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신년 2강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말씀 / 디모데전서 6:3-21 요절 / 디모데전서 6:12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영생을 취하라 이를 위하여 네가 부르심을 받았고 많은 증인 앞에서 선한 증언을 하였도다” 4장에서 바울은 디모데에게 경건에 이르도록 자신을 연단하라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연소함을 업신여기지 못하게 하고 더 성숙해지도록 권면했습니다. 5장에서는 교회 성도들을 어떤 태도로 대하며 교회를 어떻게 섬길 것인지를 말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권면하는 내용이 6장입니다.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삶이 흔히 전쟁터로 비유되곤 합니다. 직장도 생존과 승진을 위한 전쟁터이고 학교도 입시와 학점을 위한 전쟁터입니다. 아침마다 밥상 위가 전쟁터가 되기도 합니다. 숨도 안 쉬고 밥을 순식간에 넘기고 학교와 일터로 뛰어나갑니다. 사는 게 전쟁인데 무슨 싸움을 또 하라는 말인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과연 우리가 진정으로 싸워야 할 싸움이란 어떤 싸움입니까? 본문을 통해 새해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를 기도합니다. 바울이 디모데전서를 기록하게 된 것은 교회 내에 다른 교훈이 퍼지는 것에 대한 우려 때문이었습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이 넘쳐나야 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런데 다른 교훈이 말해지고 학습되고 있었습니다. 다른 교훈은 신화와 족보에 관련된 것들이며 영지주의나 유대 율법주의에 관련된 가르침들입니다. 이는 교회의 근간이 흔들리는 일이었습니다. 바울은 이에 대한 우려를 1장 초반부터 6장 편지가 끝날 때까지 계속하고 있습니다. 21세기 지금의 교회 상황도 비슷합니다. 교회 안에 바른 말씀보다 다른 교훈이 더 들려지고 있습니다. 예수 믿고 형통하고 성공한다는 구복주의 신앙, 성공주의적 가르침이 퍼지고 있습니다. 병이 낫는다든지 입학이나 취업에서 승리해야 믿음이 좋은 것으로 비춰집니다. 우리 같으면 양이 많고 제자의 열매가 풍성해야 신앙생활을 잘 한 것입니다. 어떤 선교사가 집회에 초청을 받았다가 그가 당한 질병과 자녀의 죽음과 사업 실패 등을 듣고는 초청하고자 했던 교회에서 취소를 했다고 합니다. 요즘 그런 얘기를 듣고 은혜 받을 사람이 없다는 것이 이유였습니다. 이것이 가당키나 한 이유입니까? 당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십자가 복음으로 구원을 받았는데 회개와 고난을 배척하는 영지주의가 교회에 들어옵니다. 오직 은혜로 구원을 받았는데 율법을 강조하는 유대주의적 교훈이 신자들을 미혹하니 정신이 제대로 된 신자라면 분노가 폭발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런 심정을 안고 말합니다. 3-5절을 보겠습니다. 누구든지 다른 교훈을 하며 바른 말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경건에 관한 교훈을 따르지 아니하면 그는 교만한 사람이고 아무 것도 알지 못하는 사람이고 변론과 언쟁만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못을 박습니다.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교회 안에서 그리스도의 말씀과 교훈에서 벗어난 다른 것을 말하는 사람은 교만한 사람입니다. 교만하여 아무 것도 알지 못하면서 마치 구원의 모든 지식을 아는 사람인양 말하는데 실은 변론과 언쟁을 하고 싶어 하는 사람이며 그런 사람 때문에 투기와 분쟁과 비방이 발생한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마음은 부패해질 대로 부패해지고 진리는 상실했고 그들은 경건(신앙)을 이익의 방도(돈벌이 수단) 정도로만 생각합니다. 신앙을 돈벌이의 수단으로 생각하니 돈만 벌 수 있다면야 별의별 신앙적인 요소들을 다 이용하여 마케팅을 할 것입니다. 이런 자들끼리 모여서 다툼이 일어나 교회는 파국으로 치닫게 됩니다. 결국 말씀과 경건에 착념하지 않으면 말쟁이들과 신앙을 돈벌이에 이용하려는 사람들만 늘어나 공동체에 다툼과 분열이 심화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바울은 ‘자족’에 대해 말씀합니다. 6절을 봅니다. “그러나 자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은 큰 이익이 되느니라” 뭔가 크게 얻거나 성공하려고 하지 말고 자족하는 마음을 갖도록 말합니다. 자족하는 마음으로 신앙생활을 할 때 크게 유익하다는 것입니다. 세상일은 욕심을 부려야 잘 된다고 말할지 모르지만 영적인 일은 자족을 해야 잘 됩니다. 자족한다는 것은 현실에 안주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변화 발전시켜야 할 것을 도외시하며 산다는 말도 아닙니다. 