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누가복음 18강
선한 사마리아 사람
말씀/ 누가복음 10:25-42
요절/ 누가복음 10:36
“네 생각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오늘 말씀에는 복음의 소중한 진리가 담겨져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복음의 은혜가 우리 마음에 넘쳐나기를 기도합니다.
25절을 보십시오. “어떤
율법교사가 일어나 예수를 시험하여 이르되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어떤 율법 교사가
일어나 예수님께 질문을 던졌습니다.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영생’은 문맥에 따라 ‘죽음이 없는 영원한 생명’ 혹은
‘거짓이 아닌 참된 생명, 하나님의 생명’을
의미합니다. 율법 교사는 성경을 필사(베껴서 적는 일)하고 사람들에게 그 의미를 해석해주고 가르쳐주는 일을 직업으로 하는 사람입니다.
예수님 당시 율법 교사는 오늘날로 치면 해당 분야에서 권위를 인정받은 전문가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는
성경을 필사하고 가르치는 가운데 ‘과연 죽음이 없는 영원한 생명, 참된
생명, 하나님의 생명을 얻는 길이 어디에 있는가’ 깊이 묵상했던
것 같습니다. 오랜 묵상끝에 그는 나름대로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그는
과연 예수님은 이 깨달음을 알고 계실까 궁금했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성경 실력을 시험하기 위해 이 질문을
던졌습니다.
26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이르시되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 얼핏 보기에 질문에 도로 질문으로 대응하신
것처럼 보이는 예수님의 말씀에는 중요한 단서가 숨어 있습니다. 먼저 율법 교사가 질문한 내용에 대한
답이 율법의 말씀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율법 교사가 오랜 세월 묵상해서 깨달은 것이었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영생을 얻는 길이 유대인으로 태어나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율법
교사의 질문에서 영생을 얻는다는 표현은 원문상 ‘상속받다(inherit)’입니다.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What must I do to
inherit eternal life?” 상속은 출신성분과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의 아들로 태어나면 자연스럽게 아버지의 모든 유산을 상속받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이 택하신 백성인
유대인으로 태어나면 하나님의 생명을 상속받습니다. 만약 유대인으로 태어나지 않으면 하나님의 생명을 상속받지
못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할례를 받고 율법을 지키는 것에 영생의 길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오늘날로 치면 ‘주일날 빼먹지 않고 교회에 가서 예배드리면 구원을
받는다’라고 생각하는 것고 비슷합니다. 그런데 율법교사는
성경말씀을 필사하고 그 의미를 깊이 묵상하는 가운데 영생의 길이 그런 자연적인 혈통이나 외적인 종교적 행위에 있지 않다는 것을 깊이 깨달았습니다. 그는 영생의 비밀이 여러 율법의 말씀 중 한 말씀 안에 축약되어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어 있느냐?”라는 이 질문은 사실은 율법교사가 깨달은 그것을 예수님은 알고 계심을 의미합니다.
그러면 율법 교사는 성경의 여러 말씀 중 어떤 말씀 속에 영생의 비밀이 감추어져 있음을 깨달았을까요? 그 질문에 대한 답은 예수님의 두번째 질문에 담겨 있습니다.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 네가 어떻게 읽느냐는 말씀은 “How do you read it?”입니다. 이것은 ‘그 말씀을 어떻게 해석하느냐’ 하는 의미도 되고 ‘그 말씀을 어떻게 읽느냐, 낭송하느냐’ 하는 의미도 됩니다. 모든 유대인들은 신명기 6:4,5절 말씀을 ‘쉐마’라 하여 매일 아침과 저녁으로 하루 두
번씩 낭송했습니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네가 어떻게 읽느냐?” 하신 예수님의 질문에는 그가 매일 아침과 저녁으로 읽고 낭송하는 쉐마의 말씀 안에 영생의 길이 담겨져 있음을
강하게 암시한 것이었습니다.
27절을 보십시오. “대답하여
이르되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 예수님의 질문에 예수님이 이미 모든 것을 알고 계신 것을 깨달은 율법 교사는 그가 깨달은 말씀으로 답을 했습니다.
