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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2021년 히브리서 공동특강 `예수를 바라보자 ⁠`(히브리서 12장)2021-09-12 2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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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가을학기 특강


예수를 바라보자

말씀/ 히브리서 12장
요절/ 히브리서 12:2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특강 통해 믿음이란 무엇인지 배우게 되어 감사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예수님이 어떻게 믿음의 최고봉이 되시는지 배우고 우리도 예수님처럼 믿음으로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1절을 보십시오.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며”


저자는 히브리서 11장에서 믿음으로 살아 승리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기록했습니다. 이런 믿음의 증인들은 한 두 사람이 아닙니다. 성경에 자세히 기록되지 못했지만 믿음으로 살아서 승리한 수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서울 양화진과 광주 양림동산의 선교사 묘역에는 믿음으로 살다가 조선 땅에 묻힌 수많은 선교사들의 무덤과 묘비가 있습니다. 이들이 어떻게 믿음으로 살면서 여러 고난과 역경을 이기고 승리의 면류관을 얻었는지 그 스토리가 끝이 없습니다. 책으로 펴낸다면 수백권으로도 부족할 것입니다.


본 편지의 수신자인 히브리 성도들이 각자 자신의 주변을 돌아보면 믿음으로 사는 사람이 많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믿음으로 사는 것이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살다가 승리한 수많은 믿음의 선진들을 생각할 때 큰 힘과 용기를 얻게 됩니다.

기드온이 단 300명으로 135,000명의 미디안 연합군과 맞서 싸울 때 하나님께서 그에게 번득이는 지혜를 주셨습니다. 그것은 미디안 연합군의 약점이 숫자가 너무 많다는 것이었습니다. 숫자가 너무 많아 훈련되지 않은 군대이고 또 너무 여러 부족을 연합해서 군대를 구성하다보니 서로 의사소통 체계가 잘 확립되지 않은 것이었습니다. 이 약점을 찔러 항아리 깨지는 소리를 내며 야간기습작전을 펼쳤을 때 미디안 연합군은 집단 패닉 상태에 빠졌습니다. 누가 아군인지 누가 적군인지 구별하지 못하고 자기 부족 사람이 아니면 전부 적군이라고 생각하고 칼을 휘두르다가 전멸에 가까운 패전을 하고 말았습니다.


또 바락이 900대의 철병거 부대와 맞서 싸울 때 바락은 마치 수류탄 하나 들고 육탄으로 탱크에 달려드는 병사와 같은 심정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믿음으로 철병거 부대와 맞서 싸울 때 하나님께서 그 때가 비가 내리지 않는 건기임에도 불구하고 갑자기 하늘에서 천둥벼락과 함께 장대비를 쏟아지게 하셨습니다. 비로 인해 시스라의 철병거 부대는 진흙탕에 고립되어 전혀 힘을 쓰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믿음으로 사는 사람의 삶에는 하나님이 주시는 번뜩이는 지혜가 있습니다. 보이지 않는 가운데 하나님이 주시는 비밀한 도우심이 있습니다. 저에게도 그런 간증이 많이 있습니다. 또 우리 선배 목자님들, 동료 목자님들, 또 후배 목자님들에게도 그런 간증이 수없이 많이 있습니다. 이런 간증을 들으면 힘이 납니다. 또 이렇게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이 구름떼처럼 많다는 것을 생각하면 큰 힘이 납니다.

 

이제 히브리서 저자는 경주자의 비유를 통해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버리고 인내로써 우리에게 주어진 믿음의 경주를 하자고 권면합니다.


당시 히브리 성도들에게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는 무엇이었을까요? 모든 무거운 것은 이렇게 믿음으로 살다가 망하지 않을까 하는 염려와 두려움이었습니다. 히브리서 10:32-34절을 보면 그들 가운데 일부는 예수님을 믿는 믿음 때문에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기도 했습니다. 그 지역에서 왕따가 되기도 하고 사람들에게 비난을 받기도 했습니다. 심지어 터를 내리고 살던 고향에서 떠나 외지로 가야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크리스챤들이 당하는 이런 고난에 대한 소식을 들으면서 그들의 마음에 믿음으로 살다가 망하지 않을까 하는 염려와 두려움이 들기 쉬웠습니다.

