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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2024년 마가복음 22강 언약의 피(마가복음 14:1-26)2024-09-01 16: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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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마가복음 22강


언약의 피


말씀/ 마가복음 14:1-26

요절/ 마가복음 14:24

“이르시되 이것은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오늘 말씀에서 예수님은 제자들과 마지막 유월절 만찬을 하십니다. 유월절은 예수님 이전 1,400년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켜온 절기였습니다. 예수님은 이 유월절의 참된 의미가 무엇인지 가르쳐주십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예수님의 피로 맺은 새 언약에 대해 배우길 기도합니다. 새 언약을 허락하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우리가 새 언약의 백성으로 살아가기를 기도합니다. 


1. 향유를 부은 여인 

1절입니다. "이틀이 지나면 유월절과 무교절이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를 흉계로 잡아 죽일 방도를 구하며" 유월절은 유대 종교력 첫 달인 니싼월 (태양력 3-4 월에 해당) 14일입니다. 유월절은 영어로 ‘Passover’ 인데 죽음의 사자가 넘어간다는 뜻입니다. 애굽의 바로 왕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내보내려고 하지 않자 하나님은 마지막 10번째 재앙을 내리셨습니다. 밤에 하나님의 사자가 그 집의 문설주에 어린 양의 피가 없는 집은 다 쳐서 장자들을 멸하셨습니다. 이를 계기로 이스라엘 백성은 400년 동안 종살이 하던 애굽에서 나올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백성들에게 이 유월절을 대대로 기념하라고 명하셨습니다. 그래서 출애굽 이후 유대인들은 유월절 낮에 음식을 준비하고 해가 지면 유월절 음식을 먹었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감사하는 찬송을 불렀습니다.


이제 이틀이 지나면 유월절과 무교절이었습니다. 무교절은 유월절 날에 이어 7일간 누룩이 들어가지 않은 떡을 먹는 절기였습니다. 유월절과 무교절은 이스라엘의 가장 큰 명절이었습니다. 우리는 설이나 추석 명절이 되면 고향으로 갑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명절에는 예루살렘에 몰려들었습니다. 성전에서 제사를 드리며 하나님을 예배하였습니다. 유대 종교지도자들은 예수님을 흉계로, 곧 간사한 방법을 써서 잡아 죽이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나 엄청난 무리들이 예루살렘에 몰려들었고 그 중에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었기 때문에 잘못하면 민란이 일어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명절에는 말자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3~9절은 예수님께 향유를 부은 한 여인에 대한 내용입니다. 신약 성경에 예수님께 향유를 부은 사건은 누가복음 7장과, 요한복음 12장, 그리고 여기 마가복음 14장에 나옵니다. 누가복음 7장 사건은 갈릴리에서 예수님의 사역 초기에 있었던 일입니다. 요한복음 12장 사건은 유월절 6일 전 나사로의 집에서 있었던 일인데, 본문의 사건과 내용이 비슷하여 같은 사건으로 보는 학자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은 예수님이 유월절 이틀 전, 그러니까 1/12 일에, 나병환자 시몬의 집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3절입니다. "예수께서 베다니 나병환자 시몬의 집에서 식사하실 때에 한 여자가 매우 값진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옥합을 가지고 와서 그 옥합을 깨뜨려 예수의 머리에 부으니." 나병환자였던 시몬의 집에서 식사하실 때 한 여자가 등장합니다. 그녀는 순전한 나드 한 옥합을 가지고 왔습니다. 보통 이런 식사자리에서 귀한 손님의 머리에 향유 몇 방울을 떨어뜨리는 것이 통례였습니다. 그런데 그녀가 한 일이 무엇입니까? 몇 방울 떨어뜨린 것이 아니었습니다. 병을 거꾸로 들어 예수님의 머리에 부었습니다. 호리병 모양의 옥합의 목구멍이 너무 작아 찔끔 찔끔 나왔습니다. 그러자 그녀는 주둥이를 쳐서 깨뜨렸습니다. 향유를 예수님의 머리에 쏟아 부었습니다. 옆으로 비스듬히 기대어 식사하시던 예수님의 머리에서 향유가 흘러 바닥에 떨어졌습니다. 이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이 어떠합니까? "와, 정말 대단한 헌신이구나!" 하였습니까? 그들은 "이런, 바닥에 비닐이라도 깔고 붓지! 삼백 데나리온은 족히 될 텐데! 이것을 팔아 가난한 자들을 구제해야 되는 거 아냐? 하였습니다. 


