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5강
가인에게 표를 주신 하나님
말씀 창세기 4,5장 요절 창세기 4:15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그렇지 아니하다 가인을 죽인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 하시고 가인에 게 표를 주사 그를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서 죽임을 면하게 하시니라”
오늘의 본문은 비극적인 가인과 아벨 이야기와(4장), 그리고 가인의 후손과 셋의 후손들의 계보(5장)입니다. 이 가운데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지만 가인에게 표를 주신 하나님을 깊이 배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1,2a절을 보십시오. 아담이 그의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임신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하니라 그가 또 가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는데 아담이 그의 아내 하와와 동침하자 하와가 임신하여 첫 아들을 낳았습니다. 하와는 감격하여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라고 했습니다. 첫 임신, 첫 출산이어서 감격스러웠을 것입니다. 아담은 첫 아들의 이름을 가인 (뜻: 얻음)이라 지었는데 이름에 첫 자녀에 대한 기대가 듬뿍 담겨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여자의 후손에 대한 복음을 들었기에 기대감이 더 컸을 것입니다. 하와는 다시 가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습니다. 아벨의 이름의 뜻은 ‘허무’입니다. 이는 가인에 대한 실망에서 나온 이름일 수도 있고 아벨의 허무한 죽음을 암시하기도 할 것입니다.
2b-4a을 보십시오. 아벨은 양치는 자였고 가인은 농사하는 자였더라. 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아벨은 양을 치는 목자가 되었습니다. 장자인 가인은 아버지의 가업을 이어받아 농사를 지었습니다. 가인과 아벨은 하나님께 제물을 드렸습니다. ‘제물’이란 단어가 ‘공물, 선물’이란 뜻이므로 하나님의 통치와 은총에 대한 감사의 성격이 짙었습니다. 곧 추수감사적 제사였습니다.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아벨은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습니다. 가인의 제물은 어떤 특별함이 없고 아벨의 제물은 소중함과 특별함이 묘사되어 있습니다.
4b,5a를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 아벨과 가인이 제물을 놓고 경배하는 데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아벨의 제물을 즉시 태웠습니다. 향기로운 양고기 냄새가 진동했습니다. 그러나 가인의 제물에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가인은 자기가 직접 불을 피워보았지만 불은 자꾸 꺼지고 나중에는 비까지 내렸습니다. 이 말씀을 보면 하나님이 받으시는 제사가 있고 받지 않으시는 제사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제물보다 먼저 사람을 받으십니다. 그 사람 즉 그의 일상과 사람됨을 제사보다 더 중요하게 여기십니다. 다시 말하면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의 내가 누구이고 내가 어떻게 사는 가가 주일예배 한 시간보다 더 중요합니다. 하지만 사람과 함께 제물도 묶여 언급되었기에 제물도 중요합니다. 제물에 정성이 담기기 때문입니다.
5b를 보십시오.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제물이 거부당했을 때 가인은 몹시 분하여 얼굴 빛이 바뀌었습니다. 제사를 받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이지만 하나님이 제물을 받지 않은 이유가 있습니다. 때문에 가인은 “하나님, 다 아셨군요?” 하며 그 자리에 무릎을 꿇고 회개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오히려 하나님께 분노하며 얼굴이 붉으락 푸르락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가인을 카운슬링하십니다. 6,7절을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 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 됨이냐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하나님은 그의 분노가 정당하지 못함을 지적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그가 평소에 선을 행하지 않음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 때문에 그의 제물을 받지 않으셨습니다. 사람이 선을 행하지 않을 때 죄가 문에 엎드립니다. 죄가 귀신처럼 내 내면상태를 알고 나를 삼키기위해 문앞에 배고픈 사자처럼 엎드립니다.
하나님이 선을 행치 않는 가인의 제물을 그냥 받으셨다면 어떻게 되었을 까요? 가인의 내면상태는 묻히고 가인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법을 배우지 못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거절과 냉대’는 나의 삶을 돌아보고 고칠 수 있는 기회를 줍니다.
