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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2024년 로마서 2강 하나님의 진노(로마서 1:18-32)2024-09-23 1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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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로마서 제 2강

하나님의 진노


말씀/ 로마서 1:18-32

요절/ 18절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하지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부터 나타나나니”


 여러분은 ‘폼페이의 최후의 날’에 대해 알고 계시나요? 폼페이는 인구 3만명이 살던 로마제국의 강남과 같은 곳이었습니다. 이곳은 해안가에 위치한 귀족들의 휴양지요 최첨단 문화생활을 즐기던 곳이었습니다. 로마제국의 영토가 가장 넓고 문명의 정점을 구가하던 시기인 A.D.79년에 (바울이 로마서를 쓴 후 대략 22년이 지난 후) 베수비오 화산이 폭발하면서 폼페이 도시 전체가 7~8미터 두께의 화산재로 덮혀 역사에서 사라졌습니다. 18세기 한 농부에 의해 우연히 발견된 이 지하도시는 그때부터 20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발굴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발굴을 통해서 많은 사실이 알려지고 있습니다. 그들은 현대식 목욕탕, 화장실, 상하수도 시설. 식당등 현대와 견주어 조금도 손색이 없는 호화로운 생활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많은 벽화들이 발견되었는데, 요즈음으로 치면 음란물들로 도배되어 있었습니다. 성적 타락이 얼마나 심했는지를 알려준다 하겠습니다. 로마제국의 타락상을 보여주는 한 단면입니다. 기록에 의하면 화산폭발로 수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는데, 거기에는 사도바울을 심문하고 그에게서 복음을 들었던 벨릭스총독과 그의 아내 유대 여자 드루실라도 포함되어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사람은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발굴 도중 이상한 점은 화산재 속에 빈공간들이 군데군데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이를 이상히 여긴 한 고고학자가 여기에다 석고를 부어 보았습니다. 그리고 주위에 있던 화산재를 거두어 내니 어떤 형상이 나타났는데 모두가 놀랐습니다. 사람이었습니다. 화산재에 파묻힌 시체가 세월이 지나면서 썩어 없어지고 그곳이 빈 공간으로 남았던 것입니다. 사진 속의 인간 석상은 이 빈 공간에 석고를 부어 만들어 낸 것입니다. 


 고통으로 몸부림치며 최후를 맞이한 이들의 모습을 본 관광객마다 소름이 돋는다고 했습니다.영국의 한 작가가 이것을 본 후 시를 지었습니다. “당신은 폐허를 아는가/ 나는 심장에 못이 박힌 표정의 사람들 곁에서/ 치를 떨었다/ 썩지 못하고 잿빛 화석이 되어/ 영원한 고통 속에 갇혀버린 자들의 절규/ 예전에도 지금처럼/ 내게는 본 것을 제대로 해석해 낼 만한/ 지혜가 없었다/ 다만 신이 그날의 대재앙을 기념하기 위해/ 지옥의 꽃을 말려/ 이 세계라는 화병에 꽂아둔 것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환락의 도시를 삽시간에 심판하신 하나님은 오늘날도 범죄한 인간들을 향하여 진노하고 계십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하나님께서 왜 진노하시는가? 이를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인가를 배우길 기도합니다. 


1. 하나님이 진노하시는 이유(18절)


