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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2024년 마가복음 10강 떡 먹 개나 있는지 가서 보라(마가복음 6:30-56)2024-05-20 00: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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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마가복음 제 10강 

떡 먹 개나 있는지 가서 보라

말씀/ 마가복음 6:30-56

요절/ 6:38 “이르시되 너희에게 떡 몇 개나 있는지 가서 보라 하시니 알아보고 이르되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있더이다 하거늘

 

지난주 말씀에서 예수님은 열두 제자에게 권능을 주셔서 둘씩 둘씩 전도 여행 보내시고, 그 결과 많은 귀신이 쫓겨나고 병이 낫는 기적의 역사가 여기저기서 일어납니다. 이 소문이 왕궁까지 전해져서 헤롯왕이 죽은 세례요한이 다시 살아났다 말합니다. 이는 장차 예수님도 죽으시고 부활할 것을 예고합니다. 이제 예수님의 사역이 제자들에게 계승될 시기가 가까워지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모습이 무엇이며, 어떻게 구현이 되는지, 그리고 그 가운데 예수님이 누구신지, 제자들의 역할이 무엇인지를 알려줍니다. 이 시간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의 눈을 뜨게 하사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알게 하시고, 주님이 주시는 방향에 순종하게 하시길 기도합니다.

 

30절을 보겠습니다. “사도들이 예수께 모여 자기들이 행한 것과 가르친 것을 낱낱이 고하니전도여행에서 돌아온 제자들이 선교보고대회를 가졌습니다. “주님, 우리가 말씀을 전하니까 사람들이 눈물을 흘리며 자기 죄를 회개했습니다. 그보다 더 기쁜 일이 어디 있겠어요. 예수 이름으로 명하노니 더러운 귀신아 나오라말하니 귀신이 나가고, 병자에게 손을 얹고 낫게 하여 주옵소서기도하니 병이 나았어요. 사람들이 얼마나 놀라고 기뻐하는지~. 실은 제가 더 놀랬습니다. 그동안 예수님을 따라 다니면서 배운 것이 결코 헛되지 않았어요제자들은 너무나 신나고 들떠서 피곤한 줄도 몰라 합니다. 이제 그들은 예수님을 따라 다니는 일개의 작은 무리가 아닙니다. 예수님처럼 능력있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인정을 받았고, 인기도 치솟았습니다. 여기 보면, 제자들의 호칭을 사도들로 쓰여졌습니다. 마가복음에서 딱 한 번 여기에서만 사용하였습니다. 그 뜻은 보내심을 받은 자들, 하나님의 대리자, 그리스도의 대리자로서 그들이 영화롭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입니다.

 

신나있는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어떤 방향을 줍니까? 31너희는 따로 한적한 곳에 가서 잠깐 쉬어라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오고 가는 사람이 많아 음식 먹을 겨를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오고 가는 사람이 많아이전에 사람들이 예수님께 은혜를 구했던 것처럼, 한 무리가 제자들을 따랐고, 이어서 다른 무리도 제자들을 따라오니 열두 제자가 음식 먹을 여유도 없습니다. ‘한적한 곳으로 물러나라이 말은 고된 노동 후에 잠깐 쉬라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여기에는 그 이상의 영적 의미가 있습니다. 그것은 광야에서의 안식입니다. ‘한적한 곳으로 번역된 단어는 헬라어 에레모스인데 광야라는 뜻입니다. 저자 마가는 31,32절에서 광야 한적한 곳이란 표현을 반복하여 기술합니다. 하나님이 광야에서 자기 백성에게 안식을 준다는 것은 성경에서 반복되는 주제입니다. 하나님께서 출애굽한 이스라엘에게 광야에서 안식을 주셨으며, 그들의 자녀인 광야 세대에게도 안식을 광야에서 주셨습니다. 이사야와 예레미야 선지자에게 두 번째 출애굽에 관한 약속으로 광야에서의 안식을 예언하셨습니다.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니라 칼에서 벗어난 백성이 광야에서 은혜를 입었나니 곧 내가 이스라엘로 안식을 얻게 하러 갈 때에라 옛적에 여호와께서 나에게 나타나사 내가 영원한 사랑으로 너를 사랑하기에 인자함으로 너를 이끌었다 하였노라”(31:2,3) 광야에서의 안식에 대한 희망이 예수님이 제자들을 광야로 모아 그들과 함께 함으로 성취될 것입니다. 또한 제자들과 그들을 쫓는 무리가 새 출애굽의 백성이 될 것입니다. 예수님의 임재와 하나님의 공급하심이 광야에 있는 새 이스라엘에게 하나님 나라의 안식이 무엇인지를 보여주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 일행은 배를 타고 한적한 곳으로 갑니다. 그 장소가 누가복음에서는 벳새다라고 나옵니다. 분봉왕 빌립이 다스리는 지역입니다. 시기적으로는 유월절이 가깝습니다. 이때는 겨울비가 온 뒤라 요단강 수량이 많아져 가버나움에서 벳세다로 도보로 갈려면 요단강을 건너야 하는데, 어렵기에 배를 타고 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가만 놔두지 않습니다. 33절을 보겠습니다. “그들이 가는 것을 보고 많은 사람이 그들인 줄 안지라 모든 고을로부터 도보로 그 곳에 달려와 그들보다 먼저 갔더라여기서 그들은 누구죠? 예수님의 제자들입니다. ‘, 저분 우리 동네에 오신 베드로인데~. 와서 병도 고치고 귀신도 쫓아내 주신 분 아니야?’, ‘, 저분은 우리 동네에 오셨던 도마 선생님이시네여러 고을 사람들이 열두 제자들을 알아보고 좇아옵니다. 전도 여행을 통해 제자들의 위상이 얼마나 높아졌는지, 그 인기를 실감할 수 있습니다.

