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겨울 요한계시록 9강 믿음을 지키는 자
말씀 요한계시록 13:1-14:20
요절 요한계시록 14:12 “성도들의 인내가 여기 있나니 그들은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에 대한 믿음을 지키는 자니라”
오늘 본문은 두 짐승의 출현과 그들의 역할에 대해서, 짐승의 표를 받은 사람들의 모습과 끝내 짐승과 그 우상에게 경배하지 않는 이들의 영광스런 모습이 대조적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믿음의 싸움을 싸우고 있는 성도들을 향한 권면과 짐승의 표를 받은 사람들에게 대한 경고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계시록을 교회의 책이라고도 하지만 경배의 책이라고도 합니다. 우리가 이시간 생명보다 더 중요한 경배문제를 돌아보고 우리의 경배를 레벨업 시킬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1절을 보십시오. 내가 보니 바다에서 한 짐승이 나오는 데 뿔이 열이요 머리가 일곱이라 그 뿔에는 열 왕관이 있고 그 머리들에는 신성 모독하는 이름들이 있더라 여기서 짐승은 2절을 보면 표범과 비슷하게 생겼는데 발은 곰의 발같고 입은 사자 입 같았습니다. 이는 이 짐승이 흉폭하며 힘이 세고 다른 짐승들을 거침없이 삼키는 존재임을 뜻합니다. 이 짐승은 머리가 일곱 개나 있고 머리에는 열 뿔이 있습니다. 머리가 7개라는 것은 이 짐승이 간교하며 미혹하게 하는 존재임을 뜻합니다. 그 일곱 개의 머리에는 신성모독 하는 이름들이 있었습니다. 열 개의 뿔은 17:12절을 볼 때 열 왕입니다. 짐승은 다니엘서 7장에 배경을 두고 있는데 강하고 큰 제국을 뜻합니다. 다니엘서에서는 네 짐승이 나오는 데 바벨론, 페르시아, 그리스, 로마제국입니다. 본문에 나타난 짐승은 로마제국입니다. 로마제국과 그 황제는 주위 나라를 삼키고 덩치를 불린 후, 교만하여 하나님을 모독하고 대적했습니다. 로마의 황제들은 자신들을 신으로 격상시켜 하나님의 이름을 모독했습니다. 특히 네로는 자신을 세상의 구세주, 도미티안은, 주화에 도미티안, 주 하나님이라고 새기게까지 했습니다. 2b절을 볼 때 용이 그 짐승에게 자기의 능력과 보좌와 큰 권세를 주었습니다. 용은 영적인 존재로서 자신이 인간을 상대할 수 없기에 눈에 보이는 세상권력을 자신의 대리인으로 사용합니다. 마치 보이지 않으신 하나님이 자신의 아들을 대리인으로 세우신 것과 같습니다. 이런 점에서 사탄은 매사에 하나님을 모방하고 있습니다. 3절을 보면 용의 아들격인 짐승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모방합니다. 악의 세력은 역사의 어느 시기에 죽은 듯 활동하지 않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교회가 부활하듯 악의 세력도 부활하여 끈질기게 활동합니다. 4절을 보면 용이 짐승에게 권세를 주므로 짐승이 그 권세가 막강해졌습니다. 사탄은 하나님이 허용하신 한도 내에서 권세를 가지고 있는 데 그 권세를 짐승에게 준 것입니다. 그러자 사람들은 용을 경배하며 짐승을 경배했습니다. 사람들은 “누가 이 짐승과 같으냐” 감탄하며 짐승을 찬양하고 경배했습니다. 하나님과 예수님이 찬양을 받듯이 용과 그의 아들 짐승도 높임을 받고 찬양을 받기 원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철저히 사탄이 하나님처럼 되고자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5절b를 보면 짐승은 42달 동안 일할 권세를 부여받습니다. 여기서 42달은 11장에서 두 증인이 활동하는 기간과 같습니다. 짐승은 두 증인처럼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까지 계속 활동합니다. 짐승은 용이 준 권세를 덧입어 자신만만 합니다. 무적의 존재처럼 행동하며 자신을 높혀 신처럼 행세합니다. 하나님과 맞장을 뜨고 하나님께 속한 자들을 비방합니다. 각종 가짜뉴스로 성도들을 매도했습니다. 당시에는 성만찬과 남녀가 모이는 것을 왜곡하여 비방했습니다. 오늘날은 십일조를 왜곡하여 교회를 물질을 탐하는 곳으로 매도하고 일부 목회자나 성도들의 문제를 일반화하여 욕하고 비난합니다. 7절을 보십시오. 또 권세를 받아 성도들과 싸워 이기게 되고 각 족속과 백성과 방언과 나라를 다스리는 권세를 받으니 하나님은 온 세상 만민을 다스리기 원하십니다. 그런데 마귀도 하나님처럼 되고자 자신의 대리인인 제국을 통해 세계지배권을 확장시켜나가고자 합니다. 그들은 마귀가 주는 힘을 받아 성도들과 싸워 이기게 됩니다. ‘성도들과 싸워 이긴다’는 것이 무엇일까요? 