싸움에 나갈만한 자를 계수하라
말씀 민수기 1:1-2:34
요절 민수기 1:3 “이스라엘 중 이십 세 이상으로 싸움에 나갈 만한 모든 자를 너와 아론은 그 진영별로 계수하되”
민수기 말씀은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약속의 땅을 향해 나아가는 과정에서 있었던 일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민수기 말씀에는 이스라엘에 두신 하나님의 소망과 그에 부응하지 못하는 이스라엘의 한계와 실패가 잘 나타나 있습니다. 특히 출애굽 1세대는 원망, 대적, 악평 등으로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약속의 땅은 출애굽 2세대가 들어갑니다. 우리는 출애굽 1세대들을 통해 우리의 내면을 돌아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민수기 말씀을 통해 우리의 내면을 잘 돌아보고 내면을 새롭게 하여 약속의 땅에 들어가는 주님의 백성들이 다 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오늘 말씀은 하나님께서 출애굽한지 1년 보름정도 지났을 때 이스라엘 백성 중에서 싸움에 나갈만한 자들을 계수하여 군대를 만들도록 한 내용입니다. 왜 하나님은 군대를 조직하도록 했을 까요? 이렇게 해서 세워진 이스라엘 군대의 숫자가 60만 명쯤 되었습니다. 이런 군대의 숫자는 무슨 의미를 가질까요? 마지막으로 이스라엘의 진정한 힘은 어디에 있을까요? 이런 주제로 말씀을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애굽 땅에서 이스라엘 자손이 출애굽 한지 둘째 해, 2월 1일에 내려진 하나님의 명령이었습니다. 즉 출애굽한지 1년 15일되던 날에 주어진 명령입니다. 하나님은 시내 광야의 회막에서 모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3절을 보십시오. “이스라엘 중 이십 세 이상으로 싸움에 나갈 만한 모든 자를 너와 아론은 그 진영별로 계수하되” 그 명령은 이스라엘 남자 중, 20세 이상으로 싸움에 나갈만한 자를 계수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왜 이런 명령을 내리셨을까요?
첫째는 군대조직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아직 시내 광야에 있습니다. 1년이 지났으니 애굽군대가 다시 군대를 정비하여 언제 쫒아올지 모릅니다. 3개월 전쯤에는 아말렉이 공격했는데 언제 다른 족속들이 광야에서 그들을 공격할지 모릅니다(출 17:8). 나중에 이스라엘은 바산 왕 옥과 아모리 왕 시혼과 전투를 치르게 되며 그 후, 가나안 정복전쟁을 할 때, 꼭 군대가 필요합니다. 이런 이유로 하나님은 20세 이상의 남자들로 군대를 조직하게 하셨습니다.
둘째로,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역사하심을 알려주시기 위함입니다. 20세 이상 남자의 숫자를 계수하는 데, 총 60만 몇 명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당시 이스라엘은 전체적으로 여성과 미성년자, 노약자를 다 포함하면 200-300만 정도의 인구였습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 특히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을 신실하게 지키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 집을 떠나게 하시며 약속하셨습니다.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창 12:2) 여기서 큰 민족이란 인구수가 많고, 하나님 경외하는 민족이란 뜻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에게 그 약속이 주어졌을 때 아브라함 가정에 남자는 1명으로 아브라함 자신뿐이었습니다. 그리고 아내 사라는 불임여성이었습니다. 또한 아브라함은 나이가 75세인 노인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인간적으로 실현 가망성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되었습니까? 25년이 흘러 아브라함의 나이가 100세가 되었을 때 하나님이 또 다른 남자 1명을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그의 이름은 이삭입니다. 이삭이 40세가 되었을 때 장가를 가서 20년 후 60세에 하나님이 쌍둥이를 주셨는데 그중에 하나가 이스라엘 민족의 조상인 야곱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을 주신 지 85년이 지났을 때, 3명의 남자가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90여년이 흘러 아브라함이 약속을 받은 지 200년이 가까웠을 때 야곱이 12 아들을 낳았고 야곱가문은 70여명이 되었습니다. 이 때 가나안 땅에 기근이 찾아와 가문이 멸절될 상황에서 애굽의 고센 땅으로 이주하게 되었습니다. 고센 땅은 이스라엘 백성이 목축을 하며 번성하기 좋은 땅이었습니다. 그로부터 400여년이 지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마침내 인구 200~300만 명의 민족이 되었습니다.
