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누가복음 13강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말씀/ 누가복음 8:40-56
요절/ 누가녹음 8:50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그리하면 딸이 구원을 얻으리라 하시고”
현대인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는 가장 강력한 세력 중 하나가 두려움입니다. 아침에
눈을 뜸과 동시에 오늘 하루에 대한 두려움이 마음을 엄습합니다. 하루 종일 여러 불안과 두려움에 시달리다가
밤에 침대에 누우면서 또 내일 하루에 대한 두려움을 마음에 가득 안은채 겨우 잠이 듭니다. 오늘 말씀은
이런 두려움을 어떻게 이기고 승리할 수 있는지 보여줍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가 두려움을 이기고
승리하는 삶 살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41,42a절을 보십시오. “이에
회당장인 야이로라 하는 사람이 와서 예수의 발 아래에 엎드려 자기 집에 오시기를 간구하니 이는 자기에게 열두 살 된 외딸이 있어 죽어감이러라”
회당장은 조선시대같으면 서원의 관리와 책임을 맡은 마을 유지입니다. 그
동네에서 가장 존경받는 사람입니다. 이런 그가 예수님의 발 아래 엎드려 간구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는 그에게 12살 된 외동딸이 있었는데 그 외동딸이 죽어가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아버지에게
있어 딸은 얼마나 소중하고 사랑스러운 존재입니까! 대체로 무뚝뚝한 아들과 달리 딸은 아빠에게 사랑 표현을
아주 잘 합니다. 딸들은 아빠한테 ‘나는 크면 꼭 아빠한테
시집갈거야.’라고 종종 말합니다. 아들은 엄마한테 ‘나는 크면 꼭 엄마한테 장가갈거야.’ 그런 말 절대 안합니다. 아빠가 퇴근하여 집에 돌아오면 딸은 ‘아빠’하고 아빠 품에 안깁니다. 그리고 온갖 애교를 부리고 사랑표현을 합니다. 아들은 자기 방에서 나오지도 않습니다. 엄마가 ‘OO야, 버릇이 그게 뭐니? 아빠한테
인사해야지’ 하고 나무라면 그제서야 문을 1/5만 열고 ‘오셨어요?’ 건성으로 인사하고 다시 얼른 문을 닫습니다. 야이로도 딸을 무척 사랑했을 것입니다. 더더군다나 외동딸이니 얼마나
사랑스러웠겠습니까. 하루 일과를 마치고 집에 돌아와 애교를 부리는 딸을 보면 하루의 피로가 날아갔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딸이 어느날 심하게 아프더니 삶과 죽음의 경계에 서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딸을 잃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야이로는 눈 앞이 캄캄해졌습니다. 그는
병을 고치는 능력이 있다고 소문이 난 예수님께 와 무릎을 꿇고 제발 딸을 살려달라고 눈물로 간구했습니다.
42b-44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가실 때에 무리가 밀려들더라 이에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는 중에 아무에게도 고침을 받지 못하던 여자가 예수의 뒤로 와서 그의 옷 가에 손을 대니
혈루증이 즉시 그쳤더라”
예수님은 야이로의 간청을 받아들이셨습니다. 예수께서 야이로의 집으로
가실 때 수많은 무리들이 예수님께 밀려들었습니다. 그 수많은 무리들 중 12년을 혈루증으로 고통하던 한 여인이 있었습니다. 혈루증은 현대
의학의 관점에서 보면 ‘자궁 내막염’입니다. 이는 세균이 자궁 내로 침투하여 염증을 일으키는 병입니다. 염증이
심해지면 주위 조직에까지 염증이 퍼지게 되어 하복부에 심한 통증, 발열 현상이 나타납니다.
