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마태복음 10강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대접하라
말씀/ 마태복음 7:1-12 요절/ 마태복음 7:12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지난 말씀에서도 보았듯이 예수님은 산상수훈을 통해 제자들에게 율법의 근본 정신을 가르쳐 주십니다. "살인하지 말라"라는 제 6 계명의 정신은 사실, 사랑하라는 계명이죠. 동해보복법, 곧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말씀도 복수의 정도를 자기가 해를 입은 것 이상으로 해서는 안된다는 문자적인 것에 더 나아가 무엇이죠? 누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오 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 리를 동행하라는 의미입니다. 곧 원수를 사랑하는 것이 동해보복법 계명의 근본 정신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율법을 내실 때 사람들이 지키도록 요구하신 궁극적인 수준이었습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나는 사람을 실제적으로 죽이지는 않았다, 마음으로는 음욕을 품어도 간음을 하지는 않았다, 같은 수준으로만 보복했다 하며, 하나님의 계명 준수의 수준을 한참 낮춰놓았습니다. 그렇게 낮춰 놓고 그것을 지키고 있다고 자기 의를 가졌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그런 바리새인들의 의보다 더 나은 의를 갖지 않으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더 나은 의에 대해 가르쳐 주시고 계십니다. 오늘 말씀도 이제 율법과 선지자의 요약이 무엇인가 가르쳐주십니다. 그것은 바로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대접하라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이 말씀의 뜻을 배우고 순종하기를 기도합니다.
1절입니다.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을 비판합니다. 정죄하는 마음으로 험담을 합니다. 그러면 그 험담하는 말이 돌고 돌아 그 사람의 귀에 들어 갑니다. 그러면 그는 "자기는 뭐가 잘 났다고" 하며 자기 험담을 한 그 사람을 정죄하며 비판합니다. 그 말이 다시 돌아 또 처음에 험담한 그 사람에게까지 들아갑니다. 그래서 우리는 다른 사람을 비판하지 말아야겠구나 하는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그러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1절에서 말하는 '비판'은 "judge"로 재판장의 자리에서 유죄 선고를 내리는 것을 말합니다. 비판하면 비판을 받게 된다는 말씀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비판하는 그를 비판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누구를 비판할 때 율법을 갖고 판단합니다. 율법이 옳고 그름의 기준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우리에게 율법을 주신 목적은 우리로 그 율법을 지키라고 주신 것이지, 그 율법을 갖고 내가 다른 사람을 정죄 비판하라고 주신 것이 아닙니다. 야고보서 4:11,12절은 말합니다. "형제들아 서로 비방하지 말라 형제를 비방하는 자나 형제를 판단하는 자는 곧 율법을 비방하고 율법을 판단하는 것이라 네가 만일 율법을 판단하면 율법의 준행자가 아니요 재판관이로다 입법자와 재판관은 오직 한 분이시니 능히 구원하기도 하시며 멸하기도 하시느니라 너는 누구이기에 이웃을 판단하느냐" 우리 인간은 하나님이 주신 율법을 준행해야 되는 자들입니다. 그 율법을 갖고 해석하고 판단하는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이십니다. 누가 다른 사람을 비판한다면 이는 그가 하나님 만이 앉으실 수 있는 재판장의 자리에 않아서 다른 사람을 정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권한을 침해하는 것입니다.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다른 사람을 다루는 방식대로 다루신다." 우리는 내가 하는 대로 하나님의 판단을 받을 것을 알고 정죄 비판하는 마음을 버려야겠습니다. 다른 사람에 관한 모든 판단을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다른 사람의 허물을 볼 때 나도 모르게 비판하는 마음이 들기도 합니다. 이럴 때 우리가 먼저 할 일이 무엇입니까? 3, 4절입니다.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보라 네 눈 속에 들보가 있는데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하겠느냐" 들보가 무엇이죠? 건축용어인데 건물에서 기둥과 기둥을 가로로 연결하여 지붕의 하중을 받쳐주는 나무입니다. 한옥의 대청 마루에 앉아 위를 보면 무거운 지붕을 떠받치고 있는 큰 가로목이 보입니다. 그것이 들보입니다. 엄청나게 큰 나무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흔히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자기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합니다. 물론 들보가 눈에 있을 수는 없겠죠. 비유입니다. 예수님은 목수이셨기 때문에 티, 들보 이런 것을 사용하여 비유를 하시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허물은 아무리 작은 것이라고 잘 보고 판단하는데 자기 허물에 대해서는 관대하다는 것입니다. 요즘 말로 내로남불입니다. 왜 그럴까요? 눈은 밖을 보도록 되어 있기 때문일까요? 사람은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하고 판단합니다. 남을 쉽게 비판 정죄하면서 자기를 높입니다. 이를 극복하는 길이 무엇일까요? 자주 거울을 보고 자기 눈을 살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거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우리의 들보를 먼저 보아야 합니다.
