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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2024년 마가복음 23강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마가복음 14:27-72)2024-09-09 0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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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마가복음 23강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말씀/ 마가복음 14:27-72

요절/ 마가복음 14:36 “이르시되 아빠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오늘 본문은 예수님의 생애 중에서 가장 고통스럽고 가장 절망스러운 시기의 내용입니다. 십자가를 앞에 두고 고뇌하는 한 인간으로서의 진실된 모습이 나옵니다. 그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될 지경에 이르기까지 고뇌합니다. 이를 예수님은 어떻게 극복합니까?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로 승리하십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예수님의 ‘겟세마네 기도’를 배우길 기도합니다.


예수님은 유월절 만찬후에 제자들을 데리고 감람산으로 갑니다. 그리고 심각한 말씀을 하십니다.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3년동안 애써 키운 제자들이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간다는 것입니다. 스가랴 13;7절 말씀을 기억하시고 하시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하시는 예수님의 심정이 오죽했겠습니까? 베드로의 반응이 무엇입니까? ‘다’란 말이 귀에 거슬렸습니다. “다 버린다니요~. 여기 있는 사람들이 다 버릴지라도 난 안 버립니다.” 역시 베드로, 의리의 사나이입니다. 그러나 그의 충성심은 곧 무너질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이 밤이 지나기 전에 예수님을 한 번이 아니고 세 번이나 부인하기 때문입니다. 그 사실을 모르고 그는 더욱 강하게 고백합니다.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 모든 제자도 이처럼 말하였습니다(30-31). 그들의 마음은 진심이었습니다. 


본문 말씀에서 우리는 시공을 초월하여 온전히 성취되는 하나님의 말씀의 위력을 확인하게 됩니다. 아울러 인간이 환난이나 유혹 앞에서 얼마나 맥없이 무너지는 존재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사람은 강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강하지 못합니다. 지혜가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지혜롭지 못합니다. 허점도 많고 약점도 많은 것이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너희가 사람의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마24:4)고 경고합니다. 우리를 미혹하는 사단 마귀는 우리의 허점과 약점들을 잘 알고 있기에 주의하지 않으면 그가 쳐놓은 올무에 걸리기 쉽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난 시험에 안들거야~’ 장담해서도 안되고, 항상 넘어지지 않을까 조심하고 또 조심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은 제자들은 겸손하게 자신들의 연약함을 인정하고 실족하지 않도록 깨어 기도하고 준비해야 마땅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겟세마네라는 곳에 이르렀습니다. ‘겟세마네’가 무슨 뜻입니까? ‘기름을 짜는 틀’입니다. 예수님은 혈과 육의 싸움을 싸우지 않고 이곳에서 자신의 피와 땀을 짜서 간절히 기도하고자 오셨습니다. 기도할 동안 제자들에게 여기 앉았으라 하시고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만을 데리고 가십니다. 이때 예수님은 심히 놀라고 슬퍼하십니다. 세 제자들에게 기도 부탁을 하십니다.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깨어 있으라.” 예수님이 이처럼 연약한 모습을 보인 적이 없었습니다. 광풍이 휘몰아치는 위기 가운데서도, 살기가 등등한 원수들 앞에서도 조금도 놀라거나 두려워하지 않으셨습니다. 항상 의연하시고 위엄과 영적 권위로 충만하셨습니다. 그런 예수님이 당당한 모습을 보이지 않으시고 놀라고 슬퍼하시다니~ 의외입니다. 소크라테스는 죽을 때 안색 하나 변하지 않고 태연히 독이 든 잔을 마셨다고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왜 이렇게 죽음 앞에서 죽는 소리를 하는 걸까요? 예수님의 죽음이 보통 인간의 죽음과 차원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보통 인간의 죽음은 자신의 죄로 인한 개인적인 죽음이지만 예수님의 죽음은 인류의 모든 죄를 담당하시는 대속의 죽음입니다. 육체적 고통도 두려운 것이지만 그보다는 인류가 지은 모든 죄를 대신 짊어지며, 저주를 받으며, 십자가에 높이 달려 만민의 비방의 표적이 되어야 하십니다. 무엇보다 하나님께로부터 버림을 받아야 합니다. 일시적이지만 성부 하나님과 연합된 사랑에서 끊어져야 합니다. 사실 하나님의 본체이신 예수님이 하나님과 단절된다는 것은 생각조차 하기 어려운 끔직한 일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실 때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외치신 것 아닙니까? 그가 비록 성자 하나님이시지만 이를 감당하고자 할 때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될 정도로 힘든 일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구원이 결코 값싼 댓가로 얻어진 것이 아니라 엄청난 값을 지불하고 얻은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저는 이번주 메시지를 준비하면서 왜 이리 바쁜지, 또 이리 시간은 없는지, 메시지 진도는 왜 이리 안 나가는지, 피곤하고, 머리도 아프고, 잠도 뒤척이며, 부담감에 짓눌려 보냈습니다. 이렇게 저는 성냥개비로 만든 십자가를 지고도 힘들어하였습니다. 하물며 온 인류의 죄를 담당하시기 위해 우주만한 십자가를 져야 하시는 예수님의 그 영육간의 고통을 생각할 때 할 말이 없습니다. 한 인간으로서 너무나 큰 고통을 맛보신 예수님은 우리가 겪는 마음의 번민, 고통, 고독, 슬픔을 근본적으로 이해하십니다. 동정하십니다. 도우실 수 있습니다(히4:15).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의 피의 은혜를 의지하여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가야 합니다(히4:16). 


