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8강 메시지 바벨탑 말씀 창세기 9:18-11:26 요절 창세기 11:9 “그러므로 그 이름을 바벨이라 하니 이는 여호와께서 거기서 온 땅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셨음이니라 여호와께서 거기서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셨더라” 오늘 본문은 노아의 축복과 저주, 바벨탑을 쌓는 이들을 흩으신 하나님, 그리고 셈의 족보가 주 내용입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우리가 인간의 내부에 자기를 높이고자 하는 근본적인 성향을 깊이 돌아보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노아의 세 아들로부터 온 인류가 퍼졌습니다. 노아가 농사를 시작했고 특히 포도나무를 심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농사가 잘 되었고 노아는 포도를 수확하여 포도주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포도주를 마시고 장막 안에서 벌거벗었습니다. 늘 성령과 말씀에만 취했던 노아가 술 취하여 이런 모습을 보여 안타깝습니다. 다행스런 것은 그래도 장막 안에서 그랬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제일 먼저 본 사람이 함이었습니다. 함은 아버지의 하체를 보았는 데 ‘보았다’는 것은 ‘라하’로서 유심히 연구하듯 바라본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그는 밖에 나가서 두 형제에게 알렸습니다. 알렸다는 것은 ‘광고하다’는 의미입니다. 허물을 떠벌렸다는 것입니다. “저 영감탱이가 맛이 갔어” “홍수 전에는 몰라도 더 이상 저 영감탱이 못 따르겠어” 그러나 셈과 야벳은 옷을 가져와서 어깨에 메고 뒷걸음쳐 들어가서 아버지의 하체를 보지 않고 덮어드렸습니다. 노아가 술이 깨어 그의 작은 아들이 자기에 대해 한 일을 알고 함의 아들 가나안을 저주했습니다(25). 그리고 자신을 공경하고 허물을 덮어준 셈과 야벳에 대해서는 축복을 선언했습니다(26,27). 이상이 홍수 후 노아의 허물과 가나안과 셈과 야벳이 저주와 축복을 받은 내력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첫째로 완전한 인간은 없다는 것을 배웁니다. 모든 인간은 허물진 죄인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있을 때 우리 인간은 아름답고 존경스런 모습, 완벽한 모습을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가 없으면 허물진 모습이 드러납니다. 노아는 홍수 전에는 방주짓는 분명한 삶의 목적과 방향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홍수 이후에는 긴장이 풀어지고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 안일과 여유가운데 있다가 이렇게 술취하여 자기도 모르게 추태를 보이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둘째로 우리는 권위자의 허물을 다루는 법을 배웁니다. 함은 이것을 잘 못해서 저주를 받았습니다. 권위자를 통해 질서가 유지되고 교육이 이루어지기에 권위자의 존재는 중요합니다. 영적 권위자의 경우는 더욱 그렇습니다. 노아는 노아가족의 아버지요 하나님이 노아공동체에 세운 선지자, 교사, 제사장이었습니다. 하나님이 그를 통해 말씀하시고 방향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그 권위가 허물어질 때 노아의 가족과 그 영적공동체도 허물어집니다. 그러므로 아버지요, 영적 지도자의 권위가 존중되고 존경을 받도록 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권위를 허물어뜨리는 것은 결국 공동체를 허물어뜨리고 자신의 삶도 허무는 것입니다. 따라서 의도적이든, 생각 없이든 권위자의 허물을 드러내고 떠벌이는 것을 사탄이 기뻐하며 위험하고 파괴적인 결과를 가져옵니다. 권위자의 허물을 다룰 때는 아름답게 다루어야 합니다. 사람의 허물을 아름답게 다루는 사람은 축복을 받고 사람의 허물을 dirty하게 다루는 사람은 하나님의 저주를 받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기존의 권위자의 권위를 허물어뜨림으로 자기의 권위를 세우고 자기를 높이고자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래서 권위자의 허물을 발견하는 것을 기뻐하고 그것을 확대 재생산합니다. 