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누가복음 제 16 강 하나님의 그리스도 말씀 / 누가복음 9:18-36 요절 / 누가복음 9:20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하나님의 그리스도시니이다 하니” 오늘 본문은 9:18-36절입니다. 앞부분 9:1-17절은 예수님이 열두 제자를 전도여행 보내시고, 그 이후 오천 명을 먹이신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부분에서 우리가 배운 것은 첫째, 복음역사를 섬기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주님이 주시는 영적 능력과 권세를 덧입어야 한다는 것 둘째, 우리가 하나님 한 분을 믿는 믿음에서 성장해야 하며 또한 그런 제자들을 양성해야 한다는 것 셋째, 어떤 상황에서도 오병이어를 드리는 믿음이 있으면 무리를 먹일 수 있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오늘 9장 후반부는 예수님이 제자들로부터 신앙고백을 받으시는 내용과 변화산 사건입니다. 본문을 통해 우리가 예수님은 ‘하나님의 그리스도’라는 고백을 새롭게 하며 영광스런 소망 가운데 주님을 따르는 제자의 길을 가기를 기도합니다. 18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따로 기도하실 때에 제자들이 주와 함께 있더니 물어 이르시되 무리가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18절은 "예수께서 따로 기도하실 때에"라고 하면서 시작합니다. 누가복음을 보면 예수님이 기도하셨다는 기록이 나오면 그 뒤에는 항상 중요한 결정을 하시는 내용이 나옵니다(4:32-복음 전파 방향, 6:12-열두 사도를 세우심, 9:28-변형되심). 여기에서도 "예수께서 따로 기도하실 때에"하시면서 무엇을 하시나요?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물으십니다. "무리가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이 질문은 별 부담 없이 답할 수 있는 것입니다. 소위 ‘카더라’ 통신대로 들은 바를 말하면 됩니다. 정답이 있는 것도 아니고 무슨 대답을 하던 자기들과 별로 상관이 없습니다. 제자들이 대답합니다. 19절을 보십시오. "대답하여 이르되 세례 요한이라 하고 더러는 엘리야라, 더러는 옛 선지자 중의 한 사람이 살아났다 하나이다." "예수님, 어떤 사람은 예수님이 추상같은 목소리로 바리새인들을 책망하신 것을 들었는지 세례 요한이라고 하던데요. 어떤 사람은 예수님이 가난하게 사시며 전도하시는 것을 보고 엘리야 선지자가 나타났다고도 합니다. 어떤 사람은 말씀을 권세 있게 가르치신다고 옛 선지자 중의 하나가 살아났다고도 합니다. “ 세례요한이나 엘리야나 옛 선지자나 이들의 특징은 한 마디로 위대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이 첫 번째 질문을 하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이는 다음의 본론적인 질문을 위해 제자들의 마음을 미리 준비하도록 하심입니다. 다른 사람들의 의견을 답하면서 그들 스스로, ‘나는 예수님을 어떤 분이라고 고백할 수 있을까’생각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실상 예수님은 다른 사람들이 무엇이라 말하는지는 관심이 없으셨습니다. 제자들의 답에 대해 코멘트 하지 않으시며 의도하신 질문을 하십니다. 20a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이 질문은 예수님이 즉흥적으로 하신 것이 아닙니다. 제자들을 위해 간절히 기도하신 후에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지상에서의 두 가지 핵심 사역이 무엇일까요? 복음의 완성과 열두 제자 양성입니다. 십자가에 죽으심과 부활을 통한 인류의 죄문제 해결, 곧 복음의 완성과 그 복음을 전할 교회공동체의 기초가 되는 제자들을 세우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지금까지 열두 제자들을 따로 세워 훈련하셨습니다. 온 힘을 다해 섬기셨습니다. 경제학에서 자산운용의 원칙이 ‘모든 달걀을 한 바스켓에 넣지 말라’입니다. 분산투자를 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의 주어진 시간과 에너지를 모두 한 바스켓에 넣으셨습니다. 열두 제자 양성에 올인하셨습니다. 이것이 실패하면 예수님의 구속역사도 실패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제는 예수님의 사역의 마지막 기간으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셔야 합니다.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복음을 완성해야 합니다. 이 순간에 열두 제자들의 신앙고백을 받고자 하신 것입니다. 그동안 약 3년간 훈련을 받았는데 이제 기말고사를 보는 것과 같습니다. 