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신년 1강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니라
말씀 에베소서 4:1-16 요절 에베소서 4:15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내일이면 새해입니다. 여러분은 새해를 생각하면 설레고 기대가 됩니까? ‘새로운 의욕이 생겨야 새해다’ 라는 말이 있습니다. 오늘 말씀은 성도의 영적 성숙과 성장에 대한 말씀입니다. 우리가 오늘 말씀을 통해서 영적 성숙과 성장에 대한 기대로 새해를 희망차게 출발하기를 기도합니다.
1절을 보십시오. 바울은 현재 감옥에 있습니다. 그는 로마 선교를 위해서 로마시민권을 이용하여 황제에게 송사했습니다. 그는 선교역사상 최초의 죄수 선교사였습니다. 그는 어떻게 서든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자 하는 분이었습니다. 그는 감옥에 있는 것을 조금도 부끄러워하지 않고 간절한 마음으로 에베소 교인들을 권면합니다. 바울은 그들에게 “부르심을 받은 일에 합당하게 행하라”고 했습니다. 교회는 헬라어로 ‘에클레시아’ 인데 부르심을 받는 사람들이란 뜻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 목적이 천국 가는 것이라고만 알고 있는 분들도 있습니다. 혹은 예수님을 통해서 축복받아 잘 먹고 잘사는 것으로 알고 있는 분들도 있습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부르신 목적은 무엇입니까? 외적으로는 사명을 감당하고 내적으로는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닮아가는 것이 더 본질적이고 중요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을 영적 성숙, 성장이라 부릅니다.
우리가 어떤 사람이 되는 것이 영적 성장인가를 바울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2,3절을 읽어 봅시다.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이 말씀을 핵심적으로 요약하면 “사랑 가운데서 서로를 용납하여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지키라”입니다.
교회는 다양한 사람들이 모인 곳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십인십색이 될 수 있었습니다. 다른 교회도 마찬가지였겠지만 에베소 교회내부에도 서로 용납하지 못하는 문제가 있었습니다. 특히 계시록을 보면 에베소 교회는 교리논쟁이 치열했던 곳입니다.
사람마다 신앙의 유형도 다르고 신앙의 수준도 다릅니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하고 어떤 사람은 하나님께 대한 사랑과 헌신을 강조하기도 합니다. 한 사람이 예정론과 주권신앙에 심취했습니다. 그는 사람의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에 직면했고 그 가운데 사람의 무력함을 철저히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문제는 자기 확신이 지나쳐 인간의 노력은 다 소용없으니 캠퍼스에 나가서 피싱할 필요도 없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리고 상대적으로 헌신을 가르치는 목자는 신앙이 얕은 사람으로 매도하는 분위기를 만들었습니다. 이 경우 자기가 체험한 신앙만 최고이고 전부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열 손가락이 있으면 그 길이가 다 다르듯 신앙이 다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섣불리 다른 사람을 판단하거나 매도하지 말고 서로를 받아야 합니다.