사탄이 크리스챤들이 믿음으로 사는 것을 포기하도록 만드는 중요한 전략 중 하나가 바로 이것입니다. 그것은 크리스챤의 삶의 한 장면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창세기에서 요셉의 삶 전체를 보여주지 않고 만약 그가 감옥에 갇혀 고통받는 삶의 모습만을 보여준다면 어떻게 될까요?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사는 삶에 대해 심각한 의심과 회의가 들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도 믿음으로 사는 사람이 고난당하는 것을 볼 때 우리 마음에 믿음으로 살아도 망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의심과 회의가 찾아올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우리가 보는 것은 그 사람의 믿음의 여정에서 한 단면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그의 앞길에 어떤 일이 펼쳐질지 모릅니다. 삼손처럼 일생 실패한 것처럼 보여도 그의 삶에 마지막에 지금까지 모든 실패를 만회하고도 남는 드라마같은 승리가 있을지 모릅니다. 또한 우리가 보기에는 실패한 것처럼 보여도 정작 본인의 내면에는 놀라운 믿음의 승리의 체험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한편 염려와 두려움은 그것을 즉각 제거하지 않을 때 곧 의심과 불안, 더 나아가 불신과 원망 곧 심각한 죄로 발전하는 길을 열어주게 됩니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살고자 하는 사람은 몸과 마음을 무겁게 하는 모든 의심과 염려, 두려움을 벗어버려야 합니다. 어떻게 벗어버릴 수 있습니까?

요즘 종로 2부에서는 새롭게 성경을 공부할 때 그 성경 전체를 필사, 혹은 중요 구절을 암송하는 운동을 하고 있습니다. 참 좋은 운동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요즘 ‘드라마 바이블’이라는 앱을 다운받아서 틈날 때마다 성경 말씀을 듣고 있습니다. 성경을 읽어주는 앱이 여러가지 종류가 있는데 드라마 바이블은 마치 드라마처럼 읽어주는 앱입니다. 성경 말씀에서 “하나님을 거역한 앗수르 왕을 죽이니라” 하는 부분이 나오면 칼 소리가 쉭 나고 악 하는 소리가 배경으로 들립니다. 최근에 동역자가 요즘 목자님이 좀 달라진 것 같다고, 갑자기 믿음이 확 좋아진 것 같다고 했습니다. 어떻게 된 거냐고 물었습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틈날 때마다 성경을 들은 것이 그 원인인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가을학기가 시작되었습니다. 우리 종로 형제 자매님들, 목자님들이 가을학기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마음에 파고들기 쉬운 모든 의심과 불안, 염려, 두려움을 물리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말씀을 통해 믿음으로 살 때 반드시 승리한다는 담대한 마음의 확신을 얻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2절을 보십시오.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원문상 본문은 “예수를 바라보자”라는 표현이 제일 앞에 위치해 있습니다. 여기에서 바라본다는 표현은 원문상 ‘아포라오’로 이것은 “다른 모든 것에서 눈을 돌려(아포) 예수님 한 분에 모든 시선과 신경과 정신을 집중해서 바로보자(호라오)” 하는 의미입니다. 영어로는 “Let us fix our eyes on Jesus”입니다.

그러면 이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그는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이십니다. 여기에서 이 말씀을 읽을 때 사람들에게 약간의 오해가 있습니다. 그것은 “믿음의 주이신 예수를 바라보자” 할 때 이 ‘주’라는 부분을 Lord의 의미로 읽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믿음의 주님이신 예수를 바라보자, 우리가 믿는 신앙의 대상이신 예수를 바라보자” 이런 의미로 읽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오해입니다. 여기에서 주라는 말은 Lord가 아니고 ‘가장 앞자리에 있는 사람’ 혹은 ‘최고봉의 자리에 오른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가장 앞자리에 있는 사람’이라는 의미를 살려 영어로 옮기면 founder 혹은 originator로 번역할 수 있습니다. ‘최고봉의 자리에 오른 사람’으로 번역하면 champion이라고 번역할 수 있습니다. 대부분의 영어성경은 전자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다만 NASB의 각주에는 leader로 번역할 수도 있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전자의 의미를 살려보면 예수님은 신약 시대에 예수님을 믿는 믿음,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을 믿는 믿음으로 사는 믿음의 경주를 만드시고 본인이 그 경주를 처음 시작하셨습니다.