이를 감당해야만 하는 예수님은 세 제자에게 자기를 위해 기도해 달라 부탁하십니다. 제자들의 기도의 동역을 간절히 원하십니다. 


35절을 보겠습니다. 예수님은 조금 나아가사 땅에 엎드리어 기도하셨습니다. ‘땅에 엎드렸다’는 것은 복종과 겸손을 나타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엎드려 필사적으로 기도하십니다. 그 기도의 내용이 무엇입니까? 36절을 읽습니다. “이르시되 아빠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아빠 아버지’ 이는 하나님께 대한 예수님의 사랑과 깊은 신뢰를 말해 줍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고자 하실 때 하나님께 섭섭한 마음을 품거나 그 사랑을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된 지경에 이르렀을지라도 어린 아이가 부모를 사랑하고 신뢰하듯, 하나님 아버지를 절대적으로 사랑하고 신뢰하셨습니다.


여기서 ‘이 때’란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셔야 하는 때를 말하며, ‘잔’은 십자가의 고통과 죽음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할 수만 있으면 십자가를 지고 싶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시기 때문에 다른 방법으로 인류 구원을 이룰 수 있다고 고백합니다. 마음의 번민과 고통을 진실되게 아룁니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그러나’ 이 말은 위대한 전환입니다. 자기 뜻에서 하나님 뜻으로의 전환이요, 육에서 영으로의 전환입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기쁘게 하기보다 적극적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자 하십니다. 이를 위해서 자기를 쳐서 하나님의 뜻에 복종시킵니다. ‘겟세마네의 기도’는 어찌보면 십자가를 회피하기 위한 기도라기보다 오히려 이를 적극적으로 감당코자 하는 몸부림이라 할 수 있습니다. 참된 기도는 자기 생각, 자기 고집, 자기의 뜻을 하나님의 뜻에 복종시키고 일치시키는 과정입니다. 


여러분은 ‘개와 고양이의 신학(Dog and Cat Theology)’이란 말을 들어 보셨나요? 개가 주인에게 말합니다. ‘당신이 나를 사랑하고 먹여주고, 재워주는 것을 보니 당신은 나의 하나님이군요.’ 반면 고양이가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이 나를 사랑하고, 먹여주고, 재워주는 것을 보니 내가 하나님인게 분명하군.’ ‘개’는 주인의 원함에 초점을 맞추었다면, ‘고양이’는 자기 원함을 중심으로 삽니다.


여기에 등장하는 ‘그 개’와 ‘그 고양이’는 오늘날의 크리스천을 비유한 것이라 합니다. ‘갯과 신자’는 “내가 오늘 이렇게 사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라고 고백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원함보다도 하나님의 원하심을 받아들이기 위해 애를 씁니다. 반면 ‘고양잇과 신자’는 “내가 오늘 이렇게 사는 것은 오직 내가 잘났기 때문이다.”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자기 원함을 하나님께 관철하기 위해 삽니다. 


