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신년 1강 경건에 이르기를 연단하라 말씀 디모데전서 4:1-16 요절 디모데전서 4:7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를 버리고 경건에 이르도록 네 자신을 연단하라” 희망찬 새해가 밝았습니다! 지인으로부터 “해가 바뀐다고 새해가 되나요. 내가 바뀌어야 새해가 됩니다”라는 글을 받았습니다. 신년 메시지 통해서 내가 바뀔 희망을 볼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디모데 전(후)서는 디도서와 함께 목회서신으로 분류됩니다. 사도바울이 에베소교회를 책임지고 있는 젊은 디모데에게 쓴 편지입니다. 우리가 본문을 통해서 경건이 얼마나 유익한 가를 깨닫고 경건에 이르기를 연단하는 한 해가 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1,2절을 보십시오. “그러나 성령이 밝히 말씀하시기를 후일에 어떤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 미혹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따르리라 하셨으니 자기 양심이 화인을 맞아서 외식함으로 거짓말하는 자들이라” 사도 바울은 밀레도 고별메시지에서 자신이 교회를 떠난 후에 사나운 이리들이 에베소 교회에 들어와 어그러진 말을 할 것이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행 20:29,30) 그들의 가르침은 미혹하는 고단수 영적 사기꾼인 사탄이 배후에 역사하고 있기에 분별하기 어렵습니다. 그들의 가르침은 예수님을 믿는 것으로는 부족하다고 하여 예수님을 믿는 믿음에서 떠나게 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사탄에게 속한 종교적 확신 범들로 사기꾼들이 떨지 않고 사람을 속이듯 거짓 진리를 확신 있게 가르칩니다. 그러면 그들의 가르침이 구체적으로 무엇이었습니까? 3,4절을 보십시오. “혼인을 금하고 어떤 음식물은 먹지 말라고 할 터이나 음식물은 하나님이 지으신 바니 믿는 자들과 진리를 아는 자들이 감사함으로 받을 것이니라. 하나님께서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나니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라” 그들의 가르침은 금욕주의였습니다. 구체적으로 혼인과 육식을 금지했습니다. 이런 금욕주의는 BC 2세기부터 시작된 유대 에세네파의 가르침과 헬라의 영지주의가 혼합되어 생겨났습니다. 이들은 영혼은 선하고 물질과 육은 악하다는 생각으로 육신의 욕망을 제어함으로 고결한 삶을 살고자 했습니다. 그 결과 에베소 교회에는 혼인을 하지 않는 아저씨, 아줌마 같은 노총각, 노처녀들이 생겨났습니다. 또한 채식만 하여 비쩍 마른 사람들도 보였습니다. 유대율법주의자들은 레위기 11장에 기초해 어떤 음식은 먹지 말아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사도바울은 혼인이나 음식물이나 하나님이 지으신 것으로 근본적으로 선한 것으로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다고 말했습니다. 혼인은 하나님이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지으실 때 이미 계획하셨습니다. 남자와 여자의 신체적, 정신적 특징을 보더라도 하나님이 이미 혼인을 염두에 두셨습니다. 혼인을 할 때 형제자매들은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효과적으로 감당할 수 있으며 서로의 필요를 채워주며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또한 혼인을 하지 않으면 2세를 나을 수 없기 때문에 인류역사가 중단됩니다. 그러므로 혼인을 금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다만 하나님나라를 위해서 사도 바울처럼 스스로 고자 된 사람들이 있을 뿐입니다. (마 19:12, 고전 7:7) 음식물에 대한 규례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거룩에 대한 관념을 가르치기 위해서 주신 임시법적 성격이 있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9:10절을 보면 “개혁할 때까지 맡겨 둔 것”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오늘날도 어떤 이단은 “구약의 율법도 지키면 더 완벽하지 않겠습니까” 하면서 율법의 완성이신 예수님을 믿음으로 완전한 구원을 얻는 진리를 그럴듯한 말로 어그러지게 합니다. 