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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2024년 마가복음 20강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라(마가복음 12:18-44)2024-08-19 16: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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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마가복음 20강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라


말씀/ 마가복음 12:18-44

요절/ 마가복음 12:30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


오늘 말씀의 요지는 3가지입니다. 첫째, 예수님은 부활을 믿지 않는 사두개인들에게 부활이 있음을 논증하십니다. 둘째, 수많은 계명 가운데 가장 중요한 계명이 무엇인가를 알려주십니다. 셋째, 온 마음과 힘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는 한 과부를 칭찬하십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도 예수님이 가르쳐 주시는 가장 큰 계명을 배워 전폭적이고 전 의지적으로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1.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

18절입니다. "부활이 없다 하는 사두개인들이 예수께 와서 물어 이르되." 예수님 당시 유대교에 여러 파가 있었는데 그 중에 메이저 3종파는 바리새파, 사두개파, 그리고 에세네파였습니다. 바리새파는 율법에 열심이었고 경건한 자들이었습니다. 그들 중 많은 자들이 외식하여서 예수님의 책망을 받았지만 그래도 당시 민중들로부터 존경받는 영적 지도자들이었습니다. 사두개인들은 오늘날로 말하면 매우 현실적인 종교인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다수의 제사장들에 의해 구성되었고 솔로몬 시대의 대제사장 사독의 후예임을 자처했습니다. 그들은 영이나 천사, 내세를 믿지 않았습니다. 성경도 모세 5경만 받아들였습니다. 에세네파는 성경에는 그 이름이 나오지는 않습니다. 그들은 광야에서 금욕적인 생활을 하던 자들이었습니다.


부활을 믿지 않는 사두개인들이 예수님께 나아와 부활을 부정하기 위한 해괴한 질문을 합니다. 19-23절을 보면 이렇습니다. 칠 형제의 장남이 자식이 없이 죽었습니다. 이에 구약의 계대결혼법(繼代結婚法)에 의해 그의 동생이 형수를 취했습니다. 아들을 낳게 되면 그 아들은 죽은 형의 자식으로 간주되어 대를 잇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둘째도 자식이 없이 죽어 셋째 동생이 그 여인을 취하였는데 셋째도 형들과 같이 죽었습니다. 그렇게 하여 죽 내려가서 막내인 일곱째까지 그 여인과 결혼하였는데 모두 자식이 없이 죽었습니다. 참으로 있을 수 없는 해괴한 스토리입니다.  


그러면 사두개인들이 이런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들의 질문입니다. 23절. "일곱 사람이 다 그를 아내로 취하였으니 부활 때 곧 그들이 살아날 때에 그 중의 누구의 아내가 되리이까?" 무슨 말입니까? 일곱 형제가 다 그를 아내로 취하였는데 그들이 만일 다 부활한다면 그 여인은 도대체 누구의 아내가 될 것인가? 이런 혼란한 일이 일어날 것이니 부활이라는 것은 없는 것이고 있어서도 안 된다는 것입니다. 얼핏 보면 그들이 주장이 말이 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24절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므로 오해함이 아니냐?“ 사두개인들의 문제는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NIV는 "you do not know the Scriptures or the power of God"으로 번역합니다. “the Scriptures” 와 “the power of God”을 "or" 접속사로 연결하고 있습니다. 즉, 그들이 성경이나 또는 하나님의 능력을 모른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성경을 아는 것이 하나님의 능력을 아는 길이라는 것을 배웁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경험으로 통해서 알 수도 있지만 무엇보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읽고 배우는 성경은 단순히 머릿속에 지식을 쌓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을 통해 하나님의 능력을 알게 됩니다. 성경은 그 자체가 영이요 생명입니다. (요6:63b) 겸손한 마음, 영접하는 마음으로 성경을 읽을 때 우리 내면에 영과 생명이 역사합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알게 합니다. 


