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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2024년 마가복음 9강 둘씩 둘씩 보내시며(마가복음 6:1-29)2024-05-13 00: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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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마가복음 9

 

둘씩 둘씩 보내시며

 

말씀 / 마가복음 6:1-29

요절 / 마가복음 6:7

열두 제자를 부르사 둘씩 둘씩 보내시며 더러운 귀신을 제어하는 권능을 주시고

 

마태, 마가, 누가, 이 세 공관 복음서는 각각 그 전반부에서 예수님이 메시아 사역을 갈릴리에서 하신 일을 다룹니다. 그리고 후반부에는 예수님의 예루살렘에서의 마지막 일주일을 중점적으로 다룹니다. 한편 요한복음은 예수님이 예루살렘에서 종교지도자들과 부딪치신 것을 주로 다룸으로 예수님의 메시아 되심을 증거합니다. 우리가 마가복음을 공부한지 얼마 안 된 것 같지만 시기적으로는 벌써 갈릴리 사역 후기에 접어들었습니다. 1년차(초기) 3:12까지, 2년차(중기) 6:6a까지, 그리고 3년차(후기)가 오늘 본문에 나오는 6:7b부터 8:21까지입니다. 예수님은 그의 공생애의 마지막으로 갈수록 더욱 하나님의 나라를 열심히 전파하시며 제자들을 양성하십니다. 특히 오늘 말씀에서 열두 제자를 둘씩 둘씩 보내시며 전도하게 하십니다. 본문을 통해 우리가 예수님이 하신 일을 배우고 본받기를 기도합니다.

 

1절입니다. "예수께서 거기를 떠나사 고향으로 가시니 제자들도 따르니라." 예수님은 갈릴리 중기 사역을 마치실 즈음에 고향을 방문하십니다. 여기서 고향은 갈릴리 나사렛을 의미합니다. 나사렛은 가버나움에서 남서쪽으로 30Km정도 떨어진 조용한 마을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많은 무리를 피하여 제자들과 조용한 시간을 갖기 원하셨던 것 같습니다. 2절을 보면 예수님은 안식일이 되어 회당에 가십니다. 고향 사람들이 알고 있던 예수님은 과거에 회당 예배에 참석하여 조용히 듣던 사람이었습니다. 서서 말을 한 적이 거의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오랜 만에 고향에 온 청년 예수가 예배 중에 일어나 사람들에게 말씀을 전합니다. 그 말씀은 서기관들과 같지 않고 힘이 있고 권세가 있었습니다. 고향 사람들은 예수님의 신령하고 권세 있는 가르침에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말씀의 은혜를 누리며 계속하여 잘 듣고자 해야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반응이 어떠했습니까? 2b입니다. "많은 사람이 듣고 놀라 이르되 이 사람이 어디서 이런 것을 얻었느냐 이 사람이 받은 지혜와 그 손으로 이루어지는 이런 권능이 어찌 됨이냐." 회당에 있던 사람들은 깜짝 놀랐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참으로 놀라울 정도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예수님을 "이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이는 “This fellow”"이 자가", "이 친구가"라는 뜻입니다. "이 사람이"라는 말은 2절 중간 부분과 3절에도 반복됩니다. 그들은 소년 시절부터 알았던 예수님에 대한 선입견을 버리지 못했습니다. 거기에 매여 있었습니다. “아니, 이 사람이 어렸을 때 우리 아들과 친한 사이였잖아, 우리 집에 와서 놀기도 하고 밥도 같이 먹었지. 이 사람이 짜준 장롱이 지금도 우리 집에 있지 않은가?”하였습니다.

 