또한 우리에게 진실된 친구가 있어 그의 조언을 받을 수 있다면 그는 복된 사람입니다. 잠언서 27:5,6입니다. "면책은 숨은 사랑보다 나으니라 친구의 아픈 책망은 충직으로 말미암는 것이나 원수의 잦은 입맞춤은 거짓에서 난 것이니라." 진실한 친구의 면책은 좋은 것입니다. 그런데 누가 얘기하기도 전에 자기 자신을 고쳐나갈 수 있는 길은 없을까요? 저는 소감 모임이 좋은 기회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의 소감을 들으면 나에게도 동일한 문제가 있는 것이 잘 드러납니다. 우리 소감 모임이 대등한, 비슷한 관계에서 형성되잖아요? 그래서 누가 어떤 문제를 가지고 회개하거나 투쟁할 때 나의 문제를 발견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말씀을 전하는 분이 특별히 어떤 점을 지적하기도 하고, 또 우리의 성경 공부를 통해 드러나기도 하지만 일반적으로 말씀만을 갖고 스스로 죄 깨닫기가 쉽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동역자님들과 소감 나누는 걸 통해서 우리는 자신의 문제도 발견하고 극복해 나가는 은혜를 많이 입습니다.
대개 사람들이 누구를 판단하는 것을 보면 판단하는 그 사람에게 동일한 문제가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교만한 사람은 교만한 사람을 못 봐줍니다. 이기적인 사람은 다른 사람의 이기심에 아주 민감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남의 허물을 봤을 때, 그것을 비판하기보다, ”아, 나에게도 그런 문제가 있을 수 있구나“ 하고 자신을 먼저 돌아보는 것이 좋습니다.
무엇보다 우리가 사람 앞에 살 때는 비판하는 마음을 갖기 쉽지만 하나님 앞에 서면 자기의 죄를 발견하고 겸손하게 됩니다. 이사야가 선지자로 부르심을 입을 때 이스라엘은 최고 지도자로부터 말단 공무원에 이르기까지 머리부터 발끝까지 부패하였습니다. 종교 지도자들의 형식적인 신앙 생활은 극에 달하였습니다. 백성의 장로들과 방백들은 가난한 자들을 탈취하고 그 얼굴에 맷돌질하였습니다. 자매들은 교만하여 늘인 목, 정을 통하는 눈으로 다니며 아기죽거리며 다녔습니다. 그런 시대에 이사야는 사람들로 말미암아 속이 시끄러웠습니다. 분노하며 판단하는 마음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그가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발견하였을 때 그는 말했습니다. "그 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나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주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하였더라” (사6:5) 그가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발견하였을 때 자기가 남을 판단하기는 커녕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얼마나 비참한 죄인인가를 발견하였습니다. 이 때 그의 마음에 백성들에 대한 판단하는 마음이 사라졌습니다. 그때 그는 진정으로 백성들을 품고 사랑하며 그들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도울 수 있게 되었습니다. 자기가 먼저 회개하고 사죄의 은혜를 덧입을 때 형제의 연약함을 깊이 이해하고 마음으로 동정할 수 있습니다. “나도 그런 입장이었다면 그럴 수 있었을 것이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형제를 판단하는 마음을 버리고 용서할 수 있습니다. 5절입니다.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 내 눈 속에 들보가 있다면 어떻게 남의 눈의 티를 빼주겠습니까? 그러다가 큰일 나죠. 자기가 먼저 들보를 빼야 합니다. 그래야 밝히 보고 형제의 티를 빼 줄 수 있습니다. 눈의 티를 빼는 좋은 방법은 무엇일까요? 티를 빼는 방법은 눈물을 많이 흘리는 겁니다. 내 자신이 먼저 들보 같은 죄를 깊이 회개하고 소감을 나누면, 상대방이 "아, 나도 형제님과 같이 동일한 죄인입니다. 제가 저의 죄를 회개합니다" 하게 됩니다. 상대방이 감동을 받고 눈물을 흘립니다. 그러면 형제의 눈에 있는 티가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5절까지 비판하지 말라는 말씀을 살펴보았습니다. 한 가지 생각해 볼 점은, 비판하지 말라고 해서 동역자들의 죄를 눈감아주고 넘어가라는 것은 아닙니다. 본문에서 말하는 비판은 교만한 마음, 악의적인 마음으로 다른 사람을 정죄하는 그런 비판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하여 다른 사람의 허물을 보고, 사랑의 마음으로 권하는 것은 필요합니다. 기도하는 심정으로 그 사람을 잘 도와 회개에 이르도록 돕는 것은 꼭 필요한 일입니다.