후자의 의미를 살려보면 예수님은 구약 시대에 믿음으로 산 수많은 사람들이 있지만 예수님은 그중에서도 으뜸이 되는 믿음, 최고의 믿음, 믿음의 챔피언이 되셨다는 의미가 되겠습니다.

다음으로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입니다. 우리말 성경을 보면 “믿음의 주” 다음에 의미상 쉼표하고 끊고 “온전하게 하시는 예수”이렇게 읽힙니다. 그러니까 “믿음의 주이신 예수와 온전하게 하시는 예수를 바라보자” 이렇게 읽힙니다. 그런데 사실은 온전하게 하시는 이라는 표현은 믿음을 수식하고 있습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예수님은 믿음의 완성자 - perfecter of faith라는 것입니다.

이 역시 두 가지로 해석될 수 있는데 예수님은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을 믿는 믿음으로 사는 믿음의 경주를 만드셨고 혹은 시작하셨고 더 나아가 그 믿음의 경주를 완성시키신 분, 혹은 끝을 내신 분이라는 의미가 됩니다. 이 의미로 해석하면 예수님은 십자가와 부활로 믿음의 경주에 필요한 모든 것을 완성시켰습니다. 사람이 추후에 여기에 뭔가를 더할 필요도 없고 더해서도 안됩니다. 예를 들어 어떤 교회에서 복음도 믿지만 안식일법을 비롯한 율법도 지켜야 구원을 얻는다라고 주장하면 이단이 됩니다. 또 이만희같은 사람이 이만희를 종말의 구주로 믿어야 한다라고 주장하면 역시 이단이 됩니다. 믿음의 경주는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믿으면 됩니다.


또 한 가지 해석은 예수님과 그의 삶을 통해 믿음은 그 완성된 모습을 보여준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을 배우고 본받는 것이 최고의 믿음, 완성된 믿음으로 나아가는 첩경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어떤 점에서 믿음의 출발점이 되시고 완성자가 되십니까? 또 어떤 점에서 최고의 믿음, 완성된 믿음의 모습을 보여주셨습니까?

마르틴 헹엘이 지은 ‘십자가 처형’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책을 보면 고대 사회에서 십자가 처형을 당하는 것이 얼마나 큰 수치이고 저주인지 잘 나타나 있습니다.


오늘날 SNS 혹은 유투브 등을 통해 어떤 사람의 부끄러운 치부가 전국민에게 낱낱이 공개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런 수치를 당하면 더 이상 얼굴을 들고 밖으로 나갈 수 없게 됩니다. 하루종일 방구석에 처박혀 있거나 검은 선글라스를 끼고 모자를 쓴 채 외출을 해야 합니다. 누군가 거리에서 자기를 알아보면 이 더러운 놈이라고 욕할 것만 같습니다. 이런 수치와 고통을 당하는 것이 바로 십자가의 수치의 일부분입니다. 십자가에 달린 죄수는 최대한의 수치를 주기 위해 발가벗긴 채 죄목을 써서 사람들이 잘 보이는 길가에 나무에 매달아 두었습니다. 집안에 누군가가 십자가에 달려 죽었다고 한다면 남은 가족들은 큰 수치심에 떨며 고통하며 살아가야 했습니다.


십자가의 수치뿐만 아니라 육체적 고통은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습니다. 굵은 대못이 박힌 손과 발목에서 전해져오는 통증, 온 몸의 뼈가 탈골되는 고통, 혀가 입천장에 달라붙는 목마름, 머리를 쇠망치로 계속해서 두들겨 맞는 것 같은 두통, 호흡을 제대로 쉴 수 없는 고통이 한데 어우러졌습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십자가의 모진 고난과 수치를 다 받으신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어떻게 이러한 십자가와 수치와 고난을 참고 이겨낼 수 있었을까요?

첫째, 예수님은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11장에서 수많은 구약의 선진들의 예를 들며 그들이 어떻게 하나님을 믿고 승리했는지를 간증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하나님을 믿은 것은 믿음의 최고봉이요, 믿음의 완성에 해당합니다. 구약 성도들의 믿음을 촛불로 비유한다면 예수님의 믿음은 태양과 같습니다. 구약 성도들의 믿음을 그림자로 비유한다면 예수님의 믿음은 그 그림자의 본체에 해당합니다.