3절입니다. "이 사람이 마리아의 아들 목수가 아니냐 야고보와 요셉과 유다와 시몬의 형제가 아니냐 그 누이들이 우리와 함께 여기 있지 아니하냐 하고 예수를 배척한지라" 이 말씀을 볼 때 예수님의 직업은 목수였고, 적어도 6명의 동생을 둔 집안의 장남이었습니다. 목수였던 아버지 요셉이 일찍 세상을 떠나자 예수님이 장남으로 그 가업을 이어 받아 가정을 섬겼던 것입니다. 오늘날 같으면 7명이 넘는 다둥이 집안으로 정부의 보조도 많았겠지만 그 시대에는 어린 자녀들이 많을수록 부양하는 짐도 컸습니다. 여하튼 고향 사람들은 예수님의 과거를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친밀함이 경멸을 낳는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에 대한 편견과 선입견으로 그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의 하시는 말씀과 일을 통해 그를 그리스도도 믿어야 했는데 그렇지 못했습니다. 도리어 예수님을 배척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배척하는 그들을 볼 때 마음이 아프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당시 잘 알려진 격언으로 이 일을 해석하십니다. "선지자가 자기 고향과 자기 친척과 자기 집 외에서는 존경을 받지 못함이 없느니라." 예수님은 개인적으로 상처받지 않으십니다. 또한 제자들에게도 이러한 일이 그들에게도 있게 될 것을 알려주십니다. 고향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지 않았습니다. 이런 그들을 위해 예수님은 아무 권능도 행하지 않으셨습니다. 다만 소수의 병자를 고쳐주셨습니다.

 

이상의 사실을 볼 때 우리가 예수님을 제대로 알려면 이미 갖고 있는 모든 인간적인 선입견과 편견을 버려야 함을 봅니다. 예전에 “TIME”지에 이런 기사가 실렸습니다. 복음서에서 예수님이 정말 말했을 것이라는 말씀, 또는 정말 행했을 일이라고 일들과 나중에 다른 사람들이 추가했을 것이라고 여겨지는 말과 일을 구분한 것입니다. 이와 같이 사람들은 예수님은 선한 사람이지만 후대 사람들이 그를 우상화하여 없던 말이나 일도 추가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학교에서 예수님은 사대 성인 중의 한 분이라고 배웁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기독교인들이 믿는 성인, 오늘날의 과학 문명시대에는 맞지 않는 종교의 창시자 정도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성경을 읽어도 예수님이 행하신 기적은 그냥 허구하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선입견을 버려야 합니다. 성경에 기록된 예수님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영접해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예수님을 제대로 알 수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성경 기록이 잘못된 것 아닌가? 오류가 있지 않은가?“ 합니다. 그러나 수많은 성경학자들이 모든 사본을 검토하였고 이제 성경 본문비평은 끝났습니다. 현재 우리가 갖고 있는 성경의 정확성에 대해 따지는 사람은 더 이상 없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을 이와 같이 전수받아 읽고 공부하는 것은 얼마나 큰 특권인지 모릅니다. 우리가 편견 없이 말씀을 잘 배우고 성경에 나타난 예수님을 깊이 알아가기를 기도합니다.

 

고향을 떠난 예수님은 무엇을 하십니까? 6b입니다. "이에 모든 촌에 두루 다니시며 가르치시더라" 이 시점이 예수님의 갈릴리 사역 후반기가 시작되는 때입니다. 예수님은 이제 약 1년 후면 예루살렘에 올라가셔서 십자가에 달리셔야 합니다. 그런 가운데서도 집중하신 것은 여전히 하나님의 나라의 복음을 전파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처음에 배웠듯이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선포하시고 지금까지 그 하나님의 나라의 실현을 위해 말씀을 전파하시고 귀신을 쫓아내셨습니다. 사탄의 통치를 받고 있던 사람들의 내면이 하나님의 통치를 받도록 도우셨습니다.

 

예수님의 갈릴리 후기 사역의 특징 중의 하나는 열두 제자들을 복음 전도자로 훈련하시는 것입니다. 7절입니다. "열두 제자를 부르사 둘씩 둘씩 보내시며 더러운 귀신을 제어하는 권능을 주시고" 복음을 전해야 할 곳이 너무 많았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들어야 할 영혼들이 너무 많았습니다. 이를 예수님 혼자서 다 감당할 수 없으셨습니다. 이에 열두 제자를 부르셔서 전도를 보내십니다.