문제는 오늘날 신자 중에 ‘갯과 신자’보다 ‘고양잇과 신자’가 더 많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뜻보다 자기의 생각과 뜻을 더 앞세웁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가를 찾아 순종할려고 하기보다 내가 원하는 것을 하나님께 일방적으로 청구합니다. 그리고 그 청구한 것이 빨리 응답되지 않으면 하나님을 원망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합니다. 그래서 장래 방향을 정하는 문제나 결혼 문제에 부딪히면 자기가 원하는대로 하고자 합니다. 


그렇다면 왜 우리의 기도를 하나님의 뜻에 맞추어야 합니까? 우리가 원하는 것은 대개 좁고 자기 중심적이며 불완전한 반면 하나님의 뜻은 원대하고 완전하며 우리에게 유익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자기 생각과 자기 뜻을 부인하고 적극적으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때 놀라운 영적 세계의 비밀을 깨닫게 되고, 하나님이 쓰실 만한 영적인 사람으로 성장하게 됩니다.  


예수님의 겟세마네 기도는 예수님의 순종의 삶의 결정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본래 그 본체가 하나님으로서 하늘나라의 영광과 권세와 존귀로 옷 입으신 분이십니다. 그러나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여 이 땅에 비천한 육신의 몸을 입고 오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시되 십자가에 죽기까지 철저히 순종하셨습니다. 히5:7-9절은 말합니다.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건하심으로 말미암아 들으심을 얻었느니라 그가 아들이시면서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셨은즉 자기에게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 이러한 예수님의 순종의 기도, 순종의 삶을 우리가 본받아 예수님의 형상이 우리 내면에 새겨지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은 동일한 기도제목을 가지고 세 번 기도하셨습니다. 얼마나 힘쓰고 애써 간절히 기도하셨는지, 눅 22:24절에서는 땀방울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같이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기도하심으로 모든 슬픈 생각, 연약한 생각을 다 물리치시고 적극적으로 십자가를 질 힘을 얻으셨습니다. 


이처럼 겟세마네에서 기도하시는 예수님과 달리 베드로는 무엇을 합니까? 자고 있습니다. 아예 코를 골며 자고 있습니다. 제자들이 왜 잤을까요? 유월절 식사 때 떡을 너무 많이 먹고 포도주를 너무 많이 마셨기 때문에? 아니면 예수님께서 자꾸 십자가를 말씀하시고 고민되어 죽겠다고 하니 부담되고 피곤해서? 대개 사람들은 부담이 되면 잠으로 도피를 많이 합니다. 예수님은 이런 그를 깨우십니다. ‘시몬아 자느냐, 네가 한 시간도 깨어 있을 수 없더냐?’ 그리고 그 이유를 알려주십니다.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겟세마네 기도를 마치신 예수님은 그 모습이 어떻게 바뀝니까? 42절을 읽겠습니다. “일어나라 함께 가자 보라 나를 파는 자가 가까이 왔느니라.” ‘일어나라’, ‘함께 가자’ 예수님은 확신과 용기와 담대함으로 충만하셨습니다.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 담대히 일어나셨습니다. 고난의 길을 앞장서서 가십니다. 


