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누가복음 13 강 어떻게 들을까 스스로 삼가라 말씀 / 누가복음 8:4-18 요절 / 누가복음 8:18 “그러므로 너희가 어떻게 들을까 스스로 삼가라 누구든지 있는 자는 받겠고 없는 자는 그 있는 줄로 아는 것까지도 빼앗기리라 하시니라” 오늘 말씀의 제목은 ‘어떻게 들을까 스스로 삼가라’입니다. NIV 성경으로 보면 ‘Therefore, consider carefully what you listen.’이라고 되어 있는데, ‘consider carefully’, 곧 주의 깊게 들으라, 깊이 생각하라는 말씀입니다. 오늘 말씀의 내용은 우리가 잘 아는 씨 뿌리는 자의 비유입니다. 이 말씀은 마태복음 13장, 마가복음 4장에도 비슷한 내용이 나옵니다. 마태, 마가, 누가복음을 공관복음이라고 하는데, 공관복음은 ‘Synoptic Gospels’, 곧 공통된 관점에서 본 복음서라는 뜻입니다. 다른 복음서로는 요한복음이 있습니다. 요한복음은 다른 관점에서 보았습니다. 공관복음은 예수님을 밖에서 본 것이라고 한다면, 요한복음은 예수님을 그분 안에서 본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은 예수님을 왕으로 보고, 마가복음은 섬기는 종으로 보고, 누가복음은 예수님을 인자, 곧 사람 되신 분으로 봅니다. 요한복음은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봅니다. 본문은 공관복음에 다 기록된 것으로, 우리 공부하는 스타일상 우리가 빼놓지 않고 공부하기 때문에 항상 매년 공부하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좀 너무 익숙하고 지루하기도 한 말씀이라고 할 수 있죠. 그래서 오늘은 이 본문을 그냥 읽고 나가는 식이라기보다는 약간 대화식, 광고식 메시지로 섬기고자 합니다. 오늘 말씀의 결론은 말씀을 잘 받으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100배의 결실을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제목 ‘어떻게 들을까 스스로 삼가라’에 따라 우리가 조금 더 말씀을 깊이 듣는 자세에서 성장하기를 기도합니다. 4절을 보겠습니다. “각 동네 사람들이 예수께로 나아와 큰 무리를 이루니 예수께서 비유로 말씀하시되“ 각 동네 사람들이 예수님께 나아와 큰 무리를 이루었습니다. 예수님이 이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십니다. 비유라는 것은 원어로 보면 ‘옆으로 던진다’는 뜻인데,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견주어 설명하는 것을 말합니다. 비유로 가르치면 어떤 장점이 있죠? 추상적일 수 있는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아주 쉽게 재미있게 가르칠 수 있습니다. 비유는 그림 언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마음에 그림이 들어와야 비주얼로 기억에 잘 남습니다. 그림 언어가 제일 많이 사용된 성경은 요한계시록입니다. 그림 언어를 사용하면 또한 어떠한 장점이 있냐 하면, 자기의 지적 수준, 또 영적 수준에 따라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어린 아이든지 어른이든지 지식인이든지 평범한 사람이든지 자기 수준에 맞게 해서 포인트를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장점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비유의 천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은 진리의 마스터, 진리를 완전히 알고 계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확실하게 아는 사람이 가장 쉽게 가르칠 수가 있습니다. 4절을 보면 쉽게 비유로 말씀하시는데 그 내용은 우리가 잘 아는 농부가 밭에 나가 씨를 뿌리는 비유입니다. 그런데 네 가지 다른 종류의 땅에 씨가 떨어지죠. 밭이 아닙니다. 땅에 떨어집니다. 길가도 있고 돌밭도 있는 것을 보니까 땅에 떨어졌습니다. 첫째가 무엇입니까? 길가 밭. 아스팔트 같은 길이 아니라 사람들이 밟고 다니고 마차가 지나다녀서 딱딱해진 길을 말합니다. 