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
말씀 마태복음 13:1-23
요절 마태복음 13:23 “좋은 땅에 뿌리웠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니 결실하여 어떤 것은 백 배, 어떤 것은 육십 배, 어떤 것은 삼십 배가 되느니라”
어떤 분들에게 본문은 많이 듣다 보니 다 안다는 생각 때문에 되려 길가 밭처럼 듣기 쉬운 말씀입니다. 그러나 모든 하나님의 말씀은 항상 새롭고 무궁무진한 보화를 감추고 있습니다. 저는 1986년 주일예배 때 전요한 박사님이 전하신 이 말씀을 깨닫고 새로운 세계가 열리는 놀라운 체험을 했습니다. 이 말씀을 통해 소원을 가지고 성경공부를 진지하게 감당하게 되었고 오늘날 말씀의 종으로까지 성장했습니다. 이시간 예배에 참여하는 모든 분들도 저와 같은 감동과 감격과 변화를 경험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예수님이 바닷가에 가셨습니다. 해운대 등 전국의 바닷가에 사람들이 몰리고 있는 데 여기에 모인 이들은 해수욕하기 위해 모인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예수님이 행하시는 표적을 보기 위해서 였습니다. 얼마나 사람이 많은 사람이 모였는 지 예수님이 물에 빠질 지경이 되어, 배에 올라, 뱃머리를 강단 삼아 말씀을 전하시기 시작하셨습니다.
바닷가라 갈매기가 울며 날아다녔을 것이고 예수님과 청중들과 거리가 있었고 사람들이 수천은 되었을 것이나 예수님은 아주 유능한 말씀의 종이셨기에 여유있게 말씀을 잘 전하셨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모인 무리들에게 여러 비유로 가르치셨습니다. 비유란 헬라어로 ‘파라볼레이스’ 로서 ‘곁에 던지다’란 뜻입니다. 즉 심오한 진리를 무엇에 견주어 쉽게 설명하는 교수법이 비유입니다. 예수님은 모인 무리들에게 7개의 천국에 관한 비유를 가르치십니다. 이 7개의 비유를 통해 천국을 사람들에게 쉽게 설명해 주십니다.
제일 먼저 예수님이 가르치신 비유는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입니다. 3-9절의 이 비유를 요약하면 뿌린 씨가 네 가지 밭에 떨어지는 데, 밭에 따라 결과가 다릅니다. 싹도 트지 않거나 조금 있다가 바로 죽어 버리거나, 오래 버티지만 열매를 맺지 못하거나, 놀라울 정도의 열매를 풍성히 맺는 결과가 나옵니다. 이 비유는 모든 비유를 가르치기 전에 하셨던 비유입니다. 이 비유의 핵심은 말씀듣는 자세의 중요성입니다. 학생들이 공부하는 자세가 안되어 있으면 오래 공부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어떤 학생은 하루 종일 공부하지만 실제 집중한 것은 1시간도 안됩니다. 이처럼 말씀공부도 어떤 자세로 하느냐가 중요합니다.
비유를 듣고 제자들은 왜 비유로 말씀하시는 지를 물었습니다. 이에 천국의 비밀이 제자들에게는 허락되었지만 어떤 사람들에게는 허락되지 않으셨기 때문이라 대답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비유로 가르치심으로 깨닫는 사람에게는 풍성하게 천국의 비밀을 드러내시고 그렇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아예 천국의 비밀을 감추어 버리고자 하신 것입니다. .
12절을 보십시오. 무릇 있는 자는 받아 넉넉하게 되되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 천국의 비밀이 계시된 사람들은 영적 소원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영적 소원을 가지고 있어 천국의 비밀을 풍성히 깨달아 영적 부자가 됩니다. 반면 영적 소원 없는 이들은 영적 거지요 가난뱅이들이 됩니다. 예수님은 비유라는 방법으로 가르치심으로 영적 소원 있는 사람들은 축복하고 영적 소원없는 자들은 심판하셨습니다.