하나님은 이것을 악하게 보십니다. 그러므로 권위자의 허물을 다룰 때는 어떤 동기로 그것을 다루는 지 깊이 돌아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자기를 높이기 위해 영적 권위를 허무는 자를 저주하십니다. 하나님이 세우신 질서를 가볍게 여기는 것은 하나님을 멸시하는 것이며 그의 교만은 하나님을 향한 것이기 때문에 심각합니다. 노아의 저주와 축복은 노아의 개인감정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아들들의 내면을 깊이 아는 통찰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이 노아의 저주와 축복을 그대로 실행하셨습니다. 사람들은 별것 아닌 것에 노아가 과잉반응하거나 너무한 것 아닌가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별것 아닌 것처럼 보이는 말 한마디, 눈빛 하나, 행동하나에 그 사람의 깊은 교만과 반역, 조롱과 멸시가 담겨져 있습니다. 함의 일에 가나안을 저주한 것은 자녀에 대한 저주가 아버지에게 가장 큰 저주여서도 그렇지만 가나안 역시 함과 같은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저주는 운명론적인 저주는 아닙니다. 오히려 사랑의 경고에 가깝습니다. 레위에 대해서 야곱이 저주했지만 레위지파가 출애굽 때 하나님편에 섬으로 오히려 영적인 축복을 가장 많이 받게 된 것이 좋은 예입니다. 또 라합의 경우, 하나님편에 섬으로 구원을 받고 메시아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10장은 노아의 아들들의 족보 입니다. 먼저 야벳, 함, 셈의 후손들 순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내용을 보면 함의 아들들이 가장 많은 족속을 이루고 많은 영역을 차지했습니다. 함의 족속들은 저주를 받았지만, 인구수도 많고 가장 힘도 셌고 강하고 대단한 인물도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사람이 함의 손자인 니므롯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축복과 저주를 외적인 것으로 다 판단할 수 없습니다. 니므롯은 세상의 첫 용사였습니다. 용사라는 말은 영웅, 군주를 뜻합니다. 그는 여호와 앞에 용감한 사냥꾼이었습니다. 그는 짐승이나 사람을 사냥하는 데 유능했습니다. ‘여호와 앞에서’ 란 말은 그가 하나님도 두려워하지 않았으며 그의 대담성, 리더십, 카리스마가 탁월했음을 뜻합니다. 그는 최초로 세상에 나라를 세웠는데 그의 나라는 조그만 나라가 아니라 메소포타미아의 중심지인 시날 땅의 바벨, 에렉, 악갓, 갈레에서 시작하여 광대한 영토를 아우르는 대제국이었습니다. 함족속 중에는 이스라엘의 원수가 되는 블레셋도 있고 특히 가나안 족속이 있습니다. 10:21절 이하는 셈 족속에 대한 기록 입니다. 셈 족속들은 세계문화사에서 수메르 왕국과 수메르 문명을 이룬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하나님의 계보는 셈을 통해 아르박삿, 셀라, 에벨로 이어집니다. 에벨은 히브리 민족의 이름이 여기서 나왔습니다. 에벨의 아들은 벨렉과 욕단입니다. 벨렉이란 ‘나눔’이란 뜻입니다. 이는 벨렉 때 바벨탑 사건이 있었고 언어가 나뉘고 세상 사람들이 흩어졌기 때문입니다. 11:10-32절에는 벨렉의 족보가 아브라함에게 까지 이어진 것이 기록되었습니다. 바벨탑 사건이 셈 족의 족보에 중간에 삽입되어 있는 것은 바벨탑 사건이 함의 손자 니므롯이 주도했으나 셈족들도 그에 연루되어 있음을 보여줍니다. 11장입니다. 당시 온 땅의 언어와 말이 하나였습니다. 노아의 후손들은 동방으로 옮겨갑니다. 서쪽은 지중해가 있기 때문에, 해가 돋는 동쪽으로 이동했을 것입니다. 그들은 계속 이동하여 세계 모든 곳에 편만하게 거주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땅에 충만하고 땅을 정복하라는 명령을 주셨기 때문입니다.(창 1:28, 9:1) 그런데 왜 그들은 더 이상 흩어지지 않고자 했습니까? 그들이 시날 평지를 만났기 때문입니다(2). 시날 평지는 유프라테스 강과 티그리스 강 사이 메소포타미아 계곡 하류의 비옥한 평원지대를 말합니다. 10:10절에 니므롯이 건설한 제국에 시날 땅 (바벨)이 제일 먼저 언급되어 있는 것을 볼 때 그곳은 니므롯 제국의 수도였습니다. 단 1:2절에 의하면 유대의 성전의 기구들이 옮겨진 곳이 바로 시날 땅입니다. 이곳은 후에 셈족인 수메르인 들에 의해 수메르 왕국이 세워지고(14:1,9) 한참 후에는 바벨론 제국이 건설됩니다. 시날평지는 현재 이라크의 수도 바그다드 남쪽 80km 지점으로 보고 있습니다. 