그러면 가인은 하나님의 카운슬링을 어떻게 받아들였습니까? 8절을 보십시오.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에게 말하고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 죽이니라 가인은 하나님의 카운슬링을 받지 않았습니다. 그는 수도승같은 동생을 주셔서 자신을 괴롭히시고 매사에 이렇게 저렇게 가르치는 꼰대같은 하나님도 싫었습니다. 또한 늘 의로운 체, 잘난 체 동생은 죽도록 싫었습니다. 가인과 아벨 영화중 하나를 보면 처음에 두 사람이 다 농사를 지었습니다. 그런데 아벨의 밭은 농작물이 잘 자라는데 자기밭은 그러지 않았습니다. 그는 아벨만 사랑하시는 하나님과 하나님께 사랑받는 아벨이 미웠습니다. 아벨은 질투심많은 형을 위해서 농사를 포기하고 양을 치기로 합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자기가 열심히 일할 때 피리만 불며 목가적인 목자생활을 하는 동생이 미웠습니다. 또 형인 자신에게 충고하고 영적으로 이리 저리 가르치는 아벨을 미워했는데 어느 날은 아벨의 양들이 가인이 힘써 농사지은 밭에 들어와 밭을 짓밟는 것을 보고 분노가 폭발하여 양들을 쳐 죽이기도 했습니다. 가인에는 하나님과 부모님, 아벨에 대한 분노가 쌓이고 있었습니다. 그는 하나님과 부모님과 아벨과 같이 있으면 너무나 답답하고 자신의 불의함과 열등감만 드러났습니다. 가인은 자신의 불의함을 드러내는 아벨,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아벨을 없애버림으로 모두에게 복수하고 싶었습니다. 그는 아벨을 죽이기로 결심하고 들로 유인하여 그를 돌로 쳐 참혹하게 죽였습니다. 그는 마음에서 끓어오르는 대적하는 마음과 분노를 다스려야 했지만 하나님의 카운슬링보다 마귀의 코칭을 받았습니다. 이번에 강원도 화재에 변압기가 폭발하여 대화재가 일어났는데 가인의 분노는 대참사를 가져왔습니다.
9절을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그가 이르되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 하나님은 아담을 찾아 오셨듯 가인을 찾아오시고 물으셨습니다.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이 역시 아벨이 어디 있는지 몰라서 묻는 질문이 아니었습니다. 그의 죄를 드러내고 그가 회개하도록 도우시는 말씀이었습니다. 특히 ‘네 아우’ 라는 말이 강조되어 있는 데 형으로서 보호의무와 책임을 의미합니다. 사실상 우리 인류는 모두 형제로서 서로에 대해 보호의무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질문에 가인은 뻔뻔하게 대들 듯 말했습니다.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 아담이 두려워 떨며 변명을 하면서도 죄를 인정한 것과 다릅니다. 인간내부의 악이 더 성장했습니다. 자기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오히려 대적하는 것은 인간이 사탄처럼 되어가는 모습입니다. 문제를 지적할 때 그것이 옳다면 인정하고 고치면 하나님께 속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끝까지 자기를 인정하지 않고 대적하면 그는 마귀에게 속한 사람으로 소망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그가 죄를 인정치 않고 회개치 않자 그의 죄를 확정하고 죄에 대한 형벌을 선고하십니다. 10-12절을 보십시오. 이르시되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 땅이 그 입을 벌려 네 손에서부터 네 아우의 피를 받았은 즉 네가 땅에서 저주를 받으리니 네가 밭을 갈아도 땅이 다시는 그 효력을 네게 주지 아니할 것이요 너는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 하나님의 시선은 사각지대가 없습니다. 아무도 없는 들이나 아파트나, 깊은 지하실에서 벌어진 일도 다 아십니다. 그러니 우리가 죄를 짓지 않는 것이 현명하며 범죄한 후에는 신속히 회개해야 합니다. 땅은 저주를 받았지만 농부들에게 어느정도 협조했습니다. 그러나 피로 땅을 적신 가인에게 땅은 조금도 협조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는 아무리 수고해도 열매와 보상이 없는 삶을 삽니다. 그러니 그는 더 이상 땅에서 농사를 지을 수 없으며 땅을 떠돌며 유리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죄에는 형벌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형벌은 녹록하지 않습니다. 때문에 우리가 작은 죄라도 죄짓기를 두려워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죄벌을 선고하실 때 가인의 반응은 어떠했습니까? 13,14절을 보십시오. 가인이 여호와께 아뢰되 내 죄벌이 지기가 너무 무거우니이다. 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쫒아내시온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지라 무릇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 가인이 정말 양심이 있다면 그는 “저는 죽어 마땅한 죄인입니다.”라고 애통해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죄벌이 너무 과하다며 고통을 호소했습니다. 그는 남의 고통에는 무감각하고 자기의 고통에는 과도하게 집착했습니다. 그는 자기 고통만 압니다. 자기의 허물과 죄로 다른 사람이 얼마나 고통했는 지, 아벨이 살해당할 때의 그의 공포와 고통, 아담과 하와가 사랑하는 아들의 죽음을 알았을 때 고통, 하나님이 얼마나 마음 아파하시는 지 이런 것은 조금도 생각하지 않습니다.
