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메세지

제목2021년 민수기 3강 `진영을 더럽히게 하지 말라⁠`(민수기 5-6장)2021-10-04 01:38
작성자

민수기 3강


진영을 더럽히게 하지 말라


말씀 민수기 5-6장
요절 민수기 5:3 남녀를 막론하고 다 진영 밖으로 내보내어 그들이 진영을 더럽히게 하지 말라 내가 그 진영 가운데 거하느니라 하시매


1-10장은 이스라엘의 행군준비라고 합니다. 1-2장에서 외적으로 군대를 편성해서 행진할 준비를 했다면 3-4장에서는 이스라엘의 코어인 성막과 레위인을 정비하여 내적 준비, 영적 준비를 하도록 했습니다. 오늘 말씀도 내적 준비의 일환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행군을 잘 하고 승리하려면 어떤 내적 준비들을 해야 합니까? 이시간, 진영을 더럽히게 하지 말라, 진영을 깨끗하게 하라는 한 말씀을 깊이 받기를 기도합니다.

여호와께서 모세를 통해 말씀하셨습니다. 2,3절을 보십시오.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령하여 모든 나병 환자와 유출증있는 자와 주검으로 부정하게 된 자를 다 진영 밖으로 내보내되 남녀를 막론하고 다 진영 밖으로 내보내어 그들이 진영을 더럽히게 하지 말라 내가 그 진영 가운데 거하느니라 하시매 그 내용은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하여 모든 나병 환자, 유출증 있는 자, 시체로 인해 부정하게 된 자들을 진영 밖으로 내보내라는 말씀이었습니다. 그 이유는 그들이 진영을 더럽히지 않도록 함이며, 하나님이 진영가운데 거하시기 때문이라고 하셨습니다.  


나병은 신체조직이 썩어 문드러지는 병입니다. 이 병은 전염성이 아주 강하기에 의학적인 면에서 다른 사람들의 보호를 위해서도 속히 격리해야 합니다. 종교적으로는 하나님은 썩어 문드러지는 것을 좋아하지 않으며, 그런 자들과 함께 하실 수 없습니다. 유출증있는 자는 성기에서 피고름이 나오는 이들입니다. 이들도 병을 전염시킬 수 있으며 종교적인 면에서 보이진 않지만 신체조직이 썩어 있으며 생명을 상징하는 피를 유출시키고 있습니다. 또한 시체로 인해 부정하게 되는 경우는 의학적으로는 그 시체에 죽음을 가져올 수 있는 치명적 바이러스가 있을 수 있고 종교적으로는 죽음은 죄의 결과로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지 않으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상을 보면, 하나님은 의학적, 종교적 이유로 진영을 깨끗하게 하라 하셨습니다.


고린도전서 5장을 보면, 고린도 교회 내에 아버지의 아내를 취한 자가 있었고 이런 사람을 용납하고 있는 고린도 교회를 사도바울이 강하게 책망한 내용이 나옵니다. 아마 고린도 교회는 이런 자를 용납하며 자신들이 사랑많은 교회라고 자랑한 것 같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그러한 자랑이 옳지 않다고 책망하며 그런 자를 교회 밖으로 쫒아내는 것이 그 사람도 구원하고 교회도 지키는 것이라 가르쳤습니다.


사도 바울은 적은 누룩이 온 덩이에 퍼진다고 했습니다. 그는 교회는 누룩 없는 떡과 같으므로 교회 안에서 묵은 누룩을 내어버려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이를 볼 때 하나님의 교회는 순전하고 죄를 멀리하는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교회는 성령이 운행하는 공동체입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교회를 우습게보고 주의 종들을 적당히 속이려 하다가 즉사했습니다. 우리는 나의 삶과 행위가 교회의 거룩을 무너뜨리는 영적인 나병을 주위 사람들에게 전염시키고 있지는 않는 지 돌아봐야 합니다. 또한 나의 삶과 행위가 다른 사람들의 생명력을 빼앗고 무기력과 영적 죽음에 이르는 영적 코로나, 델타 바이러스를 전염시키고 있진 않은 지 돌아봐야 하겠습니다.


왜, 이스라엘은 진영을 더럽혀서는 안 됩니까? 이스라엘 공동체는 하나님이 거하시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계시고 하나님이 승리 주셔야만 광야의 행진과 가나안 정복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조건은 성결과 거룩이기 때문입니다.