그 모든 훈련과정의 목적은 그들이 예수님을 아는 것이었습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짧지만 분명한 이 질문은 핵심적인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주님을 인격적으로 잘 알도록 3년간 교육하셨습니다. 베이비씨팅하듯이 섬기셨습니다. 이를 볼 때 우리도 사람들을 도울 때 도달해야할 첫 째 목표가 무엇인지 알게 됩니다. 그것은 그들로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알도록 하는 것입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라는 예수님의 질문은 우리의 일생에서 가장 중요한 질문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을 누구로 아느냐 하는 것에 구원이 달려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17:3) 우리는 이 고백을 하도록 돕기 위해 조급한 마음을 버리고 인내심을 갖고 성경을 가르치고 예수님의 말씀을 순종해 보도록 도와야 합니다. 말씀을 통한 성령의 역사를 위해 간절히 기도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잘 알지 못한 채 경건의 모양에 열심을 내는 것은 사상누각입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하는 이 시험에 패스한 사람만이 진정으로 구원을 얻고 주님의 제자의 길을 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다른 제자들이 머뭇거리고 있을 때 베드로가 선두를 치고 나와 말합니다. 20b을 보십시오.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하나님의 그리스도시니이다 하니." "하나님의 그리스도시니이다." 정확한 대답이었습니다. 마태복음에서는 예수님이 베드로의 대답을 들으시고 말씀하십니다.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마16:17).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셔서 베드로가 정답을 말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고백한대로 예수님은 ‘하나님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그리스도가 무슨 뜻일까요? 갑자기 나타난 그리스도, 자칭 그리스도가 아니라, 하나님이 약속하셨던 그 그리스도, 하나님이 보내주신 그 그리스도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라는 말은 원어로 기름부음을 받은 자라는 뜻입니다(the anointed). 우리는 기름부음을 받았다고 하면 옥합을 깨고 통째로 다 쏟아 붓는 것으로 생각하는데, 기름부음의 형태는 세 가지입니다. 통상적으로 기름을 바릅니다. 성막과 성물의 경우, 또 제사장의 경우입니다(출40:9). 또는 약간의 기름을 뿌립니다(출29:21). 어떤 경우는 약간의 기름을 실제로 붓습니다(레8:12). 기름부음의 의미는 성별입니다. 곧 하나님의 특별한 일을 섬기기 위해 그 사람을 구별하여 세우는 것입니다. 구약시대에는 세 종류의 사람이 기름부음을 받았습니다. 선지자와 제사장과 왕이었습니다. 그들은 모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서 중보자로서 일을 하던 사람들입니다. 선지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사람에게 전하는 일을 했습니다. 제사장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서 죄를 속하고 기도하는 일을 했고, 왕은 하나님의 권위를 받아 다스리는 일을 했습니다. 그 기름부음 받은 사람을 모두 ‘그리스도’라고 불렀습니다. 구약시대에 그리스도는 보통명사였습니다(a christ). 그러던 것이 점차 메시야를 의미하는 고유명사가 된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의 고백, 곧 하나님의 그리스도라는 말은 "The Christ of God" 으로 '하나님의 그 그리스도' 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일찍이 인간의 타락 직후에 그리스도를 보내주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을 통해 그 약속을 구체화하시고, 그 이후 줄기차게 여러 선지자들을 통해 약속을 확인해주셨습니다. 마침내 마리아의 몸을 빌려 아들 하나님을 인간의 몸으로 보내셨습니다. 그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그 분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진정한 선지자로서 우리에게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주시는 분이십니다. 그 분은 우리가 처한 문제가 하나님을 떠난 죄 문제라는 사실과, 하나님께 돌아갈 수 있는 길을 제시해주십니다. 