시날 평지는 물좋고 아주 비옥한 곳입니다. 거류하다는 말은 ‘주저앉다’는 말인데 우리가 하나님의 명령을 순종하지 못할 때 보면 뭔가 우리를 주저앉히는 것이 있습니다. 서로 말하되 자, 벽돌을 만들어 견고히 굽자 하고 이에 벽돌로 돌을 대신하며 역청으로 진흙을 대신하고 또 말하되 자, 성읍과 탑을 건설하여 그 탑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하였더니(3,4) 시날평지에 안주하기를 결정한 그들은 견고한 성읍과 높은 탑을 건설하고자 했습니다. 성읍건설은 하나님을 떠난 가인이 보호본능가운데 처음 했던 행위입니다. 성읍을 이루게 되면 삶이 훨씬 안정적일뿐 아니라 편리하게 됩니다. 거의 동시대인 수메르 왕국의 유적지의 경우, 역청을 칠한 수도관이 발견될 정도로 당시 도시는 편리한 시설들을 갖추었습니다. 이때의 흔적은 아니지만 느부갓네살의 바벨론제국의 유적들중 세계 7대 불가사의중 하나인 공중정원을 볼 수 있는데 고대에도 사람들은 도시를 만들어 아주 편리하고 쾌적한 생활을 했습니다. 성읍을 이루게 되면 적들로부터 자신들을 지킬 수 있습니다. 사람들의 힘을 효과적으로 모으고 분업화시키며 인간의 지혜나 힘을 공유하여 문명의 발전을 극대화시킬 수 있습니다. 이렇게 큰 성읍과 높은 탑을 쌓는 것을 가능하게 한 것은 때마침 개발된 신소재 구운 벽돌과 역청 때문이었습니다. 흩어지는 사람들을 모아 이 일을 주도한 사람은 탁월한 영도자였던 니므롯이었습니다. 그는 아마 히틀러처럼 많은 사람들을 감동시키는 대중연설능력을 갖추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는 왜 사람들이 흩어져 살지 않고 함께 모여 도시를 건설할 때 어떤 점이 좋은 지, 인간의 위대성과 협력의 위대성을 역설했을 것입니다. “그 탑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4b) 그들은 성읍을 짓되 그 가운데 하늘에 닿는 높은 탑을 쌓기로 결정했습니다. 고대인들은 ‘구름’을 하늘의 바닥으로 생각했습니다. 학자들에 의하면 당시 구운 벽돌로 실험한 결과 이론적으로 3.2km 높이의 탑까지 쌓을 수 있고 실제로 어떤 학자들은 바벨탑이 약 2마일 곧 2.5km에 이른다고 말했습니다. 이 탑은 이 도시의 랜드 마크가 될 것입니다. 이런 높은 탑을 쌓아 그들이 의도한 바가 무엇입니까?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4b) 어떤 사람들은 홍수심판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못해 이렇게 높은 탑을 쌓았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본문에 보면 그들이 이런 탑을 높게 쌓은 이유는 자신들의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는 것이었습니다. 인간의 이름을 낸다는 것은 인간존재의 위대성을 나타내는 것을 뜻합니다. “우리의 이름을 내고” 인간이 자신의 위대함을 뽐내고 싶은 마음이 인간내부에 있습니다. 특히 무엇을 잘 하게 될 때, 무엇이 잘될 때 이런 마음이 생깁니다. 그러면 마음이 높아져 권위자들도 무시하고 복종하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의 허물을 다룰 때도 사실은 그것을 통해 자기가 뛰어남을 드러내고자 합니다. 인간은 무엇이 좀 잘 될 때 조심해야 합니다. 벽돌이 개발되 자기가 원하는 데로 성취의 탑이 쌓아져 올라갈 때입니다. 그럴 때라도 자신의 본질을 한시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인간은 미천한 피조물이며 부패한 본질을 가지고 있습니다. 인간은 무능합니다. 감기하나에 기침하다가 죽을 수 있으며 한 순간 후도 모르는 보잘 것 없는 존재입니다. 모든 선처럼 보이는 일에 악이 들어있는 위선적인 존재입니다. 이런 인간에게 하나님의 형상, 속성이 내재되어 있다고 해서 인간이 위대한 체, 하나님인체 해선 안 됩니다. 인생의 목적은 하나님의 이름을 내는 것입니다. 이것이 정당하며 적절합니다. 하나님은 천지를 무에서 창조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천지만물을 붙들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장차 독생자를 십자가에 내어주시는 사랑으로 인간을 섬기시는 분입니다. 이 하나님만이 그 존재와 능력과 속성으로 영광 받으시기에 합당하십니다. 인간은 겸손히 자신을 낮추고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며 하나님께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이 그런 그들의 이름을 창대케 해주십니다. 