가인이 자기의 고통을 호소하며 누군가에 의해 죽임당할까 염려하며 말할 때 하나님이 뭐라 말씀하셔야 마땅합니까? “너같은 놈은 죽어 마땅하다. 내가 벼락을 내려 차라리 너를 죽이겠다” 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요? 그러나 하나님은 어떻게 말씀하셨습니까?
15절을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그렇지 아니하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 하시고 가인에게 표를 주사 그를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죽임을 면하게 하시니라 하나님은 그의 두려움을 이해하시고 그에게 보호의 표를 주십니다. 그 표가 무엇인지를 모르지만 그 표를 보면 가인을 죽여서는 안된다는 생각을 하고 그를 죽이지 않게 되는 표입니다. 하나님은 죽어 마땅한 가인을 보호하시고 그가 자연수명을 다 누리도록 하십니다.
이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가인도 불쌍히 여기시는 가인의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은 아벨은 보호하지 않으시고 가인을 보호하셨습니다. 의인의 죽음은 허용하시고 죄인은 어찌하든지 살리시다니요? 하나님은 의인 스테반은 죽게 하신 반면 살인자요 포행자인 사울은 살리셨습니다. 이런 하나님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왜 의인보다 죄인을 더 사랑하시는 지 불만을 가지기도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이런 식으로 하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어찌하든지 죄인들을 회개시켜 살리고자 하십니다. 의인은 이미 구원을 받았으니 그들은 하늘나라로 영접하십니다. 반면에 하나님은 회개치 않는 가인은 어찌하든지 기회를 주셔 구원에 이르도록 하셨습니다.
사도행전의 주인공은 사도바울입니다. 그는 하나님과 성도들에게 가인보다 더한 죄인, 곧 죄인중 괴수였습니다. 사도바울은 자신같은 죄인이 구원을 받고 쓰임받는 이유를 이렇게 이했습니다. 디모데전서 1:15,16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그러나 내가 긍휼을 입은 까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먼저 일체 오래 참으심을 보이사 후에 주를 믿어 영생 얻는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은 죄인의 괴수 사울을 섬기심으로 후에 구원받는 사람들, 그런 이들을 섬기는 사람들에게 격려를 주고자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무한하신 사랑으로 죄인을 섬기시는 분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경의 주제입니다. 그러니 본문의 주인공도 아벨이 아니라 가인입니다.
