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창세기 23강 꿈꾸는 요셉 말씀 창세기 37:1-38:30 요절 창세기 37:9 요셉이 다시 꿈을 꾸고 그의 형들에게 말하여 이르되 내가 또 꿈을 꾼 즉 해와 달과 열한 별이 내게 절하더이다 하니라 오늘 본문은 꿈이 있었던 사람 요셉과 꿈이 없었던 사람 유다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요셉의 꿈은 무엇이었습니까? 그는 어떻게 해서 꿈을 가질 수 있었습니까? 이시간 사랑하는 이들에게 꿈을 주시고 그를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잘 배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야곱은 이스라엘로 개명되었고 그의 열두 아들들을 통해 이루어진 민족이 바로 이스라엘 민족입니다. 37-50장은 이스라엘 족속이 애굽으로 이주하여 그곳에서 민족을 이룬 내력을 적고 있습니다. 본문은 이스라엘 족속중 야곱의 11번째 아들 요셉이 먼저 애굽에 간 내용입니다. 요셉은 17세 소년이었는데 형들과 함께 양을 쳤습니다. 그런데 야곱의 아들들은 두 그룹으로 나누어 양을 쳤습니다. 한 그룹은 주류그룹으로 레아의 아들들이었습니다. 다른 그룹은 주로 어머니가 종이었던 아들들과 엄마가 돌아가신 케이스였습니다. 이들은 비주류였습니다. 사람이 자신의 탄생을 귀하게 여기고 의미부여할 때 삶을 아끼고 함부로 살지 않습니다. 그런 측면에서 B그룹은 자신의 운명을 탓하며 막 살았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달랐습니다. 요셉이 형들의 잘못을 아버지에게 알렸다는 것은 기본적으로 그가 형들처럼 살지 않았다는 것을 전제합니다. 이런 요셉은 형들에게 결국 자기만 잘난 체하는 놈, 첩자로 낙인찍히고 미움을 샀을 것입니다. 아버지 야곱은 요셉을 얼마나 사랑했습니까? 야곱은 요셉을 특별히 사랑했습니다. 사랑하는 라헬이 뒤늦게 낳았기 때문만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사랑할만한 구석이 많이 있었을 것입니다. 의롭고 정직한 점, 지혜로운 점, 무엇을 맡기면 충성스러운 점, 용모가 아주 빼어나게 아름다운 점들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야곱은 특별한 사랑을 요셉에게 쏟아부었습니다. 왕자가 입을만한 채색 옷을 그에게만 지어 입혔습니다. 이것은 틴에이저요 20대를 갓 넘긴 형들이 보기에는 못마땅한 것이었습니다. 20대 형들은 아버지가 아이를 버르장머리 없이 키우고 왕자병걸리게 한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틴에이저 형들은 요셉을 시기하고 아버지와 요셉을 모두 미워했을 것입니다. 형들은 요셉을 어느 정도로 미워했습니까? 그에게 편안하게 말할 수 없었습니다. 이 말은 그에게 형들이 매사에 못마땅하고 퉁명스럽게 대했음을 뜻합니다. 원어상으로 보면 “안녕”이라는 인사말도 건네지 않는 관계였습니다. 보고도 모른 체하고 인사도 하지 않고 지나쳤습니다. 이렇게 야곱이 요셉을 편애한 것은 야곱이 명백히 잘못한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보이지 않는 가운데도 깊은 사랑을 표시할 수도 있는데 말입니다. 하지만 특별한 사랑을 받게 되면 사람이 자존감이 높아지고 내적으로 강해집니다. 요셉은 이후에 낮아지고 억울한 일을 많이 당합니다. 그러나 자존감이 높고 내면이 강했기에 슬픔과 자괴감에 빠지지 않고 고난을 참고 일어설 수 있었습니다. 왜 요셉이 형들에게 더욱 미움 받는 존재가 되었습니까? 그것은 요셉이 꿈을 꾸고 형들에게 말한 것 때문이었습니다. 형들은 요셉의 이야기를 듣고 싶지 않은데 요셉은 말했습니다. “청하건대 내가 꾼 꿈을 들으시오” KJV를 보면 요셉은 형들에게 꿈 이야기를 하면서 “Behold(보소서)” 라는 감탄사를 5번이나 사용했습니다. 이는 스스로 감탄하고 흥분하며 꿈 이야기를 한 것입니다. 요셉이 꾼 꿈의 내용은 더욱 형들을 화나게 했습니다. 그 꿈의 내용은 형들이 벤 곡식단들이 요셉이 벤 곡식단을 빙 둘러서더니 요셉의 곡식단을 향해 절을 하더라는 것이었습니다. 절이라는 것은 낮은 사람이 높은 사람에게 복종과 존경을 표하거나 상대방에게 깊은 감사를 표시하는 행위입니다. 형들로서는 아주 기분 나쁜 이야기가 아닐 수 없었습니다. 요셉은 다시 꿈을 꾸었습니다. 그 꿈의 내용은 더 나갔습니다. 