그러나 이런 가르침을 받아들이게 되면 음식규례만 지키는 것이 아니라 구약의 모든 절기와 전통을 다 지켜야 합니다. 그러면 구원의 조건이 다시 율법준수와 인간의 의로 바뀌게 됩니다. 그러므로 이 가르침은 하나님의 의이신 예수님을 통해서 구원을 얻는 다는 복음진리를 무너뜨리는 사탄에게서 나온 가르침입니다. 5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니라” 혼인이나 음식이나 그것을 어떻게 대하느냐가 중요합니다. 자기쾌락과 만족만을 위해 무엇을 행하면 아무리 선한 것도 악한 것이 됩니다. 반면에 무엇이든지 말씀과 기도 가운데 감당하면 모든 것이 아름답고 거룩해집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말씀과 기도 가운데 감당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6절을 보십시오. “네가 이것으로 형제를 깨우치면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일꾼이 되어 믿음의 말씀과 네가 따르는 좋은 교훈으로 양육을 받으리라” 디모데가 제대로 된 복음진리로 형제를 깨우치면 그 자신이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일꾼이 되고 스스로가 성장합니다. 디모데가 형제들을 깨우치려면 어떻게 해야죠? 자신이 먼저 잘 배워야 합니다. 스스로 성경연구를 통해서 성경을 관통하는 복음진리의 완전성을 이해해야 합니다. 이런 것은 힘든 작업입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일꾼이 되고 자신도 훈련되고 성장하는 축복이 있습니다. 7절을 보십시오.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를 버리고 경건에 이르도록 자신을 연단하라” 디모데가 무엇을 버리고 무엇에 힘써야 하는 가를 말씀하는 내용입니다. 특히 ‘버리라’는 말씀은 관계의 완전한 단절을 의미합니다. 그러면 디모데가 끊어버려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입니다. ‘망령되고 허탄한 것’은 ‘영적으로 무가치하고 허무하고 거짓된 것을 말합니다. 신화는 ‘신들의 이야기’이지요. 그리스 로마신화를 예로 들 수 있는데 완전 허구이며 허무맹랑합니다. 그런데 좀 신비하고 재미는 있습니다. 당시에는 어떤 도시나 가문의 기원을 신들에게 찾는 신화와 족보가 유행하였습니다. 이것은 자신의 도시나 가문을 미화시키기 위함이었습니다. 영어성경에 보면 신화를 할머니들의 이야기라고 번역했습니다. 아마 할머니들이 이런 신화들을 젊은 사람들에게 이야기하였던 것 같습니다. 이런 신화들은 연극장 같은 데서 공연되었는데 그것이 바로 드라마의 원조입니다. 당시 신화에 빠져든 사람들을 이해하려면 한국드라마가 그것에 한번 빠지게 되면 시간가는 줄 모르고 그것에 잡힌다는 것을 통해서 잘 알 수 있습니다. 심지어 북한에 있는 주민들도 낮에는 “김정은 만세”를 부르지만 밤에는 이불속에서 한드 [한국드라마]를 본다고 합니다. 당시신화도 그렇고 한국드라마도 그렇고 영적인 유익은 별로 없습니다. 오히려 불륜과 쾌락과 폭력의 세계에 눈뜨고 그런 것에 은연중 오염됩니다. 무엇보다 목자들의 경우 하나님과 깊이 교제하지 못하게 하고 영혼을 구원하는 일에 전념하지 못하게 합니다. 특히 에베소 교회의 최고책임자인 디모데가 이런 신화와 족보에 빠져있으면 영혼의 감독자로서 일을 제대로 수행할 수가 없습니다. 사도바울은 디모데가 이런 망령되고 허탄한 것들을 버리고 무엇에 힘쓰라고 하였습니까? “경건에 이르도록 네 자신을 연단하라” 구약성경에서 대표적으로 경건한 사람은 누구입니까? 요셉입니다. 그는 미스 이집트출신의 보디발 여사가 유혹할 때 어떤 말로 그것을 물리쳤습니까? “이 집에는 나보다 큰 이가 없으며 주인이 아무것도 내게 금하지 아니하였어도 금한 것은 당신뿐이니 당신은 그의 아내임이라 그런즉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죄를 지으리이까”(창 39:9) 요셉은 여사의 유혹을 받을 때 보이지 않는 두 분을 의식했습니다. 첫째는 자신을 신뢰하여준 주인입니다. 둘째는 자신의 삶을 보고 계신 하나님이었습니다. 그가 하나님을 경외하였을 때 그는 강한 유혹을 이기고 그녀에게서 눈을 돌릴 수 있었습니다. 