 

예수님이 둘씩 둘씩 짝지어 보내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는 둘이 하나보다 낫기 때문입니다. 전도서 4:9,10절은 말합니다. "두 사람이 한 사람보다 나음은 그들이 수고함으로 좋은 상을 얻을 것임이라 혹시 그들이 넘어지면 하나가 그 동무를 붙들어 일으키려니와 홀로 있어 넘어지고 붙들어 일으킬 자가 없는 자에게는 화가 있으리라" 실제로 우리도 이 사실을 경험합니다. 캠퍼스에 혼자 피싱을 가면 양들에게 말을 걸기가 쉽지 않습니다. 벤치에 앉아 학생들 구경하다 식당에 가서 밥 먹고 내려오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둘이 갈 때 서로 힘이 됩니다. 합심하여 기도하며 서로 믿음을 북돋아줍니다. 또한 예수님 당시 어떤 사실을 증거할 때 두 사람 이상이어야 그 사실이 인정되었습니다. , 둘 이상이 전해야 복음이 신빙성이 있는 내용을 받아들여졌던 것입니다. 우리 가운데 한 목자님이 사모님과 캠퍼스에 저녁에 올라가서 산책도 하고 부담 없게 학생들에게 말을 걸어 관계성을 맺으십니다. 둘씩 전도를 하는 아주 좋은 본이라고 보입니다. 우리 목자님들이 대부분 캠퍼스 근처에 사시므로 저녁 시간이나 휴일에 같이 올라가서 산책도 하시고 선배로서 양들의 진로문제도 상담해주시며 말씀공부에 초대할 수 있으면 좋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갈릴리 지방 동서남북 여러 곳으로 보내십니다. 예수님은 아직 연약한 제자들이 이 일을 감당하기 쉽지 않음을 잘 아셨습니다. 이는 전도는 사탄과 싸우는 영적 전쟁이기 때문입니다. 이에 예수님은 그들에게 "더러운 귀신을 제어하는 권능을"주십니다. 사람들의 내면에 역사하는 귀신의 세력과 능히 싸울 수 있는 권능을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악령의 세력에 눌려있는 인생들을 구원하도록 하셨습니다.

 

영적 권능은 주시지만 반면에 무엇을 주지 않으십니까? 8,9절입니다. "명하시되 여행을 위하여 지팡이 외에는 양식이나 배낭이나 전대의 돈이나 아무 것도 가지지 말며 신만 신고 두 벌 옷도 입지 말라 하시고" 당시 마을로 나가 전도를 하려면 많이 걸어야 되었습니다. 120년 전 남장로교 선교사들이 전주에 와서 복음을 전할 때 그들의 가장 큰 힘든 것 중의 하나가 너무 많이 걸어야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이 남긴 기록을 보면 돌이 많은 산길을 하루에도 수 십리를 걸어 다니며 전도할 때 발바닥이 부르트고 너무 아파 고생한 이야기들이 나옵니다. 나중에 온 어떤 후속 선교사는 발병이 나서 미국으로 돌아간 일도 있습니다. 이런 전도 여행을 하기 위해 지팡이는 필수적입니다. 특히 산길을 오르거나 내려올 때 필요합니다. 뱀 같은 짐승이 나타날 때 호신용으로도 필요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이렇게 꼭 필요한 지팡이 하나 외에는 아무 것도 지참하지 않도록 하셨습니다.

 