 

큰 무리를 보신 예수님의 반응이 무엇입니까? 34절을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그 목자 없는 양 같음으로 인하여 불쌍히 여기사 이에 여러 가지로 가르치시더라

 

첫째, 그 목자 없는 양 같음을 보셨습니다. 그 당시 누가 목자 노릇을 해야 합니까? 헤롯왕이해야 마땅했습니다. 그런데 목자 노릇은 커녕 백성들을 억압하고 의인 세례 요한을 죽이는 악행을 저지렀습니다. 또한 종교지도자들이 목자 노릇을 해야 했습니다. 모여드는 무리중에는 지금 유월절을 맞이하여 예루살렘을 향해 순례하는 여행객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이들은 성전에 가서 제사를 지내고 제사장들을 통해 가르침을 받고 은혜받고 안식을 누려야 합니다. 그러나 종교지도자들은 삯군목자로서 백성들을 하나님께로 인도하지 못합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시기하여 죽이고자 합니다. 그나마 그동안 목자 역활을 했던 세례 요한마저 죽임을 당하고 없습니다. 백성들이 방황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사는 현 시대는 어떻습니까? ‘코로나 학번(21-23학번)이 위험하다는 말이 있습니다. 한 상담사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심각해요. 팬더믹 기간에 대학 다닌 21-23살 청년들의 상담 전화가 올해 급증했습니다. 전화 받아보면 그들이 말하기를 배운 것도 없고, 대학에 친구도 없고, 학회나 동아리는 하다가 중단했어요. 한 것도 없는데 벌써 졸업해서 사회에 나가라고 하네요. 불안해요. 내가 무슨 성인이에요. 준비기도 제대로 없었는데요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직장인들은 어떻습니까? 한 설문조사에 의하면, 직장 생활하면 고립감이 해소될 줄 알았는데, 도리어 더 심해졌다는 비율이 56%나 나왔습니다. 직장에서는 속마음을 털어놓았다가 소문날까봐 말도 못한다고 합니다. 10명중 8명이 나는 고립이라고 했습니다. 30대 직장인 송민기씨(가명)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람과 대화하고 싶어서 당근에 올라온 글을 보고서, 동네 사람들과 함께 삼겹살 먹는 모임에 가 본적이 있어요. 하지만 크게 도움을 받지 못했어요. 그런 일이 있고 난 뒤로는 이제 혼자 영화관에 가서 영화를 보거나 넷플릭스로 드라마를 보곤 합니다. 조금 에너지가 있을 땐 산책이나 등산을 해요라고 했습니다.

젊은 대학생이나 직장인이나 한결같이 하소연 하는 말은 도움을 요청할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 시대의 필요가 무엇입니까? 목자가 절실히 필요합니다. 청년들에게 나는 누구인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인생의 목적이 무엇인지, 어떻게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인지, 그 길을 제시해주고, 함께 동행해 줄 목자가 필요합니다. 그 목자 역할을 누가 해야 합니까? 교수가? 부모가? 선배가? 진리를 알고 그 길을 제시해 줄 수 있는 우리가, 목자 역할을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국민대 영혼들의 목자 노릇을 정유석목자가 해야 되지 않을까요? 예수님은 우리가 이 시대의 목자가 되길 원하십니다.