예수님은 7절에서 기도에 대한 말씀을 주시기 전에 6절 말씀을 추가로 주십니다.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그들이 그것을 발로 밟고 돌이켜 너희를 찢어 상하게 할까 염려하라." 여기서 거룩한 것, 또는 진주는 영적으로 귀한 것들, 곧 하나님의 나라, 복음 진리, 또는 교회의 존엄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편 개는 더러운 짐승의 상징이고, 돼지도 그러합니다. 개는 자기가 토한 것을 다시 먹고, 돼지는 깨끗이 씻어 놓으면 다시 더러운 구덩이로 돌아가서 눕습니다. (벧후 2:22) 그와 같이 진리의 고귀함을 모르고 함부로 대하는 자들을 조심하라는 말씀입니다. 나이브한 마음으로 무분별하게 복음을 전하다 뺨 맞고 복음 전도의 길이 더 막히게 되지 않게 지혜롭게 행해야 합니다. 비판은 하지 말되 악한 자들을 잘 분별하여 지혜롭게 행하는 것은 필요합니다. 예수님도 그러셨습니다. 고향 나사렛에 가셔서 말씀을 전하는데 사람들이 믿음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거기서 기적을 많이 행하지 않으셨습니다. (막 6:6) 금방 그곳을 떠나셨습니다. 예수님도 그런 사람들에게 진리의 말씀을 낭비하지 않으신 것입니다. 사도 바울도 복음을 전하다 유대인들이 핍박하고 들고 일어나니까 자기 발에 먼지를 떨어버리고 당신들에게 책임 있다 하고는 가버렸습니다. (행 13:51)
그러나 개나 돼지와 같은 사람들이 운명적으로 결정된 것은 아닙니다. 사도 바울 같은 사람도 살기등등할 때에는 개나 돼지와 다를 바가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누구보다도 열정적인 복음의 종이 되었습니다. 이처럼 어떤 사람은 영적 무지로 인해 복음 전하는 사람들을 배척하지만 나중에는 마음이 가난해져서 복음을 영접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운명적으로 저 사람은 개나 돼지다라고 결론을 내려서는 안 됩니다. 다만 복음을 전하는 현 상황에서 분별력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7절부터 11절은 기도에 관한 말씀입니다. 7절입니다.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것은 우리의 필요를 주님께 들고 나가서 요구하는 것입니다. 찾으라는 주님께 구할 뿐만 아니라 얻기 위해서 적극적으로 도전하는 것입니다. 문을 두드리라는 것은 장애물에 부딪쳤을 때 물러서거나 포기하지 말고 어찌하든 장애물을 극복하고 적극적으로 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께 무엇을 구할 때 우리는 적극적으로 구해야 합니다. 얻고자 하는 것을 받기까지 인내심을 가지고 구하고 찾고 두드려야 합니다. 그에 대한 약속이 무엇입니까?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라고 하십니다 (8).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세 번 명하시고, 세 번 약속을 하십니다. 곧 간절히 명하시며 또한 하나님께서 그 구하는 바를 반드시 들어주신다는 확증의 말씀을 하십니다. 여기서 올바른 기도의 자세를 배웁니다. 우리는 기도할 때, 하나님이 나의 기도를 현재 듣고 계시며 나의 기도에 반드시 응답하신다는 것을 믿고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한 자각과 믿음 없이 드리는 기도는 무기력하고 의미 없는 종교 생활에 불과합니다. 하나님께서 나의 기도를 들으신다는 확신은 나의 기도를 힘이 있고 열정적이 되게 합니다.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이 말씀을 일반적으로 적용할 수도 있지만, 여기 문맥에서는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무엇을 구하라고 하시는 것일까요? "구하라 그러면 주실 것이요, 찾으라, 두드리라.." 무엇을 구하고 찾으라는 의미일까요? 방금 전 6절까지의 내용은 "비판하지 말라, 그렇지만 분별은 하라" 이었습니다. 그 말씀을 하시고 "구하라" 하시는 것입니다. 이런 문맥을 볼 때 구하라는 것은 두 가지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첫째, 좁은 의미로는 비판하지 않으면서 분별하는 지혜를 구하라는 것입니다. 실제로 분별을 하다보면 자기도 모르게 비판이 들어갑니다. 연륜이 오래된 목자들은 성경도 잘 알고 인생 경험도 많습니다. 그래서 양들이나 동역자들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좋은 의도로 시작된 대화가 어느새 비판하는 말을 하게됩니다. 그래서 비판하지 않고 분별하는 것이 쉬운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사랑의 마음과 지혜가 필요합니다. 