이사야 시대 사람들은 마음이 완악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듣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화가 나시고 이사야 선지자에게 그 사역을 통해서 백성들의 귀를 닫히게 하고 눈을 감기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말씀을 최대한 못 깨닫게 전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백성들이 말씀을 듣고 깨달아 회개할 까 걱정된다고 하셨는 데 그들이 말씀을 듣고 깨닫고 회개하면 하나님은 그들에 대한 심판을 철회하셔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회개하지 않도록 못 깨닫게 전하라 하셨던 것입니다. 이는 그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분노를 의미합니다.
우리는 여기서 사람이 말씀을 듣고 깨달으면 삶이 회복되지만 말씀을 듣고 깨닫지 못하면 심판을 받게 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가장 큰 축복이 말씀을 깨닫는 것이고 가장 큰 심판이 말씀을 감추어 말씀을 깨닫지 못하게 하는 것임도 알게 됩니다.
제자들은 말씀을 듣고 깨닫는 축복을 받았습니다. 말씀의 비밀인 그리스도를 깨달았습니다. 그리스도는 구약의 많은 선지자와 의인들이 그토록 고대하던 그분입니다. 말씀을 듣고 그리스도를 깨닫는 사람이 가장 큰 복을 누린 사람입니다. 이상에서 영적 소원이 있는 사람들은 말씀을 깨닫고 말씀을 깨닫는 사람이 가장 축복받은 사람임을 배웠습니다. 여러분은 말씀을 들으면 깨달아지십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축복을 받은 사람입니다. 눈이 스스르 감기고 혼수 상태가 됩니까? 여러분이 말씀을 깨닫는 복을 가장 큰 축복을 가진 분들이 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제자들이 씨뿌리는 자의 비유에 대해 묻자 예수님은 설명해 주십니다(눅 8:9).
맨 먼저, 말씀의 씨가 길가에 뿌려진 사람들은 천국 말씀이 고막에는 들리나 마음에는 결코 들리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그럴 때 사탄이 새처럼 날아와 말씀의 씨를 가지고 가버립니다. 왜 우리가 말씀을 진정으로 못하는 것일까요? 선입견, 편견, 상식, 교만, 자기생각, 불신을 심는 인본주의 교육 때문에 속 마음이 닫히고 굳어졌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 마음 밭은 돌밭 같은 마음 밭입니다. 말씀을 듣고 즉시 기쁨으로 받으나 뿌리가 없어 잠간 견디다가 말씀으로 인한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날 때 곧 넘어지는 사람들입니다. 해는 식물을 죽이기 위해 뜨는 게 아니라 식물이 광합성을 하여 빛에너지를 양분으로 바꾸어 성장하도록 하기 위해 뜹니다. 그런데 뿌리가 있으면 수분을 흡수하여 태양열을 견디지만 뿌리가 없으면 수분이 부족함으로 열기를 견디지 못해 그만 식물이 타버려 죽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식물의 성장에 뿌리가 중요하다는 것을 배웁니다. 그러니 우리가 사람들이 말씀을 듣고 은혜받도록 하는 데 그치면 안되고 말씀에 깊이 뿌리내리도록 도와주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하면 말씀이 깊이 뿌리를 내리도록 할 수 있을 까요? 성경에서 말씀에 깊이 뿌리내린 사람들은 베뢰아 사람들입니다. 사도행전 17:11,12를 보면 베뢰아에 있는 사람들은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 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함으로 그중에 믿는 사람이 많았다 했습니다. 