해와 달과 열한 별들이 자신에게 절을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요셉은 이 꿈을 형들에게 말했고 그 후 아버지와 형들이 함께 있을 때에 또 말했습니다. 그러자 아버지 야곱이 그를 꾸짖었습니다. “네가 꾼 꿈이 무엇이냐 나와 네 어머니와 네 형들이 참으로 가서 땅에 엎드려 네게 절하겠느냐” 꿈을 들었을 때 형들과 아버지 야곱은 정확하게 해석했습니다. 그것은 요셉이 왕이 되어 형들을 다스리며 부모님들과 형들도 요셉에게 복종하고 요셉을 높히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형들은 요셉의 말을 듣고 “꿈의 끝판왕이구만” “해도 너무 하네” “미친 거 아냐”라고 판단하고 미워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꿈의 사람이었던 아버지 야곱은 그 꿈을 마음에 담아두었습니다. 요셉의 꿈 이야기는 창세기 종반부 이야기가운데 아주 중요합니다. 창세기 종반부는 그의 꿈이 이루어지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요셉의 꿈이 만약 개꿈이라면 아무런 의미도 없습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종종 꿈은 하나님의 계시의 일환이었습니다. 민수기 12:6절에 보면 하나님은 환상이나 꿈으로 혹은 대면하여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모든 꿈이 다 하나님의 계시는 아닙니다. 깊은 염려나 욕망이 무의식중에 형상화되기도 합니다. 또 사탄이 주는 것도 있습니다. 그러기에 꿈꾸는 자를 죽이라고까지 하면서 꿈에 대해 부정적으로 언급하기도 했습니다(신 13:1,3,5). 창세기 15:12-16절에 아브람이 깊이 잠들었을 때에 하나님이 그에게 200~600년 후의 일을 말씀하셨습니다. 야곱은 벧엘에서 불안한 가운데 잠이 들었는데 사닥다리 꿈을 꾸었습니다. 그 꿈에서 하나님은 야곱에게 그를 지키시고 보호하실 것을 약속했습니다(창 28:12-15). 또한 35:11-13절에서는 꿈에 하나님의 사자가 나타나 야곱이 라반을 이길 수 있었던 이유를 보여주었습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성령이 임하면 자녀들은 예언하고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고 했습니다. 환상과 꿈의 차이는 생시에 보는 가, 잠든 가운데 보는 가의 차이일뿐 큰 의미는 없습니다. 환상과 꿈과 예언의 말씀은 모두 장차 하나님이 하실 일을 미리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환상이냐 꿈이냐 예언의 말씀인가가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정확도로 하면 꿈 < 환상 < 말씀 순 입니다. 왜 하나님은 이처럼 이루어질 일을 미리 보여주십니까? 그것은 그것이 이루어졌을 때 하나님이 인생과 역사의 주관자이심을 드러내기 위함입니다.
오늘날 꿈이란 단어는 잠들 때 무의식중에 일어나는 잠재의식의 현상으로 특정되지 않고 의식 중에서도 미래에 이루어질 일들을 소망하는 것을 가리키는 말로 쓰입니다.
꿈을 가지는 것이 얼마나 큰 삶의 차이를 가져옵니까? 미래에 대한 하나님이 주신 꿈이 있는 사람들은 함부로 살지 않습니다. 자신의 삶을 귀히 여기고 유혹과 싸웁니다. 고난에 좌절하지 않고 다시 일어나는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함부로 유혹에 넘어가고 고난에 픽픽 쓰러지는 것을 보면 그에 대해 여러 가지 분석을 할 수 있지만 그에게 하나님이 주신 꿈이 없기 때문이 큰 이유입니다. 그러면 꿈은 어떻게 갖는 것입니까? 꿈은 사람이 가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꿈꾸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이 자신이 갖는 꿈은 야심이라고 하고 하나님이 주신 꿈은 비전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어떤 사람은 요셉이 꾼 꿈이 총리가 되는 것으로 잘못 알고 세상적으로 높은 사람이 되는 것을 하나님이 주신 꿈으로 이해합니다. 그러나 요셉이 꾼 꿈의 본질은 하나님의 백성의 모태가 되는 야곱의 12아들과 그 식구들을 경제기근으로부터 살려내는 것입니다. 세속사에서 유명한 사람이나 높은 사람이 되는 것이 꿈의 핵심이 아닙니다. 