한 목자님이 있습니다. 그분이 일용할 양식을 써서 보내는 데 읽어보면 아주 깁니다. 그 이유는 말씀묵상도 깊지만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한 것이 많아 그것을 나누다 보니 길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임재는 우리에게 기쁨을 줍니다. 다른 모든 조건이 좋아도 하나님의 임재가 결여되면 우리는 우울할 뿐입니다. 죠지뮬러는 하나님의 임재체험 곧 기도응답을 많이 받았습니다. 하루 2번쯤 기도응답을 받은 셈인데, 오전과 오후에 한 번씩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한다면 우리도 행복할 것입니다.


우리가 같은 하나님을 섬기는 데 왜 다른 신앙생활을 하는 것일까요? 시편 66:18절 말씀은 그 답이 될 수 있습니다. “내가 나의 마음에 죄악을 품었더라면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리라” 이 말씀을 통해 우리가 하나님이 받으실 수 없는 내면은 아니었는 지 돌아보고 회개하게 됩니다. 우리가 썩고 문드러지고 무기력한 죽음의 요소들을 내어 버리기를 기도합니다.


3절을 다시 보십시오. “남녀를 막론하고 다 진영 밖으로 내보내어 그들이 진영을 더럽히게 하지 말라 내가 그 진영 가운데에 거하느니라 하시매” 모세는 이 말씀에 순종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하나님이 임재하시고 역사하실 수 있는 공동체의 성결과 거룩을 이루었습니다.


5-10절은 이웃에게 죄를 범한 경우, 어떻게 해야 하는 지에 대한 여호와의 말씀입니다. 6절을 보면 이스라엘이 범하는 모든 죄는 하나님께 대한 거역이 바탕에 있습니다. 하나님께 대한 자세가 좋지 못할 때 이웃에게도 범죄하게 됩니다. 이웃에게 범죄한 경우 7절을 보면 먼저 그것을 자복해야 합니다. 자복한다는 것은 “내가 잘못했으니 용서해 달라”고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자신이 이웃에게 죄를 지었지만 하나님께 용서를 받았으니 다 됐다고 생각하며, 심지어 그 피해자 앞에서 그 사실을 당당하게 말합니다. 


또한 어떤 사람은 다짜고짜 물질적 배상만 하고자 합니다. 그러나 마음을 어루만지지 않고 돈으로 무마하려 할 때 상대방이 상처를 받고 분노하게 됩니다. 사람은 마음을 가진 존재이며 영혼의 소유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웃에게 피해를 끼쳤다면 마음으로 자복하고 사과를 하는 것이 우선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죗값도 지불해야 합니다. 오분의 일을 더하여 죗값을 갚으라는 것은 120% 보상하라는 것입니다. 피해를 끼치기 전의 상태로 원상복구를 해주되 정신적, 시간적 피해를 끼쳤기에 20%를 추가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최선을 다한 보상인 셈입니다. 이러한 규정은 죄를 함부로 짓지 못하게 하는 범죄예방의 기능도 합니다. 예컨대 1,000만원의 피해를 끼친 경우, 1,200만원을 물어줘야 하니 함부로 피해를 끼치지 않을 것입니다. 기독교인들의 문제가 죄를 짓고 죄사함 받는 것을 너무 가볍게 생각하는 것 곧 죄 사함의 은혜를 값싸게 여기는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하나님은 이웃에 대한 죄를 철저히 보상하도록 하셨습니다.


이웃과의 관계가 왜 중요합니까? 전쟁공동체에서 이웃과의 관계가 화목하지 않으면 전우애가 형성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서로를 미워하고 판단하고 있으면 유사시에 서로를 돕지 않게 됩니다. 미워하는 이웃이 잘못되는 것을 오히려 좋아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이런 공동체는 외부의 적과 싸움에서 결속력이 약해 승리할 수 없습니다.


