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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2022년 누가복음 11강 `⁠말씀을 듣고 결실하는 자 `(누가복음 8:1-21)2022-05-23 0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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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누가복음 제 11

말씀을 듣고 결실하는 자

말씀 / 누가복음 8:1-21

요절 / 누가복음 8:15 “좋은 땅에 있다는 것은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지키어 인내로 결실하는 자니라

 

많은 신학자들이 누가복음을예수님의 이 땅으로의 여행으로 봅니다. 하늘에 계신 성자 하나님께서 성육신하여 이 땅에 오셨고, 세상 여행을 하시고, 본향인 하늘로 승천하는 것으로 누가복음이 끝납니다. 여행에는 장소와 기간, 그리고 목적이 중요합니다. 예수님의 여행 목적이 무엇인가요?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시는 것입니다(19:10). 한마디로전도 여행입니다. 오늘 말씀은 갈릴리 전도 여행중 무리를 보시면서 그들 모두가 생명의 말씀을 듣지만 그 중에 어떤 사람만이 결실하는가를 비유로 알려주십니다. 오늘 말씀을 들을 때에 들을 귀를 갖고 듣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이 천국 비밀을 알아가며 풍성한 결실 맺기를 기도합니다.

 

1절을 읽겠습니다. “그 후에 예수께서 각 성과 마을에 두루 다니시며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시며 그 복음을 전하실새 열두 제자가 함께 하였고.” 예수님께서 각 성과 촌에 두루 다니셨습니다. 예수님의 복음전파의 열심, 구령의 열심, 잃어버린 자를 찾는 열심을 볼 수 있습니다. 다음 주 말씀에 나오겠지만 예수님이 얼마나 열심히 했는지 갈릴리사역을 마치고 배를 타고 갈 때 피곤하셔서 깊은 잠에 빠져들고 거센 풍랑속에서도 주무셨습니다. 갈릴리 각 지역을 다니면서 하신 일이 무엇입니까? 하나님 나라를 선포했습니다. ‘선포는 영어로 ‘proclaim’인데앞을 향하여 외친다는 뜻입니다. 왕의 전령이 왕의 포고령을 각 마을마다 가서 전하는 것을 말합니다. 사람들이 듣든 안듣든 그들은 담대하게 외쳐 말합니다. 예수님은 만왕의 왕이신 아버지 하나님의 메시지를 인류를 향하여 힘차게 외치고 있습니다. 우리는 여름수양회를 앞두고 있습니다. 이 예수님의 구령의 스피릿을 배워야겠습니다. ‘코로나로 수고하고 고생하는 MZ세대 여러분~ 하나님 나라의 참된 쉼이 있는 여름 수양회가 대면으로 열리게 되었습니다. 오셔서 생명을 얻고 천국의 즐거움과 쉼을 누리세요열심히 초청역사를 섬기길 기도합니다.

 

예수님의 복음전파에 누가 동행하였나요? 열 두 제자들이 동참했습니다. 또 누가 동참했죠? 2,3절을 읽겠습니다. “또한 악귀를 쫓아내심과 병 고침을 받은 어떤 여자들 곧 일곱 귀신이 나간 자 막달라인이라 하는 마리아와 헤롯의 청지기 구사의 아내 요안나와 수산나와 다른 여러 여자가 함께하여 자기들의 소유로 그들을 섬기더라.” 여인들이 예수님의 사역에 동참했습니다. 당시 여자들은 남자들과 동등한 위치를 갖지 못하여 사람 수에도 넣지 않았습니다. 랍비들은 자기 아내와 함께 다니면 안된다고 가르쳤고, 여자가 지나가면 쳐다보아서도 안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여인들을 전도여행에 동참시켰어요. 이 얼마나 파격적이며 진보적입니까? 그것도 문제가 될 수 있는 여인들입니다. 일곱 귀신들렸던 막달라 마리아, 세례요한의 목을 벤 헤롯왕의 측근이요 재정담당자인 구사의 아내 요안나, 그리고 며칠 또는 여러 날을 함께 먹고 자고 해야 하는데~ 여인들이 동행한다는 것은 가쉽거리, 비난의 대상이 될 수도 있었습니다. 2000년전 남녀를 엄격히 구별하던 그런 시대에 이렇게 하셨으니 참으로 놀랍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하신 이유가 뭘까요? ‘천국 일군의 자격은 남녀가 구별이 없다’ ‘남자도 되고 여자도 된다. 누구든지 천국 일군이 될 수 있다그것을 의도적으로 보여주신 것 아니겠습니까? 참으로 은혜입니다.

