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에베소서 6강 피차 복종하라 말씀 에베소서 5:15-6:4 요절 에베소서 5:20,21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 본문은 신자의 인간관계를 다루고 있습니다. 인간관계가 참으로 어렵습니다. 인간관계를 잘하는 비결은 무엇이며 가장 큰 장애물은 무엇일까요? 우리가 오늘 말씀을 통해 인간관계에서 걸림이 되는 한 가지 점을 깊이 생각해 보고 그 점을 고치는 시간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지난 말씀 후반부에서 사도는 성도들에게 열매 없는 어둠의 일을 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열매 없는 어둠의 일이란 첫째는 하나님 앞에 섰을 때 그 일의 가치가 없습니다. 지금은 의미 있는 듯 보이나 그 가치와 의미가 주님 앞에까지 지속되지 않습니다. 둘째는 도덕적으로 부끄러운 일로 그 일이 공개되면 수치스럽습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성도들은 거듭난 다음에도 이런 열매 없는 일들을 계속합니다. 후회하고 또 하고 그렇습니다. 그래서 사도는 성도가 거듭난 다음에 어떻게 살아야 하는 지 다시 한 번 코칭하고 있습니다. 15절을 보세요. 그런즉 너희가 어떻게 행할지를 자세히 주의하여 지혜 없는 자같이 하지 말고 오직 지혜 있는 자같이 하여 지혜롭게 행동하라 권면했는 데 지혜는 ‘분별력’입니다. 옥석을 가리고 똥인지 된장인지를 가리는 것입니다. 사람이 분별력을 가질 때 해야 할 일들의 여부와 우선순위를 정할 수 있습니다. 지혜로운 자가 특히 잘해야 할 것이 무엇입니까? 16절을 보세요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 지혜로운 자는 세월을 아낍니다. 세월은 시간의 묶음인데 한마디로 시간을 아끼는 것입니다. 거듭난 성도인데 시간을 방탕에 방임하며 열매 없는 일을 하는데 다 허비해 버리기도 합니다. 신앙생활이나 삶이 승리하지 못하는 이유는 시간 관리를 잘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왜 성도가 시간관리가 어렵고, 왜 시간 관리를 잘 해야 합니까? 그 답은 때가 악하기 때문입니다. 때가 악하다는 것은 마귀가 배고픈 사자같이 삼킬 자를 찾아 두루 돌아다니고 있다는 말입니다. 잠깐 한눈을 팔면 마귀에게 먹혀 하루종일 끌려 다닙니다. 우리는 어제를 후회하며 오늘은 제대로 하루를 보내리라 결심합니다. 그런데 조금 긴장을 푼 사이 어느새 안목의 정욕과 육신의 정욕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그리고 하루를 다 살았을 때는 허탈함과 패배감으로 마감 합니다. 이처럼 마귀가 우리 본성을 부추겨 우리를 열매 없는 삶으로 인도하고자 무진 애쓰고 있기 때문에 우리도 정신 바짝 차리고 시간 관리를 해야 합니다. ‘세월을 아끼라’ 라는 말씀에서 ‘아끼라’는 말은 원어로 ‘구원하라’는 뜻입니다. 값비싼 대가를 지불하여 노예를 구원할 때 쓴 단어입니다. ‘시간은 황금이다’ 라는 말도 있지만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은 시간입니다. 특히 거듭난 성도가 갖게 된 새 생명의 시간은 참으로 소중합니다. 엄청난 대가를 지불하고 주어졌으며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수많은 사람을 살릴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시간을 어떻게 쓰는 것이 가장 아껴쓰는 것일까요? 17절을 보세요.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 시간을 주의 뜻대로 쓰는 것입니다. 주의 뜻대로 쓰기위해서는 먼저 주의 뜻을 이해해야 합니다. 주님은 거듭난 성도가 무엇을 위해 살기를 원하십니까? 주의 뜻은 예수님을 닮는 것입니다. 범사에 감사하고 항상 기도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을 용서하고 섬기는 것입니다. 한 영혼이라도 구원하여 제자 삼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일에 시간을 쓰는 것이 시간을 가장 잘 쓴 것입니다. 세월을 허비하는 대표적인 예가 무엇입니까? 