 설득만으로는 불가능합니다. 하지만 사람 편에서는 편견과 선입관, 시대 분위기에 편승하여 깊은
고민없이 지레짐작하고 결론을 내리는 마음을 돌이켜야 합니다. 정말로 예수께서 내 죄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셨단 말인가 진지하게 고민하고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그의 마음의 눈을 열어주십니다. 오늘 이 시간 우리 모두가 베드로의 이 고백 앞에서 진지하게 생각하고 고민하고 또 기도하는 가운데 예수님이
하나님의 그리스도이신 것을 밝히 깨닫고 신앙고백하게 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23-26절을 보십시오. “또
무리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를 잃든지 빼앗기든지 하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누구든지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자기와 아버지와 거룩한 천사들의 영광으로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
이 말씀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그리스도로 신앙고백한 이들에게만 해당하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신앙고백한 이들은 바로 이와같은 자세로 따라야 합니다. 곧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라야 합니다. 자기를 부인한다는 것은 그것이 좋든지, 싫든지, 하고 싶든지, 하고
싶지 않다든지 하는 개인의 생각과 취향이 절대적인 기준이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을 따르는
삶은 동호회 활동이나 팬덤 활동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동호회 활동은 자기가 좋아서 하는 것입니다. 동호회 활동은 열심히
하다가 싫증이 나면 좀 쉴 수도 있습니다. 마음 먹기에 따라 아예 영영 그만둘 수도 있습니다. 요즘 사람들은 팬덤 활동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어떤 분들은 팬덤
활동이 뭐냐고 질문하시는데 팬덤 활동이란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을 정해서 그 사람에게 다양한 방법으로 팬심을 보여주고 또 그 사람을 위해서 여러
방식으로 활동도 하는 것입니다. 요즘 정치인들은 사람들의 이런 성향을 이용해서 이른바 팬덤 정치를 합니다. 한 정치인이 같은 정당의 다른 정치인에 대해 다소 비판적인 발언을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면 그 비판받은 정치인의 팬덤 그룹이 비판한 정치인의 휴대폰에 문자폭탄을 날립니다. 그 정치인의 사무실 문에 항의성 현수막을 내걸기도 하고 직접 찾아가서 강력 항의를 하기도 합니다. 10대 청소년들이 좋아하는 아이돌 가수를 향해 무한한 사랑과 팬심을 드러내고 표현하는 것처럼, 요즘 30대-50대 분들은
남녀를 가리지 않고 좋아하는 정치인을 향한 팬심을 드러내고 표현합니다.
23-26절에서 예수님이 하신 말씀의 핵심은 다음과 같습니다. 곧 예수님을 따르는 자는 동호회 활동을 하거나 예수님을 좋아하는 팬심의 마음으로 따라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자기의 영원한 생명을 걸고 따르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파선하는 배에 있는 사람이 자기를 향해 던져주는 구명 밧줄을 적당한 마음으로 붙들 수 없습니다. 구명
밧줄을 잡고 싶으면 잡고, 잡기 싫으면 안잡아도 되는 문제가 아닙니다.
또 밧줄을 잡고 있다가 손이 까지고 힘들면 그냥 놓아도 되는 문제가 아닙니다. 파선하는
배에 올라탄 사람에게 던져지는 구명 밧줄은 그의 생명을 구하는 밧줄입니다. 그러므로 그의 생명을 걸고
절대적인 자세로 붙들어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따르는 것은 동호회 활동이 아닙니다. 팬덤 활동도
아닙니다. 내가 죄와 죽음으로부터 구원을 얻고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함입니다. 나의 영원한 생명을 걸고 구세주 예수님을 따른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어찌
이것을 소풍가는 마음으로, 굳이 특별히 할 일도 없으니 노느니 염불이라도 외우자는 마음으로 할 수 있겠습니까!