요셉이 경건한 삶을 살 수 있었던 비결은 그가 하나님을 공경하였기 때문입니다. 경건(敬虔)을 정의해 보겠습니다. 경건은 헬라어로는 ‘유세베이아’로 ‘두려워하는 마음’ ‘공경하는 마음’ ‘예배’ 란 뜻입니다. 한자의 뜻으로 보면 번역이 잘 되어 있는 데 ‘하나님을 공경하여 삼가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경건은 추상적인 가치가 아닙니다. 구체적으로 삶속에서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삶을 예배화입니다. 경건은 실제 삶속에 어떻게 나타납니까? 기도, 성경읽기, 전도, 구제와 심방(약 1:27), 그리스도를 닮은 성품 등입니다. 새벽기도에 나와서 기도하고 하루를 살아계신 하나님께 맡기는 것, 경건입니다. 올해는 닭의 해입니다. 새벽을 깨우는 새벽닭처럼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새벽기도는 못나와도 매일 양식 쓰는 시간을 갖는 것도 경건입니다. 눈이 피곤할 정도로 안목의 정욕에 따라 살지 않고 시간을 내어 하루에 정한 성경읽기 목표를 이루는 것도 경건입니다. 어떤 분은 새벽기도도 잘하고 양식도 잘 먹습니다. 그런데 참지 못하고 화를 잘 내서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합니다. 그런데 이분이 하나님을 두려워함으로 화를 내지 않고자 애쓰는 것도 경건에 이르고자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신전의식(神前意識)을 갖는다면 어떻게 분노를 폭발시키거나 험한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모세는 자신을 격동시키는 백성들을 참지 못하고 반석을 가리키기만 해도 되는데 지팡이로 두 번이나 쳤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지 못하였고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어떤 분은 분노를 조절하기 위해서 화가 나면 1-10까지 숫자를 센다고 합니다. 혹은 화를 내게 하는 사람을 떠나서 밖에서 바람을 쐬다 돌아온다고 합니다. 이기심을 극복하고 가난한 자를 돌아보고 복음을 전하는 것도 적극적인 경건입니다. “연단하라”에서 연단의 의미는 운동선수가 경기에 나가기위해 부단히 연습하는 것을 말합니다. 연단하라는 명령을 볼 때 경건은 연단을 통해서 도달할 수 있습니다. 경건의 완성은 하루아침에 어디서 뚝 떨어지지 않습니다. 왕도가 없습니다. 많은 연습을 통해서 경건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왜 경건에 이르기를 힘써야 합니까? 8절을 보십시오. “육체의 연단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 사람들은 조금이라도 유익하면 앞 다투어 그것을 하고자 합니다. 그런데 바울은 경건이 아주 유익하다고 했습니다. 경건이 얼마나 유익합니까? 경건은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습니다. 약속이 있다는 것은 경건에 하나님의 축복이 보장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금생에는 어떤 유익이 있습니까? 경건은 하나님을 의식하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이 어느 정도 유익합니까? 하나님이 동행할 때 얼마나 든든하고 담대합니까? 얼마나 즐겁습니까? 어떤 사람은 운전하면서 기도하는데 하나님과의 대화가 너무 즐거워 감격해서 눈물을 흘리거나 소리를 치기도 합니다. 경건을 몸에 익힌 사람은 하나님을 의식하니 부끄러운 일을 덜 하게 됩니다. 얼마 전 기사를 보니 한 학교선생님은 컴퓨터로 좋지 못한 동영상을 보다가 학생의 카메라에 찍혔습니다. 그 결과 교장 직에서 잘리게 되었습니다. 경건에 이르고자 연습하는 사람에게는 이런 일이 없습니다. 하나님을 의식하기에 부정부패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공직에서 잘릴 이유도 없습니다. 경건에 이르고자 하는 사람은 남보다 일찍 일어납니다. 기도하고 하루를 시작하니 얼마나 앞서가는 학생, 직장인으로 살겠습니까?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은 화도 잘 내지 않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친구관계가 좋겠습니까? 부부싸움 횟수도 줄어들고 아이들과도 좋은 관계성을 맺습니다. 