28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하시니” 예수님은 그의 답변이 옳다고 인정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을 행하면 살리라, 곧 영생을 얻으리라 말씀하셨습니다.
29절을 보십시오. “그
사람이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예수께 여짜오되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니이까” 만약 율법교사와 예수님의
대화가 28절에서 끝났더라면 아무런 문제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율법 교사는 예수님께 한 가지 질문을 더 던졌습니다.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 이 율법 교사의 질문에는 그가 가진 중대한 문제가 담겨져 있습니다. 그의
질문에 내포된 그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첫째, ‘나’ 중심의 사고입니다. 사실 그의 ‘나’ 중심의
사고는 그의 맨 처음 질문에도 어느 정도 드러나 있습니다.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What must “I” do to inherit eternal life? 사실 영생은 사람이 무엇을 행함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영생은 ‘하나님이 자격이 없는
죄인들에게 값없이 은혜로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우리가
어떤 사람에게 어떤 일을 한 것에 대한 대가로 뭔가를 준다면 그것은 선물이 아니라 일에 대한 ‘보수’입니다. 반면 선물은 일방적인 호의로 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선한 일을 한다고 해도, 그 어떤 amazing한 일을 한다고 해도 결코 그것이 하나님께 영생을 달라고 주장할만큼 값어치가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진시황제는 천하를 통일한 후 사람을 늙지 않도록 만들어주는
‘불로초’를 찾기 위해 동남동녀를 보내 천하를 뒤지도록 했습니다. 그러나 결국 얻지 못하고 죽었습니다. 어떤 부자가 있어 의사에게
현대의학으로 고칠 수 없는 병을 만약 고쳐준다면 내 전 재산의 반을 주겠다 해도 그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많은 돈을 준다해도, 아무리 큰 선행을 행한다 해도 그것이 하나님께 영생을 삯으로 달라고 주장할만큼
가치가 있을 수 없습니다. 지구에서 가장 높은 에베레스트 산이 멀리 우주에서 보면 작은 언덕에 불과합니다. 지구를 뒤집어놓을 정도의 큰 일을 행해도 영원의 관점에서 보면 작은 먼지 티끌 하나를 이쪽에서 저쪽으로 옮겨놓은
것에 불과합니다. 그런 작은 일을 해놓고 영원을 삯으로 달라고 주장한다면 하늘의 하나님께서 웃으실 것입니다.
그러면 사람이 어떻게 영원한 생명, 하나님의 생명을 얻을 수 있습니까? 그것은 내가 주인이 된 삶에서 하나님이 주인이 된 삶으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4영리’라는 전도책자에 보면 두 종류의 사람에 대한 그림 설명이 있습니다. 먼저 내가 나의 주인인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그의 삶의 왕좌에
나 자신이 앉아 있으며 그리스도는 그의 인생의 밖에 계십니다. 모든 일을 나 자신이 주관하므로 자주
좌절과 혼란에 빠집니다. 이에 비해 예수 그리스도가 나의 주인인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삶에는 그리스도가 인생의 왕좌에 앉아 계시며 그는 그의 인생의 왕좌에서 내려와 모든 것을 그리스도께 맡겼습니다. 모든 일을 그리스도께서 주관하시므로 하나님의 계획과 일치된 생활을 하게 됩니다. 방금 율법 교사가 낭랑한 목소리로 암송한 신명기 6:5절 쉐마의
말씀은 바로 하나님을 내 삶의 중심에 모시고 그의 말씀을 내 모든 생각과 판단과 행동의 기준으로 삼고 살라는 의미입니다. 그렇게 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을 통해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이루시며, 행위에
대한 삯이 아닌 하나님의 선물로 영생을 우리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서기관이 하는 말과 그 질문을 볼 때 여전히 그의 삶의 중심에는 ‘내’가 있음을 엿볼 수 있습니다. “내가 무엇을 해야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까?” “이웃을 사랑하라고 하셨는데 누가 내 이웃입니까? 나는
누구를 이웃으로 생각하고 내 몸처럼 사랑해야 합니까?” 사실 이러한 나 중심의 사고는 창세기 3장에서 인간이 하나님이 금지한 선악과를 따먹고 범죄한 결과 생겨난 현상입니다.
