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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2021년 히브리서 특강 3강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 받기를 거절하고⁠`(히브리서 11:23~40)2021-09-06 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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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서 특강 3강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 받기를 거절하고
(부제 : 모세의 믿음과 인내)

말씀 / 히브리서 11:23~40
요절 / 히브리서 11:24~26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 받기를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


 지난 주에는 히브리서 2강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믿음’에 대하여 배웠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하늘 소망을 새롭게 덧입을 수 있었고, 이 땅을 변화시킨 진정한 주역들이 곧 하늘 소망을 품은 자라는 것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오늘 말씀에서는 모세의 믿음과 인내에 대해 배우고자 합니다. 성령께서 우리 각 사람의 마음 가운데 말씀을 증거 해 주시길 기도합니다.  


1장 - 모세의 믿음과 인내(23~29)

 23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믿음으로 모세가 났을 때에 그 부모가 아름다운 아이임을 보고 석 달 동안 숨겨 왕의 명령을 무서워하지 아니하였으며


 22절과 23절 사이에는 약 400년이라는 큰 시간의 간격이 있습니다. 그 동안 이집트 정세에는 많은 변화가 있었습니다. 요셉을 모르는 새 왕조가 일어났습니다. 바로 왕은 무섭게 번성하는 히브리 민족을 두려워하여 노예로 만들고, 인구 억제를 위해 강제 노역을 시켰습니다. 하지만 소용없는 일이었습니다. 이에 왕은 남자 아이가 태어나면 모두 나일 강에 던지라는 끔찍한 명령을 내렸습니다. 모세가 태어났을 때, 그 부모는 이 아기가 아름다운 아이임을 보았습니다. 사도행전 7장 20절에서는 “그 때에 모세가 났는데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운지라...”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아름다웠다’ 는 말은 창세기에서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할 때의 ‘좋았다’ 는 뜻입니다. 왕의 명령을 두려워하여 다들 하나님이 주신 귀한 생명을 나일 강에 버리는 것을 당연시 하던 이때에, 모세의 부모는 바로보다 크신 하나님을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았습니다. 그리고 생명의 주관자이신 창조주 하나님이 그들에게 한 생명을 보내실 때에는 악어 밥이 되게 하라고 주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특별한 뜻과 계획 가운데 주신 것이라 믿었습니다. 그럴 때 모세의 부모는 하나님의 눈으로 아이를 바라볼 수 있었고, 석 달 동안 아기를 숨겨 왕의 명령을 무서워하지 않았습니다.


 24~26절을 다 같이 읽겠습니다.

24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 받기를 거절하고
25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26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


 하나님의 은혜로 모세는 바로의 공주의 아들로 입양 되어 궁중에서 자라나게 됩니다. 모세는 당시 최강대국이던 애굽의 왕실에서 왕자로서 갖추어야 할 최고급 학문과 교양을 받으며 자랐습니다. 모세가 자신이 히브리인이라는 정체성을 언제 어떻게 알아갔을지는 알 수 없습니다. 학자들은 모세가 유모인 어머니로부터 신앙 교육을 받지 않았을까 추측 할 따름입니다. 사도행전 7장 23절에서는 모세의 나이가 사십이 되매 그 형제 이스라엘 자손을 돌볼 생각이 났다고 말씀합니다. 모세는 자신이 궁중에서 살았던 지난 40년의 화려한 삶을 되돌아 볼 때 찰나와 같았습니다. 그의 남은 삶도 결국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삶’ 이 될 것을 알았습니다. 모세는 남은 인생을 바로의 공주의 아들 자리를 등지고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는 삶을 살기로 결단 합니다. 