또한 예수님은 진정한 제사장으로 우리의 죄 문제 해결을 위해 친히 제사를 드리십니다. 우리의 죄문제는 명상과 도, 참선과 고행을 통해 해결되지 않습니다. 죄의 대가는 피를 요구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참 제사장으로 자신의 피를 흘려 우리를 위한 완전한 속죄를 이루셨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진정한 왕으로 우리를 다스리십니다. 세상 왕은 무력으로 임의로 다스립니다. 세상 왕의 다스림을 받을 때 우리는 비참합니다. 그러나 이 참된 왕 예수님의 다스림을 받을 때 우리는 참으로 자유롭고 행복합니다. 예수님은 그의 백성을 진리의 말씀으로 가르치시며, 죄사함을 주시며, 사랑과 공의로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그리스도이십니다. 이 하나님의 그리스도 예수님께 찬양과 영광을 돌려드립니다! 그런데 우리가 예수님을‘하나님의 그리스도’로 말로만 고백하고 그저 가만히 있기만 한다면 아직 그 분을 모르는 것입니다. 세상 지식은 내가 움직이지 않고도 머리로만 알 수 있습니다. 지구가 태양을 돈다는 사실은 내가 알기만 하고 가만히 있어도 됩니다. 동물은 종류가 150만종, 식물은 30만종, 머리로만 알아도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진심으로 고백하며 가만히 있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예수님이 나의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는 것은, 그 분이 나에게 진리요 생명이요 나의 왕이 되심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를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것은 나의 인생을 온전히 예수님께 맡기겠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마음과 결단이 있을 때 비로소 그를 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하나님이 보내신 나의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것은 나의 인생의 근본적인 터닝의 순간입니다. 나의 인생 최고의 기적의 순간이요 최대 결단의 순간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그리스도시니이다! 고백할 수 있다는 것은 우리에게 임한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입니다. 우리가 이 감격적인 고백을 해 보겠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그리스도이십니다!’우리를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시고 영원히 진리와 사랑으로 다스려주시는 예수님을 날마다 그리스도로 고백하며 그를 더욱 깊이 알아가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의 신앙 고백을 들으시고는 무슨 말씀을 하십니까? 21절을 보십시오. "경고하사 이 말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명하시고." 예수님은 자신이 그리스도라는 말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경고하셨습니다. 로마의 식민 통치를 받던 당시에는 그리스도 대망사상이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리스도는 다윗과 같은 강력한 왕을 의미했습니다. ‘그리스도’라는 말은 극도로 예민한 단어였습니다. 로마제국은 그런 자가 나타나기만 하면 반란을 초기에 진압하기 위해 즉시 체포하여 처형하고자했습니다. 예수님이 그리스도라고 알려지면 그는 백성들로 부터 왕으로 추대됨과 동시에 처형당할 운명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아직 하나님의 때가 되지 않았기에 자신이 그리스도이심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경고하셨습니다. 그러고 나서 제자들에게 가르치시는 바가 무엇입니까? 22절을 보십시오. "이르시되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야 하리라 하시고." 예수님은 자신을 ‘인자’라고 하십니다. 인자(Son of Man)라는 단어는 복음서에 91번 나오고, 복음서 외의 신약 성경에 3번(행7:56, 계1:13, 계14:14)나옵니다. 이는 당시 유대 남자들이 ‘누구의 아들 누구’라고 칭한 것과 비슷하면서도, 그 의미는 다니엘서 7장에 나온 것과 같이 메시야를 의미하는 말입니다. (단 7:13,14‘내가 또 밤 환상 중에 보니 인자 같은 이가 하늘 구름을 타고 와서 옛적부터 항상 계신 이에게 나아가 그 앞으로 인도되매 그에게 권세와 영광과 나라를 주고 모든 백성과 나라들과 다른 언어를 말하는 모든 자들이 그를 섬기게 했으니 그의 권세는 소멸되지 아니하는 영원한 권세요 그의 나라는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니라’) 여기서 ‘인자 같은 이’는 바로 그리스도를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인자라는 말로 지칭하심으로 당시 정치적으로 예민한 상황을 지혜롭게 헤쳐나가신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님은 많은 고난을 받게 됩니다.