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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2023년 신년2강 `마음을 같이하여 모이기를 힘쓰고⁠`(사도행전 2:42-47)2023-01-09 03: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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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신년 제 2

 

마음을 같이하여 모이기를 힘쓰고

 

말씀 / 사도행전 2:42-47

요절 / 사도행전 2:46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부활 승천하신 예수님은 약속하신 성령을 오순절에 보내주셨습니다. 성령에 충만한 사도 베드로는 예루살렘에 모인 무리들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의 말씀을 통해 예수님을 영접하고 세례 받은 사람이 삼천 명이나 되었습니다. 이들 중 디아스포라들은 오순절 후에 자기 나라로 돌아갔습니다. 그러나 예루살렘에 거주하는 상당수의 사람들이 당초 120 명의 제자들의 수에 추가되었습니다. 이들에 의해 바로 최초의 기독교 신자 공동체 곧 신약 교회가 탄생되었습니다. 이 교회는 성령께서 친히 세우신 교회입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이 교회가 아무 문제가 없는 완벽한 교회라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교회의 원형으로서 아름다운 모습들을 갖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주님이 기뻐하시는 교회의 모습을 배우고 우리도 이러한 공동체를 이룰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42절입니다. "그들이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쓰니라." 저자는 최초로 탄생한 교회의 모습을 말하면서 그 교회는 무엇보다 사도의 가르침을 받는 교회라고 말합니다. KJV에는 "they continued stedfastly in the apostles' doctrine"으로 되어 있는데, "흔들림 없이 계속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았다는 뜻입니다. NIV에는 "They devoted themselves to the apostles' teaching"으로 되어 있습니다. 'devote' '헌신하다' 또는 '전념하다'라는 뜻이죠. 예루살렘 초대 교회는 사도들로 부터 배우는 일에 헌신하고 전념하는 교회였습니다.

 

무엇보다 초기 신자들은 흔들림 없이 헌신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요즘에는 지난 3년간 코로나 시대를 겪으며 어디에도 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신앙생활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소비자 중심 시대를 살면서 신앙생활도 인터넷 쇼핑하듯이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여기가 좋을까? 아니 저기가 더 좋지. 이게 재미있을까? , 저것이 흥미로운데.. , 이건 시간 낭비야, 다른 것 찾아볼까?" 합니다. 내가 좋으면 하고 좋지 않으면 하지 않습니다. 무슨 책임을 지는 일에 매이기 원치 않습니다. 그런 자세는 '헌신'(devotion)이 아닙니다. 초대교회는 '헌신'하는 교회였습니다. 여건이 되던 안 되던, 자기가 편하던 불편하던 책임성과 지속성을 갖고 참여하였습니다.

 

그들은 무엇에 헌신하였습니까? "사도의 가르침을 받는 일에" 헌신하였습니다. 그저 자기 뜻대로 무엇을 행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먼저 말씀을 배우는 일에 헌신하였습니다. 곧 그들의 신앙생활은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그 말씀에 기초한 것입니다. 이 사실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예를 들어 우리는 기도가 귀한 것임을 다 압니다. 그러나 기도도 하나님의 뜻, 곧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한 것이 아니하면 소용이 없습니다. 잠언 28:9은 말합니다. "사람이 귀를 돌려 율법을 듣지 아니하면 그의 기도도 가증하니라." 우리가 보기에 가장 고상한 기도도 말씀을 떠나면 가증한 것이 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의 기초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래서 먼저 말씀을 잘 배워야 되는 것입니다.

 

