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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2022년 누가복음 14강 `오천 명을 먹이신 예수님`(누가복음 9:1-17)2022-06-13 0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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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누가복음 제 14

 

오천 명을 먹이신 예수님

 

말씀 / 누가복음 9:1-17

요절 / 누가복음 9:15,16


"예수께서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사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어 무리 앞에 놓게 하시니 먹고 다 배불렀더라 그 남은 조각을 열두 바구니를 거두니라"

 

신약성경을 보면 공관복음 즉, 마태, 마가, 누가복음에 모두 기록된 사건들이 많이 있습니다. 나병 환자를 고치신 사건, 중풍병자를 고치신 일, 풍랑을 잔잔케 하신 일, 혈루증 여인을 고치시고 야이로의 딸을 살리신 일, 거라사 광인을 고치신 일 등이 공관복음에 실려 있습니다. 그러나 요한복음에는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 살펴보게 될 예수님의 오병이어 사건은 사복음서에 모두 기록된 유일한 기적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이는 1차적으로는 예수님의 행하신 기적의 규모가 너무 커서 제자들은 그 사건을 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남자만도 오천 명 되는 사람들이 벳세다 푸른 언덕에 오십 명씩 떼를 지어 않아서 떡과 물고기를 배불리 먹는 모습은 참으로 장관이었을 것입니다. 무엇보다 하나님께서는 이 사건을 통해 모든 사람에게 들려주고자 하시는 중요한 메시지가 있으셨기 때문이었습니다. 복음서를 읽을 때마다 만나게 되는 이 사건을 통해 하나님은 우리에게 무엇을 알려주기 원하셨을까요? 성령님께서 우리 마음의 문을 열어주시고 이를 깨닫고 영접하게 도우시길 기도합니다.

 

1절은 "예수께서 열두 제자를 불러 모으사 모든 귀신을 제어하며 병을 고치는 능력과 권위를 주시고" 라고 되어 있습니다. 지난 6장에서 우리는 예수님이 열두 사도를 세우신 것을 보았습니다. 그들을 예수님의 부활 승천 이후의 복음 전파의 계승자로 삼고자 하신 것입니다. 6-8장에서는 그들을 데리고 다니셨지만 예수님만 말씀을 전하시고 병자들을 고치셨습니다. 이제 9장부터는 예수님은 그들을 실제 사역에 투입하십니다. 그들이 아직 부족한 점들이 있었지만, 9:53절에서와 같이 예수님이 최후의 사역을 감당하시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기 전, 그들이 실제적인 사역을 해봄으로써 믿음이 자라도록 하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들을 전도여행 보내시되 무엇을 주셨습니까? "모든 귀신을 제어하며 병을 고치는 능력과 권위를" 주셨습니다. 돈이나 사도증명서 같은 것을 주지 않으셨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인 능력(Spiritual Power)과 예수님의 이름으로 행할 수 있는 권위(Authority)를 주셨습니다. 이는 복음역사는 눈에 보이는 사람과의 싸움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영적 세력과의 싸움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역사를 효과적인 섬기기 위해서는 주님이 주시는 이러한 영적 능력과 예수님의 권위를 덧입어야겠습니다.

 