세상에서 높은 사람이 되는 것은 그럴 수도 있고 안 그럴 수도 있습니다. 총리가 될 수도 있고 하급공무원이 될 수도 있습니다. 요셉의 꿈은 창조질서를 회복한 사람들 곧 하나님을 인정하고 하나님께 순종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살려내고 그들을 번성케 하는 데 쓰임받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이스라엘 족속을 보존하고 그 후손가운데 예수 그리스도가 오셔 구원역사를 완성하게 하는 것입니다. 때문에 만약에 어떤 사람이 세상에서는 무명의 사람이나 하나님의 백성들을 보존하고 번성하게 하는 데 귀하게 쓰임 받았다면 그가 바로 요셉의 꿈을 이룬 사람입니다. 예수님의 사도들과 사도바울이 그렇습니다. 우리가 대단하게 여기는 야심의 대상인 세상 명예와 권세는 바람처럼 사라지고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들만 영원히 남기때문입니다(요일 2:16,17). 하나님의 백성의 생명을 살리는 일이 요셉의 꿈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이 꿈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서 많이 말씀하신 예수님은 “이스라엘 나라의 회복은 너희의 알바가 아니다. 성령이 임하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나의 증인이 될 것이다.”(행 1:6-8) 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꾸게 하신 꿈은 이스라엘 나라의 정치적 회복이 아니었습니다.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님을 영접한 한 사람 한 사람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바울의 꿈은 만유회복과 새 하늘 새 땅이 펼쳐지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에 우리의 썩을 몸이 부활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소망가운데 복음이 온 세상에 전파되면 주님이 오시기에 이 땅에 세계선교가 완성되기를 꿈꾸었습니다. 예수님은 성서이스라엘과 세계선교의 꿈을 제자들에게 꾸게 하셨습니다. 구체적으로는 주님의 어린 양을 먹이고 제자를 삼도록 하셨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의 현실은 어떠했습니까? 자신도 믿음이 없어 의심하는 이도 있었습니다. 그들은 서로 사랑하지도 못하였습니다. 이런 그들이 어떻게 다른 사람을 돕고 성서이스라엘과 세계선교를 이룬단 말입니까? 꿈같은 이야기였습니다. 그러나 꿈은 이루어졌습니다. 왜 입니까? 하나님이 주신 꿈이었기 때문입니다. 꿈은 하나님이 주시고 이루시는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에게 과연 꿈이 이루어질까 하는 의심이 있습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이 주신 꿈에 대한 좌절이 있습니다. 하지만 원래 꿈은 이루어지지 않을 것 같은 비현실성을 가지고 있고 이것이 꿈의 속성입니다. 2002년 한국이 월드컵 4강을 이루리라고 생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꿈은 이루어졌습니다. 1963년 8월 28일 워싱턴 링컨 기념관 광장에서 25만여 명의 군중이 모인 데서 마르틴 루터 킹 목사가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I have a dream) 라는 유명한 연설을 했습니다. “언젠가는 조지아의 붉은 언덕 위에 예전에 노예였던 부모의 자식과 그 노예의 주인이었던 부모의 자식들이 형제애의 식탁에 함께 둘러앉는 날이 오리라는 꿈입니다. 언젠가는 불의와 억압의 열기에 신음하던 저 황폐한 미시시피 주가 자유와 평등의 오아시스가 될 것이라는 꿈입니다. 나의 네 자녀들이 피부색이 아니라 인격에 따라 평가받는 그런 나라에서 살게 되는 날이 오리라는 꿈입니다.” 마르틴 루터 킹 목사님이 인권운동을 하던 그 시절에는 버스에 백인이 서 있으면 흑인은 자리에서 일어나야 했습니다. 흑인과 개는 사절이라는 표지판이 곳곳에 달려있었습니다. 