본문은 초대교회 성도들이 사도의 가르침을 받는 일에 전념하였다고 합니다. 원문이나 영어를 보면 사도는 복수형인데 따라서 정확한 번역은 '사도들의 가르침'이 되겠습니다. “사도의 가르침"이란 가르치는 사람들이 사도적 권위를 갖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또한 배우는 사람은 사도적 권위를 가진 말씀으로 받는 것입니다. 당시에는 예수님의 12사도들이 살아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직접 모셨던 자들이며 그리스도로부터 직접 배운 자들입니다. 특히 하나님께서 그들로 특별한 이적과 기사를 행하게 하셔서 그 가르치는 말씀에 권위를 더하여 주셨습니다. 오늘날 이런 의미에서 사도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사도적 가르침은 지금도 존재합니다. 성령이 충만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잘 풀어 가르칠 때 그것이 영적 권위가 있는 사도적 가르침인 것입니다. 또한 그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일 때 사도적 가르침을 받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데살로니가 성도들이 좋은 본이 됩니다. 데살로니가전서 2:13은 말합니다. "이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끊임없이 감사함은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 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받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 진실로 그러하도다 이 말씀이 또한 너희 믿는 자 가운데에서 역사하느니라." 가르치는 자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고 가르쳤고, 배우는 자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고 받았습니다. 그럴 때 그들 가운데 말씀이 강력하게 역사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토론한다고 깨닫는 것이 아닙니다. 서로 합의하여 말씀의 의미를 결정하는 것도 아닙니다. 신앙공동체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잘 연구하고 사도적 권위로 가르치는 사람들이 있어야합니다. 그런 역할을 하는 종들을 위해 열심히 기도해주어야 합니다. 또한 배우는 사람들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믿음을 갖고 받아야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의 말씀이 능력으로 나타납니다. (4:2) 초대교회는 지속적으로 사도의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그것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고 배우는 일에 헌신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성도의 교제, 기도, 구제의 기초가 되었습니다. 우리도 예루살렘 초대교회 성도들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는 일에 헌신하기를 기도합니다.

 

42절을 다시 보십시오. "그들이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쓰니라." "교제"라는 말은 '코이노니아'인데 '참여', '나눔', '사귐'이라는 뜻입니다. 이들의 교제가 어떤 교제였을까요? 그냥 같이 먹고 마시며 세상을 살아가는 이야기를 나눈 것이었을까요? 모여서 운동이나 정치 얘기하며 같이 시간 보낸 것일까요? 아닙니다. 앞에서 보았듯이 그들은 먼저 사도의 가르침을 받는 것에 전념했습니다. 말씀을 배우고 그 배운 은혜를 나누고, 서로 격려하며, 실천하는 그런 교제를 한 것입니다. 곧 말씀 중심의 교제를 한 것입니다.

 

한 중학교 2학년 아들로 인해 많은 고통을 받고 있는 사모님이 있었습니다. 그 아들은 하루 종일 스마트폰만 보고 게임을 합니다. 집에서 낮과 밤을 가리지 않고 꽥꽥 소리를 지르며 노래를 합니다. 아빠가 책망해도 전혀 듣지 않고 도리어 대듭니다. 집 근처 나가 담배를 피다가 들어옵니다. 같은 집에 사는 딸아이는 너무 스트레스 받아 웁니다. 이런 사모님이 모임에서 소감을 발표하였습니다. 그때 비슷한 문제를 가진 다른 사모님이 자기의 어려움도 공유합니다. 자기는 그 문제를 어떻게 극복하고 있는지 말해줍니다. 이를 통해 이런 문제가 자기만 갖고 있는 문제가 아님을 알고 위로를 받습니다. 아들을 섬길 지혜를 얻습니다. 같이 자녀들을 위해 합심 기도합니다. 그럴 때 그 사모님의 얼굴이 밝아지고 다시 힘을 얻어 아들을 섬기고자 방향을 잡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하여 대화하고 기도할 때 참된 교제가 있습니다. 위로와 격려를 얻습니다. 고난을 감당할 힘을 얻습니다.

 

신앙공동체에서 교제는 참으로 중요합니다. 사람은 사회적 존재라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이는 사람은 관계성 가운데서 살아가도록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관계성에서 행복을 누립니다. 친구, 동역자, 가족 가운데 내가 귀히 여김 받고 가치 있게 여김 받을 때 존재감을 느낍니다.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주고 그가 행복할 때 나도 행복합니다. 혼자 무인도에서 산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웃을 일이 있겠습니까? 물론 나쁜 이웃과 사는 것은 괴로운 일입니다. 그래서인지 요즘 자연인으로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성 가운데 살아가도록 창조되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변화된 사람들 가운데 사는 것은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릅니다.

 

지난 신년 스탭수양회에서 한 특강 강사의 강연을 들었습니다. 그 분이 한 말입니다. 2차 대전이 끝나고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에 대해 조사를 하였습니다. 어떤 사람들이 그곳의 굶주림과 질병과 공포를 이기고 살아남았을까요? 강인한 체력을 가진 사람? 강한 정신력의 소유자? 젊은 사람? 아니었습니다. 거기서 살아남은 사람들은 안정된 짝이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안정된 짝. 사랑의 공동체가 있는 사람들이 생존하였다는 것입니다. 사랑의 공동체는 공동체 자체를 위한 것이 아닙니다. 당신과 나, 우리 모두를 위해 있는 것입니다. 말씀과 기도가 충만한, 예수님을 주로 모시는 안정된 교회 공동체가 우리를 살게 합니다.