함의 손자로서 “하나님께 반역하리라”라는 이름의 뜻을 가진 니므롯은 바벨탑을 쌓아 하나님을 대적하고자 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저주하실지라도 합심하고 단결하여 하나님과 싸우겠다는 반역의 의지와 교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사람들을 똘똘 뭉치게 하여 하나님께 대항하려 했습니다. 그는 회개하고 순종하기보다는 사람들의 힘을 모아 하나님께 반역하는 인본주의의 탑을 높게 쌓아 올렸습니다. 그러면, 인간의 교만과 반역에 대해 하나님은 어떻게 하셨습니까? 그들이 짓는 성읍과 탑을 보시려고 내려오셨습니다(5). ‘내려오신다는 것’은 하나님이 인간의 선행과 악행을 확인하실 때 쓰는 표현입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의 삶, 섬기는 내면을 확인하기 위해 아브라함의 장막에 내려 오셨고 소돔과 고모라의 죄악을 확정하시기위해 그곳을 찾으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이 짓는 성읍과 탑이 안 보여서 내려오신 것이 아니라 그들의 교만과 마음깊이 감추어진 저의를 확인하시기 위해 내려오셨습니다. 그리고 무슨 계획을 피력하시고 어떤 결정을 하십니까?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이 무리가 한 족속이요 언어도 하나이므로 이같이 시작하였으니 이 후로는 그 하고자 하는 일을 막을 수 없으리로다. 자 우리가 내려가서 거기서 그들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여 그들이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하자 하시고 여호와께서 거기서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셨으므로 그들이 그 도시를 건설하기를 그쳤더라 (6-8) 하나님은 그들이 하는 성읍공사와 탑공사를 막고자 하셨습니다. 왜 이렇게 하십니까? 그들이 하는 일을 지금 막지 않으면 나중에는 막을 수 없을 정도의 일들을 벌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바벨탑을 성공적으로 쌓아 구름 위까지 올린다면 어떻게 될까요? 그들은 한껏 자신들의 교만을 뽐내며 우쭐거릴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인간들에게 좋은 것일까요? 인간의 교만은 진실이 아니며 가소롭고 역겨운 것이며 그래서 그것 자체가 불행이며 재앙입니다. 또한 언제 태풍이나 지진에 의해 무너진다면 높이 쌓을수록 대 참사가 일어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자신의 영광과 인간의 행복을 위해서 그 성읍건설을 중단시키고 탑도 완공되지 못하게 하십니다. 그 방법은 성읍이나 탑에 벼락이 내리신 것이 아니라 언어를 혼잡하게 하신 것입니다. 그들은 협의와 소통이 잘 이루어져 교만의 바벨탑을 더 높게 쌓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순식간에 인간의 혀를 살짝 꼬으시자 사람들이 제 각각 다른 말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위에서 “Give me the bricks more”하고 벽돌을 달라고 말하자, 밑에 있는 사람이 뭔 말인지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뭐, 뭐라고 예?” 하면서 역청을 내밀었더니 위에 있는 사람이 역정을 내며 역청을 그 사람 얼굴에 부어버렸습니다. 의사소통이 안 되니 결국 공사가 중지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의사소통도 안 되는 데 같이 살다가는 답답하고 복장 터져 죽을 것 같아 말이 통하는 사람들끼리 온 지면으로 흩어졌습니다. 시날 평지에는 흉물스럽게 짓다만 성읍과 탑만 덩그러니 남게 되었습니다. 9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그 이름을 바벨이라 하니 이는 여호와께서 거기서 온 땅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셨음이니라 여호와께서 거기서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셨더라. 바벨이란 ‘혼란’, ‘혼잡’이란 뜻입니다. 이렇게 해서 그 짓다만 거대한 탑은 바벨탑으로 불리우게 되었습니다. 바벨탑은 오고가는 세대에 거대한 영적 랜드마크가 되었습니다. 바벨탑이 보여주는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고 산산조각 내시는 분이십니다. 교만한 자는 하나님의 영광을 훔치는 자입니다. 그는 하나님과 싸우는 자입니다. 