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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2019년 창세기 3강 `에덴동산을 창설하신 하나님`2019-03-25 0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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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세기 3강 


에덴동산을 창설하신 하나님


말씀 창세기 2:4-25
요절 창세기 2:8 “여호와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그 지으신 사람을 거기 두시니라”


아리스토텔레스는 우리 인간은 모두 행복을 추구하는 존재라고 했습니다. 세상에 수많은 행복론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 창세기 2장은 ‘성경이 말하는 인간 행복론’입니다. 에덴동산은 하나님이 인간을 사랑하사 만드신 완전한 행복의 동산이었습니다. 우리가 행복의 동산 에덴에서 행복의 여러 조건들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이가운데 행복의 비결을 잘 배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무엇보다 우리를 완전한 사랑으로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만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4a절을 보십시오. 이것이 천지가 창조될 때에 하늘과 땅의 내력이니 1:1-2:3절까지는 천지가 창조될 때에 주로 하늘과 땅이 만들어진 내력을 기록했습니다. 4b-7까지는 하늘과 땅의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는 인간이 어떻게 만들어졌는 가 그 내력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1장에서 이미 인간창조가 언급되었는데 이곳에서 다시 인간창조 각론을 다루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만큼 인간이 하나님이 지으신 세계의 주인공이요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으로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4b-6절을 보십시오. 여호와 하나님이 땅과 하늘을 만드시던 날에 여호와 하나님이 땅에 비를 내리지 아니하셨고 땅을 갈 사람도 없었으므로 들에는 초목이 아직 없었고 밭에는 채소가 나지 아니하였으며 안개만 땅에서 올라와 온 지면을 적셨더라. 이 모습은 하늘과 땅의 주인공인 인간이 등장하기 전의 세상의 모습을 잘 보여줍니다. 여기서 초목과 채소는 셋째 날 만들어진 초목과 채소가 아니라 인간이 경작하면서 생긴 것들입니다.

2장부터 하나님의 이름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1장에 31번의 ‘하나님’이란 말이 나오는 데 이것은 하나님의 이름이 아니라 하나님의 ‘지위와 신분’을 말한 것입니다. 하나님이란 단어 ‘엘로힘’은 권능자, 전능자입니다. 반면에 2장에 등장한 ‘여호와’는 하나님의 이름입니다. 그 뜻은 ‘자존자’이지만 의미적으로는 세상을 창조하신 후 역사와 인생에 초월하여 계시지 않고 인간의 역사에 오셔 자신을 나타내신 분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우리와 관계를 맺고 계약을 체결하시며 우리를 도우시는 사랑과 구원의 하나님이십니다. 성경에 ‘여호와’란 이름은 6823번 나오는 데, 하나님은 하늘의 별처럼 멀리 계신 분이 아니라, 역사속에 오시고, 나를 불쌍히 여기사 나의 삶에 오사 나를 구원해주시고 나와 동행하시고 나를 키워주시고 나를 이끌고 계신 분이십니다.

7절을 보십시오.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셨습니다. 하나님은 땅의 흙을 이겨서 정교하게 빚으셨습니다. 갈비뼈 속에 오장육부를 만드시고 서울에서 부산을 133번 왕복할 수 있는 모세혈관의 길을 만드셨습니다. 몸을 덮는 500만개의 땀구멍이 있는 피부를 섬세하게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먼지가 들어오면 스스로 깜박이는 눈을 만드셨습니다. 하나님의 솜씨는 참으로 놀랍습니다. 그래도 인간은 흙덩이에 불과했습니다. 그런 인간이 어떻게 살아 움직이는 존재가 되었습니까? 하나님이 그 코에 생기를 불어넣으심으로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흙으로 지으시고 그 코에 생기를 불어넣으셔 생령이 된 인간은 어떤 존재입니까?
첫째로 인간은 흙으로 지음받은 존재입니다.
인간을 강한 다이아몬드나 금속으로 만들지 않고 흙으로 만드셨습니다. 흙은 보잘것없습니다. 잘 부서집니다. 때문에 인간은 부러지기도 하고 감기만 걸려도 1주일은 고생해야 합니다. 인간에게는 신의 능력과 형상이 부분적으로 내재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자칫 마음이 높아져 자신의 정체성과 분수를 넘어 교만을 떨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가 보잘 것 없는 존재임을 기억하도록 흙으로 만드셨습니다. 