싸움에 나갈만한 20세 이상의 남자를 60만이나 보유한 민족이 되었습니다. 일반적으로 60만 군대를 가졌다는 것은 무시못할 나라가 된 것입니다. 모세와 아론은 20세 이상 싸움에 나갈만한 자들을 계수하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 까요? 신실하신 하나님, 약속을 지키시는 하나님을 생각했을 것입니다. 특히 창세기의 저자인 모세는 더욱 그러지 않았을 까요? 그리고 약속의 땅도 꼭 주실 것을 믿는 믿음을 덧입지 않았을 까요? 기독교는 언약의 종교입니다. 구약이 신약에서 성취되었고, 신약의 말씀은 앞으로 꼭 성취됩니다. 그러니 우리가 언약의 말씀을 사랑하고 그 말씀을 굳게 신뢰하며 말씀에 기초한 신앙생활을 해 나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은 모세와 아론에게 싸움에 나갈만한 자를 계수할 때, 함께 일할 사람들을 지파별로 한 사람씩 세우도록 했습니다. 그들은 자기 지파의 우두머리였습니다. 이렇게 해서 르우벤 지파부터 납달리 지파까지 모두 12명의 계수실무자가 세워졌는데 그들은 앞으로 각 지파를 지휘할 군대지휘관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면 지파별로 20세 이상, 싸움에 나갈만한 인원이 얼마나 되었습니까? 르우벤 지파는 46,500명, 시므온 지파는 59,300명이었습니다. 갓 지파는 45,650명이었고 유다지파는 74,600명이었습니다. 잇사갈 지파는 54,000명, 스블론 지파는 57,400명이었습니다. 요셉지파는 두 지파였는데, 에브라임지파가 40,500명이었고 므낫세 지파가 32,200명이었습니다. 그리고 베냐민 지파는 35,400명, 단 지파는 62,700명, 그리고 아셀 지파는 41,500명, 마지막으로 납달리 지파는 53,400명이었습니다. 이렇게 총 603,550명이 계수되었습니다.
이 숫자에서 두드러진 점은 유다지파가 74,600명으로 제일 많은 숫자를 보유하고 있었다는 것과 요셉지파가 그 다음으로 번성했습니다. 요셉지파는 두 지파로 에브라임과 베냐민을 합하면 총 72,700명이었습니다. 이것은 창세기 49장에 나오는 야곱의 축복대로 된 것입니다. 에브라임과 므낫세의 순서가 바뀐 것도 야곱의 축복대로 되었습니다.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누군가의 말의 힘입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게 축복의 말, 저주의 말을 할 수 있는데 말은 힘이 있습니다. 그래서 시시때때로 자기가 들은 축복의 말과 저주의 말이 생각납니다. 그래서 그 말이 나의 삶에 영향을 미쳐 나를 격려하기도 하고 낙심시키기도 합니다. 어떤 분은 어렸을 때 지나가던 사람이 한 말인데 신체일부가 잘 생겼다고 말했는 데, 그 말이 항상 격려와 힘이 되어 늘 자신감을 불어넣고 용기를 주어 승리하는 삶을 살게 했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야곱처럼 우리의 유다, 우리의 요셉에게 격려의 말, 축복의 말을 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특히 믿음과 성품에 대한 칭찬을 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47-54절은 레위지파를 계수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레위지파는 몇 명인지 세지 말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3,4장에 가면 레위지파는 더 자세하게 셉니다. 