베뢰아 사람들은 아무 생각 없이 말씀을 듣지 않았습니다. 목자님에게 잘 보이기 위해 무조건 고개를 끄덕이는 영혼없는 성경공부를 하지 않았습니다. 사도바울이 전하는 말씀이 과연 그러한 지, 구약성경에 맞는 지, 이치에 맞는 지 곰곰이 따져 보며 들었습니다. 이는 거부하기 위해 그런 것이 아니라 정말 제대로 받아들이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들은 말씀을 자기 것으로 만드는 작업 곧 말씀을 소화하는 작업을 했던 것입니다. 소화되지 않는 말씀은 우리의 삶에서 아무런 힘도 발휘하지 못합니다. 깊이 소화된 말씀이 피가 되고 살이 되며 힘을 쓰게 합니다. 마치 소가 네 개의 위로 소화를 철저히 하므로 큰 힘을 쓰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가 말씀에 부정적인 생각이라는 돌덩이들을 내버려 두고, 다루지 않고, 통과의례 식으로 말씀공부를 하면 말씀공부가 별 의미가 없습니다. 많은 질문들을 통해 돌덩이 같은 것들을 부수고 마음으로부터 말씀을 진리로 agree 해야 합니다. 깊이 동의하고 그 진리됨을 감탄하며 진정으로 받아들이는 것, 이것이 말씀이 내 안에 뿌리 내리게 하는 것입니다. 이 작업을 한 사람들은 큰 환란이나 박해가 와도 거뜬히 버팁니다. 그러나 이게 안 되어 있는 사람들은 작은 환란과 박해에도 그냥 넘어져 버립니다. 우리가 말씀에 깊이 뿌리를 내리면 환난이나 박해가 신앙성장에 오히려 도움이 됩니다.
우리가 이제부터 의례적으로 성경 공부하지 않고 베뢰아 사람들처럼 철저하게 성경공부를 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또한 우리가 말씀에 뿌리 내리는 좋은 방법은 소감을 쓰는 것입니다. 소감은 영어로는 reflection이라고 합니다. 말씀을 깊이 묵상하고 논리적으로 agree하여 마음에 받아들이고 내게 적용합니다. 이 때 말씀이 내 안에 깊이 자리하게 됨을 체험합니다. 여러분, 소감을 쓰시며 말씀을 내 것으로 하는 기쁨을 누리고 계시나요? 우리가 말씀에 깊이 뿌리를 내리므로 믿음의 거목들이 다 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다음으로 가시떨기 같은 마음 밭을 가진 사람들 있습니다. 그들은 말씀의 씨와 함께 가시떨기를 키움으로 말씀으로 인한 성장과 열매가 맺히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주님은 가시떨기에 해당하는 것이 세상염려와 재물의 유혹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재물은 세상의 좋은 것들을 즐기기 위한 수단입니다. 그러므로 재물의 유혹은 곧 세상의 유혹입니다. 그 마음 속에 세상 염려와 유혹이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말씀은 천국의 비밀을 담은 천국말씀입니다. 그런데 세상을 염려하고 세상의 유혹을 가득 받고 있으면 천국말씀이 그 사람 속에서 힘을 쓰지 쓰지 못합니다. 그러면 신앙생활을 오래 해도 영적 힘이 없고 천국의 기쁨이 없습니다.
딤후 4:10절에 데마라는 제자가 나옵니다. 그는 제자의 길에 들어섰으나 세상을 더 사랑함으로 결국 제자의 길을 떠났습니다. 사도요한은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요일 2:15)고 했습니다. 왜 우리가 세상을 살지만 세상을 사랑하지 말아야 합니까?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하느니라.”(요일 2:17) 세상은 아무리 좋아 보여도 바람처럼 지나가는 것이고 지나고 나면 남는 것이 없는 허망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내 안에 세상누룩이 가득합니까? 영적인 힘이 없습니까? 이런 우리가 다시 천국을 맛보려면 세상가치관, 세상염려, 세상유혹을 철저히 회개해야 합니다. 그러면 천국말씀이 다시 힘 있게 우리 안에 역사하는 것을 체험하게 됩니다.