우리가 서로 용납하기 위해서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야 합니까? 2절을 읽겠습니다.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첫째로 겸손하면 하나 될 수 있습니다. 겸손은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는 것입니다. 남을 나보다 훌륭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우바나바 선교사님은 동역문제로 어려움을 겪었는데 겸손을 통해서 하나 될 수 있었다고 고백했습니다. “당신이 나보다 더 낫습니다” 헨리 박 선교사님은 부부갈등을 해결할 수 있는 비결에 대해서 항상 “Thank you, You are right” 라고 말하는데 있다고 하였습니다. 하나 되지 못하는 이유는 내가 낫고 그래서 내 의견대로 되어야 한다, 나는 가르치고 너는 배워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생각의 배후에는 낮아짐을 굴욕으로 생각하는 로마시대나 조선시대의 가치관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가 오신 후부터 겸손은 최고의 미덕이 되었습니다. 겸손은 가장 위대한 것이요 정말 위대한 자만이 가지는 덕목입니다. 실제로 나의 생각이 더 옳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옳은 생각을 주장할 때 내 뜻대로 되는 쾌감이 있지만 상대방을 잃을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얻는 성취가 무의미합니다. 왜냐하면 사람이 가장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또 내가 양보할 때 상대방이 감동을 받고 자신의 생각을 양보할 수도 있습니다. 또한 양보하여 최선이 아니라 차선의 길로 가더라도 공동체의 주인인 하나님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고 바른 길로 가도록 정정하여 주실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겸손히 다른 사람을 높일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모든 겸손”이라는 말은 우리가 적당히 겸손해서는 안 되고 할 수 있는 모든 방법과 길을 동원해서 겸손해야 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초한지의 한신은 동네 부랑아 들의 가랑이 사이로 기어들어갔습니다. 예수님은 죽기까지 겸손하셨습니다. 자신이 죽을 때 우리가 어떤 사람과도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모든 겸손을 통해서 모든 관계에서 하나 됨을 유지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다음으로 온유입니다. 온유는 부드러운 마음입니다. 상대방의 말이나 의견이나 주장에 급히 반응하지 않고 끝까지 들어줄 수 있는 마음입니다. 온유한 사람과는 대화가 가능합니다. 온유한 사람은 사람을 얻고 결국 승리자가 됩니다. 교회에 여러 가지 문제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온유한 사람끼리는 대화하지 못하고 해결하지 못하고 방향잡지 못할 문제가 없습니다. 온유한 자는 진리에 복종하기 때문입니다.
끝으로 오래 참아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오래 참는 것은 어떻게 하는 것입니까? 끝까지 참는 것입니다. 아하스는 하나님의 인내심을 시험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아하스를 참으시고 친히 징조를 보여주셨습니다. 그의 인격과 태도에 걸맞지 않는 은혜를 일방적으로 부어주셨습니다. 주님은 자신을 세 번이나 부인한 베드로를 찾아가시고 숯불 사랑으로 그를 녹여주셨습니다. 사도의 자격이 없는 그를 수사도로 세워주셨습니다. 우리가 적당히는 참지만 오래 참지는 못합니다. 어느 선을 넘어서면 부글부글 끓습니다. 분노게이지가 급상승 폭발합니다. 사이다처럼 분노를 터트릴 때 시원합니다. 그러나 분노는 사이다가 아니라 강철비, 파편입니다. 너와 나에게 박혀 큰 고통을 주고 한번 박힌 파편은 빼내기가 힘듭니다. 그러므로 참고 분노를 터트리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100년 묵은 포도주처럼 참고 참아야 합니다. 그럴 때 거기서 은은하고 달콤한 맛이 나옵니다. 저도 자녀를 기를 때 참을 수 있을 만큼 참았던 것을 깨닫고 회개합니다. 제가 100년 묵은 포도주처럼 참고 속이 없어질 때까지 참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이 모든 덕목을 묶는 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사랑은 모든 덕의 총화입니다. 사랑이 무엇입니까? 일반적으로 세상에서 사랑은 보통 자기만족을 뜻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진정한 의미에서 사랑이 아니라 자기애일 뿐입니다. 예수님은 사랑이 무엇인지 그 본질을 보여주셨습니다. 그것은 자기를 희생시켜 다른 사람을 행복하게 하는 것입니다. 자기를 죽여서 다른 사람을 살리는 것입니다. 철저히 타인 중심적입니다. 이런 예수님의 사랑이 뒷받침될 때 겸손도, 온유도, 오래 참음도 가능합니다.