무엇보다 양식을 가져가지 말라고 하십니다. 며칠을 걸어 다닐 생각을 하면 배낭에 빵이나 초콜릿을 꼭 가져가야 될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런 양식은 물론이고 필수품을 넣을 수 있는 배낭 자체도 가져가지 말라고 하십니다. 돈도, 여분의 신발이나 옷도 가져가지 말라하십니다. 오늘날 한 스탭 목자님이 청년팀에게 이런 방향을 주고 며칠 간 전도하러 가라고 하면 어떻게 될까요? "! 아무리 훈련이지만 너무 심하지 않은가?" 할 것입니다. 당시에는 지금처럼 길가에 “GS 마트가 있는 때도 아니었습니다. 해가 질 때 인가를 찾지 못하면 꼼짝없이 짐승들이 울부짖는 들판에서 밤새 이슬을 맞으며 굶주림과 추위에 떨어야 되었습니다. 길에는 강도도 많았습니다. 또한 당시에는 떠돌아다니는 부랑자들이 많았고 또 거짓 선지자들도 많았습니다. 사람들은 이런 자들을 쫓아내고는 하였습니다. 제자들이 거짓 선지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종으로 인정받는 것은 쉽지 않았습니다. 기도를 많이 하고 믿음으로 말씀을 전해야 되었습니다. 스피릿이 없이 메시지를 전했다가는 문전박대를 당하기 쉬웠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을 보내실 때 마치 어린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내시는 것과 같은 심정이셨습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은 열두 제자를 믿음으로 내어 보내십니다. 그들에게 아무런 인간적인 보장도 해주지 않으십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온실 안에서 기르지 않으셨습니다. 믿음으로 승리하지 못하면 굶주릴 수도 있고 추위에 떨 수도 있는 세상으로 보내셨습니다. 사람들의 일시적인 도움을 받기보다 전능하신 하나님 한 분 만을 의지하도록 키우신 것입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고 불가능에 도전하는 자들로 키워 예수님의 구속 역사를 계승하도록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오늘날도 세상을 바라보시며 믿음 있는 전도자들을 찾으십니다. 세상 권세 잡은 사탄과 싸우며 하나님의 나라의 복음을 전할 일꾼들을 찾으십니다. 우리가 이런 전도자가 되기 위해서는 주님이 주시는 능력이 필요하고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믿음이 없이는 사탄에 매인 영혼을 구원하기는 커녕 나 한 사람도 감당할 수 없습니다. 이런 면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배워야 합니다. 언제든지 자기를 극복하고 다른 사람을 도울 수 있는 역량을 키워야 합니다. 이를 위해 때때로 영적인 훈련이 필요합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자기가 원하는 것만 자기가 원하는 범위 내에서만 하고자 합니다. 소위 “Comfort Zone”에만 있기 원합니다. 그러나 “Comfort Zone”을 벗어나는 훈련이 없으면 믿음의 성장도 없습니다. 미국의 한 목회자가 여러 선교지를 다녀와서 말했습니다. “아프리카, 중남미에는 15years, 16 years old men이 많이 있다. 한편 미국에는 35years old boys들이 많이 있다는 말을 했습니다. 우리 식으로는 자기 나라에는 어른 아이가 많다는 것입니다. 우리 모임에서는 알게 모르게 여러 가지 영적 훈련을 받고 있습니다. 다 같이 받기 때문에 훈련을 받지 않고 있는 것 같은데 받고 있습니다. 새벽기도와 일용할 양식훈련, 소감훈련을 받습니다. 본문을 잘 묵상하며 꾸준히 소감을 쓰다 보면 자기도 모르게 생각하는 바와 말하는 바가 요점이 분명해지고 의사 표현이 명확해 집니다. 빼어난 메신저로 성장하게 됩니다.

 

양을 피싱하여 말씀을 가르치는 훈련을 통해 한 영혼의 목자로 성장합니다. 장막생활을 통해 좁은 마음을 넓히고 다른 사람을 이해하는 훈련을 받습니다. 평신도 목자님들은 이중 삼중의 십자가를 담당할 때는 힘들지만 익숙해지면 평범한 일은 어렵지 않게 처리하게 됩니다. 특별히 영적인 훈련의 목적은 하나님 한 분만을 믿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의 복음은 전하고 싶은 마음으로만 되지 않습니다. 마귀의 방해와 핍박이 많은 세상에서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실제적인 믿음이 있을 때 사탄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능력 있게 말씀을 전할 수 있습니다. 사탄에 매인 한 영혼을 구출해냅니다. 예수님은 열두 제자가 온실 속의 화초, 마미 보이와 같은 사람들이 아니라 어디에 던져 지더라도 생존하며 복음 전파의 사명을 완수할 수 있는 믿음의 용사들로 키우셨습니다.

 

10절입니다. "또 이르시되 어디서든지 누구의 집에 들어가거든 그 곳을 떠나기까지 거기 유하라." 제자들이 어느 집에 가서 묵게 되면 그곳을 떠날 때까지 거기 머무르라는 것입니다. 설사 숙식이 좀 불편해도 한 곳을 근거지로 하여 전도를 해야 합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고향에서 배척받으신 것처럼 배척받을 수 있습니다. 그럴 때 의기소침해질 것이 아닙니다. 도리어 떠날 때에 배척하는 자들에게 발아래 먼지를 떨어버려 증거를 삼아야 합니다. 이는 그들이 복음을 거부함으로 받게 될 결과에 대해 그들이 책임을 지게 된다는 경고입니다. 이를 통해 제자들이 배척의 때 더욱 담대한 마음으로 말씀을 전하도록 하셨습니다.