이것은 내적 승리는 아니고 물리적인 승리를 말합니다. 로마제국은 황제숭배를 빌미로 성도들을 핍박하고 심지어 죽였습니다. 이럴 때 생명책에 확실히 기록되지 않은 이들은 모두 짐승에게 굴복하고 짐승에게 경배합니다. 10절을 보십시오. 사로잡힐 자는 사로잡혀 갈 것이요 칼에 죽을 자는 마땅히 칼에 죽을 것이니 성도들의 인내와 믿음이 여기에 있느니라 로마제국이 박해할 때 성도들중에 사로잡히는 자도 있고 칼에 죽는 자들도 있습니다. 이것은 매우 심각한 이야기인데 사도요한은 매우 쿨하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는 성도는 어차피 영원한 생명을 소유한 이들로서 이 땅에서 삶에 크게 연연해 하지 않기때문입니다. 또한 박해를 받고 순교를 당하는 이들은 영원한 상급이 클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인간적으로 이 일은 쉬운 일들은 아닙니다. 믿음이 약한 이들은 믿음이 흔들릴 수도 있습니다. 그러기에 성도들의 인내와 믿음이 필요한 시기라고 부언했습니다. 11,12절을 볼 때 땅에서 올라오는 다른 짐승이 있었습니다. 이 짐승의 특징은 처음 짐승처럼 흉폭스럽지 않습니다. 잔인한 표범의 얼굴이 아니라 어린 양의 얼굴입니다. 하지만 그는 용의 말을 말합니다. 이는 그의 내면에 용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이 짐승은 본질적으로 먼저 짐승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다른 점이라고 하면 부드러운 외모를 가지고 있다는 것일 뿐입니다. 그의 역할이 무엇입니까? 처음 짐승에게 경배하게 하는 일입니다. 즉 그는 용의 아들격인 세상권세 즉 적그리스도를 위해 충성하는 자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 그리스도, 선지자를 흉내내어 만든 마귀, 적그리스도, 거짓선지자 시스템인 것입니다. 적그리스도의 선지자는 적그리스도를 위해 놀라운 이적들을 행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는 부드럽게 일하는 것같지만 짐승의 우상에게 절을 하지 않으면 몇이든 잔인하게 죽이는 것을 볼 때 어떤 면에서 더 무서운 악의 세력입니다. 이상에서 많이 반복되는 키워드가 ‘경배’입니다. 용과 두 짐승이 획책하고 목적하는 바는 사람들이 하나님 대신 자신들을 경배하게 하는 것입니다. 박해라는 물리적인 수단을 동원했고 그럴듯한 말과 이적을 행하여 미혹시켰습니다. 이제 경제적 유익을 빌미로 사람들을 압박합니다. 16,17절을 보십시요. 그가 모든 자 곧 작은 자나 큰 자나 부자나 가난한 자나 자유인이나 종들에게 그 오른 손에나 이마에 표를 받게 하고 누구든지 이 표를 가진 자 외에는 매매를 못하게 하니 이 표는 곧 짐승의 이름이나 그 이름의 수라. 짐승과 그 우상에게 경배하는 것은 구체적으로 당시 황제숭배를 의미합니다. 사도요한이 본 환상에서 둘째짐승은 제국의 모든 사람들이 예외없이 첫째 짐승과 그 우상에게 경배하고 그 증표를 받도록 했습니다. 만약 경배하지 않으면 매매를 하지 못하게 했습니다. 물건을 사고 팔아야 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경제를 수단으로 압박할 때 큰 힘을 발휘합니다. 그러니 모두들 앞다투어 짐승의 표를 받았습니다. 짐승숭배의 증표로 사람들의 이마와 손에 짐승의 이름이나 그 이름의 숫자가 새겨졌습니다. 히브리어는 문자가 22개인데 모두 숫자 값이 부여되어 있습니다. 짐승의 이름은 그 숫자 값이 666이니 로마황제중에 네로가 해당됩니다. 그는 짐승의 대표입니다. 6은 인간의 숫자, 7은 하나님의 숫자입니다. 그러니 666의 숫자적 의미는 사람이 한껏 자신을 과장하여 교만해진 상태를 의미합니다. 이상에서 사탄과 적그리스도와 거짓 선지자는 모두 ‘경배문제’에 목을 매고 있습니다. 도대체 경배가 무엇이길래 이렇게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이 일을 하고 있는 것일까요? 우리 인간은 본래 창조주 를 경배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인간의 창조목적입니다. 이것은 인간의 행복에 가장 중요하기에 하나님은 십계명 1,2계명으로 주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경배할 때 하나님이 영광 받으십니다. 그리고 우리도 행복하고 풍성한 삶을 삽니다. 그래서 사탄은 어떻게든지 우리가 하나님을 경배하지 못하게 합니다. 대신에 자신을 경배하게 합니다. 직접적인 사탄숭배를 하게 하기도 하지만 너무 노골적이면 사람들이 눈치채기 때문에 다른 것을 내세워 그것을 경배하게 합니다. 그것이 본문에서는 세상권력과 그 우상이었습니다. 