여기서의 의미는 병역의무를 부과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레위지파는 일종의 대체복무를 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칼을 잡고 싸우는 것이 아니라, 성막에서 봉사하는 일을 합니다. 성막은 어떤 곳입니까? ‘증거의 성막’이라고 불리우는 이곳에는 증거 곧 십계명 돌판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명령과 언약의 말씀이 보관되어 있으니 하나님의 계시가 있는 곳입니다. 또 성막은 ‘거룩한 장막’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곳입니다. 또한 회막으로도 불리는데, 회막이란 ‘만남의 장막(tent)’이란 뜻입니다. 누구가 만납니까? 하나님과 사람이 만납니다. 또한 ‘모임의 장막’이라고도 번역할 수 있는데 사람들이 이곳을 중심으로 모여야, 진정한 모임이 됩니다. 이런 성막 내지 회막을 섬기며 관리할 사람들이 필요한 데 이 일을 레위 지파 중에서 선발된 사람들이 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성막 근처에 살면서 성막을 지킵니다. 이곳은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거룩한 곳이기에 사람들이 함부로 접근할 때 여호와의 분노가 있고, 죽을 수도 있습니다. 때문에 레위지파는 성막을 사수하는 영적 군대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2장은 계수된 이스라엘 군대를 어떻게 편성하고 행군 순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 지에 대한 내용입니다. 2:2절을 읽겠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은 각각 자기의 진영과 군기와 자기의 조상의 가문의 기호 곁에 진을 치되 회막을 향하여 사방으로 치라”
첫째로, 이스라엘 군대는 회막을 향하여 진을 칩니다. 그러니까 회막은 이스라엘의 중심입니다. 이스라엘 군대는 회막을 향하고 있습니다. 회막을 보면서 힘을 얻습니다. 회막을 뒤로 두고 싸울 때 든든하고 힘이 납니다.
둘째로, 질서 있게 진을 치고 행진합니다. 진을 칠 때는 크게 네 개의 진영을 만듭니다. 유다, 르우벤, 에브라임, 단 진영입니다. 그 각각의 진영들은 다른 두 개의 지파들과 함께 합니다. 그들은 각각 동남서북쪽에 위치합니다. 그들은 진영의 군기와 지파의 기호를 따라 진칩니다. 진 편성은 아주 지혜롭게 되었습니다. 우선 진영을 리드하는 지파는 모두 책임감이 있거나 헌신적이거나 시니어거나 적극적이거나 호전적인 지파들이었습니다. 이런 지파들이 진영을 리드해야 리더십 있게 이끌어나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음으로 각 진영은 혈연이 같거나 처지가 비슷한 지파들끼리 편성함으로 결속력을 갖도록 했습니다. 예를 들면, 같은 어머니를 둔 지파들이 같은 진영을 구성할 때 결속력이 컸을 것입니다. 진영의 숫자는 18만, 15만, 15만 정도였는데 에브라임 진영만 10만 정도였습니다. 이는 에브라임지파가 호전적이고 싸움을 잘해 숫자가 조금 적어도 충분했기 때문입니다.
세째로, 행진의 순서는 동쪽의 유다, 남쪽의 르우벤, 서쪽의 에브라임, 북쪽의 단 진영 순으로 나아가도록 했습니다. 즉 가장 강하고 책임감있는 유다지파가 항상 선두에 섰습니다. 이는 유다지파의 리더십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사자같은 유다 지파가 앞장 서서 나갈 때 모든 지파가 용기를 얻고 담대히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습니다.
