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창세기 제 27 강 열두 지파를 위한 야곱의 축복 말씀 / 창세기 49:1-50:26 요절 / 창세기 49:28 “이들은 이스라엘 열두 지파라 이와같이 그들의 아버지가 그들에게 말하고 그들에게 축복하였으니 곧 그들 각 사람의 분량대로 축복하였더라” 창세기 마지막 강의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야곱은 12 지파를 축복합니다. 그리고 야곱과 요셉이 자신을 가나안 땅 막벨라 굴에 묻어달라는 유언을 합니다. 우리가 본문을 통해 참 축복은 무엇인지, 어떻게 그 축복을 받을 수 있는 지를 잘 배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1,2절을 읽겠습니다. “야곱이 그 아들들을 불러 이르되 너희는 모이라 너희가 후일에 당할 일을 내가 너희에게 이르리라. 너희는 모여 들으라 야곱의 아들들아 너희 아버지 이스라엘에게 들을지어다” 이 말씀에서 우리는 시니어다움에 대해서 생각해 봅니다. 우리 모두는 누군가의 시니어입니다. 시니어는 후배들을 모아서 자기 말을 들으라고 할 컨텐츠를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시덥지 않는 이야기를 들으라고 강요하는 것이 아닙니다. 야곱은 430년 이후에 이루어질 이야기 곧 매우 권위있고 경청할 가치가 있는 이야기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면 야곱은 어떻게 권위와 통찰력을 가지고 후손들의 미래를 예언할 수 있었을 까요? 첫째는 관찰력 때문입니다. 이하 야곱의 예언을 보면 자신의 자녀들을 정확히 알고 있습니다. 단순히 관찰하지 않고 기도하면서 사랑과 깊은 관심가운데 자녀들 하나하나를 관찰했을 것입니다. 둘째로 성령이 주시는 통찰력을 덧입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자녀들을 깊이 관찰한다 하여도 어떻게 430년 더 나아가 1700 년 후의 일들을 예언할 수 있겠습니까? 요한복음 16:13절을 보면 성령님이 오시면 장래 일을 알려주신다고 하였습니다. 성령님이 임하면 어린이든, 청소년이든, 나이든 사람이든 미래 일을 알 수 있습니다(행 2:17). 성령이 충만하지 못한 사람들은 한치 앞도 내다보지 못하지만 성령이 충만했던 이사야 선지자나 사도요한은 새 하늘 새 땅까지 내다보았습니다. 그러면, 야곱이 그 아들들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축복했습니까? 먼저 장자 르우벤입니다. 3,4절을 읽겠습니다. “르우벤아 너는 내 장자요 내 능력이요 내 기력의 시작이라 위풍이 월등하고 권능이 탁월하다마는 물의 끓음같았는 즉 너는 탁월하지 못하리니 네가 아버지의 침상에 올라 더렵혔음이로다 그가 내 침상에 올랐었도다” 르우벤은 야곱의 축복을 받을 수 있는 모든 조건을 가지고 태어난 금수저중의 금수저였습니다. 그는 고대사회에서 장자로 태어났기에 웬만하면 아버지의 축복을 이어받을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외모와 능력은 탁월했습니다. 그는 키 188cm/몸무게 73kg의 다니엘헤니 이상이었습니다. 그리고 능력도 많았습니다. 하지만 그는 장자의 지위를 상실하고 별 볼일 없는 사람으로 살았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첫째로 정욕대로 살았기 때문입니다. 물의 끓음은 정욕의 충동을 뜻합니다. 정욕대로 사는 사람은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어떤 사람을 쓰십니까? 금 그릇이나 은 그릇이 아니라 깨끗한 그릇을 사용하신다고 했습니다(딤전 2:21) 그러기에 쓰임받고자 하는 청년들에게 청년의 정욕을 피하라고 사도바울은 권면했습니다. 