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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2022년 누가복음 33강 "내가 돌아올 때까지 장사하라" (누가복음 19:11-27)2022-11-07 02: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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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누가복음 제 33

 

내가 돌아올 때까지 장사하라

 

말씀 / 누가복음 19:11-27

요절 / 누가복음 19:13

"그 종 열을 불러 은화 열 므나를 주며 이르되 내가 돌아올 때까지 장사하라 하니라"

 

지난 강의에서 예수님은 한 맹인의 믿음을 축복하시고 그를 구원해주셨습니다. 또한 세리장 삭개오를 구원하셨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품을 떠나 어둠 가운데 있는 모든 잃어버린 자들을 의미합니다. 실로 예수님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시려고 하늘 보좌를 버리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이러한 은혜를 받은 사람은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오늘 말씀을 통해 구원의 은혜를 받은 우리가 주님이 다시 오실 때를 소망하며 어떠한 삶을 살아야 하는 지 배우기를 기도합니다.

 

1. 왕위를 받으러 가는 귀인

여리고는 예루살렘에서 불과 한 시간 거리입니다. 갈릴리에서 시작한 예수님의 6개월에 걸친 긴 여행이 이제 거의 끝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이는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사 인류 구원을 위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제 곧 다가올 고난을 생각할 때 비장한 마음이 되셨을 것입니다. 십자가의 고난을 능히 감당하고 부활의 영광에 이를 것을 믿으며 기도하셨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당하실 고난, 즉 이방인들에게 넘겨져 희롱과 능욕을 당하며, 죽임 당하실 것, 이어서 사흘 만에 살아나실 것을 제자들에게 여러 번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예수님의 이 말씀을 두 귀를 틀어막고 듣지 않고자 하였습니다. 그들은 도리어 지상메시야 사상 곧 예수님이 이 땅에서 영광된 나라를 이루실 것을 확신하고 소망하였습니다. 이런 제자들이나 무리들은 예수님의 입성이 임박하자 조금씩 흥분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주님의 놀라운 능력으로 로마를 몰아내고 과거의 다윗 왕국과 같은 영광스런 나라를 세우실 것을 기대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그들의 오해를 바로 잡아주시기 위해 한 비유를 가르쳐주십니다. 12절입니다. "이르시되 어떤 귀인이 왕위를 받아가지고 오려고 먼 나라로 갈 때에" 어떤 귀인이 있었습니다. 그가 왕위를 받아가지고 오려고 먼 나라로 갑니다. 여기서의 귀인은 예수님을 가리킵니다. 주님은 예루살렘에 들어가시면 하나님의 나라를 즉시 이루는 것이 아니고 도리어 떠나십니다. 어디로? 먼 나라로 가십니다. 그 목적이 무엇입니까? 왕위를 받아가지고 오시기 위함입니다. 과거에 헤롯대왕의 아들 아켈라오가 유대 분봉왕으로 책봉되었을 때 로마에 가서 시이저 아우구스투스에게 왕위 승인을 받고 돌아온 적이 있었습니다. 그와 같이 예수님은 먼 나라로 가서 왕위를 받아 돌아오실 것입니다.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첫째,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후 이 세상에 계시지 않고 먼 나라로 떠나십니다. 둘째, '먼 나라'가 의미하는 바는 돌아오시기까지 상당한 기간이 걸린다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당장에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질 것으로 기대했지만, 하늘로 가신 예수님은 지난 2천 년간 오지 않으셨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이 다시 오신다는 약속이 어찌 된 것이냐? 세상은 불법이 가득하고 악인들이 점점 득세하며 가지 않느냐?" 합니다. 그러나 주님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습니다. 우리에게는 길게 느껴질 수 있지만 영원 가운데 존재하시는 주님께는 한 순간입니다. 우리가 보기에 더디 오시는 것 같은 이유는 단 한 가지입니다. 이는 주님께서 인생들을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 원하시기 때문입니다(벧후3:4-9). 예수님은 반드시 오십니다. 하나님이 친히 세우신 왕이요 심판주로 오십니다. 성경에 예언된 모든 말씀이 하나만 빼고 다 이루어졌습니다. 그 남은 예언은 주님의 재림입니다. 노아시대에 아무도 홍수가 내릴 것을 믿지 않았지만 때가 되자 순식간에 홍수가 내렸습니다. 앞으로도 하나님이 정하신 그 때에 왕이 다시 오시고 세상을 심판하십니다. 주님이 이루시는 나라는 세상 왕국이 아닙니다. 다시는 죄와 죽음이 없는 영원한 나라입니다. 우리 모두가 깨어서 왕이요 심판주이신 예수님을 맞을 준비를 해야겠습니다.

