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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2022년 누가복음 26강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길`(누가복음 14:1-35)2022-09-12 0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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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누가복음 26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길

 

말씀/ 누가복음 14:1-35

요절/ 누가복음 14:33

 

“이와 같이 너희 중의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회사에 입사하기 전 면접을 볼 때 빼놓지 않고 묻는 질문이 있습니다. “우리 회사에 지원하게 된 동기가 무엇입니까? 왜 우리 회사에 들어오기 원하십니까?” 어떤 피면접생은 이 질문에 답변하면서 자기가 지원하는 회사가 정확히 어떤 회사인지, 무엇을 목적으로 세워진 회사인지 모르는 것이 드러나기도 합니다. 심지어 이름이 비슷한 다른 회사와 착각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또 어떤 피면접생은 면접관의 유도 질문에 넘어가 사실 자기가 이 회사를 잠시 다니다가 다른 좋은 기회가 생기면 얼마든지 떠날 수 있다는 속내를 들키기도 합니다. 그런 경우 면접관은 그에게 불합격 판정을 내릴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예수님은 예수님의 제자로 살겠다고 지원한 우리들에게 면접관으로서 질문을 하십니다. 예수님의 질문이 무엇이며 우리는 과연 어떤 답변을 할 수 있습니까? 오늘 말씀을 통해 예수님의 면접 시험에 답변을 잘 하여 합격 통지서를 받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1-6절을 보십시오. “안식일에 예수께서 한 바리새인 지도자의 집에 떡 잡수시러 들어가시니 그들이 엿보고 있더라 주의 앞에 수종병 든 한 사람이 있는지라 예수께서 대답하여 율법교사들과 바리새인들에게 이르시되 안식일에 병 고쳐 주는 것이 합당하냐 아니하냐 그들이 잠잠하거늘 예수께서 그 사람을 데려다가 고쳐 보내시고 또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 중에 누가 그 아들이나 소가 우물에 빠졌으면 안식일에라도 곧 끌어내지 않겠느냐 하시니 그들이 이에 대하여 대답하지 못하니라”

 

어느 안식일었습니다. 예수께서 한 바리새인 지도자의 집에 식사 초청을 받아 그 집으로 들어가셨습니다. 그때 마침 수종병 든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수종병은 몸에 물이 차 온 몸이 물먹은 하마처럼 부풀어 오르는 병입니다. 수종병에 걸리면 아무리 물을 마셔도 목이 계속 마른다고 합니다. 예수님 당시 사람들은 수종병이 걸리는 것은 그 영혼에 탐심이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어떤 한 고대 문필가의 기록에 의하면재물에 대해 끝없는 탐심을 가진 사람을 수종병 걸린 자와 같다라고 표현한 글이 나옵니다.

 

본문의 수종병 환자는 병도 병이지만 그 병으로 인한 사회적 편견으로 인해 마음의 큰 고통을 받았을 것입니다. ‘아이고, 저 배 나온 것 봐라. 내면이 얼마나 탐심으로 병들었으면 저런 병에 걸렸을까? 하나님이 저 사람의 탐심을 심판하신 거야.’ 사람들이 서로 수근대며 하는 이런 말이 그의 귀에 들려왔을 것입니다. 그는 이런 말을 듣는 것이 너무도 고통스러웠습니다. 그래서 평일이면 거의 집밖으로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안식일만큼은 예배에 참석하기 위해 밖으로 나왔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그를 보셨습니다. 그의 병으로 인한 고통을 보셨습니다. 더 나아가 사회적 편견으로 인한 그 마음의 고통을 보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를 치료해주기 원하셨습니다. 그러나 당시 율법교사들이 정한 규칙에 의하면 안식일에 응급상황이 아닌 환자를 치료해주는 것은 불법이었습니다. 그 규칙은 하나님이 주신 것이 아니라 사람이 정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그 규칙을 그냥 무시하고 수종병 환자를 고쳐주실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먼저 그들의 잘못된 생각을 고쳐주기 원하셨습니다. 그들이 정한 또다른 규칙에 의하면 안식일일지도 자기 아들이나 소가 우물에 빠지면 끌어낼 수 있습니다. 수종병은 몸에 물이 차는 병이기 때문에 마치 우물에 빠져 허우적대는 상황과 같습니다. 더 나아가 그는 사람들의 편견의 우물에 빠져 고통하고 있었습니다. 편견의 우물에 빠져 안식일이 아니면 집밖으로 나오지도 못하는 고통 가운데 있었습니다. 이런 그를, 안식일이니까 겨우 예수님 앞으로 나올 수 있는 그를 이 안식일에 고쳐주는 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얼마나 합당한 일입니까!