여인이 이와 같이 예수님께 향유를 쏟아 부은 이유가 무엇일까요? 8절입니다. "그는 힘을 다하여 내 몸에 향유를 부어 내 장례를 미리 준비하였느니라." 예수님의 장례를 미리 준비했다는 것에 대해서는 두 가지 해석이 있습니다. 하나는 여인은 예수님이 유월절 어린양으로 죽으실 것을 알지는 못했을 것이다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녀의 행동을 자신의 장례를 위한 것이라고 그 의미를 승화시켜 말씀하셨다고 봅니다. 다른 하나는 여기서 여인이 누구인지는 밝혀지지 않고 있지만 그녀는 예수님이 곧 죽으실 것을 알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자신이 이번에 예루살렘에 올라가면 죽임을 당할 것이라고 3번씩이나 명확히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여인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서둘러 내려져 시신에 향유를 부을 시간도 없이 묻히실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미리 그 몸에 향유를 부은 것입니다.


그 여인은 예수님께 큰 은혜를 받았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 은혜에 대해 감사를 표시하는 거였다면 옥합을 잘 포장하여 여비에 쓰시라고 드렸을 것입니다. 그녀는 감사에 더하여 예수님을 메시아로 영접하고 예수님께 온 마음을 다하여 경배한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여인의 이러한 헌신을 허비라고 여겼습니다. 허비란 낭비, 곧 쓸데없는 일이나 대단치 않은 사람을 위해 많은 시간이나 물질을 사용하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을 보통 사람으로 생각한다면 허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참으로 아는 사람은, 예수님께 자기의 모든 것, 심지어 생명까지 드려도 전혀 허비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더 드리지 못하여 아쉬울 뿐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기도제목은 이것입니다.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날마다 더 알게 하소서” 우리가 예수님이 얼마나 귀한 분인지 날마다 더 알아가는 가운데 주님께 우리의 온 마음과 힘을 쏟아 붓는 사람들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은 9절에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리라 하시니라." 죽음을 앞둔 이 순간, 제자들이 모두 예수님을 배반하고 도망갈 것을 아시면서도 이 놀라운 말씀을 하십니다. "온 천하에 복음이 전파"된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죽이고 제자들은 다 도망가게 되지만 주님은 복음의 승리를 내다 보셨습니다. 온 천하가 복음으로 정복될 것을 확신하셨습니다. 그리고 복음이 전파되는 곳마다 이 여인이 행한 일도 말하여져 그녀를 기억하게 된다고 하십니다. 무슨 말이십니까? 그녀는 비록 무명의 여인이지만 예수님을 섬기는 아주 귀한 예로 영원히 기억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에서 가장 존귀하게 여기신다는 것입니다. 그녀는 다 드렸지만 예수님을 소유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가장 부요하고 행복한 여인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 이러한 아름다운 여인들을 많이 세워주시길 기도합니다.


2.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집니다.

