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누가복음 24강
회개하지 않으면 망하리라
말씀/ 누가복음 13:1-21
요절/ 누가복음 13:3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오늘 말씀은 제목이 좀 부담스럽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주님께서 우리를
협박하기 위해 주신 말씀이 아니라, 사랑의 주님께서 나를 세상 그 무엇보다 사랑하심으로 주신 말씀입니다. 우리가 이 주님의 말씀을 듣고 받아 아름답고 영원한 생명의 열매 맺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1절을 보십시오. “그
때 마침 두어 사람이 와서 빌라도가 어떤 갈릴리 사람들의 피를 그들의 제물에 섞은 일로 예수께 아뢰니”
12장 하반부를 보면 예수님은 시대를 분간하라고 하셨습니다. 구름이 서쪽에서 이는 것을 보면 곧 소나기가 올 것이고 남풍이 부는 것을 보면 매우 더울 것이다 예측하는 것처럼, 이 시대의 여러 징조를 보고 그 징조가 갖는 의미를 잘 분간하여 깨달으라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이 말씀을 하셨기 때문이었을까요? 몇 사람이 예수님께 다가와
한 사건을 언급했습니다. 그것은 유대 총독 빌라도가 어떤 갈릴리 사람들의 피를 그들의 제물에 섞은 사건이었습니다. 당시 유대 지역은 로마가 총독을 보내 다스리는 형식으로 직할 통치를 하고 있었습니다. 이에 비해 북쪽 갈릴리는 현지인 중 한 사람인 헤롯을 왕으로 임명해 다스리는 간접 통치를 했습니다. 당시 로마 정부에 저항하는 무리들을 가리켜 ‘열심당원’이라 불렀는데 이 열심당원의 본거지가 갈릴리에 있었습니다.
이 사건이 일어났던 때는 전국의 유대인들이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에 모여들어 제사를 드리던 유월절 기간이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성전에서 유대인들이 희생제물을 잡아 그 피를 제단에 뿌리는 제사를 드리고 있을 때였습니다. 정확한 경위는 알 수 없는데 빌라도가 보낸 군인들이 갈릴리 사람 몇을 현장에서 칼로 찔러 죽였습니다. 이때 그들의 피가 튀어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의 피와 섞였습니다.
이 사건은 유대인의 3대 명절 중에서도 유월절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유대인들, 또 유월절에서 어린 양의 피를 뿌리는 의식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유대인들에게 충격적인 사건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이 사건이 가진 의미를 해석해주기 원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2,3절을 보십시오.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는 이 갈릴리 사람들이 이같이 해 받으므로 다른 모든 갈릴리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그들은 예수님으로부터 이 사건이 가진 정치적, 사회적, 신학적 의미에 대해 듣기 원했습니다. 예전에 대한민국에서 박종철
군 고문치사 사건, 이한열 군이 시위 중에 최루탄 파편에 머리를 맞아 사망한 사건을 계기로 군사 정권을
무너뜨리고 민주화를 이루었던 것처럼 과연 이 사건을 잘 이용해 로마의 압제로부터 민중봉기를 이끌어내어 조국의 독립을 이룰 수 있을 것인가, 갈릴리 사람들의 피가 섞인 유월절 제사가 신학적으로 합법적인 제사인가 하는 문제들에 대해 예수님의 의견을 듣기
원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은 그들의 기대나 예상과 전혀 다른 답변이었습니다.
4,5절을 보십시오. “또
실로암에서 망대가 무너져 치어 죽은 열여덟 사람이 예루살렘에 거한 다른 모든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예수님께 질문을 한 사람들의 입장에서 볼 때 빌라도가 보낸 군인들이 제사드리고 있던 갈릴리 사람들을 죽인 사건과
실로암 망대가 무너져 18명이 죽은 사건은 완전히 그 의미가 다른 사건이었습니다. 후자는 그야말로 사고였습니다. 사고는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습니다. 이에 비해 빌라도가 보낸 군인이 제사드리던 갈릴리 사람들을 죽인 사건은 엄청난 정치적, 사회적, 신학적 이슈가 내포된 사건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 그 의미를 해석해 달라고 한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이 두 사건을 동일한 하나의 카테고리로 묶으셨습니다. “너희는
제사드리다 죽은 이 갈릴리 사람들이 다른 모든 갈릴리 사람보다 더 죄가 많은 것으로 생각하느냐?” “예루살렘에
있는 실로암 망대가 무너져 압사한 18명의 예루살렘 시민들이 다른 모든 예루살렘 사람들보다 더 죄가
많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느냐?”