둘째로 인간생명의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그 코에 생기를 불어 넣으시자 흙덩이에 불과한 사람이 살아있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초당 2만개의 적혈구가 골수에서 생성되고 평생 28억번 뛰는 심장이 콩딱콩딱 뛰기 시작하며 피를 돌게 하였습니다. 1000 조개의 뇌신경스냅스가 작동하며 행동들을 결정하기 시작했습니다. 생명이 있는 사람과 생명이 없는 사람은 똑같은 인체를 가지고 있는데 하늘과 땅의 차이입니다. 그러므로 생명이란 참으로 신비하고 소중합니다. 이 생명은 하나님으로부터 왔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주셨다가 하나님이 거두어 가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경외하며 그 생명을 하나님이 기뻐하신 뜻을 위해 사용해야 하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인간은 ‘살아있는 영적 존재’입니다.
다른 피조물들은 그냥 말씀으로 지으셨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하나님의 숨결을 불어넣자 그 코를 통해 영원 불멸의 영이 들어가 인간이 생령(生靈) 곧 살아있는 영적 존재가 되었습니다. 인간은 속에 불멸의 영혼을 소유하고 있기에 영원하신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과 교제할 때 참 만족을 누립니다. 노아시대에는 인간이 영성을 추구하지 않고 육신의 것만 찾자 인간은 고깃덩어리로 전락하였고 하나님의 성령이 인간을 떠났습니다. 인간존재의 핵심은 영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영혼을 만족시키는 영적 활동을 해야 합니다. 기도를 통해 하나님과 교제해야 합니다. 영혼의 양식이 되는 하나님의 말씀을 규칙적으로 섭취해야 합니다. 우리가 고깃덩이 가 아니라 살아있는 영적 존재의 삶을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은 자신이 창조한 인간이 어디서 그 삶을 시작하게 하셨습니까? 8절을 보십시오. 여호와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그 지으신 사람을 거기 두시니라 하나님은 인간이 광막한 광야나 사막에서 그 인생을 시작하도록 하지 않으셨습니다.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셨습니다. 에덴이란 지역은 언급된 강들의 위치를 볼 때 현재의 이라크 정도로 추정됩니다. ‘동산’이란 단어는 ‘울타리를 치다’는 말에서 나왔습니다. 그러므로 에덴동산은 하나님이 직접 울타리를 박아서 만든 곳은 아니겠지만 다른 곳과는 구별되는 아름답고 환상적인 곳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사랑하는 자녀가 결혼을 할 때 최고급 자이 아파트를 마련해주시고 거기 살게 하시는 부모님과 같았습니다.
 
에덴이란 ‘넘치는 기쁨’이란 뜻입니다. 그러므로 에덴은 기쁨의 동산이요 행복의 동산입니다. 이 이름을 보고 또 하나님이 갖추어준 에덴동산의 여러 가지 행복의 조건들을 보며 하나님이 얼마나 인간이 기쁘고 행복하게 살기를 원하셨는 지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간을 지극히 사랑하사 우리 인간이 행복하게 살 수 있는 모든 것을 예비해 주셨습니다. 그 형상대로 지으신 인간을 지극히 사랑하사 완전한 행복의 동산을 만들어주신 하나님께 감사찬양드립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예비하신 에덴동산은 어떤 곳이었습니까? 9절을 보십시오. 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 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

첫째, 먹는 문제가 해결된 곳입니다.
에덴동산은 보기에 이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들이 있었습니다. 생존이 보장될 때 사람은 행복합니다. 요새 공무원이나 교사가 인기있는 직업인 이유가 무엇입니까? 안정되게 먹는 문제가 해결되기 때문입니다. 먹는 것도 그냥 입에 구겨넣듯이 먹는 것이 아니라 먹기에 좋은 음식을 먹어야 합니다. 최소한 사진 한번 찍고 먹을 만한 음식들을 먹으면 더 행복할 것입니다. 먹는 것과 함께 보는 것도 행복의 중요한 부분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조금만 여유가 있으면 여행을 떠나고자 하고 해외여행 인파는 어려운 가운데도 늘고 있습니다. 해외에 가지 못해도 국내에도 아름다운 산과 공원이 많습니다. 이런 곳을 보고 거닐 때 행복합니다.