마지막으로 많은 열매를 맺는 좋은 마음 밭에 대해 생각해 봅시다. 23절을 보십시오. 좋은 땅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니 결실하여 어떤 것은 백 배, 어떤 것은 육십 배, 어떤 것은 삼십 배가 되느니라 하시니라. 이 말씀을 볼 때 가장 먼저 들어오는 단어는 “100배”입니다. 말씀으로 인해 어떤 사람의 삶이 100배 달라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와! 천국말씀이니까 내 안에서 천국이 100배 확장되는 것입니다.
말씀이 우리 안에서 자라서 열매를 맺게 되면 우리가 지금보다 100배 행복해질 수 있습니다. 삶의 지평이 크게 넓어지고 삶의 수준이 크게 달라집니다. 100배라는 것은 얼마나 크게 우리 삶이 변화되는 지를 상징적으로 강조하는 표현입니다.
우리 UBF역사를 보십시오. 천국이 백배, 천배, 만배 확장된 역사입니다. 이 모든 것이 창립자이신 이 사무엘 선교사님이 한 말씀을 깊이 깨달은 데서 왔습니다. 사무엘 선교사님은 엄마 얼굴도 보지 못하고 계모 밑에서 자랐습니다. 그는 어머니에 대한 깊은 그리움이 있었습니다. 어머니의 사랑에 대한 목마름이 있고 마음 깊은 곳에 슬픔과 운명주의가 있었습니다. 이런 그는 울밑에 선 봉선화와 같은 삶을 살든 지, 세상을 증오하고 치고받는 거친 삶을 살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성경공부 중 한 말씀을 깨달았습니다. 그 말씀은 에베소서 2:10절이었습니다.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그는 하나님이 예수님 안에서 그를 지으셨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자신은 하나님의 작품이요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안에서 그를 지으셨고 그를 통해 선한 일을 계획하고 계심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런 그의 깨달음은 그의 삶을 완전히 달라지게 하였습니다. 그는 운명주의가 사라지고 생명의 빛이 임하는 것을 체험했습니다.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졌습니다. 이 깨달음이 있기 전에 새를 보면 새가 우는 것으로 보였지만 그 깨달음 뒤엔 새가 노래하고 있는 것으로 보였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다스리며 정복하는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자기 같은 운명주의와 슬픔가운데 있던 많은 젊은이들을 일으켜 세우는 영적 아버지로 귀하게 쓰임을 받으셨습니다.
항상 웃는 얼굴로 세계를 종횡무진 다니셨던 안 요셉 선교사님은 어떻습니까?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어떻게 세상을 살아가나 많은 걱정을 했습니다. 서울에 왔을 때 잘나고 똑똑해 보이는 서울대생들을 보며 마음이 위축되고 초라해졌습니다. 그런데 이분이 UBF 성경공부에 초대를 받으셨습니다. 그리고 창세기 말씀을 공부하는 데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이 말씀이 깨달아졌습니다. 이 말씀을 통해 그는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을 자기 아버지로 만났습니다. “창조주 하나님이 나의 아버지라니” 그때부터 세상이 달라 보였습니다. 그는 깊은 감격가운데 항상 기쁘고 자신감이 넘치는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그의 입에서는 찬송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참 아름다워라 주님의 세계는 저 솔로몬의 옷보다 더 고운 백합화 주 찬송하는 듯 저 맑은 새소리 내 아버지의 지으신 그 솜씨 깊도다.” 그는 이 찬송을 열심히 부르고 다셨습니다. 그때 그는 담대해져서 수업 시간 전에 강의실에 들어가 후배들을 예수님께 초청하는 연설을 하기도 했습니다. 또한 하나님 아버지를 의지하여 믿음으로 외무고시에 도전하여 합격하고 외교관으로 세계를 돌며 주님의 제자들을 세우는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이 모든 것이 그가 말씀을 듣고 깨달은 데서 비롯되었습니다.