 

2. 장사하라

13절입니다. "그 종 열을 불러 은화 열 므나를 주며 이르되 내가 돌아올 때까지 장사하라 하니라" 왕위를 받기 위해 먼 나라로 가는 귀인은 떠나기 전에 그의 종 열을 부릅니다. 각각에게 한 므나를 줍니다. 므나는 당시의 은화로써 100데나리온에 해당됩니다. 한 데나리온이 노동자 하루 품삯이므로 한 므나는 오늘날 돈으로 약 2천만 원 정도입니다. 아주 큰돈은 아니지만 결코 적은 돈이라고 할 수도 없습니다. 종들은 그 돈을 밑천으로 하여 장사하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물론 장사의 목적은 이윤을 얻는 것에 있습니다. 그러나 종들은 장사를 해 본 경험이 없었습니다. 무슨 장사든 처음 해보면 손해를 보게 되어 있습니다. 주인도 종들이 손해를 볼 수도 있고 밑천을 다 날릴 수도 있음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므나를 갖고 열심히 방법을 찾아 장사하기를 명한 것입니다.

 

주인의 의도는 이윤을 취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실제로 나중에 열 므나를 얻는 종이나 다섯 므나를 얻는 종으로부터 그것들을 받지 않습니다. 그대로 종들이 취하게 하고 더하여 열 고을, 다섯 고을 다스리는 권세를 줍니다. 주인의 의도는 종들이 주인의 명령에 순종하여 장사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를 통해 주인을 주인으로 인정하는 관계성을 유지하고자 하였습니다. 또한 종들이 열심히 일을 함으로 그들의 역량이 성장하고 더 큰 일을 감당 할 수 있는 사람들이 되기 원했습니다. 종들을 위해 장사하라고 명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종들은 주인을 믿고 순종하면 됩니다. 주인이 장사에 따른 리스크도 다 알고, 자기들이 장사 경험이 전무하다는 것도 다 알고 방향을 주신 것을 영접해야 합니다. 주인을 판단하는 교만한 마음이 아니라, 겸손한 마음으로 주인에게 순종하여 최선을 다 하면 됩니다. 주인은 그들의 겸손한 순종, 최선을 다하는 자세를 기대하며 장사하라고 명령하였습니다.

 

3.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하였으니

15절입니다. "귀인이 왕위를 받아가지고 돌아와서 은화를 준 종들이 각각 어떻게 장사하였는지를 알고자 하여 그들을 부르니." 마침내 귀인이 왕위를 받고 돌아왔습니다. 왕은 종들이 그간 어떻게 장사했는지 한 사람씩 불러 결산합니다. 16절입니다. "그 첫째가 나아와 이르되 주인이여 당신의 한 므나로 열 므나를 남겼나이다." 이 종은 "당신의 한 므나"라고 말합니다. 그는 그 돈이 자기 것이 아니라 주인의 돈이라는 사실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 종은 "한 므나? 2천만 원 밖에 안 되는 돈? 이걸 가지고 장사를 하라고?" 하며 가볍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한 푼이라도 허투로 사용할 수 없는 왕의 재산으로 알고 귀히 여겼습니다. 청지기의 자세로 관리하며 장부도 깔끔하게 만들었을 것입니다. 그는 장사를 아주 잘했습니다. 한 므나로 열 므나를 만들었습니다. 천 퍼센트의 수익을 냈습니다. 고대 사회에서 이와 같은 막대한 수익을 내는 것은 아주 드문 일이었습니다.