 이후 모세는 애굽인에게 학대 당하는 자기 동족을 돕는 과정에서 우발적으로 살인을 저지르게 됩니다. 게다가 히브리 노예들은 모세를 지도자로 인정하지 않았고, 오히려 그의 살인죄를 공개적으로 폭로하였습니다. 당시 모세와 정적 관계에 있던 바로는 이를 듣고 모세를 죽이고자 찾았습니다. 이에 모세는 급히 미디안 광야로 피신하였습니다. 사람이 위기의 때에 무엇을 찾느냐는 그 사람의 중심에 무엇이 있는지를 드러냅니다. 모세는 위기의 때에 양어머니인 바로의 공주를 찾지 않고, 광야로 도피합니다. 나중에 모세는 미디안 광야에서 가족을 이루고 자식을 낳게 되는데, 둘째 아이의 이름을 ‘엘리에셀’ 곧 “내 아버지의 하나님이 나를 도우사 바로의 칼에서 구원하셨다” 는 뜻으로 이름을 습니다. 이를 볼 때, 그의 미디안 광야로의 도피는 하나님께 피한 것이라고 생각 해 볼 수 있습니다. 그는 하루 아침에 공주의 아들에서 도망자의 신세가 되었습니다. 요즘 말로 이런 상황을 ‘폭망’ 혹은 ‘이생망’ 이라고 표현 할 수 있습니다.
 
 믿음의 결단을 하고, 그 믿음을 드러냈을 때, 다 그런 건 아니지만 보통 상황이 나빠집니다. 모세는 믿음의 결단을 하고 행함으로 자신의 믿음을 드러냈지만, 그 결과는 모든 것을 잃고, 좇기는 도망자가 되었습니다. 게다가 하나님은 모세를 이때 즉시 부르시지 않으시고, 성경 본문 만을 참조 해 볼 때, 무려 40년 간을 침묵 하셨습니다. 모세는 광야에서 평범한 양치는 목자로 40년을 살면서 하나님의 섭리와 뜻 가운데 바로의 공주의 아들로서 죽고, 하나님의 종 모세로 새로 태어나게 됩니다. 광야는 외롭고 쓸쓸하고 메마른 곳이지만 우리의 마음을 가난하게 하고 겸손하게 합니다. 하나님과 내가 단독자로 만나는 곳, 하나님이 나의 옛 사람을 허물고, 새 사람으로 빚으시는 곳 입니다. 광야에 계시는 분이 계십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다 알 수는 없지만, 확실한 것은 하나님은 선하시고, 선하신 하나님께서 현재 나의 인생을 베스트로 인도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오늘도 살아 역사하시고, 선하게 나의 인생을 인도하고 계시는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립니다.


 26, 27절을 다시 읽겠습니다.

26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
27 믿음으로 애굽을 떠나 왕의 노함을 무서워하지 아니하고 곧 보이지 아니하는 자를 보는 것 같이 하여 참았으며

 히브리서 기자는 26절에서 갑자기 그리스도를 언급합니다. 모세는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시기 약 1400여년 전 살았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모세가 어떻게 그리스도를 위해 수모를 받았다는 것일까요? ‘모세’라는 이름을 들으면 무엇이 떠오르시나요? ‘모세의 기적’은 워낙 유명하여 교회 안 다니는 사람들도 다 압니다. 그런데 성경에서는 모세의 또 다른 진가가 나타납니다. 모세의 삶의 대부분은 기적과 능력을 행하는 삶 보다는 죄악 된 백성들의 죄를 짊어지는 삶이었습니다. 곧 그의 삶은 죄인들의 죄를 짊어지신 그리스도의 모형이었습니다. 출애굽 직후 시내 산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우상 숭배의 죄를 범했을 때, 광야 길 가운데 백성들이 목마르다고, 길이 험하다고, 고기가 먹고 싶다고 하나님을 시험 하고 모세를 원망하며 돌로 치려 들었을 때, 모세는 참았습니다. 특히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 입성을 앞두고, 백성들의 불신의 죄악 때문에 40년을 광야에서 떠도는 큰 시련을 겪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이것조차 참고 인내하였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요? 모세가 40세 때, 애굽 사람을 쳐 죽인 것을 보면, 모세는 본래 그렇게 인내하는 사람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26절 하반부를 보면 “...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 라고 말씀하고, 27절 하반부에서는 “.,. 보이지 아니하는 자를 보는 것 같이 하여 참았으며”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곧 모세가 이 모든 것을 참을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 먼저는 하나님이 함께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모세는 함께 하시는 하나님께서 약속 하신 상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리고 모세는 함께 하시는 하나님, 그러나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믿음의 눈으로 보는 것 같이 하여 참을 수 있었습니다.