전도여행에서 이 여인들이 한 것이 무엇입니까? ‘자기들의 소유로 그들을 섬기더라’. 예수님 일행의 물질적인 필요를 헌신적으로 지원하고 섬겼습니다. 특히 헤롯의 청지기 구사의 아내가 나오는데, 경제적으로 부유했겠죠. 그녀는 남편의 동의를 얻어 물질을 지원한 것 같습니다. 우리 UBF모임도 사모님들의 헌신적인 섬김이 있었기에 가능하였다고 생각합니다. 헌금이나 재정지원에 있어서는 사모님들이 더 적극적입니다. 평신도 목자님들은 보통 이리저리 계산해 보고 형편에 맞추어서 하자고 합니다. 이때 사모님들은아니~ 짜게 왜 그래요?’ 하면서 더 풍성히 하고자 합니다.

 

4절을 보겠습니다. “각 동네 사람들이 예수께로 나아와 큰 무리를 이루니 예수께서 비유로 말씀하시되.” 각 동네에서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 나아왔습니다. 큰 무리를 이루었습니다. 이때 예수님은 무슨 생각을 하였을까요? “~ 많이 왔네!” 이렇게 기뻐한 것 같지 않습니다. 많은 사람이 말씀을 들으러 왔지만 그들의 마음 상태를 보셨습니다. 그들 중에 일부만이 생명의 결실을 맺을 것을 아셨습니다. 씨 뿌리는 비유를 통해 그것을 알게 하고자 하십니다.

 

5-8절 상반절 까지를 읽어보겠습니다. “씨를 뿌리는 자가 그 씨를 뿌리러 나가서 뿌릴 새 더러는 길가에 떨어지매 밟히며 공중의 새들이 먹어버렸고 더러는 바위 위에 떨어지매 났다가 습기가 없으므로 말랐고 더러는 가시떨기 속에 떨어지매 가시가 함께 자라서 기운을 막았고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나서 백배의 결실을 하였느니라.” 본분의 비유를 잘 이해할려면 먼저 예수님 당시의 이스라엘의 밭과 농사법을 알 필요가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대부분의 밭은 자갈밭입니다. 해안가의 밭은 옥토이지만 일찍부터 블레셋이나 가나안 원주민들이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유다 산지나 갈릴리 산지에 터를 잡고 살았습니다. 어떤 랍비들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하나님이 돌을 만들어 세상에 두실 때 대부분을 이스라엘 땅에 쏟아부으셨다그곳은 농사짓기에 적절하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유대 민족은 목축업에 많이 종사하였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농사를 짓지 않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유대 민족은 쟁기로 지표면을 몇센티미터 대충 갈아엎고 씨를 뿌렸습니다. 우리나라처럼 밭고랑을 만들어 그곳에 씨를 뿌릴 수 없었습니다. 농부는 종자 주머니를 차고 들판을 가로질러 왔다 갔다 하면서 손 가는 대로 씨를 뿌렸습니다. 씨는 온 들판에 떨어졌습니다. 길가, 돌밭, 가시떨기 위에도 떨어졌습니다. 팔레스틴에는 유난히 가시가 돋은 식물들이 많이 자란다고 합니다. 히브리 성경에는 가시나 가시 종류의 식물을 의미하는 용어가 22종류나 나옵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말씀하신 밭의 상태가 매우 험악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는 예수님이 사역하던 당시의 상태를 보여주기도 합니다. 참 빛이신 예수님이 오셨지만 어두움속에 있던 사람들은 깨닫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의 고향인 나사렛 사람들은 예수님을 배척했습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예수님을 따라다니면서 괴롭혔습니다. 따라다니던 사람들 중에 사역 말기에 말씀이 어렵다며 많이 떠나갔습니다. 예수님의 사역현장은 결코 순탄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실망하지 않고 소망가운데 씨를 뿌리셨습니다. 떨어진 씨가 새에게 먹히기도 하고, 말라 죽기도 하고, 기운이 막혀 열매를 맺지 못하기도 하지만 좋은 땅에 떨어지면 백배의 열매를 맺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비유를 말씀하신 후에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고 외치셨습니다. 숨은 뜻이 있으니 잘 들으라는 것이죠. 겉에 나타난 모습만 보지 말고이게 무슨 뜻이지?’ 깊이 사고하면서 영적 상상력을 가지고서 들으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알 수 있다는 것이죠. 그렇지 않으면 단지 평범한 농사짓는 이야기로 들릴 뿐입니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들을 귀가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습니다. 듣는 자 중에 적절한 응답을 한 청중도 없었고 심지어 제자들조차도 그 비유의 뜻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이에 제자들이 어떻게 합니까? 9제자들이 이 비유의 뜻을 물으니.” 여기서물으니에페로톤으로 심문하듯이 계속하여 집요하게 묻는 것을 말합니다. 요한은 예수님의 어깨를 주물러 드리고 베드로는 박카스를 따서 예수님께 드리면서예수님~ 많이 피곤하시죠. 하지만 이 비유의 뜻을 정말 저희들이 알고 싶거든요. 제발 해석 좀 해 주세요.’ 이렇게 열정적으로 집요하게 물었다는 겁니다. 지난주 말씀에서도 세례요한이 예수님께 대한 의구심이 들자 자기 제자 둘을 보내어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질문하였죠. 의문이 생기면 질문하고 어떻게든 적극적으로 알고자 해야 합니다. 이런 태도를 예수님은 기뻐하십니다. ‘그것도 몰라.’ ‘신앙수준이 그 정도 밖에 안돼이렇게 답하지 않으십니다.