저도 잇몸이 약해서 치주염을 자주 앓습니다. 잇몸에 가끔 급성으로
염증이 발생하는데 한 번 염증이 생기면 온 몸이 몸살을 앓는 것처럼 아프고 열이 납니다. 아무리 급하고
중요한 일이 있어도 염증이 생기면 만사를 제치고 치과를 가는데 그러면 치과 선생님이 쇠꼬챙이같은 것으로 염증 부위를 막 긁어냅니다. 그때 누런 고름이 피와 섞여 나옵니다. 이런 치료를 받고 항생제
처방을 받아 약을 복용하면 염증 증상이 사라지고 이제 살 것 같습니다. 그러나 본문의 여인은 아직 항생제가
발견되지 않아 그런 치료를 받을 수 없었습니다. 그녀는 어떤 의사도 치료할 수 없는 심한 염증 증상을
가지고 무려 12년을 살았습니다. 12년을 고칠 수 없는
난치병을 안고 살아간다는 것은 참으로 큰 고통입니다. 오늘날 현대 의학으로도 고치기 쉽지 않은 난치병들이
있습니다. 어떤 분은 이명 현상으로 고통하는데 귀에서 늘 소리가 나는 것이 참으로 큰 고통입니다. 밤에 잠을 자야 하는데 ‘윙윙, 삐’ 하는 소리 때문에 잠을 자기 어렵습니다. 이명으로 인해 수면장애, 두통, 우울감, 피로감, 집중력 저하 현상이 나타납니다. 또 어떤 분은 학업과 취업에 대한
스트레스 성 만성 두통이나 위장 장애로 고통합니다. 위장 장애가 얼마나 힘든지, 저도 과거 한 6개월 정도 경험한 적이 있는데 밥을 먹고 소화시키는
것이 고통이요, ‘이런 고통을 안고 평생을 살아간다면 정말 억만 장자가 된다 해도, 아니 온 세상을 다 소유한다 해도 전혀 행복하지 않겠다’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본문의 여인은 난치병으로 인한 이런 고통을 무려 12년간 겪었습니다. 저자 누가는 야이로의 딸이 12살인 것과 본문의 여인이 병으로 고통한
기간이 12년인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강조하는
저자의 의도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이 두가지 사건이 인간이 스스로의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한계상황이요,
인생에게 가장 큰 고통을 주는 전형이기 때문입니다. 야이로는 12년간 자기의 삶에 가장 큰 기쁨을 주었던 것, 자기에게 있어 가장
소중한 것을 한 순간에 빼앗길 위기에 처했습니다. 이에 비해 여인은
12년간 난치병으로 인해 그 무엇을 해도 행복을 느낄 수 없는 비참한 시간을 보냈습니다. 여인은
병으로 인해 아무리 맛있는 음식을 먹어도, 아무리 멋진 곳으로 여행을 가 절경을 보아도 전혀 행복하지
않았습니다. 이에 비해 야이로는 한 순간 아버지로서 감당하기 어려운 상실의 아픔과 고통을 목전에 두고
있습니다. 그가 곧 겪게 될 고통은 인간으로서 감내하기 어려운 고통이었습니다. 자식을 먼저 보낸 부모의 고통을 어찌 말로 표현할 수 있고, 글로
다 표현할 수 있을까요?
이 한계상황 속에서 여인은 어떻게 했습니까? 여인은 예수님께 나아왔습니다. 당시 여인이 앓는 병은 구약 율법에서 부정한(ceremonially
unclean) 병에 해당되었습니다. 부정한 병에 걸린 사람을 만지는 사람도 같이 부정해졌습니다. 한 번 부정해지면 정결의식을 행하고 일정 기간 시간을 보내야 다시 정결해집니다. 정결해진 사람만 공적인 종교 행사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여인은
예수님이 자기를 만질 경우 예수님도 부정해지는 것을 잘 알았습니다. 그러므로 여인은 내가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지리라 생각했습니다. 지금 내가 처한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옷자락을 만지는 것밖에 없으므로
옷자락을 만지면 내 병이 나으리라는 믿음을 가졌습니다. 그녀는 이 믿음을 갖고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졌습니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당시 유대인의 옷 끝자리에 매다는 장식용 술을 만졌습니다. 그때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녀의 병이 나았습니다. 그녀는 자기의 병이 나은 것을 알았습니다. 염증 증상으로 고통하는
사람은 그 나은 것을 즉각 알 수 있습니다. 만성 통증이 사라지고 열도 사라지고 기분이 날아갈 것처럼
상쾌해집니다. 여인은 무려 12년만에 그러한 상쾌한 기분을
느꼈습니다. 여인의 마음은 천국이 되었고 그녀의 머리카락은 천상의 바람에 아름답게 휘날렸습니다.