반면에 평소에 깊은 사랑과 신뢰, 존경의 관계가 있다면 유사시에 어떻게든 서로를 돕고자 할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나에 대해 피해의식과 원망하는 마음을 가진 이들을 찾아 그 원망이 정당하다면, 어찌하든지 사과하고 좋은 관계를 회복해야 하겠습니다. 마태복음 5:23,24절을 보면 하나님께 예물을 드리러 가다가도 형제에게 원망 들을 만한 일이 생각나면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리고나서 예물을 하나님께 드리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이번 주간에는 원망들을 만한 대상들을 찾아 진심으로 사과하고 배상하는 일들을 시작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이번 주간이 힘들다면 연내에라도 감당하기를 기도합니다.


11-31절은 부부관계의 신뢰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요약하면 아내가 불륜이 의심스러울 때 남편이 어떻게 해야 하는 가에 대한 말씀입니다. 두 경우를 말씀하고 있는 데, 하나는 실제로 아내가 불륜을 저질렀는데 증거가 없는 경우이며, 또 하나는 아내가 불륜을 저지르지 않았지만 남편이 자꾸 아내를 의심하는 경우입니다. 이런 경우 남편이 아내를 의심하고 속으로 미워하거나 자기 판단으로 연약한 아내를 위협하고 폭행하고 죽일 수도 있습니다. 이것을 막기 위해 하나님은 의심의 소제, 기억의 소제를 드리도록 하셨습니다.


그 절차는 여성을 제사장 앞에 나오게 한 다음, 저주와 축복의 맹세를 하게하고 두 번 아멘으로 화답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 과정에는 저주의 쓴물을 마시게 하는 것도 포함되어 있는 데  실제로 불륜을 저지른 여성은 배가 붓고 넓적다리가 마르는 신체적 고통과 불임의 저주를 받게 된다고 하셨습니다. 반면에 순결한 여성은 그런 해를 받지 않고 임신의 축복을 받게 된다고 말씀했습니다. 이런 절차를 한마디로 의심의 법이라 불렀습니다.


이런 의심의 법의 역할은 연약한 여성들을 남성의 폭력으로부터 구하는 여성보호의 의미와 함께 범죄예방, 가정의 순결을 지키는 기능을 담고 있었습니다. 가정은 이스라엘 공동체의 세포와 같습니다. 가정이 파괴되면 공동체가 파괴됩니다. 배의 선실 하나가 깨어지면 배가 점점 기우는 것과 같습니다. 가정의 핵심은 부부관계입니다. 부부가 서로를 신뢰하고 존경하지 못하면 사회전체가 의심과 불신의 사회가 됩니다. 남편이 아내를 믿지 못하면 남편은 칼을 잡고 전쟁에 집중할 수 없습니다. 남편이 아내를 신뢰할 때 이스라엘 공동체는 힘찬 공동체, 승리하는 공동체가 될 수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서로를 의심하는 게 어찌보면 당연합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하나님이 보고 계심을 믿기에 딴 짓을 할 수가 없지만 불신자들은 하나님을 안 믿으니 서로에 대해 의심이 들고, 그러면 핸드폰추적기를 설치하기도 하고 사설탐정을 고용하기도 합니다. 배우자가 이쁘고 멋있을수록 더욱 그럴 것입니다. 또한 상대적으로 자신에 대해서 열등감이 있는 사람일수록 더욱 그러할 것입니다. 반면 믿음으로 결혼한 사람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짝지어준 배우자이기에 절대 무시하지 않습니다. 부족할수록 더욱 사랑하고 섬기고자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나를 그에게 붙이신 이유이기 때문입니다. 남편들은 부족한 자신을 절대적으로 respect하고 섬겨주는 것에 대해 감동을 받고 눈물을 흘립니다.


