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창세기 13강 중보기도하는 아브라함 말씀 : 창세기 18,19장 요절 : 창세기 18:27 “아브라함이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티끌이나 재 같사오나 감히 주께 아뢰나이다”
우리는 모두 한번 밖에 없는 삶을 성공적으로 살기 원합니다. 어떻게 살면 정말 잘 살았다고 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의 파트너, 친구로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파트너, 친구가 되는 것은 어떻게 사는 것일까요? 이시간 우리가 하나님의 친구로 사는 것이 무엇인지 잘 배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1절을 보십시오. 세 명의 나그네가 아브라함 앞에 나타났습니다. 한분은 성육신 하신 그리스도이며 다른 두 사람은 천사입니다. 히브리서 13:2절을 보면 아브라함은 그들이 누군지 알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그들을 온 마음을 다해 섬깁니다. 날이 뜨거우므로 나그네들이 헉헉대며 힘겨워할 때입니다. 아브라함이 이런 나그네들을 향해 달려갑니다. 180도 폴더인사를 합니다. 손님인데 하나님처럼 섬깁니다. 그는 나그네들이 발을 씻고 음식을 먹고 마음을 상쾌하게 하신 후에 지나가달라고 했습니다. 나그네의 입장에서 실제 필요한 것뿐 아니라 그 마음까지 읽고 섬기고자 했습니다. 그들이 섬김에 동의하자, 아브라함은 급히 달려가 사라에게 빨리 고운 가루로 떡을 만들라고 합니다. 또한 가축 떼에 달려가 기름진 송아지를 잡아 하인에게 요리하도록 했습니다. 떡은 20명은 족히 먹을 분량이고 송아지 한 마리는 세 명이 먹기에 결코 작은 양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은 최고의 것으로 풍성히 섬겼습니다. 이상에서 손님 대접하기를 힘쓴 아브라함을 배웁니다. 아브라함이 이렇게 풍성하게 잘 섬길 수 있었던 비결이 무엇일까요? 물질이 많아서일까요? 물론 물질이 많으면 마음이 여유가 있습니다. 그러나 항상 그런 것은 아닙니다. 물질이 많아도 스크루지 영감처럼 베풀지 않은 구두쇠 인생을 살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자신을 섬겨주시고 감당해주신 하나님의 은혜가 넘쳤기 때문입니다. 또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되라는 말씀을 받고 그 내면이 자기와 자기가정만 생각하지 않고 넓고 풍성해졌기 때문입니다. 마지막날 예수님은 자신의 오른편에 세우신 자들에게 자신이 주릴 때 그들이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 영접하였다고 칭찬하셨습니다. 그러자 의인들은 “우리가 언제 그렇게 하였습니까?” 반문했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형제중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바로 당신께 한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 25:40). 우리 곁에 변장하신 예수님이 도움이 필요한 지극히 작은 자의 모습으로 와 계십니다. 우리가 도움이 필요한 형제자매들을 아브라함처럼 물질과 마음을 드려 극진히 섬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아브라함에게 흡족한 섬김을 받으신 하나님은 사라를 찾으셨습니다. 그리고 내년 이 맘때에 사라에게 아들이 있을 것이라고 축복의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이나 사람이나 섬김을 받으면반드시 더 나은 섬김으로 갚아주는 것이 진리입니다. 그래서 섬김은 손해가 아니라 은혜입니다. 섬김으로 나의 숙원이 풀리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이제 하나님의 영광과 믿음의 능력을 나타내기에 가장 적절한 시간이 되었기에 아브라함에게 자녀를 주시지만, 그와 함께 아브라함의 내면이 변화되고 아름답게 성숙되었기에 축복하십니다. 우리의 내면변화가 하나님의 축복과 관련될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사라가 장막 문에서 하나님과 아브라함의 대화를 엿들었습니다. 아브라함과 사라는 내년이면 각각 100세, 90세입니다. 아브라함과 사라는 할아버지, 할머니이고 사라는 불임여성인데다가 생리마저 끊어진 상태입니다. 사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속으로 웃었습니다. 그녀의 웃음은 허탈과 냉소의 웃음이었습니다. 사라의 미소는 썩소였습니다. 