 

10절을 보십시오.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다른 사람에게는 비유로 하나니 이는 그들로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지난 주 과학계를 놀라게 한 뉴스가 있었습니다. 우리 은하계 중심부에 있는 블랙홀이 실제 관측이 된 것입니다. 그동안 아인쉬타인의 일반 상대성 이론에 기초하여 과학자들이 상상도를 만들어 우리 은하계 중심부에 이런 블랙홀이 있을 것이라고 예측하였는데, 예측한 그대로 실제로 존재하고 있음을 관측하고서 환호하였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아인쉬타인의 일반상대성 이론이 옳다는 것이 증명되었습니다. 아인쉬타인은 그의 일생에 가장 행복했던 생각은등가원리라고 하였습니다. 중력의 효과와 가속도의 효과가 같다는 법칙입니다. 너무나 단순한 원리입니다. 이 원리에서 출발하여 사고실험(생각으로 실험하는 것)을 통하여 일반상대성 원리가 나왔습니다. 이 심오한 의미를 깨닫는 사람은 전 세계에서 열명도 되지 않을 것이라고 합니다. 아인쉬타인은 물질 세계의 원리, 등가원리를 깨닫고 그 원리를 적용하는 사고의 범위를 점차 확장해 갔습니다. 그 때 그는 가장 행복했다고 합니다. 물질 세계인 우주의 비밀을 깨닫는 것도 엄청난 기쁨이요 행복인데, 더 높은 차원인 하나님 나라, 영적 세계를 깨닫는 즐거움이야 어떠하겠습니까? 하나님 나라의 비밀은 누가 알 수 있습니까? 허락된 사람만이 알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지혜와 계시의 영을 주셔서 마음의 눈이 밝아져야만 보입니다(1;17,18). 이것이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허락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우리에게 주어졌습니다. 이 특권을 누리고 있나요? 이 즐거움을 누리고 있습니까? 예배에 참석하신 모든 분들이 이 즐거움을 누리고 행복하기를 기도합니다.

 

11-15절까지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비유의 말씀을 해석해 주십니다.