예수님 당시 사람들의 문화나 사고방식은 오늘날과 크게 다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이 말씀을 오늘날 우리 문화와 사고방식으로 다시 설명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얼마 전 미국에서 9.11 비행기 테러가 있었습니다. TV 화면에서 피할 곳이 없던 사람들이 시뻘건 불길을 피해 빌딩 아래로 몸을 던지는 모습이 생생하게 방영되었습니다. 수백명의 소방관들이 화재를 진압하기 위해 건물 안으로 진입했습니다. 소방관들이
들어간 후 얼마 되지 않아 건물이 완전히 붕괴되었습니다. 방금 전 건물 안으로 들어갔던 소방관들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누가 말해주지 않아도 다 알 수 있었습니다. 이 모습을 지켜 본 reporter들은 그야말로 speechless 한 상황이 되었습니다.
이 사건이 벌어진 후 수많은 평론가들, 지식인들, 언론인들이 이 사건이 가진 의미에 대해 말을 하고 글을 썼습니다. 그
말과 글들을 전부 프린트하여 자료로 모은다면 아마 큰 창고 몇 개가 필요할 것입니다.
그런데 그날 아침 그 빌딩 안에 있던 사람들은 왜 그런 비극적인 죽음을 당했을까요? 만약 다른 도시에 있는 다른 빌딩에 그런 사건이 벌어졌다면 그들은 지금 이 시간까지도 평범한 직장인의 생활을
하면서 잘 살고 있을 것입니다. 아침이면 부인과 키스를 나눈 후 직장으로 출근하고 퇴근하면 사랑하는
자녀들과 함께 오붓한 시간을 보냈을 것입니다. 그가 크리스챤이라면 지금 교회에 가서 주일예배를 드리고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왜 미국의 수많은 도시들, 수많은
건물들 중 하필 그 건물 안에 있는 회사에 취직하여 그런 비극적인 죽음을 당했을까요?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은 ‘뭔가 죄가 있었겠지’ 생각할 것입니다. 우리 동양인들은
‘업보가 있었겠지, 태어날 때부터 타고난 명이 거기까지였나보지’ 생각할 것입니다.
9.11 사건 이후 분노한 미국 정부는 사건의 배후를 추적했습니다. 그리고 책임이 있다고 생각한 이들을 군사력으로 처단했습니다. 이를
통해 정의를 실행했습니다. 이후 수많은 언론인들, 지식인들, 사상가들이 이 사건이 내포한 의미를 규명하기 위해 노력했고 다시 이러한 사건이 생기지 않도록 하기 위해 어떻게
할 것인가를 논의했습니다.
본문에서 예수님께 질문을 던진 유대인들도 이러한 지식인들, 사상가들
중 한 사람처럼 예수님도 그런 깊이있는 식견과 견해를 나타내주실 것을 요청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런 견해보다 이 사건이 “나에게 주는 의미가 무엇인가” 하는
것에 포커스를 맞추셨습니다.
9.11 테러와 같은 사건이 나에게 일어날 가능성은 확률적으로 높지
않습니다. 실로암 망대 사건같은 사고가 일어날 가능성도 높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비행기를 안심하고 타는 이유는 비행기 사고로 죽을 확률이 일반적인 교통사고로 죽을 확률보다 훨씬 낮기 때문입니다. 한 조사에 의하면 비행기 사고가 날 확률은 400만분의 1입니다. 즉 비행기를 400만번
타면 그 중 한 대 정도 사고가 날 가능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또 한 통계에 의하면 2012년에서 2016년 사이 평균
100억명의 승객 중 1명이 사망했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어떤 대형 사고나 사건이 나면 나에게도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다는 생각은 거의 하지 않습니다. 그보다는 그 사건이 가진 의미를 분석하기에 바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사건이 가진 정치적, 사회적 의미를 분석하기에 앞서 그러한 사건이 언젠가 ‘너’에게도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말씀하십니다. 아니 언젠가 너에게도 일어날 수 있다는 것에 머무르지 않고 너도 만약 회개하지 않으면 반드시 이처럼 망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9.11 테러 때 시뻘건 불길을 피해 천길 낭떠러지와 같은 빌딩 아래로
몸을 던져야만 했던 그 사람의 마음이 어떠했을까요? 불길에 코 앞까지 다가왔을 때 사랑하는 사람과 마지막으로