다음으로 교만하고 질서를 어기는 사람은 하나님의 축복을 받지 못합니다. 르우벤의 죄는 단순히 정욕죄가 아니었습니다. 아버지의 아내를 범한 죄 곧 교만과 패역의 죄였습니다. 교만하고 질서를 깨드린 것은 사탄이 걸었던 길입니다. 사탄은 축복을 받은 것이 아니라 저주의 원형이 되었습니다. 교만하고 영적 질서를 어기는 사람들은 결코 하나님께 축복을 받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겸손한 자는 때가 되면 반드시 높이시고 쓰십니다. 하지만 교만한 자는 대적하사 산산히 깨뜨리십니다. 두 번째로 야곱이 언급한 이들은 시므온과 레위였습니다. “시므온과 레위는 형제요 그들의 칼은 폭력의 도구로다”(5) 시므온과 레위는 둘째, 셋째 아들입니다. 다른 형제들도 형제인데 유독 이 두 사람을 형제로 부르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이 두 사람이 악한 일에 형제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죄가 가중되는 것은 그들이 모의를 하였기 때문입니다. 모의는 단독범죄보다 더 죄질이 나쁩니다. 그들이 어떤 죄를 저질렀습니까? 그들은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컬었습니다. 그래서 결국 하나님의 영광을 땅에 떨어뜨렸습니다. 그들은 거짓증거를 하였고 살인하고 도둑질했습니다. 이웃의 것을 약탈하는 탐심의 죄를 범하였습니다. 야곱은 이들에게 저주를 선언했습니다. 그리고 그 형벌로 야곱 중에서 나누이며 이스라엘 중에서 흩어질 것이라 했습니다. 실제로 시므온 지파는 단독 기업이 없고 유다지파내에 몇 개의 고을밖에 분배받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모든 지파중에서 가장 작은 소수의 인구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레위지파는 그보다 더 심하게 모든 지파에 흩어졌습니다. 그런데 두 지파는 야곱의 저주를 잘 감당했습니다. 시므온 지파는 겸손하게 작아짐을 감당했을 때 결과적으로 유다지파의 보호아래 안전하게 살 수 있었습니다. 또한 레위지파는 모세가 우상숭배자들을 단호하게 다룰 때 인본주의와 정을 극복하고 하나님 편에 섰습니다(출 32:29). 그때 모세는 레위지파를 축복했습니다. 그럴 때 레위지파는 모든 지파에 흩어져서 각지파를 섬기는 제사장지파가 되었고 모든 지파에게 공궤를 받았습니다. 신명기 33장을 보면 모세가 열두지파를 축복한 내용이 나오는데 레위지파에 대한 축복이 무려 20절에 달하고 있습니다. 이를 볼 때 하나님의 축복은 운명적으로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님을 보게 됩니다. 축복이 저주도 될 수 있고 저주도 축복으로 바뀔 수 있습니다. 야곱은 르우벤을 비롯하여 시므온과 레위에게 가혹하리만큼 냉정하게 저주를 선언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무조건 좋은 말만 해주는 것이 꼭 축복한다 볼 수 없습니다. 감당할 수 있다면 냉혹하게 이야기하는 것도 변화와 발전의 계기가 될 수 있습니다. 시므온과 레위는 칼을 들고 대들지 않고 겸손히 아버지의 말씀을 경청하였고 자기반성과 성장의 계기로 삼았습니다. 그랬을 때 레위지파는 영적 장자가 되는 대반전을 경험했습니다. 우리가 때론 저주에 가까운 이야기를 들었더라도 반발하지 않고 그것을 잘 소화하여 축복으로 만들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8-12절은 유다와 그 지파에 대한 축복입니다. 이 축복은 요셉과 그 지파에 대한 축복과 정확히 절수와 줄 수가 같습니다. 5절 18줄입니다. 