그녀는 자신이 노쇠하였고 아브라함도 늙었으므로 그들에게는 더 이상 즐거움은 없을 것이라고 단정지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사라의 태도를 문제삼으셨습니다. 그리고 “여호와께 능치 못할 일이 있겠느냐” 책망하시고 믿음을 심으셨습니다. 사라는 두려워서 자신이 웃지 않았다고 잡아떼었습니다. 하나님은 “네가 웃었으니라”며 미소를 날리셨습니다. 손님들이 소돔으로 갈 때 아브라함은 그들을 전송하려고 함께 갔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하려는 것을 아브라함에게 숨기겠느냐”(18a) 속내를 털어놓고 상의하는 관계를 친구라 하고 사업적으로는 동업자, 파트너라고 합니다. 성경은 아브라함을 하나님의 벗이라고 합니다(사 41:8, 약 2:23). 예수님도 그 사도들에게 그들을 친구로 삼으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요 15:5)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키워서 자신의 동역자, 친구로 삼고자 하셨습니다. 우리는 어리고 수준이 낮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당신의 파트너요 친구로 성장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통해 이루시고자 하시는 자기계획을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은 아브라함이 강대한 나라를 이루는 것입니다(18). 그래서 전 세계가 복을 받는 것입니다. 강대한 나라는 어떤 나라입니까? 군사력이나 경제력이 큰 나라입니까? 여호와의 도를 지키는 나라입니다(19). 이 나라에는 의와 공도가 살아있습니다. 출애굽기 19:5,6절에서는 ‘거룩한 나라’로 불립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나라가 임하시옵소서” 라고 기도하도록 하셨는데 그 나라가 바로 이 나라입니다. 이 나라는 어떻게 이루어집니까? 아브라함이 그 자식과 가족들에게 여호와의 도를 지키게 함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먼저, 아브라함 한 사람이 철저하게 여호와의 도를 지키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그가 자신의 가족과 족속이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들이 되도록 하는 것입니다. 이상에서 우리는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통해 이루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계획을 배웠습니다. 한마디로, 아브라함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이뤄지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우리 모든 믿는 자들의 조상이므로 아브라함에게 두신 비전과 계획은 우리에게도 해당됩니다. ‘목적이 이끄는 삶’이란 말이 있습니다. 우리의 삶은 어떻게 살았을 때 잘 살았다고 할 수 있을 까요? 인생의 성공과 실패의 기준은 무엇입니까? 내게 두신 하나님의 뜻과 계획이 어느정도 이루어졌는 가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다른 모든 분야에서 성공했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지 않았다면 나의 삶은 실패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스라엘 나라의 정치적 회복만을 바라는 제자들에게 그것은 그들의 알바가 아니요 오직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면 그들이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예수님의 증인이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행 1:8). 즉 그들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먼저, 하나님의 말씀에 철저하게 순종하고 다른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도록 도우므로 내게 두신 하나님의 나라의 비전이 성취되길 기도합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그를 통해 어떤 역사를 이루어 나가고자 하시는 지를 밝히신 다음에 소돔과 고모라에 대한 계획을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소돔과 고모라에 대한 부르짖음이 크며 그 죄악은 심히 무겁다고 하셨습니다. 이는 소돔과 고모라의 악행을 고발하는 천사들의 소리, 의인들의 기도소리, 피해자들의 소리가 하늘에 사무쳤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악인들이라고 함부로 심판하지 않고 실사를 하시고 공의롭게 심판하시고자 하십니다. 