어떤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있음을 믿고 현실에 감사하며 사는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에 아무 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습니다. 금수저를 물고 태어난 사람이 있다고 하지만 정말 금수저를 쥐고 태어나는 사람은 없습니다. 아무 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고 또 아무 것도 가지고 가지 못합니다. 이집트의 파라오들은 내세에서도 왕으로 살고자 왕이 되는 순간부터 피라밋을 건축하고 온갖 부장품들을 안치하였습니다. 진시황도 자신의 사후를 생각하고 39년간 340여만 명의 인부들을 동원하여 지상의 황궁을 그대로 재현한 "진시황릉"을 조성했습니다. 50㎢에 달하는 엄청난 크기의 부지에 수많은 보물들을 묻었는데 6000개의 병마용갱들과 40대의 전차도 있습니다. 그가 49살에 죽으며 이 모든 것을 가지고 갔습니까? 동전 하나 가지고 가지 못했습니다. 워렌 버핏이나 미 대통령 당선자 트럼프도 어마어마한 부자이지만 빅맥 하나와 콜라 한 잔으로 한 끼를 해결합니다.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으면 족한 줄로 알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히 13:5은 말합니다. “돈을 사랑하지 말고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알라 그가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결코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결코 버리지 않으시고 떠나지 않으시는 하나님을 믿을 때 우리는 자족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빌4:13에서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고 했습니다. 부자로 살아도 감사하고 가난하게 살아도 감사하고 부자로 살아도 사명인으로 살 수 있고 가난하게 살아도 사명인으로 살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말입니다. 주님이 그런 능력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육신의 부모는 나를 버릴 수 있습니다. 세상은 나를 모른 척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나를 버리지 않으십니다. 나를 도우십니다. 주는 나를 돕는 이시니 내가 무서워하지 아니하겠노라고 했습니다(히13:6). 자족이 신앙을 성장시킵니다. 자족이 경건의 열매를 맺게 합니다. 탐욕은 이단적인 다른 교훈에 빠져들게 합니다. 신앙을 퇴보시킵니다. 바울은 자족하기를 권면합니다. 9,10절을 봅니다. ‘부하려 하는 자들’로 시작합니다. 부한 자들이 문제가 아니라 부하려 하는 소원을 가진 것이 문제입니다. 문제를 정확히 진단해야 합니다. 부자들이 문제가 아닙니다. 부하려고 하는 마음이 문제입니다. 부하려고 하는 마음은 부자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가난한 자들에게도 있습니다. 부자가 되고자 애쓰는 사람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욕심에 떨어진다고 말합니다. 그러면 부자가 되지 말라는 말인가? 돈도 벌지 말라는 얘기로 오해해서는 안 됩니다. 자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재물에 관련된 정보나 이야기에 과도하게 이끌리지 않습니다. 상도를 벗어나는 방법으로 재물을 얻고자 한다든지 불로소득 하고자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부자가 되려는 마음이 있으면 재물에 관련된 정보나 이야기가 귀와 눈에 쏙쏙 들어옵니다. 일확천금, 대박, ‘나도 청담동 페라리의 주인공이 될 수 있다’ 이런 기사에 눈이 확확 돌아갑니다. 그래서 끌려갑니다. 그런데 그곳에는 시험과 올무가 모습을 숨기고 함정을 벌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를 아차 하는 순간에 잡아 삼킵니다. 그런 줄도 모르고 욕심을 더 부리다가 더 깊은 함정으로 빠져 들어가 마침내 파멸과 멸망에 이르고 맙니다. 그들은 나중에 자신을 시험에 들게 하고 함정에 빠트린 사람이나 규범을 원망합니다. 그러나 변명하지 말아야 합니다. 스스로 미혹된 것입니다.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입니다. 일만 악의 뿌리라는 것은 돈을 사랑하는 마음이 수많은 죄의 원인이 된다는 것입니다. 표면적으로는 다른 죄인데 추적해 들어가면 그 죄가 나옵니다. 눅12장에는 한 사람이 예수님에게 와서 자기 형을 명하여 자신과 유산을 나누라고 말해달라고 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는 억울했고 정의롭지 못한 형이 미웠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람의 생명이 소유의 넉넉함에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하시면서 문제의 본질이 재물에 대한 탐심임을 지적하셨습니다. 