이는 두 지파가 하나님의 축복을 가장 많이 받았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8절을 읽겠습니다. “유다야 너는 네 형제의 찬송이 될지라 네 손이 네 원수의 목을 잡을 것이요 네 아버지의 아들들이 네 앞에 절하리로다” 형제들의 찬송이 된다는 것은 유다와 그 후손들이 형제들의 칭송을 받고 인정을 받는 다는 것입니다. 그 결과 그들은 어떻게 됩니까? 10절을 보십시오. “규가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며 통치자의 지팡이가 그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하기를 실로가 오시기까지 이르리니 그에게 모든 백성이 복종하리로다” 규는 왕이 드는 작은 지팡이 곧 홀입니다. 그러므로 유다지파가 왕가가 되는 축복을 받을 것이란 예언입니다. 이 예언대로 유다지파는 다윗 왕으로부터 시작하여 시드기야까지 20명의 왕을 배출하였습니다. 또한 영원한 왕 예수님이 유다의 후손으로 오십니다. 본문에서 ‘실로’는 평화를 가져다는 주는 분이란 뜻으로 바로 평화의 왕으로 오실 예수님을 가리킵니다. 유다가 이런 축복을 받은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유다가 위기의 때에 나서서 그 책임감과 대범한 희생정신으로 야곱공동체를 살려냈기 때문입니다. 위기의 때에 공동체를 살려내는 책임감과 희생정신 이것이 진정한 리더의 면모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유다를 축복하사 계속하여 이스라엘을 이끄는 리더들을 배출하게 하셨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칭송받기 원하지만 희생하고 헌신하고 베풀기는 싫어합니다. 이런 사람은 구성원들에게 결코 칭송받을 수 없고 누구도 그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지도력과 영향력을 갖기 원한다면 희생하고 헌신하고 책임감을 가지고 섬겨야 합니다. 유다는 넷째 아들이지만 구속역사에서 메시아언약의 계승자의 축복을 받았습니다. 어떤 면에서 가장 가치 있는 축복을 받은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유다는 나귀가 포도나무에 매여있고, 포도주에 옷을 빨고 우유가 잇사이에 흘러넘칠 정도의 물질적인 번영의 복도 받게 되었습니다. 다음으로 스불론, 잇사갈, 아셀, 납달리 지파는 어떤 축복을 받습니까? 스불론 지파는 갈릴리해변과 지중해해변 사이에 거주하며 해상무역을 할 것입니다. 잇사갈 지파는 건장한 나귀처럼 이스라엘 열두지파를 섬기는 삶을 삽니다. 잇사갈지파는 이스라엘 역사에서 두각을 나타낸 이들이 없고 농민과 노동자로서 섬기는 삶을 살았습니다. 아셀지파는 왕의 수라상을 전담할 만큼 기름진 땅에서 삽니다. 납달리는 경쾌한 암사슴 같고 아름다운 소리를 발합니다. 납달리 지파에서는 남달리 노래잘하는 이들이 많이 배출되었습니다(삿 5:1) 16-17, 19, 27절을 보면 단, 갓, 베냐민 지파의 축복이 나옵니다. 단지파의 축복을 보면 이렇습니다. “단은 이스라엘의 한 지파같이 그의 백성을 심판하리로다 단은 길섶의 뱀이요 샛길의 독사로다 말굽을 물어서 그 탄자를 뒤로 떨어지게 하리로다” 단 지파는 한 지파로서 야무지게제 구실을 합니다. 그들은 지파의 이름대로 백성들을 똑뿌러지게 재판합니다. 이것은 역사상 삼손이 재판관으로서 역할을 잘해내는 것으로 성취되었습니다. 그런데 단 지파는 길섶의 뱀이요 샛길의 독사처럼 행동합니다. 말이나 사람이 갑작스런 독사의 공격을 받을 때 얼마나 놀라고 당황하겠습니까? 독사가 나를 노려볼 때 얼마나 섬뜩하고 무섭습니까? 