 

12절입니다. "제자들이 나가서 회개하라 전파하고." 제자들은 의식주 문제 때문에 사람들의 눈치를 보지 않았습니다. 은혜와 축복의 메시지만 전하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 회개하도록 촉구했습니다. 현재 우리나라는 그래도 아직 나은 편인데 미국이나 유럽에 가면 인본주의가 너무 강하여 모든 사람의 모든 자유가 보장되는 시대입니다. 모든 것을 허용해야 하는 시대입니다. 이런 시대에 회개의 메시지를 전하면 도리어 인권 침해로 소송을 당합니다. 악한 일을 악하다고 말하면 그렇게 말하는 것이 악하다고 하는 세상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요7:7절에서 말씀하셨습니다.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지 아니하되 나를 미워하나니 이는 내가 세상의 일들을 악하다고 증언함이라" 예수님은 세상의 악한 일들을 악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에게 회개를 촉구하신 것입니다. 그 일로 예수님은 미움을 받으시고 결국 십자가에 달리십니다. 우리는 세상에 살면서 악한 일은 악하다고 말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을 사랑하시지만 그들의 행위를 악하게 여기신다는 것을 말해야 합니다. 이는 어찌하든지 사람들이 깨닫고 회개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14절을 보면 제자들의 전도 사역은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이 갈릴리 전역에 널리 알려졌습니다. 이에 분봉왕 헤롯이 듣고 자기가 죽인 세례 요한이 죽은 자 가운데 살아나서 그의 능력이 예수 안에 역사하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막강한 권력을 가진 왕이었지만 의로운 사람을 죽인 죄책감에 시달렸습니다. 17~29절까지 저자 마가는 세례 요한의 순교를 상세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세례 요한이 잡힌 것은 마가복음 1:14절에 나옵니다. 시간상으로는 마가복음 1장 후반부에 요한의 순교를 다루어야 자연스럽습니다. 그런데 저자는 예수님의 갈릴리 사역 후반기 이 시점에, 이곳 6장에서 매우 길게 다루고 있습니다.

 

17절입니다. "전에 헤롯이 자기 동생 빌립의 아내 헤로디아에게 장가 든 고로 이 여자를 위하여 사람을 보내어 요한을 잡아 옥에 가두었으니." 여기서 헤롯은 헤롯 안티파스로 이두매 지역 분봉왕을 말합니다. 그는 헤롯대왕의 아들이었는데 나바티안 왕국의 공주에게 장가들었었습니다. 그 당시에는 나바티안 왕국의 수도는 페트라였고, 그 세력은 아라비아 반도 전체와 다메섹에 이르기까지 광대하였습니다. 그런데 헤롯 안티파스는 이복동생 빌립의 아내 헤로디아를 좋아하여 그녀를 빼앗아 또 장가들었습니다. 헤로디아는 헤롯대왕이 다른 아내로부터 낳은 아들 아리스토볼로스의 딸이었습니다. 결국 헤로디아는 이복 삼촌인 빌립과 결혼하였다가, 다시 다른 이복 삼촌 헤롯 안티파스에게 결혼한 셈이었습니다. 헤롯 왕가의 성적 타락은 극심하였습니다.

