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누가복음 제 6 강 자유를 주러 오신 예수님 말씀/ 누가복음 4:16-44 요절/ 누가복음 4:18,19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지난주에 우리는 시험받으신 예수님을 배웠습니다. 예수님은 사탄에게 시험을 받으실 때마다 어떻게 이기셨죠? 기록된 말씀으로 이기셨습니다. 시편 119:98절에 보면 "주의 계명이 항상 나와 함께 하므로 그것이 나로 원수보다 지혜롭게 하나이다"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를 영적 전쟁에서 원수보다 지혜롭게 합니다. 사탄의 시험이 많은 봄학기에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굳게 의지하여 모든 시험을 승리하기를 기도합니다. 영화 "빠삐용“, ”몬테크리스토 백작“, ”쇼생크 탈출“의 공통점이 무엇입니까? 이 영화의 주인공들은 모두 한번 들어가면 절대 나올 수 없다는 철통같은 감옥에서 탈출한 것입니다. 무엇이 그들을 그토록 집요하게 탈옥하도록 한 것일까요? 자유에 대한 갈망입니다. 자유를 얻을 수만 있다면 죽기를 불사한 것입니다. 인간에게 있어서 자유는 생명과 같습니다. 인간의 가치와 행복은 그의 자유로움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패트릭 헨리가 말한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라는 말처럼 인간은 누구나 자유를 갈망합니다. 그런데 참 자유는 양심의 자유이며 진리 안에서의 자유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진정한 자유를 주시려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이 예수님을 만나 참 자유를 누리길 기도합니다. 16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그 자라나신 곳 나사렛에 이르사 안식일에 늘 하시던 대로 회당에 들어가사 성경을 읽으려고 서시매." 예수님이 고향 나사렛을 떠나실 때는 평범한 목수였습니다. 그러나 다시 오신 때는 말씀을 전하는 하나님의 종으로 오셨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안식일마다 회당에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예배 순서는 먼저 신명기 6:4-9절의 쉐마('들으라') 본문을 암송하고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모세 오경을 읽고 선지서를 낭독했습니다. 회당에 참석한 누구든지 성경을 읽을 수 있었는데 이번에는 예수님이 일어나서 이사야서 두루마리 성경을 받으셨습니다. 두루마리 성경은 그 특성상 처음 부분부터 펴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사야서 뒷부분까지 계속하여 두루마리를 펴셨습니다. 드디어 의도하신 부분에서 멈추어 낭독하십니다. 그 말씀이 무엇입니까? 18,19절을 보십시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사 61:1,2; 58:6) 이 말씀은 약 700년 전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한 것으로 1차적으로는 이스라엘 백성이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올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는 장차 메시야가 오셔서 하실 일을 예언한 것입니다. 20절을 보십시오. “책을 덮어 그 맡은 자에게 주시고 앉으시니 회당에 있는 자들이 다 주목하여 보더라“ 예수님은 책을 덮어 그 맡은 자에게 주고 앉으셨습니다. 당시 랍비들은 앉아서 가르쳤습니다. 회당에 있는 사람들이 다 예수님을 주목하였습니다. 이때 예수님은 무슨 말씀을 하십니까? 21절을 보십시오. "이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되 이 글이 오늘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 하시니." 이 글이 오늘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 이는 실로 놀라운 말씀입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말한 메시야에 대한 예언이 오늘 성취되었다." "너희가 그토록 기다리던 메시야가 드디어 왔다." "내가 그다. 