사람이 누구를 경배하는 가? 무엇을 경배하는 가? 이것은 아주 중요한 문제입니다. 계시록의 화두입니다. 우리 인간의 행복에 가장 중요한 것은 경배입니다. 잘못된 것을 경배하면 우리 삶이 망가집니다. 삶의 질이 떨어집니다. 절대 행복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 종말의 시대에 사탄의 공작명이 무엇이겠습니까? “경배를 허물라”입니다. 우리는 지금 무엇을 경배하고 있습니까? 세상권세와 영광을 경배하고 있습니까? 특히 본문에서 사탄은 경제적 유익을 빌미로 성도를 헛된 경배로 이끌었습니다. 물질은 필요한 것이지만 물질지상주의 가운데 빠지면 안됩니다. 물질의 종이 되면 하나님께 드리는 것을 아깝습니다. 모든 것을 돈으로 판단하면 돈이 안되는 것은 하나님의 역사도 잘 섬기려 하지 않게 됩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그리스도 주님이라고 고백했습니다. 하지만 주님을 자기유익을 위해 이용하는 수준이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이 가시는 길을 막고자 했습니다. 그때 그는 “사탄”이라는 책망을 받았습니다. 우리가 때마다 자기유익에 무릎 꿇는 신앙이 아니라 유불리를 떠나 하나님께 경배하고 그분께 절대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는 어리석은 삶처럼 보이나 사실은 가장 현명한 삶입니다. 마귀가 예수님을 시험할 때 예수님을 데리고 지극히 높은 산으로 가서 천하만국과 모든 영광을 보여주면서 자기에게 엎드려 경배하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세상 모든 권세와 영광을 주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이때 예수님이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사탄아 물러가라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마4:10) 경배는 세상의 모든 것을 주고도 바꿀 수없습니다. 다니엘의 친구들은 극렬히 타는 풀무불에 들어갈지라도 느부갓네살이 세운 우상에게 절할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경배하기 위해 고위직 공무원이라는 타이틀뿐 아니라 하나 밖에 없는 생명까지 걸었습니다. 우리는 삶속에서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과 다른 것을 경배하는 것 사이에서 실질적인 도전을 받고 있습니다. 위협이나 경제적 유익이 걸려 있기에 어떤 태도를 취할지 쉽지 않습니다. 한 목자님은 사병으로 군대입대했는 데 처음부터 주일예배를 생명처럼 여기고 지키고자 했습니다. 그때 주일마다 모든 소대원들이 연병장에 모여 풀을 뽑고 있는 데 혼자 예배에 다녀오기가 너무 눈치가 보였습니다. 그러나 앞뒤가리지 않고 절대적으로 예배를 드리고자 손을 들고 교회에 갔습니다. 그랬을 때 돌아온 다음에 창고에 끌려다 매주 고참들에게 맞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이렇게 절대적으로 주님을 경배하고자 했을 때 결국 고참들에게 참 신앙인으로 인정을 받았고 하나님은 그의 군대생활을 넘치게 축복하사 수많은 휴가를 받게 하셨습니다. 오늘날은 강력한 쾌락의 여신 아데미 우상이 우리가 자신앞에 경배하기를 바랍니다. 온갖 재밌고 쾌락적인 동영상과 드라마나 잡다한 정보통에 코를 박고 엎드려 절하도록 합니다. 그런 것에 빠지게 되면 우리는 말씀을 묵상하거나 엎드려 기도하는 것을 거의 하지 못하게 됩니다. 형식적으로 연명하듯 합니다. 이런 경우는 우리의 눈이 짐승의 표를 받은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유혹을 물리치고 말씀과 기도의 종으로 하나님께 인정을 받아야 하겠습니다. “너는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별하며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으로 인정된 자로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기를 힘쓰라”(딤후 2:15) “너는 돌아가서 내 백성의 주권자 히스기야에게 이르기를 왕의 조상다윗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 내가 네 기도를 들었고 네 눈물을 보았노라 내가 너를 낫게 하리니 네가 삼일만에 여호와의 성전에 올라가겠고”(왕하 20:5) 어느 세계에나 인정받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과연 하나님편에서 말씀과 기도의 종으로 인정한 사람입니까? 