 

둘째 종은 말합니다. "주인이여 당신의 한 므나로 다섯 므나를 만들었나이다(18)" 두 번째 종 역시 장사를 잘했습니다. 첫째 종에 비하면 적었지만 한 므나로 다섯 므나를 남겼습니다. 오백 퍼센트의 수익을 냈습니다. 이 두 종들이 이렇게 많은 이익을 남길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주인의 말을 마음을 다하여 영접하고 겸손히 순종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주인을 판단하지 않았습니다. "언제 돌아오신다는 말도 없이 그냥 장사하라고 하시네.. 밑천이 너무 작은데... 요즘 같은 경기침체기에 무슨 장사를 해? 주인이 알아서 자금 관리하지 왜 부담스럽게 우리에게 이런 것을 맡기시지?" 하지 않았습니다. 주인을 믿었습니다. 주인이 하시는 말에 순종하여 주인을 기쁘시게 하고자 했습니다. 그들은 주인이 떠나자마자 즉시 시장조사를 하고 무슨 사업을 하면 좋을지 검토했습니다. 조심스럽게 투자하였습니다. 인건비를 줄이고자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을 다 하였습니다. 사업트렌드를 잘 살폈고 다른 경쟁자들은 어떻게 하는 지 배웠습니다. 기회가 왔다고 판단된 때에는 자금을 쏟아 부어 투자하였습니다. 손해볼 때는 잠도 못자며 마음고생이 많았지만, 열심히 노력하여 사업의 결과가 좋았습니다. 수익을 낸다고 자기에게 돌아오는 것도 아니지만 다만 주인을 기쁘게 하기를 원했습니다.

 

주인은 그 두 종들을 어떻게 칭찬합니까? 열 므나를 남긴 종에게 말합니다.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다 착한 종이여 네가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하였으니 열 고을 권세를 차지하라 하고(17)" 다섯 므나를 남긴 종에게 말합니다. "주인이 그에게도 이르되 너도 다섯 고을을 차지하라 하고(19)" 여기서 우리는 세 번째 종에 대해 생각해보기 전에 주인이 칭찬한 두 종에 관해 좀 더 살펴보겠습니다. 물론, 두 종들은 다만 주인의 말에 순종하여 열심히 장사를 한 것이지 상을 바라고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왕이 되어 돌아오는 주인이 열 고을 다스리는 권세, 다섯 고을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인은 그들의 순종을 기뻐하고 큰 상을 줍니다. 그런데 상을 주는데 차이가 있습니다. 그 차이는 그들이 남긴 이윤에 따른 것이었습니다. 열 므나를 남긴 종은 열 고을, 다섯 므나를 남긴 종은 다섯 고을을 다스리게 하였습니다. 각각 도지사, 시장 수준의 높은 권세를 준 것입니다.

 