“이 비유는 이러하니라 씨는 하나님의 말씀이요 길 가에 있다는 것은 말씀을 들은 자니 이에 마귀가 가서 그들이 믿어 구원을 얻지 못하게 하려고 말씀을 그 마음에서 빼앗는 것이요 바위 위에 있다는 것은 말씀을 들을 때에 기쁨으로 받으나 뿌리가 없어 잠깐 믿다가 시련을 당할 때에 배반하는 자요 가시떨기에 떨어졌다는 것은 말씀을 들은 자이나 지내는 중 이생의 염려와 재물과 향락에 기운이 막혀 온전히 결실하지 못하는 자요 좋은 땅에 있다는 것은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지키어 인내로 결실하는 자니라

먼저 씨는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였습니다. 씨와 말씀의 공통점이 무엇입니까? 생명력이 있다는 것이죠. 한 사람의 마음에 말씀의 씨앗이 뿌려지면 어떤 사람에게는 그렇고 그런 말씀이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그 말씀이 충격이 되고, 감동이 되고, 회개가 되고, 한 사람의 인생을 바꾸어 버리지 않습니까? 저도 불신자였을 때 한 외국인 선교사와 중학교 동창이 들려준 롬5:8 “우리가 아직 되었을 때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이 말씀이 들려질 때 엄청난 충격이었습니다. 어떻게 다른 사람의 죄를 위해 죽을 수 있단 말인가? 그것도 그리스도가 죄인들을 위해 죽다니~ 저는 이 하나님의 크신 사랑에 감동이 되어 마음이 녹아져 내렸습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고 나를 위해 죽으신 예수를 위해 살리라 자발적 결단을 하게 되었습니다. 여러분들도 다 그런 체험을 하셨을 것입니다. 성령께서는 한 말씀을 통해 아주 변화무쌍하게 한 사람 한 사람을 거듭나게 하고 회개하게 하고 깨닫게 하십니다. 그래서 종교개혁자들이말씀이 살아있다’, ‘그리스도의 영이 거기 있다라고 말합니다. 어떤 사람은성경말씀이 곧 그리스도라고 까지 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이처럼 살았고 활력이 있습니다.

 

씨가 하나님의 말씀이라면 네 종류의 밭은 말씀을 받는 사람의 마음 자세를 말합니다.

 

첫째, 길가와 같은 마음 밭입니다. 딱딱한 토질은 복음의 씨가 뚫고 들어가지 못하고 표면에만 머물게 하는 강퍅한 마음을 말합니다. 말씀이 마음 속으로 들어오지 않기 때문에 싹을 낼 기회조차 얻지를 못하는 것이죠. 이때 초청하지 않은 마귀가 나타납니다. 믿어 구원을 얻지 못하게 하려고 말씀이 그 마음에 들어가기 전에 빨리 채갑니다. 여기에 속한 사람이 누구일까요? 우리는 이 토양이 불경하고 사악한 죄인을 나타낸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사실 예수님은 형식적인 경건과 종교의식과 전통적인 예배에 열심히 헌신했던 이스라엘의 종교지도자들을 염두에 두고 계셨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거부했기 때문에 구원받을 가능성이 전혀 없습니다. 그들이 종교적이라고 해서 곧 심령이 부드럽다는 뜻이 아니다는 증거를 보여줍니다. 인간이 만든 종교에 더 깊이 몰두하는 마음일수록 더 강퍅하게 변한다고 합니다. 이런 경우는 견고한 진을 무너뜨리듯 강퍅한 마음을 강제로 무너뜨리는 것만이 유일한 희망입니다.(고후10:3-5)

 

둘째, 바위 같은 마음 밭입니다. 바위 위에 얉게 흙이 덮여 있는 밭이죠. 이런 밭은 잠시 기쁨으로 말씀을 받습니다. 그런데 뿌리가 없어서 잠간 믿다가 시련이 올 때에 배반을 합니다. 어떤 사람일까요? 감정적인 신앙 생활, 자기 중심적인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입니다. 자기가 좋아하는 것만 추구하고 자기의 유익만을 구하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여기 저기 좋다 하는 부흥회만 좇아다니지 정작 한 곳에 정착하지 못합니다. 산기도, 철야기도하고 나서 무엇이든지 할 수 있을 것처럼 방방 뜨다가 조금만 어려움이 오면 사람에게 불평하고 교회에 불평하고 하나님을 원망하다 믿음에서 떠나는 사람입니다. 이들의 문제는 예수님께 뿌리를 내리지 못한 것입니다. 이럴 때 어떻게 해야 합니까? 방해하는 돌을 깨야 합니다. 자기 사랑, 자기 욕심을 깨 주시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어찌하든 예수님 안에 뿌리를 내릴려고 예수님을 붙들어야 합니다. 골로새2:6,7은 말합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으니 그 안에서  행하되 그 안에 뿌리를 박으며 세움을 받아 교훈을 받은 대로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 우리의 신앙생활을 내가 원하는 것을 이루는데 초첨을 맞추지 말고 예수님을 아는 것에 초점을 맞추어야 합니다. 시련이 왔을 때는예수님께 뿌리를 내려야 할 때이구나!’ 생각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빛가운데 예수님을 만났을 때 두 가지를 물었죠? ‘당신은 누구십니까?’, ‘내가 무엇을 하리이까?’ 우리도 시련의 때에 예수님께주님, 당신은 누구이신지요?’, ‘주님, 제가 무엇을 할까요?’ 이렇게 예수님께 질문하면 좋겠습니다. 그러면 예수님 안에 뿌리가 내려지게 됩니다.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고 했으니 시련의 때에 하나님의 선한 섭리가 있음을 믿고 감사해야겠습니다. 시련은 반드시 지나갑니다. 지나간 후에 보면 나의 삶의 뿌리가 예수님께 좀 더 단단히 박혀 있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이 누구신지 알게 되고 예수님을 더욱 사랑하게 됩니다.