우리가 그런 것을 기도로 구해야 합니다. 둘째, 넓은 의미로는 5~7장이 산상수훈인데 7장이 결론 부분입니다. 그래서 여기서 ‘구하라’는 말씀은 산상수훈 말씀을 잘 지킬 수 있도록 하나님께 은혜를 구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산상수훈의 그 높은 수준, 정말 우리 힘으로 지킬 수가 있겠습니까? 우리는 기도로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을 구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반드시 우리의 기도를 응답하심을 예를 들어 말씀하십니다. 9, 10절입니다. "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 하는데 돌을 주며 생선을 달라 하는데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 어린 아들이 말합니다. "아빠, 나 배고파, 떡 한덩이 주세요!" 그럴 때 어떤 아빠가 떡과 비슷하게 생긴 돌을 주면서 "옛다! 돌이나 먹어라!" 하겠습니까? "아빠, 생선 하나 구워주세요" 그런데 "생선은 무슨 생선? 뱀이나 먹어라!" 할 아빠가 어디 있겠습니까? 당연히 떡을 주고 생선을 구워줍니다.
11절입니다.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예수님은 인간 아버지들이 악하다고 하십니다. 실제로 아버지들이 악하지는 않죠. 예수님이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은 하나님 아버지에 비하면 사람이 아무리 선해도 악하다는 것입니다. 아버지들은 희생적으로 자녀들을 섬김니다. 그래도 아버지 입장에서 뭔가 자식들에게 요구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자식을 사랑하지만 하나님처럼 아무 조건 없이, 변함 없이, 절대적으로 사랑하기는 어렵습니다. 이런 점에서 하나님의 완벽한 사랑을 기준으로 보면 악합니다. 그런데 너희가 그렇게 악할지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준다,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는 얼마다 더 하겠는가? 하는 말씀입니다.
11b절을 다시 한번 봅니다.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십니다. 여기서 좋은 것이 무엇일까요? NIV나 KJV영어 성경에 보면 좋은 것을 "good gifts"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좋은 선물들"입니다. 복수형입니다. 하나님은 구하는 자에게 좋은 선물들, 좋은 영적 선물들을 주십니다. 앞의 7절에서, 우리는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구하라고 하셨는데 무엇을 구하라고 하신 것인지에 대해 생각해 보았습니다. 문맥상, 예수님이 구하라고 하신 것은 좁은 의미나 넓은 의미로나 결국 산상수훈을 지킬 수 있는 능력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구할 때, 율법의 정신까지 지킬 수 있는 믿음, 능력, 은혜, 곧 산상수훈을 온전히 순종할 수 있는 하늘의 은사들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런 하늘의 은사들이 무엇일까요? 원수를 섬길 수 있는 사랑, 거친 세상에서 사나워지지 않는 온유함, 박해하는 자들을 참아내는 인내, 고난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는 열정, 하나님께 대한 충성심, 자기를 제어할 수 있는 절제력 등, 이러한 비범한 능력들입니다. 어두운 세상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소금과 빛으로 살아갈 수 있는 은혜입니다. 이러한 것들이 여기서 말하는 좋은 것들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구할 때 이러한 것들을 넘치게 주십니다.
평행 본문인 누가복음 11:33에는 "구하는 자에게 자에게 성령을 주시기 않겠느냐?"라고 되어 있습니다. 같은 의미입니다. 산상수훈을 따라 살 수 있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 이런 것이 다 성령의 열매입니다. (갈5:22,23) 성령님이 주시는 선물들을 받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은 성령님 자신을 받는 것입니다. 성령에게서 그 은사들이 다 나옵니다. 우리 힘으로는 산상수훈을 결코 지킬 수 없습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하나님은 성령님을 우리에게 주십니다. 성령은 우리에게 좋은 은사들을 풍성히 주셔서 산상수훈을 능히 지키게 만들어주십니다. 더 나은 의를 실천하는 예수님의 제자가 되게 하십니다.