 

또한 초대교회 성도들은 모여서 서로 떡을 떼었습니다. 여기서 떡을 때는 것은 성찬과 애찬을 나눈 것을 말합니다. 당시에는 성찬에 이어 애찬을 같이 나누었습니다. 지난 3년간 코로나로 인해 우리는 잘 모일 수 없었습니다. 예배와 말씀 공부를 온라인으로 하면서 내용은 전달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성도간의 교제가 부족하였습니다. 성도의 교제를 위해서는 실제적으로 만나는 것이 중요합니다. 공동체로서 드리는 예배와, 실제적인 교제 가운데 성령이 함께 하십니다. 각 사람에게 역사하시는 성령님의 은혜의 역사를 나누는 가운데 서로 은혜를 받습니다. 음식을 나누는 사랑의 교제 가운데 위로를 얻습니다.

 

제가 오래 전에 우리 모임에 처음 나왔을 때 우리 모임의 강력한 선교정신에 도전이 되었습니다. 한편 부담을 느꼈습니다. 내가 있을 곳이 아닌 것 같아 항상 떠날 생각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제가 속한 요회의 한 시니어 목자님 가정이 학사 양인 저를 환영해주셨습니다. 주일 예배 후에는 삼선교에 있는 그의 집에 자주 초대해주셨습니다. 버스를 타고 그 집에 가면 늘 소불고기가 준비되어 있었습니다. 전골판 위에 불고기가 산처럼 수북이 쌓여 있었습니다. 배고픈 시절 불고기를 마음껏 먹었습니다. 그만큼 섬기는 은혜와 사랑이 풍성하였습니다. 가정을 오픈하여 크게 환영해주고 풍성히 섬기는 그 사랑을 지금도 잊지 못합니다. 그런 사랑으로 인해 결국 제가 남게 되고 목자가 된 측면이 있습니다. 여하튼 그래서 저도 결혼 후 쎈타 바로 옆에 살면서 나름대로 요회원들을 가족처럼 섬겼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단칸방이었지만 요회 식구들을 초대하여 섬겼습니다. 그때 제가 다니던 회사의 한 여직원이 예배에 온 적이 있었습니다. 그가 생각하기에 자기 과장님이 이렇게 검소하게 살면서도 방안 가득히 사람들을 초대한 것에 약간 놀랬던 모습이 기억납니다.

 

교회는 관심이나 취미가 같은 사람들끼리 모여 동호회 활동을 하는 곳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지체들의 모임입니다. 한 몸이요 한 가족입니다. 이런 공동체에 '헌신'(devotion)으로 임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자기가 바쁘다고, 형편이 안 된다고, 자기 좋은 대로 행한다면 그것은 헌신되어 있는 것이 아닙니다. 히브리서 10:25은 말합니다.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우리가 이와 같이 서로 사랑하며 모이기를 힘쓰길 기도합니다.

 

43절입니다. "사람마다 두려워하는데 사도들로 말미암아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나니." 이러한 기독교 공동체의 출현 자체가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을 갖게 하였습니다. 또한 사도들로 말미암아 기사와 표적을 많이 행하셨습니다. 이를 통해 그들이 사도라는 것을 확실히 증명해 보여주셨습니다. (고후12:12, 2:3-5) 곧 그들의 말한 바가 하나님의 말씀임을 증거하시고 그 말씀들이 성경으로 기록되게 하셨습니다.

 

44절입니다.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여기서 '다 함께 있어' (All the believers were together)는 미완료 과거형으로 신자들이 계속하여 자주 함께 모였다는 말입니다. 모이기를 자주 했다는 것입니다. 이는 신자들이 자기들의 가정을 버리고 신앙촌처럼 한 공동체 생활을 한 것은 아니라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들은 이전에는 구약의 규례를 준수하기 위하여 예루살렘에 모였었습니다. 이제는 그리스도의 새로운 사랑의 공동체로 자주 모인 것입니다. 그들은 서로 신분과 개성이 달랐지만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으로 한 몸이 되었습니다. 이런 그들은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였습니다. 여기서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했다는 것은 성도들이 자발적으로 자기 재산을 공동의 유익을 위하여 내어놓았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공동체는 Thomas More가 쓴 '유토피아'와는 다릅니다. 유토피아에는 기독교 공동체를 이루신 성령이 빠져 있으며, 그 핵심 정신인 사랑도 강조되지 않습니다. 유토피아 공동체는 인간적인 이상향을 그린 것이며 이는 차라리 고대의 원시 공동체와 유사합니다. 초대교회 공동체는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철저히 사랑과 자발성의 원리에 의해 이루어졌습니다.