이 비유가 우리에게 주는 의미가 무엇일까요? 우리는 지금 왕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중입니다. 지금은 그 왕께서 우리에게 맡겨준 사명을 감당하고 있는 중입니다. 우리의 왕 예수님은 다시 오셔서 우리를 불러 모으실 것입니다. 그가 주신 므나, 곧 우리의 생명, 재능, 은사를 갖고 우리가 얼마나 남겼는지 보실 것입니다. 그 결과에 따라 하나님 나라에서 상을 다르게 주십니다. 그 상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크고 영광스러운 것입니다(1:18, 8:18).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한 가지 주의해야할 점이 있습니다. 비유에서는 장사를 잘하고 못하고가 눈에 보이는 수량으로 측정이 됩니다. 열 므나, 다섯 므나, 정확히 측정이 가능합니다. 이는 오해를 불러일으키기 쉽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을 구원했는가, 얼마나 큰 역사를 이루었는가, 요회 식구들이 몇 명이나 목자로 성장했는가, 헌금은 얼마나 했나 등으로 그 공적을 따지려 하기 쉽습니다. 스탭 목자는 몇 명대의 역사를 섬겼냐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절대로 수로 나타난 결과로 판단하지 않으십니다. 수로 나타나는 결과는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지 자기 힘으로 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성령을 쏟아 부어주시는 부흥의 때에는 양들이 몰려들기도 합니다. 조금만 힘써도 양들이 제자로 자랍니다. 그러나 요즘은 열심히 헌신하지만 한 해에 한 명의 양도 남기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헌신만 했지 아무 것도 남기는 것이 없는 것일까요? 사회에서도 큰 교회를 운영하는 목회자가 있는 반면, 한 영혼을 목숨을 바쳐 섬기지만 시골 개척교회를 벗어나지 못하는 목회자들도 많이 있습니다. 그러면 일생 개척교회를 섬기는 분은 남기는 것이 없는 것일까요? 미얀마에 파송된 아도니람 저드슨 선교사는 처음 7년 동안 한 명의 개종자도 얻지 못했습니다. 그러면 그는 아무런 열매를 맺지 못한 것일까요? 결코 그렇지가 않습니다. 하나님은 과부의 두 렙돈을 가장 많이 드린 헌금으로 여기십니다. , 주어진 여건과 상황 속에서 온 마음을 드려 최선을 하는 것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가장 많이 남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보이지 않는 진심과 희생, 기도와 사랑의 무게를 재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여, 사심 없이, 순수하게 드려진 것만이 무게로 측정이 됩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주님은 이 비유를 통해 외적인 공로주의를 말씀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 오시는 날까지 마음을 다해 주님을 섬기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므나는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눈에 띄는 업적을 얼마나 쌓았는가로 결정되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마음으로 어떤 태도를 가지고 어떤 삶을 살았는가로 결정됩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다가 실패하고 넘어질 수도 있습니다. 쫄딱 망했다 싶을 때도 있고 도무지 일어날 힘이 없다 여길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 안에서는 그 어떤 것도 실패도 아니고 망한 것도 아닙니다. 그런 과정을 통해 우리는 주님과 더 깊은 교제에 들어가기도 하고, 주님의 심정을 더 깊이 깨닫기도 합니다. 주님의 형상을 덧입고 성숙해지기도 합니다. 주님 앞에서는 그 모든 것이 남긴 것이 됩니다. 이런 점에서 주님을 위해 장사하는 사람은 남기지 않는 사람이 하나도 없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사랑, 깨달음, 성숙, 성장, 눈물, 기도 등 모든 것이 다 남긴 것에 포함되기 때문입니다. 내적으로 예수님의 성품을 닮은 사람이 되는 것이 가장 많은 므나를 남기는 사람입니다. 눈에 보이는 실패가 실패가 아닙니다. 보이지 않는 것을 정확히 계산하시는 하나님이 마지막에 모든 것들은 정확히 계산하사 우리의 상급으로 고스란히 보상해주십니다.

 

예전에 한 대형교회 목사님이 이런 말씀을 하시는 것을 들었습니다. "저는 설교준비를 따로 시간을 내어서 하지 않습니다. 그냥 주일 아침에 간단히 정리하여 설교합니다. 그래도 반응이 좋습니다. 제가 별로 힘쓰지 않아도 교회에 사람들이 몰려듭니다. 책을 한권 쓰면 성도들이 다 사기 때문에 금방 베스트셀러가 됩니다. 이런 저는 실상 캠퍼스에서 한 영혼을 구하고자 애쓰시는 선교단체 목자님들이 부럽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보시기에 저는 가장 적은 희생을 하는 자요, 여러분들은 가장 많은 것을 드리는 삶을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강남의 한 대형교회 목사님도 절규하듯이 설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나는 한 영혼을 도와 그가 제자로 살도록 하기 원합니다. 이렇게 우리 교회에 사람들이 많이 몰려들어 나의 관심을 분산시키니 나는 괴롭습니다. 나는 여러분들이 우리 교회에 오는 것이 싫습니다. 나는 가만있어도 칭찬과 영광을 받으니 하나님의 나라에서 상이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헌신과 희생을 하나도 못 보심이 없으십니다. 하나님의 눈은 불꽃 같으셔서 정확히 보십니다. 우리의 행동을 달아보십니다(삼상2:3). 그러므로 우리는 지금 보내는 하루, 한 시간을 가볍게 여기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지금 그리스도를 위해 복음을 파는 장사를 하고 있는 중입니다. 이 장사는 언제 어디서든 어떤 환경에서든지 충성할 수 있는 장사입니다. 하면 할수록 누구나 반드시 이익을 내는 장사입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돌아오실 때 우리는 육신의 장막을 벗고 영화를 누리게 될 것입니다. 그때 믿는 자의 영광이 다 똑같지는 않습니다. 그 영광은 우리가 이 땅을 살면서 남긴 것에 따라 결정됩니다. 물론 복음을 믿는 자는 누구든지 천국에 들어갑니다. 어떤 사람은 천국에는 상급의 차별이 없이 다 똑같다고 주장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천국에서 받는 상급이 다릅니다. 이 세상에서 어떻게 주님을 섬기느냐에 상급이 달라집니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하나님 나라에서 상을 받을 필요가 없어. 그저 그 나라에 들어가는 것으로 만족해." 저도 예전에 그렇게 생각을 했었습니다. "꼴지라도 그 나라에 들어가는 것만으로도 감사하다. 천국에서 또 상을 받으려고 이 땅에서 뭔가 열심히 하는 것은 올바른 동기로 일하는 것이 아닌 것 같다. 나는 불 가운데서 구원받는 것처럼 부끄러운 구원을 얻어도 만족해(고전3:15)" 그런 것이 정직하고 겸손한 표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런 생각을 가진 분들을 위해 이제 마지막 세 번째 종을 만나보겠습니다.