45-48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게 손을 댄 자가 누구냐 하시니 다 아니라 할 때에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무리가 밀려들어 미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게 손을 댄 자가
있도다 이는 내게서 능력이 나간 줄 앎이로다 하신대 여자가 스스로 숨기지 못할 줄 알고 떨며 나아와 엎드리어 그 손 댄 이유와 곧 나은 것을 모든
사람 앞에서 말하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하시더라”
여인이 나음받는 순간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내게 손을 댄 자가
누구냐?” 예수님이 갑자기 정색을 하며 말씀하시니 예수님을 밀치던 사람들이 다 나는 아니라고 발뺌했습니다. 베드로는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밀고 있는데 내게 손을 댄 자가 누구냐 하시니 이해할 수 없어 무슨 말씀이신지
다시 여쭈었습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내게 손을 댄 자가
있다. 방금 병을 고치는 능력이 나에게서 나갔다.” 말씀하셨습니다. 이 상황을 본 여인은 더 이상 숨길 수 없음을 알고 예수님께 자기에게 일어난 일을 예수님과 사람들 앞에서 소상하게
아뢰었습니다. 여인의 말을 들은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49, 50절을 보십시오. “아직
말씀하실 때에 회당장의 집에서 사람이 와서 말하되 당신의 딸이 죽었나이다 선생님을 더 괴롭게 하지 마소서 하거늘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그리하면 딸이 구원을 얻으리라 하시고”
예수님이 여인과 아직 대화를 나누고 계실 때였습니다. 그때 회당장의
집에서 사람이 와서 야이로에게 말했습니다. “당신의 딸이 죽었습니다.
선생님을 더 괴롭게 하지 마십시오.” 이 말을 들은 예수님은 야이로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그리하면 딸이 구원을 얻으리라”
현재 야이로가 두려워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의심할 여지 없이 그것은
딸의 죽음입니다. 가장 소중한 것, 나의 생명보다 더 소중한
것을 영원히 잃어버리는 상실의 아픔입니다. 딸의 죽음으로 인해 야이로가 겪게 될 아픔과 고통은 여인이
지난 12년간 날마다 받아온 지속적인 고통을 마치 한 순간에 한꺼번에 당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는 딸의 죽음으로 자신의 삶에서 가장 소중한 것을 영원히 잃어버리게 되리라는 두려움을 가졌습니다. 가장 소중한 것을 잃어버린 것은 자신의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린 것과 같았습니다. 그의 삶에 이제 남은 것은 죽는 날까지 상실의 아픔과 고통을 느끼도록 만들어주는 육체의 빈껍데기뿐이었습니다.
이런 그에게 예수님은 말씀을 주셨습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믿음이란 무엇입니까? 사실 예수님이 여인과 대화하며
시간을 지체하신 까닭은 야이로에게 믿음이 무엇인지 가르쳐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여인은 ‘내가 예수님의 옷자락에만 손을 대어도 내 병이 나으리라’는 믿음을
가졌습니다. 그 믿음으로 예수님의 옷자락을 ‘터치’했습니다. 이것이 그 유명한 ‘믿음의
터치(touch by faith)’입니다. 여인이 믿음으로
예수님의 옷자락을 ‘터치’했을 때 인간의 힘으로 고칠 수
없었던 그녀의 병이 나았습니다. 병을 고치는 예수님의 능력이 나타났습니다. 그렇습니다. 믿음은 예수님의 능력이 내 삶에 나타나게 만드는 놀라운 ‘비밀’입니다.