우리가 왜 교회의 하나 됨을 지켜야 합니까? 3-6절에는 ‘하나’라는 말이 무려 8번이 나옵니다.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도 한 몸입니다. 우리를 거듭나게 하신 성령도 한 분이십니다. 우리는 같은 소망가운데 부르심 받았습니다. 우리는 모두 하늘나라에 같이 갈 사람들입니다. 주님도 같은 분이고 우리가 가진 믿음도 같습니다. 우리가 받은 세례도 동일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에 같이 못 박혔고 예수님이 부활하실 때 같이 부활했습니다.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도 한분이십니다. 하나님은 만유를 통일하시고 하나 되게 하려 하십니다. 이 세상은 사탄이 만든 분란과 혼란으로 가득찬 곳이 되었습니다. 이 가운데 하나님은 만유의 회복과 통일을 이루어가십니다. 그 가운데 성도가 하나 되고 교회가 하나 되기를 원하십니다. 왜냐하면 교회의 일치는 만유통일의 근간이고 핵심이기 때문입니다. 성령은 우리를 하나 되게 부르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 됨을 깨는 행위는 성령을 슬프시게 하는 행위입니다. 우리는 하나 되기 위해 모든 노력을 다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왜 교회를 만드셨습니까? 하나님이 왜 가정을 만드셨습니까? 하나님이 왜 장막을 만드셨을 까요? 그것은 하나 됨을 배우고 연습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교회도 가정도, 천국도 공동체입니다. 사람이 모인 곳에 어디나 갈등과 스트레스가 있습니다. 우리는 갈등과 스트레스를 피하기위해서 교회를 떠납니다. 이혼합니다. 공동생활을 떠납니다. 그러나 갈등과 스트레스가 바로 우리의 영적 성장을 만들어내는 주물공장입니다. 지지고 볶는 것 같은 고통이 있지만 이것이 사랑의 띠로 우리를 묶어서 하나님께 드리는 가장 아름다운 선물이 되게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심을 어찌하든지 지킬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처럼 원숙한 하나 됨을 이루기를 기도합니다.
7-16절에서 사도 바울은 교회 각 구성원들이 하나 되는 것을 한 몸과 지체의 원리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성도 각 사람에게 그리스도를 통해서 분량에 맞게 선물을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강림과 승천을 통해서 죄와 사망의 포로된 사람들을 구원하셨습니다. 구원하실 뿐 아니라 선물을 주셨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세우는 직분입니다. 구체적으로 어떤 직분을 주셨습니까? 사도, 선지자, 복음 전하는 자, 목사와 교사의 직분을 주셨습니다. 사도는 예수님의 열두 제자와 성경의 저자로 부르신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선지자는 성경이 완성되기 전까지는 하나님의 계시를 받아 전달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주어진 성경말씀을 깊이 있고 통찰력 있게 해석하여 전달하는 사람들입니다. 목사는 헬라어로 양을 치는 사람이란 뜻이니 목사와 교사는 교회구성원들을 돌보며 말씀을 가르치는 사람, 곧 목자를 말합니다. 이 모든 직분은 진리의 말씀을 전하고 가르치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이들은 그 직분을 통해서 교회 구성원들인 성도들을 온전하게 합니다. 원어로 보면 성도를 무장시킵니다. 그래서 교회를 위한 봉사의 일을 하는 사람들로 세웁니다. 이렇게 주의 일꾼들을 온전케 할 때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가 세워지게 됩니다.
각 직분자는 그리스도의 몸을 구성하는 지체와 같습니다. 지체는 드러나는 지체가 있고 드러나지 않는 지체도 있습니다. 머리와 눈, 코, 입, 귀와 손발은 드러나는 지체들입니다. 그러나 이에 비해서 은밀하게 일하는 지체들도 있습니다. 심장과 허파와 간과 쓸개와 내장과 같은 것은 보이지 않는 데서 일합니다. X선을 촬영해야만 그들의 존재가 드러납니다. 하지만 이들은 태어난 그 시간부터 쉬지 않고 일해 왔습니다. 이들이 잠깐이라도 안식년이나 안식일을 가져도 그 사람은 죽습니다. 교회에도 이처럼 드러나는 일을 하면서 어느 정도 인정을 받는 지체도 있고 드러나지 않는 데서 숨은 수고를 많이 하는 지체들도 있습니다.