43-65절은 예수님께서 체포당하시고 심문받는 내용입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죽이고자 하였으나 증거를 찾지 못하였습니다. 그러자 대제사장이 단도직입적으로 묻습니다. “네가 찬송받을 이의 아들 그리스도냐?” 그동안 침묵으로 일관하던 예수님께서 대답합니다. 62절을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그니라 인자가 권능자의 우편에 앉은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 전에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니이다’ 고백하였을 때 예수님은 그것을 숨기도록 신신당부하셨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담대히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십니다. “내가 그로라” ‘그리스도’ 맞다고 외칩니다. “인자가 권능자의 우편에 앉은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 이 말씀은 단7:13절을 비롯하여 구약에 예언된 ‘이스라엘의 소망’에 관한 것입니다. 자신이 ‘이스라엘의 소망’ 즉, 메시야임을 선포합니다. 이것은 그들에게 참으로 기쁜 소식, 복음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이를 어떻게 봅니까? 신성모독으로 보았습니다. 아니, 예수님께서 대제사장 귓속에 대고 ‘내가 그로라’ 조용히 말씀하실 것이지, 왜 많은 사람 앞에서 이런 식으로 선포해 버리신단 말입니까? 어찌 이리도 쉽게 죽음의 길을 선택한단 말입니까? 이제 그들 모두는 예수님을 사형에 해당한 자로 정죄합니다. 죄인 취급을 합니다. 어떤 사람은 예수께 침을 뱉습니다. 예수의 얼굴을 가리고 주먹으로 칩니다. 하인들조차 예수를 손바닥으로 칩니다. 어찌 그 피조물이 창조주에게 이렇듯 폭력을 가하며 멸시와 조롱과 능욕을 준단 말입니까? 그리스도께서는 도살장에 끌려가는 어린 양같이 죽음의 길을 이렇게 묵묵히 간단 말입니까? 참으로 우리는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그 고난, 그 순종, 그 은혜를 우리가 늘 기억해야겠습니다. 


반면, 깨어 기도하지 않고 자고 있던 제자들은 어떻게 됩니까? 50절을 읽겠습니다. “제자들이 다 예수를 버리고 도망하니라” 51,52절도 읽겠습니다. “한 청년이 벗은 몸에 베 홑이불을 두르고 예수를 따라가다가 무리에게 잡히매 베 홑이불을 버리고 벗은 몸으로 도망하니라” 여기 나오는 한 청년은 저자 마가로 봅니다. 그 이유는 베 홑이불이 당시 귀하고 비싼 이불이었기 때문입니다. 유월절 만찬이 끝나고 예수님 일행이 겟세마네로 갈 때 그는 옷을 벗고 베 홑이불을 덮고 잠을 청하였습니다. 그러다가 한 무리의 군병들이 왁자지껄하며 예수님이 가신 겟세마네로 급히 가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잠결에 무엇인가 안 좋은 예감이 들어 급히 그들을 따라 왔었고, 예수님이 체포당하는 일련의 과정을 숨어서 지켜 보았습니다. 제자들이 다 도망갈 때 군병들이 그들을 쫓았습니다. 마가도 황급히 그 자리를 뜨고자 하였는데 한 군병이 그를 붙들었습니다. 그는 베 홑이불을 버리고 벗은 몸으로 도망갔습니다. 


한편 도망간 베드로는 그래도 예수님께 대한 의리가 있는데~ ‘예수님께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그 상황을 알아보고자 대제사장 집에 들어갑니다. 그러나 그는 어떻게 합니까? 자기를 알아보는 여종 앞에서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하고 맙니다. 닭이 울자 예수의 말씀이 생각나 통곡하였습니다. 


베드로처럼 저에게도 부끄러운 일이 있었습니다. 80년대 대학생때 캠퍼스에서 어떤 한 학생에게 전도하고 있었습니다. 열심히 말씀을 설명하고 있는데, 대학교 후문 근처에서 시위가 벌어져 대학생과 전경(전투경찰)이 대치하였습니다. 그러다가 시위가 격렬해지자 최류탄이 발사되었습니다. 그 중에 지랄탄이 바로 내 앞에 떨어졌습니다. “쉬이익, 쉭~쉭~” 순간 저는 양을 버려두고 ‘걸음아 나 살려라’ 하며 도망갔습니다. 한참 도망간 후 뒤를 돌아보니 양의 모습은 온데 간데 없었습니다. 저의 마음이 비참해졌습니다. 저는 중국선교사로 갔다가 한국으로 돌아온 후 원광대학 치대 대학원에 지원했습니다. 그런데 원불교 학교라 혹시 불이익이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종교란을 빈칸으로 남겨두었습니다. 면접관은 저에게 “혹시 기독교인, 아니세요?” 물어보았습니다. ‘맞다’고 하자 ‘왜 종교란을 빈칸으로 두었냐’고 물었습니다. 저는 쥐구멍이라도 들어가고 싶었습니다. ‘이런 내가 무슨 중국 선교사야’하는 마음의 고소가 들려왔습니다. 이처럼 저는 연약하고 나약하고 쉽게 예수님을 부인하는 자입니다. 주님 앞에 낯을 들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나를 여전히 사랑하시고 자신의 모든 것, 목숨까지도 내어 주시는 주님을 생각할 때 참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제가 나의 연약함을 알고 깨어 기도해야겠습니다. 