아니면 사탄이 자신 편에 속했다고 거의 낙인찍은 사람입니까? 우리가 구원을 받았지만 실제적인 삶은 사탄편에서 인정받는 성도가 아니라 확실하게 예수님편에 속한 경배자들이 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우리가 사탄의 유혹에 넘어가 그쪽 편으로 분류되면 내면과 삶이 황폐화해됩니다. 반면에 경배자로 주님편에 확실하게 소속될 때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을 풍성하게 하십니다. 우리가 확실하게 주님의 것이 되는 것은 그 어떤 유익이 없어도 그리해야 하는 것이지만, 우리의 삶이 풍성케 되는 것이기에 더욱 확실한 경배자의 삶을 살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특별히 개인 경배시간을 확실히 가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사도요한은 수많은 사람들이 짐승에게 경배하고 짐승의 표를 받는 것을 보고 마음이 아팠을 것이니다. 그러나 세상에는 그런 사람들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14:1절을 보십시오. 또 내가 보니 보라 어린 양이 시온 산에 섰고 그와 함께 십사만 사천이 서 있는데 그들의 이마에는 어린 양의 이름과 그 아버지의 이름을 쓴 것이 있더라. 그들의 이마와 오른 손에는 짐승의 이름이나 숫자가 아니라 어린 양과 아버지의 이름이 쓰여져 있었습니다. 어린 양은 우리 죄를 위해 죽임 당하신 예수님입니다. 아버지는 예수님을 우리에게 보내신 하나님입니다. 그들의 이름이 이마와 오른 손에 있다는 것은 그들이 확실히 주님의 소유라는 것입니다. 또한 그들이 확실히 예수님과 하나님을 아는 사람들이란 뜻입니다. 그들의 생각(이마)에도, 행위(손)에도 주님이 계십니다. 지금 그들은 하늘의 시온 산에 예수님과 함께 영광가운데 서 있습니다. 무수한 천군천사들이 거문고 곡조에 따라 노래를 부르고 있습니다. 그들이 부르는 노래는 14만 4천만이 이해하며 따라 부를 수 있는 노래였습니다. 14만 4천은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의 숫자가 아니라 상징어입니다. 14만 4천은 12*12*1000 으로 구약 12지파와 신약 12사도를 통해 생긴 무수한 하나님의 백성을 뜻합니다. 우리는 모두 14만 4천에 들기를 원합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들이 14만 4천입니까? 확인해 보겠습니다. 첫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아는 사람들입니다(1) 둘째, 새 노래를 부를 수 있는 사람입니다(3). 새 노래는 15:3절에 의하면 어린 양의 노래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를 위해 죽임당한 예수님의 대속의 은혜를 알고 그에 감동된 사람입니다. 어떤 성악가가 성가를 녹음했는데 은혜가 하나도 없더랍니다. 그는 진정으로 어린 양을 알지 못하였기에 심령으로 노래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14만 4천은 십자가의 은혜를 개인적으로 깊이 체험하고 그 은혜가 그 사람의 삶의 중심이 된 사람입니다. 셋째, 진실한 성도입니다(4,5). 4,5절을 읽어보겠습니다. “이 사람들은 여자와 더불어 더럽히지 아니하고 순결한 자라 어린 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자며 사람가운데서 속량을 받아 처음 익은 열매로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속한 자들이니 그 입에 거짓말이 없고 흠이 없는 자들이더라” 여기서 여자는 17:1,2절을 볼 때 음녀 곧 세상을 뜻합니다. 그러니 14만 4천은 주님께 대해 정절을 지키며 순결한 신부처럼 사는 사람들입니다. 다음으로, 그들은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삽니다. 예수님은 당신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자기를 따라오려면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베드로에게 “너는 나를 따르라” 말씀을 주셨습니다. 14만 4천은 주님이 부르시면 어디든 가는 사람입니다. 아골골짝, 빈들에도 가는 사람, 독도에도 가는 사람입니다. 또한 14만 4천은 성령으로 거듭나 첫 소산처럼 자신을 하나님께 온전히 드린 자들입니다. 그들은 입으로만 주여 주여 하지 않습니다. 