우리가 지체의식이 아닌 비교의식을 가지면 서로를 시기하므로 하나 되어 일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내가 하는 고유한 일은 누구도 할 수 없는 나만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하면 보람과 긍지를 가지고 일할 수 있습니다. 로렌스 수사는 부엌에서 일하는 것을 하나님이 주신 성직으로 여기고 일했습니다. 그가 요리하는 모습은 예배와 같았다고 지켜보았던 수사들이 말했습니다. 그럴 때 그는 요리하면서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며 기쁨과 감격을 누렸습니다. 결국 그는 동료들의 인정을 받아 그 수도원의 원장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교회에서 사람을 위해서 일한다고 생각하면 사람에게 인정받지 못할 때 배신감과 손해의식을 가질 수 있습니다. 직분자는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세우기 위해서 일합니다. 이렇게 일하는 목적이 분명할 때 사람의 인정에 관계없이 자기직분에 충성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보이지 않는 데서 일하는 지체들의 수고를 깊이 알아주는 것이 필요합니다. 심장과 허파는 가장 중요한 일을 쉼 없이 하지만 아무도 그 수고를 알아주지 않습니다. 너무나 은밀하고 자연스럽게 일하고 있기에 그들의 존재를 잊고 수고를 당연시합니다. 마치 중요한 장기가 병들어 제 기능을 못할 때 비로소 뒤늦게 그 존재와 역할의 중요성을 인식하는 것과 같습니다. 수고하는 지체들은 하나님 앞에서 자기 일을 묵묵히 감당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인지라 힘들 때가 있습니다. 인정과 격려가 필요합니다. 생각해 주고 인정하는 이들이 있다면 힘을 내어 일할 것입니다. 1년에 한번이라도 인정과 격려가 있다면 힘을 얻고 열심히 일할 것입니다. 우리가 보이지 않는 데서 수고하는 지체들에게 감사를 표시하고 격려하기를 기도합니다.
13-16절은 성도의 영적 성장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13절을 보십시오.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 까지 이르리니”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믿음과 영적 지식에 있어서 일치하여 함께 성장해 나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13). 성장하는 사람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성장할 때 기쁨이 있습니다. 그 자신과 그를 지켜보는 사람에게 기쁨이 있습니다. 성장이 멈추면 노화가 시작됩니다. 노화가 시작되면 사람은 우울하고 기쁨이 사라집니다. 그러나 영적 성장은 육체의 성장처럼 노화가 없습니다. 성장하고자 하면 무한히 성장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90세를 넘긴 어떤 분은 지금도 날마다 배우는 기쁨이 넘친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성장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소극적으로 피해야 할 것들이 있습니다. 14절을 보십시오.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 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속임수와 간사한 유혹에 빠져 온갖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여기서 어린아이는 분별력 없이 잘 미혹되는 존재를 뜻합니다. 어린아이 같은 사람은 영적 사기꾼들의 속임수와 간사한 유혹에 빠집니다. 온갖 거짓된 가르침을 베푸는 자들의 말을 듣고 혹하여 이리 쏠리고 저리 쏠립니다. 이단 사상에 빠지고 잘못된 철학에 빠지고 세상정욕에 빠집니다. 이들은 알찬 영적 자양분을 공급받지 못하기 때문에 영적으로 성장하지 못합니다. 마치 굶주려 비실대는 사람과 같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할 때 영적으로 성장할 수 있으며 영적 성장은 어느 정도까지 이룰 수 있습니까? 15절을 보십시오.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첫째로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할 때 범사에 성장할 수 있습니다. 참된 것이란 무엇일까요? 위의 말씀에 비추어 볼 때 속임수와 간사한 유혹과 반대되는 개념임을 알 수 있습니다. 잠언 31:30절을 보면 여성의 외모와 매력은 속이는 것, 전도서 기자는 세상의 지혜와 물질과 쾌락을 바람과 같이 헛되다고 표현했습니다. 뭔가 잡은 것 같고 뭔가 누린 것 같은 데 남는 것은 없다는 것입니다. 속이는 것들은 안개와도 같습니다. 도시를 덮은 안개가 대단해 보이는 데 실체는 어떻지요? 넓이 7 평방 km, 높이 30m를 채운 안개가 물 반 컵밖에 안 된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영적 성장은 그냥 되지 않습니다. 영적 자양분을 튼실하게 공급받아야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헛된 것들, 거짓된 것들에 속아 그런 것만 추구하면 영적으로 성장할 수 없습니다. 항상 제 자리고 심지어 퇴보합니다.