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바 되어 죽임을 당하십니다. 그러나 그것이 끝이 아닙니다. 제 삼일에 살아나십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복음은 단순히 기록된 스토리나 책이 아닙니다. 복음은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고 죽으시고 제 삼일에 다시 살아나신 사건입니다. 한 마디로 그리스도 사건입니다. 제자들은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지 않고 위대한 제2의 다윗 왕국을 건설할 것을 믿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런 일을 하러 세상에 오신 것이 아닙니다. 인류의 가장 심각한 문제인 죄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을 통해 우리의 죄와 사망의 문제를 해결하시고 누구든지 그를 믿는 자에게 죄사함과 영생을 선물로 주십니다. 죄사함과 영생! 이 얼마나 놀라운 선물입니까! 그러기에 예수님은 이어지는 말씀을 할 수 있으십니다. 23~25절을 보십시오. "또 무리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를 잃든지 빼앗기든지 하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 신자들은 그저 예수 믿고 구원받으면 되는 거고, 제자들은 큰 책임을 감당하기 위해 자기부인 자기 십자가의 길을 가야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말씀을 제자들에게만 주신 것이 아닙니다. 무리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무리에게 이르시면서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이라고 하셨습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예수님을 믿는 무리는 다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이며 예수님을 따르는 모든 사람은 자기부인 자기 십자가의 길을 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기부인이란 자기가 원하는 대로 살고자 하는 본능적 욕망을 부인하는 것입니다. 자기 십자가란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 감당해야할 모든 내적 외적인 짐을 지는 것을 말합니다. 다시 언급하지만 예수님은 이 부담스런 명령의 말씀을 주시기 전에 무엇을 분명히 하셨나요? 복음을 먼저 말씀하셨습니다. 복음은 기쁜 소식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가장 심각한 죄문제를 해결하신 사건입니다. 그 사건을 믿는 자들에게 죄사함과 영원한 부활의 생명을 주십니다. 이 황홀한 소망을 믿을 때 우리는 자기부인 자기 십자가의 길을 능히 갈 수 있습니다. 그다지 어렵지 않습니다. 영광의 복음, 이 화려하고 찬란한 복음을 알 때, 우리는 ‘주님은 나의 그리스도이십니다’ 고백하며 이 길을 기쁨으로 가게 됩니다. 주님께서 우리 눈을 밝히 여사 영광의 복음의 광채를 더욱 밝히 보게 하소서!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이 얼마나 분명하고 진리가 충만한 말씀입니까! 여기서 '제 목숨은' 우리의 현재의 ‘육신의 목숨’입니다. 잃을 것 또는 구원하게 되는 것은 영혼의 생명을 말합니다. 영혼은 우리 자신의 주인공입니다. 그런데 육신의 행동이 영혼의 운명을 결정합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육신의 생명을 위해서 살 때, 곧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고 자기 욕심대로 살 때 어떻게 됩니까? 자신의 영혼이 멸망합니다. 하나님의 생명에서 영원히 끊어져 지옥형벌에 처하게 됩니다. 반면에 세상에서 육신의 생명을 위해서 살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좆아 살 때 어떻게 됩니까? 자신의 영혼을 구원합니다. 그는 결국 부활의 몸도 입고 하나님 나라에서 영원한 복락을 누립니다. 찰나와 같은 순간의 쾌락을 위해 영원히 멸망하는 어리석은 인생을 살 것인가, 잠시의 고난을 감당함으로 영원한 복락에 들어갈 것인가 하는 선택의 문제입니다. 그런데 잠시의 고난을 감당하고자 하면, 주님이 도와주십니다. 이 땅에서의 삶도 기쁘고 행복합니다. 참 자유와 평안을 누립니다. 이야말로 은혜 위의 은혜입니다.