10,11절입니다. "열둘 중의 하나인 가룟 유다가 예수를 넘겨주려고 대제사장들에게 가매 그들이 듣고 기뻐하여 돈을 주기로 약속하니 유다가 예수를 어떻게 넘겨줄까 하고 그 기회를 찾더라." 앞의 1,2절을 보면, 종교지도자들은 명절에는 예수님을 잡지 말자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런데 유다가 예수님을 배반합니다. 그는 예수님이 향유를 부은 여인을 칭찬하시는 것을 통해 예수님은 자기가 원하는 것을 주지 않으실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예수님 따르기를 중단하고, 그간 3년간 따른 것에 대한 손해를 조금이라도 만회하고자 했습니다. 예수님을 팔기로 결심하였습니다. 그는 종교지도자들에게 가서 예수님을 어떻게 은밀하게 넘겨줄 수 있을지 협의합니다. 종교지도자들의 당초의 계획과 관계없이 하나님의 뜻이 성취되는 쪽으로 일이 급격히 진행됩니다. 여기서 우리는 사람의 실패, 심지어 사람의 행악도 쓰시는 하나님을 봅니다. 사실 하나님은 선한 사람들보다 악한 사람들을 더 많이 쓰셔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십니다. 사람은 같이 일하는 사람이 실패하면 자기 일에 영향을 받지만 하나님은 그렇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어떤 결정을 내리던 그 모든 것을 사용하여 그 뜻을 이루시는 지혜로운 분이십니다. 유다의 배반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예정된 일이 성취가 됩니다. 


어떤 사람은 유다가 하나님의 역사에 쓰임 받았으니 잘 한 것 아니냐고 말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무엇이라 하십니까? 21b절을 보면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그 사람은 차라리 나지 아니하였더라면 자기에게 좋을 뻔 하였느니라 하시니라." 하나님은 유다의 악도 쓰셔서 예정된 뜻을 이루시지만 유다는 자기의 죄로 말미암아 비참한 최후를 맞이합니다. 잠언서 19:21은 말합니다. "사람의 마음에는 많은 계획이 있어도 오직 여호와의 뜻만이 완전히 서리라." 모든 일에 하나님의 섭리가 있고, 사람이 무슨 일을 계획해도 결국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집니다. 우리가 이 사실을 믿을 때 언제나 마음의 평안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때로 날로 거칠어 가는 세상을 볼 때 근심이 됩니다. 악이 성행하고 의인들은 고통을 받는 것 같습니다. 나를 헐뜯는 사람들의 말을 들으면 마음에 상처가 됩니다. 그러나 사람이 무엇을 도모하든 하나님의 선한 뜻이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우리가 이를 믿고 모든 상황에서 요동하지 않고 당신의 뜻을 이루시는 하나님을 바라보기를 기도합니다.

 

3. 언약의 피

이제 예수님은 유월절 식사를 준비케 하십니다. 12절입니다. "무교절의 첫날 곧 유월절 양 잡는 날에 제자들이 예수께 여짜오되 우리가 어디로 가서 선생님께서 유월절 음식을 잡수시게 준비하기를 원하시나이까 하매." 이제 유월절 양을 잡는 날, 곧 1월 14일이 되었습니다. 해가 지면 집 안에서 유월절 음식을 먹는 날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어디에 유월절 식사를 준비하기 원하시는 지 묻습니다. 13~15절을 보면 예수님이 예루살렘 입성하실 때 나귀 새끼를 데리고 오도록 하셨는데 그와 비슷한 방향을 주십니다. 마치 007작전 같습니다. 이는 이미 배반을 결심한 유다가 유월절 먹는 장소를 모르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누가복음 22:15 을 보면 예수님은 고난 받기 전에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 먹기를 원하고 원하였노라 하십니다. 그 만큼 유월절 음식을 드시며 제자들에게 시각적으로 생생하게 예수님의 죽으심의 의미를 가르쳐주기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제자 중 둘을 보내시며 성내에서 물 한 동이를 가지고 가는 사람을 만나도록 하셨습니다. 당시 여자들은 물동이를 이고 다녔고 남자들은 물주머니를 어깨에 메었습니다. 남자가 물동이를 들고 가는 것은 이례적이던 것입니다. 그를 따라가면 큰 다락방을 보여줄 것인데 그곳에 유월절 음식을 준비하도록 방향을 주셨습니다. 학자들은 물동이를 가지고 가는 그 남자가 나중에 성령께서 강림한 다락방, 그 집의 주인인 마리아의 아들로 봅니다. 아마 평소에 예수님을 극진히 섬겼던 마리아가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오셨다는 소식을 들었을 것입니다. 이에 그녀는 예수님이 유월절 식사를 하실 장소를 미리 준비하였을 것입니다. 전지하신 예수님은 이 모든 것을 아시고 은밀한 방법으로 유월절을 준비하게 하셨습니다. 