헤롯 안티파스가 빌립의 아내를 빼앗자 세례 요한은 이 죄에 도전하였습니다. “동생의 아내를 취한 것이 옳지 않다라고 직언하였습니다. 한 번만 말한 것이 아니라 헤롯이 회개할 때까지 반복하여 말하였습니다. 헤롯은 요한을 의인으로 여겨 그런 말을 듣고도 참고 넘겼는데 헤로디아는 참지 못하였습니다. 마침 헤로디아에게 좋은 기회가 왔습니다. 곧 헤롯이 자기 생일 파티를 크게 열었는데 헤로디아는 그의 딸로 하여금 그 파티에 들어가 춤을 추게 하였습니다. 역사가 요세푸스에 의하면 그 딸의 이름은 살로매였습니다. 살로매는 무희와 같이 노출이 심한 옷을 입고 외설적인 춤을 추었습니다. 살로매의 현란한 춤이 헤롯과 그와 함께 앉은 자들을 기쁘게 하였습니다. 이에 왕이 무엇이든지 구하는 것을 주겠다고 약속하였습니다. 나라의 절반까지라도 주겠다고 허풍을 떨며 맹세하였습니다. 살로매는 나가서 그 어머니에게 무엇을 구할 것인가 상의하였습니다. 세례 요한의 머리를 달라는 요청에 헤롯은 술이 번쩍 깨었을 것입니다. 그는 자신의 경솔함을 후회하였겠지만 손님들 앞에서 자기의 체면을 구길 수는 없었습니다. 병사를 보내 요한을 목 베어 그 머리를 소반에 얹어다가 소녀에게 주었습니다. 그 소녀는 14,15세 정도의 틴에이저이었습니다. 그런 소녀가 선지자의 머리를 소반에 담아 자기 어머니에게 가져가는 모습을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 헤로디아는 살인을 교사하였을 뿐 아니라 그 머리를 받아들고 미소를 지었을 것입니다. 그녀는 심히 악마적이었습니다.

 

그러면 저자 마가가 이 시점에 세례 요한의 죽음을 이렇게 상세하게 기록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그 시대의 정치 지도자들의 타락상을 말하고자 함입니다. 헤롯은 왕으로 백성들의 목자가 되어야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심히 음란하고 허풍을 떠는 자였습니다. 자기 정욕과 체면만을 생각한 자였습니다. 이런 시대에 백성들은 목자 없는 양과 같았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시대에 정치적인 혁명을 도모하지 않으셨습니다. 도리어 모든 촌에 두루 다니시며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셨습니다. 더 나아가 열두 제자를 둘씩 보내어 전도 훈련을 받게 하셨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사람, 능력 있는 전도자가 되도록 도우셨습니다.

 

둘째, 세례 요한의 죽음은 임박한 예수님의 죽음을 예표합니다. 헤롯은 의인 요한의 말을 듣고 안절부절 못하다가 헤로디아의 계략에 넘어가 요한을 죽입니다. 나중에 총독 빌라도가 의인 예수님을 놓아주려고 애쓰다가 결국 종교지도자들의 압력에 못 이겨 십자가에 내어줍니다. 헤롯이 요한의 부활을 얘기하는 것처럼 예수님도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십니다. 여하튼 예수님은 그런 불의한 시대에 친히 말씀을 전파하시고 믿음의 전도자들을 세우셨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보내신 사건은 어두운 시대에 별과 같이 빛나는 일입니다. 의인이 목 베임을 당하는 불의한 시대에 절망하지 않고 도전한 혁명적인 사건입니다. 전도하는 제자들이 없으면 세상은 어둡기만 합니다. 전도하는 제자들이야말로 세상의 소망입니다. 오늘 우리가 세상에서 할 일이 무엇일까요? 우리가 전도하는 것이요 전도하는 제자들을 세상으로 내보내는 것입니다. 물론 불신 세상으로 복음을 들고 들어가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해를 당할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이 그러셨던 것처럼 낙심하거나 두려워하지 말고 계속 세상에서 전도하고 전도자들을 세워 보내야 합니다. 말씀을 전하지 않으면 아무도 듣지 못합니다. 듣지 못하면 아무도 믿지 못합니다. 믿지 않고는 아무도 예수님을 주로 고백할 수 없습니다. 우리나라가 한 세대 후에 주님을 모르는 세대가 될까 두렵습니다. 우리가 먼저 일방적인 은혜를 받아 주님을 알게 된 자들로, 빚진 자의 심정으로 힘써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기를 기도합니다. 믿음으로 전도자들을 세워 내보내기를 기도합니다.

 

결론적으로, 배척과 박해는 복음역사를 어렵게 만들고 신자들을 힘들게 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오히려 이때 제자들을 내보내셨습니다. 오늘날 캠퍼스의 어려운 환경으로 전도가 위축되고 전도자들이 잘 안보입니다. 그러나 이때야 말로 복음을 들고 캠퍼스로, 세상으로 계속 나가야 할 때입니다. 주님이 권능을 주시고 필요한 모든 것을 주실 걸 믿고 계속 전도자들을 내보내야 합니다. 복음 전도자들이 이 어두운 시대의 소망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