가룟 유다는 혁명 대신에 십자가를 지러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예수님께 실망하여 은 30에 팔아버립니다. 성경은 그가 본질적으로 돈을 사랑하는 자였기에 예수님을 배반했다고 말합니다. 표면적으로 전혀 다른 죄처럼 보이는데 뿌리에는 돈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21세기는 돈이 최고의 위세를 떨치고 있는 자본주의 시대입니다. 성경을 패러디 하면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돈이 있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 라고 말하는 시대입니다. 그런데 돈 때문에 가족이 갈라지고 형제간의 의가 상하고 사람이 죽고 죽이고 나라가 부도나는 일이 벌어집니다. 국정농단 비선실세 헬조선 같은 말들이 어디서 나온 것입니까? 돈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마음이 나라를 이 지경으로 만들어놓은 것입니다.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어서 모든 악을 양산할 뿐 아니라 돈을 탐낸 자 스스로가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납니다. 마치 바알을 섬기면 여호와를 떠나듯이 돈을 섬기면 믿음을 저버리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다가 나중에 후회하고 자책하고 많은 근심으로 자기를 찌르며 고통스럽게 살아갑니다. 바울은 이런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를 향해 추상같은 어조로 외치십니다. 11절을 봅니다. “오직 너 하나님의 사람아!” ‘오직’이란 말은 ‘세상은 그렇게 살지라도 오직 너는’ 이란 말입니다. 영적 지도자는 세상 흐름대로 사는 사람이 아닙니다. 롬 12:2에서도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누구입니까? “너 하나님의 사람아!”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세상의 사람이 아니고 배달의 민족이 아니고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위해 사는 사람이요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첫째, 피하라! 이것들을 피하라고 말합니다. 자족하지 못하고 부하려 하고 돈을 사랑하는 분위기에서 떠나라는 것입니다. 근처에는 얼씬거리지도 말아야 합니다. 둘째, 따르라! 피한 다음에는 적극적으로 따라야 할 것이 있습니다.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따르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전부 내적인 성품이고 마음의 자세와 관련된 것들입니다. 우리들이 추구해야 하는 것은 눈에 보이는 외적인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닮은 내적 성품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관심이 돈이 아니라 예수님이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보여주신 신성한 성품을 따라가기를 기도합니다. 셋째, 싸우라! 12절을 봅니다.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영생을 취하라 이를 위하여 네가 부르심을 받았고 많은 증인 앞에서 선한 증언을 하였도다”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고 말씀합니다. 신앙은 싸우는 것임을 깊이 받아들여야 합니다. 싸우지 않고 물러서는 것이 미덕이 아닙니다. 사람들과 싸우라는 말은 아닙니다. 지난 해 특공대로 배운 요한계시록의 핵심 중의 하나가 싸우는 교회였습니다. 짐승과 음녀와 용과 바벨론이 공존하는 시대에 그들과 싸우는 것이 교회의 사명이었습니다. 싸운다는 말에는 신앙이 적당히 안주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님을 의미합니다. 또한 지려고 싸우는 사람은 없습니다. 싸운다는 말에는 이겨야 한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누구든지 싸움에서 지면 이긴 자의 종이 되는 법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우리의 싸움의 대상이 누구입니까? 어떤 분들은 동역자들과 싸웁니다. 4,5절에서 바울은 투기와 분쟁과 비방과 다툼 등을 이야기 했는데 그것들은 동역자들과의 싸움이었습니다. 동역자와 싸워 이기고자 합니다. 자기 아내, 자기 남편과 싸워서 이기고자 합니다. 심지어 자녀들과 싸워서 이겨먹고자 합니다. 또 싸우되 주로 돈을 갖고 싸웁니다. 한 푼이라도 더 벌고자 돈을 놓고 사람들과 싸웁니다. 그것은 선한 싸움이 아닙니다. 악한 싸움입니다. 