여행객이 모텔에 투숙하려해도 흑인이라고 거절당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킹 목사님에게 꿈을 주셨고 그 꿈은 이루어졌습니다. 46년 만에 흑인대통령이 탄생하였고 흑인과 백인의 인권은 완전히 평등하게 되었습니다. 교만하고 이기적인 내가 다른 사람을 깊이 존중하고 그를 위해 전폭적으로 섬긴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합니다. 나 하나도 감당하지 못하는 사람이 한 사람을 섬기고 열두 제자를 키운다는 것은 역시 어느 세월에 이루어질지 모르는 꿈같은 이야기입니다. 내가 선교사로 나아가 피부색이 다르고 언어가 다른 사람들을 섬기고 제자로 키우리라는 것은 꿈같은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꿈은 이루어집니다. 그리고 꿈이 있는 인생만이 살 가치가 있습니다. 자기를 채찍질하고 유혹을 거절하고 고난을 떨치고 일어날 힘을 갖습니다. 여러분은 꿈이 있습니까? 아버지 야곱은 요셉에게 물었습니다. “네가 꾼 꿈이 무엇이냐” “What is your dream?” 요셉은 반복하여 꿈을 꾸었습니다. 그 꿈이 너무나 분명해서 자신만 간직할 수 없었습니다. 형들도 나중에 그 꿈이 이루어지는 지 증인이 되어야 했기에 결국 말하게 되었습니다. 그 꿈은 17살 청년 요셉을 흥분시키고 설레게 했습니다. 성서한국 세계선교의 꿈은 UBF 청년들의 가슴을 설레고 흥분하게 했습니다. 꿈이 있을 때 movement가 일어납니다. 자신을 바치고 헌신합니다. 꿈이 있으면 그는 청년입니다. 사도행전 2:17절에서 젊은이는 환상을 보고 늙은이는 꿈을 꾸리라고 했습니다. 늙었어도 꿈을 꾸는 분은 여전히 청년입니다. 마르틴 루터 킹 목사님은 39세의 나이로 죽습니다. 그런데 검시를 해보니 그의 심장은 60세의 심장이었습니다. 그 이유는 아마도 그의 꿈이 그의 심장을 날마다 불태웠기 때문입니다. 꿈이 없는 우리는 그냥 심장만 60세 심장이 되어버리진 않았습니까? 우리는 꿈이 애초부터 없었습니까? 도중에 사라져 버린 것입니까? 믿음이 없어 꿈을 놓아버렸나요? 우리가 꿈을 회복할 수 있길 기도합니다. 하나님은 어떤 사람에게 꿈을 주십니까? 물론 하나님의 주권이 있겠지만, 요셉은 불의와 타협하지 않았습니다. 죄를 짓지 않았습니다. 순수하고 충성된 사람이었습니다. 청소년기를 보호하는 것은 꿈밖에 없습니다. 꿈이 없는 청소년은 막가파가 되고 인생을 허무한 일에 낭비합니다. 우리가 죄를 버리고 마음을 청결하게 할 때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에게 꿈을 주십니다. 우리가 깨끗한 그릇이 될 때 하나님의 영이 임하고 하나님의 꿈이 주어집니다. 하나님은 더러운 그릇에는 거룩한 꿈을 주실 수 없습니다. 우리가 죄를 먹고 마실 때 있던 꿈도 사라집니다. 우리가 다시 회개하므로 하나님이 꿈을 담아 주실 수 있는 성령의 그릇들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그리하여 다시 꿈을 품고 기대와 설레임가운데 기도의 단을 쌓고 하나님의 구속역사를 섬길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저는 이번 가을학기에 2명의 신입생들의 변화를 꿈꿉니다. 종로센터가 서로 사랑하며 영적질서를 가지고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어가는 파워스테이션이 되기를 꿈꿉니다. 우리나라가 제사장나라가 되어 세계를 섬기는 것을 꿈꿉니다. 청년들이 돌아오는 것을 꿈꿉니다. 제가 유능한 말씀의 종이 되고 사랑의 목자가 되기를 꿈꿉니다. 꿈이 있다면 꿈에 걸맞게 행동하라는 말이 있습니다. 제가 더욱 꿈을 분명하게 하고 꿈에 걸맞은 실제적인 수고를 감당하기를 기도합니다. 12-17절을 보십시오. 요셉은 아버지의 명령을 받들어 자신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형들을 찾아 갑니다. 세겜까지 약 80km되는 거리를 찾아갑니다. 그리고 그곳에 형들이 없자 다시 북쪽으로 30km 떨어진 도단까지 갑니다. 그는 누가 자신에게 일을 맡기면 이렇게 했습니다. 작은 일에 충성하는 자는 큰 일에도 충성합니다. 이런 그의 충성심은 아버지 심부름할 때나 보디발 장군이 맡긴 일을 할 때나 바로가 맡긴 나라 일을 할 때나 동일했습니다. 18-36절은 꿈이 없는 형들의 모습입니다. 그들은 요셉을 미워했습니다. 그래서 요셉이 올 때 죽이기로 모의하며 “그의 꿈이 어떻게 되는 지 우리가 볼 것이라” 라고 했습니다. 