메시야 사역이 이제부터 시작된다"하는 말씀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지난 오랜 세월동안 메시야를 기다렸습니다. 그가 오셔서 백성들을 구원하시고 다윗 왕국과 같이 강대하고 위대한 나라를 건설할 것을 고대했습니다. 그런데 이사야의 말씀에 따르면 메시야는 구체적으로 무엇을 하십니까? 첫째,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십니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18a) 예수님은 요한에게 세례 받으실 때 하늘에서 성령이 비둘기같이 임하였습니다. 성령의 충만을 받으신 예수님은 먼저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십니다. 복음이 무엇입니까? 복된 소식, good news입니다. 이 복음의 내용은 영생복락의 하나님의 나라가 도래했다는 것입니다. 누구나 회개하고 믿으면 들어갈 수 있는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임했다는 것입니다. 이런 복음을 누구에게 전하러 오셨습니까? ‘가난한 자에게’. 여기서 가난한 자는 누구를 말할까요? 물질적으로 가난한 자? 영적으로 가난한 자? 여기서 가난한 자는 모든 사람을 말합니다. 어떤 사람은 자기가 부자라고 생각합니다. 적어도 가난하지는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복음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모두 가난한 자들입니다. 아무것도 가지지 못한 빈털터리입니다. 복음은 엄청난 가치가 있어서 세상의 그 어떤 부귀영화도 복음에 비하면 먼지와 같습니다. 복음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누구나 최악의 파산상태에 있는 것입니다. 흙수저는 부모가 가난한 자가 아닙니다. 복음을 소유하지 못한 자가 흙수저입니다. 예수님은 죄로 인해 철저히 파탄된 인생들에게 영생복락을 주는 하늘나라의 복음을 전하러 오셨습니다. 둘째,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나를 보내사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18b) 메시야 예수님은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주러 오셨습니다. 여기서 '포로된 자'는 1차적으로 바벨론에 잡혀간 이스라엘 백성을 가리킵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는 죄와 사망의 포로된 온 인류를 의미합니다. 고대에는 전쟁에 지면 포로로 끌려갔습니다. 그 자손들도 노예가 되어 적국 사람들을 섬겨야 했습니다. 포로는 스스로 자유인이 될 수 없습니다. 원수보다 더 큰 힘을 가진 자가 와서 자유롭게 해줄 때만이 자유롭게 될 수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정치적으로 매여 있지는 않지만 여러 가지 현실문제에 매여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현실에 대해 어느 분은 말하기를 “10대는 입시 공부에 매이고, 20대는 취업에, 30대는 직장에, 40대는 자녀교육에, 50대는 명퇴에, 60대는 소외감에 매여 있다”라고 했습니다. 제가 어릴 때에는 “일제 36년”이라는 말을 많이 썼습니다. 일제 식민지에서 해방된 지가 얼마 안 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일제의 압박 속에서 우리나라의 많은 사람들이 독립운동을 했습니다. 윤동주 같은 시인은 만주에서 시를 씀으로 자유를 그리워했고, 수많은 독립투사들이 상해에 모여 해방의 꿈을 꾸었습니다. 8.15광복절은 환희에 찬 날이었습니다. 광복절은 우리가 누구에게 지배받으며 사느냐에 따라 삶의 질이 달라질 수 있음을 말해줍니다. 현재 우리는 자유민주주의 국가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영적으로는 자유를 상실한 채 살아가고 있습니다. 마가복음 5장에 보면 거라사 지방에 한 귀신들린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군대 귀신에게 이끌리어 밤낮 무덤 사이에서나 산에서나 늘 소리 지르며 돌로 제 몸을 상하고 있었습니다. 그 자신은 거룩하고 자유로운 삶을 살고 싶었지만 귀신의 세력에 잡혀 전혀 힘을 쓸 수 없었습니다. 아무도 그를 도울 수 없었습니다. 그저 그 광인이 마을에 나타나지 않는 것을 다행으로 여겼습니다. 그는 점점 파멸로 치달았습니다. 예수님이 그곳에 심방 오시자 그는 예수님께 달려가 엎드려 절했습니다. 