둘째, 영생이 보장된 곳입니다.
동산중앙에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가 있었습니다. 이 두 나무들은 동산가운데 있기 때문에 인간의 행복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그중 생명나무는 3:22절을 보면 그 열매를 따먹으면 영생할 수 있습니다. 사람이 아무리 잘 먹고 잘 살아도 죽음이 다가오므로 행복할 수 없습니다. 대기업 총수들은 좋은 것을 많이 먹었을 텐데 의외로 오래살지 못했습니다. 대부분 70세 정도에 죽습니다. 정주영 회장은 아침부터 일찍 일어나 의욕적으로 일하였고, 또 오래 살고자 어디서 산삼이 발견되었다고 하면 직접 그곳에 가서 그 자리에서 돈을 지불하고 그걸 먹곤 했습니다. 그래서 86세까지 비교적 오래 살았습니다. 사람이 언젠가 죽는다고 생각할 때 결코 행복할 수 없습니다. 인간에겐 죽음의 그림자가 항상 드리워져있으므로 웃음끝에도 슬픔이 있는 웃픈 삶을 삽니다. 그러므로 사람에게는 영생이 보장되어야 행복합니다. 오늘날 크리스천들은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님을 믿으므로 영생을 이미 소유하였습니다. 생명나무는 예수님입니다. 영생을 허락하신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립니다.

셋째, 영적질서와 삶의 좌표가 있는 곳입니다.
동산중앙에 있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는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나는 누구인가? 나의 한계는 무엇인가? 나는 어떤 기준과 삶의 방향을 가지고 살아야 하는 가를 가르쳐주는 나무입니다. 아무리 경제문제가 해결되고, 영생불사할지라도 자신이 누구인지도 모르는 가운데 산다면 그는 영원히 방황하는 우주미아로서 그 삶에 결코 행복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정체성을 확립해주고 삶의 기준과 좌표를 제시하는 선악과나무는 인간의 행복에 필수적으로 있어야 할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오늘날 이 선악과는 바로 성경말씀입니다.  

10-14절에는 에덴에서 발원하여 흘러가는 4대강의 이름이 나옵니다. 그 강의 이름은 한강, 금강, 낙동강, 영산강이 아니고요. 비손, 기혼, 힛데겔, 유브라데입니다. 어디가나 강이 흘러야  마음도 흘러가고 심령이 정화됩니다. 대한민국에는 사대강이 흐르고 특별히 우리는 가장 아름답고 풍부한 한강이 있는 도시 서울에서 사니 참으로 행복합니다. 미세먼지만 없으면 좋겠습니다. 에덴동산은 먹는 문제가 없고, 죽음문제도 없고, 삶의 정체성과 좌표가 분명하고, 미세먼지도 없는 완벽한 행복의 동산이었습니다.