 

둘째, 예수님은 그들을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근래 상담사들이 전화로 상담해 오는 대학생들과 잘 소통이 안된다고 푸념하고 있습니다. 대학생들이 이해하기 어려운 말들을 하고, 논리가 없는 말을 한다고 합니다. 또 상담사가 해 주는 말을 그들이 도통 알아듣지 못하는 경우가 예전보다 더 많아졌다고 합니다. 마치 외계인과 대화하는 느낌이라고 합니다. 하물며 하늘에서 오신 예수님께서 우리 인생들과 대화하실 때 얼마나 답답하시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무리를 불쌍히 여기십니다. 긍휼히 여기십니다. 사랑하십니다.

 

셋째, 그들에게 여러가지로 가르치셨습니다. 여러분은 우리 청년들에게 무엇을 주고 싶습니까? 가장 좋은 것, 가장 필요한 것을 주고자 하지 않겠습니까? 그것이 무엇입니까? 영혼을 살리고 삶의 목적과 방향을 알게 해 주는 생명의 말씀이 아니겠습니까? 예수님은 가장 좋은 것을 양들에게 주십니다.

 

이처럼 예수께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열심히 가르치실 때 어떤 문제가 생겼습니까? 날은 저물어가고 저녁식사 시간이 다가옵니다. 이곳은 빈들입니다. 제자들이 어떻게 할까?’ 서로 의논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 대안을 제시합니다. “무리를 보내어 두루 촌과 마을로 가서 무엇을 사 먹게 하옵소서”(35,36) 그들의 해결책은 대단히 합리적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대답은 무엇입니까? 37절을 읽겠습니다.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하시니 여짜오되 우리가 가서 이백 데나리온의 떡을 사다 먹이리이까”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하십니다. 제자들은 당황스러워하며 우리가 가서 이백 데나리온의 빵을 사다가 이들을 먹이란 말입니까? 이들을 먹이는데는 최소 이백 데나리온, 노동자의 200일 품삯이 필요합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밀 이삭을 잘라 손으로 비벼먹던 우리인데, 그런 돈이 어디 있습니까?’ 제자들은 돈이 없어서 먹일 수 없다고 합니다. 오늘날에도 사람들은 먼저 돈을 계산합니다. ‘돈만 있으면 뭐든 할 수 있다고 합니다. 경제적 여유가 생기면 하겠다고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돈을 요구한 것이 아닙니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원문에는 너희란 단어가 강조되어 있습니다. 돈이 문제가 아니라 너희가 양에 대한 목자 심정만 있으면 먹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다 함께 38절을 읽겠습니다. “이르시되 너희에게 떡 몇 개나 있는지 가서 보라 하시니 알아보고 이르되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있더이다 하거늘” ‘너희에게 떡 몇 개나 있는지 가서 보라찾아보고 너희에게 있는 그것으로 먹이라고 하십니다.

 

제자들이 찾아보니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있었습니다. 이를 받으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무엇을 하도록 하십니까? 그 모든 사람으로 떼를 지어 푸른 잔디 위에 앉도록 하시되 떼로 백 명씩 또는 오십 명씩 앉게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양을 푸른 풀밭으로 인도하시는 것처럼, 예수님께서 그 양을 푸른 잔디에 앉히십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가지고 온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축사하시고, 그것을 제자들에게 주어,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게 하십니다. 제자들이 그렇게 하니 다 배불리 먹고, 남은 조각이 열두 바구니에 찼습니다. 그 떡을 먹은 남자는 오천명이었습니다. 남녀노소 다 합하면 2만명은 족히 될 것입니다.

 