‘참된 것을 하다’의 동사 ‘알레듀오’는 ‘진리나 진실을 말하다’ 뜻입니다. 그러니까 참된 것은 진리 입니다. 영적 성장이란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여 진리를 말하는 가운데 이루어집니다. 확실한 진리의 신포는 벽에 못을 박듯이 듣는 이들의 어지러운 삶을 정리해 줍니다. 이웃에 대한 최고의 사랑은 진리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남에게 진리를 말하려면 우리가 진리를 확실히 소유해야 합니다. 그럴려면 진리를 철저히 연구하는 작업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진리의 말씀을 확실하게 연구하여 선포할 때 나 자신이 영적으로 성장합니다. 영적 자양분을 충분히 공급받기 때문입니다. 뭐든지 확실하게 하는 것은 그냥 되지 않습니다. “공부에 대한 예의를 갖추라”는 책을 보면 하버드에 들어간 그 학생은 매일 예습을 하는데, 궁금한 것이 나오면 연관어 연구를 통해서 10여 가지를 통달하고 학교수업을 받으러 간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면 선생님을 넘어설 정도의 실력을 가지고 선생님과 대화하면서 공부가 깊어지고 공부하는 기쁨이 넘쳐서 자연스럽게 공부를 잘하게 되었고 명문대에 들어갈 수 있었다고 고백했습니다. 갓난아이들은 성장하기 위해서 기를 쓰고 젖을 사모합니다. 우리는 2018년 한해 헛된 것들을 버리고 진리의 말씀을 잘 가르치는 가운데 그 자양분을 받아 영적으로 무럭무럭 부쩍부쩍 성장하는 것을 체험하기를 기도합니다.
둘째로 영적 성장의 목표는 예수그리스도입니다. 예수님에게 까지 자랄 수 있다는 것은 우리의 영적 성장이 무한히 계속될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사람은 엄청난 가능성의 존재입니다. 유명한 일화가 있지요. 미켈란젤로가 최후의 만찬을 그릴 때 먼저 예수님의 모델을 찾았습니다. 그래서 보기만 해도 예수님처럼 보이는 사람을 운 좋게 찾아 그를 모델로 하여 예수님의 모습을 완성했습니다. 맨 나중에 가룟유다의 어둡고 불안한 얼굴을 한 사람을 찾다가 이번에도 운 좋게 그런 사람을 찾아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사람이 예수님 모델이었다는 것이 아닙니까? 사람은 무한히 성장하여 예수님 같은 얼굴과 마음을 가진 이가 될 수도 있고 반면에 짐승 같은 존재 더 나아가 마귀와 같은 존재로 전락할 수도 있습니다.
벼룩을 가지고 실험한 것이 있습니다. 벼룩은 자기 신장의 100배를 뛰어오를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7-8센티의 병에 넣고 뒤집습니다. 그러면 벼룩들은 높이 뛰다가 천정에 부딪히게 되고 나중에는 7-8센티 정도만 뛰게 됩니다. 나중에 병을 뒤집어 놓아도 그곳을 튀어나오지 못합니다. 우리 성도들도 무한히 영적으로 성장할 수 있는 존재들입니다. 그러나 자기 한계에 갇혀서 짜 부러진 골룸처럼 성장이 갇혀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가 무한히 성장하기를 바라십니다. 죽을 때까지 성장하기를 바라십니다. 죽는 그날에도 10센티라도 성장하고 죽기를 바라십니다. 이렇게 날마다 예수님을 배우고 영적 성장하면 우리의 신앙생활이 어떤 가운데서도 기쁨이 충만합니다. 2018년은 우리 모두가 한 단계, 몇 단계 영적으로 성장하는 기쁨이 충만히 누리는 한 해가 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16절을 보십시오. 그리스도에게서 온 몸이 마디를 통해 도움을 받아 연결됩니다. 지체인 성도는 머리인 그리스도와 결합되면 두뇌의 지휘와 도움을 받아 몸이 성장하듯 그리스도의 도움을 받아서 자연스럽게 성장합니다.
결론입니다. 성장할 때 기쁨이 있습니다. 새해 예수님의 내면을 배우며 성장하기를 기도합니다. 특히 참된 것, 진리의 말씀을 가르치는 가운데 성장하는 기쁨을 충만히 누리기를 기도합니다. 2018년 한해 우리에게 성장하는 기쁨이 충만하기를 기도합니다.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