 

오늘날 우리 주변에도 본문의 수종병자처럼 육신의 병, 마음의 병으로 고통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사회적 편견으로 인해 편견의 바다에 빠져 허우적대며 고통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이런 그들을 끌어내줄 수 있는 유일한 분은 예수님입니다. 아무 편견없는 예수님의 사랑만이 시커먼 편견의 바다에서 허우적대는 이들을 건져내 줄 수 있습니다. 오늘날 예수님은 당신의 제자들을 통해서 이 예수님의 사랑을 나타내십니다. 사람에 대해 아무런 편견이 없는 예수님의 마음을 가진 당신의 제자들을 통해 편견의 물에 빠져 고통하는 이들을 건져내십니다. 우리가 이 예수님의 마음을 안고 세상에 나아가 여러 사회적 편견으로 인해 고통하는 이들, 외모, 학벌, 집안 배경 등 세상 기준으로 차별당하는 이들을 예수님의 말씀과 사랑으로, 아무런 편견없이 그들을 순수한 사랑, 참 사랑의 마음으로 대함으로 그들의 영혼을 편견의 바다에서 건져낼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7-11절을 보십시오. “청함을 받은 사람들이 높은 자리 택함을 보시고 그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여 이르시되 네가 누구에게나 혼인 잔치에 청함을 받았을 때에 높은 자리에 앉지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보다 더 높은 사람이 청함을 받은 경우에 너와 그를 청한 자가 와서 너더러 이 사람에게 자리를 내주라 하리니 그 때에 네가 부끄러워 끝자리로 가게 되리라 청함을 받았을 때에 차라리 가서 끝자리에 앉으라 그러면 너를 청한 자가 와서 너더러 벗이여 올라 앉으라 하리니 그 때에야 함께 앉은 모든 사람 앞에서 영광이 있으리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예수님은 잔치 자리에 초청받은 사람이 스스로 높은 자리를 택하는 것을 보셨습니다. 예수님 시대와 오늘날 시대 분위기가 많이 다르기 때문에 본문의 상황을 오늘날 상황으로 제가 각색을 한 번 해 보겠습니다.

 

어떤 한 세계적인 글로벌 기업이 신제품을 소개하는 중요한 행사를 기획했습니다. 그 회사는 초대할 인사들을 신중에 신중을 기해 선택했고 그 인사들이 앉을 자리를 미리 정해 초청받은 사람의 이름을 써서 자리 위에 두었습니다. 무대의 정중앙 가장 앞자리에는 가장 중요한 인사, 그 옆자리와 뒷자리로 갈수록 중요도가 점점 낮아졌습니다. 마침내 행사 시작 시간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행사 정중앙 가장 중요한 자리에 꼭 와야 할 사람이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그에게서 못오겠다는 연락이 따로 온 것도 없었습니다. 전체 행사를 기획한 담당자는 크게 당황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가장 중요한 자리를 비워둘 수도 없었습니다. 그는 그 자리를 다른 인물로 채웠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행사가 시작하기 직전 본래 그 자리에 앉아야 할 중요 인사가 Sorry, I’m late. 하면서 나타난 것이 아닙니까! 만약 그를 말석에 앉힐 경우 그는 큰 굴욕감을 느끼고 차후 그 회사와의 관계에서 적대적으로 나올 것이 분명했습니다. 담당자는주여 도우소서기도하고 그 자리에 앉은 사람에게 몸을 90도로 숙여 절하고 상황을 설명한 후 그 자리를 원래 내정된 사람에게 내어줄 것을 요청했습니다. 만약 그가 상황을 이해하고 OK 하고 흔쾌히 자리를 내어주면 괜찮지만 심히 기분나빠하고 거절한다면 그는 큰 곤란에 빠질 것이 분명했습니다.