날이 저물자 예수님은 열두 제자를 데리고 성내에 들어가 그 다락방에 들어가셨습니다. 18절입니다. "다 앉아 먹을 때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의 한 사람 곧 나와 함께 먹는 자가 나를 팔리라 하신대." 예수님은 배반자를 특정하지는 않으십니다. 너희 중의 한 사람이라고 하십니다. 20절에도 "나와 함께 그릇에 손을 넣는" 자라고만 하십니다. 이는 유다의 인격을 존중하시고 그의 자발적인 회개를 촉구하시기 위함입니다. 예수님은 비록 배반하는 제자라 할지라도 끝까지 그를 존중하고 사랑하셨습니다. 유다는 예수님의 이 사랑을 알고 악한 계획을 중단해야 되었습니다. 그러나 유다는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요한복음에 의하면 바로 이 순간에 그는 자리를 박차고 밖으로 나가버렸습니다. (요13:30)


22절입니다. "그들이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받으라 이것은 내 몸이니라 하시고." 예수님은 유월절 의식을 순서대로 따라 하시되 그 의미를 새롭게 부여하십니다. 유월절 식사 때에는 집안의 가장이 무교병을 떼어 나누어 주었습니다. "이 떡은 애굽 땅에서 우리 조상들이 먹던 고난의 떡이다" 말하며 나누어 주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제 떡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며 주십니다. "받으라 이것은 내 몸이니라" 여기서 떼어 주시는 것은 ‘Break’로 부셔서 주시는 것입니다. "떡"으로 번역이 되어 찹쌀떡 같이 떼어주는 느낌이 들지만, 실제는 둥글고 넓적한 마른 빵을 부셔서 떼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떡 조각을 ‘내 몸’이라 하십니다. 무슨 말입니까? 이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시는데, 그 죽음의 의미는 우리로 그의 몸을 먹게 하기 위해 그의 몸이 부서진다는 것입니다. 물론 사람의 살을 먹는다는 것은 아니고 영적으로 먹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 요한복음 6:51은 말합니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내가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니라 하시니라." 무리들은 오병이어 기적을 체험하고는 예수님을 따라 다니며 계속 떡을 요구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육신을 배부르게 하는 떡을 주러 오신 분이 아니십니다. 영생을 주시는 참 떡을 주러 오셨습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을 통해, 우리는 그를 믿음으로 그를 영적으로 먹게 되었습니다. 먹는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 몸에 들어와 소화되어 우리 몸의 일부가 되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을 믿을 때 그는 우리 안에 들어와 거하십니다. 우리와 하나로 연합하십니다. 모든 예수 믿는 신자는 예수님이 그 안에 계십니다. 그 분 자체가 생명이십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그 안에 있는 자는 생명이 있고 없는 자는 생명이 없습니다. (요일5:12)


23절을 보면 예수님은 또 잔을 가지사 감사 기도하시고 제자들에게 주십니다. 제자들은 다 그 잔을 마십니다. 예수님은 그 마신 잔의 의미를 말씀하십니다. 24절입니다. "이르시되 이것은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히브리 관용구에 의하면 '많은 사람'은 '모든 사람'을 뜻합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여기서 "많은 사람"은 "모든 믿는 사람"을 뜻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단어는 "위하여"입니다. 예수님이 피를 흘리시는 이유, 곧 그가 죽으시는 것은 그 자신을 위해서가 아닙니다. 그의 죄 때문도 아닙니다. 누구를 위한 것입니까? 많은 사람을 위한 것입니다. 곧 예수님의 죽으심은 많은 사람들의 죄를 대신하여 죽으시는 것입니다. 대속의 죽음입니다. 해마다 유월절에는 양을 잡았습니다. 그 양은 피를 흘려 죽었고 사람들은 양의 피를 문인방과 기둥에 발랐습니다. 그럼으로써 죽음의 사자가 유월(Passover)하는 것을 기념하였습니다. 이제 지난 천여 년간 이어진 유월절이 의미하는 바가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성취됩니다. 유월절 양은 그림자입니다. 예수님이 참 유월절 양이십니다. 그래서 세례 요한은 예수님을 이렇게 증거했습니다.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요1:29)