경건한 삶을 살았던 조나단 에드워드가 동시대 알코올중독자였던 맥스듀크보다 훨씬 더 자손의 축복을 받은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에드워드의 영향력으로 그의 후손가운데는 성직자, 선교사, 신학교수가 300명, 대학교수가 120명, 의사가 60명, 저술가가 60명, 판사가 30명, 대학총장이 14명, 하원의원이 3명, 부통령 1명이 나왔습니다. 이상을 보면 “이 세상에서 제일 좋은 것이 경건이다” 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금생의 유익은 유익해도 죽음과 함께 사라집니다. 그러나 경건은 결정적으로 내세에 유익합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은 확신 있게 하나님나라에 들어갑니다. 모든 경건의 투쟁들은 하나님나라에서 영원한 상급으로 돌아옵니다. 영생과 영원한 상급! 이보다 더 좋은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사도바울은 경건의 연단과 유익을 육체의 그것과 비교했습니다. 사람들은 좀 더 가뿐하게 살기위해서, 다른 사람들에게 몸짱으로 인정받으려고 열심히 육체의 연습을 합니다. 닭가슴살과 약간의 야채와 과일만 먹으면서 열심히 뛰고 운동기구를 들어 올립니다. 그러나 경건에 이르기를 연습하는 사람은 사람들의 인정과 비교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인정을 얻습니다. 육체의 연습을 하면 몸이 조금 가뿐한 정도이지만 경건에 이르기를 연습하면, 비행기를 타고 나는 것처럼 홀가분하고 행복합니다. 삶의 클래스가 달라집니다. 건강정도가 아니라 영생을 얻습니다. 경건을 연습하지 않는 지도자는 목자생활이 너무나 힘듭니다. 딸린 식구들이 많을수록 힘에 부치고 피곤하여 죽을 지경이 됩니다. 그러나 경건을 연습한 지도자는 가뿐합니다. 비행기가 많은 사람을 싣고 나른다고 해서 힘듭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요셉은 경건을 연습하였을 때 어디가나 공동체를 이끄는 지도자역할을 했습니다. 그가 하나님과 동행하였을 때 대제국 이집트도 거뜬히 관리했습니다. 새해가 시작되었습니다. 새해는 모두가 결심을 합니다. 제일 많이 하는 결심은 금연, 다이어트와 같은 것들입니다. 또 운동을 하고자 결심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조나단 에드워드는 경건에 이르고자 하나님 앞에서 몇 가지 자신의 약속들을 정하였습니다. 우리도 새해를 맞이하여 하나님 앞에서 경건에 이르고자 하는 소원가운데 몇 가지의 결심을 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우리는 경건을 연단해도 잘 안 될 것이라는 생각이 있습니다. 그러나 김연아 선수는 피겨스케이팅의 불모지였던 대한민국에서 올림픽 금메달을 따는 쾌거를 이루었습니다. 동양선수는 절대로 피겨스케이팅만큼은 잘 할 수 없다는 생각이 있었는데 그 생각이 깨졌습니다. 박지성을 이어 몇몇 축구선수들은 꿈의 무대라고 하는 영국프리미어리그에서 뛰고 있습니다. 이들은 부단한 연습을 통해서 자신들이 생각할 수도 없었던 클래스에서 뛰고 있습니다. 우리가 젊은 시절에 경건에 이르고자 결단할 때 시간이 많이 흐르면 영적 꿈의 무대에서 뛰고 있는 자신을 볼 것입니다. 에녹이나 노아, 요셉과 같은 사람들이 될 수 있습니다. 경건은 그냥 주어지지 않습니다. 하루하루, 한해두해 연단을 통해서만 성취됩니다. 성령께서 새해 첫날 우리에게 경건에 이르고자 하는 문제의식과 소원과 구체적인 결단을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9절을 보십시오. “미쁘다 이 말이여 모든 사람들이 받을만하도다” 경건의 유익과 연단은 일부 지도자에게만 해당되는 말씀이 아닙니다. 모두에게 필요하고 가능한 말씀이기에 또한 모든 이가 그리하도록 도와야 합니다(11). 우리가 경건에 이르기를 힘쓸 수 있는 비결이 또 무엇입니까? 10절 말씀을 볼 때 살아계신 하나님께 소망을 둘 때입니다.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믿지 않는 사람은 형식적인 신앙생활 합니다. 그러나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경건의 사람이 되려면 율곡 이이나 이황처럼 의지적, 윤리적인 면보다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믿는 믿음이 더 중요합니다. 