 

예수님 시대 당시 잔치집에 어떤 자리에 앉는가 하는 것은 방금 제가 설명드린 것처럼 그 사람의 사회적 지위와 신분을 공개적으로 드러내고 인정받는 시간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초청받은 사람들은 어떻게든 주인과 가장 가까운 자리, 높은 자리에 앉으려고 치열한 자리 쟁탈전을 벌였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그들에게 스스로 자기를 높이지 말라고 하십니다. 스스로 자기를 높여 주인 바로 옆자리에 앉았다가 주인이 그 자리를 다른 사람에게 내 주라 하면 그는 말석으로 내려가는 부끄러움을 당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차라리 처음부터 말석에 앉는 것이 낫습니다. 주인이 아무런 말을 하지 않으면 그대로 앉아있으면 되고 혹 주인이 친히 와서 내 옆자리로 오라고 한다면 손님들 앞에 더 큰 영광이 될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이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가 무엇입니까? 그것이 사람이 진정으로 높아지고 낮아지는 것은 하나님께 달려있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스스로를 높이기 원합니다. 스스로를 높일 수 있는 가장 빠른 길은 세상에서 출세하고 성공하는 것입니다. 부와 권력과 명성을 쌓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내가 이렇게 부와 권력과 명성을 쌓았으니 내가 나를 스스로 높여도 되겠지 생각합니다. 그러나 사람을 높이고 낮추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잔치를 준비한 주인이 어떤 사람이 어떤 자리에 앉는지를 주인 본인이 결정하는 것처럼, 이 세상의 무대에서 과연 어떤 사람을 높이고 어떤 사람을 낮출 것인가 하는 것은 모든 것의 주인이신 하나님이 결정하십니다.

 

누가복음의 중요한 전체 주제는탐심을 버리고 하나님이 주신 재물로 가난한 자들을 섬기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이 세상에 쌓은 부와 재물을 근거로 자기가 높아졌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실상 높은 사람은 하나님이 주신 재물로 가난한 자들을 섬기는 사람입니다. 나는 아무런 자격이 없는데 하나님이 나에게 이런 큰 은혜를 주셨다고 생각하고 그것을 가난한 영혼, 병든 영혼을 위해 아낌없는 쓰는 사람입니다.

 

여러분에게 어떤 하나님이 주신 은혜가 있습니까? 젊음이 있습니까? 그 젊음을 가난한 영혼, 병든 영혼을 위해 쓰십시오. 부와 물질이 있습니까? 그 부와 물질을 가난한 영혼, 병든 영혼을 위해 쓰십시오. 명예와 권세가 있습니까? 그 명예와 권세를 가난한 영혼, 병든 영혼을 위해 쓰십시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높이실 것입니다.

 

12-14절을 보십시오. “또 자기를 청한 자에게 이르시되 네가 점심이나 저녁이나 베풀거든 벗이나 형제나 친척이나 부한 이웃을 청하지 말라 두렵건대 그 사람들이 너를 도로 청하여 네게 갚음이 될까 하노라 잔치를 베풀거든 차라리 가난한 자들과 몸 불편한 자들과 저는 자들과 맹인들을 청하라 그리하면 그들이 갚을 것이 없으므로 네게 복이 되리니 이는 의인들의 부활시에 네가 갚음을 받겠음이라 하시더라

 