2절을 보면 제자들이 나아가 해야 할 일은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며 앓는 자를 고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고 병든 자를 고치는 것이 주요 사명이라는 것은 6절과 11절에서도 반복하여 나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것임을 압니다. 예수님이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처음 전하신 내용이 하나님의 나라였습니다. (4:17) 또한 부활하신 후 사십일 동안 지상에 계시면서 하신 일도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신 것이었습니다. (1:3) 우리들이 전해야 할 메시지도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그러나 2, 6, 11절을 보면, 병든 자를 고치는 것도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는 것과 대등 접속사로 연결된 말씀으로 동일하게 중요함을 알 수 있습니다. 병 고치는 것이 하나님의 나라를 전하기 위한 예비적인 섬김 또는 보조적인 도움이 아니라 그 자체가 중요한 사명임을 말해 줍니다. 영적, 육적으로 병든 사람에게는 그것이 정말 심각한 문제입니다. 우리 전도자들은 그들의 실제적인 어려움, 영육간의 병든 문제, 고통 받는 문제를 잘 헤아리고 낫도록 도와주어야 합니다. 이런 점에서 복음역사는 한 사람 한 사람의 영육간의 문제를 잘 케어해주는 전인적인 사역임을 알 수 있습니다. 각 사람을 예수님 안에서 건강하게 세워나갈 때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앞에서 말씀드렸듯이, 본문 9장부터 예수님은 제자들이 아직 부족하지만 전도훈련을 보내심으로 실제적인 사역을 감당하게 하십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보내시며 무슨 방향을 주십니까? 첫째, 전도여행을 위해 아무 것도 가지고 가지 말라하십니다. 3절입니다. "이르시되 여행을 위하여 아무 것도 가지지 말라 지팡이나 배낭이나 양식이나 돈이나 두 벌 옷을 가지지 말며." 여행을 위해 이런 것들을 챙겨가야 될 것 같은데 도리어 가지고 가지 말라고 하십니다. 있는 것도 내려놓고 가라고 하십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먼저는, 그런 실제적인 필요를 하나님이 공급하실 것을 믿도록 훈련하신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이는 제자들의 믿음을 훈련하시는 것입니다. 어떤 분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당신은 하나님이 먹을 것 입을 것을 공급하실 것을 믿습니까? 그러면 당신은 선교사로 나갈 준비가 다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선교는 실제적인 삶에서 하나님이 먹을 것과 입을 것을 공급하신다는 것을 믿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 모임의 평신도 선교사님들은 이런 믿음으로 선교지에 나아가십니다. 요즘에는 그래도 일정한 직업을 얻고 나아가거나, 유학으로 가는 경우가 많지만 예전에는 오직 믿음으로 나아갔습니다. 외국에 나가는 길만 열리면 어찌하든 선교사로 나아갔습니다. 저는 1980년대 후반에 중국 문이 열리면서 그곳에 선교사로 나아가고자 했습니다. 선교후보로 지원하고 인생소감도 제출했습니다. 중국에 가면 공장에 취직은 될 거니까 일단 가서 부딪쳐보고자 했습니다. 결단해 놓고 보니, 제 어린 자녀들이 중국의 열악한 환경에서 살다가 영양실조로 죽을 것 같은 두려움에 시달리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때 천안문 사태가 일어나 중국에 가는 길이 막혔습니다. 여하튼 당시에 많은 동역자들이 믿음으로 여러 선교지로 나아갔습니다. 제가 아는 한 선교사님은 돈이 없어서 마트에서 제일 싼 감자를 사다가 일주일간 감자만 삶아 먹은 경우도 있었습니다. 어떤 선교사님은 일시적이나마 노숙자가 되어 길거리에서 잠을 잔 적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럴 때 정말 하나님께 기도하게 되고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것을 체험한 분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믿음으로 먹을 것을 해결하는 사람은, 동일한 믿음으로 불가능한 일에 도전합니다. 현지 제자양성에 믿음으로 도전합니다. 그래서 이러한 자비량 선교를 Faith mission (믿음 선교)라고 부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좀 고생스럽더라도 이러한 살아있는 믿음을 배우고 그 믿음으로 전도여행을 감당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다른 이유는, 제자들로 하여금 현실적인 문제에 너무 구애받지 않도록 하심입니다. 생활의 유익과 편리를 구하면 끝이 없습니다. 이런 경우가 있었습니다. 한 번은 선교사들이 아프리카 어느 지역에 사는 사람들에게 신발을 공급해 주었습니다. 그들은 너무나 감사해하였습니다. 시간이 지나자 그들에게 자전거를 선물해 주었습니다. 그들은 너무나 감사해하였습니다. 그런데 자전거에 익숙해진 그들은 신발을 주어도 그다지 감사하지 않았습니다. 나중에는 오토바이를 원했습니다. 이와 같이 사람들의 편리에 대한 욕구는 끝이 없습니다. 예수님의 제자의 삶은 생활의 유익과 편리를 추구하는 삶이 아니요, 다소 불편하더라도 사명을 앞세우는 삶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생활의 편리함을 추구하기보다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의 자세를 갖도록 하신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주신 방향으로 둘째는 한 집에 유하라는 것입니다. 4절입니다. "어느 집에 들어가든지 거기서 머물다가 거기서 떠나라." 이는 물론 아무 집에나 들어가서 머물라는 말은 아닙니다. 말씀을 받아들이는 사람에게 믿음으로 신세를 지는 것입니다. (10:11) 그러나 한 번 숙소를 정했으면 그 마을을 떠날 때까지 그곳에 머물러 있으라 하십니다. 불편한 점이나 만족스럽지 못한 대접을 받는다고 해서 더 좋은 곳을 찾아 여기저기를 전전해서는 안 됩니다. 한 집에 머물면 그 집 사람들과 인격적인 사랑의 관계성을 맺을 수 있습니다. 그들을 하나님의 역사의 주인들로 세워가며 지속적인 복음역사를 섬길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 16장을 보면 사도 바울은 루디아의 집에 머물면서 가정교회 사역을 하였습니다.