이상의 20세 이상의 싸움에 나갈만한 자를 계수하여 군대를 조직하고 진을 편성한 것을 통해서 우리가 무엇을 배울 수 있습니까? 성도의 삶은 적이 존재하는 전투라는 사실입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을 구약교회라 하는 데 그들이 가는 광야 길에는 적들이 존재하고 약속의 땅도 전투를 해야만 얻을 수 있습니다. 신약교회도 그들을 위협하는 원수마귀가 있습니다. 우리가 전에 계시록 공부를 할 때 계시록에서 말하는 지상교회는 전투하는 교회였습니다. 그래서 계시록에는 ‘이기는’ 이란 단어가 많이 나왔습니다. 그러면 성도들이 영적전투에서 이기는 삶을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첫째로, 가장 기본적인 것인데 내가 싸우는 자이고, 내 주위에 항상 적이 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는 것입니다. 벧전 5:8절을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우는 사자란 배고파 울부짖으며 먹이를 노리는 사자를 뜻합니다. 마귀는 친근한 붉은 악마나 귀여운 도깨비 같은 존재가 아닙니다. 우리의 원수로서 우리에 대해 일말의 자비도 없습니다. 우리 영혼을 파멸시키는 것이 유일한 목적인 악 그 자체입니다. 군인이 전쟁터에서 자신이 군인이라는 사실을 잊어버리면 어떻게 됩니까? 전투헬밋을 벗고 총을 놓고 들판을 거닐면 어떻게 됩니까? 전투에서 승리하려면 기본적으로 항상 자신이 군인임을 인식하고 나를 죽이려는 적이 있음도 한시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전쟁영화를 보면 언제 어디서 화살이나 칼이나 총알이 날아올지 모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기드온의 300용사를 뽑으실 때, 군인의 신분을 망각하고 사주경계를 하지 않고 무릎을 꿇고 머리를 박고 물을 먹은 사람들은 다 돌려보냈습니다. 그리고 사주경계를 하며 물을 손바닥으로 떠서 개가 혓바닥으로 핥듯 마신 사람들만 전투에 참여하게 했습니다. 성도가 깨어있는 삶을 산다는 것은 삶의 모든 욕망을 부인하며 사는 것이 아닙니다. 보통 사람들이 하는 것을 다 하지만 항상 그 영혼이 깨어 있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둘째로, 지혜롭게 조직하고 운용을 잘해야 합니다. 지휘관도 잘 세워야 합니다. 당나라 부대는 100만 대군으로 침입했지만 양만춘 장군이 이끄는 적은 숫자의 고구려부대를 이기지 못했습니다. 안시성에서 참패를 당하고 당태종 이세민은 왼쪽 눈에 화살을 맞고 돌아가 죽었습니다. 그때부터인지, 여러 가지 견해가 있지만 숫자만 많고 잘 싸우지 못하는 부대를 당나라 부대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캠퍼스 역사도 잘 싸우려면 전투력 있는 사람들을 세워야 합니다. 전투력 없는 사람들을 억지로 긁어모으면 이도저도 안됩니다. 억지로 참가하여 계속 불평하거나 패배감을 심으면 그가 내부의 적과 같은 역할을 하게 됩니다. 군인의 자세가 되어 있는 사람들도 그릇을 잘 이루어 가장 효과적인 조직을 만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적극적이고 리더십 있는 사람들을 잘 세워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이스라엘의 승리의 원동력이 무엇이냐 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운명이 60만 군인의 숫자와 조직과 그 운영에 달려 있을 까요? 이스라엘의 중심에 계신 하나님과 그 임재에 달려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진의 중심에는 성막이 있고 진들은 모두 ‘성막을 향하여’ 있었습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의 중심은 성막이고, 이스라엘의 힘도 성막 곧 하나님의 임재에 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이스라엘의 진정한 칼과 방패는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임재, 하나님과의 교제가 그들의 승리의 원동력입니다.
역대하 17-20장에 비교적 길게 나오는 유다의 왕이 있습니다. 여호사밧 왕입니다. 그는 다윗 왕의 처음 길로 행하였습니다. 오직 하나님께만 구하고 하나님의 계명을 행했습니다. 그러자 여호와께서 그 나라를 견고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유다 사방의 모든 나라에 두려움을 주사 아무도 여호사밧과 싸우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를 사랑하사 그가 아합과 연합하여 아람 군대와 싸울 때, 아합은 죽지 않고자 변장하였으나 우연히 적이 쏜 화살이 터진 갑옷솔기사이에 박혀 죽지만 여호사밧은 살게 해주셨습니다.