 ‘슬기로운 목자생활’ 하면 어떤 이미지가 떠오르나요? 우리가 각자 알아서 개인 투쟁과 성경 연구만 하면서 혼자 신앙 생활한다면 오히려 쉽고 편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 나라에 관심도 없는 캠퍼스 양들에게 가서 복음을 전하고, 믿음이 어린 형제를 도와가며 함께 신앙 생활하려 하니 힘이 듭니다. 나도 먹고 사느라 바쁜데, 그 와중에 시간 내서 양에게 말씀 공부 해 주고자 하는데, 그마저 바쁘다고 거절 당하기 일수입니다. 예약도 안 받습니다. 제가 학생 때, 장래 문제로 인하여 마음이 힘들고 완악해진 때가 있었습니다. 저는 매주 일대일 목자님과 성경 공부 하는 시간에 온갖 불신과 원망 불평의 말을 쏟아내었습니다. 목자님은 이런 저를 감당 해 주시고, 믿음과 소망의 말씀을 심어 주셨습니다. 지금 생각 해 보니 얼마나 힘드셨을까 생각이 듭니다. 만일 목자님이 이런 저를 소망 없다, 믿음 없다 생각하시고, 그냥 포기 해 버리셨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아마도 지금 이렇게 말씀을 전하고 있는 저는 없었을 것입니다. 여기 계신 모든 분들도, 주의 종들의 큰 인내과 섬김과 사랑 때문에 이 자리에 계시게 된 줄 믿습니다. 주의 종들 통해 우리를 오래 참으시고, 연약함과 허물을 감당 해 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와 찬양을 드립니다. 우리가 받은 바 은혜에 기초하여, 우리 또한 양들과 믿음이 어린 지체들을 인내하며 섬겨, 함께 구원과 영생의 길을 걸어가길 기도합니다.

 또 우리가 믿음의 공동체 안에서 지내다 보면, 형제의 허물과 죄 때문에 상처를 받는 경우가 더러 생깁니다. 정신적 스트레스를 받고, 심지어 물질적인 손해를 보는 경우도 발생합니다. 이럴 때, 세상 사람들처럼 싸우고, 세상 법정에 고소하고 싶기도 합니다. 하지만 모세의 삶을 통해 볼 때,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수모를 받는 삶이란, 형제의 연약함과 허물과 죄를 함께 짊어지는 삶을 의미 합니다. 곧 형제의 연약함과 죄와 허물을 잘 감당하는 것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이요, 하늘의 상급을 받는 값진 일이라는 것입니다. 나 혼자 신앙생활 잘 하면 편할 수는 있어도, 하나님 나라 상급을 받을 수 있을까요? 하지만 이것을 나의 힘과 의지로만 하려하면 골병듭니다. 모세도 너무 힘들어서 하나님 앞에 나아가 탄식 하곤 하였습니다. 민수기 11장 11~15절을 좀 더 현실감을 살리기 위해 표준 새번역으로 읽어보겠습니다..