그러면 성경은 부활 후의 삶에 대해 무어라 합니까? 25절입니다. "사람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때에는 장가도 아니 가고 시집도 아니 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 사두개인들의 오해가 무엇입니까? 그들은 사람이 부활하면 현재와 동일한 몸으로 동일한 스타일의 삶을 사는 것으로 본 것입니다. 그러나 부활의 몸은 우리의 현재의 몸과 전혀 다릅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전서 15장에서 말한 바와 같이 부활의 몸은 썩지 아니할 몸, 영광스러운 몸, 강한 몸, 영원한 몸입니다. 사람들은 천사와 같은 불멸의 존재가 됩니다. 영원히 살기에 결혼하여 자녀를 생산할 이유가 없습니다. 이렇게 말하면, 아내와 두 아들을 끔찍하게 사랑하며 깨가 쏟아지는 가정의 행복을 맛보고 있는 어느 목자님은 그럼 부활하여 결혼도 하지 않으면 무슨 낙으로 살지? 합니다. 장차 행복한 결혼생활을 꿈꾸고 있는 우리 청년들은 "아, 그럼 부활해도 소망이 없겠구나!"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우리가 하늘에 있는 천사같이 된다는 말씀은 부활 후의 세상에는, 이 세상에서의 결혼보다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더 행복하고 기쁜 어떤 상태가 있다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이를 믿고 부활의 삶을 간절히 소망해야겠습니다. 


예수님은 이제 사두개인들이 믿고 있는 모세5경중 출애굽기 말씀을 통해 부활이 있음을 증명하십니다. 26절입니다. "죽은 자가 살아난다는 것을 말할진대 너희가 모세의 책 중 가시나무 떨기에 관한 글에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하신 말씀을 읽어보지 하였느냐" 이는 출애굽기 3:6a절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원어로 보면 "나는 ...이다"라고 현재형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NIV 영어성경에는 "I am the God of Abraham, the God of Isaac, and the God of Jacob"로 현재형으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시내 산에서 모세에게 이 말씀을 하셨을 당시 아브라함, 이삭, 야곱은 이미 죽은 지 오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을 살아 있는 자들로 언급하셨습니다. 하나님이 현재 누구의 하나님이 되신다는 것은 하나님이 살아계신 것과 같이 그 사람도 살아있어서 현재적으로 하나님과 관계성을 맺고 있다는 말입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이, 살아있는 아브라함, 이삭, 야곱과 현재적으로 교제하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믿음의 조상들은 죽어서 무로 돌아간 것이 아닙니다. 부활하여 모세가 하나님과 대화하는 그 시점에 그들은 하나님과 생명적인 교제를 하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이 말씀은 그 조상들의 부활을 명백히 증명해 주는 말씀입니다. 


본문의 사두개인의 질문을 볼 때 그들의 사고의 영역을 보게 됩니다. 부활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어쩔 수 없는 죽음의 한계에 갇힙니다. 그들의 관심은 먹고 마시는 것, 결혼하는 것, 그리고 죽는 것입니다. 그 다음이 없습니다. 세상의 불신자들의 삶이 다 그렇지 않습니까? 내일 죽을 테니 먹고 마시고 즐기자! 부활에 대한 믿음이 없는 삶은 그 내면이 죽음의 권세에 사로 잡혀 어둡고 무겁습니다. 근본적으로 참 기쁨이 없습니다. 이런 세상에서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부활신앙을 갖게 된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요! 부활 믿음 자체가 생명이요, 부활 믿음이 없는 것 자체가 죽음입니다. 부활을 믿기에 우리는 이 세상에서 자신 있게 주님의 말씀에 순종합니다. 섬기며 희생하며 꾸리지 않고 살아갈 수 있습니다. 세속의 누룩을 피해 천성을 향하는 거룩한 나그네로 살 수 있습니다. 우리가 부활의 믿음을 굳게 하기 위해서는 성경을 잘 공부해야 합니다. 성경을 앎으로 하나님의 능력을 더욱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알 때 우리는 어떤  일에도 요동하지 않고 부활신앙으로 승리하는 삶을 살아 갈 수 있습니다.