18절을 보세요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 게임이나 담배나 주색잡기, 마약등도 술취하는 것에 포함됩니다. 술취한다는 것은 무가치한 것에 빠져 헤어 나오지 못하는 것을 대표하는 말입니다. 사도는 술 취함 대신에 우리에게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라고 합니다. 즉 성령에 취하라는 것입니다. 성령에 취하면 술 취할 때처럼 왠지 기분이 좋습니다. 담대해집니다. 어떤 어려움도 극복할 힘이 생깁니다. 입에서는 노래가 흘러나옵니다. 성령 충만한 삶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사는 것입니까? 첫째로 영적인 교제에 힘씁니다. 19절을 보세요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 여기서 영적 교제란 하나님을 높이며 성도들간 교제하는 것을 말합니다. 둘째로, 범사에 감사하게 됩니다. 20절을 보세요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 성령 충만한 사람의 특징은 범사에 감사한다는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자신을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신 것을 믿습니다. 때문에 자신의 삶에 일어난 모든 일에 대해서 하나님의 사랑 측면에서 해석합니다. 로마서 8:28절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이 말씀과 같습니다. 성령 충만하지 못하면 하나님과 사람을 원망하고 불평하고 저주하고 미워합니다. 낙심합니다. 주저앉습니다. 하지만 성령 충만한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과 인도하심을 믿기에 모든 일에 감사하여 의미를 찾습니다. 마지막으로 성령 충만한 사람은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합니다. 21절을 읽겠습니다.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 성령 충만하지 못한 사람은 피차 원망하고 싸웁니다. 혹은 팽팽하게 평행선을 그으며 불필요한 기싸움을 하며 인생을 소모합니다. 세월을 아끼지 못하는 대표적인 예가 바로 기싸움입니다. 목회자와 성도들 간에, 기성세대와 젊은 세대간에, 남성과 여성, 부부간에, 부모와 자녀사이에, 직장 상사와 후배 간에 이런 기싸움이 있습니다. 이런 기싸움이 있게 되면 하나님의 역사도 발전이 없습니다. 어떤 교회는 12명이 모였는데 한 번도 물질지출을 한 적이 없다고 합니다. 누가 어떤 일에 돈을 쓰자고 하면 꼭 반대하는 사람이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남편은 자존심을 굽히지 못해 결국 이혼합니다. 어떤 부자관계는 아버지는 아버지의 자존심 때문에, 자녀는 자녀의 상처와 반발심 때문에 아버지가 돌아가시기까지 화해하지 못했습니다. 이렇게 기싸움을 할 때 마귀가 역사합니다. 마귀가 아주 좋아라 하며 이런 것을 부추깁니다. 그래서 관계를 냉담하게 만들고 더 나아가 파괴합니다. 누군가에 대해 냉담한 마음, 한 치도 물러서지 않고자 하는 마음을 가진 것은 결코 성령 충만한 마음이 아닙니다. 피차 복종한다는 의미가 무엇입니까? 기독교윤리는 일방윤리가 아니라 쌍방윤리입니다. 높낮이가 없습니다. 단지, 질서상 주신 직위나 신분을 다른 이들보다 높음으로 착각해서는 안됩니다. 사람은 하나님 앞에 모두 죄인으로 평등합니다. 기싸움하는 원인이 무엇입니까? 자존심, 권위의식같은 것을 붙들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상대방의 말이 옳은 데도 듣지 않습니다. 피차 복종하라는 것은 타이틀이나 권세나, 자존심, 나이같은 허울과 껍데기를 내려놓고 상대방을 통해 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라는 것입니다. 피차 복종하라는 것은 상대방이 누구냐 보다, 상대의 말이 옳으냐 그렇지 않느냐로 상대방의 말을 평가하고 수용하는 것입니다. 이렇게만 한다면 세월을 낭비하는 모든 기싸움은 사라지고 하나님 편에서 생산적이고 좋은 방향으로 성큼 성큼 나갈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특히 유교적인 배경가운데 권위와 자존심이 강합니다. 특히 한국에서는 나이가 중요합니다. 나이가 어린 사람이 바른 소리를 하면, 말하는 내용보다 “너 몇 살이야, 건방지게” 하는 말이 나옵니다. 