 

셋째는 거절당해도 기죽지 말라는 것입니다. 5절입니다. "누구든지 너희를 영접하지 아니하거든 그 성에서 떠날 때에 너희 발에서 먼지를 떨어 버려 그들에게 증거를 삼으라 하시니." 사람들이 제자들을 영접하지 않을 때 낙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들을 영접하지 않는 것은 그들을 보내신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는 것이요, 또한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신 하나님 아버지를 영접하지 않는 것입니다. (10:40) 예수님은 제자들이 그 성에서 떠날 때 발에서 먼지를 떨어 버려 증거를 삼으라 하십니다. 과거에 유대인들은 이방 지역을 지날 때 그 마을을 통과한 뒤 발의 먼지를 떨어 버리고 이스라엘 땅에 들어갔습니다. 이는 그들이 부정한 것을 자신들의 성스러운 땅으로 묻혀 들어오지 않으려는 의식적 행동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영접하지 않는 성에 대해 그와 같이 하라고 하심으로 선민과 이방인의 진정한 구분은 하나님의 말씀을 영접하느냐의 여부에 달려있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하나님 나라의 메시지를 거부한 곳에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리라는 사실을 공적으로 선언하는 것입니다. 이를 통해 복음을 거절한 그들에게 책임이 있음을 분명하게 하도록 하심으로 제자들로 하여금 낙담하지 않도록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이러한 방향에 순종하여 나가 각 마을에 두루 다니며 곳곳에 복음을 전하며 병을 고쳤습니다. (6) 그들은 하나님의 공급하심과 도우심을 체험하며 성공적인 전도여행을 할 수 있었습니다.

 

열두 제자들이 각처에서 복음을 전하자 그 소식이 헤롯 궁에까지 전해졌습니다. 7,8절입니다. "분봉왕 헤롯이 이 모든 일을 듣고 심히 당황하여 하니 이는 어떤 사람은 요한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다고도 하며 어떤 사람은 엘리야가 나타났다고도 하며 어떤 사람은 옛 선지자 한 사람이 다시 살아났다고도 함이라." 마가복음 6:7절을 보면 예수님은 열두 제자를 둘 씩 보내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여섯 팀이 움직였을 것입니다. 그들의 전도여행은 전국에 큰 임팩트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사역을 통해 베드로의 이름이나 요한의 이름이 드러난 것이 아니었습니다. 열두 제자 중 그 누구의 이름도 드러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이 드러났습니다. 이는 제자들이 오직 예수님의 권위로 일하면서 예수님의 이름만을 드러냈기 때문이었습니다. 주님의 일을 하는 우리도 우리가 섬기는 일을 통해 주님이 드러나야 합니다. 그것이 주님을 영화롭게 하는 일입니다.

 

소문을 들은 어떤 사람은 요한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다고도 하며 어떤 사람은 엘리야가 나타났다고도 하며 어떤 사람은 옛 선지자 한 사람이 다시 살아났다고도 하였습니다. (7,8) 본서의 다음 본문을 보면, "무리가 나를 누구라 하느냐"는 예수님의 질문에 제자들은 여기에 나오는 사람들의 반응 그대로 대답합니다. 사도들이 행한 일에 대한 소문을 들은 분봉왕 헤롯은 심히 당황하였습니다. 이는 그가 의인 세례 요한을 목 베어 죽였었기 때문입니다. 그의 마음에 죄의식이 늘 자리 잡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죄를 지은 심령에는 평화가 없습니다. "당신이 죄를 지으면 온 세상 구석구석이 당신의 죄를 비추는 거울이 된다"는 말이 있습니다. 죄 짓지 않고 사는 것이 큰 복입니다.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는 우리가 매일 아침 깊은 감사함으로 기도할 내용입니다.