여기에 떨어진 씨는 어떻게 됩니까? 당연히 심겨지지 않습니다. 땅위에, 길 위에 그냥 있다가 공중의 새가 보고 와서 이게 웬 떡이냐 하고 와서 먹어버립니다. 둘째로 6절을 보면 바위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바위는 암석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암석 같은 돌 위에 얇은 흙이 덮인 그러한 돌밭을 말합니다. 큰 돌이 있는데 그 위에 흙이 약간 덮여 있는 상태를 말합니다. 여기에 씨가 떨어졌습니다. 흙이 부슬부슬해서 잘 심겨집니다. 그런데 무엇이 문제입니까? 6절을 보니 습기가 없어서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말라 버렸습니다. 세 번째, 7절을 보면 더러는 가시떨기 속에 떨어졌다고 되어 있습니다. 보통 가시떨기는 숲이 우거지고 습한 곳에서 가시떨기가 잘 자랍니다. 땅에 물기가 많습니다. 그래서 흙 속에 있는 양분이 물이 용해해서 식물에게 잘 흡수가 됩니다. 씨가 잘 자라죠. 문제는 가시가 함께 왕성하게 자라서 씨에 갈 양분을 가시가 가져간다는 것입니다. 제가 1993년에 영국에 회사 주재원으로 평신도 선교사로 나갔을 때입니다. 영국이 어떤 곳인지 제가 잘 모르기 때문에, 처음 1년간은 조금 적응하기 위해서 런던 북쪽에 비교적 좋은 주택가에 집을 얻었습니다. 한국에서 단칸방에 살고, 재래식 화장실을 쓰다가, 샤워하려면 연탄창고에 들어가서 샤워하고, 연탄 때던 그런 시절에 살다가 영국에 가서 2층집을 얻었습니다. 거기 또 3층도 있는데 공부할 수 있는 다락방이었습니다. 10평쯤 되는 정원도 있었습니다. 이런 집에 살다 보니까 완전히 새로운 인생을 사는 것 같았어요. 정원에 잔디가 초록색으로 나타나는데 너무나 보기가 좋았습니다. 보기는 좋았는데 이게 어떤 문제가 있냐면 일주일에 한 번, 여름에는 두 번씩은 풀을 깎아 줘야 되었습니다. 잔디를 깎아주고 잡초를 뽑아줘야 됩니다. 해보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또 평신도 선교사 생활이 얼마나 바쁩니까? 매주 마다 메시지를 써야 되죠, 직장 다녀야죠, 피싱해야 되죠, 일대일 해야 되죠, 잔디 깎을 시간이 어디 있어요? 그러다 보니까 정원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엉망이 되었어요. 풀도 자랄 뿐만 아니라 잡초도 무성해서 잡초가 얼마나 강력한 성장력이 있는지 풀에 갈 양분을 다 가져가 버립니다. 그래서 잔디밭이 바리깡으로 머리를 잘못 깎듯이 듬성듬성 풀이 나고 이상해져 버렸습니다. 제가 이때 배운 것이, 아 잡초는 정말 생명력이 왕성하구나 뽑아도 뽑아도 계속 자라고, 잔디에 갈 양분을 다 빨아먹어 잔디를 죽이는구나 하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런저런 이유로 이사를 했는데 다시는 정원 있는 집으로 안 들어갔습니다. 제가 말하는 포인트는 잡초가 아주 생명력이 왕성해서 이 가시떨기가 씨를 자라지 못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8절을 보면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졌습니다. 백배의 결실을 하였습니다. 이 말을 하시고 예수님께서 외치십니다.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들을 귀’가 있다는 게 무슨 말일까요? 들을 귀가 있고 못 들을 귀가 있습니까? 다른 한글 번역을 다 보아도 다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한 군데, 현대인의 성경만 조금 다르게 번역이 되어 있더군요. 뭐라고 되어 있냐면 ‘귀 있는 사람은 잘 들으라’. 귀 있는 사람? 귀 없는 사람도 있나? 아아. 이것은 영적인 귀를 말하는구나. 영적인 귀가 무엇일까? 이것을 곰곰이 생각하다가 18절을 보니, ‘어떻게 들을까 스스로 삼가라’ 하는 말이구나. 이것이 영적인 귀로 듣는 것, 곧 귀담아 듣는 거구나. 잘 듣고 들은 바를 잘 생각하는 그러한 마음으로 듣는 귀를 말하는구나. 하고 알게 됐습니다. 배우고자 하는 마음, 깨닫고자 하는 마음으로 주의 깊게 듣는 자세, 이것이 바로 들을 귀라는 것입니다. 