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를 잃든지 빼앗기든지 하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너무나 당연한 말씀입니다. 세상 사는 동안 돈을 많이 벌어 온 천하의 제일가는 부자가 되었다고 칩시다. 그러나 곧 이 세상을 떠나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심판을 받고 영원한 지옥 형벌로 들어갈 때, 그의 세상의 부가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세상에 남은 사람이 그를 위해 초호화 장례식을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지혜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세상을 길게 보는 눈을 갖는 것입니다. 나의 이 세상의 삶은 잠시요 곧 영원한 순간이 온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논바닥의 올챙이들은 작은 웅덩이 속에서 서로 살겠다고 막 싸웁니다. 그러다가 조만간 물이 마르면 다 없어지고 맙니다. 잠시 사는 이 세상에서 모든 것을 얻어도 자기 영혼의 구원을 얻지 못하는 자는 말로 다할 수 없이 비참한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영혼의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가 이 그리스도 예수님을 온전히 의지하며 힘써 따르기를 기도합니다. 이상과 같이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교훈은 참으로 귀중하고 생명과도 같은 말씀이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아직 영적으로 어려 복음의 영광스런 소망을 잘 보지 못했습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라는 말씀에 괴로운 표정을 짓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그들에게 영광스런 부활의 소망을 심어주고자 하십니다. 28,29절을 보십시오. "이 말씀을 하신 후 팔 일쯤 되어 예수께서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데리고 기도하시러 산에 올라가사 기도하실 때에 용모가 변화되고 그 옷이 희어져 광채가 나더라." 예수님은 수제자 세 명을 데리고 변화산에 올라가 기도하셨습니다. 기도하시는 중에 그 용모가 변화되었습니다. 그 옷이 희어져 광채가 났습니다. 예수님의 본래의 모습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본래의 모습을 잘 표현한 구절이 있는데 요한계시록 1:13~16입니다. "촛대 사이에 인자 같은 이가 발에 끌리는 옷을 입고 가슴에 금띠를 띠고 그의 머리와 털의 희기가 흰 양털 같고 눈 같으며 그의 눈은 불꽃같고 그의 발은 풀무 불에 단련한 빛난 주석 같고 그의 음성은 많은 물소리와 같으며 그의 오른손에 일곱 별이 있고 그의 입에서 좌우에 날선 검이 나오고 그 얼굴은 해가 힘있게 비치는 것 같더라" 그 동안 제자들의 눈에 보인 예수님은 뜨거운 태양으로 그을리신 얼굴, 남루한 옷차림, 가난한 목수의 모습, 들이나 야산에서 피곤하여 주무시는 모습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원래 모습은 너무나 영광스럽고 찬란했습니다. 그 영광스런 모습에 압도되어 있을 때, 문득 두 사람이 나타나 예수님과 함께 대화했습니다. 그들은 모세와 엘리야였습니다. 모세와 엘리야는 한 마디로 고난의 종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백성들을 죽을 힘을 다해 섬기다가 마른 넝쿨과 같이 되어 세상을 뜬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런 그들이 부활하여 예수님과 대화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이 대화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영광 중에 나타나서 장차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을 말할새(31)"‘별세’라는 말은 세상을 떠나는 것입니다. 모세와 엘리야는 부활의 영광스런 모습을 하고 나타나서 예수님께 예루살렘에서 종교지도자들에게 버림을 받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실 것을 말했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그리스도로서 복음을 온전히 완성하시도록 격려한 것입니다. 이러한 대화를 할 때 베드로와 다른 제자들이 깊이 졸다가 깨어났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선 두 사람을 보았습니다. 그들이 명찰을 찼는지 제자들은 그들이 모세와 엘리야임을 알아차렸습니다. 대화가 끝나고 두 사람이 떠날 때에 베드로가 말합니다.