2. 하나님을 사랑하라

예수님의 답변에 감탄한 서기관 중 한 사람이 예수님께 나아와 여쭙니다. 29절입니다. "모든 계명 중에 첫째가 무엇이니이까" 이는 실제적으로 그 당시에 치열하게 논의되던 이슈였습니다. 구약 성경에는 많은 계명들이 들어 있습니다. 성경에 기록된 계명 외에도 구전으로 전해지는 계명이 613개나 되었습니다. 이 수많은 계명들 중에 어느 것이 보다 중요한지, 또 어느 것이 덜 중요한지 하는 논쟁이 랍비들 사이에 끊임없이 있었습니다. 본문의 서기관도 그런 논쟁 가운데 정말 율법의 핵심이 무엇인지 예수님이 가르쳐 주시기를 원하였습니다. 감사하게도 이 서기관 덕분에 우리는 예수님의 명쾌한 답변을 듣게 됩니다.


29-31절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첫째는 이것이니 이스라엘아 들으라 주 곧 우리 하나님은 유일한 주시라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 둘째는 이것이니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 이보다 더 큰 계명이 없느니라" 예수님의 답변의 요점은 첫째, 하나님을 사랑하라, 둘째, 이웃을 사랑하라입니다. 그런데 이 계명들을 주실 때 먼저 하시는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가 사랑해야할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신가를 먼저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주 곧 우리 하나님은 유일한 주시라" 우리 하나님은 유일한 주시다 라는 것입니다. 세상에 신이라고 칭하는 존재가 많지만 우리 하나님만이 살아계신 참 신이십니다. 우리 하나님이 만물을 무에서 창조하셨고 지금도 온 세상을 붙들고 계십니다. 그 분은 우리 각자를 지으시고 생명을 주신 분입니다. 우리 각자의 생명의 주인이요 지금도 그의 붙드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호흡하며 아침에 눈을 뜹니다. 그 분만이 우리를 영원한 구원으로 인도하는 분이십니다. 


이를 생각하면 당연히 우리는 이 하나님을 어떻게 섬겨야 하는 지 답이 나옵니다. 곧,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입니다. 성경은 매우 압축된 기록인데, 간단히 "네 마음을, 목숨을, 뜻을, 그리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하면 될 것 같은데 "다하고, 다하고, 다하고, 다하고"를 반복합니다. 이는 그 만큼 0.000001% 도 남기지 않고 다하라는 것입니다. 마음은 우리 내면의 가장 깊은 곳에 위치한 중심부를 말합니다. 마음은 우리의 소원과 사랑이 자리 잡는 인격의 중심입니다. 그 마음 깊은 곳에서 우리의 의지가 나옵니다. 마음을 다하는 것은 의지와 소원, 애정을 다하는 것입니다. 목숨은 육체의 생명력을 말합니다. 적당한 선까지만이 아니라 생명을 내 걸고 전심전력으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뜻은 지적 능력을 가리킵니다. 이는 맹목적으로가 아니라 분명한 지식과 이해에 기초하여 사랑하는 것입니다. 힘은 영적, 육체적 모든 에너지를 말합니다. 이 모든 것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우리의 전 인격과 모든 정성과 모든 능력을 다하여 전폭적으로 전의지적으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모든 계명 중에 가장 큰 계명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사람에게 주어진 가장 큰 본분이요 인생 방향입니다. 이렇게까지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하신 이유는 무엇보다 앞에 언급한 대로 그 분이 우리의 유일한 하나님, 유일한 주인, 유일한 경배 대상이기 때문입니다. 더 나아가 하나님이 그런 사랑으로 우리를 먼저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처음 인간이 범죄하였을 때부터 자신의 독생자를 보내 구원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창3:15) 때가 되자 죄인된 우리를 위해 아들 예수님을 보내셨습니다. 그를 십자가에 내어 주셨습니다. 로마서5:8절은 말합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사랑하신 것입니다. 그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의 사랑으로 초대하십니다. 하나님과 우리 간에 뜨거운 사랑의 관계성을 맺고자 하십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절대적으로 그 분만을 사랑하라는 것은 어떤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모든 영광을 받으시고 혼자 누리고자 하시는 이기적인 목적이 아닙니다. 이는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지만 또한 우리를 위한 것입니다. 우리와의 사랑의 연합을 통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생명과 복에 참여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로 하나님의 기쁨과 은혜로 영원토록 충만하게 하기 위함이십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계명은 우리 각자가 가장 복되고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길입니다.