그들은 요셉을 죽이고자 구덩이에 빠뜨렸지만 르우벤과 유다의 제의로 죽이지는 않고 애굽에 노예로 팔았습니다. 그리고 아버지에게는 요셉의 채색 옷에 피를 묻혀 짐승이 죽였다고 거짓말을 했습니다. 꿈이 없는 이들의 모습은 정말 비행청소년들의 모습 그 이상이었습니다. 요셉은 미디안 상인들에 의해 애굽의 보디발 장군의 노예로 팔렸습니다. 표면적으로 볼 때 그의 삶은 꿈과 반대로 갔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꿈을 이루기 위한 지름길로 가고 있었습니다. 그는 지도자가 되기 위해 가장 밑바닥 인생을 살며 섬기는 훈련을 받아야 했습니다. 또한 자립적인 믿음을 배우기위해 아버지집이 아닌 머나먼 타향에서 훈련받아야 했습니다. 38장은 형제들 가운데 유다의 방황과 허물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유다는 형제들 가운데 나름괜찮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꿈이 없는 그의 삶은 어떠했습니까? 38:1 절을 보면 유다는 아버지와 형제들을 떠납니다. 이는 그가 요셉을 잃고 힘들어하는 아버지를 보기가 죄송하고 죄를 저지른 공범자 형제들과 같이 있는 것이 괴로웠기 때문입니다. 그는 세상 친구인 아둘람 사람 히라를 사귑니다. 그리고 가나안 사람 수아라 하는 이의 딸을 보고 맘에 들어 그녀와 동거합니다. 그래서 아들 엘과 오난과 셀라를 낳습니다. 그들이 자라자 유다는 장자 엘을 위해 다말이란 가나안 여자를 며느리로 데려옵니다. 이런 일련의 과정에서 그는 하나님의 뜻을 묻거나 부모님과 상의한 바가 전혀 없습니다. 이런 삶의 결과는 어떠했습니까? 장자 엘이 여호와 보시기에 악하여 여호와께서 그를 죽이셨습니다. 유다는 오난에게 형사취수를 명했습니다. 이에 오난은 형수에게 태어날 아이가 자신의 씨가 되지 않고 결과적으로 자신의 상속분이 줄어들 것을 알고 악한 짓을 했습니다. 결국 하나님이 그도 죽이셨습니다. 이런 면에서 유다는 믿음의 결혼에 실패자요 자녀교육에도 실패한 자였습니다. 얼마 후에는 그의 가나안 아내마저 죽고 말았습니다. 그의 인생은 저주받은 인생처럼 보였습니다. 이런 그는 불행의 주요한 원인을 며느리 때문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셀라가 장성했어도 셀라를 그녀에게 주지 않았습니다. 유다는 며느리 다말과 약속을 지키지 않았고 다말은 가부장적 사회에서 결국 과부로 살다가 죽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다말은 그렇게 운명적으로 살다 죽지 않습니다. 자신을 창녀로 위장하여 시아버지를 유혹하여 아이를 임신했습니다. 이 다말의 행위를 도덕, 윤리적으로 비난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룻기 4:12절에서 다말을 언약의 계보를 이어가게 하고 유다의 집안을 세운 공로자로 칭송하고 있습니다. 다말은 정욕 때문에 시아버지를 유혹한 것이 아닙니다. 그녀는 생명을 사랑했고 언약의 계보가 이어지길 원했습니다. 창세기에서 생명의 출산과 번성이 선이고 축복입니다. 또한 구속사의 계보가 이어져가는 것이 최고의 선이며 축복입니다. 다말은 운명에 굴하지 않고 이 일을 이루었고 이 일에 쓰임 받았습니다. 그가 한 번에 임신한 것을 볼 때 그는 하나님께 기도했고 하나님은 그녀의 기도를 받으시고 그녀를 축복하셨습니다. 우리도 시대나 자신을 탓하지 않고 하나님의 구속역사에 생명을 낳고 키우며 영적인 계보를 이어감으로 다말처럼 하나님의 역사를 살리는 사람들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결론입니다. 꿈은 사람을 유혹으로부터 지키고 고난을 이기게 합니다. 꿈꾸는 사람은 항상 청년입니다. 꿈은 아무에게나 주어지지 않고 깨끗한 심령을 가진 이에게 주어집니다. 우리의 꿈은 세상에서 잘 먹고 잘 살고 유명해지고 높아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꿈은 하나님의 구속사에서 생명을 구원하고 예수그리스도를 전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는 것입니다. “네 꾼 꿈이 무엇이냐” 우리에게 분명한 꿈이 있습니까? 우리도 우리를 흥분시키는 요셉의 꿈을 다시 꿀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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