예수님 당시 잔치를 베풀어 친구나 형제, 친척, 부자 이웃을 초청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단순한 친분활동이 아니라 상대방을 존귀히 여긴다는 사회적 표현이었습니다. 오늘날은 꼭 이런 잔치가 아니어도 눈과 귀와 혀를 즐겁게 해 줄 수 있는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렇게 큰 돈이 아니어도 어느 정도 큰 맘 먹고 한 1년에 한 번 정도는 온 가족이 63빌딩에 있는 고급 뷔페 식당에 가서 산해진미를 즐길 수 있습니다. 크게 부담되지 않은 비용으로 아이맥스 영화로 눈을 즐겁게 해 줄 수 있고 대학로 연극을 보며 수준높은 문화생활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당시에는 이런 기회가 드물었습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자치를 베풀었습니다. 우선 잔치에 가면 평소 먹기 힘든 산해진미를 먹을 수 있습니다. 또 잔치에는 수준높은 밴드나 공연이 준비되어 있었습니다. 이것을 구경하며 오랜만에 수준높은 문화생활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또 그곳에 모인 사람들과의 대화를 통해 귀를 즐겁게 할 수 있었습니다. 국제 정세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들을 수 있었고 여러 사람들의 진기하고 다양한 경험을 간접 체험할 수 있었습니다. 이와같은 잔치를 베푸는 것은  초청받은 사람에게 큰 혜택을 제공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혜택을 제공받은 사람은 차후 어떤 방식으로든 그가 받은 혜택만큼 되돌려주는 것이 사회적 예의였습니다. 이런 예의를 지키지 않은 사람은 반드시 조롱거리가 되거나 멸시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초청한 사람도 이런 맥락에서 예수님을 잔치자리에 초대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그에게 갚을 능력이 있는 사람을 초대하는 것은 그가 추후 이 은혜를 갚을 것이기 때문에 나중에 주님으로부터 받을 칭찬이 없다고 하십니다. 그러므로 차라리 가난한 자, 몸 불편한 자, 저는 자, 맹인들을 초청하라고 하십니다. 이들은 전혀 갚을 능력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의인들이 부활할 때 하나님께서 대신 갚아 주십니다.

 

우리가 사회생활하면서 사람들을 섬깁니다. 직장인들은 상사를 섬기고 대학원생은 교수님을 섬깁니다. 또 때를 따로 가족과 친척을 섬깁니다. 그 섬김의 대부분이 인간관계를 위함이고 자신의 장래에 무언가 유익이 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이런 섬김이 아주 필요없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이런 섬김도 필요하고 지혜롭게 잘 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의 포인트는 이런 섬김이 자기를 위한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으로부터 특별히 받을 상은 없다는 것입니다. 만약 하나님께 상급을 받기 원한다면 할 수 있는대로 갚을 능력이 없는 사람을 섬겨야 합니다. 구체적으로 갚을 능력이 없는 사람을 섬기는 것은 무엇을 말할까요? 나와 아무런 직접적인 이해관계가 없는 사람, 그 중에서도 특히 마음이 병든 사람, 죄로 인해 허물과 연약함이 있는 사람을 섬기는 것입니다. 섬길 때 아무 대가도 바라지 않는 마음으로 섬기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귀하게 보십니다. 그가 섬기되 아무런 보상을 받지 못한 것을 하나님의 장부에 기록해 두십니다. 그리고 때가 되면 풍성하게 갚아주십니다.

 

15-24절을 보십시오. “함께 먹는 사람 중의 하나가 이 말을 듣고 이르되 무릇 하나님의 나라에서 떡을 먹는 자는 복되도다 하니 이르시되 어떤 사람이 큰 잔치를 베풀고 많은 사람을 청하였더니 잔치할 시각에 그 청하였던 자들에게 종을 보내어 이르되 오소서 모든 것이 준비되었나이다 하매 다 일치하게 사양하여 한 사람은 이르되 나는 밭을 샀으매 아무래도 나가 보아야 하겠으니 청컨대 나를 양해하도록 하라 하고 또 한 사람은 이르되 나는 소 다섯 겨리를 샀으매 시험하러 가니 청컨대 나를 양해하도록 하라 하고 또 한 사람은 이르되 나는 장가 들었으니 그러므로 가지 못하겠노라 하는지라 종이 돌아와 주인에게 그대로 고하니 이에 집 주인이 노하여 그 종에게 이르되 빨리 시내의 거리와 골목으로 나가서 가난한 자들과 몸 불편한 자들과 맹인들과 저는 자들을 데려오라 하니라 종이 이르되 주인이여 명하신 대로 하였으되 아직도 자리가 있나이다 주인이 종에게 이르되 길과 산울타리 가로 나가서 사람을 강권하여 데려다가 내 집을 채우라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전에 청하였던 그 사람들은 하나도 내 잔치를 맛보지 못하리라 하였다 하시니라

 