 

4. 악한 종아

20절입니다. 셋째 종은 어떻게 결산했습니까? "또 한 사람이 와서 이르되 주인이여 보소서 당신의 한 므나가 여기 있나이다 내가 수건으로 싸 두었었나이다." 열 명의 종들 중에서 세 명의 종을 언급하면서 마지막 사람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열 명의 종을 다 언급하지 않는 것은 이 비유가 세 가지 형태의 종에 대한 이야기로 꾸며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언급되지 않은 나머지 종들은 이 세 가지 중 어느 하나에 속한 사람일 것입니다. 세 번째 종은 장사하는 것이 두려워 한 므나를 수건으로 싸두었습니다. 혹시라도 장사를 하다 날려 먹으면 주인에게 혼날 것이 두려웠던 것이지요. 이 종은 돈을 수건으로 꼭꼭 싸서 아무도 모르는 곳에 보관해 두었다가 그대로 내 놓았습니다. 그는 막상 왕 앞에 와서 회계하려고 하니 마음에 걱정이 태산 같았습니다. 그래서 변명을 늘어놓습니다. 21절입니다. "이는 당신이 엄한 사람인 것을 내가 무서워함이라 당신은 두지 않은 것을 취하고 심지 않은 것을 거두나이다."

 

그는 자기가 장사하지 않은 이유를 말합니다. 첫째, 그는 주인을 엄한 사람으로 생각했습니다. '엄한'(아우스테로스)은 엄격하고 날카롭다는 뜻입니다. 그는 주인이 자비롭지 않고 까다롭고 무서운 사람으로만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방관하는 입장에 섰습니다. 그러나 앞의 두 경우에서 드러나듯이, 이 주인은 근거 없이 엄한 사람이 아닙니다. 도리어 공의롭고 풍성한 상급을 주는 사랑이 많은 사람입니다. 둘째로, 그는 주인을 '두지 않은 것을 취하고 심지 않은 것을 거두는 사람'으로 생각했습니다. 한 마디로 착취자요 고리대금업자 같은 사람으로 보았다는 것입니다. 악질적인 지주로 보았다는 것입니다. 그는 종인 신분에 임의로 주인을 판단했습니다. 그는 한마디로 교만했습니다. 주인에게 겸손히 순종하고자 하기 보다 주인의 머리 위에 올라서서 주인을 악한 자로 판단했습니다. 그런 교만한 마음을 갖고 있으니 주인의 명령에 순종할 수 없었습니다. 주인은 종의 속마음을 간파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합니다. "그래? 만일 네 말대로 내가 어떻게든 재산을 불리려는 악한 사람이라고 치자. 정말 네가 나를 그렇게 봤다면 너는 내 돈을 은행에 맡겨서 내가 돌아왔을 때 이자와 함께 찾도록 해야 하는 것이 아니냐?" 그 종은 자기의 말로도 스스로를 정당화할 수 없었습니다.