히브리서 11장은 ‘믿음장’이라는 별칭으로 유명합니다. 히브리서 11장을 읽어보면 구약 시대 수많은 사람들이 어떻게 믿음으로 삶의 고난과 역경을 이기고 승리했는지, 더 나아가 믿음으로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을 체험했는지 기록하고 있습니다.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비록 아벨은 죽었지만 여전히 그의 믿음을 통해
우리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믿음으로 에녹은 죽지 않고 하늘로 옮겨졌습니다. 믿음으로 노아는 아직 보지 못하는 일에 대해 하나님의 경고를 듣고 방주를 준비했습니다. 이를 통해 세상이 잘못되어가고 있음을 사람들에게 알리고 그의 가족을 구원했습니다.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가라고 지시한 땅으로 가서 외국인과 나그네처럼 살았습니다. 믿음으로 사라는 임신할 수 없는 나이에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녀의
믿음으로 인해 죽은 사람과 다름없던 한 사람으로부터 하늘의 별과 바닷가의 모래알같이 셀 수 없는 많은 후손이 나왔습니다. 믿음으로 모세는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받기를 거절했습니다. 믿음으로
그는 잠시 동안 죄의 낙을 즐기는 것보다 하나님의 백성들과 함께 고난받는 것을 택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믿음으로 홍해 바다를 육지처럼 건넜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여리고성 주변을 믿음으로 칠일 동안
돌았을 때 한순간에 성이 무너졌습니다. 기드온은 믿음으로 단 300명의
용사를 데리고 메뚜기떼처럼 많은 적군과 맞서 싸워 승리를 체험했습니다. 믿음으로 삼손은 홀홀단신으로
수많은 블레셋 적들과 맞서 싸웠습니다. 이들은 믿음으로 나라를 이기기도 하고 의를 행하기도 하며 하나님의
약속을 받기도 하고 또 사자의 입을 막기도 하며 불의 세력을 멸하기도 하고 칼날을 피하기도 하고 연약한 가운데 강하게 되기도 하고 전쟁에 용감하게
되어 적들을 무찔렀습니다.
히브리서 12장을 보면 예수님은 그 수많은 믿음의 용사들 중에서도
최고의 믿음을 가지셨습니다. 예수님도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불같은 십자가의 고난과 시련을 이기고 승리하셨습니다. 이로써 예수님은 믿음의 최고 우두머리, 믿음의 끝판왕, 믿음의 챔피언이 되셨습니다.
저는 지난 2주간에 걸쳐 히브리서
10장 하반부터 13장 전반부까지 100회 정도
필사했습니다. 필사를 한 이유는 오늘 본문의 메시지를 준비하기 전 먼저 믿음이 무엇인지 깊이 묵상해
보기 원했기 때문이었습니다. 필사를 하면서 저는 나름대로 놀라운 체험을 했습니다. 그것은 제 마음에 새롭게 믿음과 비전이 생기는 것이었습니다. 꿈과
비전이 가득한 젊은 청년이 된 느낌이었습니다.
그러면 다시 본문에서 예수님이 야이로에게 갖도록 도우신 믿음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죽음보다 더 크고 강한 분이 계시다는 사실을 믿는 것입니다. 또 그 분이 나를 사랑하시며 내 편이 되어주신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두려움의 정의를 사전을 찾아보니까 여러 정의가 있는데 종합해서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았습니다. “두려움은 내가 통제할 수 없으며, 그러면서
나를 대적하는 어떤 힘이나 세력, 혹은 존재에 대해 느끼는 기분과 감정이다.”