여러분은 주님이 요구하시는 사명이 부담되어서, 또는 내가 원하는 것과 달라서, 도망가고 싶은 적은 없습니까? 회피하고 싶은 적은 없습니까?


성경에서 하나님께 사명을 받았으나 그 사명이 내가 원하는 것이 아니어서 도망간 대표적인 인물이 누구입니까? 요나입니다. 종로7부는 요나서를 지금 공부하고 있는 것으로 압니다. 하나님께서 요나를 부르시고 그에게 사명을 주십니다. “너는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그것을 향하여 외치라 그 악독이 내 앞에 상달되었음이니라 하시니라”(욘1:2) 요나가 할 일은 세 가지 ‘일어나라’, ‘가라’, ‘외치라’입니다. 그러나 요나는 이 사명이 맘에 들지 않았습니다. 싫었습니다. 그래서 니느웨 반대편에 있는 다시스로 도망하고자 배를 탑니다. 그리고 거센 풍랑이 일자 배 밑창으로 갑니다. 깊은 잠으로 도피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를 다시 붙잡아 바다에 던지고, 물고기가 삼켜 물고기 뱃속에 들어가게 하십니다. 기도하던 요나를 하나님은 사흘만에 육지에 토해냅니다. 그리고 그에게 두 번째 하나님의 말씀이 임합니다.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내가 네게 명한 바를 그들에게 선포하라 하신지라”(욘3:2) ‘일어나라’, ‘가라’, ‘선포하라’ 하나님의 첫 번째 명령과 똑같습니다. 


예수님이 처한 현 상황은 요나가 처한 상황과 비슷합니다. 예수님도 요나처럼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피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결코 도망가지 않으십니다. 기도하십니다. 예수님은 기도하는 가운데 요나에게 주신 두 번에 걸친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하셨으리라 여겨집니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사람들에게 ‘요나의 표적밖에 보여줄 것이 없다’고 말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주신 소명을 온전히 나의 것으로 영접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입에서 나온 말씀 ‘일어나라’ ‘함께 가자’ 그리고 ‘내가 그로라’ 외치심으로 순종의 결과를 나타내셨습니다. 요나의 불순종과 예수님의 순종이 참으로 대조가 됩니다. 우리 각자에게도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 또는 약속의 말씀이 있을 것입니다. 그것을 생각하면서 한번 따라해 보겠습니다. ‘일어나라’, ‘가라’, ‘외치라’. 우리 모두 순종의 열매를 맺기를 기도합니다. 


오늘 살펴본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일련의 사건은 에덴동산의 사건과 밀접하게 연관됩니다. 에덴동산에서 인간의 반역이 죽음의 통치를 불러왔다면, 게셋마네 동산에서의 예수님의 복종이 이 반역의 패턴을 뒤집고 죽음의 통치를 물리치는 새 생명의 역사를 오게 하는 시발점이 되었습니다.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이 말씀을 실천한 성경인물을 생각해 볼 때 사도바울이 생각났습니다. 그는 아시아에서의 사역을 위해 오랜동안 준비하였고 기도하였고 이를 위해 시도하였습니다. 그런데 계속하여 길이 막혔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뜻이 유럽에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때 그가 어떻게 합니까? 자신의 뜻과 계획을 접고 즉시 유럽으로 건너가 선교함으로써 하나님의 뜻에 굴복시킵니다(행16:6-10). 이를 통해 유럽이 복음화 되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나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내가 원하는 것과 다를 때 어떻게 해야 하는가? 도망가면 안됩니다. 회피하면 안됩니다. 겟세마네 동산에 올라가 기도해야 합니다. 말씀을 붙들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에 복종해야 합니다. 그때에 우리를 통한 생명의 역사가 있을 줄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