통화하려고 사력을 다했던 사람의 마음이 어떠했을까요? 그런 비극적인 일이, 그런 끔찍한 일이 만약 회개하지 않으면 너에게도 반드시 일어난다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오늘 예수님의 말씀의 포커스는 그 사건의 정치적 사회적 신학적 의미보다, 나 한 사람의 ’회개’에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회개’란 헬라어로 ‘메타노에오’로 ‘생각을
바꾼다, 마음을 바꾼다’는 의미입니다. 구약에서는 회개를 ‘슈브(turn)’라
하여 하나님을 멀리 떠났던 사람이 방향을 바꾸어 하나님께 돌아오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구약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겉으로는 하나님을 섬겼지만 마음으로는 하나님을 떠났습니다. 하나님을 떠나 세상의 돈과 명예와
권력, 쾌락을 신으로 삼아 섬겼습니다. 선지자들은 이런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 마음을 돌이켜 하나님께 돌아오라 외쳤습니다. 그러므로 신약의 언어로는 “회개하라” 구약의 언어로는 “돌이키라, 돌아오라”라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오늘 회개에 대해 생각할 때 중요한 포인트는 ‘회개’라는 개념의 역동성입니다. 오늘날 많은 크리스챤들이 회개라는 개념을
일회성, 혹은 단회성으로 이해합니다. 한 번 회개하면 그것으로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회개는 역동적이고 지속적인 개념입니다. 잔
번연이 쓴 천로역정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책은 지금까지 인류가 프린트하여 낸 책 중 베스트셀러 2위입니다. 이 책의 주인공인 크리스챤은 본래 장망성(장차 멸망할 성)에 살던 거주민이었습니다. 어느날 그는 전도자가 준 성경을 읽고 이 성에 그대로 머물러 있다가는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을 받아 멸망할 것을
깨달았습니다. 이후 그는 다시 전도자의 도움을 받아 하나님이 계시는 저 천성을 향해 길을 떠나는 순례자의
삶을 시작합니다. 순례자의 여정에 갖은 어려움과 고난이 있었습니다. 어떤
이들은 크리스챤과 함께 같은 길을 가다가 도중에 세상의 유혹과 시험을 견디지 못하고 샛길로 샜습니다. 그
결과 멸망의 길로 빠지게 되었습니다. 크리스챤은 최종적으로 죽음의 강을 건너고 천성문에 도달하게 됩니다.
이 책에 나온 것처럼 회개란 한 번 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저 천성에 이를 때까지 지속적으로 하는 것입니다. 지속적인 회개를 통해 성도는 그 내면의 불순물이 빠지고 정금과 같이 됩니다.
지속적인 회개를 통해 예수님을 더 닮은 사람이 되며, 지속적인 회개를 통해 세상에 빛과
소금과 같은 좋은 영향력이 됩니다.
저는 이번 누가복음 말씀을 공부하며 누가복음이 마태복음 못지 않게 종말의 긴박성과 그 종말에 대해 준비할 필요성을
강조하고 있음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제 나이 어느덧 50대
중반에 들어섰습니다. 캠퍼스 선교를 하는 풀타임 사역자로서 이제 일할 수 있는 때가 많이 남지 않은
것을 생각할 때 과연 내가 주님 앞에 설 때 부끄러울 것이 없겠는가 자신을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이때
너무도 부끄럽고 회개할 것이 많은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좌절하고 부끄러워하던 저에게 주님께서 아직은
기회가 있다 하시고 이제부터라도 회개하고 잘 하면 된다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제가 이 주님의 위로와
격려에 큰 힘을 덧입었습니다. 제가 이제부터라도 회개하여 남은 사역의 기간 청년 캠퍼스 선교에 저의
생명을 드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6-9절을 보십시오. “이에
비유로 말씀하시되 한 사람이 포도원에 무화과나무를 심은 것이 있더니 와서 그 열매를 구하였으나 얻지 못한지라 포도원지기에게 이르되 내가 삼 년을
와서 이 무화과나무에서 열매를 구하되 얻지 못하니 찍어버리라 어찌 땅만 버리게 하겠느냐 대답하여 이르되 주인이여 금년에도 그대로 두소서 내가 두루
파고 거름을 주리니 이 후에 만일 열매가 열면 좋거니와 그렇지 않으면 찍어버리소서 하였다 하시니라”
비유에서 예수님은 회개할 수 있는 시간이 제한되어 있음을 말씀하십니다. 무화과
나무가 무려 3년간 열매를 맺지 못했습니다. 주인은 참다
못해 포도원지기에게 무화과나무를 찍어버리라고 말합니다. 포도원지기는 주인에게 간청하여 약 1년의 유예기간을 허락받았습니다.