현대인들은 과학과 의학 등 지식과 학문의 힘으로 두려움을 떨쳐버리고 인간 승리를 이루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과학 기술이 발전하고 의학 지식이 발전해도 인간은 여전히 두려움을 떨쳐버릴 수 없습니다. 예수님 시대에 인류는 여러 질병으로 고통했습니다. 자식을 낳아도
병이나 사고로 많이 죽으니까 어린아이는 사람으로 취급하지 않았습니다. 어린아이를 사람으로 취급했다가
죽으면 부모의 마음이 너무 힘드니까 어린아이는 아직 사람이 아니다,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만 12살이 넘어 성년식을 치르면 그제서야 비로서 사람으로 인정했습니다. 현대 사회는 예수님 시대에 비하면 여러 질병으로 자유하게 되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녀를 단 한 명만 나아도 문제없이 잘 성장할 것으로 기대하고 딱 한 명만 낳습니다. 그러나
과학 기술이 진보한만큼 더 큰 두려움이 생겼습니다. 1983년 9월 26일 자정 무렵 소련 조기 경보 시스템에 사이렌이 울리고 전광판에 빨간불이 켜졌습니다. 미국 몬태나에서 핵 미사일이 발사되었다는 신호였습니다. 당시 담당자였던
페트로프는 원래대로라면 경보 신호에 의거 12,000기의 소련 핵 미사일을 미국 본토에 발사해야 했습니다. 그 결과 예상되는 사망자 수는 10억이었습니다. 페트로프는 고민하다가 경보 시스템이 오류를 일으켰을 것으로 믿고 발사 버튼을 누르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그는 소련 당국에 의해 징계를 받고 조기 예편한 후 가난한 노후를 보내야 했습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미국과 독일 시민들이 돈을 모아 그에게 전달했습니다. 이처럼
과학 기술의 진보로 인류는 한 순간에 재앙을 맞이할 수 있다는 새로운 두려움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런가 하면 개인적인 두려움들이 있습니다. 대학생들은 졸업 후 취업을
할 수 있을지 두려워합니다. 직장인들은 언제 직장에서 해고당하지 않을까 두려워합니다. 미혼자들은 결혼을 할 수 있을지 두려워하고 기혼자들은 배우자가 바람을 피우지 않을까, 가정이 깨지지 않을까 두려워합니다. 매일 끝없이 일어나는 각종 사건사고를
다루는 신문 기사를 보면 그런 일이 나에게도 일어나지 않을까 두렵습니다. 전에도 이야기한 바가 있지만
보이스 피싱은 사람들 마음 깊은 곳에 감추어진 두려움을 이용해 사기를 치는 범죄입니다. 취업을 앞둔
젊은이들에게는 당신의 계좌가 범죄조직에 도용되어 당신이 전과자가 될 수 있다, 그러면 앞으로 영영 취업을
할 수 없다는 두려움을 심어 속입니다. 또 사랑하는 자녀에게 혹 무슨 일이 일어나지 않을까 늘 마음
한 구석에 염려와 두려움이 있는 가정 주부에게 그 일이 지금 정말로 일어났다라고 거짓말하여 속입니다. 노후
염려가 있으신 분에게는 지금 노후자금이 전부 털릴 위기에 처했다라고 두려움을 심어 속입니다. 전화기
너머 들려오는 보이스 피싱의 음성이 내 내면 깊이 감추어진 두려움을 터치하는 순간 이성은 마비되고 그의 모든 말이 다 사실로 믿어집니다.
두려움이 무서운 것은 두려움이 두려워하는 일이 정말로 일어나도록 만드는 힘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남편의 외도로 가정이 깨어지지 않을까 두려워하는 주부는 때마다 남편을 의심하고 바로 그 의심 때문에
가정이 깨어지게 됩니다.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이 실패로 끝날 것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자기가 하는
일에 진심과 열정을 쏟아붓지 못하게 됩니다. 실패할 것이 두렵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 두려움 때문에 정말로 실패합니다. 혹시 여러분 가운데
늘 해야 하는 일을 마지막 순간까지 미루는 습관이 있는 분이 있습니까? 그것은 절대로 성격 탓이 아닙니다. 그것은 여러분의 마음 안에 두려움이 있기 때문입니다. 늘 해야 할
일을 마지막 순간까지 미루는 사람은 내가 무엇을 두려워하는지 그 뿌리를 찾아야 합니다. 잡초를 제거해도
제거해도 다시 자라나는 것처럼 두려움은 제거해도, 제거해도 다시 잡초처럼 살아납니다. 그러므로 뿌리를 찾아야 합니다.