이런 자세로 말씀을 잘 들으라는 것입니다. 9절부터는 제자들에게 들려주시는 비유의 해설편, 쉽게 설명한 해설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해설을 하시기 전에 한 가지 의미심장한 말씀을 10절에서 하십니다. 10절을 같이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이르시되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다른 사람에게는 비유로 하나니 이는 그들로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앞에서 예수님께서 비유를 사용하여 말씀하시는 이유는 뭐라고 했죠? 누구나 자기 수준에 맞게 쉽게 재미있게 잘 이해할 수 있도록 비유를 사용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의도는 청중이 쉽게 잘 이해하도록 하심입니다. 그런데 어떤 의도도 있습니까? 10절을 보니까 무관심한 사람, 가볍게 여기는 사람, 배우고자 하지 않는 사람은 깨닫지 못한다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아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자, 이 진리의 말씀, 하늘의 비밀을 누가 알게 해 줍니까 누가 깨닫게 해 줍니까? 하나님이 해 주십니다. 하나님이 허락해주셔야지 깨닫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누구에게 이런 은혜를 허락하십니까? 알고자 하는 자, 겸손히 배우고자 하는 자에게, 그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알도록 허락하십니다. 이 시점에서 생각나는 구절 하나가 있습니다. 마태복음 7장 6절입니다.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왜 그렇죠? ‘그들이 그것을 발로 밟고 돌이켜 너희를 찢어 상하게 할까 염려하라’ 개나 돼지에게 좋은 것, 진주나 금반지를 줘도 좋아하지 않습니다. 뭐 이런 걸 줘? 뼈다귀나 여물이나 이런 걸 줘야지. 진주나 금반지 주면 그것 귀중한줄 모르고 화가 나서 짓밟고 들이 받습니다. 개, 돼지에게 그런 좋은 것을 줄 필요도 없고 주어봤자 도리어 해를 입으니 주지 말라는 교훈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비밀은 진주보다도 귀한 것입니다. 거룩합니다. 누구에게 주어집니까? 들을 귀 있는 자에게 주어집니다.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허락되지 않습니다.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여서 그래서 어떻게 될까요? ‘깨닫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이 깨닫지 못하게라는 말, 굉장히 중요한 말입니다. 깨달아야 되는데, 말씀을 듣는 자세가 잘못되어 깨닫지 못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비유로 말씀하시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잘 깨닫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잘못 오해해서 주님이 악한 의도를 갖고 계시다, 주님은 우리를 깨닫지 못하게 하신다, 깨닫지 말도록 하신다, 골탕 먹이신다, 망하라고 하신다 그런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대한 모든 우리의 사고, 생각, 우리의 모든 추론의 결론이 하나님은 악하시다, 하나님은 나쁜 의도를 갖고 계시다, 하나님은 우리가 잘못되길 원하신다, 이런 생각이 들면 틀린 겁니다. 하나님은 절대적으로 의로우시며 절대적으로 거룩하시고 진리시요 절대적인 사랑이시라고 성경은 누누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11절부터 해설편을 한번 보겠습니다. 11절 보겠습니다. 씨는 무엇이죠? “이 비유는 이러하니라 씨는 하나님의 말씀이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12절을 보니까 길가는 무엇이죠? 말씀을 듣지만 말씀이 심겨지지 않아서 마귀가 가서 그들이 믿어 구원을 얻지 못하게 하려고 말씀을 그 마음에서 빼앗는 것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런 마음 밭이라는 것입니다. 