15절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듣던 사람 중 하나가무릇 하나님의 나라에서 떡을 먹는 자는 복되도다말했습니다. 그가 갑자기 왜 뜬금없이 이런 말을 했을까요? 뭔가 자기들을 혼내시키는 것 같은 예수님의 말씀에 분위기가 썰렁해져 분위기를 바꾸려고 했는지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그는 자기가 장차 하나님 나라에서 당연히 떡을 먹을 수 있다는 것을 전제로 이런 말을 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그에게 한 가지 스토리를 통해 그의 편견과 오해를 바로잡아주십니다. 어떤 사람이 큰 잔치를 베풀기로 결정하고 많은 사람을 초청했습니다. 그는 종을 보내 초청받은 사람에게 일일이 연락하여 잔치에 참여할 것을 미리 확답받았습니다. 그는 오기로 한 사람의 수를 계산해서 소와 양과 염소를 잡고 잔치 준비를 했습니다. 당시 잔치는 주로 저녁에 했습니다. 당시에는 냉장고가 없기 때문에 잔치를 위해 낮에 준비한 음식은 대부분 다음날이 되기 전에 소비해야 합니다. 이러한 시대적 분위기 가운데 잔치에 오겠다고 말하고 갑자기 오지 못하는 것은 큰 실례를 넘어 주인에 대한 모독이었습니다. 그런데 스토리에서 이런 일이 정말로 발생했습니다. 먼저 첫 번째 사람은 밭을 샀으니 나가보아야 하므로 잔치에 가지 못하니 이해해달라고 말씀했습니다. 아니 밭을 미리 보지도 않고 샀다는 말입니까? 이것은 마치 오늘날로 치면 부동산에서 연락이 와서 어떤 집을 사기로 휴대폰을 통해 서류를 주고받고 계약했으니 이제 그 집을 보러가야한다는 말도 안되는 변명이었습니다. 두 번째 사람은 소 다섯 겨리, 그러니까 소 10마리를 샀으니 소의 상태를 시험해보러 가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이것은 오늘날로 치면 갑자기 중고고래 앱에서 아주 좋은 신상품이 싼 가격으로 나와 사기로 약속했으니 그 사람하고 거래하고 신상의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 약속을 못지키게 되었다고 변명하는 것과 같습니다. 세 번째 사람은 장가들었으니 가지 못하겠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오늘날로 치면 연인과 갑자기 약속이 생겨 회사의 중요한 미팅에 불참하게 되었다고 통보하는 것과 같습니다. 세 번째 사람은 청컨대 양해해 달라는 말조차 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사람들이 점점 더 무례해지고 뻔뻔해지는 것을 보여줍니다. 심한 모독을 당한 주인은 시내의 거리와 골목으로 나가서 몸 불편한 자들, 맹인들, 저는 자들을 데려오라고 말합니다. 그래도 자리가 남자 길과 산울타리가로 나가서 사람들을 강권하여 내 집을 채우라 말합니다.

 

예수님이 주시는 이 이야기의 포인트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그들의 예상과 달리 하나님 나라의 잔치는 죄로 병든 영혼들, 또 유대인이 아닌 외국인들이 참여하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들이 하나님 나라 잔치에 참여하지 못하게 된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그들이 예수님을 거절했기 때문입니다. 또 이 세상의 사고 파는 일, 시집가고 장가가는 일에 마음이 매여있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사람들도 늘 이 세상 일이 관심과 마음이 매여 있습니다. 학생 시절에는 학점과 스펙에 마음이 매여 있습니다. 결혼할 때가 되면 연애하고 결혼준비하는 일에 마음이 매여 있습니다. 직장을 다닐 때에는 늘 직장 일에 삶이 매여 있습니다. 자녀들이 자라면 자녀들을 교육시키는 일, 결혼시키는 일에 마음이 매여 있습니다. 장년이 되면 노후준비에 마음이 매여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도대체 언제 하나님과 하나님이 보내주신 구세주에 관심을 갖습니까? 도대체 언제 내가 죄인인 것을 깨닫고 회개하여 하나님 나라 잔치에 참여할 자격을 얻을 준비를 할 수 있습니까? 노인이 되면 이제 시간이 납니까? 노인이 되면 또 그 나름대로 마음을 얽어매는 무언가가 생길 것입니다.