11. 모세가 주께 여쭈었다. "어찌하여 주께서는 주의 종을 이렇게도 괴롭게 하십니까? 어찌하여 저를 주님의 눈 밖에 벗어나게 하시어, 이 모든 백성을 저에게 짊어지우십니까?
12. 이 모든 백성을 제가 잉태하기라도 했습니까? 제가 그들을 낳기라도 했습니까? 어찌하여 저더러, 주께서 그들의 조상에게 맹세하신 땅으로, 마치 유모가 젖먹이를 품듯이, 그들을 품에 품고 가라고 하십니까?
13. 백성은 저를 보고 울면서 우리가 먹을 수 있는 고기를 달라! 하고 외치는데, 이 모든 백성에게 줄 고기를, 제가 어디서 구할 수 있습니까?
14. 저 혼자서는 도저히 이 모든 백성을 짊어질 수 없습니다. 저에게는 너무 무겁습니다.
15. 주께서 저에게 정말로 이렇게 하셔야 하겠다면, 그리고 제가 주님의 눈 밖에 나지 않았다면, 제발 저를 죽이셔서, 제가 이 곤경을 당하지 않게 해주십시오."

 모세는 하나님께 당장 죽여 달라고 할 정도로 힘들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힘들 때 이처럼 하나님께 나와 힘든 마음을 토로하며 기도하였습니다. 우리가 힘들고 어려울 때 일수록, 모세처럼 하나님께 나아가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주님의 도우심으로 힘든 마음 가운데 위로 받고, 나의 상처 받은 내면도 치유 받아야 합니다. 우리가 주님의 도우심을 잘 받아 이 땅에서 믿음 생활도 기쁘게 하고, 하늘의 상도 받는 ‘슬기로운 목자생활’ 하는 저와 여러분 되기를 기도합니다.


 27절을 다시 읽겠습니다.

27 믿음으로 애굽을 떠나 왕의 노함을 무서워하지 아니하고 곧 보이지 아니하는 자를 보는 것 같이 하여 참았으며

 애굽은 당시 최고 강대국이었으며, 바로 왕은 태양 신의 아들이라 불리며, 절대적인 권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에 비해 모세는 눈에 보이는 아무런 권력도 가지고 있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모세에게는 하나님이 계셨습니다. 하나님이 모세를 통해 이집트에 9번째 재앙을 내리신 후, 바로는 노하여 모세에게 “너는 나를 떠나가고 스스로 삼가 다시 내 얼굴을 보지 말라 네가 내 얼굴을 보는 날에는 죽으리라” 라고 엄하게 경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왕의 명령을 두려워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주신 10번째 장자 재앙을 경고하기 위해 다시 바로를 찾아갑니다. 그리고 모세는 왕을 두려워하기는커녕 완악한 바로를 면전을 향해 큰 노를 발하고 궁에서 나옵니다. 그에게 하나님을 믿는 담대한 믿음이 있을 때, 세상 최고의 권력자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 두 사건을 통해서 참 된 믿음의 놀라운 능력을 보여줍니다. 믿음은 세상에서 가장 두려워 할 대상인 왕 조차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는 담대함을 줍니다. 히브리 성도들에게 있어서 가장 큰 문제는 핍박 그 자체보다도 그로 인한 두려움이었습니다. 두려움은 믿음이 없는 문제입니다. 히브리서 2장 14b, 15절에서는 말씀합니다. “... 죽음을 통하여 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멸하시며 /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려 하심이니” 죽음과 두려움은 사탄 마귀의 가장 강력한 무기입니다. 세상 권세자들은 두려움을 통해 우리를 종으로 삼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세상보다 크십니다. 또 우리 예수님은 죽음에서 부활하심으로 죄와 죽음의 권세를 이기셨습니다. 우리를 두려움과 죽음에서 해방 시키셨습니다. 죽음을 이기신 예수님을 믿고 바라볼 때, 우리는 두려움을 극복 하고 담대하게 살 수 있습니다. 


 28절을 읽겠습니다.