그의 삶은 미래가 없습니다. 그러나 본문에서는 하나님이 완전한 심판은 아니고 흩어 보내시는 사랑의 조치를 취하셨습니다. 그래서 불가항력적으로라도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삶을 살도록 도우셨습니다. 언어의 기원은 소통의 단절입니다. 언어의 분화는 사람들이 하나님편에서 좋지 않는 야합과 단결을 하지 않고 각자가 겸손히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과 깊은 관계를 맺도록 도우신 지혜의 손길이었습니다. 사도행전 2장을 보면 제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온 세계에 흩어져 주님의 말씀을 전하고자 하자 하나님께서 놀라운 방법으로 이방인들과 소통하도록 도와주셨습니다. 세계 여러 나라의 언어를 순식간에 정복하는 초자연적 현상을 허락하셨습니다(행 2장). 이처럼 인간이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고 하나님께 순종하면 하나님이 친히 도우사 소통의 역사를 이루십니다. 그래서 모든 언어의 장벽, 소통의 장벽, 세대차도 극복하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고 겸손한 이들을 축복하사 형통케 하십니다. 벨리즈의 모세스 장 선교사님은 미국에 선교사로 왔지만 사실은 아메리칸 드림을 이루고자 오셨습니다. 그는 그 꿈을 이루어 많은 돈을 벌고 좋은 집에서 살았습니다. 그러나 삶이 허무했습니다. 그리고 장차 하나님 앞에 갈 때 어떻게 삶을 결산할까 생각하니 두려웠습니다. 그래서 60세의 늦은 나이에 선교사로 나가기로 결단했습니다. 이때 현재 70세가 넘었지만 캠퍼스에 나아가 복음을 전하면 벨리즈의 대학생들이 그분과 그 동역자 사라선교사님을 “파파”“마마”라고 따릅니다. 그리고 토요일에 지방에 내려간 학생들이 주일예배 드리러 서울에 올라온 다음에 다시 내려간답니다. 정말 우리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고 그 영광을 드러내려고 하면 하나님이 우리에게도 어떻게해서라도 양들을 보내어주실 수 있습니다. 아저씨 입맛을 가진 양도 보내어주시고 엄마 같은 아줌마들을 좋아하는 양들도 보내어 주실 수 있습니다. 반면에 자기 이름을 내고자하는 욕심으로 양을 치면 양들을 아무리 잘 섬겨도 양들과 소통이 안되며결국 그 양들은 무슨 일에서라도 걸림이 되서 떠날 수 있습니다. 우리의 목자생활의 형통도 양들과의 소통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소통에 달려 있습니다. 우리가 계획하고 열심히 추구했던 것들이 무너질 때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셔서 내가 교만의 바벨탑을 쌓지 못하도록 도우시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교만의 바벨탑이 허물어지고 아무것도 자랑할 것도 없고 내세울 것도 없을 때 허망할 수 있지만 차라리 이것이 진정한 축복이고 행복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를 감사해야 하겠습니다. 또한 우리가 다시 교만의 바벨탑을 쌓지 않도록 항상 경계해야 하겠습니다. 교만에 빠져있음을 알려주는 5가지 신호입니다. 1. 건강하지 못한 비교를 한다. 2. 비판하는 것을 거부한다. 3. 듣는 것보다 더 많이 말한다. 4. 당신의 이미지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5. 지위나 타이틀에 지나치게 집착한다. 제가 이런 사람이었는데 하나님이 저를 도우셔서 깨주심을 감사합니다. 제가 겸손히 하나님의 이름을 드러내며 다른 사람들의 말 듣기를 좋아하고 외적인 이미지나 타이틀보다 존재와 본질에 더 관심을 갖는 이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11장 후반부의 셈족들을 보면 함족의 니므롯처럼 뛰어난 사람도 업적도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함족의 역사는 자기의 위대함을 드러내는 역사입니다. 반면에 셈의 역사는 자신의 약함과 자랑할 것 없음을 드러내는 역사입니다. 결론적으로 우리 인생의 목적은 하나님의 이름을 내고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하나님이 나의 이름을 높여주시고 형통케 하십니다. 소통의 역사도 이루십니다. 우리가 자기를 드러내는 교만의 바벨탑, 불순종의 바벨탑을 쌓지 않고 겸손과 순종의 삶을 살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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