이것을 메시야의 잔치라고 합니다. 이 잔치는 무슨 잔치와 대조가 됩니까? 바로 앞에 나오는 헤롯의 잔치와 대조가 됩니다. 헤롯은 자기 생일을 위해 잔치를 벌였습니다. 거기에는 술과 춤과 산해진미가 가득합니다. 여기에 공급된 모든 것들은 백성들의 살과 피를 빨아 준비한 것들입니다. 거기에는 고관대작들이 참여하였습니다. 잔치의 마무리는 의인인 세례 요한의 목을 소반에 담아오는 것으로 끝이 납니다. 반면 목자되신 예수님이 베푸신 잔치는 어떻습니까? 목자의 음성을 듣고 몰려온 양들을 위한 잔치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으로 영혼의 양식을 먹습니다. (소금으로 절여 말린 작은)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개, 이렇게 소박한 음식을 먹었지만 모두가 다 배불리 먹습니다. 이것은 예수께서 자신의 살을 찢어서 나누어 준 생명의 떡입니다. 그 공급은 무한정입니다. 그들은 목자되신 예수 안에서 안식을 누리며 풍성한 공급을 체험합니다. 23:1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말씀이 떠오릅니다. 잔치의 마지막은 제자들이 남은 떡 조각과 물고기를 열두 바구니에 차게 거두는 것으로 마무리됩니다. 이 떡은 제자들을 통해 장차 열방으로 가져가게 될 것입니다. 체코에 가져가 체코 영혼을 먹이고, 불가리아에 가져가 불가리아 영혼을 먹일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십니다. 만물을 창조하신 창조주요, 무에서 유를 만들어내시고, 불가능을 가능케 하시는 분입니다. 예수님은 목자이십니다. 그분은 자신의 무한한 능력을 그 분의 양들을 위해 사용하십니다. 양들에 대한 목자 심정을 가진 자에게 그 능력을 한량없이 부어주십니다.

 

이 사건을 통해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무엇을 원하시며 훈련하십니까?

첫째, 목자 심정을 가지라 하십니다.

둘째, 양을 먹이되 제자들이 가지고 있는 것으로 먹이라 하십니다. 없는 것을 찾지 말고 있는 것을 찾아 그것으로 시작하라 하십니다.

셋째, 예수님의 능력을 믿고 예수님의 이름 권세를 사용하라 하십니다. 16:24은 말합니다. “지금까지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예수 이름 권세로 무엇이든지 구하면 받게 됩니다. 사도행전 3장에 보면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 미문에 구걸하는 앉은뱅이를 보고 이렇게 선포합니다.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그러자 앉으뱅이가 일어나 걷기도 하며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송하였습니다. 사도바울은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4:13)’고 하였습니다.

 

요한복음 21장을 보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예수님은 부활하셔서 갈릴리 해변에서 제자들을 만나시고, 자신이 준비한 구운 물고기와 떡으로 그들에게 조반을 먹이십니다. 여기서 먹이신 물고기는 오병이어 사건 때 먹이신 물고기와 같은 작은 물고기였습니다. 이 장면은 제자들에게 오병이어 사건을 떠오르게 하였을 것입니다. 식사 후에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묻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그리고서 내 양을 먹이라이렇게 세 번을 반복합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나는 주님을 버리고 도망갔어. 예수님을 세 번 부인했어이런 생각을 털어버리고, 이제 예수님이 세상을 떠나가니 네가 앞으로 내 양을 맡아서 먹여줘이렇게 부탁하였던 것입니다. 마가복음은 박해받는 로마성도들을 위해 쓰여진 복음서입니다. 베드로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로마성도들과 함께 로마에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생명의 위협을 느끼고 로마를 떠나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주님을 만납니다. ‘쿼바디스- 주님, 어디로 가시나이까?’ 묻습니다. 그러자 주님은 네가 버린 나의 양, 로마 성도들에게로 내가 간다고 하십니다. 이 말에 베드로는 충격을 받고 어떻게 합니까? 회개하고 로마로 다시 돌어갑니다. 그는 로마성도들을 돌보다가 붙잡혀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순교를 합니다. ‘내 양을 먹이라그는 주의 부탁을 끝까지 신실하게 감당했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너희에게 떡 몇 개나 있는지 가서 보라이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길 기도합니다. 우리가 양을 먹이기를 기도합니다.

 

오병이어 사건 후에 예수님은 무엇을 하십니까? 제자들을 재촉하여 앞서 건너편 벳새다로 가게 하십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왜 이렇게 제자들을 채촉하여 먼저 가게 하시는 걸까요? 요한복음을 보면, 무리들이 예수님을 왕 삼으려 했기 때문입니다(6:15). 광야에서 식사한 후 무리들의 흥분이 예수님의 사역을 위태롭게 하고 있습니다. 무리들과 제자들이 결탁하여 예왕모(예수를 왕으로 옹립하는 모임)’를 만든다면 예수님은 참으로 난처하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를 철저히 거부하십니다. 지금 위기입니다. 예수님은 빨리 제자들을 무리로부터 분리시킵니다. 무리를 해산시키십니다. 그리고 기도하시러 산으로 갑니다. 무엇을 위해 기도하셨을까요? 먼저 자신을 위해 기도하셨을 것입니다. 쉬운 길을 가라는 마귀의 유혹을 뿌리치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자신의 몸을 십자가 죽음에 내어줌으로 자신의 살을 무리에게 생명의 떡으로 주고자 방향을 잡습니다. 제자들을 위해 기도합니다. 그들이 예수님이 정치적 메시야가 되기를 바라는 꿈을 버리고, 양들의 목자가 되기를 기도했을 것입니다. 무리를 위해 기도합니다. 그들은 장차 예수님이 잡히실 때 빌라도 앞에서 우리에게는 가아사 외에는 다른 왕이 없나이다고함을 칠 것입니다. 그들이 영적인 눈을 떠서 예수가 하나님께서 보내신 그리스도인 것을 알고 하나님 나라를 추구하게 되기를 기도했을 것입니다.