28 믿음으로 유월절과 피 뿌리는 예식을 정하였으니 이는 장자를 멸하는 자로 그들을 건드리지 않게 하려 한 것이며


 이어서 모세는 믿음으로 유월절과 피 뿌리는 예식을 정합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경외하여 장차 임할 장자 재앙을 피하기 위해, 어린 양의 피를 이스라엘 모든 집의 문설주에 바르게 합니다. 그날 밤 애굽 전역에 모든 장자가 죽임을 당합니다. 지금까지 다른 재앙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거하는 고센 땅을 제외하고, 애굽 인들이 거하는 곳에만 임하였는데, 장자 재앙은 고센 땅을 포함 한 애굽 전역에 임합니다. 다만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 장자 재앙을 피할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시는데, 이를 믿고 순종 한 자들만이 구원을 얻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믿고 순종하여 모두 구원을 얻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히브리 성도들에게, 모세가 믿음으로 유월절과 피 뿌리는 예식을 정한 것을 상기시켜 줍니다. 이는 장차 오실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피의 언약에 대한 예표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그 어떤 율법이나 규례나 장로들의 유전이 생기기도 전에, 모세는 믿음으로 아직 오시지도 않은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피의 언약을 예표하는 예식을 백성들과 더불어 지켜 구원을 받았습니다. 모세를 포함 한 믿음의 조상들이 장자 재앙에서 구원을 받게 된 것은 그 어떤 율법의 의가 아닌 그리스도의 피를 믿는 믿음이었음을 상기시켜 줍니다. 히브리 성도들이 다시 유대교로 돌아가는 것은 다른 방법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요, 마귀에게 속아 구원을 져버리고 영원한 멸망과 심판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29절을 보십시오.


29 믿음으로 그들은 홍해를 육지 같이 건넜으나 애굽 사람들은 이것을 시험하다가 빠져 죽었으며


 장자 재앙 이후, 하나님은 모세의 믿음을 쓰셔서 홍해를 가르셨습니다. 하지만 갈라진 홍해 바다 물 사이로 들어가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 개개인의 믿음이 필요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믿음으로 순종하여 바다를 육지 같이 건넜습니다. 곧 뒤따라온 애굽 군사들도 이 장엄 한 광경을 보고 크게 놀랐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마음이 완악해질대로 완악해지고, 복수심으로 눈이 먼 바로 왕의 뒤를 따라 갈라진 홍해 물벽 사이로 들어갔습니다. 똑 같은 물벽 사이로 한 그룹은 믿음의 사람 모세를 좇아, 다른 한 그룹은 완악한 바로를 좇아 들어갔는데, 그 결과가 어떠했습니까? 모세의 뒤를 이은 믿음의 행렬은 모두 구원을 받고, 바로의 뒤를 이어 하나님을 시험 한 불신의 행렬은 모두 죽음에 이릅니다.

 히브리 성도들은 핍박과 유혹이라는 거대 한 홍해 앞에서 자신들이 어느 대열에 합류해야 하는지 깊이 깨달아야 합니다. 예수교와 유대교가 똑 같은 모세 오경을 가지고, 똑 같은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는 것 같아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그들이 돌아가려 하는 유대교가 과연 어린 양의 피를 증거 한 모세의 행렬이 맞는지 심각하게 따져보아야 합니다. 잠언 29장 25절에서는 말씀합니다. “사람을 두려워하면 올무에 걸리게 되거니와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안전하리라”. 그들의 선택 기준은 핍박이 있느냐 없으냐가 아니라, 믿음의 길이냐 아니냐가 기준이 되어야 합니다.

 현재 우리는 전례 없는 코로나라는 세계적인 재앙 가운데 있습니다. 신앙에 대한 직접적인 핍박은 없으나, 교회 공동체 생활이나 영적교제가 많은 제한을 받고 있습니다. 자연히 성도들의 믿음 생활에도 큰 영향을 끼치고 있습니다. 이럴 때일수록 우리는 현재 나의 믿음 생활이 앞서 간 믿음의 조상들이 갔던 그 믿음의 행렬인지 근신하며 점검 해 봐야 하겠습니다. 히브리 성도들이 믿음을 져버리고, 옛 생활 곧 율법으로 돌아가고자 하듯, 이방인 출신인 우리는 다시 나의 옛 사람이 왕 노릇 했던 옛 삶으로 돌아가려 하고 있 않은지 두렵고 떨림으로 살펴  보아야 합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믿는 자의 삶이란 하늘 상급을 바라보며 이 땅에서 그리스도의 수모에 동참하는 삶이라 말씀합니다. 코로나로 인해 우리는 교회 공동체 생활보다는 개인과 가정 중심적으로 지내는 시간이 많아졌습니다. 오히려 이 때가 개인 신앙과 가정 교회를 견고히 할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합니다. 코로나라는 홍해를 어떻게 건너냐에 따라 오히려 개인 신앙이 성장하고, 믿음이 견고 해 질 수도 있고, 아니면 있던 믿음 마저 잃어버리는 결과, 곧 홍해에 빠져 죽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모세와 같은 믿음을 가지고 코로나의 홍해와 우리 각자 앞에 놓인 홍해들을 믿음으로 건널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2장 - 믿음이 이룬 일들(30~38)