 

내 마음을 빼앗는 일은 언제든지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나를 천국 잔치에 초대한 분이 누구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는 온 우주만물을 지으신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천국 잔치 초대장에 그 이름을 올려주시고 나에게 초대장을 보내주셨습니다. 이 초대장을 책상 한 구석에 방치하거나 심지어 휴지통에 넣어버리고 세상 일에 몰두하는 것은 초대장을 보내신 하나님에 대한 내가 할 수 있는 최고의 모욕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천국 초대장에 반응해야 할 때는 언제입니까? 바로 오늘입니다. 바로 지금입니다. 저는 이 자리에 앉아계신 모든 분들이 한 분도 빠짐없이 천국 잔치에 참여하리라 믿습니다. 그러나 성경을 보면 롯의 아내는 천국과 가장 가까운 자리에 있었으나 세상에 마음을 빼앗겨 소금 기둥이 되고 말았습니다. 혹 여러분 중에 세상 일에 마음을 다 빼앗긴 분이 계십니까? 마음을 돌이켜 하나님의 천국 잔치 초청장을 소중히 여기고 그 잔치에 참여할 마음의 준비를 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25-33절을 보십시오. “수많은 무리가 함께 갈새 예수께서 돌이키사 이르시되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더욱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고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너희 중의 누가 망대를 세우고자 할진대 자기의 가진 것이 준공하기까지에 족할는지 먼저 앉아 그 비용을 계산하지 아니하겠느냐 그렇게 아니하여 그 기초만 쌓고 능히 이루지 못하면 보는 자가 다 비웃어 이르되 이 사람이 공사를 시작하고 능히 이루지 못하였다 하리라 또 어떤 임금이 다른 임금과 싸우러 갈 때에 먼저 앉아 일만 명으로써 저 이만 명을 거느리고 오는 자를 대적할 수 있을까 헤아리지 아니하겠느냐 만일 못할 터이면 그가 아직 멀리 있을 때에 사신을 보내어 화친을 청할지니라 이와 같이 너희 중의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오늘 말씀의 결론으로 예수님은 자기를 따르는 제자들이 어떤 마음의 자세를 가져야 하는지 말씀해 주십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자는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는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A를 사랑하고 B를 미워한다는 것은 당시 고대 셈어의 표현방식으로 B보다 A를 더 사랑한다는 의미입니다. 곧 예수님만 사랑하고 자기 부모는 덜 사랑한다는 것이 아니라, 자기 부모도 사랑하지만 예수님을 최고로 사랑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비유에서 어떤 사람이 망대를 세우기로 계획했습니다. 그는 망대 건설에 얼마나 비용이 들지 먼저 계산하고 그만한 비용을 댈 수 있는지 생각해 봅니다. 만약 그렇지 않고 공사를 시작했다가는 공사 중간에 그만두어 사람들에게 비웃음을 당할 것입니다. 또 어떤 임금이 다른 나라 임금과 전쟁할 때 먼저 자기에게 승산이 있는지 따져 볼 것입니다. 승산이 없다면 전쟁을 시작하기 전 화친조약을 시도할 것입니다.

 

서두에서도 말씀드렸던 것처럼 어떤 사람이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가 되려면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할지 먼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는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합니까? 예수님의 제자는 예수님을 최고로 사랑하고자 하는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예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만약 내가 가진 모든 것을 버려야 한다면, 심지어 내 목숨까지도 버려야 하는 그런 상황이 온다면 그렇게 하겠다는 마음의 결심과 각오가 있어야 합니다.

 

2천년 기독교 역사를 살펴보면 진정한 예수님의 제자들은 다 그러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 한 분을 소유하기 위해 필요하다면 가진 모든 것을 버릴 수 있었습니다. 심지어 목숨까지도 버릴 수 있었습니다. 오늘날은 2천년 전과 달리 기독교인이라고 해서 특별한 사회적 박해나 불이익은 없습니다. 그러나 정말로 주님의 말씀대로 순종해서 사려 한다면 여러 어려움이 찾아옵니다. 오해를 받을 수도 있고 미움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 오해와 미움이 두려워 주님 뜻대로 살기를 포기한다면 참된 예수님의 제자가 될 수 없습니다.

 

34,35절은 바로 그러한 결단과 자세를 가진 사람들이 세상의 소금이 되는 것을 말씀합니다.

 

결론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예수님의 제자는 내가 가진 모든 것, 심지어 내 생명보다도 예수님을 더 사랑해야 합니다. 그를 위해 모든 것을 잃게 되면 잃으리라는 마음의 각오와 결단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다 이러한 결단을 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