 

45절입니다.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며" 사도들의 가르침은 이론으로만 남지 않았습니다. 삶의 현장에서 실현되었습니다. 무엇보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복음으로 말미암아 부활의 믿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부활과 영생을 확신한 그들은 더 이상 세상 것들에 매이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소유를 빼앗기는 것도 기쁘게 당하였습니다. (10:34) 그들은 자기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었습니다. 보통 돈은 가족 간에만 공유합니다. 그런 물질을 공유한 것입니다. 이는 신자들이 서로에게 진정한 가족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부활 신앙은 물질과 가족에 대해 새로운 가치관을 갖게 하였습니다.

 

한 여행객이 어떤 도시에 도착하였습니다. 주일이 되어 교회를 가고자 하였는데 어느 교회에 가야 할지 몰랐습니다. 그래서 호텔 프론트에 물었습니다. 그때 직원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 앞에 보이는 건물 뒤에 있는 교회를 가세요. 저는 교회를 다니지는 않지만 저 교회 사람들은 늘 기쁨이 가득하고 서로 사랑하는 것을 봅니다. 좋은 교회임에 틀림없어요." 세상의 불신자들도 다 봅니다. 누가 진짜 신자인지 압니다. 냉정한 세상에서 사랑의 공동체를 이루어가는 것, 그 자체가 전도하는 일입니다. 예수님은 자기의 살을 찢어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우리가 자기의 소유를 나누어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섬기며 공유하는 것이 그리스도의 정신입니다. 존 웨슬레는 우리 주머니가 회개하지 않으면 참된 회개를 한 것으로 볼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서로를 참 가족으로 여기며 가난한 동역자들을 물질로도 적극적으로 섬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들은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에 따라 나누어주었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이 사실을 언급하며 초대교회가 공산사회를 이루었다고 말합니다. 즉 자기 재산을 모두 팔아 그 공동체에 헌납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재산과 소유를 '팔았다'는 것은 그런 뜻이 아닙니다. 본문에서 "팔아'의 시제는 원어상 미완료형입니다. , 이는 계속적으로 파는 일이 일어난 것을 의미합니다. 한꺼번에 모두 가지고 와서 다 팔아 하나의 경제공동체를 이룬 것이 아닙니다. 45절을 NIV "Selling their possessions and goods, they gave to anyone as he had need"로 되어 있습니다.  "as he had need"란 누군가 필요가 생겼을 때, 즉 도움이 필요하게 되었을 때, 사람들이 자기 소유를 팔아 그를 도와주었다는 것입니다. 자발적이고도 희생적인 구제를 했다는 것입니다.

 

또한 이러한 "재산과 소유를"파는 것은 결코 강제적인 것이 아니었습니다. 또한 재산을 파는 것이 일반적인 것도 아니었습니다. 여유가 있는 재산을 팔아서 어려운 사람들을 도운 것입니다. 집을 여분으로 소유한 사람이 그것을 팔아서 남을 도왔습니다. 그러나 자기가 사는 집까지 팔아야 했던 것은 아닙니다. 초대교회에서 사도급으로 쓰임 받았던 바나바는 가지고 있던 밭을 팔아 교회에 헌금한 것으로 칭송을 받았습니다. (4:36,37) 예루살렘 교회에서도 자기의 재산을 드리는 일은 드문 일이었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또한 이러한 현상이 모든 초대교회에 있었던 현상은 아니었습니다. 성령께서 초자연적으로 역사하신 예루살렘 교회에 한정되었습니다. 이방인 교회 공동체에서는 그런 예가 기록된 바가 없습니다. (고전11:21,22) 저자가 예루살렘 교회의 이러한 특별한 현상을 기록한 것은 그만큼 오순절에 임하신 성령의 역사가 얼마나 컸던 가를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여하튼 성령의 은혜를 받은 초대교회는 자기의 것을 팔아 희생적으로 더 어려운 사람들을 구제하였습니다. 구제하면서도 기쁨과 하늘의 은혜가 넘쳤습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빌립보 교회는 마게도냐에 세워진 첫 교회로 많은 환난이 있었습니다. 박해와 경제적 곤궁함에 시달렸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주님의 은혜로 인해 기쁨이 넘쳤습니다. 극심한 가난 가운데서도 예루살렘 교회를 위해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하였습니다. 지난번 재정부 모임에서 종로7부의 희생적인 헌금 역사에 대한 보고가 있었습니다. 동역자님들이 극심한 가난을 겪으면서도 변함없이 하나님의 역사를 섬겼습니다. 경제적으로도 고 나바울 목자님의 빈자리를 적극적으로 분담하여 감당하는 모습을 보고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이러한 것은 아름다운 성령의 역사인 것입니다.