선한 싸움은 죄와의 싸움입니다. 시대와의 싸움이요 복음을 위협하는 이단적인 가르침들과의 싸움입니다. 또한 내면의 자족을 모르는 마음과의 싸움, 부 하려고 하는 마음과의 싸움, 돈을 사랑하는 마음과의 싸움이 선한 싸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경건에 관한 교훈을 무시하는 영지주의, 율법주의 등 다른 교훈들과의 싸움이 우리가 싸워야 할 싸움입니다. 바울은 그런 싸움을 싸워왔습니다. 고전15:32에서 그는 에베소에서 맹수와 더불어 싸웠으면 무슨 유익이 있었겠느냐고 했습니다. 거기서 맹수는 그의 선교를 방해하는 유대인들을 말합니다. 그들과 싸우면 아무 득이 될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는 차라리 그들 앞에서 날마다 자신을 죽이는 싸움을 했습니다. 자기의 혈기와 교만을 꺾고 섬기고 낮아지고 부활복음을 위해 십자가를 지는 싸움을 했습니다. 딤후 4:7에서는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만난 순간부터 로마에서 순교하는 그 날까지 선한 싸움을 싸웠습니다. 시대의 물질주의는 가만히 있어도 싸움을 걸어옵니다. 멍 때리다가는 영혼이 사냥을 당합니다. 또한 다양한 다른 교훈들이 사람들의 마음을 흔듭니다. 바울은 감옥에서도 기도와 편지로 싸웠습니다. 교회들에게 올바른 교훈을 전하고 복음에 굳게 서도록 도와주면서 싸웠습니다. 그의 싸움의 정신이 13개의 서신서를 쓰게 했고 그것이 오늘날 성경이 되었습니다. 오늘날 물질주의, 상대주의 같은 인본주의 사상만 아니라 신천지, 구원파를 비롯한 이단의 가르침들이 교회에 파고듭니다. 이런 거짓된 사상들과 무엇으로 싸워야 합니까? 엡6:17에서 바울은 싸우는 우리들에게 있어 유일한 무기는 성령의 검인데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말씀으로 싸우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들에게 있는 말씀이 더 날카롭고 더 강하게 단련되어 있어야 합니다. 히4:12을 보면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 라고 했습니다. 이런 말씀을 무디게 방치해서는 안 됩니다. 군대에서 총기는 제 2의 생명이라고 했습니다. 훈련을 마치고 들어오면 손발을 씻기 전에 먼저 하는 것이 총기를 손질하는 것입니다. 분해해서 기름걸레로 샅샅이 닦습니다. 간혹 총알을 발사하는데 장전이 안 되거나 약실에서 탄피가 빠지지 않거나 총알이 안 나가는 것은 대부분 손질 불량입니다. 그런 반동 병사는 하루 종일 연병장을 돌아야 합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맡기신 말씀을 읽고 붙들고 기도하고 묵상하여 말씀이 내 입술과 머리와 가슴에서 최적화되어 언제든지 성령의 검으로 발사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또한 이 싸움은 혈과 육으로, 내 능력과 힘으로 할 수 없는 싸움입니다. 하나님이 능력을 부어주셔야 하고 성령의 역사를 이루어주셔야 합니다. 이를 위해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오 세상에 오신 구주이심을 믿어야 합니다. 이 믿음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오직 믿음으로만 감당할 수 있는 싸움이기에 믿음의 선한 싸움입니다. 넷째, 취하라! 싸우는 자들이 바라는 것이 있습니다. 명예일 수도 있고 부일 수도 있습니다.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는 자들이 바라는 것은 오직 하나, 곧 영생입니다. 영생을 취하고자 싸우는 것입니다. 영생이 아니라면 한번뿐인 인생 싸우며 살 필요가 없습니다. 쉬엄쉬엄 살지 미쳤다고 자기 부인하며 죄와 싸웁니까? 또한 이 말씀은 선한 싸움을 싸울 때에만 영생을 현재적으로 체험한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선한 싸움을 하지 않는 자에겐 영생이 없습니다. 물질주의와 각종 죄악에 지배당하는 사람의 내면에 영생이 임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합니다. 적극적으로 선한 싸움을 하는 자만이 영생의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다. 새해에는 믿음의 선한 싸움을 지속적으로 감당하여서 우리 속에 영생의 기쁨이 충만히 넘치기를 기도합니다. 바울은 디모데가 이 싸움을 하도록 하나님이 부르셨다고 말합니다. 또한 많은 증인 앞에서 이 싸움을 싸우겠노라고 선서했다고 말합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베드로서에서 베드로는 우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도록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셨다고 표현합니다. 바울은 우리가 선한 싸움을 싸우도록 하나님이 부르셨음을 선포합니다. 이 싸움이 우리를 부르심의 취지에 부합시키고 신자답게 제자답게 살아가게 합니다. 그러니 이런 삶을 살아도 좋고 안 살아도 좋은 것이 아닙니다. 