과거 우리 모임이 이와같은 절대적인 자세로 예수님을 따르도록, 자기의
영원한 생명을 걸고 예수님을 따르도록 사람들을 훈련하고 도왔습니다. 그런데 요새는 시대 분위기를 반영하여
예전에 비해 부드럽게 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좋은 점도 있지만 신앙 생활이 마치 동호회 활동인 것처럼
되어가는 점도 있습니다. 우리가 방법적인 측면에서는 예전에 비해 부드럽게 할 수 있지만 말씀에 새겨진
그 정신은 동일합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은 각자의 영원한 생명을 걸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절대적인 자세를 가지고 해야 합니다. 한 번 예배를 드릴
때 그 예배가 나의 삶의 마지막 예배인 것처럼 마음과 진심을 다해 드려야 합니다. 한 번 성경을 읽을
때 이 성경을 읽는 것이 나의 삶의 마지막 성경읽기인 것처럼, 한 번 기도할 때 이 기도가 나의 삶의
마지막 기도인 것처럼 마음과 정성을 다해 감당해야 합니다.
어떤 분들은 팬덤 활동을 신앙생활하는 것처럼 합니다. 항의성 문자를
날릴 때 소감을 쓰는 것처럼 시간과 마음을 진심을 드려 문구를 작성합니다. 항의 집회에 참석하는 것을
마치 신자가 예배에 참석하는 것처럼 경건한 마음으로 집회 시작하기 훨씬 전에 미리 와서 마음을 준비합니다. 현대인들은
팬덤 활동은 신앙생활처럼, 신앙생활은 팬덤 활동처럼 합니다. 참
안타까운 일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에 의하면 우리의 신앙생활은 가장 엄숙하고 절대적인 자세로 해야
합니다.
또한 우리 신앙의 최종 목표가 분명해야 합니다. 우리 신앙생활의 최종
목표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예수님 한 분을 소유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소유한다는 의미가 무엇입니까? 우리가 예수님을 소유한다는 것을 예수님을 더 깊이 알고 그 분과
더 친밀한 관계를 맺기 위해 나에게 주어진 시간과 열정을 투자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를 들어 사람들은
돈을 버는 것에 자기에게 주어진 시간과 열정을 아낌없이 투자합니다. 어떤 사람은 주식 투자를 한 후
거의 하루 24시간 가까이 모니터를 관찰하며 주식을 사고 팔고 합니다.
이렇게 평생을 보내고 나면 죽기 직전 남는 것은 그동안 모아둔 재산입니다. 결과적으로 그
사람은 자기 생명과 재산을 맞바꾼 것입니다. 그러나 그 재산을 죽은 후 가져갈 수 없습니다. 동전 하나까지도 이 땅에 그대로 남겨놓아야 합니다.
이에 비해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은 자기가 가진 시간과 열정을 다 드려 예수님 한 분을 얻고자 애씁니다. 예수님을 좀 더 깊이 알기 위해 성경을 읽고 묵상합니다.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는데 자기가 가진 시간과 열정을 아낌없이 투자합니다. 예수님을 더 깊이 알고 그의 말씀에
순종하기 위해 나에게 주어진 시간과 열정을 아낌없이 드리는 것 - 이것이 예수님을 얻기 위해 자기 생명을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재물을 얻기 위해 인생을 투자한 사람은 그 재물을 영구히 소유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얻기 위해 인생을 투자한 사람은 그 예수님을 영원히 소유하게 됩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을 통해 제가 과거 훈련받았던 절대적인 자세를 많이 잃어버리고 동호회 활동하는 것처럼 신앙생활했던
것을 깨닫고 회개하게 되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 통해 과거 우리 선배님들이 참 신앙생활을 성경 말씀대로
잘 했구나, 성경의 정신을 잘 알았구나 새롭게 깨닫고 은혜를 받았습니다. 제가 다시 새롭게 절대적인 자세를 회복하고 절대적인 자세로 신앙생활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 한 분을 소유하고자 하는 신앙생활의 최종 목표를 분명히 하고 예수님 한 분을 소유하기 위해 주어진 하루하루의
삶을 열정을 다해 불태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30-36절에서 예수님은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화하셨습니다.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나 예수께서 장차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영광스러운 모습을 보여주신 것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후에 부활의 영광이
있음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소유하기 위해 자기 생명을 내어줄 때 예수님을 소유하게 됩니다. 더 나아가 예수님의 부활의 영광에 동참하게 됩니다.
결론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그리스도이십니다. 이 신앙고백을 할 때 죄와 죽음으로부터 구원을 얻게 됩니다. 이
예수님을 따르는 자는 엄숙하고 절대적인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자기의 영원한 생명을 걸고 예수님을 따라야
합니다. 우리가 이러한 자세를 가지고 예수님을 따름으로 생명을 얻는 복된 자들이 되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