예수님은 이와같이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믿고 신뢰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그 수치와 모진 고통을 당하실 때 하나님이 나를 미워하시기 때문에 이런 고통을 주신다고 생각하지 않으셨습니다. 그 모진 채찍질이 바로 하나님이 나를 미워하시고 나를 버리신 증거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신경을 통해 전달되는 그 견딜 수 없는 아픔이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지 않으시는 증거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그 고난과 고통에는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있음을 믿었습니다. 십자가의 그 모진 고통과 고난과 죽음을 통해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있음을 믿었습니다.

둘째, 예수님은 십자가의 고난 뒤에 고난과 비교할 수 없는 큰 기쁨과 영광이 있을 것을 믿었습니다. 이사야 53:10-11절을 보면 다음과 같은 말씀이 나옵니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사 질고를 당하게 하셨은즉 그의 영혼을 속건제물로 드리기에 이르면 그가 씨를 보게 되며 그의 날은 길 것이요 또 그의 손으로 여호와께서 기뻐하시는 뜻을 성취하리로다 그가 자기 영혼의 수고한 것을 보고 만족하게 여길 것이라 나의 의로운 종이 자기 지식으로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하며 또 그들의 죄악을 친히 담당하리로다”

하나님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시기 약 700년 전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이미 메시야의 고난이 가진 의미에 대해 예언해 주셨습니다. 그것은 메시야의 수난을 통해 수많은 죄인들이 죄사함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메시야는 자기 영혼의 수고를 통해 수많은 생명을 열매가 맺히는 것을 보고 마음에 큰 기쁨과 만족함을 얻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메시야로서 당하는 이 십자가와 고통과 아픔 뒤에 수많은 생명의 열매가 맺히고 그의 마음에 참 만족과 기쁨을 얻게 될 것을 믿었습니다. 십자가 뒤에 나타날 이 큰 기쁨과 만족을 생각할 때 예수님은 현재의 십자가의 부끄러움을 개의치 않으셨습니다. 개의치 않으셨다는 것은 “scorning its shame(NIV)”으로 십자가의 부끄러움을 멸시하셨다(despise, look down on)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뒤에 나타날 생명의 역사를 아직 보지 못하셨지만 믿음의 눈으로 그것을 바라보셨습니다. 믿음의 눈으로 그것을 바라보셨을 때 현재 당하는 십자가의 이 수치를 아무 것도 아닌 것으로 여기셨습니다. 저자는 예수님이 십자가의 수치를 멸시하셨다는 표현을 쓰고 있는데 이는 사람들이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을 흘겨보며 그에게 조롱과 수치를 주고 있는데 예수님을 그 수치를 멸시하셨다, 조롱하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만큼 예수님이 십자가를 통해 얻게 될 기쁨을 바라보며 그 수치를 참으셨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예수님이 보여주신 최고의 믿음입니다. 최고의 믿음으로 하나님을 신뢰할 때 현재 십자가의 수치와 고난을 능히 이겨낼 내적인 힘을 얻게 됩니다.


오늘날 우리가 기독교인이 된다, 기독교인으로 살아간다 말할 때 그 핵심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우리도 작은 예수님이 되어 예수님처럼 믿음으로 이 세상을 살아내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 각자에게도 하나님이 주신 나의 십자가가 있습니다. 그 십자가는 안티 기독교 청년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복음 전파의 십자가일 수 있습니다. 혹은 예수님을 아는 이들이 더 좋은 예수님의 제자로 서도록 돕는 제자 양성의 십자가일 수 있습니다. 혹은 가정에서 자녀들에게 혈과 육으로 대하지 않고 온유와 사랑으로 자녀교육을 감당하는 십자가, 직장에서 본성대로 살지 않고 신자로서 좋은 보이는 빛과 소금으로 살아가는 삶의 십자가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런 십자가를 감당하고 승리할 수 있는 비결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믿음으로 십자가를 이기시고 승리하신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예수님처럼 여러 고난과 어려움 앞에서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신뢰하고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믿는 것입니다. 나의 이 고난과 아픔을 통해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이루어질 것을 믿는 것입니다. 이 고난과 아픔 뒤에는 하나님의 영광에 동참하는 큰 기쁨과 만족함이 있을 것을 믿는 것입니다. 가을학기 우리가 예수님을 바라보고 각자의 십자가를 믿음으로 감당하는 가운데 승리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3-4절을 보십시오. “너희가 피곤하여 낙심하지 않기 위하여 죄인들이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이를 생각하라 너희가 죄와 싸우되 아직 피흘리기까지는 대항하지 아니하고”