세상에서 서로를 불신하고 싸우고 함부로 대하는 부모님을 본 대학생들이나 청소년들은 부부관계에 대해 실망하고 아예 결혼하지 않고 비혼 주의자로 살고자 마음을 먹기도 합니다. 어떤 이들은 감정과 정욕에 이끌려 결혼했다가 결혼초기부터 크게 실망하고 이혼하는 이들도 많습니다. 결혼이 서로에 대한 신뢰와 절대적 사랑을 배우는 것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결혼은 자칫 지옥문을 여는 것이 될 수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아무리 부부가 서로 신뢰하려고 해도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이유와 에너지가 없습니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들은 다릅니다. 때문에 서로 신뢰하는 부부관계는 교회가 세상에 대해 갖는 비교우위이며 힘입니다. 그래서 우리 모임에 학생들이 와서도 서로 존중하고 신뢰하는 부부의 모습을 통해 큰 감동을 받고 이 모임에 나와 성경공부를 해야 하겠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많았습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결혼하고, 부부가 서로를 절대적으로 사랑하고 아끼고 신뢰하는 가운데, 세상 가정에 대한 비교우위를 보여줌으로 삶을 통해 선교하고 불신 세상을 회복해 나가는 데 쓰임받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6장 말씀은 나실인 법에 대한 말씀입니다. 나실인 할 때 ‘나실’이란 말은 ‘구별되다’, ‘성별되다’란 뜻입니다. 나실인이란 자기 몸을 구별하여 하나님께 드리기로 서원한 사람들을 말합니다. 본문에는 평생이 아니라 일정기간만 서원하고 다시 보통의 삶으로 돌아오는 경우를 말하고 있습니다. 정리하자면, 어떤 사람이 어떤 이유로 정말 간절히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께 집중하기를 원할 때 나실인 서원을 합니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나실인의 삶은 어떻게 사는 것입니까?

첫째, 포도주와 독주를 멀리합니다. 포도주와 독주는 기쁨을 주며, 고통을 잊게 하는 것입니다. 즉 나실인은 이런 육신의 기쁨을 주는 것을 일시적으로나마 멀리하고 하나님을 자신의 기쁨의 이유로 삼는 것입니다. 포도주와 독주를 멀리할 때 포도로 된 초, 독주로 된 초 정도는 괜찮지 하며 마셔서는 안됩니다. 포도즙이나 생포도, 건포도, 포도씨나 껍질도 먹어서는 안됩니다. 왜냐하면 100% 헌신만이 하나님이 받으시기 때문이며, 만약에 작은 것이라고 허용하면 인간은 연약하여 나중에는 포도주나 독주를 벌컥벌컥 마시게 되고 결국 나실인 서원자체가 무너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 씨나 껍질도 입안에 넣지 않는 것이 서원을 지키는 지혜입니다.


둘째, 머리를 길게 하고 시체를 가까이 하지 않습니다. 머리를 길게 하는 것은 육신의 관리보다는 영혼의 관리에 집중하는 것입니다. 머리는 생명력이 가장 잘 나타나는 것으로 그가 참 생명력을 지키고 있다는 것도 의미합니다. 그리고 나실인은 시원 기간 동안 죽음을 상징하는 시체를 가까이 하지 않는 데 이를 어느정도 철저히 지키냐면 부모형제가 죽을 때에라도 그 주검을 가까이 하지 않고 만약 우연히 누구랑 같이 있다가 그 사람이 죽게 되어 그 시체에 접촉하게 된 경우는 그동안 성결이 무효가 되어 다시 머리를 밀고 속죄제를 드리고 서원기간을 시작해야 할 정도입니다.


13-21절은 서원기간이 끝나 보통의 삶으로 돌아오는 절차에 대해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러 제사를 드리는 것은 그만큼 헌신의 기간이 의미가 있었다는 뜻입니다. 특히 머리 털을 밀어 불에 태우는 것은 어떤 의미였을 까요? 머리털은 거룩함의 상징이고 열매라고 할 수 있는 데  이것을 불태움으로 하나님께서 흠향하시도록 하는 것입니다.  


나실인 서원을 통해 우리가 배울 점은 무엇입니까? 때로는 우리가 기간을 정해 하나님을 간절히 찾고 하나님을 기쁨의 이유로 삼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일상에 함몰되거나 육신의 욕망을 따라서만은 살 수 없는 데 그것은 인간은 영혼의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을 찾아야할 때가 있고 하나님과 씨름하며 승부수를 띄워야 할 때도 있습니다. 이럴 때 우리는 나실인 서원을 해야 합니다. 사도바울은 로마서 12:1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대부분의 사람들이 죽어 둥둥 떠내려가는 물고기처럼 세상의 흐름에 자신을 내맡기며 삽니다. 게중에 문제의식을 가진 이들도 대부분 조금 허우적대보다가 다시 그 흐름에 묻혀 버립니다. 이럴 때는 소원과 의지를 가지고 단호한 결단을 할 필요가 있습니다. 평생을 주님께 바치지는 못할지언정 몇 달이라도 혹은 며칠이라도 혹은 하루 중 몇 시간이라도 따로 구별하여 하나님을 찾는 시간을 갖는 것입니다.