일의 우선순위에 대한 원칙이 있습니다. 보통 일을 4가지로 분류합니다. 첫째는 급하고 중요한 일, 두 번째는 급하지 않지만 중요한 일, 세 번째는 중요하지는 않지만
급한 일, 네 번째는 급하지도 않고 중요하지도 않은 일입니다. 이중
어떤 일을 가장 먼저 해야 할까요? 급하면서 중요한 일입니다. 두
번째가 무엇일까요? 급하지는 않지만 중요한 일입니다. 중요하지는
않지만 급한 일은 최대한 빠른 속도로 처리하면 됩니다.
우리 인생에서 가장 급하고 중요한 일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회개입니다.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삶은 일종의 유예기간입니다. 어쩌면 그 유예기간이
이미 끝났는데 하나님의 긍휼로 내가 회개할 수 있도록 그 유예기간이 1차, 2차, 3차로 연장되고 있는 중인지도 모릅니다.
저는 2005년 고속도로에서 중대한 교통사고를 당했습니다. 평생을 운전하신 저의 아버지는 그 사고에 대한 자세한 내용을 듣고 난 후 “네가
믿는 하나님이 너를 살렸다. 그 정도의 사고면 거의 죽는다고 봐야 한다.”라고 하셨습니다. 그 전에도 저는 죽을 기회가 많았습니다. 3살 정도 되었을 때 동네 우물을 기어오르다가 미끄러져 바닥에 머리를 부딪혔습니다. 그때 어머니가 읍내에 있는 의원으로 저를 업고 갔습니다. 그때 마침
의사가 다른 곳에 출타 중이었습니다. 의사 밑에서 일하던 조수가 말하기를 저렇게 아이 배가 부풀어 오르는
것은 죽을 징조라고 했습니다. 절망한 어머니는 울면서 저를 업고 와 아랫목에 눕혔습니다. 그리고 어떻게 될지 지켜보았습니다. 그런데 기적적으로 살아났습니다. 중 3 때는 자전거를 타고 가다가 빙판 길에 넘어졌습니다. 그 순간 필름이 끊겼습니다. 캄캄한 무의식의 세계에서 갑자기 눈
앞에서 플래쉬가 번쩍였습니다. 그리고 다시 어둠이 임했습니다. 다시
눈을 떴을 때 구토 증상을 느끼고 뭔가를 토했습니다. 알고보니 병원이었습니다. 플래쉬가 번쩍인 것은 의사가 제 뇌기능이 살아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눈에 플래쉬를 비춘 것이었습니다.
저는 예수님의 예자도 모르고 죄 가운데 태어나서 죄 가운데 죽을 자였습니다. 하나님이
이런 저를 불쌍히 여기시고 생명을 연장시켜 주시고 회개할 기회를 주셨습니다. 그리고 저처럼 죄 가운데
죽어갈 영혼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사역자로 세워주셨습니다. 제가 날마다 회개하고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맡겨주신 복음 전파의 사명을 생명을 다해 감당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10-17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안식일에 한 회당에서 가르치실 때에 열여덟 해 동안이나 귀신 들려 앓으며 꼬부라져 조금도 펴지 못하는 한 여자가 있더라 예수께서 보시고 불러 이르시되
여자여 네가 네 병에서 놓였다 하시고 안수하시니 여자가 곧 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지라 회당장이 예수께서 안식일에 병 고치시는 것을 분 내어
무리에게 이르되 일할 날이 엿새가 있으니 그 동안에 와서 고침을 받을 것이요 안식일에는 하지 말 것이니라 하거늘 주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외식하는
자들아 너희가 각각 안식일에 자기의 소나 나귀를 외양간에서 풀어내어 이끌고 가서 물을 먹이지 아니하느냐 그러면 열여덟 해 동안 사탄에게 매인 바
된 이 아브라함의 딸을 안식일에 이 매임에서 푸는 것이 합당하지 아니하냐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매 모든 반대하는 자들은 부끄러워하고 온 무리는
그가 하시는 모든 영광스러운 일을 기뻐하니라”
10계명을 보면 안식일에 일하지 말라는 계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유대인 랍비들은 구체적으로 해서 안되는 일이 무엇인지 명확하게 하기 위해 하지 말아야 할 일을 39가지 행위로 분류했습니다. 응급상황이 아닌 경우 치료행위를 하는
것도 이 39가지 행위에는 포함되지 않지만 넓은 의미에서 하지 말아야 할 해위 중 하나였습니다. 반면 안식일에 가축이 목이 마른 경우 그 가축을 묶어놓은 멍에를 풀어주고 그 가축을 끌고 가 물을 마시도록
하는 행위는 허락되었습니다. 그 행위가 허락된 것은 목마른 가축을 불쌍히 여겼기 때문입니다.