15절을 보십시오.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동산에 두어 그것을 경작하며 지키게 하시고 하나님은 인간이 에덴동산에서 놀고 먹도록 하실 수 있지만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곳을 경작하도록 하셨습니다. 그래서 에덴 동산을 확장해 나가며 전세계를 에덴처럼 만들어 가는 것이 아담이 해야 할 일이었습니다. 이처럼 일이 있어야 사람은 행복합니다. 건물주나 건물주의 아들이라도 일이 없으면 심령이 부패하고 무의미하여 참된 보람과 행복이 없습니다. 요새 연예인들이나 정치인들의 성스캔들을 보면 사람이 돈과 권력은 있고 할 일은 없을 때 어떻게 까지 비참하게 되는 지 알 수 있었습니다. 또한 아담에게는 에덴을 지켜야 할 미션이 주어졌습니다. 이것은 어떤 면에서 그들의 행복을 시기한 사탄이 뱀처럼 그 동산에 침입하고 그래서 동산을 잃을 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16,17절을 보십시오.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이르시되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하나님은 인간에게 무한대의 자유를 주셨습니다. 동산에 있는 각종 나무의 열매를 자유롭게 먹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만은 먹을 순 있지만 먹어선 절대 안된다고 하셨습니다. 만약 그들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으면 그들은 반드시 죽습니다. 죽는 다는 것은 최고로 잘못되는 것이므로 절대적인 명령으로 금지하셨습니다. 우리도 만약 누군가가 그 행위의 결과로 죽는 다면 강력하게 경고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는 강력한 사랑의 경고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로봇으로 만들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자유의지를 가진 무한대의 자유의 소유자로 지으셨습니다. 그래서 어떤 것도 할 수 있고 심지어 인간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도 먹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절대로 해서는 안되는 것이 선악과를 따먹는 것입니다. 그러면 선악과 나무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선악을 알게 한다’는 것은 ‘분별한다’, ‘판단한다’는 뜻입니다. 인간이 선악과를 따먹지 않는 것은 선악의 판단을 하나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창조주요 전능자로서 선악의 기준이시며 선악을 결정하십니다. 반면, 인간이 선악과를 따먹는 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선악을 인간이 스스로 결정하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즉 인간이 이 우주의 기준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리에 오르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지워버리거나 하나님과 대등한 존재가 되어 사는 것입니다. 오늘날 모든 불신자들은 선악과를 따먹은 사람들입니다. 포스트모더니즘시대는 각 사람이 하나님입니다. 그들에게는 자신이 옳다고 하는 것이 진리입니다.   

철학자 칸트나 헤겔 등은 사람이 선악과를 따먹은 것이 인류역사상 가장 잘한 일이라고 말했습니다. 즉 인간이 우주의 주체로 나서게 되었고 이성을 발전시키게 되었다고 말했습니다. 과연 그럴까요? 니체는 “신은 죽었다”라고 하면서 뛰어난 인간 곧 초인(超人)이 우주의 문제를 판단하고 결정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말하자면 그는 스스로 하나님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42세의 나이에 정신병원에 입원하였고 56세에 정신병원에서 죽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능력과 형상을 일부 가지고 있기에 때로 자신에 대해서 자부심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부심이 지나쳐 분수를 넘으면 안됩니다. 인간이 하나님과 그 형상을 공유하고 있지만 넘을 수 없는 한계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인정하고 하나님을 선악의 기준으로 삼아야 합니다. 그가 선이라고 하는 것을 선으로, 그가 악이라고 하는 것을 악으로 받아야 들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해야 합니다. 그의 권위를 깊이 인정하고 그의 거룩한 명령을 존중해야 합니다. 이것을 영적 질서를 존중한다고 말합니다. 즉 인간은 영적 질서를 지킬 때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영적 질서를 지키며 산다고 해서 우리의 자유가 제한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인정하는 영적 질서 하에서도 우리가 누릴 자유는 무궁무진합니다. 물고기더러 물 안에서 자유를, 새보고 대기권에서 자유를 누리라고 하는 것은 결코 제한이 아닙니다. 그것은 그들의 정체성과 구조에 맞는 진리이며 진정한 자유를 주는 행복의 지침입니다.  

행복의 가장 중요한 비결은 무엇입니까? 아무리 에덴동산같은 데 살아도 선악과를 먹어버리면 에덴동산은 곧 혼돈과 공허와 무의미와 흑암의 동산으로 바뀝니다. 진정한 헬조선은 다른 게 아니라 선악과를 먹은 삶입니다. 오늘날 선악과는 바로 성경말씀입니다. 우리가 성경말씀을 존중하고 순종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우리가 매일 일용할 한 말씀을 내 마음의 동산에 세우고 순종함으로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과 바른 관계성을 맺고 진리안에서 참 자유를 누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완전하신 하나님이 보실 때 행복의 동산에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었습니다. 18-25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은 아담이 혼자 있는 것을 좋지 않게 보셨습니다. 그리고 아담을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짓겠다고 하셨습니다(18). 그 때 아담은 열심히 하나님이 주신 피조물들을 관리하는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19). “너는 코가 기니 코끼리, 너는 목이 기니 기린” “너는 항상 딱딱거리고 있으니 딱따구리” 구체적으로 피조물들의 이름을 짓고 있었습니다. 100만종이 넘으니 혼자 하기 힘들고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했습니다.