예수님이 누구를 위하여 죽으신다고요? 많은 사람을 위하여! 많은 사람들의 죄 때문에 죽으시는 것입니다. 왜 예수님이 많은 사람들을 위해 죽으셔야 되었나요? 그렇지 않으면 많은 사람이 자기들의 죄로 인해 다 죽어야 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죄를 그냥 없는 것으로 하지 못하십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시기 때문에 못하시는 것이 없지만, 이것은 못합니다. 죄를 그냥 지나치는 것. 이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성품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아무리 인생들을 사랑하시더라도, 공의로운 하나님은 모든 사람들을 반드시 심판하여 지옥 형벌을 내리셔야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는 결코 양립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하나님은 놀라운 지혜를 내셨습니다. 이는 온 우주가 떠나갈 정도의 놀라운 지혜였습니다. 곧 하나님은 당신의 사랑하는 하나 밖에 없는 아들로 하여금, 사람들을 대신하여 십자가에 죽게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이는 갑자기 나온 방법은 아닙니다. 최초의 인간 아담이 범죄했을 때부터 약속하신 것이었습니다. (창3:15) 이 일이 이루어질 때까지 유월절을 지키게 하심으로 사람들로 하여금 메시아를 기다리게 하셨습니다. 


사람은 자기 죄로 죽습니다. 자기의 죽음은 자기 한 사람의 죄를 속할 뿐입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 한 분의 피가 온 세상 사람들의 모든 죄를 속할 수 있을까요? 이는 그가 하나님의 아들, 성자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거룩하신 성자 하나님의 피는 모든 인류의 모든 죄를 다 대속하고도 남는 가치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피에는 완전하고 영원한 사죄의 능력이 있습니다.


"이것은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예수님이 흘리시는 피는 언약의 피입니다. 언약의 피라는 말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첫째는 언약을 성립시키는 피입니다. 둘째는 언약을 인치는 피입니다. 첫째, 예수님의 피로 인해 언약이 성립되었습니다. 즉, 예수님의 피로 인해 우리에게 새 언약이 주어졌습니다. (KJV “my blood of the new testament”) 이는 구 언약과 다른 것입니다. 구 언약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시내 산에서 율법을 주셨는데 그것을 다 지키면 의를 얻는 언약입니다. 그런데 율법이 얼마나 많습니까? 십계명 외에 수백 가지가 있습니다. 이를 다 지켜야 의인이 됩니다. 가능하겠습니까? 더욱이 율법을 지키는 수준은 그저 겉으로만 지키는 것이 아닙니다. 간음을 실제적으로 하지 않는 수준이 아니라, 눈으로 음욕을 품기만 해도 간음한 것입니다. 그런 수준으로 모든 계명을 지킨 사람은 세상에 전혀 없습니다. 그래서 율법은 우리에게 의가 무엇인지 가르쳐주시면 결국 우리를 정죄하여 죽음에 이르게 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말했습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7:24) 


그런데 예수님의 피 흘리심으로 새 언약이 우리에게 주어졌습니다. 새 언약에서는 우리가 율법을 지키는 것이 아닙니다. 누가 지킵니까? 예수님이 지키십니다. 예수님은 죄가 없으신 분입니다. 이런 예수님이 율법을 온전히 지키심으로 율법의 완성이 되셨습니다. 다른 표현으로 하면, 예수님은 대제사장으로서 자기 자신을 제물로 바치셨습니다. 이로써 우리 인간을 위한 완전한 속죄를 이루셨습니다. 예수님이 나 대신 죗값을 치르신 것입니다! 이제 누구든지 예수님이 나의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피 흘리신 것을 믿기만 하면, 예수님이 이루신 의가 나에게 전가됩니다. 그가 하신 일이 내가 한 일이 됩니다. 물론 그가 하신 일이 내가 한 일은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렇게 쳐 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받는 이 의는 ‘칭의’입니다. 대속은 한마디로 자리바꿈입니다. 의인이신 예수님이 죄인의 자리에 처하심으로, 죄인인 내가 의인의 자리를 얻게 된 것입니다. 그를 믿음으로! 이것이 복음입니다. 