귀신은 그를 끝까지 놓아주지 않고자 하였지만 예수님의 명령 앞에 쫓겨 가고 그는 정상적인 청년으로 돌아왔습니다. 예수님은 그를 귀신의 포로에서 해방시키고 자유를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고 하셨습니다(요8:34).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초등학교에 다니는 한 아이가 집안에서 장난을 치다가 그만 화분을 넘어뜨려 금이 가고 말았습니다. 그 화분은 아버지가 가장 아끼는 화분이었습니다. 아버지께서 알게 되면 크게 야단을 맞을 것이 뻔했습니다. 그런데 이를 그 집에서 일하던 가정부가 지켜보았습니다. 그 가정부는 아이에게 나를 도와 청소를 같이 하면 아버지께 말하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그 아이는 할 수 없이 매일 매일 가정부 일을 도와야 했습니다. 그 가정의 귀한 아들이 가정부의 일꾼이 되고 말았습니다. 종이 되었습니다. 그 원인은 아버지의 화분을 깨드린 죄에 있었고, 그 죄를 가정부가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이 아이가 “언제까지 내가 가정부의 종처럼 살아갈 것인가? 차라리 아버지께 말씀을 드려서 매를 맞는 것이 났겠다”하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용기를 내어 아버지께 말씀을 드리며 용서를 빌었습니다. 그때 아버지는 예상 밖으로 아들의 머리를 쓰다듬으시며 자기 잘못을 정직하게 말한 아들을 칭찬해주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아이는 화분을 깨뜨린 자기의 잘못의 굴레에서 벗어나게 되었습니다. 더 이상 가정부의 종노릇할 필요가 없게 되었습니다. 아들이지만 잘못을 범했을 때 아들은 자유를 잃어버렸었습니다. 그러나 잘못을 아뢰며 용서를 구했을 때 아들의 자유는 다시 회복되었습니다. 이처럼 죄가 있는 곳에는 자유가 없습니다. 그러나 죄를 회개하고 용서함을 받는 사람에게는 자유가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각종 죄에 포로되어 헤어 나오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를 ‘중독’이라고도 하고 ‘질병’이라고도 하는데 죄의 종이 된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도박에 중독되어 있습니다. 한탕주의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어떤 도박이든지 처음에는 조금 따게 해 줍니다. 주식이든지 빠징고든지 다 그렇습니다. 미끼입니다. 탐심에 불을 붙입니다. ‘아, 잘 되는구나!’ 한몫을 보겠다고 달려들다가 전 재산을 하룻밤에 다 날려버립니다. 어떤 사람은 게임에 포로되어 있습니다. 학교 강의도 빼먹고 PC방으로 달려갑니다. 밤새도록 게임을 합니다. 어떤 사람은 음란물에 포로되어 있습니다. "아, 나는 정말 이러고 싶지 않아' 절규하면서도 눈이 빨개지도록 음란물을 탐닉합니다. 어떤 사람은 정욕에 중독이 되어 있습니다. 포로된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쇼핑에, 어떤 사람은 술에 포로되어 있습니다. 카페인과 니코틴에 포로된 사람도 있습니다. 요즘은 스마트폰에 중독이 되어 폰이 없으면 안절부절못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 외에도 장래에 대한 두려움, 불안함, 열등감, 우울증, 패배의식의 포로가 된 사람도 많습니다. 그 마음에 참 기쁨이 없습니다. 깊은 평화를 모릅니다. 자유함이 없습니다. 누가 이런 인생들을 자유롭게 해 줄 수 있을까요? 친구? 선생님? 의사? 상담사? 성령의 기름부음 받으신 예수님이 하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온갖 죄에 포로된 우리를 자유케 하기 위해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죄에서 자유케 하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피를 흘려 돌아가심으로 그 죄값을 치르십니다. 이제 누구든지 예수님께 나아와 회개하고 그를 믿으면 주님이 주시는 참 자유를 누리게 됩니다. 우리가 이 사실을 영접하고 사죄의 주님께 나아오기를 기도합니다. 주님이 주시는 참 자유를 누리기를 기도합니다. 셋째, 예수님은 눈먼 자가 다시 보게 하십니다.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18c) 구약 성경 어디에도 맹인이 눈을 떴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이사야 말씀에 기초하여 장차 메시야가 오시면 맹인의 눈을 뜨게 해 주실 것으로 믿었습니다. 