이렇게 바른 소리를 듣지 않으면 후배들도 내게 아무도 가까이 오지 않고 조언도 하지 않게 됩니다. 권위나 나이같은 것을 따지지 않고 피차 복종하면 좋을 텐데 그게 잘 안됩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피차 복종할 수 있습니까? 그리스도를 경외할 때 가능합니다. 렘브란트가 그린 ‘엠마오에서의 저녁식사’라는 유명한 그림이 있습니다. 제자들이 식탁에 앉아 예수님과 식사를 하려는 순간, 그들의 눈이 열려 예수님을 알아보게 된 놀라움을 그린 것입니다. 청교도들은 주님을 교회에서만 예배하는 것이 아니라 일상의 식탁에서도 경외하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다음과 같은 글귀를 적어 식탁 옆에 걸어놓았습니다. “그리스도는 모든 식탁의 손님이시고 모든 대화를 듣는 분이시다” 우리가 우리의 삶에 동행하시는 그리스도를 경외할 때 마음이 겸손해집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과 기싸움하는 이유는 권위주의, 자존심, 교만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리스도를 경외하면 어떻게 됩니까? 나의 작음을 알게 됩니다. 대통령이라도 위대한 하나님의 종이라도 주님 앞에서는 미세먼지 같은 존재에 불과합니다. 언제 바람이 불어 사라질지 모릅니다. 또 우리는 모두가 그리스도의 심판대에 앞에 죄인으로 동등하게 설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부끄러운 것들이 다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이런 그리스도의 심판대를 생각하면 얼마나 작고 보잘 것 없는 존재인지 깨닫게 됩니다. 우리가 이렇게 자신의 심히 작음을 알 때 어떤 사람에게도 자신을 굽힐 수 있습니다. 굴욕감이란 느낌 자체를 갖지 않을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의 말도 들을 수 있습니다. 심지어 어린아이의 말도 경청하고 그의 말에 복종할 수 있습니다. 또한 우리가 진리를 사랑하는 진리애를 가지면 어떤 말이든지 옳은 말이면 누구에게든 머리를 숙이고 들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겸손과 진리애를 가짐으로 모든 허울에 속한 껍데기들을 벗고 피차 복종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럴 때 우리 안에 모든 기싸움과 갈등이 사라지고 하나되는 공동체를 이룰 수 있으며 인간관계도 원만하고 부드럽게 유지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저는 지난 1년 동안 종로1부에서 목자님들, 사모님들의 말에 복종하는 것을 배웠습니다. 이 일은 시니어들을 섬기는 것보다 어려운 점이 있었습니다. 한번은 어떤 목자가 기도모임에서 제가 마우스클릭을 하는 것이 거슬린다고 멈추면 좋겠다고 카톡을 보내왔습니다. 저는 스탭목자에게 그런 문자를 보낼 수 있는 가 잠시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제가 틀렸기에 “네~”라고 답을 보내고 마우스클릭을 멈추었습니다. 살짝 기분이 나빴습니다. 그 외에도 1년 동안 많은 이들의 크고 작은 판단이나 건의를 받았습니다. 그때마다 마음에 금이 가기도 했습니다. 주님께서 저의 권위주의를 온전히 내려놓고 조언들을 받도록 하셨습니다. 이번 주는 본문말씀을 섬기게 되어서 인지 자녀들에게 복종하는 것도 배우게 하셨습니다. 제가 저를 책망하는 찬미의 말을 듣고 변명하고 싶었지만 입을 다물고 수긍하고 복종했습니다. 저는 최근에 청년들이 많이 나오는 어떤 교회의 한 목사님에 대해서 들었습니다. 그분은 청년들의 돌직구를 좋아하며 무익한 종의 자세로 섬기므로 어떤 상처도 받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그러니 그 교회에 청년들이 많은 것이구나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또 그분의 말에 제 자신이 얼마나 교만한가 알게 되었고 부끄러움을 느꼈습니다. 교만하고 마음이 높은 저를 훈련하시고 자기 발견하게 하시고 겸손히 옳은 소리를 듣고 경청하는 내면을 갖도록 도와주심을 감사합니다. 