바울은 고린도교회를 개척하고 고린도를 떠날 때 겐그레아 항구에서 머리를 깎았습니다(행 18:18). 그것은 고린도에서 개척역사를 섬긴 1년 6개월이 서원기간이었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고린도는 참 개척하기 쉽지 않는 곳이었습니다. 항구도시라 뜨내기들이 많고 육신적이고 쾌락적이며 우상숭배가 난무한 곳이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곳에서 자립하면서도 말씀에 사로잡혀 열심히 하나님의 역사를 섬겼습니다. 하지만 비방하는 유대인들의 장벽을 만났습니다. 이때 바울은 비방하는 자들을 하나님 편에서 해석하고 그들을 떠나 이방인사역에 집중했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이방인 디도 유스도 라 하는 사람의 집에 가서 사역을 했는 데 그 집옆에 유대인의 회당이 있었고 회당장 그리스보가 주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이어 수많은 사람이 복음을 듣고 믿고 세례를 받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고린도교회가 성공적으로 개척되었습니다. 이게 그냥 된 일일까요? 하나님과 바울사이에 something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울이 1년 6개월 동안 자신의 몸을 구별하여 하나님께 드렸고 하나님이 그 헌신을 받으셨고 그 헌신이 힘이 되어 고린도교회가 개척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우리 몸을 하나님께 산 제물로 드릴 때 하나님은 그것을 귀히 여기시고 받으십니다. 평생 나실인 서원을 했던 삼손, 사무엘, 세례요한과 같은 사람들이 슈퍼파워를 발휘했던 이유가 무엇입니까? 원수들을 나귀턱뼈 하나로 물리치고, 하늘을 움직여 기도응답을 받고, 수많은 사람들을 돌이키는 감화력 있는 메시지를 전한 힘이 어디서 나왔습니까? 그들이 자신을 구별하여 삶을 하나님께 드렸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의 공동체가 파워풀하고 승리하는 공동체가 되려면 자신을 성결케 하고 헌신하는 사람들이 많아야 합니다. 특히 몸만 헌신하는 것이 아니라 즐거이 마음을 헌신하는 사람들이 있어야 합니다. 물론 이스라엘 공동체에는 신분적으로 헌신하는 레위인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어떤 면에서 하나님은 레위인들보다 나실인들의 헌신을 더 기뻐하십니다. 왜입니까? 레위인들은 어쩔 수 없이 레위인으로 태어나 헌신하는 사람들이지만, 나실인들은 그러지 않아도 되는데 자발적으로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께 헌신하기로 결단한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어디가나 자발적으로 헌신하는 사람들이 힘이 있습니다. 우리가 그냥 흘러가는 대로 살지 않고 때로 서원과 헌신이 있는 삶을 살기를 기도합니다. 가능하면 우리 청년들은 결혼하기까지 자신을 나실인으로 드리기로 서원하면 좋겠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그 역사에 쓰시고 결혼도 축복하실 것을 믿습니다. 우리 목자님들도 일상에 묻혀 살지 않고 자신만의 나실인 서원을 하여 영적 파워가 있고 하나님께 쓰임받는 이들이 다 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22-27절은 제사장 축복기도에 대한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축복이 우리 인생에서 가장 중요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제사장의 축복을 통해서 인생들을 축복하시겠다고 하셨습니다. 그 이유가 뭘까요? 제사장이 사람들을 바라볼 때 웬만하면 다 저주하고 싶습니다. 그러므로 그가 죄인들을 축복을 하려면 마음을 넓혀야 합니다. 그래서 제사장은 바다를 의미하는 청색 옷을 입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죄인들을 축복할 때 제사장들의 축복기도를 사용하는 이유는 제사장들에게 죄인을 품으시는 하나님의 넓은 마음을 가르치기 위함입니다.


오늘 말씀의 결론입니다. 하나님이 우리가운데 거하시면서 역사하시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더러운 것들을 내보내면, 하나님은 우리와 강력하게 함께 하시며 승리의 행군을 하게 하실 것입니다. 우리가 더러운 것들을 내보내며, 흘러가는 데로 살지 않고 자신을 구별하여 주님께 드림으로 우리 앞에 새롭게 승리의 삶이 펼쳐지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