선악과를 먹기 전 사람은 결코 선악에 대한 분별을 스스로 하지 않았습니다. 선악에 대한
모든 지식과 그 판단을 하나님께 맡겼습니다. 마치 순박한 어린아이와 같았습니다. 그런데 선악과를 먹고 난 후 자기가 스스로 하나님이 되었습니다. 스스로
선과 악에 대한 판단을 내리며 스스로 자기 인생의 주인이 되었습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삶을 살면서 고통을 느끼고 있습니다. 그것은
삶의 환경 자체가 열악하고 마음에 고통을 주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동시에 사람들이 지나치게 자기 중심적이고
자기에게 얽매여 있기 때문에 고통을 느낍니다. 얼마 전 한 노동자가 임금을 너무 적게 주는 것에 대해
항의하는 의미로 스스로 용접하여 자기를 가두는 감옥을 만들었습니다. 그 감옥 안에서 노동자는 그야말로
꼼짝도 할 수 없었습니다. 이 노동자처럼 오늘날 사람들은 스스로를 자아라는 감옥에 가둡니다. 스스로 만든 자아의 감옥에 갇힌 사람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다른 사람이 겪는 아픔에 잘 공감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선악과를 먹고 난 후 아담과 하와가 강한 자의식을
느끼고 무화과 나무 열매로 자신을 가린 것처럼 자아의 감옥에 갇힌 사람은 자의식이 너무 강하고 늘 다른 사람을 의식합니다. 옷을 입어도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말을 할 때에도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의식합니다. 물론 어느 정도의 자의식은 당연히 정상입니다. 이런 자의식이 있기에 예의를 갖춘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병적인 과도한 자의식이 있습니다. 사람들의 평가에 대한 자의식으로 인해 마음에 자유함을 잃고 고통을
느낀다면 그것은 문제가 있습니다. 이러한 과도한 자의식, 또
자기 중심적인 사고는 여러가지 정신질환과도 관련이 있습니다. 마치 방아쇠를 당기면 총알이 발사되듯, 자기 중심적인 사고는 여러가지 마음의 병의 원인이 됩니다.
본문의 서기관은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의 말씀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자기 중심적인 삶의 방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고 그런 경우가 있을 수 있습니다. 복음을 알고 교회에 나오지만 여전히 자기 중심적인 사고 방식, 삶의
방식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습니다.
둘째, 율법교사는 이웃을 ‘도구화’했습니다. 율법 교사의 생각의 프로세스 과정은 이러합니다. “내가 무엇을 해야 영생을 얻을 수 있을까?” -> “네 이웃을
네 자신같이 사랑하라” -> “내 이웃은 누구지?” ->
“정의된 그 이웃만 잘 사랑하면 내가 영생을 얻을 수 있겠구나.” 이 율법 교사의 치명적인
오류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생각 방식의 출발점에 ‘하나님’이 아닌 ‘내’가 있는
것입니다. 사실 올바른 프로세스 과정은 이러합니다. “네
이웃을 네 자신같이 사랑하라” -> “하나님이 우리에게 이 말씀을 주신 의미가 무엇일까?” ->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생명이 소중하듯 하나님이 이웃에게 주신 생명도 소중하기 때문에 귀하게 여기고
사랑하라는 의미이구나!” 그러면 율법 교사의 잘못된 생각 과정으로 인해 발생하는 문제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그가 사랑하는 이웃의 범위를 제한하고 한정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같은 유대인만 사랑하면 되는구나”, 혹은 “내 옆집에 있는 사람만 사랑하면 되는구나, 혹은 “같은 율법교사만 사랑하면 되는구나” 하는 잘못된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다. 율법교사는 예수님께 내가 영생을 얻기 위해 사랑해야 하는 나의 이웃은 누구인가 물었습니다. 다음으로 율법교사의 잘못도힌 생각 과정으로 인해 발생하는 치명적인 문제는 이웃을 그 존재자체로 귀하게 여기고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영생을 얻기 위해 필요한 하나의 과정으로 여기고 도구화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어떤 경우에도 도구화되어서는 안됩니다. 부모는 자녀를 사랑합니다. 세상에 자기가 낳은 자녀를 사랑하지 않는 부모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모와 자녀와 관계가 악화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다는 아니지만 많은 경우 그 원인이 부모가
자녀를 사랑하지만 뭔가 부모의 목적을 위해 자녀를 도구화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부모가 세상에서
못다 이룬 일류대학 진학의 꿈을 이루어주기 바라거나 혹은 다른 사람들에게 자녀를 자랑하고 싶은 마음 등이 있을 때 그 부모의 사랑은 종종 자녀의
마음에 깊은 좌절감과 분노를 불러일으킵니다. 성경적인 올바른 부모의 사랑은 비록 자녀이지만 나의 소유가
아닌 하나님이 주신 소중한 생명이며 나의 뜻이 아닌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삶을 살도록 도와주고 기도해주는 것입니다.