12절입니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공자는 논어에서 "기소불욕 물시어인" (己所不欲 勿施於人) 이라고 했습니다. “내가 원하지 않는 바를 남에게 행하지 말라”입니다. 곧, 네가 싫어하는 것은 남도 싫어하니 남에게 그렇게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소극적인 교훈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지금 말씀하시는 바는 "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는 매우 적극적인 명령입니다. 여기 12절 말씀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는 한글 성경이 좀 약하게 번역되어 있는데 원문에 충실한 KJV 번역은 이러합니다. "Therefore all things whatsoever you would that men should do to you, do you even so to them:“ 이 문장에 "Whatsoever"라는 단어가 들어가 있는데 이 말은 "어떤 상황에서도 무조건적으로"라는 굉장히 강한 의미를 갖고 있는 단어입니다. "All things whatsoever"는 어떤 상황에서도, 네가 다른 사람에게 받기 원하는 그 모든 것을, 네가 가장 받기 원하는 것 바로 그것을, 네가 먼저 남에게 주라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남에게서 무엇을 받기 원합니까? 어떤 대접을 받기 원합니까? 내가 정말 받기 원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물론, 우리는 일상생활 가운데 다른 사람의 존중을 받고 싶습니다. 칭찬을 받고 싶고, 격려를 받고 싶고 사랑을 받고 싶습니다. 좋은 선물을 받고 싶습니다. 예수님은 ”남에게 대접을 받고하 자는 대로 남을 대접하라“ 하십니다. 네가 그런 것을 받고 싶은 대로 네가 먼저 주라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 깊이 원하는 것, 인간의 마음 깊이 원하는 최고의 갈망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그 무조건적이고, 변함없고, 희생적이고 절대적인 사랑을 받기를 가장 원합니다. 우리는 그런 존재로 창조가 되었습니다. 우리를 정말 만족시키는 것은, 하나님의 독생자를 내어주신 그 희생적인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절대적인 사랑이, 그것만이 우리를 진정으로 만족시켜줍니다. 그 사랑을 받고 누릴 때 우리는 천국을 경험합니다. 천국은 사실 하나님과 하나 되어 지복을 누리는 상태입니다. 그래서 ”남에게 대접을 받고하 자는 대로 남을 대접하라“ 이 말씀은 단순히 사람 간의 도덕률을 말씀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이런 사랑을 할 수가 있을까요? 우리가 어떻게 먼저 이렇게 남을 대접할 수 있을까요? 우리 안에 하나님의 사랑이 풍성해야 합니다. 풍성해야 거기서 나가는 것 아니겠습니까? 내 안에 하나님의 사랑이 충만할 때 거기서 참 사랑이 나갑니다. 그래서 우리의 신앙생활은 하나님의 사랑을 더 알고 그 사랑으로 점점 더 충만한 사람들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묵상하고 새롭게 하면 우리 마음에 하나님의 사랑이 넘치게 됩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다 보면 바쁘고 일에 치여 마음이 드라이해지는데 하나님의 사랑을 늘 새롭게 하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의 산상수훈은 너무 수준이 높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가 그 계명의 정신까지 완벽히 지킬 것을 요구하십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하십니다. 산상수훈 계명의 말씀은 우리로 낙심하게 합니다. 절망하게 합니다. 예, 바로 그것이 계명이 의도하는 바입니다. 우리는 이를 지킬 수 없습니다. 그런데 산상수훈을 완벽히 지키신 분이 있습니다. 예수님이십니다. 이제 절망에서 희망으로 바뀌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을 때 우리는 예수님과 연합되어 그가 우리의 죄를 가져가시고 그의 의를 우리에게 주십니다. 세상의 다른 모든 종교는 사람이 어느 수준의 의로움에 이르면 구원을 받는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믿음을 보시고 먼저 구원을 주십니다. 먼저 의롭다고 하십니다. 그리고나서 우리를 이 땅에서 실제로 구원에 합당한 사람, 의로운 사람으로 만들어가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한 성령의 역사로 우리를 변화시켜 나가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으로 만들어 가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안에 살아있을 때 그 말씀은 우리의 마음을 변화시키십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닮는 사람으러 만들어가십니다. 산상수훈 말씀을 주신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고 소망 중에, 우리로 하여금 그 말씀에 이르도록 키우시는 분이십니다. 그 모든 은혜와 능력이 하나님으로부터 옵니다. 이러한 우리 아버지 하나님을 생각할 때 감사와 찬송을 드립니다.
결론적으로,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대접하라는 것은 내가 먼저 하나님의 참 사랑으로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하나님의 사랑이 부족하지만 우리가 말씀과 기도에 힘쓸 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 거룩한 사랑을 충만히 부어 주실 것을 믿습니다. 우리가 이러한 사랑으로 주님을 사랑하고 동역자들을 사랑하고 구원이 필요한 사람들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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