말씀을 들을 때, 믿음이 생기고, 믿음이 생길 때 구원을 얻습니다. 그런데 듣는 것도 그냥 듣는 것이 아니고 어떻게 들어야 되죠? 들을 귀로 들을 때. 그래서 깨달을 때. 말씀을 들을 귀로 듣고 깨달을 때, 믿음이 생기고, 믿음이 생길 때 구원에 이릅니다. 자, 그런데 말씀이 들렸습니다. 심겨지진 않았습니다. 마음에 계속 있습니다. 마음에 있으면 또 생각하고 생각하게 되겠지요. 깨달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마귀가 와서 말씀을 빼앗습니다. 마귀가 존재합니다. 마귀는 어떻게 빼앗습니까? 실제로 우리의 삶 가운데 어떻게 빼앗죠? 말씀을 버리도록, 종교는 다 그런 것이야, 그게 말이나 돼? 말씀을 버리도록 설득합니다. 그리고 관심을 다른 데로 돌립니다. 요즘 얼마나 재밌는 게 많아요? 정치뉴스, 대선, 누구를 찍을까 1번? 2번? 3번 찍을까? 이런 말 저런 말, 세상 것에 관심을 갖게 합니다. 게임을 즐기게 합니다, 영화 보게 하고 스포츠 즐기게 하고, 요즘에는 ‘인형뽑기’에 가서 뽑게 합니다. 말씀을 잊도록, 말씀에 관심 갖지 않도록 합니다. 내가 그냥 무관심하고 내가 신경 안 쓰는 것 같지만 실제로 무엇입니까, 마귀가 빼앗는 것입니다. 마귀는 우리가 구원받기를 매우 싫어합니다. 마귀라는 존재는 이 세상에서 최대한 하나님의 구속역사를 방해하지만 결국 영원한 멸망으로 가야 되는데, 그 때 같이 데리고 갈 자들을 열심히 뽑고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마귀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잘 알아야 됩니다. 마귀는 하나님의 대적자요 하나님의 사랑하시는 인생들을 파멸시키는 자입니다. 13절을 보겠습니다. “바위 위에 있다는 것은 말씀을 들을 때에 기쁨으로 받으나 뿌리가 없어 잠깐 믿다가 시련을 당할 때에 배반하는 자요“ 바위 같은 마음이라고 되어 있어요. 얇은 흙이 덮여 있습니다. 말씀을 기쁨으로 받습니다. 아멘, 아 말씀 너무 좋아요, 완존 감동이에요! 말합니다. 그러나 뿌리가 없습니다. 잠깐 믿다가 시련을 당할 때 배반하고 쓰러집니다. 무엇이 없습니까? 깨달음이 없기 때문에 뿌리가 안 내려지는 것입니다. 14절을 보겠습니다. 가시떨기에 떨어졌습니다. 말씀을 들었습니다. 좀 깨닫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지내는 중에 이생의 염려와 재물과 향락에 기운이 막혀 온전히 결실하지 못했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조금 깨달은 듯하지만 별로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기운이 막혀 조금 어려움이 있자 기운이 막혀서 결실을 못합니다. 늘 다른 것에 힘이 빠집니다. 염려에 힘이 가고 돈에 신경 쓰느라 힘 가고, 쾌락에 빠져서 열매를 맺을 힘이 없습니다. 조금 깨달은 것 같은데 뿌리를 못 내린다 이 말입니다. 15절을 보겠습니다. ‘좋은 땅에 있다는 것은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지키어 인내로 결실하는 자니라’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는다고 되어 있습니다. NIV에는 ‘noble and good heart’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noble heart’하면 뭐가 생각이 나죠? 사도행전에 베뢰아 사람이 생각이 납니다. 사도행전 17장에 보면 베뢰아 사람들이 어떻다고 되어 있는가요? 데살로니가 사람보다 더 신사적이다. noble하다. 착한 마음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했다고 되어 있습니다. ‘아멘, 예, 말씀 좋습니다’ 여기서 끝나지 않고 그 말씀을 깊이 생각합니다. 묵상합니다. 성경을 뒤적이며, 연구하며, 그 말씀의 깊은 뜻을 알고자 자꾸 생각합니다. 겸손한 마음, 진지한 마음, 말씀을 깨닫고자 하는 마음으로 묵상합니다. ‘consider carefully’ 주의 깊게 깊이 생각합니다. 말씀을 읽고 또 암송하고 기도합니다. ‘주여, 이 말씀 깨닫게 해 주시옵소서.’ 간절히 기도합니다. 제가 한번 한 유명한 설교가에 대한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분은 말씀을 깨닫고자 그렇게 애를 썼습니다. 