제가 스탭목자나 연장자의 권위를 내려놓고 상대방이 누구든지 옳은 말에 기쁨으로 복종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다음 내용은 부부관계, 부모와 자식관계에서 우리가 어떻게 서로를 존중하고 사랑해야 할 것인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관계를 언급함에 있어서 사도는 아내, 자녀, 종 같은 당시 사회적 약자들을 먼저 언급했는데 이는 관계에 있어서 주도권을 부여한 것입니다(22, 6:1,5) 관계에 있어서 약자로 취급되는 이들이 믿음을 가진다면 주도적 역할을 할 수 있습니다. 주도한다는 것은 목소리를 높이고 싸우라는 것이 아닙니다. 22-24절에서 사도는 아내들이 남편에게 주께 하듯 복종할 것을 권유합니다. 하나님은 남편을 아내의 머리로 세우셨습니다(23,24). 머리는 몸의 대표입니다. 방향을 잡고 영광을 받습니다. 남편이 모자랄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왜 이런 질서를 만드셔서 아내들은 수고하며 영광은 남편에게 돌리게 하셨을까요? 이것을 억울하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내들은 마치 삼위일체 하나님중, 성자 하나님 예수님이 걸으신 길을 걷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성부 하나님께 복종하시고 동역하시면서 영광을 성부 하나님께 돌리셨습니다. 그런데 성부 하나님은 다시 모든 영광을 그리스도께 돌리셨습니다. 극단적인 페미니스트들은 남편과 아내의 관계를 경쟁관계, 투쟁관계로 봅니다. 그렇지만 남편과 아내는 경쟁관계가 아니라 한 몸이며,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처럼 동등된 관계요 자발적인 겸손과 복종의 아름다운 관계입니다. 사라는 아브라함이란 조금 모자란 남편을 두었습니다. 그런데 사라는 그런 아브라함을 주님처럼 여기며 순종했습니다(벧전 3:6). 그 비결이 무엇입니까? 이는 그녀가 아브라함을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때 그녀는 아무 일에도 두려워하거나 놀라지 않고 남편에게 순종할 수 있었습니다. 남편들은 머리로 지음을 받았기에 존중받기를 원합니다. 당시 많은 여성들이 교회에 나왔고 그 남편들은 나오지 않았습니다. 이럴 때 남편들은 아내들이 자신보다 교회나 예수님이나 목회자들을 더 존중하는 것을 참을 수 없었습니다. 이때 성숙한 아내들은 남편들을 존중하여 그들을 감동시켜 교회에 나오게 했습니다. 남성들의 머리로서의 자존심을 여성들이 판단하면 안됩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지으셨기 때문에 그것을 존중하며 동역하는 것이 좋습니다. 남편들은 아내들로부터 존중을 받으면 그만입니까? 그러면 불공평하죠! 남편들도 아내를 사랑해야 합니다(25) 여기서 사랑이란 에로스가 아니라 아가페입니다. 희생적이고 무조건적인 사랑, 절대적인 사랑입니다. 에로스의 사랑은 상대방을 통해, 상대방을 수단화하여 자신의 만족을 얻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가페의 사랑은 예수님의 사랑으로 교회를 섬기기 위해 자기목숨을 버리신 사랑입니다. 상대방을 위해, 상대방을 섬기는 사랑입니다. 그런데 아내를 사랑한다고 하면서 방청소나 설거지도 안한고 애들하고 놀아주지도 않고 손하나 까딱하지 않는다면 아내를 사랑한다는 것은 에로스를 위한 립서비스에 불과합니다. 그리스도의 교회를 향한 사랑은 무조건적이었습니다(26,27). 예수님은 완전한 교회가 아닌 흠과 티와 주름이 있는 교회를 신부로 선택했습니다. 예수님은 부족한 신부를 택하여 완전한 신부로 만드시고자 하셨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와 교회의 결혼모델입니다. 오늘날 많은 청년들이 완전한 배우자를 찾습니다. 그러다 보니 결혼이 어렵고 늦어집니다. 완전한 배우자를 만났다고 생각한 사람이 있다고 합시다. 그에게 남은 결혼생활은 불완전한 모습에 눈뜨고 실망해가는 과정입니다. 예수님모델에 기초해서 볼 때, 결혼이란 완전한 대상을 선택하여 실망해 가는 과정이 아니라, 불완전한 대상을 섬기며 사랑과 섬김을 배우고 행복을 꽃피우는 과정입니다. 아내를 사랑하는 자는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입니다(28-30). 아내와 남편은 한 몸입니다. 사람들이 자기 몸을 얼마나 생각하고 돌봅니까? 거의 본능적입니다. 또 사람들은 자기를 위해 뭔가를 투자하는 것을 조금도 아까워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아내를 위한 투자가 곧 자신을 위한 투자입니다. 