 

10절을 보면 사도들이 전도여행을 마치고 돌아왔습니다. 그들이 같은 때에 돌아와 예수님께 보고한 것으로 보아 사역의 기간과 다시 모이는 장소는 미리 약속되어 있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도들은 다양한 체험을 했을 것입니다. 백성들이 회개하고 죄를 자백하는 일, 앉은뱅이가 일어나고, 병든 자가 고침을 받은 일 등 사도들은 각각 열을 올리며 전도여행 보고를 하였을 것입니다. 그들은 아무 것도 소유하지 않았으나 주리지도 않고 헐벗지도 않았습니다. 보고를 다 들으신 예수님은 제자들을 데리고 따로 벳새다라 하는 고을로 떠나 가셨습니다. 벳새다는 갈릴리 호수 북쪽, 요단강 동편에 있는 작은 마을입니다. 이곳은 베드로, 빌립, 안드레의 고향이기도 합니다. (1:44). 예수님께서 이곳으로 제자들을 따로 데리고 가신 것은 선교여행에서 돌아온 제자들에게 쉼이 필요한 것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또한 제자들과 사귐을 가지면서 적절한 휴식을 취하고자 하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제자들과 벳새다에 도착했을 때 무리가 이를 알고 따라왔습니다. 무리들은 제자들의 피곤함을 알아주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사정이 언제나 더 급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과 단란한 시간을 가지게 되어 좋아했는데, 무리를 보는 순간에 모든 기대가 사라져 버렸습니다. 예수님이 무리에게 "오늘은 제자수양회 하는 날이니 내일 다시 오시오" 하고 보내시길 바랐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찾아온 무리를 영접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지치고 피곤한 양무리들을 거절하시는 법이 없습니다. 언제나 불쌍히 여기시고 따뜻한 사랑으로 영접해 주시는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피곤함에 쉽게 매몰되어 버리는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언제라도 도움이 필요한 양들을 영접하여 섬기는 심정 있는 목자들로 세워주시길 기도합니다.

 

예수님은 무리에게 하나님 나라의 일을 이야기하시며 병든 자들을 고쳐 주셨습니다. 11절에서 '이야기 하시며' '고치시더라'는 동사가 모두 미완료형으로 되어 있는데, 이는 예수님의 가르침과 치유가 상당히 오랫동안 지속되었음을 말해 줍니다. 예수님은 상한 목자의 심정으로 오랜 시간동안 그들에게 진리를 가르쳐주시고 일일이 고쳐 주셨습니다. 온 힘을 다해서 무리를 섬기셨습니다. 날이 저물어 가는 줄도 모르고 계속하셨습니다. 이때 열두 사도가 예수님께 어떤 제안을 했습니까? 12절을 보십시오. "날이 저물어 가매 열두 사도가 나아와 여짜오되 무리를 보내어 두루 마을과 촌으로 가서 유하며 먹을 것을 얻게 하소서 우리가 있는 여기는 빈 들이니이다." 열두 사도들은 날이 저물어 간다고 했습니다. 이스라엘은 산이 드물기 때문에 지형상 해가 지면 즉시 어두워집니다. 그렇게 되면 그 많은 무리들이 어디에서 유숙하겠습니까? 또 먹는 문제는 어떻게 해결할 것입니까? 그래서 무리를 보내자고 했습니다. 무리들이 마을과 촌으로 가서 유하며, 스스로 먹을 것을 얻게 하자고 제안했습니다. 제자들은 합리적인 사고를 하며 상황을 잘 파악하는 센스가 있었습니다. 무리들이 당할 곤란을 미리 헤아려 섬기고자 하는 따뜻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그들에게 예수님은 무어라 하십니까? 13a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하시니."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의 뜻이 무엇일까요? 이는 첫째로, 그들로 하여금 무리들에 대한 책임감을 갖도록 훈련하신 것입니다. 제자는 목자로서 먹을 것을 주는 일, 곧 생명의 양식을 공급하는 일을 해야 합니다. 현재 먹일 수 있는가 없는가 하는 형편은 책임감과 상관이 없습니다. 상황이 어려워도 목자에게 먹일 책임은 그대로 존재합니다. 제자들은 무리들을 보내어 그 책임감을 슬그머니 벗어버리고자 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그들에게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고 명령하신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은 그들로 하여금 무리들에 대한 목자의 심정을 갖도록 도전하신 것입니다. 책임감만으로 끝까지 도울 수 없습니다. 불쌍히 여기는 마음 곧, 심정이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한 사람 한 사람을 귀히 여기며 사랑하십니다. 이 예수님을 깊이 영접할 때 우리도 한 영혼에 대한 불타는 목자의 심정을 가질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는 말씀은 예수님께 대한 믿음을 갖도록 도전하신 것입니다. 제자들은 그 말을 듣고 어리둥절하였을 것입니다. "지금,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인가?" 하며 혹시 주위에 다른 사람들이 또 있는가 두리번거렸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진정으로 자기들에게 하신 말씀인 것을 알고는 말합니다. "우리에게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 밖에 없으니 이 모든 사람을 위하여 먹을 것을 사지 아니하고서는 할 수 없사옵나이다" (13b) 예수님은 제자들을 전도여행을 보내시면서도 아무 것도 갖고 가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들은 아무 것도 갖고 가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믿었을 때 하나님이 그들의 모든 필요를 채우셨습니다. 그들은 그러한 하나님께 대해 믿음을 가져야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먹일 수 없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상황에서 믿음을 배우도록 제자들에게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들은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여 한 아이가 갖고 있던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들고 나오기는 했습니다. (6:9) 그러나 거기까지였습니다. 그것으로 누구 코에 붙이겠는가? 빨리 무리들을 흩어 보내자라는 생각뿐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그들에게 무리를 떼를 지어 한 오십 명씩 앉히라 하셨습니다. 오천 명의 무리를 오십 명 정도씩 앉히면 100개의 모임이 됩니다. 들판에 오십 명씩 100개의 그룹을 만들어야 되었는데 그 많은 무리들을 질서 있게 앉히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예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무리를 앉혔습니다.