 

46절입니다.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초기 예루살렘 성도들은 날마다 성전에 모였습니다. 그들이 모인 장소는 성전 바깥뜰 동편에 있는 솔로몬 행각이었습니다. (3:11; 5:12) 그들은 모여서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고백하였습니다. 또한 성전에 오는 유대인들을 전도하였습니다.

또 집에서 떡을 떼었습니다. 여기서 집은 각 가정별로 성찬을 했다기보다는, 넓은 거실이 있는 집을 택해서 하루씩 돌아가면서 모였던 것을 말합니다. 이는 여기서 "떡을 떼는 것"은 성찬과 애찬의 의미를 동시에 포함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기쁨이 넘쳐 이집 저집을 다니며 모임을 갖고 음식을 나누면서 교제를 하였습니다.

 

이상에서 볼 때 예루살렘 교회는 단순히 예배를 함께 드리는 정도가 아니라 삶을 나누는 공동체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내적인 친밀함과 전체적 참여가 있었던 공동체였습니다. 그들은 성전에서 모였지만 종교적인 의식을 행하기 위해서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사랑의 공동체성을 갖고 모였습니다. 이제 그들 자신이 참된 그리스도의 몸, 곧 새로운 성전을 이루게 된 것입니다.

 

저자 누가는 이상에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신앙의 모습은 어떤 것인지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종교적인 의식을 열심히 수행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하여 삶으로 사랑을 실천하는 공동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공동체가 이 땅에서 우리가 누리는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 이러한 사랑의 공동체를 이루어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47절입니다.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다른 사람들을 희생적으로 섬기면 피곤할 것 같습니다. 자기의 소유가 줄어 손해 의식에 시달릴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도리어 기쁨이 충만했습니다.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찬미하였습니다. 당시의 한 로마 관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보라 저들은 우리가 병들고 약하다고 버린 아기들을 데려다가 가르지 않는가? 저들은 서로 뜨겁게 사랑하여 자기의 목숨이라도 내어줄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가?" 신자들은 이미 성령의 선물을 받았습니다. 죄사함과 영원한 생명이라는 최고의 축복을 얻었습니다. 그들의 마음에는 하나님을 향한 찬미가 넘쳤습니다. 이런 그들은 자발적으로 사회의 가난한 사람들, 불우한 사람들을 섬겼습니다. 그 결과 온 세상의 불신자들로부터도 칭송을 받았습니다.

 

초대교회가 그와 같은 말씀과 기도가 충만한 사랑의 공동체가 되었을 때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들을 날마다 더하여 주셨습니다. 예루살렘교회는 전도하는 교회라기보다 전도가 되는 교회였습니다. 우리가 주님이 기뻐하실 만한 교회가 될 때 주님께서 구원받는 사람들도 날마다 더하여 주십니다. 우리가 세상 사람들도 감동을 받을 정도로 사랑과 은혜가 충만한 교회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그러기 위해 먼저 우리 자신의 삶이 하나님께 드려지는 삶이요, 살아있는 주님의 메시지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결론적으로, 예루살렘 초대 교회는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는 것에 헌신한 교회요 한마음으로 서로 사랑하는 교회였습니다. 특히 삶의 현장에서 사랑을 실천함으로 믿지 않는 자들에게도 칭송을 받는 교회였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교회를 크게 축복하셨습니다. 주님께서 우리가 이런 예루살렘 초대교회를 본받도록 하여 주시길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