로마서 3:23,24 입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그리스도가 우리 대신 죽으심으로 우리가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것입니다. 이는 온전히 믿음으로 되는 것이요 그래서 오직 하나님이 거저 주시는 은혜입니다. 이 복음을 믿는 것은 단순한 이론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닙니다. 복음을 믿을 때 내 안에 예수님이 들어오십니다. 우리 안에 계신 예수님의 영이 나를 변화시켜나갑니다. 우리를 거듭나게 하시고 성화되게 하십니다. 예수님을 닮기까지 나를 변화시켜 나가십니다. 예수님은 자기 피를 흘리심으로 우리에게 이러한 놀라운 은혜를 베풀어주신 것입니다. 


다시 정리하면, 구 언약은 우리가 율법을 지키는 것입니다. 그 결과는 사망입니다. 새 언약은 예수님이 지키십니다. 우리는 그렇게 하신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그 결과는 생명입니다. 믿는다는 것은 의지하는 것입니다. 의지함으로 그와 하나 되는 것입니다. 이로서 믿음으로 말미암는 구원의 길이 모든 사람들에게 활짝 열렸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에게 이와 같이 구원의 길을 허락하신 하나님께 감사와 찬송을 드립니다. 


한편으로 예수님의 피는 인을 치는 피이기도 합니다. 짐승의 피로 인을 친 것은 한시적이었습니다. 다시 짐승의 피를 흘려야 되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피는 영원합니다. 그 피로 인친 언약은 영원합니다. 


세상 사람들의 문제는 한 마디로 죄 문제입니다. 그로 말미암은 영원한 죽음 문제입니다. 이러한 죄와 죽음 문제를 해결할 길은 예수님을 믿는 것 외에는 다른 길이 전혀 없습니다. 어떠한 율법도, 종교도, 철학이나 윤리나 도덕도 사람을 죄에 구원하지 못합니다. 오직 예수님의 피만이 죄를 속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어떤 죄인도 구원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 피의 은혜를 받은 자들입니다. 이를 늘 기억하고 감사해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이 피의 은혜를 새롭게 하지 않으면 마음이 무뎌집니다. 교만해집니다. 독생자 예수님의 십자가의 피로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은 사랑 그 자체이십니다. 우리가 이 하나님의 사랑을 날마다 덧입기를 기도합니다. 이 구원의 길을 몰라 죽어가는 양떼들을 도와 예수님의 피를 믿도록 섬기기를 기도합니다. 주님을 위한 우리의 모든 헌신이 오직 예수님의 피의 은혜에 기초하기를 기도합니다. 


25절입니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하나님 나라에서 새 것으로 마시는 날까지 다시 마시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예수님의 피 흘리심으로 이제 유월절은 완성되었습니다. 더 이상 세상에서 유월절을 지킬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에서 새 것으로 마시는 날이 올 것이라 하십니다. 예수님과 함께 영원히 즐거움을 누리는 어린양의 혼인잔치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피의 은혜를 받은 자의 소망입니다.


결론적으로, 예수님의 피 흘리심은 인류의 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은 하나님께서 아담의 범죄 이래 말씀해 오신 것입니다. 어느 시대 어떤 사람이든지 예수님의 피를 믿는 것이 유일한 구원의 길입니다. 우리가 이 구원의 도리를 힘써 전하기를 기도합니다. 또한 주님의 대속의 은혜를 날마다 기억하며 늘 감사와 찬양이 넘치게 하여 주시길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