 

무리를 다 앉히자 예수님은 무엇을 하셨습니까? 16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사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어 무리 앞에 놓게 하시니." 여기서 중요한 단어는 "예수께서"입니다. 제자들이 먹이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먹이십니다. 예수님은 처음부터 자신이 무리를 먹이고자 마음을 잡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가지고 나온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축사하셨습니다. '축사하시고'라는 말은 '축복하다', '감사하다'로도 번역되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신 것은 하나님의 이적적인 능력을 요청한 것이 아닙니다. 통상적인 식사 감사 기도를 드리신 것입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나누어 주시며 무리 앞에 갖다 놓게 하셨습니다. 떡과 물고기는 예수님의 손에서 제자들을 통해 무리에게 전달되었습니다. 이러한 전달 과정에서 이 기적적인 일이 어떻게 일어났는지에 대한 언급은 전혀 없습니다. 단지 '주어'(에디두)라는 미완료 동사에서, 예수님의 손에서 떡과 물고기가 끝없이 떼어져 나가는 놀라운 일이 일어나고 있음을 말씀하고 있을 뿐입니다.

 

, 상상해 보십시오. 예수님의 손에 오병이어가 들려져 있습니다. 예수님은 한 손으로 그것을 떼서 제자들에게 주십니다. 제자들은 그것을 받아 전달합니다. 전달하고 또 전달합니다. 기적이 일어나는 장소는 예수님의 손입니다. 그 손에서 샘물이 솟아나듯이, 떼어주면 떡과 물고기가 생기고 떼어주면 또 생겼습니다. 남자만도 오천 명이 되는 무리, 여자와 아이들을 포함하여 족히 2만 명은 되는 큰 무리가 모두 먹고 다 배불렀습니다. 그곳에 있던 사람들 가운데 배불리 먹지 못한 자는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러고도 열 두 광주리가 남았습니다. 그 많은 사람들이 푸른 잔디밭에 떼를 지어 앉아 있는 엄청난 광경을 상상해 보십시오! 그리고 예수님의 손에서 끊임없이 나오는 떡과 물고기! 이는 성경 기자들이 결코 잊지 못할 사건이었습니다.