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우리가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사이다." 베드로는 문제 많은 무리들이 기다리고 있는 산 아래로 내려가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저 영광스런 예수님과 모세와 엘리야를 모시고 그곳에서 영원토록 살고 싶었습니다. 십자가 없는 영광, 고난 없는 영광을 원했습니다. 저자는 그의 말한 바에 대해 "자기가 하는 말을 자기도 알지 못하더라"라고 코멘트하고 있습니다. 취중진담이라고 이것이 그의 본심이었습니다. 다른 제자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들은 자기부인 자기 십자가를 지는 삶을 통해 부활의 영광에 들어가야 된다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고난 없는 영광, 축복과 은혜만을 구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진리의 말씀에 귀를 틀어막고 듣지 않고자 했습니다. 이런 그들에게 하나님은 특별한 은혜를 베푸십니다. 34,35절을 보십시오. "이 말 할 즈음에 구름이 와서 그들을 덮는지라 구름 속으로 들어갈 때에 그들이 무서워하더니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서 이르되 이는 나의 아들 곧 택함을 받은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하고." 구름은 하나님의 임재를 의미합니다. 예수님의 말을 듣지 않는 그들에게 아버지 하나님이 직접 말씀하십니다. "이는 나의 아들 곧 택함을 받은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아버지가 택하여 세상에 보내신 아들의 말을 듣는 것은 곧 아버지의 말을 듣는 것입니다.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그의 말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이 이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제 삼일에 살아나신다. 예수님의 죽으심은 비극적인 죽음, 패배적인 죽음이 아니라 예언의 성취, 인류의 죄 문제를 해결하시는 하나님의 지혜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고난을 통해 영광에 들어가시는데, 제자들도 이 고난을 통한 영광의 진리를 받아들여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는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우리도 본문의 제자들처럼 예수님께서 주시는 진리의 말씀을 안 듣고자 하지는 않습니까? 겉으로는 듣는 척해도 마음으로 영접하지 않지는 않습니까? 이런 우리에게도 하나님은 지금도 안타까운 마음으로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우리가 영광의 복음의 소망을 붙들고 자기부인 자기 십자가의 생명의 길, 참된 지혜의 길을 날마다 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제가 캠퍼스 1,2학년일 때 저는 그리스도를 알지 못했습니다. 그때 저의 마음에 누군가에게 쏟아 부을 열정이 있었지만 그 대상을 찾지 못했습니다. 죽으면 다 끝이라는 극도의 허무주의에 시달렸습니다. 의미 없는 인생을 비관하였습니다. 온통 검정 옷을 입고 다녔고 밝은 대 낮에도 캠퍼스에서 검정 우산을 받쳐 들고 다녔습니다. ‘이래도 한 세상 저래도 한 평생..’‘사의 찬미’가 십팔 번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저를 불쌍히 여겨주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제게 주시고 예수님이 저의 그리스도임을 알게 해 주셨습니다. 방황의 막이 내렸습니다. 지난 30여년 오직 그리스도를 향하여 달음질 하도록 은혜를 주셨습니다. 오늘날도 예수님을 하나님의 그리스도로 발견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누구나 죄와 사망이 주는 허무에 시달리며 고통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스도를 만나기 전에는 인간의 삶 자체가 비극입니다.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는 수많은 영혼들이 캠퍼스에 있습니다. 우리가 어찌하든지 이들을 이번 여름수양회에 초청하여 그리스도 예수님을 만나도록 섬기길 기도합니다. 결론적으로, 예수님은 하나님이 보내신 그리스도이십니다. 그 분은 나의 죄와 사망의 문제뿐만 아니라 이 땅에 사는 동안 나의 모든 문제에 관심을 갖고 도우시는 나의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가 이 주님을 온전히 의지하며 자기부인 자기 십자가의 길을 기쁨으로 가기를 기도합니다. 죄악된 본성대로 살다가 영원한 멸망에 처할 우리를 이 귀한 십자가의 길, 부활의 길, 생명의 길, 영광의 길로 인도하시는 그리스도 예수님께 감사와 찬양을 돌려드립니다. |