우리 모두가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음으로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경건에 이르기를 힘쓰기를 기도합니다. 12,13절을 보십시오. “누구든지 네 연소함을 업신여기지 못하게 하고 오직 말과 행실과 사랑과 믿음과 정절에 있어서 믿는 자에게 본이 되어 내가 이를 때까지 읽는 것과 권하는 것과 가르치는 것에 전념하라” 디모데는 당시 약 38세 정도였습니다. 에베소 교회에는 그보다 나이가 많은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나이가 적으면 어느 사회에서나 무시당하기 쉽습니다. 연소한 디모데가 에베소 교회의 지도자역할을 할 때 어려움이 많았을 것입니다. 바울은 사람들이 디모데를 업신여기게 내버려 두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업신여기지 못하게 하라고 하였습니다. 디모데가 목자로 인정받아야 하는 이유는 디모데의 자존심 때문이 아닙니다. 디모데의 리더십이 서지 않을 때 교회가 혼란에 빠지게 되고 교만과 무질서로 눈살 찌푸리게 하는 일들이 많이 발생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디모데가 어떻게 하면 에베소 교회에서 인정받을 수 있습니까? “나도 나이가 제법 많으니 이제는 인정해 주세요”고 읍소작전을 써야 합니까? 바울의 권면은 여러 가지 면에서 성도들에게 본이 되라는 것입니다. 본이 나이문제를 극복하게 합니다. 우선 말에서 본이 되어야 합니다. 말은 무게 있고 존중받을만한 언어생활을 해야 합니다. 말에 공적인 스피치를 포함한다면 성경공부인도나 메시지에서 인정을 받아야 합니다. 다음으로 말만 잘하면 안 됩니다. 행실이 무게 있고 본이 되어야 합니다. 기독교인에게 최고의 가치는 사랑입니다. 아가페적인 사랑에 있어서 그 성숙함을 인정받아야 합니다. 다음으로 믿음의 본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 공동체는 신앙공동체입니다. 윤리공동체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인격적이고 젠틀한 사람이라도 믿음이 없다면 그는 신앙공동체에서 인정받을 수 없고 지도할 자격이 없습니다. 정절은 하나님께 대한 충성과 함께 성적인 순결성을 의미합니다. 딤전 5:2절에는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늙은 여자에게는 어머니에게 하듯 하며 젊은 여자에게는 온전히 깨끗함으로 자매에게 하듯하라” 우리가 어머니나 여동생에게 일말의 정욕을 품지 않지 않습니다. 과거 개역한글성경에서는 “일절 깨끗함으로”(with absolute purity”(NIV)으로 되어 있었습니다. 젊은 목회자로서 이런 정절이 없을 때 교회는 성령충만대신에 정욕의 온상이 되기 쉽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신화를 버리고 자신이 갈 때까지 ‘읽는 것’ ‘권하는 것’ ‘가르치는 것’에 전념하라고 했습니다. 각각 공적 설교, 전도, 성경공부 에 힘쓰라는 것입니다. 14-16절을 보십시오. “네 속에 있는 은사 곧 장로의 회에서 안수 받을 때에 예언을 통하여 받은 것을 가볍게 여기지 말며 이 모든 일에 전심전력하여 너의 성숙함을 모든 사람에게 나타나게 하라 네가 네 자신과 가르침을 살펴 이 일을 계속하라 이것을 행함으로 네 자신과 듣는 자를 구원하리라” 디모데는 약점도 많습니다. 눈물이 많고 건강도 좋지 않습니다. 그러나 장점이 있습니다. 은사를 잘 사용하면 하나님의 일을 하는데 아주 유용한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가지지 못한 것을 탓하기보다는 가진 것을 잘 개발해야 합니다. 그는 은사를 개발하고 모두에게 인정받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 전심전력해야 합니다. 자신과 가르침을 살펴야 합니다. 삶뿐 아니라 가르침이 바른 가를 점검해야 합니다. 이것을 쉬지 않고 감당해야 합니다. 그럴 때 자신도 영적 침체에 빠지지 않고 다른 사람들을 구원할 수 있습니다. 결론입니다. 세상에 유익한 일이 많지만 경건이 가장 유익합니다. 경건에 이르는 것에 대해 소원과 문제의식을 가지고 경건에 이르는 구체적인 연단을 하는 한 해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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