 

이 종의 자세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무엇입니까? 주인이 다시 올 때까지 장사하라고 명하셨는데 우리는 그냥 "장사할 필요까지는 없고 이미 예수님 믿고 구원을 얻었으니 적당히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만 하면 만족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것이 겸손한 자세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아닙니다. 왕은 우리에게 적당함을 요구하지 않으시고 열심히 장사하기를 원하십니다. 왕께서 하나님의 나라에서 상을 주기 원하시는데 우리 스스로는 ", 나는 받을 필요가 없어요"라고 말하는 것이 겸손한 자세일까요? 우리는 그 분의 종이요 백성입니다. 왕께서 기뻐하는 것을 우리도 기뻐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왕의 명령에 단순히 순종하는 자세를 가져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만 하면 된다는 말, 그 나라에서 상을 받을 필요가 없다는 말은 세 번째 종처럼 하나님이 맡기신 일에 충성할 필요 없이 이대로 살다가 하나님 앞에 서겠다는 말입니다. 한 마디로 나태하고 게으른 말입니다. 말은 그렇게 안 하지만 나에게 많은 것을 요구하는 예수님은 악하고 엄한 주인이라고 비난하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주인은 이 종을 어떻게 벌합니까? 24절입니다. "곁에 섰는 자들에게 이르되 그 한 므나를 빼앗아 열 므나 있는 자에게 주라 하니" 장사하지 않은 자, 곧 그가 받은 재능을 발휘하지 않고 고의로 사장시켜 버리는 자는 있는 것마저도 모두 빼앗깁니다. 주인의 말에 주위 사람들이 말합니다. "주여 그에게 이미 열 므나가 있나이다." 저에게 이미 열 므나가 있는데 또 주십니까? 그러나 주인이 어떻게 대답합니까? 26절입니다. "주인이 이르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릇 있는 자는 받겠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 주인은 한 므나를 빼앗아 열 므나를 남긴 자에게 그것까지 갖도록 하였습니다.

 

5. 내 앞에서 죽이라

본문의 비유에서 왕위를 받아 오려고 먼 나라로 떠난 귀인을 미워하고 그의 왕됨을 원치 아니한 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결국 어떻게 됩니까? 27절입니다. "그리고 내가 왕됨을 원하지 아니하던 저 원수들을 이리로 끌어다가 내 앞에서 죽이라 하였느니라." 주인은 자기의 왕됨을 원치 아니하던 원수들을 자기 앞에 끌어다가 죽이라고 했습니다. 그들은 교만하게 귀인을 대적하다가 결국 죽음을 면치 못하게 되었습니다. 이들은 예수님의 왕권을 인정치 않는 복음의 원수들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다시 오실 때에 그의 왕되심을 거부했던 모든 사람들은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의 일을 방해한 사람이나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한 사람 뿐 아니라, 예수님을 왕으로 받아들이지 않은 모든 사람들이 바로 그들입니다.

 

이 비유를 마치며 이제 남겨진 것은 이 질문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살 것인가?" 왕이 오고 있습니다. 그분은 공의롭고 인자한 왕입니다. 그 나라를 우리와 함께 다스리기 원하시고 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영원히 상주시기 원하시는 분입니다. 하지만 그분을 대적하는 이에게는 엄하고 무서운 분입니다. 왕이 오시기 전까지 기회가 있습니다. 우리가 그를 대적하는 편에 서지 말고 그분 편에 서야겠습니다. 그분이 돌아오기 전에 그분의 명령을 따라 열심히 일하는 자가 되어야겠습니다. 많은 유익을 드려 주님을 기쁘시게 하기를 기도합니다.

 

결론적으로, 인생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만왕의 왕 예수님의 왕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주신 므나, 곧 우리의 생명과 능력을 다해 주님이 명하신 일에 충성을 다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진심과 헌신을 다 받으십니다. 하나도 잊지 않고 크게 보상해주십니다. 우리가 이런 믿음으로 더욱 충성된 일꾼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