여기서 하나님은 심판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최후의 심판을 예정해 두셨습니다. 그러나 역사안에서도 죄가 하늘에 사무치고 또한 심판을 하여 죄의 확산을 막고 경계를 삼아야 할 필요가 있을 때 심판을 시행하십니다. (벧후 2:5,6) 그러면, 하나님은 소돔과 고모라에 대한 심판계획을 왜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신 것입니까? 심판만이 목적이라면 그냥 가셔서 실사를 하시고 심판하시면 될 것입니다. 이것은 다음 장면에서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소돔성을 멸하지 말아 달라고 간청하는 중보기도를 드리는 것을 통해 그 답을 알 수 있습니다. 두 천사가 소돔으로 간 후 하나님과 아브라함만 남았습니다. 이때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바짝 붙으며 간구하기 시작했습니다. “주께서 의인을 악인과 함께 멸하려 하시나이까 그 성중에 의인 오십 명이 있을지라도 주께서 그곳을 멸하시고 그 오십 의인을 위하여 용서하지 아니하시리이까 주께서 이같이 하사 의인을 악인과 함께 죽이심을 부당하오며 의인과 악인을 같이 하심도 부당하니이다 세상을 심판하시는 이가 정의를 행하실 것이 아니니이까(23-25)” 그는 소돔성에 의인들이 살고 있을 텐데 같이 심판해 버리시면 어떻게 하겠느냐고 그 의인 50명때문에 그곳을 멸해서는 안된다고 말했습니다. 이렇게 시작된 그의 간청은 의인의 수를 45명으로, 40명으로, 30명으로, 20명으로, 10명으로 5번 더 깎는, 총 6번의 deal 과정을 거쳤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아브라함이 한번 더 deal을 했어야 합니다. 1명으로 말입니다. 아브라함은 롯이 그래도 10명대 요회는 이룰 것으로 착각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명목상의 의인으로 겨우 자신하나 버티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이렇게 아브라함이 간청하며 소돔성을 멸하지 말아달라고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첫째는 소돔성을 긍휼히 여겼기 때문입니다. 만약 의인들만 생각하는 것이었다면 의인들만 무사히 피하게 해달라고 하였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소돔성 사람들도 멸망당하지 않고 다 회개하여 구원에 이르기를 원했습니다. 둘째로 아브라함은 롯을 사랑했고 롯이 심판받지 않기를 원했습니다. 아브라함은 롯이 그돌라오멜 동맹군에 사로잡혀 갔을 때에도 지체없이 참전을 결정하여 목숨걸고 그를 구했습니다. 그만큼 아브라함은 롯을 사랑했습니다. 그런데 롯은 1차 구출되었을 때 죄악된 소돔성에서 나와야 했습니다. 소돔성에 대한 하나님의 경고를 받아들여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소돔성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또 그곳에 기어 들어갔습니다. 죽어도 그속에 살고자 했습니다. 자기를 죽이는 바나나를 끝까지 놓지 않는 어리석은 원숭이 같습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은 이런 롯을 끝까지 사랑했습니다. 그를 어찌하든지 살리고자 하는 심정과 책임감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롯과 그 가정을 생각하며 불개미정신을 가지고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결국 소돔성은 의인 열 명이 없어서 멸망을 당하게 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소돔성을 멸망시키는 과정에서 아브라함의 중보기도를 생각하사 롯과 그 가정을 구원하셨습니다(19:29).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대화를 마치고 가셨고 아브라함도 자기 곳으로 돌아갔습니다. 두 천사가 소돔에 이르렀을 때 롯도 아브라함처럼 두 천사에게 엎드려 절하며 자기 집으로 모시고자 했습니다. 원래 천사들은 거리에서 소돔의 밤문화를 보며 그들의 죄를 확인하고자 했습니다. 하지만 롯이 간청하자 어쩔 수없이 롯의 집으로 들어갔습니다. 롯이 그들을 위해서 저녁식사를 준비했는데 아내와 딸들이 손님이 왔는데도 얼굴도 내비치지 않았습니다. 아마 그녀들은 방에서 TV 드라마를 보거나 아이돌가수에 푹 빠져있었던 것같습니다. 그래서 롯이 혼자 토스트를 구워서 손님을 접대했습니다. 천사인 두 사람이 식사 후 잠자리에 들고자 했을 때 소돔백성들이 노소를 막론하여 롯의 집에 몰려들어 그 집을 에워쌌습니다. 