 18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하지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부터 나타나나니” 우리는 지난주 말씀에서 ‘모든 믿는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에 대해 배웠습니다. 하나님은 혈통과 신분과 지위를 차별하지 않고 구원의 문을 활짝 열어 놓으셨습니다. 믿음으로 사는 자에게 하나님의 의가 나타납니다. 복음이 사람을 차별하지 않듯이 하나님의 진노도 사람을 차별하지 않고 나타납니다. 유대인이 선민이라고 해서 하나님이 그들의 죄를 눈감아 주지 않으십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를 보십시오. 하나님의 선민이었지만 때마다 하나님을 거역하고 끝없이 죄를 범하였습니다. 이때 하나님은 진노하사 그들을 이웃나라의 침략과 억압가운데 있게 하셨습니다. 급기야 이천 년전 팔레스타인에서 완전히 사라지게 하셨습니다. 그들은 나라 없는 백성으로 세계 가운데 흝어져 고단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렇다면 유대인들을 향해서도 이렇게 진노하신 하나님께서 이방인의 죄에 대해서 침묵하시겠습니까? 노아 홍수의 때를 생각해 보십시오. 소돔과 고모라의 심판을 생각해 보십시오. 구약성경의 많은 예언서들을 보세요. 거기에 어떤 내용이 담겨져 있습니까? 바로 죄가 있는 곳에 반드시 하나님의 진노가 임한다는 사실을 기록하고 있지 않습니까? 이것이 말해주는 바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들에게 임할 진노가 과거나 현재나 미래에 동일하게 나타난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 아니겠습니까? 사도 바울이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야만인에게도 복음을 전하고자 힘썼던 이유가 바로 이 하나님의 진노 때문입니다. 세례요한은 이것을 ‘임박한 진노’라고 했습니다(마3:7). 도끼가 나무뿌리에 놓인 것과 같은 급박하고 위험스럽고 두려운 것이라고 했습니다(마3:10). 하박국 선지자의 경험에 의하면 창자가 흔들리고, 입술이 떨리며, 자기 처소에서도 몸이 부들부들 떨리는 그러한 공포입니다. 소천하신 최사무엘 목자님께서 소천하시기 오래 전에 성경공부하실 때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전에 신장수술을 받을 때 죽을 수도 있겠구나” 생각했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때 두려움이 엄습했다고 하셨습니다. 이를 통해 “하나님의 진노의 날에 오직 붙들 것은 복음밖에 없다”고 자신의 깨달음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진노는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기 전에 겟세마네에서 ‘내가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다’고 말한 정도로 두려운 것입니다. 이를 우리가 알아야겠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진노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다시 18절을 보십시오. 불의로 진리를 막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진리’란 무엇일까요? 하나님께서 사람의 마음에 새겨 넣어 주신 ‘하나님께 대한 지식’이라 할 수 있습니다. ‘불의로 진리를 막는다’ 이 말은 의가 아닌 것, 즉 하나님께 속하지 않은 것으로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막고 꽉 누르고 있음을 말합니다. 구체적으로 모든 경건하지 않음과 불의입니다. 여기서 경건하지 않음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바르지 못한 태도이고, 불의는 사람과의 관계에서 바르지 못한 태도인데, 경건하지 않음은 불신앙, 불의는 도덕적인 죄를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실 때 인간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내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도록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과 연합하고, 다른 사람과도 연합하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인간이 범죄함으로 어떻게 되었습니까? 연합이 깨져버렸습니다. 아담과 하와의 경건하지 않음이 하나님과의 연합을 깼으며, 사람 사이의 연합도 깼습니다. 그 결과가 바로 ‘하나님의 진노’를 초래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로운 분노는 인간을 낙원에서 쫓아낼 수 밖에 없었습니다. 마치 성전에서 분노하신 예수님이 장사치들을 몰아낸 것과 같습니다. 남자는 이마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얻게 되었습니다. 여자는 기쁨이 되어야 할 출산가운데 고통을 맛보아야 했습니다. 무엇보다 모든 인간은 언젠가 흙으로 돌아가야만 되었습니다. 그것으로 끝이 아닙니다. 죽음 후에 심판을 받고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던져져 영원한 사망에 이르게 됩니다. 


2. 불경건의 죄(19-23절)


 19-23절은 인간의 ‘불경건의 죄’에 대해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람은 아무도 자신의 불신앙을 핑계할 수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첫째,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을 사람들 속에 보이셨기 때문입니다. 19절을 읽겠습니다. “이는 하나님을 알만한 것이 그들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그들에게 보이셨음이라” 하나님은 자신을 알 수 있는 지식을 사람에게 이미 주셨습니다. 이것을 ‘생득적 지식’이라고 합니다. 마치 막 태어난 아이가 누가 가르쳐 주지 않아도 본능적으로 어머니의 젖을 찾는 것과 같습니다. 수학자요 물리학자요 철학자인 파스칼은 “인간의 마음에는 절대 공간이 있는데, 그 무엇으로도 채워지지 않으며 오직 절대자이신 하나님으로만 채워진다”고 하였습니다. 사람들은 다급한 일이 생기면 그 입에서 ‘하나님’을 찾습니다. 