야곱이 18절에서 “여호와여 나는 주의 구원을 기다리나이다” 라고 말하는 것은 단 지파에 대한 탄식에서 나왔다고 볼 수 있습니다. 계시록 7:5-8절에 나오는 구원받는 14만 4천중에 단지파와 에브라임지파가 빠져있습니다. 사사기 18장을 보면 단 지파가 미가라는 사람의 집에 가서 그 집의 우상과 에봇과 드라빔을 빼앗고 그 집의 제사장을 자기 지파의 제사장으로 꼬드겨 갑니다. 단지파는 한가롭게 사는 라이스 백성들을 쳐서 불사르고 그곳에 거주하면서 그 곳 이름을 단으로 바꿉니다. 그 후 북이스라엘에서는 단과 에브라임지파의 본거지인 벧엘은 금송아지 우상을 섬기는 우상숭배의 두 본산으로 바뀝니다. 이런 이유로 계시록에서 단과 에브라임지파의 이름이 빠집니다. 단 지파는 민첩하고 똑똑하였으나 그 똑똑함이 독이 되었습니다. 지혜있다 하나 어리석게 되어 우상숭배를 하여 하나님을 대적하고 하나님의 백성에서 제외되었습니다. 안타까운 일입니다. 이것은 마치 초대교회에서 인정받던 일곱집사중 한 사람이던 니골라가 초대교회를 파괴하는 니골라당의 당수가 된 것과 유사합니다. 갓은 요단강 동편에 거하면서 국경에서 동방족속의 침입을 많이 받았습니다. 그러나 의연하게 대처하여 이스라엘 공동체를 지키는 방패가 되었습니다. 베냐민은 물어뜯는 이리로 표현될 만큼 호전적이었습니다. 베냐민 지파는 사사기 19-21장에 나온 이야기를 보면 얼마나 그들이 호전적이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베냐민에 속한 기브아의 불량배들 때문에 생긴 전투에서 이스라엘 40만과 2만 6천명의 베냐민이 싸웁니다. 악한 죄를 저지른 불량배들을 내놓도록 하였으나 제식구 감싸기를 한 것입니다. 이스라엘 전체공동체의 방향을 받지 않고 끝까지 고집과 회개치 않는 길을 걸었습니다. 그래서 1,2,3차의 싸움에서 이스라엘을 2만 2천명, 18,000명, 30명을 죽였습니다. 그러다 결국은 기고만장하다가 기만전술에 빠져서 2만 오천 1백 명이 죽임을 당하여 900명만 남게 됩니다. 베냐민은 막내지파인데, 절대로 지지 않고 끝까지 싸우다가 그 족속이 멸절하게 될 지경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요셉지파가 받은 축복입니다. 22-26절입니다. 그들이 받은 축복은 한마디로 ‘무성한 가지’의 축복이었습니다. 22절을 읽겠습니다. “요셉은 무성한 가지 곧 샘 곁의 무성한 가지라 그 가지가 담을 넘었도다” 요셉이 무성한 가지가 된 정도는 담을 넘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담을 넘었다는 것은 도둑이 된다는 뜻이 아니고요 요셉이 자신이 살아남았을 뿐 아니라 형제들을 살렸다는 것입니다. 요셉은 가나안 땅에 있는 야곱족속에게까지 도움의 손을 뻗쳤습니다. 뿐만 아니라 당시 세계 각국의 굶주린 자들을 도와 살려내었습니다. 요셉은 사실은 제 코도 석자였던 사람이었습니다. 23절을 보십시오 “활쏘는 자가 그를 학대하며 적개심을 가지고 그를 쏘았으나” 활 쏘는 자는 직접적으로는 요셉의 형들과 보디발 여사와 같은 사람들입니다. 요셉을 향한 이 화살을 우리는 ‘시련의 화살’이라고 부릅니다. 사탄 마귀는 이런 시련 속에서 요셉을 향해서 날카로운 불화살을 날렸습니다. 요셉의 깊은 곳을 공격하여 그에게 내상을 입히고 그의 생의 의지를 꺾고자 했습니다. 다른 사람 같았으면 연이은 배신과 중상모략 속에서 깊이 낙심하여 자살을 시도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요셉은 그런 시련의 화살에 굴하지 않고 오히려 원수들을 향하여 반격의 화살을 날렸습니다. 그는 원수가 심는 낙심과 절망을 이기고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절망과 낙심가운데 있는 다른 사람들을 도왔습니다. 그리고 때가 되자 총리가 되어 이스라엘 공동체를 살리고 전 세계를 살렸습니다. 