모니카의 삶이 의미있는 것은 그의 말 잗 듣는 둘째 아들 때문이 아니라 끝없이 어머니를 절망하게 했던 첫째 아들 어거스틴 때문이었습니다. 어거스틴은 15년이상 창녀와 동거하며 어머니를 절망시켰습니다. 하지만 모니카는 포기하지 않고 죽기 2년전까지 그를 사랑과 기도로 섬겼습니다. 이본 목사님은 미국에서 살인죄로 무기형을 선고 받았는 데 그 어머니는 장로가 된 두 아들의 교회에서 ‘장로의 어머니’으로 불리웠지만 그녀는 자신을 ‘무기수의 어머니’로 불러달라고 했습니다. 어머니가 감옥에 있는 이본목사를 위해서 무한정 기도했습니다. 그러자 감옥에 간 이본 목사는 예수님을 영접하고 믿음으로 살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모범수로 22년 복역후 어머니가 80세였을 때 석방되었고 출옥자들을 섬기는 목사가 되었습니다. 우리가 가인같은 이를 섬길 때 언제까지 섬겨야할 지 모릅니다. 또 섬겨도 그들이 변화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래도 그 섬김이 가치가 있습니다. 또 변화될 것같지 않은 죄인들이 변화됩니다. 사도바울, 어거스틴, 이본 목사님이 그런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이 가인에게 주신 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예표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죄인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이 나타나있는 사랑의 표요, 인내의 표입니다. 우리가 죄인들을 볼 때 그들에게 있는 죄성보다 예수님의 십자가 표를 보고 그들을 참고 사랑하며 섬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여러분, 주위에 아벨같은 사람만 있습니까? 우리에게 가인같은 사람들을 주셔서 가인의 하나님을 배우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무엇보다 이시간 가인같은 나를 불쌍히 여겨주시고 섬겨주신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과 인내를 기억하며 감사합니다. 우리가 가인의 하나님을 잘 배워 하나님의 가장 큰 속성인 사랑을 조금이나마 알아가기를 기도합니다.
가인이 여호와 앞을 떠나 에덴 동쪽 놋 땅에 거주했습니다. 놋이란 말은 ‘유리함’이란 뜻인데가인의 마음상태를 잘 보여줍니다. 가인이 아내와 동침하여 자녀를 낳았습니다. 그리고 자신과 가족을 보호하기 위해 성을 쌓고 자식의 이름으로 성의 이름을 지었습니다. 하나님과 동행하지 않는 삶은 두렵습니다. 그래서 많은 성을 겹겹이 쌓아야 합니다. 아담으로부터 가인 쪽 7대손 라멕은 그 이름의 뜻이 ‘강한 자’였습니다. 그는 아다와 씰라라는 두 아내를 두었습니다. 일부일처제의 결혼진리를 깨뜨렸습니다. 그는 자신의 아내들에게 자신의 잔인한 살해행위를 자랑했습니다. 그는 한 사람과 한 소년에 의해 상해를 입었는 데 그때 그는 그들을 용서하지 않고 잔인한 죽음으로 보복했고 그것을 자랑했습니다. 그리고 혹 있을 재보복에 대해 77배로 갚아주겠다고 공언했습니다. 가인의 경우 하나님이 보호해주셨는데 자신의 경우 자기가 그렇게 하겠다고 한 것입니다. 가인의 후예들은 자기의 힘을 믿고 살았으며, 죄의식이 없고 잔인하고 포학하며 비인간화되었습니다.
25,26절을 보십시오. 아담이 다시 자기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아들을 낳아 그의 이름을 셋이라 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내게 가인이 죽인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 함이며 셋도 아들을 낳고 그의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 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셋이란 이름의 뜻은 ‘주셨다’입니다. 만약 하나님이 새로운 씨를 주시지 않으셨다면 세상은 오직 가인의 후예들만 있게 되고 인류는 소망이 없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가인이 죽인 의인 아벨 대신에 셋을 계승자로 주셨습니다. 이 셋의 족보는 제 2의 아담이라고 하는 노아에게까지 이어집니다. 사탄은 어떻게든지 의인의 계보를 끊고자 합니다만 하나님은 친히 하나님의 사람을 세우십니다. 예수님은 그 제자들을 가리켜 하나님이 주신 사람들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역사는 언제나 희망이 있습니다.