우리 목자님들도 양들을 사랑하지만 그 양이 도구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내
자존심과 명예를 세워줄 도구로 생각하거나 나의 자랑거리로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혹 자랑하더라도 사도
바울처럼 주 안에서 자랑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주신 은혜로 생각하고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또 주님이 나의 삶을 통해 하신 일을 증거하고 간증하는 의도로 해야 합니다.
주 안에서 하나님께 영광이 될 때에만 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내 영향력을 확대하거나
헛된 허영심을 충족할 의도로 자랑해서는 안됩니다.
예수님은 율법교사의 문제를 아시고 그의 잘못된 삶의 방식을 바꾸어 주기 위해 한 비유 말씀을 주셨습니다. 30-35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매 강도들이 그 옷을 벗기고 때려 거의 죽은 것을 버리고 갔더라 마침 한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고 또 이와 같이 한 레위인도 그 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되 어떤 사마리아 사람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니라 그 이튿날 그가
주막 주인에게 데나리온 둘을 내어 주며 이르되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비용이 더 들면 내가 돌아올 때에 갚으리라 하였으니”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는 길이었습니다. 예루살렘은
해발 800미터의 고지대입니다. 여리고는 해발 -250미터입니다. 해수면보다 낮습니다. 예루살렘과 여리고는 약 27km 떨어져 있습니다. 요즘은 길이 잘 닦여져 있지만 예수님 당시에는 거칠고 험한 내리막 길이었습니다. 길 주변에는 동굴도 있어서 강도가 숨어 있다가 지나가는 사람을 해치기 쉬웠습니다. 보통 사람들은 이런 강도의 위험을 피해 여러 사람이 몰려 다녔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어떤 사람이 혼자 이 길을 내려갔습니다. 불행히도 그는 강도를 만났습니다. 동굴 속에 숨어 있던 강도들이 칼을 들고 나와 그의 지갑을 강탈했습니다. 지갑만
강탈하고 보내주면 좋은데 혹시 경찰에 신고할까봐 옷을 벗기고 두들겨 패서 반쯤 죽은 상태가 되었습니다. 그가
죽어가며 신음하고 있을 때 마침 한 제사장이 그 길을 내려가다가 그를 보았습니다. 제사장은 그를 본
후 쓱 피하여 맞은편 길로 지나갔습니다. 아마 얼마 전 새로 맞춘 제사장 복에 피가 묻으면 곤란하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또 그를 병원으로 운반하다가 죽으면 부정해져서
1주일간 제사장 직무정지가 되면 곤란하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는 그가 알고 있는 모든
율법 지식을 동원해서 그 사람을 도와주지 않아도 되는 이유를 찾았습니다. 그리고 양심의 가책의 소리를
애써 무시하며 눈을 질끈 감고 마치 아무 것도 보지 못한 사람처럼 그가 더 이상 보이지 않는 길 반대편으로 폴짝 뛰어 바쁘게 길을 갔습니다. 잠시 후 한 레위인이 그곳에 이르렀습니다. 레위인은 제사장을 도와
제사를 지내는 종교인입니다. 그는 멀리서 제사장이 그를 힐끗 보고 쓱 지나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는 ‘제사장도 지나갔는데 나도 지나가도 괜찮겠지’ 생각하고 제사장이 한 그대로 반대편 길로 폴짝 뛰어 총총걸음으로 길을 갔습니다. 얼마 후 한 사마리아 사람이 그 길을 지나갔습니다. 당시 사마리아