나의 삶이 초라하고 빈곤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말씀을 듣고 깨닫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삶의 빈곤은 말씀의 빈곤입니다. 풍성한 삶은 세상에서 많은 지식을 얻고, 많은 명예를 얻고, 물질을 얻는다고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말씀을 듣고 깨달을 때 오며 말씀을 듣고 깨닫는 것이 삶의 진정한 변화를 가져옵니다!
그런데 우리는 생각합니다. “나는 말씀을 듣고 있어, 말씀을 많이 알고 있어”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말씀이 일상화되어 매너리즘에 빠져 내게 감격으로 다가오는 말씀이 없을 수 있습니다.
우리 삶의 변화가 오지 않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깊은 깨달음 없이 의지적으로 삶의 변화를 추구하기 때문입니다. 깨달음 없는 노력은 힘겹기만 하고 별 효과가 없습니다. 안중근 의사는 지난행일(知難行逸)이란 말을 했습니다. 깨닫기는 어렵지만 행하기는 쉽다는 말입니다. 정말 깊이 깨달으면 삶의 변화는 의외로 쉽습니다.
성 어거스틴은 신앙 있는 어머니의 2세로 자라 그 신앙이 타율적이었습니다. 이런 그는 여전히 죄악된 습관에서 벗어날 수 없고 어머니의 속을 태울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말씀이 깨달아졌습니다. 말씀의 빛이 그에게 임했습니다.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둠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 이 말씀이 깨달아지자 그의 삶은 어렵지 않게 탕자에서 성자로 변화되었습니다.
깨달음이 없는 삶의 변화는 자동차를 사람이 끌고 가는 것처럼 힘들지만 말씀이 깨달아지면 달리는 자동차나 비행기처럼 힘차게 삶의 진보가 이루어집니다. 삶의 지평과 수준이 달라집니다. 말씀의 씨앗은 천국말씀이고 천국의 비밀을 담고 있으니 말씀을 깊이 깨닫고 그 말씀에 붙들리면 우리 안에 천국이 임하고 확장됩니다.
저도 대학 1학년 여름수양회에서 요 21:15절 통해 주님과 저의 사랑의 관계가 깊이 깨달아 졌습니다. 그때 저는 주님의 사랑에 감동되어 주님께 사랑 고백할 때 세상이 달라지는 것을 체험했습니다. 시냇가에 가서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을 씻을 때 파란 하늘처럼 새로운 세계가 열리는 것을 체험했습니다. 같은 세상, 다른 느낌이었습니다. 더러운 돼지막이 있고 파리가 많은 수양관이었지만 천국처럼 느껴졌습니다. 수양관 이름이 천마산 이었는데 천마가 되어 날아가는 듯 했습니다. 말씀을 깨닫기 전과 후의 세상은 족히 100배는 차이가 났습니다. 주님과의 관계를 중시할 때 사람들을 의식하지 않는 자유함을 맛보게 되었습니다.
그 후 신앙생활을 했으나 자기를 사랑함으로 고통과 부자유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다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말씀을 깨닫게 되었고 정말 제대로 된 삶의 방향이 잡히자 마음에 천국이 100배는 더 확장됨을 느꼈습니다. 남을 위해 살고자 할 때 언제나 행복하고 자유로울 수 있는 비결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깨달을 때마다 천국이 내 안에서 100배 씩 확장되는 것을 경험하였습니다. 아직도 부족하지만 제가 때마다 말씀을 깨달아 천국이 내 안에서 100배씩 확장될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여러분은 어떤 말씀을 깨달았을 때 천국의 기쁨을 맛보았습니까? 천국이 확장되는 기쁨을 누리셨습니까?
결론입니다. 말씀을 깊이 깨닫고 내 것으로 할 때 엄청난 삶의 변화가 옵니다. 우리가 말씀을 깊이 깨달음으로 우리의 삶에 천국이 30배, 60배, 100배 확장되는 기쁨을 때마다 충만히 누리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