본문에서 회당장은 예수님이 응급상황이 아닌데 여자를 치료하는 치료행위를 했으므로 안식일 법을 어겼다고 이를 갈며
분을 냈습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은 “위선자들아, 안식일날 가축이 목마른 것을 불쌍히 여겨 그 매임에서 풀어주는 것을 너희들이 허락하면서, 가축보다 귀한 이 아브라함의 딸이 18년간 사탄의 매임에 매여 있었는데
오늘 그 매임에서 풀어주는 것이 안 된다는 것이냐?” 책망하셨습니다.
본문의 예수님을 통해 사람을 돕고 사람과 대화하는 예수님의 지혜를 배웁니다. 예수님은
그냥 무턱대고 “이 사랑이 없는 자들아, 어떻게 그렇게 사랑이
없냐?” 이렇게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대신 회당장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 회당장의 언어로 그의 위선과 잘못됨을 스스로 느끼도록 도우셨습니다.
부부간에 보통 남편은 논리언어로, 아내는 감정언어로 이야기합니다. 아내가 남편에게 자신이 겪는 어려움에 대해 하소연합니다. 그러면
남편은 그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 줄 수 있을까 고민합니다. 만약 해결해 줄 수 있는 길이 생각나지 않으면
더 이상 그 문제에 대해 대화하기 원치 않습니다. 실상 아내가 원하는 것은 그 어려움에 대해 들어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공감해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상대방과 대화할 때 상대방의 언어를 이해할 수 있어야 합니다. 율법과
자기 생각에 매여 있는 회당장의 경우 그의 언어를 이해하고 그의 언어로 설득하고 대화해야 합니다. 우리가
이 예수님의 지혜를 배워 여러 다양한 언어를 구사하는 사람들의 언어를 이해하고 필요한 경우 설득하고 도울 수 있는 목자로 성장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18-21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예수께서 이르시되 하나님의 나라가 무엇과 같을까 내가 무엇으로 비교할까 마치 사람이 자기 채소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자라 나무가
되어 공중의 새들이 그 가지에 깃들였느니라 또 이르시되 내가 하나님의 나라를 무엇으로 비교할까 마치 여자가 가루 서 말 속에 갖다 넣어 전부 부풀게
한 누룩과 같으니라 하셨더라”
팔레스타인의 겨자는 몸에 잔털이 나 있고 노란 꽃이 피고 씨앗은 끝이 뾰족한 작은 꼬투리에 2-3개 들어있습니다. 씨의 크기는 손가락 끝에 올려놓을 수 있을
정도로 작습니다. 겨자의 특징은 처음에는 여러 들풀 중 하나처럼 작고 연약한데 자라면서 점점 나무처럼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겨자를 풀이라고 부르기도 하고 나무라고 부르기도 했습니다. 겨자는 처음에는 작고 보잘 것 없어보이지만 시간이 지나 성장하면 공중의 새들이 그 가짓에 깃들일 정도가 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겨자씨 한 알과 같습니다. 처음에는 작고 미미해 보이지만
그것이 놀랄 정도로 크게 성장합니다. 세상에서는 큰 일을 하려면 많은 자본과 우수 인력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는 지극히 작고 미미해 보이는 것에서부터 시작합니다. 우리가
하는 한 팀의 일대일 성경공부, 내가 주님께 드리는 한 번의 믿음의 기도 - 여기에서부터 출발하여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그 비결은 하나님이
그 일에 복을 주시고 은혜를 주시는데 있습니다.
예수님이 열 두 제자들을 세우시고 하신 일은 겨자씨 한 알처럼 작아 보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성장하여 온 세상에 영향을 끼치는 하나님의 교회가 되었습니다.
누룩의 비유는 작은 분량의 누룩이 많은 분량의 밀가루에 돌이킬 수 없는 큰 영향력을 끼쳐 밀가루를 부풀게 한
것입니다. 이는 진정으로 회개한 소수의 예수님의 제자들이 세상에 얼마나 큰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가를
보여줍니다.
결론입니다. 언제 끝날지 알 수 없는 인생길을 걸어가는 여러분. 여러분의 삶에서 가장 시급하고 중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회개입니다. 회개는 내일로 미룰 수 없습니다. 회개는 지금 해야 합니다. 나의 삶이 오늘 끝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나 한 사람이 회개할
때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 귀하게 쓰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