두려움의 가장 근본 뿌리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죽음입니다. 죽음은 절대적인 한계상황입니다. 죽음 앞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죽음은 나에게 가장 소중한 것을 빼앗아갑니다. 가장
소중한 것을 빼앗긴 후 살아가는 날들은 죽음보다 더한 고통뿐입니다.
이 두려움을 이기고 승리할 수 있는 비밀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믿음’입니다. 예수님은
두려워하는 야이로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무엇을 믿어야 합니까? 죽음보다 강한 예수님이 계시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이 예수님이 나를 사랑하시고 나의 편이 되어주신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우리에게
두려움을 심는 사건이 재난, 죽음은 결코 내 편이 아닙니다. 내
힘으로 통제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죽음보다 더 강합니다. 이
예수님이 내 편이 되어주십니다. 이것을 믿을 때 우리는 두려움을 이기고 승리하는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한 가지 더 생각해 볼 것은 예수님은 야이로에게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명령형으로 말씀하셨다는 것입니다. 명령형으로
말씀하셨다는 것은 믿음은 생각이나 감정의 문제가 아니라 결단의 문제라는 사실입니다. 믿음은 가만히 앉아서
깊이 생각하고 명상해서 얻는 것이 아닙니다. 혹은 믿음을 조장하는 어떤 음악을 들으며 분위기가 고조되어
신뢰의 감정을 갖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주님의 말씀을 들은 후 그 말씀에 내가 결단을 내리는 것입니다. (Faith is not a matter of emotion, but a matter of decision.)
오늘 이 시간 사랑의 주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말씀하십니다. “OO야,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이 주님의 말씀에 저희 각자가 이제
후로는 상황을 두려워하지 않고, 내 내면에서 울려퍼지는 두려움의 음성을 듣지 않고, 주님의 말씀을 신뢰하며 주님을 믿고자 하는 믿음의 결단을 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51-56절을 보십시오. “그
집에 이르러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와 아이의 부모 외에는 함께 들어가기를 허락하지 아니하시니라 모든 사람이 아이를 위하여 울며 통곡하매 예수께서
이르시되 울지 말라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하시니 그들이 그 죽은 것을 아는 고로 비웃더라 예수께서 아이의 손을 잡고 불러 이르시되 아이야 일어나라
하시니 그 영이 돌아와 아이가 곧 일어나거늘 예수께서 먹을 것을 주라 명하시니 그 부모가 놀라는지라 예수께서 경고하사 이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 하시니라”
예수님은 야이로의 집에 이르렀습니다. 제자들 중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 또 아이의 부모만 데리고 죽은 아이의 방 안으로 들어가셨습니다. 사람들이
울 때 예수님은 “울지 말라 아이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말씀하셨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비웃었습니다. 예수님은 아이의 손을
잡고 명령형으로 말씀하셨습니다. “아이야 일어나라” 그때
아이의 영이 돌아와 아이가 일어났습니다. 예수님은 아이에게 먹을 주라 명하셨습니다. 아이의 부모는 너무나 놀랐습니다. 야이로는 이 체험을 통해 죽음보다
강한 예수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아직은 때가 아니니 이 사건을 사람들에게 말하지 말라 명하셨습니다.
흔히 기독교는 믿음의 종교라고 말합니다. 그 말이 참 옳습니다. 기독교는 믿음에서 시작하여 믿음으로 끝납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믿음을 통해 만날 수 있습니다. 무한하신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의 믿음을 통해 나타납니다. 우리의 삶을 무기력하게 하고 실패로 끝나게 하는 것은 두려움입니다. 이
두려움을 몰아낼 수 있는 유일한 힘은 믿음입니다. 오늘 이 시간 우리가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믿음으로
반응하기를 기도합니다. 믿음으로 모든 두려움을 몰아내고 승리하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