그래서 누가복음 18장을 보면 맹인 거지 바디메오가 예수님께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18:39)하며 외쳤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눈을 뜨게 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본문을 보면 예수님은 회당에 있는 사람들에게 이 말씀을 하시면서 '오늘 너희에게' 응했다 하십니다. 이를 보면 예수님은 사람들의 영적인 눈을 뜨도록 하기 위해 오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누구든지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 무한히 깊고 넓은 영적인 세계를 볼 수 있습니다. 생명의 세계, 진리의 세계, 보이지 않는 근본 세계를 볼 수 있습니다. 넷째,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십니다.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18d) 눌린 자'란 어떤 사람들입니까? 억압당하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 당시에 이스라엘 백성은 로마 사람들에게 눌렸습니다. 오늘날도 약소민족들은 강대국들의 힘에 눌려 삽니다. 중국이 우리의 사드 배치에 대해 경제보복을 하는데 우리가 마땅히 취할 방법이 없습니다. 우리가 눌리고 있습니다. 역사를 보면 어느 시대나 이런 눌림은 늘 있어 왔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예수님이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기 위해 오셨다고 할 때는 정치적인 눌림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정치적 자유를 위해 로마제국이나 헤롯을 대항하여 싸우신 적이 없으십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영적인 눌림에서 자유케 하기 위해 오셨습니다. 우리 인간을 누르는 존재는 마귀입니다. 누가복음13장을 보면 18년 동안 앓으며 꼬부라져 허리를 조금도 펴지 못하는 한 여인이 있습니다. 그 여인이 그와 같이 된 것은 마귀에게 눌려서였습니다. 예수님은 그 여인으로 하여금 마귀의 눌림에서 벗어나 참 자유를 누리게 하셨습니다. 다섯째,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십니다. 19절을 보십시오.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여기서 주의 은혜의 해는 구약에 나오는 '희년'을 말합니다. 율법에 의하면 이스라엘에서는 매 50년마다 제사장들은 전국적으로 나팔을 불어 희년을 선포합니다. 그러면 모든 것이 'reset', ‘원위치’되는 겁니다. 팔렸던 땅은 아무 대가 없이 원래 주인에게 돌아갑니다. 빚은 탕감됩니다. 노예들은 해방됩니다(레25장). 희년은 회복의 해입니다. 예수님의 오심은 희년의 도래를 의미합니다. 죄로 말미암아 사탄의 노예가 된 상태에서 해방됩니다. 하나님 나라를 되찾습니다. 하나님의 자녀 됨의 권리를 회복하게 됩니다. 이상이 메시야 취임사에 나타난 예수님의 이 땅에서의 사명 선언문입니다. 예수님은 메시야로서 자신의 이 땅에 오신 목적을 분명히 선언하시고 그 사역을 시작합니다. 21절을 다시 한 번 보십시오. "이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되 이 글이 오늘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 하시니" 마침내 메시야의 시대가 도래했습니다. 구원의 날이 임했습니다.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구원의 날입니다(고후6:2).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은혜의 해(the year of the Lord's favor)가 시작되었습니다. 이제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모든 죄를 사함 받습니다. 죄의 사슬에서 벗어나며 참 자유를 누립니다. 영적인 눈을 떠서 하나님 나라를 보게 됩니다. 우리를 죄에서 자유롭게 하실 수 있는 분은 예수님밖에 없습니다. 이 예수님을 찬양합니다! 우리가 이 예수님의 말씀을 잘 배우고 순종함으로 늘 참 자유를 누리기를 기도합니다. 