사람들은 마치 미국에서 노예가 해방되었지만 아프리칸 아메리칸들이 백인들에 의해 극한 차별과 혐오의 대상이 되었던 것처럼 유대인들에게 그런 대접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 사마리아 사람이 길에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는 한 유대인을 보았습니다. 그가 쓰러진 사람을 보았을 때 ‘아 평소 우리를 무시하던 백인 - 아니 유대인이구나. 그렇게 우리 사마리아 사람들을 차별하고 무시하더니
잘 되었다. 하나님이 벌을 내리신 모양이다.’ 생각하고 그냥
지나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모든 당시 사회적, 문화적, 인종적 차별과 편견을 갖지 않았습니다. 그를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소중한 사람으로 생각했습니다. 또 그는
나 중심으로 생각하지 않고 쓰러져 있는 그 사람 중심으로 생각했습니다. 강도를 만나 피를 흘리며 쓰러져
죽어가는 그를 보며 ‘얼마나 무섭고 고통스러울까, 사랑하는
아내와 자녀에게 마지막 인사도 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며 눈을 감을 때 얼마나 슬프고 고독할까’ 생각했습니다. 이때 쓰러져 있는 그의 고통과 아픔의 그 자신의 고통과 아픔이 되었습니다. 그에게도
바쁜 여행의 일정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모든 일정을 뒤로 하고 그 사람의 상처에 기름과 포도주를
붓는 응급조치를 한 후 그를 짐승에 태워 근처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밤새 그를 돌보아 주었습니다. 밤잠을
설치며 상처에서 나오는 진물을 닦아주고 새 천으로 상처를 싸매어 주었습니다. 다음날 아침 응급한 상황은
지나고 환자가 어느 정도 안정된 것을 확인한 그는 주막 주인에게 두 데나리온을 주며 환자를 계속 돌보아 줄 것을 부탁했습니다. 두 데나리온은 노동자의 이틀 품삯이므로 오늘날로 치면 20만원입니다. 하지만 당시 여관비가 하루에 1/12 데나리온인 것을 감안하면 거의
한달 숙박비에 해당되었습니다. 그는 만약 돈이 더 들면 돌아오는 길에 갚겠다고 했습니다. 아마도 여관주인은 사마리아인의 선행에 깊은 감명을 받았을 것입니다.
36절을 보십시오. “네
생각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예수님의 이 말씀은 율법교사의 생각을
근본적으로 바꾸어 주었습니다. 즉 ‘누가 나의 이웃인가’ 하는 관점에서 ‘누가 쓰러져 있는 사람의 이웃이 되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삶의 중심에 하나님이 있고 그 하나님을 중심으로
하나님이 내가 가서 도와주기 원하는 이웃이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율법교사와 예수님의 생각방식, 삶의 방식이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율법 교사는 나의 구원, 나의
행복을 최고의 가치로 생각했습니다. 심지어 하나님의 말씀도 궁극적으로는 나의 구원과 나의 행복을 위한
수단, 혹은 도구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을
삶의 중심에 두고 그 하나님이 돕고 사랑하기 원하는 이웃을 바라보았습니다. 첫 사람 아담과 그의 후손은
선악과를 따먹고 하나님을 멀리 떠나 자기가 자기 삶의 주인이 되었습니다. 그로 인해 행복할 줄 알았으나
오히려 죄와 죽음의 강도를 만나 피를 흘리며 거반 죽게 되었습니다.