두 번째 계명은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100% 사랑하면 이웃을 위한 사랑은 우리에게 1%도 남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사랑의 방정식은 그렇게 작동되지 않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할 때, 도리어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어집니다. (롬5:5)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 넘칩니다. 우리가 갖고 있던 사랑에 비교할 수 없는 무한한 사랑이 우리 마음을 채웁니다. 우리는 그 사랑으로 이웃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인간적인 사랑으로는 절대 불가능했던 놀라운 사랑을 하게 됩니다.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것 같이 이웃을 사랑하게 됩니다. 결국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별개의 계명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사랑할 때 이웃도 참으로 사랑할 수 있습니다. 


31절 하반절을 보면 이보다 더 큰 계명이 없다고 하십니다. 마태복음에는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라고 되어있습니다. (22:40) 모세와 선지자를 통하여 주신 성경이 말하는 바는 결국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입니다. 이 두 계명이야 말로 모든 계명 중의 계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말씀을 볼 때 우리가 무엇보다 먼저 온 마음과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해야 됨을 보게 됩니다. 우리가 아무리 많은 일을 하고 공로를 쌓아도 하나님을 온 마음을 다해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지 않으면 정작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도 지키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웃 사랑에 대해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13장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고전13:1-3) 결국 무엇입니까? 어떤 능력을 갖느냐, 무엇을 하느냐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왜 하느냐? 어떻게 하느냐? 입니다. 사랑으로 하지 않으면 우리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목자도 아니고 신자도 아닙니다. 내게 아무 유익도 없습니다. 일생을 수고하였는데 내게 아무 유익이 없다면 이 얼마나 허무한 일입니까? 사랑이 없이 하는 것은 아무 의미도 없습니다. 사랑이 최고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나 효력이 없으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갈5:6) "faith expressing itself through love." 하나님을 믿노라 하면 그 믿음은 반드시 사랑으로 나타나야만 합니다. 하나님은 사랑을 가장 가치 있는 것으로 보십니다. 아니 사랑만이 유일하게 가치 있는 것으로 보십니다.