 

날이 저물었습니다. 배는 바다 가운데 있고 예수님은 홀로 뭍에 계십니다. 바람이 거스르므로 제자들이 힘겹게 노 젓는 것을 예수님은 보시고 밤 사경, 새벽 4시쯤 바다 위로 걸어서 그들에게 오셔서 지나가십니다. 제자들은 유령인가 하여 놀랍니다(45-49).

 

예수님은 그들을 어떻게 안심시킵니까? 50절을 읽겠습니다. “그들이 다 예수를 보고 놀람이라 이에 예수께서 곧 그들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하지 말라 하시고.” ‘내니이 말은 그 옛날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서 모세에게 나타나신 여호와께서 자신을 계시하실 때 에고 에이 미 (I am who I am)’이라고 했던 말과 같습니다. ‘나 여호와가 여기 있다.’ 구약에서는 바다를 창조하신 하나님이 바다를 정복하고 파도를 밟으며 그의 위엄을 나타낸다(9:8,11)고 하였습니다. 또한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은 천국의 풍경이란 글 속에서 나온 것처럼 천국의 바다에는 파도가 치지 않는다고 믿었고, 파도로 인해 목숨을 잃을 일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천국에 사는 의인들은 바다 위를 쉽게 걷는다고 여겼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이 물 위를 걷는 것을 본 제자들에게 무슨 생각이 들었겠습니까? ‘예수님이야말로 하늘에서 오신 분이구나. 하나님의 아들이구나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지금 세상 나라의 왕의 자리를 거부한데에 따른 제자들의 실망을 잘 알고 있습니다. 이런 그들에게 자신이 세상 나라 왕과는 차원이 다른, 보다 더 높고 진정한 의미에서 왕이 되심을 그들로 알게 하고자 하십니다.

 

이 사건은 고난받는 성도들에게 위로가 됩니다. 역풍을 맞아 힘겹게 싸우는 제자들에게 내니.’하시며 찾아오신 예수님은 삶의 역풍 앞에서 힘들어하는 사람을 결코 모른 척하지 않습니다. 고난의 밤이 깊어갈 때, 인간의 힘이 탈진할 때 찾아오십니다. 그리고 안심시켜 주십니다. ‘안심하라. 두려워하지 말라주님은 우리의 목자이십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예수님이 배에 오르시는 것을 보고 심히 놀랍니다(51). 왜 놀라는 겁니까? 52절을 읽겠습니다. “이는 그들이 그 떡 떼시던 일을 깨닫지 못하고 도리어 그 마음이 둔하여졌음이러라.” 그들이 놀란 이유는 빵을 먹이셨던 그 예수님을 깨닫지 못하고 마음이 둔해졌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오천 명을 먹이신 것을 체험했습니다. 하지만 그들 마음에는 예수님은 없고 빵만 남았습니다. 우리가 어떤 문제를 해결 받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문제를 해결해 주신 예수님을 깨닫고 기억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문제 해결만 남고 예수님이 남지 않는다면 믿음이 성장하지 않습니다. 목자이신 예수님을 기억할 때 그 믿음이 자랍니다.

 

배는 게네사렛 땅에 도착했습니다. 목적지보다 남쪽으로 더 떠밀려 온 것 같습니다. 사람들이 예수신 줄 알아보고 몰려듭니다. 많은 병자들이 예수의 옷 가에라도 손을 대어 낫고자 간구하니 손을 대는 자는 다 성함을 얻었습니다. 이 지역에는 믿음 좋은 사람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양을 먹이는 목자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목자 훈련을 하십니다. 목자는 첫째, 양들에 대해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둘째, 내게 있는 것을 찾아 주님께 내어 드려야 합니다. 셋째, 내 삶 속에서 일하시는 예수님을 잊지 않아야 합니다. 이 시대의 요구가 무엇입니까? 목자를 요구합니다. 우리가 이 시대의 양들을 내게 있는 것을 찾아 먹이는 목자로 살아 가길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