입으로만 주님, 주님 하면서 실제 삶은 자기 맘대로, 자기 정욕대로 사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날마다 주님의 뜻을 묻고 주님과 동행하며 주님이 명하신 길로 가는 사람들이 14만 4천입니다. 그들은 진실된 신자들입니다. 현대인들은 많은 것을 다양하게 하고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는 데로 살면 삶이 풍성하고 생명력이 있으리라 생각합니다만 그것은 오산입니다. 오히려 삶이 허무하고 피폐해지고 복잡하게 되고 갈 길을 잃게 됩니다. 순결하며 순종하며 자신을 산제사로 드리는 삶을 사는 이들이 생명력이 풍성한 삶을 삽니다. 그리고 이렇게 사는 사람들이 14만 4천입니다. 6-20절은 하나님께 경배하고 짐승과 그 우상에게 절대로 경배하지 말 것은 경고한 내용입니다. 영원한 복음을 가진 천사가 날아가며 세상에 사는 모든 사람들에게 큰소리로 말했습니다. 그가 큰 소리로 말한 것이 무엇입니까? 첫째, 창조주이시며 심판주이신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하나님을 경배하라 했습니다. 원래 하나님이 창조주이시므로 그리고 그분이 세상과 나를 심판하시기에 우리는 그분을 두려워하고 그분에게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특히 심판의 시간이 다가오고 있기 때문에 더욱 그러해야 합니다. 둘째로, 세상권세와 우상에게 경배해서는 안됩니다. 천사는 세상권세의 상징인 바벨론이 이미 무너졌다고 예언적 과거시제를 사용하여 선포했습니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세력은 반드시 망합니다. 그들과 그들편에 선 사람들이 받을 고난은 확실하고 분명합니다. 그들이 받을 고난은 영원합니다. 고난이 영원하다는 것은 예수님이 하신 말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도요한이 우리에게 무엇을 권면합니까? 14:12절을 보십시오 “성도들의 인내가 여기 있나니 그들은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에 대한 믿음을 지키는 자니라” 짐승과 우상을 경배하지 말고 인내하고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님께 대한 믿음을 지키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계명은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을 두지 않고 하나님만 섬기는 것입니다. 예수님께 대한 믿음은 예수님만이 우리의 유일한 구주시라는 믿음입니다. 사도요한은 이 계명의 순종과 믿음을 지키는 것에 있어 인내하도록 권면했습니다. 믿음의 경주는 마라톤과 같습니다. 사점(dead point)이 있습니다. 이 사점은 너무 힘들어 모든 것을 포기하고 주저앉거나 드러눕고 싶은 시기입니다. 예수님도 그 자신의 믿음의 경주에서 사점에 직면하셨습니다. 십자가에서 그만 고통을 겪고 내려오라는 최후의 유혹을 받으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부활의 영광을 바라보며 그 십자가를 참으셨습니다. 우리도 그래야 하겠습니다. 지금까지 잘 인내하셨는데 끝까지 잘 인내바랍니다. 13절에서 하늘에서 들리는 소리는 주안에서 죽는 것이 복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어떤 면에서 믿음을 지키다가 죽으라는 권면입니다. 왜 이렇게 까지 해야 합니까? 경배는 생명보다 귀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잠시 평안하게 살자고 영원한 안식을 포기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믿음을 지킨 성도들은 귀한 알곡처럼 직접 거두어 천국창고에 들이십니다. 반면 짐승을 경배한 이들에게는 긍휼 1도 없는 무서운 진노의 심판을 받게 하십니다. 결론입니다. 사도요한은 짐승의 박해와 유혹으로 기로에 서 있는 초대교회 성도들에게 끝까지 생명 걸고 주님만 경배하도록 도왔습니다. 경배는 작은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의 삶의 질을 결정하고 영원한 상급을 결정합니다. 우리 주위에 우리의 마음을 빼앗는 수많은 우상들이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외에 다른 신을 두지 않고 하나님과 어린 양 예수님을 온전히 경배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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