 

또한 여기에는 우리에게 주시는 중요한 메시지가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물고기와 떡을 나누어 주시는 장면을 다시 한 번 보십시오. 16절에서 주목해야 할 몇 개의 단어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행동을 나타내는 동사들입니다. 예수님은 떡과 물고기를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주셨습니다.' 누가복음 24장에 보면 예수님이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와 한 마을에서 유숙하시며 음식을 나누십니다. 24:30,31절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들과 함께 음식 잡수실 때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그들에게 주시니 그들의 눈이 밝아져 그인 줄 알아 보더니 예수는 그들에게 보이지 아니하시는지라." 예수님이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그들에게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영을 나누어주신 것과 같습니다. 이에 성령의 역사로 그들의 눈이 밝아져 예수님이 누구신 줄 알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잡히시던 바로 전날 밤에 제자들과 함께 성만찬을 하셨습니다. 고전 11:23,24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전한 것은 주께 받은 것이니 곧 주 예수께서 잡히시던 밤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이르시되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예수님이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그들에게 '주셨습니다.' 그런데 떡을 주시면서 그 떡이 바로 예수님의 몸이라고 하셨습니다. 또한 식후에 잔을 가지시고 제자들에게 나누어 주시며 말씀하셨습니다.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 (고전11:25) 잔이 예수님의 피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오병이어 사건을 통해 우리에게 주시는 중요한 메시지는 예수님이 친히 인생들을 먹이신다는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이 먹이시는 참된 양식은 바로 예수님 자신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가 먹을 떡이요 마실 음료이십니다. 그의 몸과 피가 우리를 배부르게 하고 참으로 만족하게 합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주시기 위해 자신의 몸을 보리떡 같이 십자가에서 깨뜨리십니다. 그 부서진 몸으로 무리를 먹이십니다. 예수님이 주시는 참 떡, 곧 그의 몸을 먹을 때 우리는 참 만족을 누립니다. 생명을 얻습니다. (6:35,48) 실상 구약에 나오는 만나를 내려 주신 분도 예수님이요, 또한 만나가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참 만족을 주시는 생명의 떡이요 음료입니다. 우리는 이 예수님을 날마다 먹고 마셔야 합니다. 우리는 음식을 먹을 때 즐겁습니다. 맛을 느낍니다. 인상 쓰며 먹는 사람은 없습니다. 음식을 즐거워하며 먹고, 먹음으로 즐겁습니다. 음식은 우리 몸 안에 들어가 힘을 쓰게 하는 에너지가 되고 몸을 건강하게 유지하는 영양분이 됩니다. 이와 같이 우리가 예수님을 먹는다는 것은 예수님을 마음으로 즐거워하여 누리며, 예수님으로 인해 영적인 힘과 영양분을 충만히 얻는 것을 말합니다.

 

신자의 삶은 날마다 예수님을 먹고 마시는 삶입니다. 우리 각자가 예수님께 나아가 매일 성만찬하기를 기도합니다. 그의 몸을 맛만 보지 않고, 왕성하게 먹고, 그의 피를 찔끔찔끔 마시지 않고 벌컥벌컥 마시길 기도합니다. 예수님을 먹고 마신다는 것은 나 같은 죄인 위해 십자가에서 피 흘리신 예수님을 기억하고 깊이 감사하는 것입니다. 또한 주님의 말씀을 겸손히 마음에 영접하고 믿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우리 안에 계신 예수님이 우리를 먹이시고 마시게 해 주시도록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실제적으로 예수님의 은혜의 생명이 우리 안에 차고 넘칩니다. 예수님을 먹고 마시는 삶, 그리고 참 양식되는 예수님을 이웃에게 나누어주는 삶이 제자의 삶입니다. 우리가 먼저 날마다 예수님으로 인해 영혼의 참 만족을 누려야겠습니다. 그리고 양들을 먹이기 위해 오병이어를 주님께 드려야겠습니다. 그 오병이어는 우리의 작은 진심의 기도와 최선의 섬김입니다. 그러한 오병이어가 주님의 손에 들어갈 때 주님께서 우리를 통해 주리고 갈한 영혼들을 먹이십니다.

 

결론적으로, 예수님은 창조주의 능력으로 오천 명을 먹이십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예수님에게는 순종할 일꾼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이 먹이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이 먹이십니다. 예수님은 우리 인생들이 먹어 참 만족을 얻는 생명의 떡이십니다. 우리가 날마다 주님께 나아가 생명의 떡이신 예수님을 먹고 또한 이 떡을 나누어주는 목자의 삶을 살기를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