오늘날 신문 일간지를 펴보면 죄와 죽음의 강도를 만나 피흘려 죽어가는 사람이 셀 수도 없이 많습니다. 어떤 한 청년은 술잔에 마약에 타서 마시다가 실수로 치사량 이상을 넣어 그 술을 마시고 숨을 거두었습니다. 또 어떤 한 의대를 다니는 청년은 죽을 고생을 다해 의대에 합격했습니다. 그런데
정욕의 죄의 강펀치를 맞고 버스에서 몰래 잠든 같은 학교 여학생 다리를 찍다가 걸려 그 길로 경찰서에 붙잡혀 갔습니다. 죄의 강펀치를 맞은 그는 의대 공부도 포기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이처럼 죄와 죽음의 강도를 만나 피흘리며 죽어가는 인생들을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그들을 도와주기 원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하나님의 마음을 아셨습니다. 그 하나님의 마음을 가슴에
가득안고 선한 사마리아 사람이 되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사실 예수님은 이 땅에서 사마리아 사람이 당하는
것과 같은 차별과 멸시를 받으셨습니다. 요한복음 8:48절을
보면 사람들은 예수님을 향해 ‘귀신들렸다, 사마리아 사람이다’ 라고 욕했습니다. 당시 유대인을 향해 사마리아 사람이라고 하면 최고의
욕설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을 멸시하고 욕하는 그 유대인들을 위해 자신의 삶의 대부분을 바치셨습니다. 유대의 온 마을을 돌아다니며 하나님의 복음을 전했습니다. 종래에는
유대인과 온 인류를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피흘려 죽으셨습니다.
37절을 보십시오. “이르되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하시니라” 누가 쓰러진 사람의 참된
이웃인가 묻는 예수님의 질문에 율법 교사는 “사마리아 사람입니다.”라고
답을 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자존심상 차마 그렇게 답하지 못하고 “자비를 베푼 자”라고 답했습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너도 가서 이와같이 하라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그와 같이 하는 행위에 영생이 있다는 것보다는 비유의 사마리아 사람처럼 쓰러진 이웃에 대한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사람이 되라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내 스스로의 의지와 힘만으로 이웃을 사랑하는 것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그러나 죄와 죽음의 강도를 만나 피흘려 죽어가는 나를 위해 선한 사마리아 사람이 되셔서 나에게 오신 예수님을
생각할 때 이웃을 사랑할 수 있는 힘을 얻게 됩니다. 우리가 이번 여름 수양회에 죄와 죽음의 강도를
만나 거반 죽어가는 영혼들을 많이 초청하여 생명을 얻도록 함으로 주님으로부터 받은 사랑을 실천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38-42절을 보십시오. “그들이
길 갈 때에 예수께서 한 마을에 들어가시매 마르다라 이름하는 한 여자가 자기 집으로 영접하더라 그에게 마리아라 하는 동생이 있어 주의 발치에 앉아
그의 말씀을 듣더니 마르다는 준비하는 일이 많아 마음이 분주한지라 예수께 나아가 이르되 주여 내 동생이 나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시나이까
그를 명하사 나를 도와 주라 하소서 주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몇 가지만 하든지 혹은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예수님을 초청한 마르다는 정성스럽고 맛난 음식으로 예수님과 제자들을 섬기기 원했습니다. 그런데 동생 마리아가 예수님의 발치에 앉아 언니를 도와줄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다소 짜증이 난 마르다는 예수님께 동생을 타일러 언니를 좀 도와달라고 말씀 좀 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런데 의외로 예수님은 마르다에게 많은 일로 근심하고 염려하지 말고 몇 가지만 하든지 혹은 한 가지만으로도
족하다고 하셨습니다.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을 오늘날 버전으로 바꾸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마르다야, 여러 맛난 음식으로 나와 제자들을 섬기려 하는 것은 가상하다만 김치찌개하고 몇 가지 반찬으로 충분한다. 나는 네가 맛난 음식으로 나를 섬기는 것보다 내 말씀을 듣는 것을 좋아하고 말씀의 은혜를 받는 것이 더 기쁘다.” 그렇습니다. 주님은 우리가 주를 위해 분주하게 일하는 것도 좋지만
주님의 말씀을 듣고 묵상하고 그 말씀을 순종하기 위해 애쓰는 것을 더 기뻐하십니다.
결론입니다. 예수님은 죄와 죽음의 강도를 만나 피흘려 쓰러져 죽어가는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우리를 위해 선한 사마리아 사람이 되어주셨습니다. 이 은혜와 사랑을 받은 자로서
우리도 죄와 죽음의 강도를 만나 피흘려 죽어가는 영혼들에게 다가가 그들의 좋은 이웃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