 

셋째는 가시떨기와 같은 마음 밭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이 범죄하였을 때 땅을 저주하사 가시와 엉겅퀴가 나도록 하셨죠. 농사를 지으면 그것들이 다 영양분을 가져가 제대로 소출이 나지 않습니다.

가시떨기와 같은 마음 밭은 어떤거죠? 이생의 염려와 재물과 세상 향락입니다.

‘이생의 염려세상에 대한 관심으로 대체할 수 있습니다. 염려는 언제 합니까? 세상에 대한 관심을 가질 때 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염려하지 않을 수 있죠? 하나님과 하나님 나라에 관심을 두면 됩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6:33)”,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벧전5:7)” 내가 감당해야 할 일을 믿음으로 직면하여 감당하고 나머지는 믿음으로 하나님께 맡기면 됩니다. 그러면 주님이 염려를 가져가 버리기에 염려가 사라집니다.

재물은 우리가 살아가는데 필요합니다. 그런데 재물이 우리에게 가시의 역할을 하는 것은 욕심을 부리기 때문입니다. 족한 줄로 여겨야 하는데 욕심을 부리고 돈의 노예가 되기 때문이죠. 요 근래 루나와 테라 라는 가상화폐에 투자했다가 하루만에 99퍼센트 폭락하여 전 재산을 날리고 발을 동동 굴리는 투자자들이 있습니다. 재물에 대한 과도한 욕심이 우리로 하여금 결실을 하지 못하게 합니다. 신자는 열심히 일하고, 주신 재물로 검소하게 생활하고, 하나님이 쓰시고자 하면 기꺼이 내어주는 청지기적 자세로 살아야 합니다. 재물의 종이 아닌 건전하게 재물을 경멸할 수 있는 자로 살아가길 기도합니다.

향락은 세상 즐거움입니다. 향락에는 악한 향락과 건전한 향락이 있습니다. 악한 향락에는 마약, 술취함, 방탕, 음행등이 있고, 건전한 향락에는 스포츠, 게임, 오락, 여가활동등이 있습니다. 일정 부분 우리에게 건전한 즐거움이 필요하죠. 그러나 도를 넘으면 안됩니다. 절제하지 못하여서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못하게 된다든지,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에 방해가 된다면 이럴 때는 가시임을 알고 뽑아내야 하겠죠.

 

넷째로 좋은 땅과 같은 마음 밭입니다. 15절 말씀을 다 함께 읽겠습니다. “좋은 땅에 있다는 것은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지키어 인내로 결실하는 자니라착하고 좋은 마음은 어떤 마음입니까? 사도행전 17:11절에 나오는 베뢰아 사람들처럼 말씀을 받을 때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는 자세입니다. 말씀이 진리로 확인될 때 그 말씀을 따라 살고자 힘씁니다. 박해가 와도 그 말씀을 붙들고 순종하면서 인내합니다. 이런 과정을 거쳐 온전한 결실을 맺게 되는 것이죠. 결실은 하나님께서 해 주십니다. 사도바울은그런즉 심는 이나 물주는 이는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뿐이니라(고전3:7)’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라게 하시고 결실케 하십니다. 그렇다면 저자 누가가 좋은 밭으로 암시하는 사람은 누구일까요? 본문의 앞 부분에 나오는 열 두 제자들과 전도여행에 동행한 여인들, 그리고 뒤 부분에 예수님의 가족들이 찾아왔을 때 말씀을 듣고 행하고자 하는 그들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문학에서 자주 쓰는 샌드위치 기법이다) 수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 곁을 떠나갈 때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물어보죠. ‘너희도 가려느냐?‘ 이때 제자들이생명의 말씀이 주님께 있는데 어디로 가리이까하며 끝까지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여인들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릴 때도 함께 했고, 장사된 무덤에도 찾아갔고,