어떤 한 분이 그 유명한 분이 돌아가시고 나서 그 분 집에를 심방 갔는데 그분의 아내가 그 분에 대한 얘기를 합니다. ‘이 분은 말씀을 깨닫고자 얼마나 애를 썼는지 몰라요.’ 그리고 그 분의 방을 보여 주었는데, ‘그 분은 저 구석에서 말씀을 깨닫기 위해서 늘 울었습니다’ 했습니다. 말씀을 깨닫기 위해 늘 울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말씀을 깨달을 때 믿음이 생기고 말씀을 지키게 됩니다. 착하고 좋은 마음은 말씀을 깨닫는 마음입니다.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받아 깨달을 때 마음에 기쁨이 생깁니다. 말씀을 깨달으면 방향이 나옵니다. 답답했던 마음이 탁 풀립니다. 마음이 든든해지고 믿음이 생깁니다. 확신도 생기고 여유가 생깁니다. 누가복음 24장에 보면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가 근심과 걱정이 많았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만나, 가는 길에 대화했습니다. 나중에 그들이 뭐라고 했습니까? ‘그가 길에서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눅24:32) 예수님이 성경을 잘 풀어 설명해 주시자, 그들이 말씀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깊이 깨달을 때 어떤 믿음이 생겼냐면, 아아, 사람이 죽는 게 끝이 아니구나. 죽은 사람이 다시 사는구나. 부활이 있구나. 이것을 다 믿게 되었을 때, 그 마음의 모든 근심과 걱정이 다 사라졌다 이런 말입니다. 제가 최근에 묵상한 말씀 중에 골로새서 2장 15절 말씀이 있습니다. 개역한글에 보면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정사와 권세를 벗어버려 밝히 드러내시고 십자가로 승리하셨느니라’ 예수님은 십자가로 승리하셨다고 되어 있습니다. 우리도 그런 말 가끔 씁니다. ‘십자가로 승리하세요!’ 무슨 말이죠? 십자가로 승리하라? 아니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무슨 승리를 하셨죠? 그냥 비참하게, 고통스럽게, 너무나 처절하게 죽으셨잖아요? 그런데 이것이 뭐예요? 승리하셨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죽는 것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서, 원수도 사랑하는 마음으로 자기가 죽는 것, 자기가 지는 것, 자기가 손해 보는 것, 자기를 버리는 것이 승리하는 것이다 이 말입니다. 남을 짓밟고, 높은 위치를 차지하고, 권세를 누리는 것이 승리라고 생각하는데, 낮아지고 겸손히 섬기고, 대속의 죽음을 죽는 것 이것이 승리라고 골로새서 2장 15절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어제도 히브리서 2장 9절 말씀을 암송했습니다. ‘죽음의 고난 받으심으로 말미암아 영광과 존귀로 관을 쓰신 예수를 보니’. ‘죽음의 고난 받으심으로 말미암아 영광과 존귀로 관을 쓰신 예수를 보니’ 우리는 영광의 관, 존귀의 관을 쓰신 예수님을 사랑합니다. 찬양합니다. Praise the Lord! Glory to Jesus! 그런데 그가 어떻게 영광과 존귀의 관을 쓰셨습니까. ‘죽음의 고난 받으심으로 말미암아 영광과 존귀의 관을 쓰신 예수를 보니.’ 죽음의 고난 받으심으로 그 관을 쓰셨습니다. 우리도 이런 기도합니다. ‘하나님 제가 영광의 관 쓰기 원합니다. 존귀의 관 쓰기 원합니다 저에게 이런 관을 주십시오. 제게 그런 영광을 주소서. 하나님이 뭐라고 하는지 아십니까? OK, 알겠다, 염려하지 마라 네가 원하는 삶을 살게 해 주겠다. 그 영광과 존귀의 관을 얻도록 죽음의 고난을 받도록 도와주겠다 하십니다. 제가 이 말씀을 깊이 깨달았을 때 그래 나도 성경적인 삶을 살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주님의 양들을 위해, 죽음의 고난의 길을 가야겠다 하는 소원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 이후 얻을 영광과 존귀의 관을 더욱 사모하게 되었습니다. 16, 17절을 보십시오. 등불의 비유입니다. “누구든지 등불을 켜서 그릇으로 덮거나 평상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는 들어가는 자들로 그 빛을 보게 하려 함이라. 