그 후에 연합군들이 유다와 여호사밧을 공격해 왔습니다. 그때 여호사밧은 여호와께 낯을 향하여 간구했습니다. 유다 백성들에게 금식하라 공포했습니다. 그때 유다 모든 백성들이 모든 성읍에서 여호와의 도움을 얻고자 간구했습니다. 아내와 자녀와 어린이도 다 여호와 앞에 섰습니다. 여호사밧은 성전 뜰에 서서 기도했습니다. “우리를 치러 오는 이 큰 무리를 우리가 대적할 능력이 없고 어떻게 할 줄도 알지 못하옵고 오직 주만 바라보나이다”(대하 20:12). 이때 하나님께서 응답하셨습니다. “두려워하거나 놀라지 말라 이 전쟁은 너희에게 속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 속한 것이라. 이 전쟁에는 너희가 싸울 것이 없나니 대열을 이루고 서서 너희와 함께 한 여호와가 구원하는 것을 보라”(대하 20:15b, 17a).
여호와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하신다고 하셨을 때 여호사밧은 백성들에게 여호와를 신뢰하도록 하며 찬양대를 조직하여 군대 앞에서 찬송하며 행진하게 합니다. 그들이 이렇게 찬송합니다. “여호와께 감사하세” 감사의 노래가 시작되자 여호와께서 여호와의 복병을 보내사 그 연합군을 치게 하십니다. 그 후 연합군들이 서로를 치기 시작했습니다. 두 족속이 한 족속을 치고, 나머지 두 족속이 서로 쳐서 적들이 모두 스스로 궤멸했습니다. 그 후 이방나라들이 여호와께서 그 적들을 치셨다 함을 듣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므로 여호사밧의 나라가 태평하였고 하나님이 사방에 평강을 주셨습니다.
이상을 볼 때 진정한 국방은 하나님의 임재에 있고 그 하나님의 임재는 우리의 마음이 성막을 향할 때 있습니다. 우리의 삶은 영육 간에 전쟁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힘이 없습니다. 우리는 나이 많은 아브라함과 사라처럼 죽은 자와 방불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면 어떻게 달라집니까? 하나님의 도우심과 섭리로 한 연약한 자가 60만의 큰 군대를 이루었습니다. 에스겔서의 마른 뼈같은 사람들이 세상을 정복하는 큰 군대로 일어 섭니다(겔 37:9b,10).
이스라엘의 자랑은 하나님의 임재입니다. 이런 찬양이 있습니다.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여, 내가 주님을 사랑합니다. 주는 나의 반석이시며 나의 요새시라 주는 나를 건지시는 나의 주 나의 하나님, 나의 피할 바위시오 나의 방패시라.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구원의 뿔이시며 나의 산성이라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그는 나의 여호와, 나의 구세주” 이 찬송처럼 우리가 성막을 향하여 하나님을 찾고 그의 임재를 힘 삼아 세상에서 영육 간에 승리하는 자들이 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의문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힘이라면 구체적으로 병사도 필요도 없고 전투도 필요 없지 않는 가하는 생각입니다. 물론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힘이고 승리의 비결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이 실제 삶에서 치열하게 싸우면서 하나님을 의지하는 실질적인 믿음과 용기의 사람들이 되도록 그들이 현장에서 직접 싸우는 삶을 살도록 하셨습니다.
결론입니다. 성도들의 삶에 원수들이 있으니 성도는 깨어있는 군사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 앞에 수많은 적들이 있지만 우리에게는 성막 곧 하나님의 임재가 있으므로 우리는 승리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때마다 하나님의 임재연습을 하여 승리의 삶을 살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의 임재도 연습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특히 시간을 잘 보냄으로 평소에 하나님의 임재연습을 하는 성도들이 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