아내를 함부로 대하는 사람은 결국 톡톡한 댓가를 치를 것입니다. 아내를 챙겨야 한다는 이성적인 생각 정도로는 부족합니다. 아내를 챙기는 것이 거의 본능이 되도록 해야 합니다. 그것이 아내를 자기 몸처럼 사랑하는 것입니다. 남편과 아내, 둘이 하나되는 것을 사도는 큰 비밀, 위대한 신비라고 표현했습니다(31-33). 1+1이 1이 되니 신비가 아닙니까? 이것은 단지 육체적으로 하나됨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남편과 아내는 서로 닮아갑니다. 완전한 하나의 연합체요 한 인격체가 되어갑니다. 둘이 하나됨을 이루면서 그들은 셋이 하나되는 삼위일체의 비밀을 깨닫습니다.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를 이해합니다. 그러니 결혼관계란 하나님이 영적 비밀을 계시하기 위해 만들어놓으신 신비한 제도입니다. 이것을 모르고 단지 생물학적 이유로, 경제적인 편의를 위해, 외롭지 않기 위해 결혼하면 결혼이 무엇인지 모르고 결혼하기에 반드시 어려움을 겪습니다. 결혼관계를 통해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를 이해하고 그 비밀을 배워야 합니다. 이러한 방향과 목적이 있으면 결혼관계는 견고하고 풍성하며 놀라운 영적 성장을 제공합니다. 우리가 결혼관계를 통해 예수님과 교회의 관계를 깊이 배우기를 기도합니다. 다음으로, 자녀와 부모관계를 말씀합니다(6:1-4). 자녀들은 주안에서 자신의 부모들에게 순종해야 합니다. 이것이 옳다는 의미는 마땅하다, 당연하다는 것입니다. 자녀들은 부모를 통해 존재했습니다. 부모는 존재의 근원입니다. 또한 부모는 많은 수고를 통해 자녀를 낳았고 그들이 알지 못하는 많은 헌신을 했습니다. 사람이 자신의 존재의 근원을 존중하는 것에 대해 하나님이 상을 약속하신 이유는 부모를 공경하는 것이 인간이 하나님을 공경해야 하는 이유와 동일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만물의 근원이요 인간존재의 근원이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공경하며 감사해야 합니다. 부모를 공경하라고 할 때 주안에서라는 단서가 붙습니다. 하나님을 공경치 말라는 말씀까지 순종할 필요는 없습니다. 하지만 이때도 겸손하게 부모님을 공경하면서 지혜롭고 성숙하게 하나님을 공경해야 합니다. 부모의 역할을 말할 때 어머니들은 제외되고 아버지들이 언급되고 있습니다(4). 그 이유는 아버지가 가장이기때문이기도하지만 아버지들이 자녀교육에서 제일 문제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아버지들은 권위와 힘을 가지고 있기에 자녀들에게 상처를 줄 수 있습니다. 자녀를 노엽게 한다는 것은 아버지들이 부당한 권위행사나 과도하고 부적절한 징계를 함으로 자녀들의 마음에 아버지에 대한 분노와 실망과 냉담함을 주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차후 교육이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아버지들은 자녀들에게 항상 존경을 받고 수긍할 수 있는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 인내하며 최대한 온유하게 섬기며 사랑의 관계를 유지해야 합니다. 자녀교육이 어렵더라도 자녀를 절대로 방치해서는 안됩니다. 어떻게든지 사랑의 관계를 유지하며 주님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해야 합니다. 이상에서 우리는 거듭난 성도는 세월을 아껴야 함을 배웠습니다. 무엇보다 인간관계에서 세월을 아껴야 합니다. 우리 삶에 불필요한 평행선 긋기, 기싸움, 자존심싸움 같은 것을 없애야 합니다. 그 비결은 피차 복종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권위주의, 자존심, 교만한 생각들을 다 내려놓고 피차 복종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겸손히, 상대방의 옳은 말을 들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래서 기싸움을 하지 않고 세월을 아껴 주의 뜻을 섬기고 아름다운 성령의 열매들을 많이 맺어가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