3. 생명을 바쳐 하나님을 사랑한 과부

41,42절입니다. "예수께서 헌금함을 대하여 앉으사 무리가 어떻게 헌금함에 돈 넣는가를 보실새 여러 부자는 많이 넣는데 한 가난한 과부는 와서 두 렙돈 곧 한 고드란트를 넣는지라." 부자들은 많은 돈을 헌금함에 넣었습니다. 그들은 사람들이 잘 볼 수 있게 빳빳한 지폐를 높이 들어서 한 장씩 세고는 함에 넣었습니다. 그렇게 하는 부자들이 여럿 있었습니다. 그들은 돈을 넣고는 자랑스럽게 걸어 나갔습니다. 그런데 맨 나중에 한 가난한 과부가 다가왔습니다. 그녀는 지폐는 없었고 동전만 몇 개 있었는데 그것을 넣었습니다. 동전이 헌금함 바닥에 떨어져 ‘땡그랑’ 소리가 났습니다. 그녀가 넣은 돈은 두 렙돈 곧 한 고드란트였습니다. 오늘날 돈으로 한 2천 원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에 대해 무엇이라고 하십니까? 43,44절입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다가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가난한 과부는 헌금함에 넣는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 그들은 다 그 풍족한 중에서 넣었거니와 이 과부는 그 가난한 중에서 자기의 모든 소유 곧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 하시니라” 여기서 "생활비 전부"라는 말은 원어로 "비오스"인데 “생명”으로도 번역이 되는 말입니다. 그녀는 그 마지막 남은 돈으로 자기의 생명을 유지하는 음식을 사야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다 드린 것입니다. 곧 하나님께 자기의 생명을 드린 것입니다. 그녀는 마음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였습니다. 그녀의 사랑은 모든 생활비를 아낌없이 드린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사람들은 돈이 별거 아니라고 말합니다. 아닙니다. 별거입니다. 우리가 버는 돈은 귀중한 것입니다. 땀 흘려 일한 노동의 대가입니다. 나의 생명과도 같은 시간을 들여 번 것입니다. 그러기에 그 귀한 물질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구체적인 표현이 됩니다. 요한 계시록 말씀을 보면 말세가 다가올수록 사람들은 더욱 돈을 사랑합니다. 종국에는 물질에 마음이 꽂혀서 그 이마와 오른 손에 물질 스피릿이 가득하지 않으면 살아남기 힘든 세상이 옵니다. 하나님을 대항하는 최종, 최강의 우상은 물질 신, 곧 맘몬입니다. 이런 시대에 우리는 돈을 건전하게 경멸할 줄 아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자녀들에게 가르쳐야 합니다. 물질을 믿음으로 제압하지 못하면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데서 실패하게 됩니다. 


4. 우리가 어떻게 그와 같이 사랑할 수 있을까요?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이러한 계명을 명령으로 주신 것은 우리가 그렇게 할 수 있기 때문에 주신 것입니다. 절대 불가능하다면 그런 명령을 하시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말씀에 순종하기 위해 힘써야 합니다. 최선을 다해 노력해야 합니다. 그런데 여기에 중요한 점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 자신의 힘으로는 이 계명의 말씀을 절대로 순종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가 어떻게 온 마음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이 그렇게 하도록 해 주셔야 합니다. 하나님이 나의 마음에 그런 강렬한 소원과 에너지를 주셔야 합니다. 그런데 여기 놀라운 약속의 말씀이 있습니다. 신명기30:6입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마음과 네 자손의 마음에 할례를 베푸사 네게 마음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게 하사 네게 생명을 얻게 하실 것이며" 하나님이 우리의 마음을 새롭게 하셔서 우리로 하나님을 사랑하게 하시겠다는 약속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아십니다. 우리가 계명을 지킬 힘이 없음을 아십니다. 그래서 친히 우리의 마음을 변화시키시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소원을 주시고 그렇게 할 수 있는 힘도 주십니다. 이런 점에서 하나님이 주시는 모든 계명은 실상 하나님의 우리에 대한 소망이며 약속입니다. 하나님이 계명을 주시고 하나님이 지키게 하십니다.


오늘 말씀에 대한 실제적인 방향은 이렇습니다. 첫째,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계명을 우리의 목표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을 신앙의 목표로 삼고 노력해야 합니다.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둘째,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내게 하나님을 온 마음으로 사랑할 수 있는 강렬한 소원과 힘을 주시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셋째, 믿어야 합니다. 마가복음 11:24절과 같은 약속의 말씀을 붙드십시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사랑할 수 있도록 해 주셨음을 믿고 사랑하십시오. Do love! 내가 온 마음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을, 내가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 것을 경험할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십시오.


결론적으로, 우리 하나님은 우리가 절대적으로 사랑할 유일한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의 주인이시요 우리 생명의 보존자이십니다. 우리를 위해 먼저 온 마음과 힘을 다해 사랑하사 독생자 예수님을 아낌없이 십자가에 내어 주신 분이십니다. 우리가 이 하나님을 마음과 목숨과 뜻과 힘을 다하여 사랑하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을 믿고 기도함으로 실제적으로 이런 사랑을 실천하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동역자들을 사랑하며 캠퍼스 양떼들을 사랑하기를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