 둘째로, 하나님이 만드신 만물을 통해 하나님을 알도록 해 주셨습니다. 20절을 봅시다.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 여기 ‘모나리자’ 그림입니다. 누구 작품이죠? 레오나르도 다빈치입니다. 조각상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누구 작품이죠? 로뎅입니다. ‘만종’ 그림입니다. 누구 작품이죠? 밀레입니다. 우리는 그 작품을 보면 그 속에서 그것을 만든 사람의 능력과 개성을 볼 수 있습니다. 자! 여기 우주의 수많은 별들을 보십시오. 이것은 누구 작품입니까? 우연히 만들어진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작품입니다. 우리는 신비하고 아름다운 우주를 보고서 하나님을 발견합니다. 저는 원래 무신론자였습니다. 대학 1학년때 ‘현대물리’를 배우는데, 가르치시던 교수님은 우주와 여러 물리법칙을 설명할 때마다 ‘조물주가 이렇게 만들어서~’란 말을 밥 먹듯이 했습니다. 종교가 있는 것으로 알았는데 전혀 그렇지 않았습니다. 자신은 종교가 없지만 이 광대한 우주를 만들고 유지하고 법칙에 따라 운행케 하는 그 어떤 존재가 있을거다 믿는다고 하였습니다. 그 존재를 ‘조물주’라고 표현한다고 했습니다. 저는 그전까지만 해도 이 세상에 신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신이란 존재는 나약한 인간이 의지의 대상으로 만들어 낸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현대물리학을 배울수록 교수님 말에 점차 동의하게 되었습니다. 과학을 좋아해서 과학책을 많이 읽게 되면서 드는 생각이 이렇게 광대한 우주와 섬세한 운행과 물리 법칙들이 저절로 생길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만든 어떤 존재가 있을 것이란 결론에 저도 도달하게 되었고, 이것이 기초가 되어 하나님을 만났고 복음을 영접하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그의 작품인 우주와 자연 법칙, 피조세계를 통해 하나님을 알 수 있게 하셨습니다. 이것을 ‘자연계시’라고 합니다.


 본문에는 나오지 않지만 그 외에도 하나님을 알 수 있는 방법을 열어주셨습니다. 셋째로, 성경을 통해 하나님을 알게 하셨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누구이시며 어떤 일을 하시는가를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를 ‘특별 계시’라고 합니다. 넷째로,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을 알게 하셨습니다. 제자빌립이 예수님께 하나님을 보여 달라고 요청하였을 때 예수님은 ‘나를 본 것이 하나님을 본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본래 하나님을 본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요1:14)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을 알수 있습니다. 


 자, 인간이 본성과 지으신 만물을 통해 하나님을 알게 되었으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당연히 하나님을 경외하며 하나님을 섬겨야 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하였습니까? 21-23절을 보십시오. 타락하여 완악해진 마음으로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않았습니다. 그 결과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습니다. 스스로 지혜있다 하나 어리석게 되었습니다. 거룩하신 창조주 하나님의 영광을 일개 피조물에 불과한 사람과 버러지 형상의 우상으로 바꾸어 섬겼습니다. 그러니 그들이 하나님의 진노를 당한들 변명의 여지가 있겠습니까? 결코 하나님을 몰랐다고 핑계할 수 없습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지식인들의 진화론입니다. 진화론은 하나님의 형상인 인간을 동물의 형상으로 전락시켜 짐승처럼 사는 것이 당연한 것처럼 생각하도록 만든 사탄의 궤계입니다. 진화론을 믿는 사람일수록 자신이 똑똑하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지혜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버린 자들은 스스로 지혜있다 하나 실은 어리석은 자들입니다.