이게 어떻게 가능했을까요? ‘샘곁의 무성한 가지’ 라는 이 말속에 그 비결이 담겨 있습니다. 샘이 없는 곳에 자라는 가지들은 보통 때는 비와 이슬을 맞으면서 근근이 버립니다. 그런데 비가 오지 않고 가뭄이 찾아오면 더 이상 버티질 못합니다. 그 곁에 시냇가가 흐르면 좀 괜찮습니다. 그러나 가뭄이 심하면 시냇물도 다 말라버립니다. 그러면 그 가지는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죽게 됩니다. 그러나 시냇물이 말라도 샘은 어지간해서 마르지 않습니다. 샘은 지하 깊은 곳에서 물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요셉은 샘곁의 무성한 가지였습니다. 요셉 곁의 샘은 무엇을 말합니까? 여호와 하나님을 뜻합니다. 요셉은 이 샘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 샘과 함께 살았습니다. 억울하고 힘들 때, 어떻게 해야 할지 한계에 부딛힐 때 이 샘에 나아갔습니다. 그래서 그 샘을 마시면 그의 얼굴을 밝아지고 그 내면에서 힘이 솟아났습니다. 결국 이 샘은 요셉으로 하여금 모든 시련을 이기고 무성한 가지같은 이가 되게 하였습니다. 사람은 두 종류로 나눕니다. 샘을 가지고 있는 사람과 샘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가 샘이 없는 사람이라는 것은 시련의 때에 드러납니다. 그는 시련을 견디지 못합니다. 얼굴이 가뭄의 논바닥처럼 딱딱해지고 내면은 말라 갑니다. 삶의 모든 밑천을 드러냅니다. 결국 비틀비틀하다가 죽은 자처럼 됩니다. 그러나 샘이 있는 사람은 어떤 시련에도 시들지 않습니다! 변치 않고 충성합니다! 요셉은 형제중의 뛰어난 자였습니다. 특히 그는 시련을 극복하는 데 뛰어났습니다. 시련을 극복하고 이스라엘과 세계를 살린 요셉을 아버지 야곱은 마음껏 축복했습니다. 시련을 이긴 사람들이 축복을 받습니다. 야곱은 조상들에게 받은 자신의 축복을 요셉에게 물려주었습니다. 그가 야곱의 축복을 물려받는 법적인 장자라는 것은 그가 두 몫의 기업을 받은 것으로 증명됩니다. 또 하나님은 물질적인 복과 생명번성의 축복도 그에게 주셨습니다. 지금은 시련의 때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역사에도 대기근이 옵니다. 이럴 때 우리가 어떤 투쟁을 해야 합니까? 넓이의 사람과 깊이의 사람이 있습니다. 넓이의 사람은 시련의 때에 좌우로 돌아다니며 열심히 뭔가를 하고 사람들을 만납니다. 그러나 인생의 사막에서 좌우로 열심히 돌아다니는 것이 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힘만 빠질 수 있습니다. 사막에서는 넓이가 우리를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깊이가 우리를 살립니다. 깊이 내려가 나를 살릴 샘을 만나야 합니다. 삶의 깊이는 사람이 어려울 때 하나님을 찾는 것입니다. 그럴 때 여호와께서 우리의 샘이 되시고 우리로 하여금 모든 시련을 이기게 하시고 우리로 다시 담을 넘는 축복을 누리게 하십니다. 시련은 우리 삶에 깊이를 더해주기 위해 왔습니다. 우리 모두가 가을학기에 깊이 있게 하나님을 찾음으로 요셉처럼 샘곁의 무성한 가지의 축복을 누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요절 말씀인 28절을 다같이 읽겠습니다. “이들은 이스라엘의 열두지파라 이와같이 그들의 아버지가 그들에게 말하고 그들에게 축복하였으니 곧 그들 각 사람의 분량대로 축복하였더라” 야곱은 각 지파를 그들의 분량대로 축복했습니다. 분량대로 축복했다는 의미가 무엇입니까? 분량대로 축복을 받았으니 축복을 비교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각 사람의 분량대로 축복이 주어졌습니다. 