 30절을 보십시오

.

30 믿음으로 칠 일 동안 여리고를 도니 성이 무너졌으며


 여리고 성은 약속의 땅 가나안을 정복 하는데 있어서 첫 관문입니다. 홍해든 여리고 성이든 정복하는 방법은 다를 수 있어도, 그 원리는 하나입니다. 믿음으로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믿고, 순종하는 것 입니다. 우리 앞에 산재 한 여리고 성들이 믿음으로 무너져 내리길 기도합니다.


 31절을 보십시오.
 


31 믿음으로 기생 라합은 정탐꾼을 평안히 영접하였으므로 순종하지 아니한 자와 함께 멸망하지 아니하였도다

 라합은 창녀요 이방인이었으나, 출애굽 사건이 40년이나 지난 후에도 하나님의 명성으로 두려워 떨며 이스라엘의 정탐꾼들을 하나님의 사자들로 영접하고 숨겼습니다. 그리고 자신도 믿음의 대열에 합류코자 겸손히 은혜를 구하고 순종하였습니다. 하지만 라합과 함께 하나님의 명성을 충분히 들었을 다른 여리고 사람들은 천연 요새라 불리는 견고한 여리고 성을 의지하여 하나님의 백성과 대적하여 싸웠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들을 순종하지 아니한 자라고 표현합니다. 결국 라합과 그의 가족을 제외 한 모든 여리고성 사람들은 멸망 하였습니다.


 32절에서 38절까지는 계속 하여 믿음의 사람들의 믿음이 열거 됩니다.


32절을 읽겠습니다.


32. 내가 무슨 말을 더 하리요 기드온, 바락, 삼손, 입다, 다윗 및 사무엘과 선지자들의 일을 말하려면 내게 시간이 부족하리로다

32절에서는 사사는 기드온, 바락, 삼손, 입다, 왕으로는 다윗, 선지자로서는 사무엘이 나옵니다.


 33 ~ 38절의 내용은 크게 두 가지로 분류 해 볼 수 있습니다.


첫째, 이 땅에서 승리하고 영광을 얻은 믿음의 사람들입니다. 33절부터 34절을 다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33. 그들은 믿음으로 나라들을 이기기도 하며 의를 행하기도 하며 약속을 받기도 하며 사자들의 입을 막기도 하며
34. 불의 세력을 멸하기도 하며 칼날을 피하기도 하며 연약한 가운데서 강하게 되기도 하며 전쟁에 용감하게 되어 이방 사람들의 진을 물리치기도 하며


 둘째, 승리하였으나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천국에서 영광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35절부터 38절까지 읽어보겠습니다. 