 진화론적 관점에서 종교에 대해 쓴 책에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인간은 본래 자연을 숭배했다. ‘토테미즘(Totemism, 동식물을 섬기는 종교)’, ‘애니미즘(Animism, 해, 달, 별, 강과 같은 자연계에 생명이 있다고 보고 섬기는 종교)’등 하등종교를 가졌는데, 인간의 지성이 발달하여서 하나님을 섬기게 되었다.” 이 내용이 맞나요? 성경은 반대로 말하고 있습니다. “인간은 본래 하나님을 섬겼는데, 하나님을 버리면서 수준 낮은 것들을 섬기게 되었다.” 최고의 지성을 자랑하는 요즘 하등종교가 사라지고 고등종교만 남았나요? 오히려 점쟁이와 같은 역술인이 ‘부흥’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하나님을 버리고 무엇을 섬깁니까? 돈과 쾌락과 인기입니다. 부귀영화를 누렸던 솔로몬이 마지막으로 남긴 말이 무엇입니까?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하나님 없이 사는 삶은 결국 허무합니다. 목적과 방향이 없이 표류하는 바다에 떠있는 부유물과 같습니다. 솔로몬은 젊은이들에게 이렇게 충고합니다. “너는 청년의 때 곧 곤고한 날이 이르기 전, 나는 아무 낙이 없다고 할 해가 가깝기 전에 너의 창조자를 기억하라”(전12:1)


3. 불의의 죄 (24-32절)


 24-32절은 인간의 불의의 죄에 대해 다루고 있습니다. 


 그 첫 번째가 무엇입니까? 성적인 타락입니다. 로마시대 거의 모든 우상숭배는 성적인 문란을 동반하였습니다. 풍요와 다산을 기원하는 종교의식의 일환으로 성전 창기들과 음행을 일삼았던 것입니다. 인간이 하고 싶은대로, 정욕대로 살게 두면 결과가 무엇입니까? 자기 자신을 더럽힐뿐더러 다른 사람의 몸까지 더럽힙니다. 멸망을 자초합니다. “음행을 피하라 사람이 범하는 죄마다 몸 밖에 있거니와 음행하는 자는 자기 몸에 죄를 범하느니라”(고전6:18)


 두 번째 부끄러운 죄는 하나님이 선물로 주신 성을 비정상적인 방법으로 사용하는 것입니다.  오늘 날 동성애를 어떻게 봅니까? 취향이나 성향으로 치부하려고 합니다. ‘동성애가 죄다’ 이렇게 말하면 법적 처벌을 하려는 움직임이 있습니다. 일부 국가에서는 그렇게 하죠. 그런데 성경은 분명히 동성애를 큰 죄악으로 명시해 놓았습니다. 우리는 동성애자조차 불쌍히 여기고 사랑해야 하겠지만 그 죄를 용납할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남녀 간의 성 관계를 허락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신성한 결혼 생활을 통해 하나님이 주신 교회의 신비를 이해할 수 있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방법입니다.(엡5:31-33) 그러나 동성애는 하나님이 세우신 질서를 깨뜨리는 하나님이 가장 미워하시는 죄입니다. 올바른 결혼관을 가져야 올바른 신앙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본문을 통해 불의를 행하는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진노의 방식이 무엇입니까? 그들을 더러운 욕심에 그냥 내버려 두는 것입니다.(24,26,28) “알아서 해라”, “네 맘대로 해라” 이는 하나님이 무능해서가 아니라 그들이 죄값을 받도록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징계를 통해 그들이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인간세계에 횡행하는 온갖 사회 범죄들입니다.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는 자들에게 하나님께서 상실한 마음에 내어버려 두심으로 나타나는 죄목들이 29-31절에 나열되어 있습니다. “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 비방하는 자요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자요 능욕하는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우매한 자요 배약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라” 모두 21가지입니다. 대표적인 것만 나열했을 뿐, 이보다 더 많을 것입니다. 게다가 32절을 보면, 죄를 짓는 자들이 “그들이 이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한다고 하나님께서 정하심을 알고도 자기들만 행할 뿐 아니라 또한 그런 일을 행하는 자들을 옳다”고 여깁니다. 