이 말씀 역시 두 가지 해석이 가능합니다. 한 가지는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자기에게 거역한 이들을 참으시고 십자가에 피흘리까지 투쟁하셨습니다. 이에 비해 히브리 성도들은 죄와 싸우기 위해 피흘리기까지는 대항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히브리서 저자는 그들이 예수님을 본받아 죄와 피흘리기까지 맞서 싸울 것을 권면합니다.


당시 격투기에는 오늘날 스포츠처럼 싸우는 것이 있었고 어떤 경우에는 전투를 하는 것처럼 피흘리까지 싸우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스포츠에서 지는 것은 속은 상하지만 피를 흘리거나 죽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글래디에이터 경기처럼 피흘리며 목숨을 걸고 싸우는 경우는 그야말로 죽기 아니면 살기로 싸워야 합니다.

성도가 죄와 싸우는 것은 둘 중 하나는 죽어야 끝나는 싸움입니다. 죄가 이겨서 나를 완전히 압도하든지, 아니면 내가 이겨서 죄를 몰아내고 승리하든지 하는 생명을 건 전쟁입니다. 이 전쟁은 내 힘으로는 하는 전쟁이 아닙니다. 이 전쟁은 복음의 능력을 의지해야 하는 전쟁입니다. 다만 나의 마음의 소원과 결단이 중요합니다. 죄가 주는 잔재미와 즐거움을 완전히 포기하고 결단하려는 자세가 없을 때 결코 죄와의 싸움에서 승리할 수 없습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히브리 성도들이 이 결단을 하도록 촉구합니다.

다른 하나의 해석은 히브리 성도들이 예수님을 믿는 믿음 때문에 경제적인 어려움을 당하고 왕따를 당하기는 하였지만 순교를 당하거나 죽음을 당할 정도의 고난을 받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 해석이 다 가능하지만 오늘 우리는 전자의 의미를 생각하고 각자 적용해 보면 좋겠습니다. 


5-7절을 보십시오. “또 아들들에게 권하는 것 같이 너희에게 권면하신 말씀도 잊었도다 일렀으되 내 아들아 주의 징계하심을 경히 여기지 말며 그에게 꾸지람을 받을 때에 낙심하지 말라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가 받아들이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라 하였으니 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버지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히브리서 저자는 잠언의 말씀을 인용하여 하나님의 징계를 경히 여기거나 징계받을 때 낙심하지 말라고 권면합니다. 여기에서 징계는 번역하기 어려운 단어인데 “instruction with discipline” 정도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뭔가를 가르쳐주기 원하십니다. 그런데 그냥 좋은 말로만 하지 않으십니다. 때로는 교육의 효과를 위해 마치 예전 서당에서 아이들이 훈장에게 매로 종아리를 맞는 것처럼 우리를 징계하십니다.


이런 징계를 받을 때 자칫 “에이 몇대 맞고 말지.” 혹은 “때리고 싶은데로 한 번 때려보세요. 죽을 때까지 때리시면 죽고 말지.” 이런 마음을 가질 수 있습니다. 이것이 징계를 경히 여기는 것입니다. 반면 한 대 맞고 눈물을 펑펑 쏟으며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고 힘들어하는 것이 낙심하는 것입니다.

징계를 받을 때 두 가지 자세 다 옳지 않습니다. 그러면 징계를 받을 때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합니까? 징계를 받을 때에는 하나님께서 나의 유익을 위해 이런 징계를 하신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이 징계가 지금 당장은 슬퍼 보이지만 이 징계를 잘 감당하면 의와 평강의 열매를 맺게 되리라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결론입니다. 기독교는 믿음의 종교입니다. 예수님은 최고의 믿음으로 사신 분입니다. 예수님은 오직 믿음으로 사셨기에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인생을 사셨습니다. 우리도 믿음으로 살 때 작은 예수가 되어 위대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가을학기 예수님을 본받아 하나님의 선하심을 절대적으로 믿고 각자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믿음으로 감당하여 승리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