숨은 것이 장차 드러나지 아니 할 것이 없고 감추인 것이 장차 알려지고 나타나지 않을 것이 없느니라” 이 비유가 왜 갑자기 여기에 등장할까요? 18절에서 “그러므로”로 연결되는 문장을 볼 때 문맥상 필요한 비유인데 무슨 뜻일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이 비유의 뜻은 간단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감추어져 있는 것 같지만 결국 잘 드러나기 위한 것이며 우리가 겸손한 마음, 들을 귀를 갖고 들을 때 밝히 깨닫게 된다는 것입니다. 18절을 보겠습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어떻게 들을까 스스로 삼가라 누구든지 있는 자는 받겠고 없는 자는 그 있는 줄로 아는 것까지도 빼앗기리라 하시니라” 하나님의 말씀에는 놀라운 능력이 있습니다. 우리를 변화시키는, transform시키는 능력이 있습니다. 사람의 마음을 변화시킵니다. 그 마음이 다른 사람이 됩니다. 믿음의 사람이 됩니다 불신의 사람이 믿음의 사람, 세속적인 사람이 성숙한 사람, 거룩한 사람, 사랑의 사람이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꾸준히 붙들고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받을 때, 내가 바뀝니다. 노력으로 되지 않는데, 율법적 훈련으로 지 않는데, 말씀이 사람을 바꿉니다. 우리가 유네스코 평화회관에서 수양회 많이 했죠? 유네스코 국제규범에 뭐라고 되어 있나요? ‘전쟁은 인간의 마음속에서 생기는 것이므로 평화의 방벽을 세워야 할 곳도 인간의 마음이다.’ 겉에 보이는 행동, 전쟁, 1차, 2차 대전, 엄청난 전쟁도 다 알고 보면, 결국 사람의 마음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마음에 평화의 방벽을 세워야 된다하는 것입니다. 불신자들도 이것을 알고 있습니다. 엊그제 길을 가다 이런 글을 읽었습니다. ‘마음을 움직이는 것이 가장 무서운 일이다’. 그 의미는 마음을 움직이는 것이 가장 큰 일, 가장 근본적인 일이라는 뜻일 것입니다. 말씀은 우리 마음을 움직이십니다. 말씀은 우리 마음을 거룩한 사람, 의로운 사람, 겸손한 사람, 사랑의 사람, 지혜의 사람, 담대한 믿음의 사람으로 변화시킵니다. 일시적인 변화가 아니라 근본적으로 변화시키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귀 있는 마음으로 듣고 간직하여 지킬 때 결실하게 됩니다. 이 결실은 먼저 사람이 변하는 것입니다. 내 중심이 변화되는 것입니다.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의 사도, 믿음의 용사로 우리가 트랜스폼 되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에 이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뭐가 있겠습니까? 우리가 먼저 말씀을 잘 들어야 되겠습니다. 또 말씀을 사랑하고, 읽고, 묵상하고, 암송을 해야 되겠습니다. ‘consider carefully’ 자꾸 묵상하고, 곰씹고 생각을 깊이 할 때, 말씀이 우리 안에 심겨지고, 깨달아지고, 우리의 마음이 변화되고 많은 열매를 맺게 됩니다. 깨닫는 것이 우리의 영혼이 양식을 취하는 순간입니다. 영혼이 힘을 얻고 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최고의 인생은 무엇입니까?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으로 변화되어서 날마다 성장하여 많은 열매를 맺는 삶인 것을 믿습니다. 우리가 말씀을 사랑하고 잘 듣고 묵상하고 암송하는 것을 통해서 날마다, 달마다, 해마다 말씀으로 인해 내적으로 우리가 더 거룩해지고, 더 겸손과 사랑의 사람, 믿음의 사람, 외적으로도 섬김과 봉사의 사람, 전도의 열매가 있는 풍성한 삶을 살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어떻게 들을까 스스로 삼가라 누구든지 있는 자는 받겠고 없는 자는 그 있는 줄로 아는 것까지도 빼앗기리라 하시니라’(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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