 

35. 여자들은 자기의 죽은 자들을 부활로 받아들이기도 하며 또 어떤 이들은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 심한 고문을 받되 구차히 풀려나기를 원하지 아니하였으며
36. 또 어떤 이들은 조롱과 채찍질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련도 받았으며
37.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로 죽임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
38.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느니라) 그들이 광야와 산과 동굴과 토굴에 유리하였느니라


 이처럼 믿음의 역사는 이 땅에서 영광을 체험하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합니다. 주기철 목사님이 일제 강점기 신사참배를 저항하다 감옥에서 고문을 받던 끝에 순교하셨습니다. 주기철 목사님이 몇 달간 감옥살이를 하고 가석방이 되었을 때, 아내 오정모 사모님은 남편을 보자마자 이렇게 물으셨다고 합니다. ‘승리요?’ 이는 ‘승리하셨습니까?’, ‘감옥에서 타협하지 않고, 믿음의 승리를 하셨습니까?’ 라는 뜻입니다. 주기철 목사님께서 순교하시기 전날 사모님은 주기철 목사님을 면회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고 합니다. “어머니와 아이들을 내가 책임질테니 목사님은 순교하시오. 목사님이 순교하셔야 한국 교회가 삽니다“. 사모님의 믿음대로 주기철 목사님은 순교하셨습니다. 이와 같은 분들은 믿음의 최고 정점에 이른 분들로서, 영광스러운 하늘 나라에서 주님 좌우편에 앉아 계시리라 믿습니다.

3장 – 더 좋은 것을 예비하신 하나님(39~40)


39 이 사람들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증거를 받았으나 약속된 것을 받지 못하였으니“


 앞서 소개 한 믿음의 사람들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증거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약속된 것을 받지는 못하였습니다. 여기서 약속된 것은 ‘그리스도께서 오심’으로 말미암아 성취 될 ‘영원한 하늘나라의 실현’을 가리킵니다. 구약 시대의 믿음의 사람들은 모두 다 약속의 성취를 경험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믿음으로 살았습니다. 이 땅에서는 외국인처럼 나그네처럼 살았습니다.


 이러한 믿음의 선진들의 신앙이 우리에게 어떤 삶을 살아야 함을 가르쳐 줍니까?


 40절을 보십시오.


“이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셨은즉 우리가 아니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셨습니다. 더 좋은 것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구속을 가리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구약의 성도들이 누리던 것보다 더 좋은 은혜를 예비하셨습니다. 구약의 성도들은 그리스도의 구속을 멀리서 바라보며 믿음으로 죽었습니다. 그 성취를 보지 못하였습니다. “우리가 아니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었습니다.” 이 말이 무슨 뜻 입니까? 이는 신약의 성도들이 살고 있는 시대에 그리스도에 의해 복음이 완성 된 것을 말합니다. 곧 구약 시대의 믿음의 사람들이나 현재의 그리스도인들은 다 같이 동일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 앞에 자유로이 나아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구약 시대의 신자들의 신앙이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의 구속으로 말미암아 구약의 성도나 신약의 성도나 동일한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습니다.


 저는 이번 말씀을 준비하면서 개인적으로 캄캄 한 현실 속에서도 믿음으로 왕의 명령을 두려워하지 않고, 믿음으로 생명 역사에 쓰임 받은 모세의 부모의 믿음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제가 2학기 역사를 시작도 안 해 보고 이미 코로나로 인해 무엇을 하겠는가? 생각하며 불신과 게으름 가운데 있었음을 회개합니다. 생명 역사는 좋은 환경과 조건이 아니라, 준비 된 믿음과 그것을 쓰시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입니다. 죄인이 회개하고, 모세의 부모와 같이 하나님이 쓰실 만한 믿음을 드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더 나아가 모세의 부모와 같은 믿음의 눈으로 이 시대 양들과 청년들을 바라보고, 하나님의 비전과 소망 가운데 복음 역사를 섬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결론입니다. 모세의 믿음은 상 주심을 바라보는 믿음이었습니다. 그의 믿음은 보이지 않는 이를 보는 것 같이 하여 참는 믿음이었습니다. 우리가 모세의 믿음을 본 받아서, 하나님 역사를 믿음으로 섬겨 가길 기도합니다. 또 우리가 믿음의 선진들도 받지 못한 더 좋은 은혜를 받은 자들로서 더욱 힘써 주와 복음을 섬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리하여 하나님 나라에서 영원한 상을 풍성히 받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