유다 지파는 리더가 되었고 잇사갈 지파는 섬기는 종들이 되었습니다. 유다 지파는 왕, 아셀 지파는 왕의 수라상을 책임졌습니다. 이런 것은 죄의 결과가 아니요 섬기는 것이 열등한 것도 아닙니다.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 한 달란트처럼 각 사람의 분량대로 주어진 것입니다. 그러니 비교하여 섬김에 소극적이 되거나 우쭐거리고 거만하게 행동해서는 안됩니다. 그런데 한편, 분량대로 축복을 받았다는 말은 분량을 키워야 한다는 의미도 담겨져 있습니다. 내가 만약 육신적이어서 하나님의 축복을 받지 못했다면 육신적인 내면을 회개하면 됩니다. 더러운 내면이라면 깨끗한 그릇으로 만든 다음에 왜 축복해 주시지 않느냐고 하소연이라고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또 내 내면이 이기적이고 스케일이 작다면 그릇을 좀 키워야 합니다. 간장종지 같은 내면에 세수대야같은 축복을 부어줄 순 없쟎습니까? 이스라엘 공동체에 열두 명의 아들이 있는 것은 서로 동역하고 서로 배우도록 함입니다. 우리가운데도 보고 배울만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을 보고 문제의식을 가지고 배우면 내가 성장합니다. 나도 축복의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문제의식을 가지고 잘 배워 더 큰 하나님의 축복을 받길 기도합니다. 야곱은 아들들을 축복한 다음 한 가지를 부탁했습니다. 그것은 자기의 시신을 가나안 땅 막벨라 굴에 묻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요셉도 54년이 지난 후에 110세의 나이로 죽습니다. 그때 요셉도 야곱과 똑같이 유언했습니다. 그들은 모두 화려하고 부강한 애굽의 피라미드에 묻힐 수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애굽의 부귀영화를 한간의 초가, 심하면 배설물처럼 여겼습니다. 그들은 오직 영원하신 하나님의 언약을 귀히 여기고 그 언약에 자신의 존재를 의탁하였습니다. 이런 영적 가치관이 되어 있는 사람들은 세상축복을 많이 받아도 됩니다. 야곱 사후에 형들은 요셉의 보복을 두려워하였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다 하나님이 하신 일임을 말하여 그들을 안심시켰습니다. 창세기의 대단원의 막을 내립니다. 창세기 25-50장까지의 주인공을 야곱으로 본다고 하였습니다. 어떤 사람은 요셉을 창세기의 열매로 보기도 합니다. 사실은 유다가 주인공이다라고 보기도 합니다. 창세기의 주인공은 누구입니까?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창조주요 축복의 근원이십니다. 하나님은 축복의 샘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크고 풍성하신 분입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깊고 거룩한 사랑으로 한 사람을 인도하십니다. 이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이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사람은 무성한 가지, 담을 넘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번 가을학기에 축복의 샘이신 하나님께 나아가는 깊이와 영적 분량을 키워 축복의 사람들이 다 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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