그들은 롯을 부르면서 “오늘 밤에 너의 집에 들어온 사람들을 끌어내라”며 그들을 상관하겠다고 말했습니다. 상관이란 Homosex 동성간 성행위를 말합니다(유1:7). 천사들이 롯의 집에 들어간 것을 본 어떤 사람의 의해 즉시 동성애커뮤니티에 소식이 전파되었습니다. “끝내주는 미남청년 두 명 롯의 집에 들어갔다. 관심있는 사람, 다 모여라!” 그러자 그걸 본 소돔성의 동성애자들이 다 모였습니다. 가슴에 털난 동성애자들이 머리에 띠를 두르고 오토바이를 타고 나타났습니다. 이들은 동성애에 대해 조금 부끄러워하지 않고 대놓고 그것을 추구했습니다. 롯은 문밖의 사람들에게 나가 뒤로 문을 닫고 그런 악을 행하지 말라고 부탁했습니다. 대신 남자를 가까이 하지 않은 두 딸을 그들에게 줄터니 그것으로 만족하고 두 청년들에게는 아무일도 저지르지 말라고 부탁했습니다. 동성애자들은 그것을 거부했습니다. 롯이 소돔에 들어와 거류하면서 자신들의 법관이 되려 했다고 하며 그동안의 억하심정까지 쏟아내며 롯을 해치고자 했습니다. 롯을 밀치고 집 가까이 와서 문을 부수려 했습니다. 그들은 정욕에 미쳐 있었습니다. 그러자 천사들이 그들의 눈을 멀게 하여 그들이 문을 찾지 못하게 하여 롯을 보호했습니다. 소돔성의 죄악에 대해 생각해 봅니다. 소돔성의 죄악은 법관을 거부하는 그들의 말속에 잘 담겨있습니다. 법관은 옳고 그름을 판단하고, 선과 악을 규정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소돔성 사람들은 선악의 개념자체를 싫어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좋아하면 어떤 것이든 선이고 자신들이 싫어하면 그것이 악이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이 되어 선악을 정하고 자기원하는 데로 살았습니다. 그들은 선과 악을 말하는 사람들을 꼰대로 여기고 싫어하고 배척하고 해하려 했습니다. 그들에게 ‘죄의식’은 밟아버려야 할 잔디 풀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이런 그들은 동성애에 대해서도 일말의 수치심, 죄의식도 없었습니다. 그리고 죄의식을 심는 자들은 없애버려야 할 존재들로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의 죄가 심히 무겁다며 심각하게 보신 것은 그들의 죄가 도덕 윤리적인 차원을 넘어섰기 때문입니다. 천사들은 롯뿐 아니라 롯에게 속한 사람들에게 은혜를 베풀려 했습니다. 롯은 아내와 딸들에게 말한 후 딸들과 결혼할 예비사위들을 찾아가 말했습니다. 그러자 그들이 말했습니다. “심판이요? 예이, 장인어른, 농담두” “Are you joking?” 동이 트자 천사들은 자고 있는 롯을 깨우며 아내와 딸을 데리고 나가도록 재촉했습니다. 그러나 롯이 지체했습니다. 그러자 천사들이 롯과 그 아내와 두 딸의 손을 잡아 끌어서 성밖으로 나가게 했습니다. 그리고 돌아보거나 머물지 말고 멀리 있는 산으로 앞만 보고 도망치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롯은 두려움에 사로잡혔습니다. 멀리 있는 산까지 도망치다가 도중에 죽을까봐 염려했습니다. 그는 가까운 성읍에 도망할 수 있도록 선처를 호소합니다. 그러자 천사는 겨우 구원받는 주제에 말이 많냐고 하지 않고 그 청원도 들어주었습니다. 멸해야 할 성읍이지만 멸하지 않을 테니 그곳으로 도망하라고 배려해주었습니다. 그 성읍이 소알 성인데 롯이 그 소알 성에 들어갔을 때 해가 돋았고 여호와께서 불과 유황을 소돔과 고모라에 비같이 내리셨습니다. 비같이 내리셨다는 것은 피할 길이 없이 쏟아 부으셨다는 의미입니다. 소돔과 고모라 성과 그 성에 속한 들과 그곳에 사는 모든 백성들과 땅에서 난 것들을 다 엎어 멸하는 무서운 심판이었습니다. 이 와중에 어떤 일이 벌어졌습니까? 롯의 아내가 뒤를 돌아봄으로 소금기둥이 되었습니다. ‘뒤돌아보다’는 말에 ‘집요하게 바라보았다’라는 의미가 담겨있습니다. 롯의 아내는 겨우 마련한 최고급 아파트가 무너지는 것이 너무 안타까워 자꾸 뒤를 돌아보다가 그만 유황불똥에 맞아 멸망당하고 말았습니다. 아침에 일찍 일어난 아브라함이 중보기도 했던 자리에서 소돔과 고모라를 바라보았습니다. 그의 눈에는 소돔과 고모라와 온 지역이 불과 유황에 맞아 연기들이 치솟는 것이 보였습니다. 아브라함은 롯이 걱정되었을 것입니다. 30절 이하를 보면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은 롯의 부끄러운 모습이 나옵니다. 이것이 성경에 기록된 롯의 최후입니다. 롯의 딸들은 분명한 말씀교육이 이루어지지 않아 소돔과 고모라의 성관념의 영향을 받아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어지럽히는 성행위를 하여 아들인지 손자인지 불분명한 모압과 벤암미를 낳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롯은 심판중에 구원받은 사람입니다. 이러한 롯이 구원받은 것은 자기공로 때문이 아닙니다. 그를 위한 아브라함의 간절한 중보기도가 그 원동력입니다.