활하신 예수님을 목격했던 증인들입니다. 이들은 예수님 보시기에 좋은 마음 밭입니다. 이들은 넉넉히 영생에 들어갈 자들이며 하나님 나라의 상을 받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늘로 승천하신 이후 이들을 통해 이 땅에 하나님 나라가 확장될 것입니다. 예수님에게 이들이 소망입니다. 또한 종로UBF 청년들이 예수님의 소망입니다.

              

16-17절은 등불에 대해 이야기하십니다. 예수님이 말씀 이야기를 하시다가 갑자기 등불 이야기를 하시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이는 말씀이 등불과 같기 때문입니다. 시편 기자는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119:105)라고 했습니다. 등불은 어떤 역할을 하죠? 어두움속에 숨겨진 실체를 보여주죠. 또 갈 길을 보여줌으로 바른 길로 인도합니다. 말씀의 등불이 내 내면을 비추이면 어떻게 됩니까? 그동안 내가 좋은 밭인줄 알았는데~ 길가 밭이구나. 돌밭이구나.’ ‘~ 가시떨기가 있구나를 알게 합니다. 그리고 회개케 하여 생명의 말씀을 받아 결실할 수 있는 좋은 밭으로 예비케 하십니다. 또한 말씀은 진리의 길을 보여줍니다. 그동안 예수님은 자신이 그리스도이심을 감추셨습니다. 하지만비밀은 없다라는 말처럼 영원히 그 상태로 지속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과 승천하심으로 인류의 구원자가 바로 예수님이라는 것이 나타날 것입니다. 또한 그리스도가 어떻게 우리를 죄에서 구원할지 모든 선지자가 알고자 했던 것들이 다 나타나고 알려지게 될 것입니다.

18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너희가 어떻게 들을까 스스로 삼가라 누구든지 있는 자는 받겠고 없는 자는 그 있는 줄로 아는 것까지도 빼앗기리라 하시니라.” 앞에서 우리는 네 가지 밭을 살펴 보았습니다. 네 가지 밭의 공통점이 무엇입니까? 모두 다 말씀을 들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결실하는 것은 딱 한 가지 밭 밖에 없습니다. 결실의 유무는 씨에 달려 있지 않고 밭에 달려 있습니다. 말씀을 듣는 사람의 태도가 중요합니다. 주의깊게 들어야 합니다. 겸손히 들어야 합니다. 좋은 마음으로 들으면 더욱 풍성하게 받게 될 것이지만, 교만하여 귀 기울여 듣지 않으면 그 있는 줄로 아는 것까지 빼앗기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떻게 들을까 스스로 삼가야 합니다.

 

19-21절입니다. 가족들이 예수님을 방문했습니다. 이때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무엇이라 하십니까? “내 어머니와 내 동생들은 곧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이 사람들이라예수님은 육신의 가족을 사랑하셨습니다. 그런데도 이렇게 말씀하신 이유는 그들의 방문을 교육자료로 활용하여좋은 밭은 말씀을 듣고 행하는 자다는 것을 알려주고자 함입니다. 14:21에서 예수님은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사람을 예수님은 사랑하십니다. 진정한 가족으로 여기십니다.

 

결론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셨습니다. 어떠한 척박한 환경에서도 소망가운데 생명의 말씀을 전하셨습니다. 우리가 이러한 예수님의 구령의 열심과 소망을 배우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은 비유를 통해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는 사람의 자세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우리에게 가르쳐 주십니다. 좋은 마음 밭으로 말씀을 듣고 결실하여 우리 하나님께 영광을 올리길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