그러면 나사렛 사람들의 예수님에 대한 자세는 어떠합니까?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처음에는 다 감탄했습니다. 그러나 22b절을 보십시오. "이 사람이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놀라워하면서도 예수님에 대한 선입견 때문에 영접할 수가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그들의 생각을 아셨습니다. 그들은 '의사야 너 자신을 고치라'는 속담과 같이 자기 병부터 고치라고 주장하였습니다. 가버나움에서 행한 기적을 여기서도 해보라고 요구했습니다. 예수님은 고향 사람의 배척을 감당하십니다. 예수님은 이런 그들에게 선지자 엘리야와 엘리사도 고향에서 환영을 받지 못한 사실을 알려주십니다. 엘리야는 아합 왕에게 수년 동안 비가 내리지 않을 것이라는 메세지를 전했습니다. 그는 아합의 위협을 받고 그릿 시냇가로 도망갔습니다. 그 시냇물을 마시며 까마귀가 가져다주는 음식으로 연명했습니다. 이스라엘에서 아무도 엘리야를 도와주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그를 시돈 지방의 사렙다 과부에게 보내 섬김 받도록 하셨습니다. 사렙다 과부는 매우 가난하였지만 엘리야를 하나님의 종으로 영접하고 섬겼습니다. 한편 엘리사는 능력있는 하나님의 종이었지만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에게 나오지 않았습니다. 수리아(아람)의 군대장관 나아만만이 그에게 나왔습니다. 엘리사는 그의 믿음의 순종을 축복하여 나병을 치료해 주었습니다(왕하5장). 이와 같이 구약시대부터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기에게 보내어진 선지자를 박대했습니다. 이제 메시야로 오신 예수님도 박대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이 말을 들은 고향 사람들의 반응이 어떠했습니까? 28절을 보십시오. “회당에 있는 자들이 이것을 듣고 다 크게 화가 나서“ 그들은 예수님이 자기들을 이방인 과부나 나병환자 보다 못하다는 말씀에 심히 자존심이 상했습니다. 이성을 잃고 흥분하여 예수님을 동네 밖으로 끌고 나가 낭떠러지에 밀쳐 떨어뜨리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의연하게 저희 가운데로 지나 가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들과 타협하지 않으시고 그곳을 떠나셨습니다. 31,32절을 보십시오. "갈릴리의 가버나움 동네에 내려오사 안식일에 가르치시매 그들이 그 가르치심에 놀라니 이는 그 말씀이 권위가 있음이러라." 예수님은 가버나움에 오셔서 가르치시기 시작하셨습니다. 당시 랍비들의 가르침은 이론적이고 틀에 박힌 율법 논쟁에 그쳤습니다. 그러나 성령이 충만하신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을 단순하고도 명쾌히 선포하셨습니다. 이런 예수님의 가르침은 신적인 권위가 있었습니다. 그날 마침 회당에는 한 더러운 귀신들린 사람이 와서 앉아 있었습니다. 그가 회당에 들어와 조용히 앉아 있는 것을 볼 때 그의 외모나 행동은 전혀 이상한 것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아마 그는 안식일에는 늘 회당에 와서 한쪽 구석에서 졸다가 간 것 같습니다. 그는 오늘도 눈을 감고 졸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이 자신의 내면을 강력하게 찔렀습니다. 잠이 다 달아났습니다. 그 안에 있던 더러운 귀신이 말씀 권세 앞에 견디지 못하였습니다. 안절부절 못하였습니다. 귀신은 두려움에 떨며 소리쳤습니다. 34절을 보십시오. "아 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 나는 당신이 누구인 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 귀신은 영적인 존재이므로 예수님의 정체를 귀신같이 알아맞힙니다. 예수님은 그 귀신을 꾸짖으십니다. "잠잠하고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이에 귀신이 그 사람을 넘어뜨리고 나왔습니다. 그 당시 누구도 귀신들린 이 사람을 도울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악한 영을 제압하십니다. 그 사람에게서 더러운 귀신을 쫒아내고 그를 자유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회당에서 귀신 들린 자를 고치신 후 무엇을 하셨습니까? 