셋이 아들을 낳아 이름을 ‘에노스’ 라고 했습니다. 그의 이름의 뜻은 ‘약함’입니다. 아마도 그가 태어날 때 어떤 약함을 가지고 태어났습니다. 그런데 셋이 에노스를 낳을 때부터 사람들이 무엇을 했습니까? “그 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여호와를 불렀다’는 것은 기도하거나 찬양하는 것을 말합니다. 아들 에노스의 연약함은 셋이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을 찬양하게 했습니다. 가인의 후손들은 자기를 의지하고 자기의 강함을 자랑하며 살았지만 셋과 후손들은 자신의 약함을 자랑하고 하나님의 강함을 찬양했습니다.
가인의 계보에는 뭔가 있어 보입니다. 성도 쌓았습니다. 아내도 둘씩 얻었습니다. 소유도 있습니다. 음악과 문명도 발전시켰습니다. 또한 영웅적인 업적이나 무용담도 있습니다. 가인의 역사는 오늘날로 하면 세속주의 역사입니다. 하나님없는 인간들은 화려한 도시를 건설하고 많은 문명의 이기들을 만들어 내었습니다. 스마트폰도 만들어냈습니다. 핵폭탄같은 무기도 만들어냈습니다. 가인의 역사인 세속사에 뭔가 있어보이고 그 역사가 역사의 주류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셋의 역사는 뭐가 없고 초라해 보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인정하시고 기록하시는 역사는 셋의 역사입니다. 하나님은 가인의 역사를 의미없게 여겨서 라멕의 자녀들까지만 짧게 기록하고 끝내셨고 셋의 역사는 끝까지 기록하셨습니다. 셋의 역사는 그들이 믿음의 자녀를 낳고 기른 것만 반복하여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것을 인정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편에서 자부심과 확신을 가지고 대단한 것도 화려한 것도 없지만 믿음의 자녀를 낳고 기르는 일을 반복하다가 하나님께 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다음으로 하나님이 중요하게 여기시는 것은 누가 하나님과 동행한 사실입니다. 많은 소유나 업적보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은 범사에 하나님을 인정하며 사는 것입니다. 어딜 가든지 하나님을 인정하고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를 나눕니다. 이렇게 매사에 하나님을 인정하며 사는 에녹을 기뻐하시고 하나님은 그에게 큰 상을 주셨습니다. 평소에 작은 상들도 주셨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큰 상은 바로 죽음면제 였습니다. 죽음은 인류에게 주어진 최대의 형벌이요 저주였습니다. 올림픽 메달리스트들에게 군대를 면제하듯이 하나님은 믿음의 챔피언인 에녹에게 죽음을 면제해주셨습니다. 에녹은 짧은 365년을 살다가 갔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에 대해서 가장 많이 기록했습니다. 오래 사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얼마나 동행하는 사는 가가 중요합니다. 하나님과 얼마를 동행했는 가 이것이 삶의 진정한 길이 입니다. 그런 면에서 에녹이 가장 오래 살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에녹의 이름의 뜻은 전수자, 교육자, 선생입니다. 그는 한마디로 성경선생의 삶을 살았습니다. 유다서에 보면 의의 전파자로 하나님의 심판을 전했고 아들 므두셀라의 이름도 하나님의 심판을 예고하는 이름이었습니다. 심판을 믿을 때 경건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이 에녹의 증손자가 노아인데 그 이름의 뜻은 ‘위로자’입니다. 그 역시 증조 할아버지처럼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의 삶은 믿음의 조상과 선배들에게 큰 위로가 되었습니다. 우리 중에도 그를 보면 위로가 되는 믿음의 후배나 양들이 있습니다. 그는 우리들의 노아입니다.
결론입니다. 하나님은 아벨과 에녹과 노아의 하나님입니다. 의인들의 하나님입니다. 그러나 그보다 하나님은 가인의 하나님입니다. 가인을 불쌍히 여기고 그를 참고 섬기신 하나님입니다. 우리가 가인의 하나님을 모르면 하나님을 모르는 것입니다. 우리는 가인같은 죄인들이었지만 십자가의 사랑으로 의인들의 계보에 서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가인과 같은 사람들에 대해서 분노하지 않고 오래참음으로 긍휼의 하나님, 사랑의 하나님을 배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