하나님은 아담이 일을 하는데 돕는 배필(suitable helper)을 주고자 하셨습니다(20). 배필이란 짝이란 뜻입니다. 아담에게 딱 맞는 짝이 지구 반대편에 있다면 하나님은 그 사람을 아시고 데려오셨을 것인데 배필후보 자체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없는 배필을 만들어주시고자 하셨습니다. 눈앞에 배필이 없다고 너무 암담해 하지 마십시오. 우리를 지극히 사랑하시는 하나님이 없으면 만들어 주십니다. 21,22절을 보면 하나님은 아담을 전신마취시키시고 그의 갈빗대로 여자를 만들어 아담에게 이끌어 오셨습니다. 하나님이 아담의 배필에 문제의식을 가지고 친히 만드시고 아담앞으로 데려오셨습니다. 이것이 결혼에 있어서 하나님의 주도성입니다. 아담이 자신의 결혼에서 한 일은 믿음으로 잠을 잔 것뿐입니다. 우리가 발품을 파는 것보다 하나님이 움직이시는 것이 훨씬 더 정확하고 효과적입니다. 우리에게 나를 나보다 더 잘아시는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허락해주시기 기도합니다.

자신의 배필이 등장하자 아담이 뭐라 하였습니까? “이는 내 뼈중의 뼈요 살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부르리라”(23) 이 말은 “내 몸으로 정말 소중하다!” “최고다!”는 뜻입니다. 이 말을 통해 왜 하나님이 남자와 여자를 다른 동물처럼 동시에 쨘하고 만들지 않으시고 남자의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셨는 지를 알게 됩니다. 그 이유는 자기 몸처럼 소중히 여기며 하나되기를 힘쓰도록함 입니다.

인류최초의 가정을 이루는 결혼예식에서 하나님의 주례사가 무엇이었습니까? 24절을 보십시오.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남자가 성숙하여 자립적인 인간이 된다는 것은 부모님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을 의지하여 사는 것을 말합니다. 남자는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그의 아내와 합하여라는 말은 일부일처제가 결혼진리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일부일처제만이 서로를 진정으로 사랑하게 합니다. 반면 일부다처제는 배우자를 자기만족의 수단으로 삼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일생 한 배우자를 일편단심 사랑하며 참 사랑을 배우기를 기도합니다.

결혼의 방향과 목적은 둘이 하나 되어 사명을 감당하는 것입니다. 결혼의 목적은 둘이 하나되는 것입니다. 하나가 된다는 것은 말처럼 쉽지 않습니다. 자신을 비운만큼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비어 종이 되시고 죽으심으로 하나님과 하나되셨습니다. 결혼은 예수님을 배우는 것입니다. 다시말하면 결혼은 죽고자 하는 마음으로 감당하는 사람만이 성공할 수 있는 극한직업입니다. 즉 순교할 각오가 된 사람만 결혼해야 하고 그런 사람만이 결혼생활에 성공합니다. 하나되는 것은 참으로 쉽지 않기 때문에 하나되지 못하고 많은 이들이 헤어집니다. 25절을 보십시오. 두 사람은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않았습니다. 이는 숨기는 것 없이 서로가 진실하고 떳떳한 관계였음을 말해줍니다. 


결론입니다. 우리는 에덴동산을 창설하신 하나님을 통해 완전한 사랑으로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배웠습니다. 하나님의 우리를 향한 모든 동기와 행위는 사랑입니다. 허용에도, 금지에도 사랑이 깃들여져 있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고 축복하기 원하신다는 것을 믿을 때 우리가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뭘해도 행복합니다. 믿음의 가정도 이룰 수 있습니다. 우리를 완전하신 사랑으로 사랑하시는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우리의 부족한 것을 채우시는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금지를 통해서 이 일을 하심을 감사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완전한 사랑을 믿고 행복의 동산을 가꾸어 가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