 하나님을 경배하지 않는 인간~ 온갖 더러운 정욕의 노예가 된 인간, 그들은 자유를 마음껏 누린다고 착각하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실은 죄의 노예로 살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떠나서 사는 것 자체가 이미 심판을 받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린 인간에게는 암흑만이 있을 뿐입니다. 어리석은 인간은 교육과 과학과 문화의 발전으로 지상낙원을 건설할 수 있을 것이라 믿어왔습니다. 또 그렇게 가르쳐왔습니다. 그러나 2천년 전에 제기된 인간의 죄악상 중에서 변화되거나 개선된 것이 있습니까? 하나도 없습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인간은 선해지기는커녕 더 악한 범죄와 교묘한 거짓, 사기에 빠져들고 있습니다. 이는 아담과 하와를 유혹하여 범죄케 한 사단 마귀가 그때나 지금이나 똑같이 그렇게 역사하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이 시대는 어떻습니까? 문화라는 옷을 입고 음란과 죄를 부축기는 일이 버젓이 대중매체를 통해 전파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초고속 인터넷 보급률 세계 1위요 IT강국의 자긍심이 있습니다. 더불어서 음란물 유통도 1위라고 합니다. 경찰청 조사 결과 음란물을 올리는 사람들이 누구인가 조사해 보았더니 10대와 20대가 가장 많았다고 합니다. 인터넷에 음란성 광고가 얼마나 많은지 눈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난처할 지경입니다. 마약이 우리 생활 깊숙이 파고들어 오고 있습니다. 또한 얼마나 사기와 거짓 뉴스가 난무합니까? 오래전에 가족을 이끌고 탈북하여 남한에 정착한 어떤 분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북한에 있을 때 남한에 거지들이 많다고 들었는데, 남한에 와서 보니 거지는 없고 사기꾼들이 어찌 이리 많은지 모르겠다”고 하였습니다. 오늘날 보이스피싱등 다른 사람을 사기로 유혹하여 그 덪에 걸려 경제적 손실을 입고 고통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렇다면 ‘인간에게 소망이 있는가?’하는 질문이 생깁니다. 다른 길이 없습니다. 오직 유일한 길, 복음을 믿어야 합니다. 성경이 인간의 실존을 적나라하게 폭로하는 이유는 복음을 믿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인간의 비참한 실존을 아는 사람만이 복음을 영접할 수 있습니다. 복음의 필요성은 하나님의 진노하심을 깨달을 때부터 시작이 됩니다. 인류의 소망도 복음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먼저 복음을 듣고 구원받은 성도는 시대적 사명감을 가지고 복음을 전해야 하겠습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진노 아래 놓인 세상 속에서 우리가 어떻게 거룩한 삶을 살며, 죄로부터 보호함을 받을 수 있는지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어떤 과학자가 실험을 하였습니다. 피라미와 같은 작은 물고기를 세 부류로 나누었습니다. 두려움이 많고 조심성 많은 물고기, 겁이 없고 태연한 물고기, 보통 물고기 이렇게 세부류로 나누어 각각 물고기에다 번호표를 붙여놓았습니다. 그리고 나서 풀장에 방류한 후 천적이 되는 대형 물고기를 집어넣었습니다. 며칠이 지난 뒤 작은 물고기의 생존율을 확인해 보았습니다. 어떻게 되었을까요? 겁이 많고 조심성 많은 물고기의 생존율은 45%였습니다. 보통 물고기는 15%였습니다. 그런데 겁이 없고 태연한 물고기는 한 마리도 살아남지 못했습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두려워할 자를 두려워하는 것이 지혜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학교에서 교수님을, 직장에서 상사를, 가정에서 부모님을, 교회에서 목자님을 두려워하지 않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자기에게 갑자기 진노가 임할 수 있습니다. 저는 중학교 3학년때 선생님께 무례한 말과 행동을 했다가 호되게 꾸지람을 받았습니다. 그때부터 윗사람을 대할 때 조심하게 되었습니다. 우리 청년들에게 조언합니다. 조심할 사람을 조심하고 두려워할 자를 두려워합시다. 그래야 본인에게 유익이 됩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십시오. 창세기의 요셉은 보디발의 아내로부터 성적인 유혹을 받았습니다. 이때 그는 어떻게 합니까?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득죄하리이까”(창39:9) 요셉은 하나님의 진노를 두려워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이 살 길입니다. 재앙을 피하는 길입니다. 요3:36절을 말합니다. “아들을 믿는 자에게는 영생이 있고 아들에게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 우리 모두 예수님을 믿고 주님께 순종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진노를 피하는 자가 될 뿐 아니라 세상 가운데서 소금과 빛의 역할을 감당하는 자로 살아가길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