만물을 살게 하신 하나님 앞과 본디오 빌라도를 향하여 선한 증언을 하신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내가 너를 명한다고 말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까지 흠도 없고 책망 받을 것도 없이 이 명령을 지키라고 말합니다. 올 해 이러한 싸움을 싸우라는 명령을 온전히 지켜서 싸움을 승리할 뿐 아니라 우리를 부르신 하나님께 영광이요 우리 심령에도 영생의 기쁨이 충만하기를 기도합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부자들에게 권하는 바를 말합니다. 17-19절입니다. 이 세대에 부한 자들이 있습니다. 교회 안에도 부자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부하려고 하는 자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축복하심으로 이미 부자가 된 사람들입니다. 그들에게 무슨 말을 하라고 합니까? 마음을 높이지 말도록 하라고 말합니다. 일단 재벌이면 교만해지기 쉽습니다. 가난한 자들에 비해 부지런했기에 이렇게 이루었다는 마음에 교만해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복을 주신 것이기에 마음을 높일 아무 근거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또 가져가시면 바닥에 나 앉는 것도 한 순간입니다. 그러므로 마음을 높이지 말고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아야 합니다. 정함은 하나님에게만 있습니다. 그는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시고 누리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그에게만 소망을 두고 사는 것이 물질에 지배당하거나 물질에 상처받지 않는 길입니다. 부자는 재물을 어떻게 쓰느냐가 참으로 중요합니다. 선을 행하고 선한 사업을 많이 하고 나누어 주기를 좋아하며 스크루우지 영감처럼 되지 말고 너그러운 자가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장래에 자기를 위하여 좋은 터를 쌓고 참된 생명을 취하는 일입니다. 예수님도 너희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라 거기는 좀도 먹는 일이 없고 동록이 해하는 일도 없고 도둑을 당하는 일도 없다고 하셨습니다(마6:20). 선한 사업에 쓰고 나누어 주는 것이 복을 받는 길입니다. 35년 동안 약 9조원을 익명으로 기부해 온 아일랜드계 미국 갑부 찰스 F 피니(86)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가 지난해 말 700만 달러(약 83억 원)를 모교인 코넬대에 기부함으로써 마지막 재산까지 사회에 환원했습니다. 이로써 그는 살아생전 전 재산을 기부하겠다는 약속을 지켰다고 합니다. 피니는 공항면세점 체인을 설립하면서 거부가 됐습니다. 거액을 기부했지만 그의 삶은 소박합니다. 현재 샌프란시스코에 있는 임대아파트에서 부인과 함께 살면서 여행할 때 버스를 타고 다닙니다. 뉴욕에 살 때는 맨해튼 변두리의 허름한 식당에서 햄버거를 즐겨 먹었습니다. 피니의 기부금 중 27억 달러(3조2000억 원)는 5개 대륙, 1000여 개 기관에 전달됐는데 그가 한사코 사양해 이 중 어느 곳도 벽이나 명예의 전당에 그의 이름을 올리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는 기부하는 이유를 묻는 질문에 “아무리 돈이 많아도 바지 두 벌을 입고 다니는 사람은 없다”고 대답했습니다.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으면 족한 줄로 여기며 모든 것을 기부한 그야 말로 진정한 부자이며 물질주의와의 싸움에서 승리한 사람입니다. 바울은 마지막으로 다시 한 번 망령되고 헛된 말과 거짓된 지식의 반론을 피하라고 말합니다. 이것들을 따르는 사람들이 있어 믿음에서 벗어났으니 이런 것을 피하고 그가 부탁한 것을 지키라고 말합니다. 그것은 앞에서도 말한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이며 경건한 관한 교훈입니다. 곧 성경 말씀이 유일한 희망이며 은혜의 원천임을 밝힙니다. 말씀의 은혜를 새롭게 받는 새해가 되길 기도합니다. 결론입니다. 우리는 수많은 다른 교훈들과 가르침이 넘쳐나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인본주의, 상대주의, 물질주의 등이 우리의 생각과 마음을 뒤흔듭니다. 이 시대의 화려한 문화와 대중매체들은 부자가 되라고 하며 돈을 사랑하도록 부추깁니다. 욕망이라는 전차는 자족이라는 브레이크가 파열된 채 파멸로 치닫고 있습니다. 이런 우리를 향해 본문은 “오직 너 하나님의 사람아,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소리칩니다. 이를 위해 부르심을 받았다고 말합니다. 말씀을 붙들고 물질주의와 다른 교훈들과 믿음으로 싸워 승리하는 한 해가 되길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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