우리도 롯처럼 분명하고 절대적으로 말씀대로 살지 못했습니다. 반복된 주님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죄의 소굴에 빠져 나오지 못했습니다. 영적으로 민감하여 죄로부터 분명하고 빠르게 도망치지도 못하고 자꾸 미련 때문에 뒤를 돌아보고 지체하는 자들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어떻게 구원받았습니까? “누군가 널 위하여 누군가 기도하네” 하나님 보좌우편에서 죄에 발목잡혀 있는 우리를 위해서 간절히 기도하신 분이 계십니다(롬:34). 예수님의 중보기도의 힘으로 우리가 구원받았고 지금도 그 은혜로 살고 있습니다. 본문에서 말하는 것은 예수님의 중보기도가 아니라 사람의 중보기도입니다. 아브라함은 롯의 목자이고 영적인 아비 입니다. 아브라함은 뺀질이 양인 롯을 위해 끝까지 끈질긴 기도를 드렸습니다. 아브라함은 왜 롯을 끝까지 책임지려 했을까요? 아브라함은 골육의 친척인 롯에 대한 애정과 책임감이 있었습니다. 우리 인간 모두에게는 자신의 골육의 친척에 대한 사랑과 책임감이 있습니다. 모세는 자기의 생명을 걸고 자기 백성들을 위해 기도했습니다. 바울은 심지어 자신이 그리스도에게 끊쳐지는 희생 곧 영적 생명을 걸고 골육의 친척을 위해서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은 이 골육의 친척에 대한 애정과 책임감을 중보기도의 원동력으로 귀하게 쓰십니다. 골육의 친척은 아니어도 하나님이 내게 책임감을 부여하신 영혼이 있습니다. 중보기도의 여왕 모니카도 중보기도에 대해서 회의를 품은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암브로시스 주교는 “기도의 자식은 결코 망하지 않습니다.” 라고 격려하였고 다시 중보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을 굳게 믿고 기도했을 때, 결국 엄청난 뺀질이요 대왕 미꾸라지인 어거스틴이 구원을 받고 위대한 말씀의 종이 되었습니다.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있습니다(약 5:16b).
여름수양회는 심판받을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 주님이 예비하신 구원의 잔치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양들을 이 수양회에 초청할 수 있습니까? 우리가 양들에게 말할 때 양들은 우리의 말을 가볍게 여깁니다. 지나가는 말 정도로 듣고 그냥 흘려버립니다. 여러 가지 자기 계획을 이야기 하며 어려울 것같다고 합니다. 양들은 전보다 자기 생각이 강하고, 자기계획대로 삽니다. 또한 양들의 발목을 붙잡는 죄의 유혹은 예전보다 훨씬 더 강합니다. 우리가 이런 양들을 어떻게 도울 수 있을까요?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한 깊은 무력감을 느낍니다. 아브라함은 자신의 작고 무력함을 “티끌 같은 나, 재 같은 나‘라는 말로 표현했습니다(18:27). 티끌은 너무나 작고 보잘것없습니다. 바람 부는 대로 날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재는 모든 것이 다 타고 남은 것으로 아무런 힘도 소망도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티끌 같고 재 같은 우리가 무슨 일을 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역사를 섬기고 싶어도 무력감만 느낍니다. 그러나 이런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아 강력하게 일할 수 있는 방법입니다. 그것은 중보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하나님은 그 기도를 들으시고 당신의 천사들을 통해 일하십니다. 천사들의 강력한 힘으로 양들의 손을 잡아 이끌어주십니다. 우리가 남은 한 달 동안 간절히 중보기도하므로 초청역사에서 천사들의 손이 역사하는 것을 체험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결론적으로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택하신 목적은 그를 당신의 파트너, 친구 삼아 하나님나라를 세우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구체적으로 열심히 말씀을 가르치고 중보기도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나라 천국잔치인 여름수양회를 위해서, 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일인 중보기도를 믿음으로 잘 감당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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