38,39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일어나 회당에서 나가사 시몬의 집에 들어가시니 시몬의 장모가 중한 열병을 앓고 있는지라 사람들이 그를 위하여 예수께 구하니 예수께서 가까이 서서 열병을 꾸짖으신대 병이 떠나고 여자가 곧 일어나 그들에게 수종드니라." 예수님은 시몬의 집을 심방하셨습니다. 집에 가 보니 그의 장모가 중한 열병으로 앓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장모를 괴롭히는 열병을 꾸짖으셨습니다. 그러자 열병이 떠나갔습니다. 악한 영뿐만 아니라 바이러스, 병균도 떠나게 해 주시는 능력이 예수님께 있습니다. 본래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덧입은 거룩하고 건강한 자아를 가진 자들입니다. 그런데 죄 때문에 영적으로도 병들고, 육신의 병도 들어 연약하게 되었습니다. 메시야 예수님은 우리를 병들게 하고 연약하게 하는 요소들을 책망하여 쫓아내십니다. 건강한 육체와 영혼의 소유자로 회복시켜 주십니다. 40,41절을 보십시오. “해 질 무렵에 사람들이 온갖 병자들을 데리고 나아오매 예수께서 일일이 그 위에 손을 얹으사 고치시니 여러 사람에게서 귀신들이 나가며 소리 질러 이르되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 예수께서 꾸짖으사 그들이 말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니 이는 자기를 그리스도인 줄 앎이러라” 예수님은 각색 병자들을 조금도 부담스러워하지 않으셨습니다. 다 영접하여 주시고 일일이 손을 얹으셔서 치료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병든 자들의 아픔에 동참하시고 섬세하게 치료해 주시는 선한 목자가 되셨습니다. 42절을 보십시오. "날이 밝으매 예수께서 나오사 한적한 곳에 가시니 무리가 찾다가 만나서 자기들에게서 떠나시지 못하게 만류하려 하매." 예수님은 밤늦도록 사람들을 섬기셨습니다. 그러고서도 새벽 미명에 일어나셨습니다. 한적한 곳으로 가서 기도하셨습니다. 하나님과 깊은 영적인 교제를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바쁠수록 더욱 기도를 간절히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때 무리가 찾아왔습니다. 이들은 예수님의 사랑을 많이 받고 병고침을 받은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자기들로부터 떠나지 마시도록 요청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대답하십니까? 43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다른 동네들에서도 하나님의 나라 복음을 전하여야 하리니 나는 이 일을 위해 보내심을 받았노라 하시고." 예수님은 한 곳에 계시면서 존경과 대접받기 원치 않으셨습니다. 다른 곳에 가서도 복음을 전하고자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구원역사가 갈릴리 가버나움에 국한되지 않고 온 세상 만민에게 이르기를 원하셨습니다. 온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듣고 구원을 받기 원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복음이 전파되지 않을 때 본문에 나오는 사람들처럼 귀신에 시달리고 병으로 고통하고, 영적 무지 가운데서 방황할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날에도 많은 사람이 죄와 사탄의 종이 되어 있습니다. 먼저 은혜를 받은 우리가 담대하게 나아가 복음을 전해야겠습니다. 일대일 영적 전투를 통해 악한 영의 포로가 되어있는 캠퍼스 양떼들을 복음으로 구원하는 이 일에 헌신하기를 기도합니다. 결론적으로, 예수님은 죄에 포로된 자들에게 자유를, 영적으로 눈먼 자들에게 다시 보게 함을, 눌린 자들에게 자유를 주기 위해 오신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은 우리로 하여금 과거 죄의 속박으로부터 자유함을 주고자 오셨습니다. 우리 모두가 지난날의 모든 허물과 실수와 죄악의 사함을 받고 내면에 샘솟는 기쁨과, 강같은 평화가 가득한 참자유를 누리기를 기도합니다. 캠퍼스 양떼들에게 예수님이 주시는 참 자유를 전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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